제프리 바와, 장소에 깃든 천재성
- 감독
- 아프델 아지즈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히란 쿠레이, 찬나 다스와트, 무라드 이스마일, 프라딥 자예와르데네, 수넬라 자예와르데네
코로나가 가장 심각하던 시기,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 간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고, 국민들은 일부 격리되며 대부분의 문화 활동은 중지되었다. 많은 영화들은 부쩍 한산해진 극장가를 보며 개봉을 미루던가, OTT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크리스토퍼 놀란 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의 신작 < 테넷 >은 이 시기 유일하게 극장에서만 공개된 텐트폴 영화였다. 놀란과 파트너십을 이어오던 워너는 가장 OTT 공개(및 동시 개봉)에 앞장서던 배급사였고, 그래서 놀란의 결정에 난감했던 게 사실이다. 몇 번의 연기를 거쳐(다른 작품들이 창고 영화가 되거나 TV 영화가 되어가는 속에서도) <테넷>은 코로나 속 극장에서 고군분투 블록버스터로 위용을 보였지만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할리우드 메이저에 진입했던 < 인썸니아 >부터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놀란과 워너의 관계에 금이 간 건 바로 이때였다. 놀란은 워너의 소극적인 홍보를 아쉬워했고, 워너는 놀란의 비협조적인 선택에 섭섭해 했다. 결국 놀란은 워너를 떠나 차기작을 유니버셜과 하기로 결정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 프로젝트는 이전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실제 인물을 다룬 전기물이었다. 전 세계에 핵이란 새로운 빛을, 그리고 동시에 두려운 공포를 안겨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원작 제목이다)'이자 천하의 둘도 없던 천재,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 < 오펜하이머 >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놀란과 유니버셜의 첫 협업물인 <오펜하이머>는 바로 놀란의 전 파트너였던 워너의 최고 기대작인 그레타 거윅의 < 바비 >와 맞붙게 되었고, <바비>가 <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를 넘어 워너의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는 바람에 <오펜하이머>는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한번도 1위를 기록하지 못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역대급 흥행을 찍은 경쟁작의 방해와 3시간이란 상영시간의 압박, 누드와 욕설로 인한 R등급 등 숱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 조커 >의 뒤를 이어 R등급 영화사상 두 번째로 흥행한 작품이 되었고, < 보헤미안 랩소디 >가 가지고 있던 전기물 최고 흥행작 타이틀도 빼앗았으며, < 인셉션 >을 넘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리지널 작품으론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루드비히 고란손 안타깝게도 필생의 소망(!)이던 < 듄 > 작업 위해 자리를 비운 한스 짐머가 이번에도 그 속편을 위해 바쁜 관계로, 놀란은 전작 <테넷>을 함께 했던 루드비히 고란손을 다시 한 번 음악적 파트너로 맞이한다. 스웨덴 출신의 고란손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80년대생 영화음악가들 중 하나로,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베토벤의 이름을 딴(그의 아버지는 블루스 기타의 신 알버트 킹의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다!) 그의 음악적 소양은 기타 교사였던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톡홀름 왕립 음악학교를 졸업한 고란손은 미국 USC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의 영화과에 다니던 라이언 쿠글러와 의기투합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고란손은 영화음악가 테오도르 샤피로 밑에서 견습 생활을 이어가며 시트콤 <커뮤니티>로 자신의 첫 음악 크레딧을 얻는데, 여기서 차일디쉬 감비노로 활동하는 배우 도널드 글로버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이 둘과의 만남은 고란손에게 < 블랙 팬서 >의 오스카와 “This Is America”의 그래미라는 영예를 안겨다주었다. 