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분(草墳)
- 감독
- 이두용
- 제작년도
- 1977
- 출연
- 김희라, 정혜경, 윤일봉, 나시찬, 엄유신, 김정하, 강효실, 김경란, 정미경, 최정미, 현길수, 노사강, 이병만, 박종설, 김백수, 서평석, 윤일주, 임해림, 최일, 정영국, 박달, 권일수, 이백
이두용 의 < 피막 >(1980)은 전국 각지의 무당들이 강 진사 집으로 몰려드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강진사의 장남 성민이 알 수 없는 병으로 혼수상태에 빠지자 굿을 통해 고쳐보려는 것이다. 무당 가운데 옥화( 유지인 )가 영험을 보이자 나머지 무당들은 모두 물러간다. 옥화는 마을 외딴 곳에 묻혀있던 호리병을 찾아내고 거기에 갇혀 있던 원혼이 성민에게 씌었다고 말한다. 그러자 강 진사 집 사람들은 어쩔 수없이 숨겨왔던 비밀을 털어놓게 되고 미스터리는 차츰 풀려나간다. 이두용이 이 영화 바로 전에 연출한 영화는 < 최후의 증인 >(1980)이었다. 한국전쟁의 상처와 분단의 후유증을 담아내려고 열심히 찍었지만 ‘빨갱이 영화’로 몰려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두용은 2시간 30분 길이의 영화가 40분이 잘려나가는 걸 보고 상심한 나머지 영화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다. 제작자에게는 미안한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피막>은 가벼운 마음으로 만들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액션영화를 주로 찍었던 이두용은 당시 이른바 ‘토속물’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 시기 한국 대중영화의 주류는 ‘에로티시즘 영화’였다. 따라서 <피막>은 토속적 샤머니즘과 에로티시즘이 결합된 결과물이다. 원혼에 얽힌 이야기가 펼쳐질 때, 에로틱한 설정과 장면들이 나열된다. 강 진사 집안에는 남자들이 요절을 많이 한 탓에 청상과부들이 즐비한데, 여인네들은 밤마다 욕망을 참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동원한다. 그 가운데 둘째 며느리( 김윤경 )는 자해를 계속 하다 상처가 덧나 중태에 빠진다. 그녀는 ‘피막’으로 옮겨지는데, 피막지기 삼돌( 남궁원 )의 극진한 간호로 살아난다. 처음에 그들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성관계를 맺게 되지만, 결국 사랑하는 사이가 된다. 그리고 그 대가로 두 사람은 강 진사 집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원혼의 주인공은 삼돌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계급이 다른 남녀(여성이 양반이고 남성이 완전 밑바닥 계급인 경우가 많다)가 성관계를 맺는 설정을 통해 에로티시즘을 표현하고 그 결과 비극을 맞이하는 결말은 1980년대 토속물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여기에 옥화가 강 진사 집 남자들에게 성폭력을 당하는 설정을 통해 에로틱한 장면이 더해진다. 옥화의 굿 때문인지 성민은 혼수상태에서 깨어난다. 빠르게 회복된 그는 그간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다. 동경유학을 다녀온 듯한 그는 ‘과학문명으로 개화된 세상에 귀신이 어디 있냐’며 옥화의 영험을 믿는 가족들을 비판한다. 그는 옥화와 관련된 죽음의 현장에 가서 형사처럼 조목조목 합리적인 설명을 내놓는다. 샤머니즘을 모티브로 전개되던 영화는 이 대목에서 전근대와 근대가 충돌한다. 피막에서 씻김굿을 하는 옥화와 과학적인 설명을 하는 성민의 장면은 교차 편집을 통해 더욱 대비된다. 성민의 추리는 설득력이 있지만 그럼에도 옥화가 내림굿을 통해 진짜 무당이 되는 과정이나 피막에 묻힌 삼돌의 시체가 20여 년 동안 하나도 썩지 않은 상태 등은 과학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옥화는 강 진사에게 자신이 삼돌의 딸이라고 정체를 밝힌 다음 죽이려고 하다 잘못을 빌자 복수를 포기한다. 한국 공포영화에서 한을 품고 죽은 귀신이 원수들을 처치하다가 가부장(주로 시아버지)에게 억울함을 호소한 다음 복수를 멈추고 물러나는 설정과 유사하다. 이두용은 근대로의 방향은 동의하지만, 전근대의 가치에 대해 연민과 동조의 시선을 보낸다. 