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콘서트
- 감독
- 라두 미하일레아누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알렉세이 구스코프, 멜라니 로랑, 드미트리 나자로브, 발레리 바리노브, 프랑소와 벨레앙, 미우-미우, 라이오넬 아벨란스키
침체 속에 거둔 70년대 이후의 수확 1970년대 이후의 양상은 1960년대와 비교할 때 양이나 질에서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무엇보다 두드러진 점은 황정순이 <팔도강산>(배석인, 1967) 류의 국책영화에 기용되면서 그동안 호흡을 맞춰온 김승호 대신 희극배우 김희갑이 그 자리를 메웠다는 사실이다. <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김수용, 1970),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등이 그런 예다. 노부부가 일본에 사는 아들의 초청을 받아 엑스포70 세계박람회를 관람(<저것이 서울의 하늘이다>)하거나, 전국 각지에 있는 자식들을 찾아 유람 여행하는 동안 변화된 한국의 발전상을 에피소드에 끼워 보여주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달라진 제작 환경 아래서 황정순은 1970년대에 비극적인 수절의 이면을 그린 <홍살문>(변장호, 1972) 등 60여 편에 출연했다. 60년대에 비해 절반가량 줄어든 실적이다. 속편 등 유사 기획으로 작품성보다는 흥행 위주의 영화가 대세인 가운데 아들을 국가대표 골게터로 키웠으나 신장염을 앓게 되자 콩팥까지 이식해 주는 <어머니의 영광>(김기, 1973)의 생선장수, 벙어리 청소부 아들과 4남 2녀의 손자, 손녀들까지 돌보는 <슬픔이 파도를 넘을 때>(조문진, 1978)의 헌신적인 할머니, 동족상잔의 비극 앞에서 불목의 위기를 화해로 풀어내는 <장마>(유현목, 1979)의 외할머니 등 여러 형태의 모성애를 보여 주었다. 이 가운데 연기력이 가장 돋보인 것이 유현목 감독의 <장마>였다. 화면을 줄곧 적시는 지루한 장맛비 속에 외손자와 나누는 콩깍지의 교감, 설움조차도 발효시킨 푸념 조의 독백은 선율처럼 느끼게 했다. 황정순 최고의 연기라 할 수 있다. [사진] 영화 <장마>에서 황정순과 김신재(오른쪽) 1980년대 이후의 출연작은 <피막>(이두용,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여자의 함정>(이경태, 1982), <가고파>(곽정환, 1984), <88 짝궁들>(서윤모, 1984), <장남>(이두용, 1984) 등 10여 편에 지나지 않는다. 이 가운데 이두용 감독의 <피막>과 <장남>에서의 연기가 관심을 끈다. <피막>에서는 장손이 원인 모를 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하게 하는 강인한 노마님의 모습이, <장남>은 핵가족시대 노인의 소외감이 묻어나는 표정연기가 일품이었다. [사진] 영화 <장남>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김일해 황정순은 이렇게 연극무대에서 다듬은 특유의 발성과 응집력을 무기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열녀문>(신상옥, 1962)으로 대표되는 한은진과 쌍벽을 이루며 1960년대 전후의 한국영화계에 대들보 역할을 했다. ‘탱크’라는 말을 들으며 다진 연기력 황정순은 1925년 8월 20일 경기도 시흥군 수암면에서 난산 끝에 10남매 중 일곱 번째 막내딸로 태어났다. 산모는 몸이 약한 마흔이 넘은 고령자였다. 딸이 백일이 지나 건강을 되찾자 황씨 일가는 시흥을 떠나 외가가 있는 인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런데 정순이 세 살 때, 바다로 나간 아버지가 익사체가 되어 돌아오는 큰 일이 벌어졌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남긴 채무까지 짊어지고 험한 품팔이 일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어렵게 들어간 인천 박문여자중학교를 중퇴할 수밖에 없었다. 정순은 이 무렵 프랑스작가 모리스 르블랑의 탐정소설 <아르센 뤼팡>에 빠졌다. 신출귀몰하는 괴도신사의 이야기다. 그러나 열네 살 때 서울로 수학여행을 갔다가 본 ‘타잔’ 영화가 자꾸 눈앞에 아른거렸다. 