떡 정은 첫사랑을 타고...
- 감독
- 마사키 미나미토모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미타니 아카리
임권택 의 < 왕십리 >(1976)는 내게 기이한 몽환적 경험을 전해준 영화다. <왕십리>가 임권택의 초 중기 장르 영화 걸작 중 한 편이라는, 혹은 그의 필모그래피 전체에서도 수작에 속한다는 공인된 평가와 나의 그 몽환적 경험이 어떠한 관련성을 맺고 있을지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어쩌면 거의 관련이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잊히지 않는 그 몽환의 경험 때문에, 동시에 임권택 영화 세계에 대한 나의 무지를 인정하면서, 나의 첫 번째 임권택 영화의 걸작으로 <왕십리>를 꼽고 싶다. < 왕십리 >에서 나를 혼미하게 만든 건 이 영화에서 한 차원 더 발전되었다고 평가받는 임권택 식 회상 장면들의 쓰임새가 아니라, 그 회상 장면들 이후에 찾아오는 기괴한 ‘출현과 재출현’의 장면들이다. 그리고 그 장면들은 예외 없이 여주인공 정희( 김영애 )의 등장과 전부 관련이 있다. 주인공 준태( 신성일 )는 14년 만에 돌아온 고향 왕십리에서 옛 연인 정희를 다시 만나 보기를 원한다. 정희는 부잣집에 시집가서 아이 셋을 둔 행복한 귀부인이 되었으니 만나지 않는 게 좋겠다고 친구들이 말리지만 준태는 신문에 광고를 내고 마침내 정희가 나타난다. 그녀는 듣던 대로 귀부인이 된 것도 같고 영화가 회상 장면을 통해 보여 주었던 그 모습 그대로 여전히 청순함을 지닌 것도 같다. 이제 첫 번째 출현의 시간이 온다. 사기꾼 정희의 출현이다. 그녀는 사실 배다른 아이를 셋이나 키우는 왕십리의 소문난 바람둥이이며 빚을 지고 도망 다니는 사기꾼이다. 14년의 세월이 정희의 순진함을 더럽혔거나 준태가 그녀를 잘못 기억하고 있는 것이리라.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홀로 어렵게 아이들을 키우는 것처럼 위장한 그녀는 준태의 유년 시절 친구이자 자신의 현재 애인인 충근( 백일섭 )과 짜고 준태에게서 돈을 뜯어내려는 것이다. 방금 전까지도 준태에게 연약하고 쓸쓸한 애정의 눈길을 보내던 정희는 준태가 떠나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아휴 살기 힘들어”하며 성질을 내면서 천박하게 병째 소주를 들이켜고는 아이들에게 입조심들 하라며 주의를 준다. 사기꾼 정희의 정체가 드러나는 이 순간은 너무 갑작스럽고 노골적이어서 잠시 어리둥절하다. 이 장면의 ‘결’은 적지 않은 상영시간을 들여 과거의 그녀를 소개하던 회상 장면의 ‘결’과 너무 다른 탓에 거의 우격다짐으로 여겨지거나 서사적 위반 혹은 거친 속임수처럼 느껴진다. 회상 장면의 정희는 순박했는데 이 장면의 정희는 천박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이 충격 요법이 전부였다면 < 왕십리 >는 그저 범작에 그쳤을 것이다. 정희는 그치지 않고 다시 출현한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준태 앞에 또 나타난다.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나는 이 이상한 가정을 마치 홀린 듯이 연거푸 읊지 않고서는 <왕십리>의 감동을 말할 능력이 없다. 정희의 사기 행각이 전부 드러난 뒤 그녀는 준태를 다시 만나고 싶어 한다. 곱고 수수한 차림새를 하고 왕십리역 광장 목재들이 쌓인 그 좁은 틈 사이에서 그녀가 준태를 기다리고 있다. 정희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리 없다. 그럼에도 영화는 앞 장면의 천박한 정희와 지금 이 자리의 정희가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확연히 다른 톤으로 그려낸다. 그녀는 지금 천박하기는커녕 낮고 떨리는 음성으로 사랑을 배신한 것에 슬퍼하고 죄를 지은 것에 속죄하는 청순의 여인이다. 이 순간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아름답고 연약한 여인이다. 준태는 정희를 용서할 뿐만 아니라 충근과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보고 싶다며 결혼식까지 올려준다. 정희에 대한 이러한 양립된 인물 묘사가 투박한 서사적 결함에 불과하다고 지적할 순 있다. 그런데 그것이 결함이라 해도 그 결함을 능가하고 주관하는 기이한 무드가 정희의 출현 때마다 솟아난다는 걸 느끼는 것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정희의 기이한 출현과 재출현마다 그 무드가 어김없이 생성된다. 그걸 잠재적 가능성의 무드라고 불러도 될 것인가. 가령 < 왕십리 >에는 앞서 말한 것처럼 두 명의 정희가 출현한다. 