무엇보다 이 영화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설정은 ‘피막’이라는 공간이다. 그 곳은 혼령이 돌아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죽어가는 병자를 마을에서 멀리 옮겨놓는 장소로서, 하계와 이승의 중간정거장 같은 곳이다. 다시 말해서 호상도 누리지 못하고 가족들의 임종도 받지 못한 영혼들의 한이 서린 공간이다. 옥화는 복수를 완수하고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피막에 들어간다. 그녀가 기도를 시작하자 억울하게 죽었다고 호소하는 수많은 원혼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 때 그 원혼들은 멀리는 한국전쟁에서부터 가까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까지, 한국현대사의 비극 속에서 죽어간 수많은 희생자들처럼 보인다. 이두용은 인터뷰(월간 [키노](1999년 9월)에서, ‘1980년대는 검열을 피하면서 하고 싶은 말을 하는 전략이 필요한 시대였다. 사실적인 작품을 할 수가 없으니 사극의 형태를 빈 영화를 선택했다. 정권에 아부하기는 싫고 생존하기 위해 우회적으로 근대사를 표현한 미스터리한 사극 < 초분 >(1977) < 물도리동 >(1979) <피막>을 연출했다’고 말한다. 옥화가 그 모든 원혼들에게 한을 풀어주겠다고 응답할 때, 피막에 불을 지르고 아버지와 다른 모든 원혼들과 함께 산화할 때, 그 앞에서 안타까워하는 마을 사람들과 원혼들을 달래는 굿 소리가 어우러질 때, <피막>은 역사의 희생자들을 위한 진혼곡이 된다. <피막>은 한국영화 최초로 1981년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되어 특별상을 받았다. 한국영화사에서 1970-80년대는 무자비한 검열과 3S 정책에 의해 초토화된 시기였다. 만일 <피막> 같은 성과마저 없었다면, 그 시대는 완전히 한국영화의 암흑기로만 기록 되었을 것이다. >> <피막> VOD 보러가기 <<
한국 장르 영화의 계보에서 이두용 감독은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그는 거의 모든 장르를 섭렵했고, 그 모든 장르에서 뛰어난 작품성을 보여주었다. ‘액션’이 주종목이었지만, 경력 초기의 멜로드라마도 당대에 좋은 평가를 받았다. <최후의 증인>(1980) 같은 미스터리나 <귀화산장>(1980) 같은 호러 스릴러에서도 그의 장기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는 <병태의 감격시대>(1975) 같은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기도 했고, <경찰관>(1978), <장남>(1984) 같은 리얼한 톤의 드라마에서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 시대극이라는 범주 안에서도 궁중 사극인 <내시>(1986)와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3) 같은 엄격한 형식미와 <뽕>(1985) 같은 서민 희극을 오가며 수작을 뽑아냈다. <초분>(1977), <물도리 동>(1979), <피막>(1980) 등에선 샤머니즘이라는 테마를 다루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작품인 <아리랑>(2003)은 흑백 무성영화였다. 한국영화사에서 이두용 감독처럼 넓은 스펙트럼을 지녔던 감독은 흔치 않다. 물론 이러한 다재다능함을 긍정적으로만 볼 순 없다. 뒤집어 이야기하면, 그는 생존을 위해 영화산업이 요구하는 ‘제품’을 끊임없이 찍어내야 했던 감독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건, 그가 전성기를 구가했던 1970~80년대는 한국영화의 거대한 모순기였기 때문이다. 1960년대 말에 황금기를 구가했던 한국영화는 1970년대에 서서히 하강기를 맞이했다. 1973년에 제정된 ‘유신영화법’은 국책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영화진흥공사’를 설립시켰다. 외화 수입이 제한된 상황에서, 영화 산업은 흥행성이 보장된 외화 쿼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허가제에 의해 살아남은 몇몇 영화사들은 쿼터 확보를 위해 한국영화를 만들었고 ‘방화’라는 이름으로 비하했다. 