황정순은 어느새 배우지망생이 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서울에 사는 사촌 언니(황금순)를 믿고 가출한 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 ‘청춘좌’로 찾아갔다. 무턱대고 졸라 얻어낸 것이 대사 없이 처녀들 사이에 끼어 낄낄거리며 지나가는 <산송장>의 행인 역이었다. 1940년이었다. 그동안 딸의 ‘광대 짓’을 극구 말리던 노모도 제물에 지쳤는지 묵인했다. 그 사이 2차세계대전이 터졌다. 극단 ‘호화선’(1941년)의 연구생으로 들어갔으나 얼마 못가 해체되는 불운을 겪었다. 해방 후에는 중앙방송국 전속 성우(1945년)가 되었다. 그녀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직전 극단 ‘신협’의 <뇌우(雷雨)> 공연을 계기로 시작되었다· 이렇게 물꼬를 튼 연극 활동은 6,25 때 대구로 피란 온 ‘신협’의 <자명고>(1951. 1, 대구)와 <햄릿>(1951. 9, 대구), <맥베드>(1951. 10, 마산) 등에 출연하며 자리를 잡아갔다. 뒤이어 <은장도>(1953, 시공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5, 시공관) 등의 무대에 섰고, 56년에는 중앙국립극단 전속 단원이 되었다. 이즈음에 출연한 작품이 제1회 공연작 <원술랑>과 제2회 공연작 <뇌우(雷雨)>였다. 두 연극 모두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5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 서울 인구가 150만명(1955년 기준)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대단한 성공이었다. 그는 두 연극에서 김유신 장군의 아내 지소 부인과, 노씨 집안의 하녀로 들어간 사봉 역을 맡았다. 특히 젊은 나이로 노파 역까지 소화한 <원술랑>의 지소 부인 역은 관객들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햄릿>(1957, 시공관) 등 여러 작품에서 공연한 바 있는 김동원은 몸을 아끼지 않은 그녀의 열정을 보고 단원들은 ‘탱크’라는 별명을 붙였다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2003, 태학사, 188쪽) 고 했다. 황정순이 1949년 영화 <파시>에 출연한 후 6년 동안 스크린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이 시기 그녀는 이미 신접살림을 하는 새댁이었다. 1953년 3년의 열애 끝에 의사 이영복과 결혼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한꺼번에 두 딸과 아들 하나를 얻었다. 스물일곱 살 때였다. 하지만 결혼 30년 만에 남편이 먼저 가버렸다. 그의 연기를 받쳐준 것은 무대 경험을 통해 축적한 발성법과 육체언어로 인식한 연기동작, 투철한 직업의식에 따른 작품해석과 성격분석이었다. 이례적으로 현대적인 풍모와 카리스마를 보여준 <육체의 고백>의 서구적인 ‘밤의 여왕’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삶의 질곡과 모진 풍상을 겪은 억척스런 아내이거나 엄격하면서도 인자한 어머니, 가난하지만 건강하게 살아가는 서민적인 할머니의 모습이었다. [사진]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황정순 황정순은 영화계에서 은퇴한 후 2006년 여배우로서는 처음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됐으나 이후 발병한 치매로 고생하다가 2014년 2월 17일 아흔 살의 나이로 400여 편의 영화를 남기고 46년에 이르는 영화의 삶을 거두었다. * 연도별 출연 편수는 통계에서 빠진 부분이 있을 것으로 판단돼 증가될 수 있음.