천박한 정희, 순수한 정희. <왕십리>는 기승전결을 지닌 내러티브 영화이므로 우리는 이 천박함과 순수함을 한 인물이 지닌 양면적 성격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나는 그 두 명의 정희의 출현을 좀 더 비상식적으로 받아들였다. 한 인물의 두 가지 성격이 아니라 한 인물이 가질 법한 삶의 두 가지 잠재적 가능성이 번갈아 출현하는 대목으로 느꼈다. 그 때문에 출현이라고 내내 말하고 있다. 정희가 그녀의 인생에서 가졌을 법한 두 개의 삶의 가능성의 출현인 것이다. 준태는 왕십리로 돌아와 정희라는 한 인물의 두 측면을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정희가 가졌을 법한 두 개의 삶의 가능성을 차례로 혼란스럽게 겪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준태를 따라 왕십리에 도착한 관객인 우리 역시 혼란에 빠지지 않기란 어려운 상황이다. 마침내 12월 31일, 한 해의 마지막 밤에 준태가 자신의 숙소 방문을 열었을 때 정희는 또 다시 홀연히 출현한다. 충근과 신혼여행을 떠났어야 할 정희가 준태의 방에서 그를 기다린다. 이번에는 누가 찾아온 것인가. 천박한 정희가 온 것인가. 순수한 정희가 온 것인가. 정희의 어느 쪽 삶의 가능성이 온 것인가. 이날 밤만큼은 애매하고 모호해서 확신할 수 없다. 그녀의 자태 그리고 고백의 말들이 후자라는 걸 말해주는 것 같지만 정희는 끝내 준태가 잠든 사이 그의 지갑을 털어 조용히 방을 나선다. 그렇다고 온전히 사기꾼 정희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다. 정희는 이날 밤 자신의 진심을 말한 것 같다. 그녀는 순수했다. 방을 빠져나온 정희는 마침내 새 삶을 다짐하며 이 날의 범죄를 모의한 충근에게도 헤어지자고 말한다. 정희와 정희의 삶은 잠재적 가능성을 짐작할 뿐 끝내 정의될 수 없다.“세월을 거슬러 그때로 돌아갔으면... 이대로 시간이 멎어 버렸으면...”그날 밤의 정희가 준태와의 첫 정사를 떠올리는 장면에서 영화는 그녀를 위한 한 치의 회상 장면도 허락하지 않는다. 애틋한 밤의 이 냉혹한 판단, 이것은 어디에 기인한 것일까. 영화의 도입부에서 준태는 회상 장면을 따라 자신의 주관적 기억을 갖게 되고 자연스럽게 영화적 주체로 상정된 인물이다. 영화는 정희가 그와 같은 방식으로 주관성의 경로를 갖게 되기를 원치 않는다. 그녀의 주관적 기억이 형성되어 그녀 또한 준태와 같은 주체적인 인물로 상정될 때, 우리가 느껴온 그녀의 모호한 잠재적 가능성은 허물어지고 그녀는 정박될 위험에 처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오로지 왕십리라는 기이한 고향의 땅에 출몰하는 가능성의 유령, 가능성의 정희로 머물다 떠나야만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새해가 밝는다. 애틋한 밤이 지나고 정희는 떠나고 냉혹한 현실의 낮이 준태를 기다린다. 준태는 자신을 짝사랑해온 젊은 호스테스 윤애( 전영선 )를 찾아가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말하려 하지만 오히려 윤애는 티 없이 밝게 웃으며 말한다. 고향 출신의 남자와 맞선을 볼 것이라고. 영화 내내 정희의 과거태로 현존했던 그녀조차 준태를 거부했을 때 비로소 준태의 정착이 결정되고 정희와 윤애가 떠난 자리에 준태가 대신 남는다. 그러니 우리의 가정은 지금부터 다시 시작될 수도 있다. 시간이 흘러 14년 뒤 정희와 윤애가 돌아와 준태를 만나는 그때에 그들이 매 장면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출현하는 서로 다른 준태들, A라는 준태와 B라는 준태를 만나지 않으리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러한 일련의 감상의 과정을 겪고 나면 < 왕십리 >에서 왕십리는 순박한 회귀적 고향보다는 흥건하게 무드에 젖은 몽환의 땅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 때문에 <왕십리>가 임권택 영화 세계의 본류에 속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는 있다. 많이 언급되어 온 한국 문화의 전통성이나 감독 자신이 강조해 온 인본주의 사상은 <왕십리>에서 희미해 보일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그러한 희박함이 오히려 호기심을 자극하는 부분이다. 임권택 영화에 무수하게 출몰하는 어떤 명장면들, 예컨대 돌출적이고 기괴하고 매혹적으로 무질서한 감각적 차원의 명장면들과 연계되는 비밀 통로가 <왕십리>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느껴지기 때문이다. <왕십리>의 길이 이후 임권택이 주력해서 걸어간 길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왕십리>가 지금보다 더 높은 주목과 재평가를 받아야 하는 걸작인 것은 더 확실하다.