이런 상황에서 영화감독이 살아남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시스템에 철저히 적응해 기능공이 되는 것이었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은 “도대체 한 감독이 만든 영화가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일관성이 없는” 필모그래피라고 말하는데, 이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흥행 감독이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데뷔 초기 합동영화사의 전속 감독이 될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았던 그는 반복되는 장르 영화 속에서 서서히 장인이 되었다. 다행히 그는 거기서 머물지 않았고 1970년대 말부터 서서히 작가의 영역으로 옮겨 갔다. 이것은 특유의 기질 때문이었다. 이두용 감독의 인생과 영화 경력을 살펴보면, 그에겐 때론 무모하게 보일 정도의 개척자 정신이 있었다. 억압적인 환경 속에서, 그는 멈추는 순간 뒤처진다는 걸 깨달았다. 기본적으로는 산업의 요구에 순응하면서도, 이두용 감독은 끊임없이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갔다. 당대의 트렌드였던 신파 멜로로 시작한 그의 경력은 태권도를 기반으로 한 발차기 액션 영화로 돌파구를 마련했다. 이후 그는 액션 연출력을 발판으로, 다른 영화인들은 모두 충무로라는 우물 안 개구리던 시절에 <아메리칸 방문객>(1976)으로 미국 로케이션 촬영을 시도한다. <피막>으로 베니스영화제에,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에 초청 받았으며, 한국 영화감독으로는 최초로 할리우드 시스템 안에서 작업한 <침묵의 암살자>(1988)를 내놓았다. 1980년대엔 자신의 제작사를 차렸고 이후 영화 수입과 극장 경영까지 겸했다. 비록 무산되었지만 1980년대엔 충무로 감독으로서 TV 영화를 연출하려 시도했고, <아리랑>을 들고 북한에 건너가 남북 합작 프로젝트를 논의하기도 했다. 흥행성과 작품성, 창작 활동과 비즈니스, 장르 영화와 작가 영화…. 그의 좌충우돌 영화 인생은 언제나 양 극단 사이에서 진동했다. <최후의 증인> 같은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IMF로 극장 사업을 접어야 했으며, 제작자의 외화 쿼터를 위해 봉사하듯 영화를 찍기도 했지만, 그는 어떻게든 살아남았고 끊임없이 영화를 만들었다. 우리가 이두용의 영화 인생을 통해 배워야 할 것은 이 부분, 즉 장르 영화 장인으로서 지녔던 생명력이다. 그 안에서 그는 자신만의 주제 의식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외국의 영화제에 의해 먼저 발견된 후 한국의 평단에 의해 평가되었다. ** 이두용 감독은 1941년(호적엔1942년)에 서울 청파동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였고, 아버지는 간장 공장 기술자였다. 학창 시절엔 친구들과 극장에 몰려다니던 활극 영화광이었고, 미술에 뛰어난 소질을 지닌 학생이었다. 영화에 대한 꿈을 점점 키워나가던 그는 고등학교 시절 우연하게 충무로의 일원이 된다. 당시 미술 선생이 영화 포스터 그리는 일을 했는데, 심부름으로 동성영화사의 만리동 스튜디오에 갔다가 처음으로 영화 현장을 접한 것. 이후 그는 이강천 감독 연출부에서 스크립터 일을 하며 영화계에 발을 내딛었고, 1950년대 말에 몇 편의 영화를 거치지만 이렇다 할 성과는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그는 짧은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스물두 살의 나이에 감독을 꿈꾼다. 넉넉하지 않은 집안 형편이었지만, 부모님을 설득해 거의 집 한 채 값의 거금을 받아 <여승>이라는 영화를 직접 제작하고 연출했던 것. 하지만 극장 배급을 책임지기로 한 흥행사가 돈을 가지고 도망가면서 영화는 완성되지 못했다. 금전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지만 교훈은 있었다. 제대로 영화를 배운 후 감독이 되어야겠다는 깨달음이었다. 제대 후 이두용 감독은 세 명의 감독 연출부에서 일하며 많은 걸 배웠다. 전홍직 감독은 어떻게 해야 영화가 흥행하는지 잘 알고 있는 ‘기획자’였다. 일본 유학파인 김수동 감독은 콘티의 정확성과 압축해서 명료하게 표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정소영 감독은 배우의 감정을 끌어내는 데 탁월했다. 무려 7편의 영화를 함께 한 정소영 감독은 이두용 감독의 데뷔에 직간접적으로 많은 영향을 미쳤다. 