“귀하의 나라에 백정은 살 수 있습니까, 노비는 살 수 있습니까?” 류승완 감독은 < 군함도 > 개봉 초기, ‘친일영화’라는 여론에 부딪혔을 때 이렇게 말했다. “대중의 반일 감정에 기대지 않겠다.” 나는 살짝 감동받았다. 대규모 자본과 스타들... ‘천만 관객’까지 생각했을 시스템에서 일하는 영화감독이, 이런 소신을 밝히기는 쉽지 않다. 워낙 그의 팬이었으나(< 짝패 >!) 그를 다시 ‘봤다’. 그러다가 최근 김은숙 작가의 24부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보면서 <군함도>의 기시감이 되살아났다. 정확하게는 대중의 반응에 대한 기시감이다. 방영 초기, <미스터 션샤인>이 “역사를 왜곡했다”며 28,481명이 한 달 동안 청와대에 이 드라마를 막아 달라는 청원을 낸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청와대나 문화체육관광부가 TV 드라마의 스토리를 바꿀 수 있는가? 나는 창작의 자유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위 기관들은 그럴 권한이 없다. 지면 등 사회적 문제 제기를 통한 ‘역사 왜곡’ 비판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드라마에 대한 불만을 청와대에 호소하다니... 발상이 놀라울 뿐이다. 청원인들의 주장은 이렇다.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피해국과 가해국 입장이 묘하게 전복되어 있습니다. 극에서 연출된 악역들의 대부분이 조선인이며, 자기 장인(도공)의 제자가 한국인이 아닌 일본인으로 등장하고, 조선의 문화가 ‘미개’하다는 연출이 계속해서 보입니다. 극을 끌고 나가는 주축, 주·조연들이 여주인공 고애신을 제외하면 일본인들이며 그들 개개인에게 부여된 서사 역시 ‘조선’이라는 나라를 피해국이 아닌 그것을 ‘자초한 쪽’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서구로부터 시작된 근대와 자본주의는 ‘원인이 없다.’. ‘자본의 운동’이었을 뿐이다. 그들은 전 세계로 뻗어 나갔고, 한반도의 고통스러운 현대사는 그들의 대리전, 후폭풍이었다. 그리고 (반대로) 지금 우리는 ‘한류’를 무기로 삼아 아류 제국주의를 꿈꾸고 있다. 말할 것도 없이, <미스터 션샤인>도 그 ‘무기’ 중의 하나로 기획되었다. 식민 지배에, “우리의 자초”나 “저들의 의도”가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의미한 얘기다. 약육강식론도 한탄일 뿐, 원인이 아니다. 서구가 비서구를 점령했을 때, ‘우리’ 입장에서는 침략이지만 ‘그들’은 야만인에 대한 문명화 사명에 고뇌했다. 강대국과 약소국의 관계를 젠더 혹은 계급으로 비유해보자. 남성 중에서 부자 중에서, 자신이 여성과 가난한 이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별로 없다(오히려 “역차별”을 주장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직접적 계기는 <미스터 션샤인>에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조선 명문가를 대표하는 고사홍( 이호재 )은, 미국인 유진 초이( 이병헌 )가 “조선은 귀댁을 보호하지 못하니, 원하신다면 저희가 보호해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다음과 같이 위엄을 내세운다. “양이(서양 오랑캐)의 보호를 받느니, 차라리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노라.” 물론, 유진 초이의 목적은 고사홍 집안의 손녀인 고애신( 김태리 )을 친일파 낭인으로부터 보호하려는 ‘사적인 마음’의 발로였다. “조선이 나를 보호하지 못하는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말에, 나는 표현력을 잃었다. 연인 사이의 대사로 바꿔보자. “사랑하는 그대가 나를 죽이더라도 그 뜻을 헤아리겠다?” 이 무슨 노예근성 혹은 피학증인가.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 주인이 바뀌었을 뿐 고사홍 대감이 미군의 보호를 거절한 이유는 조선에 대한 자부심이나 애국심 때문이 아니다. 그 자신이 조선 왕조 500년의 기득권자이기 때문이다. 애국심은 애국심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자기 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그나마 인격적인 양반이나 근대적 낭만으로 “불꽃으로 살고 싶은 자”(고애신) 혹은 ‘사명감’ 같은 이데올로기를 간직한 자는 조선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 그러나 사리사욕이 앞선 자, 원래 핍박받았던 자들은 공동체의 운명에 관심이 없다.