부산, 광주 등 지역 인디음악씬을 다루는 연작 다큐멘터리 < In the Cold Cold Night >을 시작으로, 가수 연영석과 그가 다루는 음악을 둘러싼 우리 사회를 이야기하는 < 필승必勝 Ver 2.0 연영석 >, 제목 그대로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이야기인 <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 이야기 >, `좋아서 하는 밴드`를 담은 < 좋아서 만든 영화 >, 그리고 `루비살롱` 레이블을 무대로 한 < 반드시 크게 들을 것 >까지, 최근 몇 년 사이 인디밴드를 다룬 많은 다큐멘터리 영화가 영화제 등을 통하여 선보이고 있습니다.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 역사에서 이렇게 인디음악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한꺼번에 등장한 것은 지난 90년대 후반 이후 처음입니다. 1990년대 중반 홍대를 중심으로 한국 인디음악이 주목받기 시작했을 당시 이를 다룬 다양한 다큐멘터리영화들이 선보인 바 있습니다, 초기 `델리 스파이스`를 다룬 < POP >, `메이데이` 등 저항적인 록을 연주하는 음악인들을 다룬 < 전선은 있다 >, 펑크밴드 `18크럭`의 꿈과 일상을 다룬 < 18 >, 부산에서 막 활동을 시작할 당시의 `에브리 싱글 데이`를 < 에브리 싱글 데이 >가 바로 그 작품들입니다. 10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인디음악씬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가 다시 등장하게 된 것은 무엇때문일까요?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최근 몇 년 동안 인디음악씬이 다시 르네상스라 부를만한 시기를 맞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영화 < 반드시 크게 들을 것 >은 인디음악 중흥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레이블 루비살롱과 밴드 `갤럭시 익스프레스` 등을 통해 지금 한국 인디음악씬의 열정적인 한 단면을 (`크라잉 넛` 함경록의 유쾌한 입담에 담아) 보여줍니다. `이 빌어먹을 나라엔 록큰롤 스타가 필요하다`라는 문구로 비장하게 시작하는 이 영화는 `왜 음악을 하는지`, `인디음악인으로서 생활이 얼마나 힘이 드는지`라는 식의 질문들은 담고 있지 않습니다. 영화의 연출자가 직접 인디음악을 하는 내부자(영화에 등장하는 밴드 `타바코 쥬스`의 드러머다)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런 질문들은 TV VJ류의 프로그램 등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며, 인디밴드를 그저 대상화하고 이상한 방식으로 `신화화`하는 질문들이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다만 `당신들에게 록큰롤이란 무엇인지`를 물어볼 뿐입니다. 영화 속 `갤럭시 익스프레스`와 `타바코 쥬스`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여집니다.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공연장을 통해 관객과 호흡하는 순간들이, `타바코 쥬스`는 별로 열심히 하지 않는 일상 속의 순간들이 주로 포착되어 있습니다. 락다큐멘터리답게 그들의 음악을 오래 보여주는 장면 역시, `갤럭시 익스프레스`는 공연장에서의 `단독 공연`이고, `타바코 쥬스`는 첫 정규앨범에 들어갈 히든트랙을 `집에서 녹음하는 장면`입니다. 이 흥미로운 대비는 영화 속 두 밴드를 `성공적인 것과 성공에 미치지 못한 것`으로 비교하여 보여주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공연과 음반 작업을 하는 음악인이 자신의 음악을 만들고 연주하는 것을 즐기는 다른 순간들`을 병치하여 보여주는 것인데요, 이를 통해서 인디씬의 사람들이 `왜 음악을 하고 있는 것인지`, `그들에게 록큰롤이란 무엇인지`를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이 하고 싶은 방식으로 즐기고, 할 수 있을 때 하고, 할 수 있다면 그만큼 열심히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음악을 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영화는 관객들이 그 순간을 공유하고 체험할 수 있도록 인도해주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