당시 정 감독은 <미워도 다시 한 번>(1968)으로 엄청난 흥행을 기록하며 신파 멜로드라마의 트렌드를 만들어냈는데, 이두용 감독의 첫 작품 <잃어버린 면사포>(1970)도 그 계열이었던 것. 기획자 방규식은 정소영 감독의 제작부장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김수현도 정소영 사단의 일원이었다. 이 영화로 시작해 <작은 새>(1974)까지 이어지는 일련의 멜로는 당대의 트렌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들이었다. 가부장제에서 신음하는 여성의 비극적 운명을 강조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모성애를 그다지 강조하지 않는다는 부분이었다. 대신 여성의 상황을 더욱 가혹하게 몰고, 그 기저에 ‘가난’이라는 경제적 계급 차이가 있음을 강조한다. 이런 테마는 <초분> 이후 일련의 샤머니즘 영화와 사극으로 이어지며 변형된다. 여성의 비극을 개인사의 차원이 아닌, 역사와 사회에 의해 구조화된 모순의 결과로 바라보는 것이다. 이두용 감독의 전성기는 액션 장르와 함께 찾아온다. 변화의 원인은 신파 멜로에 대한 염증이었고, 좀 더 영화적인 기능을 살리는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액션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외국 시장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느꼈는데, 이것도 액션에 관심을 가진 계기가 되었다. 영세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고 외국 관객들에게 관심을 끌 만한 영화는 액션 밖엔 없었다. 박노식이 출연하는 <날벼락>(1971), 호러와 무협이 결합된 <야오귀>(1971), 범죄 액션 <체포령>(1972), 전쟁 액션<홍의장군>(1973) 등이 있었지만, 진짜 시작은 <용호대련>(1974)이었다. 그는 대규모 오디션을 통해 액션 배우를 꿈꾸는 전국의 유단자들을 끌어 모았고, 재미 교포인 ‘챠리 셸’ 한용철을 주인공으로 발차기를 중심으로 하는 태권도 액션 영화를 발명했다. 1974년 한 해에만 <용호대련>, <죽엄의 다리>, <돌아온 외다리>, <분노의 왼발>, <돌아온 외다리(속)>, 그리고 <배신자>까지 한용철 주연의 액션 영화 6편이 개봉되었는데, 이 영화들은 당대의 신드롬이었다. 하지만 한용철은 이두용 감독과 결별했고, 이후 이두용 감독은 강대희와 <무장해제>(1975)를, LA의 태권도 사범인 정준(준 청)과 <아메리카 방문객>(1976)을 찍는다. <비밀객(속)>(1976)부터 <해결사>(1981)까지는 신우철과 안태섭이 액션을 맡았고, <돌아이>(1985)는 당대 최고의 아이돌 가수였던 전영록을 카메라 앞에 세워 폭발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흥미로운 건 이두용 액션이 지닌 사회적 의미였다. 유신 헌법 이후 갈수록 엄혹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호쾌한 발차기가 작렬하는 그의 액션은 대중에게 정서적 탈출구였고, 오승욱 감독의 표현에 의하면 “뭔가에 억눌린 모든 것을 폭발시키는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배우들이 “으악!” 소리와 함께 나뒹군다고 ‘으악새 영화’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이두용 표 액션’의 힘은 꾸준히 지속되었다. <무장해제>는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라는 역사적 사건을 배경으로 실제 왕궁에서 촬영되었으며, <해결사>는 세트 없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펼쳐지는 생생한 액션을 보여준다. <돌아이>는 카 체이스 같은 현대적 액션을 시도했다. *** 액션은 이두용 감독을 대표하는 장르지만 그는 종종 회의를 느끼곤 했다. 액션에 대한 당대의 사회적 시선은 멸시에 가까웠다. 이때 우연히 제안 받은 <초분>(1977)은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커다란 분기점이 된다. 무속적인 소재를 다룬 일련의 영화들이 시작되었으며, 이 영화들을 통해 ‘억압 받는 인간’이라는 테마가 드러났다. 그리고 사극에선 이데올로기의 억압에 저항하는 자들을 통해 그 테마는 더욱 명확해진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가 대표적이며, 특히 이 영화의 정제된 스타일은 이두용 감독의 미장센이 정점에 올랐음을 보여주었다. 