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조선이든 대한민국이든 국가를 비롯해서 어느 공동체나 그 구성원들은 평등하지 않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시대 역시 신분 사회지만, 조선은 아예 그것이 법으로 규정된 사회였다. 노비의 입장에서, 백정의 입장에서, 여성의 입장에서 나라를 빼앗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주인이 바뀔 뿐이다. 군 ‘위안부’ 동원도 그녀들의 아버지, 한국인 업자 등 한국 남성의 협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군 ‘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피해 경험을 들어보면, 일본군을 상대하는 일보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족과 남편에게 구타당한 것이 더 억울하고 몸을 상했다는 증언이 꽤 나온다. 국가 내부에서 모든 사람이 국민인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국민이기보다는 여성, 장애인, 동성애자, 지방 사람이다.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될 뿐이다. 이 봉합은 일상적으로 찢어지고 다시 꿰매지고를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터져서 혁명이 일어날 수도 주권을 빼앗길 수도 있다. 비록 서구와 달리, 나라의 사정은 근대와 식민 지배와 함께 찾아온 자신도 모를 운명의 비극을 맞았지만, 구한말 개인들의 사정은 모두 달랐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질서가 성립될 가능성이 있다. 이 드라마에서 노비 유진 초이와 백정( 유연석 ), 이양자( 김민정 )의 신분은 바뀌었다. 낮은 계층의 여성들은 기독교의 영향으로 집 밖으로 나와 글을 배울 수 있었다. 원래 국가 내부의 차이가 국가 내외부와의 차이보다 큰 법이고 격동기에는 더욱 그렇다. 드라마에서 이 문제는 경어체 여부로 드러난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대사를 알아듣기 위해서는 고도의 한국적 맥락이 필요하다. “외국인에게는 어렵다”는 일반적인 의미가 아니다. 김은숙 작가의 대사와 스토리 전개 방식은 이제까지 그의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듯하다(예를 들어, “통성명, 악수, 포옹 그다음은 그리움이더이다” 이 말, 정말 맞다). 이 드라마의 설정상, 반말과 존대어가 뒤섞어 어떨 때는 정신이 없다. ‘원래 신분’과 외국(미국과 일본)에 다녀와서 바뀐 신분, 장 포수와 고애신처럼 반상과 사제 관계가 겹친 경우, 나이, 성별 등에 따라 서로 주고받는 말투가 다 다르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서 구한말을 총체적으로 본다. 유관순 누나? 민족의 대표가 여성일 때 윤종찬 감독의 < 청연 (靑燕, Blue Swallow)>(2005)은 그의 걸작인 < 소름 > 이후 나를 실망시키지 않은 작품이었지만, 역시 친일 문제로 고난을 겪었다. 최초의 여성 비행사로 알려진 박경원을 다룬 <청연>의 첫 장면은 남루한 옷을 입은 조선의 소녀들이 들판에서 뛰쳐나오는 데서 시작한다. 내게 이 장면은 영화의 주제처럼 보였다. 가난한 나라의 가난한 소녀들의 힘찬 달리기. 그들의 꿈을 재현한 듯 한 그 장면이 지금도 생생하다. 이 영화는 조선인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민족주의’ 영화다. 다만, 민족의 대표가 기존과 달리 남성이 아니라 여성일 뿐이다. 그 한 가지 이유로, 이 영화는 친일 논란에 휩싸였다. 한국 사회에서 늘 재연되는 장면. 맹목적 대중 심리가 배타적 국가주의와 만나 ‘생각 정지’ 상태에 이르고, ‘일본 앞에 우리는 공동 운명’이라는 퇴행적 민족주의가 저항적 민족주의로 둔갑한다. 이 과정에서 국민들 사이의 차이(이 경우는 성차별)는 은폐되고, 시선은 모두 ‘외부의 적’을 향하게 된다. 여성이 자아실현을 하는 데 일본인의 도움을 받으면 ‘친일 행적’이고 ‘친일 영화’인가? <청연>은 여성에게 ‘친일’과 ‘민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는다. 