영화음악과 힙합이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두며 화려한 커리어를 맞이한 고란손의 다음 스텝은 바로 놀란과의 계속된 협업이었다. 루드비히 고란손은 익숙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데 탁월한 식견과 해석력을 보여 왔다. 그래서 빌 콘티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록키 발보아의 세계에서 힙합 리듬으로 새로운 적자 크리드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성공했고, 마블의 고전적이고 영웅적인 심포니가 득세하는 전장에서도 리얼한 아프리칸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이식했으며, 마에스트로 존 윌리엄스가 굳건히 세워놓은 갤럭시 사가에서 향토적이고 이국적인 베이스 리코더를 내세운 색다른 만달로리안 사운드로 새로운 여정의 진군가를 완성해냈다. 랜디 뉴먼이나 마이클 지아치노가 꽉 잡고 있던 픽사 애니메이션에서도 흥분하면 래서 판다가 되는 틴에이저의 고충을 끌어안은 그의 음악은 반짝반짝 빛났다. 엔트로피와 양자역학이 판을 치는 놀란과의 첫 만남에선 데이빗 줄리앙과 한스 짐머가 구축해놓은 미니멀한 사운드에서 더 나아가 쉽게 시도하지 않는 실험적인 백마스킹을 통해 앞뒤가 똑같은 회문 구조의 인버전 스코어를 현실에 구현해냈다. 고란손은 감독들이 요구한 사항을 받아들이되 기존의 존재하던 스타일을 반복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낸다. 이게 수많은 영화음악가들이 데뷔하고 활동하는 할리우드에서 빠른 시간 안에 그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인셉션>에서의 에디트 피아프, < 인터스텔라 >에서의 파이프오르간, < 덩케르크 >에서의 시계초침과 엘가, 그리고 <테넷>에서의 인버전된 백마스킹이 핵심적인 사운드 키워드로 자리했던 놀란의 영화음악답게 이번 <오펜하이머>에서 놀란이 영화음악가에게 내민 카드는 바로 바이올린이었다. 오펜하이머가 여러 층위를 가진 복잡한 내면의 천재였고, 일반 전기물처럼 쭉 한사람의 일생을 따라가기보단 원자력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스트로스 제독의 인사청문회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일대기까지 세 가지 시간 선을 엮어낸 다층적인 구조라 레이어 쌓기 가장 좋은 악기인 바이올린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고란손 역시 아름답고 환상적인 선율의 비브라토를 연주하다가도 바로 브릿지로 격한 소리를 만들거나 빠르고 예민한 트릴이나 미끄러지는 글리산도로 신경질적이고 공포적인 효과로 돌변할 수 있는 바이올린이야말로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들면서 가졌던 이중적인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악기로 받아들였다. 아내 세레나 맥키니가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고란손은 놀란이 던진 이 아이디어를 맘에 들어 했고, 1인칭으로 묘사된 시나리오 속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바이올린으로 극대화 시킬 방법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압도적인 건 바로 오펜하이머가 가진 고뇌와 무게감, 일반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천재성과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한 큐 안에서 스트링 세션이 변화무쌍하게 4마디마다 템포가 변화해 최대 21번의 빠르기가 가중되는 'Can You Hear The Music'이나 'Destroyer Of Worlds'같은 트랙이다. 처음 시작보다 무려 3배나 빨라지는 연주는 한 테이크 안에 라이브가 불가능하다 생각해 후반 믹싱적 테크닉을 시도하려했으나 아내의 격려와 시도로 실제 연주를 사흘에 걸쳐 이뤄냈으며, 이는 남들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시선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이제는 시작돼 멈출 수 없는 핵 개발의 체인 리액션을 표출한 방식이기도 했다. 