그가 세계무대에 알려진 것도 <초분> 이후 영화들 덕분이다. <피막>은 베니스영화제에서 감독부문 특별상에 수상하는 I.S.D.A.P 상을 수상했고,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초청 받는다. 서구 비평가들이 처음으로 발견한 한국영화는 바로 이두용의 작품들이었으며, 혹자는 일본의 미조구치 겐지 영화와 비교하기도 했다. 물론 그들의 시선엔 오리엔탈리즘이 작용했지만, 이전까지 국내의 그 어떤 평론가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이두용 감독의 텍스트는 서구를 경유해 비로소 자국의 평단을 자극했다. <경찰관> 같은 리얼한 톤의 서민 드라마나 가족이라는 테마를 진지하게 접근한 <장남>, 실화를 바탕으로 인권 문제를 제기한 <청송으로 가는 길>(1990), 그리고 노부부의 삶을 다룬<애>(1999) 등 장르적 요소를 제거하고 정직하게 드라마로 승부할 때도 이두용 감독의 연출력은 빛난다. 특히 <장남>은 가족을 다룬 한국영화의 계보에 아직도 최고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두용 감독의 가장 위대한 영화적 유산은 <최후의 증인>일 것이다. 당대 충무로의 최대 역량이 결집되었던 이 영화는 누군가의 밀고로 혹독한 검열을 거쳐야 했고, 제작자와 감독은 검찰 조사를 받아야 했다. 영화는 한 시간 가까이 잘려나간 상태에서 상영되었고, 개봉 날 극장에 들어갔던 이두용 감독은 차마 끝까지 보지 못하고 나오고 말았다. 이후 한 세대 가까이 잊혀져있던 이 영화는 2006년 감독판으로 복원되면서 지금의 관객들과 다시 만났다. 전설이 현실이 되어 눈 앞에 등장하는 순간이었다. 이두용 감독은 2002년에 만든 60번째 영화 <아리랑>를 마지막으로 현업에서 물러났다. 대사 없이 초당 18프레임의 동작으로 진행되며 변사의 설명이 곁들여진 흑백 영화다. 이후 오랜 기간 동안 품어 왔던 <월광무> 프로젝트를, 남북 합작 방식으로 완성하기 위해 추진했지만 상황은 쉽지 않았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영화에 대해서는 애증이랄까…. 영화 때문에 겪은 갖가지 일들에 대해 후회는 안 하지만, 이젠 뭔가 내 직업에 대한 어떤 결과를 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생각을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오로지 영화고, 내 존재의 이유를 영화를 통해서 드러내야 한다는 것. 영화를 통해 삶을 정리해야 한다는 것. 영화로 내 삶의 큰 매듭을 짓고 싶다.” 부디 노장의 작은 소망이 이뤄지길 기원한다. [사진1] 조감독 시절의 이두용 감독. <속 미워도 다시 한 번>(1969) 현장이다. 오른쪽부터 주연을 맡은 신영균, 정소영 감독, 이두용 감독이다. 이두용 감독은 정소영 감독 연출부로 7편의 영화를 함께 했다. [사진2] 1970년 <잃어버린 면사포>로 데뷔한 이두용 감독은 한 동안 신파 멜로드라마를 만든다. <댁의 아빠도 이렇읍니까>(1971)는 두 번째 영화로 전작의 흥행세를 이었다. 배우 문희, 황정순과 스태프들 그리고 이두용 감독(맨 왼쪽)이 함께 했다. [사진3] 1974년 한 해 동안 이두용 감독은 <용호대련>을 시작으로 여섯 편의 태권도 영화를 내놓았고, 그 모든 영화에서 발차기의 주인공은 ‘차리 셸’ 한영철이었다. 사진은 <돌아온 외다리>(1974)의 한 장면. [사진4] 이두용 감독의 작품 세계는1977년 <초분>부터 변화한다. 이전까지 액션을 중심으로 한 장르 영화를 만들었다면, 이 영화부터 그는 미스터리 서사를 토대로 한 드라마의 세계로 접어들며 샤머니즘과 ‘한’의 테마를 다룬다. [사진5] 당대의 액션 스타 장동휘는 액션 전문 감독 이두용이 자신을 기용하지 않는 데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이두용 감독은 <경찰관>(19789)과 <선배>(1979)를 통해 장동휘의 진짜 매력을 드러냈다. [사진6] 이두용 감독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 받는 <최후의 증인>(1980). 하지만 개봉 당시 이 영화는 검열에 의해 사지절단 되었고, 2003년이 되어서야 감독판으로 대중과 늦은 재회를 할 수 있었다. 그리고2016년 4K로 디지털 복원되었다. [사진7] <피막>(1980)은 한국영화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되어야 할 것이다. 