여성은 민족의 주체가 아니라 민족을 재현하는 대상일 때만 유용하다. 유관순은 종종 ‘열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윤봉근 열사’에 비해서는 그 경우가 훨씬 적다. 그것도 “유관순 누나”다. (나는 “유관순 언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어떤 남성이 “레즈비언이세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우리가 ‘대표 친일파’로 기억하는 이광수나 김활란에게 ‘반민족행위자’라고 하면, 두 사람 모두 억울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을 민족주의자로 강하게 정체화했으며, 친일을 함으로써(‘근대를 지향함으로써’) 민족을 살릴 수 있다고 믿었다. ‘민족을 살리는 길’은 사람마다 이렇게 다양하다. 창씨개명이나 단발령 등 일제의 정책을 거부한 이들 중에는, 일제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유교 규범을 수호하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친일이 불가피했다거나, 사소하다거나, 모든 민족주의는 같다는 의미가 아니다. 친일 청산은 절대 선, 당위적인 진실이 아니라 경합하는 언설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친일파닷!” 이 한마디가 경합해야 할 담론장의 다른 목소리를 모두 내쫓는다는 데 있다. ‘여성에게는 조국이 없다.’ 결혼하면 국적을 잃는데 여성에게 국가가 어디 있나. 아직까지도 남자가 ‘출세’하면 여자가 따르고 남자들은 그에게 아부하지만, 여자가 ‘성공’하면 남자는 떠나고 여자들은 그녀를 시기한다. <청연>은 기존의 이성애 법칙에 도전한다. 이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 김주혁 )이 박경원을 사랑하는 이유는 그녀가 ‘똑똑하고 야망에 불타며 고집이 센’ 데다가, 특히 “너를 통해 세상과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청연>에서 남성은 여성을 통해 공적 영역에 진출하며, 여성의 꿈을 지원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 주인공 박경원( 장진영 )과 비슷한 시대를 산 퀴리 부인은 노벨상을 수상한 뒤에도, 남편 연구실에서 더부살이했고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핵분열을 발견하여 베를린 과학아카데미 첫 여성회원이 된 물리학자 리제 마이트너는, 연구소에 여성이 출입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남성들 때문에 정문을 사용하지 못하고 청소부용 반지하 뒷문으로 다녀야 했다. 우리는 < 히든 피겨스 >에서 비슷한 장면을 보았다. 당시는 무려 1960년대. 미국의 민주주의에 대한 환상을 버려야 한다! 히든 피겨스 박경원은 어땠을까? 일제 강점기 너무 가난했던 한 소녀가 현모양처 + 독립운동가 + 훌륭한 비행사… 이것이 가능했을까? 아니면, 관객의 바람 대로 위 모든 것을 다해 내거나 ‘독립운동가의 아내로만’ 헌신해야만 했을까. 개인의 삶도 복잡한데, 국제 정세가 얽힌 나라를 되찾는 일은 얼마나 복잡하겠는가. 탈식민주의 이론의 시원(始原)인 프란츠 파농은 말했다. “민족해방투쟁(독립운동)은, 빼앗기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일이다.” 탈식민주의, 즉 포스트콜로니얼(post colonial, 후기식민주의)은 형식상의 주권은 되찾았지만 여전히 이전의 식민 국가들은 전 지구적 자본주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며 문화적, 사회적으로 가해국에 대한 피해의식, 동일시 욕망, 경쟁심, 원한 등에 시달리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나는 그 가장 ‘웃긴’ 사례가 영연방 경기 대회(英聯邦 競技大會, Commonwealth Games)라고 생각한다. 이들의 공통점은 예전에 대영제국의 식민지였다는 것이다. 이 무슨 정체성인가? 같은 주인을 모신 나라들의 운동 경기? 사족 - 우연일까, <청연>의 두 주인공 장진영과 김주혁은 지금 우리 곁에 없다.