더욱이 영화상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트리니티 실험에 흘러나오는 8분에 이르는 대곡 'Trinity'는 폭발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고조되며 심장을 마구 옥죄여오는 킬링 트랙인데, 버나드 허먼이 울고 갈 정도로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날카로운 현의 비명들 아래 깔리는 웅장한 관악기와 어두운 일렉트릭의 조화는 폭발 순간 침묵에 휩싸이며 먹먹함을 선사한다. 버튼을 누르면 결코 이전으론 되돌아갈 수 없는 결과를 낳는 핵의 운명처럼, 이 모든 소리의 파편들이 쌓여 거대한 침묵을 완성한 건지 모른다. 여기에 가이거 계수기를 비롯한 다양한 펄스파의 소리들과 군중의 발소리를 채집한 효과들이 어우러지는 아방가르드한 공명감은 핵개발 이후의 바뀐,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세상의 연쇄적인 반응을 담아내는 듯 불길하고 무섭게 다가온다. 간혹 섬세한 하프와 간헐적인 피아노가 덧입혀지며 아내 키티와 동료 과학자들 간의 신뢰를 구축하기도 하지만, 독일과 소련과의 원폭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며(또 작중 후반 증인들의 증언이 거듭됨에 따라 불리해지며) 그 초조한 긴장감을 담아내는 규칙적인 초침소리와 금속성의 엠비언트, 현악 오스티나토의 질주감은 별다른 화려한 비주얼 없이도 청각적으로 스크린을 압도해버린다. 기억에 남는 명징한 테마들은 없지만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며 켜켜이 쌓이는 현악의 구조와 강도는 점점 완성되어가는 원폭을 보듯, 증언이 쌓이며 점점 인물들을 구체화 시키는 청문회를 보듯 단단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런 강렬함에도 고란손은 스코어에 드럼이나 팀파니 같은 전통적인 타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활로 현을 때리거나 샘플링된 소리들로 효과를 주었을 뿐이다. 버나드 허먼의 신경질적이고 풍부한 스트링에 나인 인치 네일의 공감각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를 포용한 채 필립 글래스나 막스 리히터의 미니멀리즘과 요한 요한손의 드론 음악을 결합시켜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현대음악처럼 풀어낸 루드비히 고란손의 추상적이고 과할 정도로 시끄러운 사운드 임팩트는 핵이란 거대 담론이 가진 여러 방향성과 폭발력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층위의 감정 스펙트럼을 방사형으로 내뿜어낸 비장의 OST다. Track List 1. Fission 2. Can You Hear the Music 3. A Lowly Shoe Salesman 4. Quantum Mechanics 5. Gravity Swallows Light 6. Meeting Kitty 7. Groves 8. Manhattan Project 9. American Prometheus 10. Atmospheric Ignition 11. Los Alamos 12. Fusion 13. Colonel Pash 14. Theorists 15. Ground Zero 16. Trinity 17. What We Have Done 18. Power Stays in the Shadows 19. The Trial 20. Dr. Hill 21. Kitty Comes to Testify 22. Something More Important 23. Destroyer of Worlds 24. Oppenheimer
피폐한 삶을 어떻게 보여줄까?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의 흔적을 어떻게 보여줄까? 예를 들어 우리 몸의 상처를 얘기할 때는 보여주면서 이건 어렸을 때 개에게 물린 거고, 이마의 상처는 친구들과 싸우다 난 거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남은 상처를 어떻게 보여줄까. 그래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까. 그것을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다면, 그것이 영상이거나 글로 묘사하는 문학이거나 우리는 그런 예술가를 천재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라이언 라킨 어떤 예술장르이거나 그런 천재들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면서도 천재들의 삶이 그렇듯 예술적 비범함만큼이나 삶을 과감하게 탕진한 사례들은 얼마든지 있다. 