베니스영화제에 초청받은 이 영화는 감독 부문 특별상인 I.S.D.A.P를 수상했다. [사진8] <피막>(1980) 현장의 이두용 감독과 주연을 맡은 유지인. <생사의 고백>(1978)으로 이두용 감독과 인연을 맺은 유지인은 이 영화에서 강렬한 복수의 주인공이 된다. [사진9] <해결사>(1981)는 세트를 벗어나 리얼한 공간에서 펼쳐지는 도시 액션이다. 신우철과 황정리가 주인공을 맡았다. 숨겨진 걸작 중 하나이며, <돌아이>(1985)를 예견하게 하는 작품이다. [사진10]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는 최초로 칸영화제에 초청받은 한국영화였다.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상영되었고, 외국 평단의 큰 관심을 받았다.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 장면이다. 통역 옆의 왼쪽이 이두용 감독이다. [사진11]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1984)로 하와이영화제를 찾았을 때 해외 영화인들과 함께 한 이두용 감독. 왼쪽부터 홍콩의 임호 감독, 일본의 영화평론가 사토 다다오, 중국의 장이모우와 첸카이거 감독, 영국의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즈 그리고 이두용 감독. [사진12] <낮과 밤>(1984)은 말 그대로 5대양6대주를 누비는 영화였고, 해외 로케이션에 강한 이두용 감독만이 만들 수 있는 영화였다. 아프리카 현장에서 마사이족과 함께 촬영하는 모습. [사진13] 직접 시나리오를 쓴 <장남>(1984)은 이두용 감독의 자전적 영화이자, 한국 가족 영화의 걸작 중 한 편이다. 형제로 나오는 신성일, 김희라와 함께 현장에서 리허설을 하는 모습. [사진14] 1970년대 ‘발차기’에서 시작한 이두용 감독의 액션 연대기는 1980년대 이르러 <돌아이>(1985)에 도착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카 액션과 패션 감각을 선보였던 영화로, 전영록은 이두용 감독의 새로운 액션 히어로가 된다. [사진15] <뽕>(1985)에서 ‘안협네’ 역을 맡은 이미숙. 나도향의 단편을 각색한 윤삼육의 시나리오는 여러 제작사를 돌아다니다가 이두용 감독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만들어져 큰 흥행을 기록했다. 아직도 꾸준히 언급되는 ‘컬트’ 영화다. [사진16] 자신의 제작사 ‘두성영화’를 차린 이두용 감독은 창립 작품으로 <내시>(1986)를 만든다. 그의 최고 흥행작으로, 궁중에서 벌어지는 음모와 반란을 그린다. 당국의 정치적 해석으로 심의가 나지 않아 개봉에 애를 먹기도 했다. [사진17] 한국영화 감독으로서는 처음으로 할리우드에 초청 받아 연출한 <침묵의 암살자>(1988) 현장. 미국에선 <Silent Assassins>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었다. 교포 배우인 정준(준 청)과 필립 리가 출연한다. [사진18] 밑바닥 삶을 사는 인간을 향한 리얼한 시선. 걸레 스님 중광을 캐스팅 한<청송으로 가는 길>(1990)은 이두용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매우 독특한 지점이다. 모스크바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사진19] IMF 시기, 두성영화의 마지막 작품으로 만든<애>(1999). 남궁원과 이경희가 노부부로 등장한다. <장남>에 이은 또 하나의 가족 영화로, 제대로 된 개봉을 거치지 못하고 묻혀 버린 수작이다. [사진20] 2002년에 만든 <아리랑> 현장의 이두용 감독. 나운규 시절의 영화 미학, 즉 흑백과 무성의 스타일로 만들었다. 노장의 녹슬지 않은 솜씨가 돋보인다. 이두용 감독의 60번째 영화다. * 이 글은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과 부산영화제가 공동 제작한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 도서 『장르의 해결사 : 이두용』을 토대로 작성되었다.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1)를 사실 경박하게 ‘삐용삐용’ B무비로 언급하는 것은 무척 난감한 일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실제로 보지 않은, 하지만 영화제목만은 다 알고 있을 사람들은 대부분 B스럽게 알고 있을 것이다. 그처럼 한국영화계에서는 뜻하지 않게 B의 운명을 타고난 영화들이 있다. 