“코넬의 영화는 홈 무비의 본질이다. 그의 영화는 우리 삶 매일의 어디에나 있는 가까운 것들을 다룬다. 큰 것이 아닌 작은 것들 말이다. 전쟁도 아니고, 격정적인 감정도 아니고, 극적인 상황이나 충돌도 아니다. 그의 이미지는 훨씬 단순하다...조셉 코넬의 박스들, 콜라주, 그리고 홈 무비는 우리 시대의 보이지 않는 성당이다. 즉, 오늘날 여전히 발견할 수 있는 모든 최고의 것들이 그러한 것처럼, 거의 보이지 않는다. 당신이 그것을 쳐다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 조나스 메카스, 「조셉 코넬의 보이지 않는 성당The Invisible Cathedrals of Joseph Cornell」 (『빌리지 보이스The Village Voice』) 고물상이나 중고물품 판매점에서 발견한, 한때는 아름답고 귀중했던 이미지와 사물을 수집하고 박스 안에 넣어 만든 아상블라주 작업이 조셉 코넬을 대표한다면, 그가 만든 (28편에 이르는) 일련의 영화 작업은 그다지 가치 있게 평가되지 못했다. 물론 코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고 말이다. 그나마 최초의 영화 < 로즈 호바트 >(1936) 등 193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영화 제작 활동 전기의 작업들이 파운드 푸티지와 원본의 변형이라는 기법의 예시로서 잘 알려진 반면, 1950년대 후반의 시적인 다큐멘터리는 여전히 대부분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이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는 코넬이 래리 조던, 루디 부르크하트나 스탠 브래키지와 같은 이들과 함께 협업하여 뉴욕의 이곳저곳을 직접 촬영하고 편집한 것으로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것들인데, < 요정의 빛 >(1957)은 그 중 하나이며 스위스 태생의 영화감독 루디 부르크하트와의 협업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후기의 영화는 대부분 명확한 서사나 중심된 사건이 없으며, 단지 도시의 아주 미시적인 단면들을 보여줄 뿐이다. 하지만 별다른 특징이 없는 일상적이고 지극히 평범한 장소는 그의 영화를 통해 의문과 상상력으로 가득 찬 곳으로 비틀린다. 1903년에 태어나 1972년에 죽기까지, 코넬은 생애 거의 전부를 뉴욕 플러싱(Flushing)에 위치한 그의 집에서 어머니, 그리고 뇌성마비를 앓아 몸이 불편한 남동생 로버트와 함께 살았다. 플러싱은 맨해튼의 삶과는 그다지 관련 없었으며, 그보다는 노동자 계층의 사람들이 사는 퀸즈에 더 가까운 곳이었다. 그는 산책자처럼 도시를 걸어 다녔고 버려진 필름을 주웠다. 그리고 자판기 식당, 도서관, 서점, 공원, 중고품 판매점에 규칙적으로 드나들었다. 그에게 도시라는 공간은 일상적인 곳이자 매우 중요한 곳이었고, 언제나 도시의 세세한 것들에 관심을 가졌다. 그의 50년대 영화는 대부분 이와 같은 생활 반경에 있는 뉴욕의 곳곳, 이를테면 3번가의 고가철도(< Gnir Rednow >, 1955-1960), 플러싱 공동묘지(< Angel >, 1955), 유니온스퀘어 공원(< The Aviary >, 1954-55), 리틀 이털리의 골목(< A Legend for Fountains >, 1957-65) 등을 담고 있다. <요정의 빛> 스틸컷 < 요정의 빛 >은 맨해튼 한복판에 위치한 브라이언트 공원과 그 안에 있는 뉴욕 공립도서관이 배경이다. 약 7분 정도 길이의 이 영화는 흰색의 드레스를 입은 한 소녀가 부서진 양산을 들고 공원으로 달려가면서 시작한다. 그는 화가인 친구 이본 토마스의 딸 그웬 토마스로, 당시 12세의 발레를 배우는 학생이었다. 화면 속의 그웬은 분수 주변에 모인 새들을 춤추듯 좇거나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본다. 이후 카메라는 계속해서 공원의 여기저기에 앉아있거나 날아다니는 새들을 천천히 이동하며 보여준다. 녹색이 우거진 공원의 나무 사이로 새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고, 한낮의 밝은 빛이 그 광경을 담은 화면을 무척이나 아름답게 만든다. 이윽고 카메라는 공원 밖의 길거리를 비추며 지나가는 차들과 사람, 공원에 한가로이 앉아 있는 인물들을 차례로 담는다. 