애니메이션계에서는 라이언 라킨(Ryan Larkin)이 그런 천재 중 한 명이다. 보통 그의 천재성을 말할 때 10살부터 유화를 그리고 13살에 미대((Montreal School of Fine Arts)에 입학한 사실을 거론한다. 또한 19살에 애니메이션을 만들어본 경험이 없음에도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이 꿈꾸는 캐나다국립영상위원회(NFB)에서 거장 노먼 맥라렌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자신만의 독창적인 제작기법과 표현 방식을 개발하여 주목받았다. 그는 영감에 의해 작업을 해왔던 애니메이터로 첫 작품부터 재능을 단번에 드러냈다. 마지막 작품은 애니메이션의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메타모포시즈metamorphosis 기법(나비가 애벌레에서 나비로 변화여 가듯 한 사물이 조금씩 변하여 전혀 다른 사물로 형상화하는 기법)을 최대한 활용한 걸작이었다. 그럼에도 라이언 라킨은 바라던 아카데미상을 받지 못했다. 오늘 소개하는 애니메이션 < 라이언 >은 라이언 라킨을 소개하는 다큐멘터리다. 이를 제작한 크리스 랜드레스는 2004년 라이언 라킨의 삶을 그린 14분짜리 < 라이언 >으로 아카데미상을 수상했다. 과연 누가 표현의 천재일까? 라이언 라킨(좌) 캐릭터와 감독 크리스 랜드레스(우) 캐릭터 <라이언>은 첫 장면부터 사람이 약물과 마음으로 입은 상처를 효과적으로 그려내며 관객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감독인 크리스 랜드레스가 애니메이션의 등장인물로 직접 출연, 인터뷰어의 역할을 하고, 라이언 라킨 역시 인터뷰이로 출연하여 자신이 캐릭터에 직접 목소리를 입혔다. 애니메이션은 공중화장실의 어둠 속에서 물 내리는 소리로 시작한다. 크리스 랜드레스가 첫 장면부터 등장, 거울 앞에서 과거의 상처를 애기하며 분열된 내면과 작가로서의 불안을 자조하듯 중얼거린다. 인터뷰는 노숙자 급식소 같은 곳에서 진행된다. 라이언의 인터뷰지만 그와 관련 사람들이 소환된다. 첫 번째로 한 때 애인이었던 펠리시티가 등장하는데, 그녀는 컬러의 선으로 표현되어 라이언이 그녀와 행복했음을 보여준다. 그녀는 라이언이 인생에서 항상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었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주목받던 작품 < 걷기Walking >과 < 거리음악Street Musique >이 소개되는데, 그의 애니메이션은 몸이 어떻게 움직이고 변하는지 보여주는 필름이다. 라이언은 거울 앞에 서기를 좋아했고, 벌거벗은 상태에서 자신의 몸과 살이 움직일 때 어떤 상태인지 관찰하며 그림을 그려왔다. 그는 회화만이 아닌 음악과 결합된 움직임을 창조하고 싶어 했다. 이어서 그가 잘 나가던 시절 프로듀서인 데렉 램이 소환된다. 그는 라이언이 자신감을 잃고 분노만 남은 사람으로, 코카인의 힘으로 뭔가 대단한 걸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게 그를 파괴했다고 증언한다. 이후 인터뷰어인 감독은 라이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다. 상실감이 가장 파괴적인 것이라며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라이언에게 술과 담배를 끊고 재기했으면 좋겠다고 권한다. 급식소 안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은 흡사 라이언이 지나온 모습 같다. 라이언의 모습을 보며 감독은 어린 시절 어머니의 알코올중독을 떠올리고, 마지막은 라이언의 거리 구걸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라이언 뒤의 배경(상점 유리)에는 잘 나가던 시절의 라이언이 비춰지며 암전된다. <걷기>(1968) <라이언>에는 라이언 라킨이 그린 독특한 작품도 맛볼 수 있는 재미가 있다. 유튜브 에 올라 있으니 전편을 보면 좋겠다. 특히 1968년 작 <Walking>은 단순하지만 다양한 걸음을 디테일하게 보여준다. 마치 로토스코핑(rotoscoping)을 사용한 듯 실감나는 인체 묘사와 다양한 포즈, 액션이 인상적이다. 수채화로 채색한 그림과 선의 움직임은 음악의 비트에 맞춰 라이언 라킨의 독특한 타이밍 감각을 보여준다. 누더기처럼 너덜너덜한 육신으로 연신 술을 들이키며 예술적 영감으로 넘쳐났던 과거를 이야기하는 노쇠한 남자, 라이언 라킨. 애니메이션의 새로운 표현방식을 제시하며 당시의 애니메이터들을 놀라게 했지만, 거리의 노숙자로 살아가며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갔다. 감독은 라이언 라킨을 인터뷰하면서 그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는 걸 드러낸다. 