개를 산책시키는 할머니,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 분수대에 앉아 있는 젊은 남성들. 쓰레기를 수거하는 청소부 등 무척이나 소박한 일상적 풍경들이 시선을 옮기며 이어진다. 별다른 서사도, 눈에 띌만한 시각적인 실험도 이 영화에서는 감지하기가 힘들다. 그러나 무척 아름답고 정적인 < 요정의 빛 >을 몇 번이고 돌려보다 보면, 어느 순간 매우 기묘한 기분이 든다. 화면에 담긴 사물과 장소의 풍경은 매우 구체적인 것임에도 아주 멀리 아득하게 잡히지 않는 간격을 두고 놓여 있는 것 같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보기 위해 앞서 말한 등장인물, 그웬 토마스에서 시작해보자. 그의 존재가 특징적인 이유는 영상 전체를 통틀어 새를 제외하고는 누군가와 함께 화면에 잡힌 숏이 없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여타의 사물과 등장인물이 일상적인 실제 세계에 속한 반면 그웬은 저 홀로 영화를 위해 연출된 요소, 즉 제목에서 추측컨대 ‘요정’이라는 허구적 인물로 등장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리하여 영화는 두 종류의 세계를 하나의 공간 안에 공존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달리 말하면 브라이언트 공원은 그웬 토마스가 연기하는 요정이 사는 가상의 공간임과 동시에 무척이나 일상적인 삶이 지속되는 현실의 세계로, 이 두 세계가 한데 포개지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차이가 없는 두 세계는 그웬이 등장하는 숏과 그렇지 않은 숏의 교차를 통해 구분된다. 그리고 그웬은 요정을 표상하는 것을 넘어 기묘한 거리감을 생성하는 기능적인 것으로 역할 한다. <요정의 빛> 스틸컷 화면에서 그웬이 사라졌을 때, 그 화면은 그웬을 외화면에 방기하기보다는 시선의 주체 그 자체로 전환시킨다. 이를 암시하는 부분은 영상의 후반에 등장한다. 카메라는 화면의 왼쪽 밖을 응시하고 있는 그웬의 얼굴을 몇 초 정도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그다음 장면으로 공원을 서성이는 하늘색 치마를 입은 또 다른 소녀를 보여준다. 그 소녀는 화면의 왼쪽에서 등장해 두리번거리다가 오른쪽으로 나가고, 곧이어 오른쪽을 응시하는 그웬의 얼굴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시 화면은 그저 새들이 걸어 다니는 공원에서 무언가를 이리저리 쳐다보는 소녀의 모습을 찍는 것이다. 즉 요정으로 분한 그웬을 매개변수로 두고, 카메라의 시선과 숏의 배치를 활용함으로써 일상적인 도시 공간은 친밀하고 익숙하면서도 매우 낯선 기묘한 감각을 생성하는 상태에 놓인다. 아담 시트니는 「조셉 코넬의 영화적 시선 The Cinematic Gaze of Joseph Cornell」이라는 1980년의 글에서, < 요정의 빛 >의 아름다운 어린 소녀를 통해 코넬이 보여준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의 상호작용”은 매우 이질적인 것처럼 보이는 그의 영화들을 연결시키는 하나의 실과 같다고 말한다. 처음에는 실제로 화면에 육화되어 등장하는 요정의 형상에 관객의 이목이 집중되지만, 카메라로 공원의 풍경을 비추면서 그의 존재는 그 장소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것으로 나아가게 되며, 우리의 시선을 인도한 이후 사라진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는 그러한 그의 ‘사라짐’을 암시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청소부가 지나쳐가는 쓰레기통에 꽂혀 있는 부서진 양산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가 누구인지, 어디로 갔는지, 실제인지 허구인지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가 매개한 세계가 우리에게 어떻게 남겨졌느냐일 것이다. 이 장면 이후 카메라는 물방울이 떨어져 일렁이는 분수의 물웅덩이를 클로즈업하여 보여주고 끝이 난다. 시트니는 이러한 코넬의 영화가 “그가 경험한 장소의 영혼에 대해 기도하는 행위”라고 표현한다. 모든 영화에서 양산을 든 요정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코넬의 영화는 영적인 존재가 사라진 그곳에 미시적이고 일상적인 세계의 이미지를 태연히 위치시킨다. <천사>(1957) 스틸컷 같은 해 11월, 마찬가지로 부르크하트와 함께 만든 3분여 길이의 <천사Angel>는 < 요정의 빛 >과 공유하는 요소가 많다. 17개의 짧은 숏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의 주인공은 분수를 내려다보며 높은 곳에 앉아 있는 천사 조각상이다. 다소 낮은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하늘을 배경으로 정면에서 조각상을 찍은 숏에서 시작하여, 바로 그다음 숏은 비스듬한 측면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분수대와 그 주변 풍경을 클로즈업하여 찍은 숏들과 조각상을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는 숏들이 교차되다가, 마지막에는 조각상의 뒷모습을 올려다보며 하늘을 비중 있게 담는 것으로 끝이 난다. 천사는 바라봄의 대상이 되었다가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의 주체로 바뀌고, 클로즈업 되어 파편화된 분수대의 풍경은 그 시선과 숏의 교차 속에서 매개되는 실제라는 점에서 <요정의 빛>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요정의 빛>에 비하자면 시선과 숏의 교차가 만들어내는 장소에 대한 감각적 경험의 효과가 떨어진다는 것은 한편으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 요정의 빛 >은 코넬의 여느 영화와 마찬가지로 소리가 없다. “이상적인 세계의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무성영화의 중요한 잠재적 가능성”이 유성영화에는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였던 그는 언제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세계를 초월해야 하는 필요에 대해 역설했다. 코넬의 영화를 당대의 오디오비주얼 미디어 문화와 병치시키면서 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마이클 피고트(Michael Pigott)의 최근 연구서 『Joseph Cornell Versus Cinema』(Bloomsbury, 2013)의 핵심적인 주장은, 코넬의 영화는 보고/보여주는 대상(특히 몸)을 통해 우리를 일상적인 세계와 꿈의 세계에 동시에 위치시키며, 이로써 우리가 우리의 실제 세계를 바라보고 지각하고 사용하는 방식을 변형시키게 되는 잠재적 효과를 지닌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중반 이후의 후기 작업은 도시 공간, 그리고 이와 관계된 몸에 대한 대안적 인식의 방식을 제공함으로써 당대를 지배하는 일반적(경제적) 세계의 시간을 교란시킨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피고트는 도시 공간 안에서 실제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상적인 시간을 제안하는 것으로서 코넬의 영화를 이해한다. 오래되고 낡은, 일상적인 세계의 사물을 수집해 박스 조각을 만든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카메라에 일상적인 세계의 지속들을 담았다. 이는 실제 세계의 푸티지를 콜라주하여 또 다른 실재성을 구성한다는 점에서 전반적인 그의 예술적 실천과 연결시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박스 조각을 비롯한 여타의 입체 작업들과는 달리 그의 영화는 콜라주로 창조된 실재적 세계의 감각적 주체로서 관객을 더욱 명확하고 강렬하게 요청한다. 결국 이러한 논의에 따라 코넬의 영화를 이해했을 때 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질문은, 과연 영화가 실제 세계를 어떻게 지각하게끔 만드느냐, 혹은 변형시키느냐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