부서지기 쉬운 사람,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공통점으로 그들은 연결된다. 그들에게 세상은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뭔가 유동적이고 왜곡되어 있다. 예술가로서의 동질감을 크리스 랜드레스의 애니메이션은 보여준다. 이 작품은 3D 그래픽만이 표현할 수 있는 소재와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애니메이션을 만들 때,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런 면에서 크리스 렌드레스는 <라이언>이 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져야 하는지 정확하게 답했다. 3D그래픽은 감독 자신의 캐릭터는 물론 라이언의 절망감과 생애, 특히 알코올과 마약 중독자의 특징과 상처를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라이언>의 캐릭터 디자인은 기이하고 우스꽝스럽고 고통스럽기까지 하다. 보통 파편화된 삶이라는 표현을 쓸 때, 파편화된 모습이 어떤 것인지 직관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여기저기 벗겨진 피부와 앙상한 뼈대 사이로 텅 빈 내부가 고스란히 보인다. 감독은 라이언 라킨을 뒤틀린 신체의 일부만으로 표현한다. 파격적이고 기괴한 캐릭터를 통해 라이언의 분열되고 상처 입은 내면을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관객은 이러한 시각적 표현과 기이한 이미지를 접하며 강렬한 충격에서 영화를 시작해서 끝날 때까지 긴장을 놓지 못한다. 또한 끝나고 나서도 파격의 이미지가 던져주는 시각적, 기술적 새로움을 넘어 두 예술가의 삶과 예술에 대한 동질감에 감동받는다. 애니메이션영화제에서 우연히 라이언과 어울리게 된 감독 크리스 랜드레스는 부랑아 정도로 여겼던 라이언에게서 비범한 예술적 재능이 있음을 알아채고, 4년여의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라이언 라킨의 삶을 애니메이션으로 기록했다. "처음 영화를 시작했을 때, 그의 삶은 여러 가지로 상징적이었어요. 그의 삶은 예술가라면 가져야 할 열정과 나이를 먹으며 어떻게 삶을 마칠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 모두를 의미했습니다. 그는 예술가가 가장 두려워하는 곳에서 살고 있었지요. 최악의 상황에 처한 한 남자의 삶은 어떠할까? 저는 이것을 보여 주고 싶었습니다. 이 작품은 비극이지만 유머나 인간미 역시 담고 있습니다.”감독의 말처럼 <라이언>은 그저 불행했던 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좌절한 애니메이터 라이언 라킨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감독 자신을 포함한 모든 예술가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더 나아가 상처받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두 예술가, 라이언 라킨과 크리스 랜드레스의 공허감은 채워질 수 없는 예술적 완성에 대한 욕망으로 보인다. 드로잉에 있어 천재적인 재능을 인정받았던 라이언 라킨은 종이에 그림을 그려 움직임을 만들었던 전통적인 애니메이터였다. 그런 그가 노숙자로 전락한 그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서는 다분히 상징적이다. 피폐한 라이언의 모습과 그것을 재현하는 크리스의 3D 표현력은 마치 컴퓨터에 밀려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는 전통적인 애니메이터의 현재를 보여주는 동시에 컴퓨터 그래픽이라는 새로운 테크놀로지도 삶의 현실을 담고 이야기를 담을 수 있음을 보여 준다. 보들레르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매우 일상적이고 처연한 실생활과 순간적이고 소멸되는 성격의 현대 도시의 삶 속에서 독특한 것과 개인적인 것을 통해 새로운 미(美)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새로운 미를 보여준다. <라이언>은 2004년부터 안시애니메이션페스티벌과 아카데미 등의 굵직한 시상식에서 앞서 소개한 박세종의 <축생일> 과 경쟁하며 주목을 받았다. 인물에 내재된 욕망과 트라우마까지 형상화한 독특한 컴퓨터그래픽 애니메이션은 시각적 충격과 탄탄한 서사로 강력한 매력을 뽐낸다. 후일담이지만 <라이언> 성공 이후 라이언 라킨은 여성 감독 로리 고든과 함께 2008년 < 한 푼 줍쇼Spare Change >라는 7분짜리 애니메이션으로 재기했다.
< 항구를 떠나는 배 >는 놀랍도록 단순한 영화다. 영화는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영 시간은 50초에 불과하며, 영화에는 별다른 사건이나 이야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영화는 흑백이며, 심지어 사운드마저 없다. 하지만 이것은 <항구를 떠나는 배>에게 너무도 당연할 수밖에 없는 얘기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1895년에 만들어진 영화이고,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은 그 유명한 < 열차의 도착 >을 만든 뤼미에르 형제가 감독한 영화이기 때문이다. <열차의 도착>을 포함해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수많은 단편 영상들은 모든 영화가 단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영 시간은 1분을 넘지 않는 짧은 영화이다. 아니 어쩌면, 누군가는 이 영화들을 진정 ‘영화’라고 불러야 될 것인지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찍은 영화에는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으며, 우리가 스마트폰으로도 충분히 촬영할 수 있는 일상의 풍경들을 촬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뤼미에르 형제가 촬영한 이 짧은 영화들은 그 역사적 의의를 제쳐두고서라도 충분히 아름답다. ‘영화 매체의 힘은 매체에 결함이 있기에 가능하다’라는 루돌프 아른하임의 말처럼,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들은 현대의 기준으로 모든 것이 결함이 있기에 아름답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리도 없고, 화면은 흑백이며 영화는 1분을 넘지 않고, 어떠한 극적인 이야기도 없으며, 단 하나의 숏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모든 결함이 바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다. 그 중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1895년에 만든 < 항구를 떠나는 배 >는 뤼미에르 형제가 만든 영화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그저 항구에서 나룻배를 탄 채로, 파도를 헤치고 나아가는 세 명의 남자를 보여주는 것이 전부이다. 이 영화가 놀라운 것은 영화에 가득 찬 활력적인 분위기이다. 여기서 뤼미에르 형제의 천재성이 드러난다. 그들은 영화사상 최초의 세트를 지어 배우들에게 연기를 ‘지시’한 토마스 에디슨과 그의 조수들과는 달리, 혹은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를 보고 최초의 극영화를 만들어냈다고 알려진 조르주 멜리에스와는 달리 어떠한 미적, 예술적 의도 없이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를 위치시킨다.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그 위치는 너무도 절묘한데, 프레임의 좌측에는 방파제에서 네 명의 여인이 수직적인 구도로 서 있고, 세 명의 남자가 탄 배는 프레임의 중앙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이동하며 프레임의 수평을 가로지르며 점점 롱 샷으로 멀어지면서 화면에 완벽한 조형미를 형성한다. 거친 파도가 화면의 정면을 향해 다가오고, 일정한 속도로 노를 젓는 남자들의 모습으로 확인할 수 있는 반복적인 몸짓에는 약간의 희극적인 모습마저 느껴진다. 점점 더 먼 바다로 배가 나가자 파도는 더 거세지고, 배에서 노 젓는 사람을 지휘하던 한 남자는 거센 파도에 휘청거리면서 영화는 끝난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자연스레 이들의 운명이 자연 속에 속해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우리는 이 갑작스러운 영화의 중단에 약간의 서스펜스마저 느낄 수 있다. 영화는 자연이 만들어내는 파도의 불규칙적인 리듬과 그 불규칙적인 리듬에 맞춰 노를 젓는 남자들의 규칙적인 몸짓, 그리고 그 몸짓에 따라 움직이는 배의 비일관적인 흐름으로 인해 영화 전체가 살아 있다는 느낌마저 불러일으킨다. 흥미로운 점은 이 모든 것이 뤼미에르 형제가 의도적으로 연출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심지어 갑작스럽게 끝나고 마는 그 엔딩마저도 당시 필름의 한계 때문에 발생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우리가 흔히 장르적으로 정의 내리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잔 헤이워드는 「영화 사전」에서 다큐멘터리를 정의 하면서 ‘허구가 아닌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의 허구적인 해석 대신 현실 그대로를 전달하는 영화’라고 했다. 뤼미에르 형제는 현실을 직접적으로 다루면서 현실을 그대로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 항구를 떠나는 배 >는 사전적 의미의 다큐멘터리라는 장르적 정의보다 한층 더 복잡한 영화다. 정확히 말하자면 <항구를 떠나는 배>는 다큐멘터리 영화(movie)가 아니라 활동사진(motion picture)이라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뤼미에르 형제가 <항구를 떠나는 배>에서 한 일은 적당한 위치에 카메라를 가져다 놓고 그것을 사진 찍듯이 촬영한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만약에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를 발명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항구를 떠나는 배의 모습을 사진으로 촬영하였을 것이다. 그들은 사진을 촬영하듯이 영화를 촬영했을 뿐이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게 촬영했기 때문에 뤼미에르 형제는 에디슨이나 멜리에스를 포함한 수많은 초창기 영화감독들이 그랬던 것처럼 영화를 연극적으로 촬영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리고 동시에, 뤼미에르 형제는 영화가 예술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발명품이라고만 생각하였고, 또한 그들 본인이 영화감독이 되기 이전에 사진가였기 때문에 그들은 프레임 안에 있는 미장센에 더 이상 극적인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 사업을 중단하게 되는 이유가 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영화의 가능성을 열어준 일이기도 했다. 그 가능성이란, 감독이 별다른 사건이나 이야기를 만들지 않고 자연의 상태를 촬영하는 것만으로도 한 편의 영화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인 것이다. 우리가 지금 극장에서 만날 수 있는 대다수의 영화에는 너무나도 많은 것들이 한 화면 안에서 이루어진다. 카메라는 끊임없이 움직이고 편집은 숏을 충분히 감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지나가며, 미장센은 과포화 상태가 되어 화면은 그 감당할 수 없는 이미지에 폭발하려고 하며, 그 사이에 일어나는 공백마저도 수많은 음악과 사운드들이 휘황찬란하게 빈틈을 메워버린다. 그런 상황에서 관객이 이미지에 대한 사고력이 떨어지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렇게 이미지에 대한 사고력이 수많은 현란함 속에 파묻히게 되면 관객은 이미지를 버리고 이야기를 쫓아가는 것으로 만족하며 극장을 나오게 된다. 더 이상 대중 영화에서 존 포드가 모뉴먼트 벨리의 그 거대함을 무심하게 쳐다보게 했던 것과 같은, 혹은 오즈 야스지로가 다다미 방에서 일어나는 부녀간의 대화를 그들의 눈높이에서 냉정하게 지켜봤던 것과 같은, 혹은 로버트 J. 플래허티가 얼음 구멍에서 표범 낚시를 하는 이누이트족의 그 절대적인 시간을 관찰했던 것과 같은 사려 깊은 이미지들은 사라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뤼미에르 형제가 태초의 영화시기에 만들어낸 < 항구를 떠나는 배 >는 더욱 중요해진다. 뤼미에르 형제는 그저 적당한 위치에서 영화에 나오는 이미지를 촬영하기만 했지만, 그 그저 적당한 위치에서 촬영했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 단순함 안에 완벽한 조형성을 갖춘 채로, 희극성과 서스펜스가 동시에 들어있을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해냈다는 사실이 나를 감동하게 만든다. 다큐멘터리의 동사형인 다큐먼트(document)는 ‘가르치다’를 의미하는 라틴어 도세르(docere)로부터 파생된 단어라고 한다. 또한, 다큐멘터리라는 단어가 영화의 장르로 정의되기 이전인 1800년대에는 가르침, 설득, 경고의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뤼미에르 형제의 <항구를 떠나는 배>는 우리에게 영화의 근본적 의미를 알려주는 도세르이며, 현대 영화에 가르침과 경고를 주는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