대부분 영화제목 때문이다. 입으로 울어야 할 앵무새가 몸으로 울었다고 하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그 앵무새가 영화 속에서 언어장애인인 정윤희를 비유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처럼 슬픈 제목이 없다. 대사로 자신의 슬픈 내면을 드러내야 할 정윤희 가 그저 하염없이 말 못하고 방황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혹자는 외모만 탁월하고 연기가 부족한 정윤희를 위해 그런 앵무새 설정을 했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정윤희는 앞서 만들어진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와 더불어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두 편으로 2회 연속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뭐랄까, 한국영화사를 통틀어 단 한 명의 ‘여신’을 꼽으라면 단연코 정윤희다. 정윤희 일단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는 도입부부터가 B스럽다. 알다시피 정진우 감독은 한국영화사에서 < 율곡과 신사임당 >(1978)을 통해 최초로 동시녹음을 시도한 선구자다. 그래서 매번 영화가 시작할 때마다 당당히 그 사실을 공표했는데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또한 ‘제6회 동시녹음 작품’이라는 대문짝만한 문구를 선보이며 시작한다. 자랑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카메라 자랑으로 이어진다. ‘TODD-AO 카메라 제1호 작품’이라는 문구도 뜨는 것. 더구나 뒷배경으로는 본 영화와 전혀 상관없이 전장의 폭발 장면이 보이고, 손현채 촬영기사가 촬영부 퍼스트로 보이는 인물과 함께 한 바퀴 뱅그르르 돈다. 왠지 당시 활동했던 분들은 ‘촬영감독’이 아니라 ‘촬영기사’라 불러야 그 아우라가 살아나는 느낌인데, 아무튼 화려한 필모그래피에 비해 한국영상자료원 데이터베이스에 증명사진 하나 없는 손현채 촬영기사의 얼굴을 그렇게 확인할 수 있다. 그는 < 초분 >(1977), < 피막 >(1980), < 뽕 >(1985), < 내시 >(1986) 등 이두용 감독과의 작업으로 유명하다. 기술의 과시 영화는 홀아비 최영감( 황해 )의 회한 가득한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벌판에서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를 입고 내려오는 문( 최윤석 )과 수련( 정윤희 )의 환상을 본다. 그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자신의 혈육이 아닌 문과 수련을 데려다 키웠는데, 바깥에는 친남매로 알려진 그들이 사랑에 빠지게 됐고 최영감은 내내 그것을 막으려했다. 어떻게 보면 요즘 TV 막장드라마(?)의 흔한 설정으로 느껴지는데, 어쨌건 그 무엇도 그들의 사랑을 막을 수 없었다. “사랑 앞에서 무엇을 감추랴? 대자연도 숨죽인 강렬한 육체언어!”라는 포스터 카피가 인상적이다. 결국 최영감은 “제발 인간 좀 되라”며 문을 서울로 보내버리는데,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괜히 지나가는 행인들과 어깨를 부닥치고 멀쩡한 전봇대를 부여잡으며 서울생활에 만족하지 못하던 그는 결국 다시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렇게 두 사람이 모처럼 다시 만나는 장면이 압권이다. 저 멀리 쓸쓸한 표정으로 있는 수련을 발견하자마자, 문은 마치 흐르는 강물을 거꾸로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물속으로 뛰어든다. 당시로선 보기 드문 수중 정사신이 그렇게 탄생했다. 이 장면을 위해 오대산 금강연에서 산소통을 메고 촬영에 임했던 손현채 촬영기사는 15번에 걸친 NG 끝에 호흡기를 놓쳐 심폐소생술로 살아났다 한다(그런 그에게 대종상은 촬영상을 안겨주었다).그렇게 그들은 뭍으로 나와서도 대충 나뭇잎으로 몸을 가리고는 서로의 몸을 탐한다. 뭍으로 나온 그들 이후 정윤희 의 팬으로서 가장 아쉬운 대목은, 하지만 영화적으로는 더욱 드라마를 풍성하게 해주는 설정은 바로 어느 순간부터 문을 쫓아다니게 되는 숙( 김형자 )의 등장이다. 사실상 영화 속 대사의 절반 이상을 책임진 숙은 시도 때도 없이 문에게 들이댄다. 그러면서 자신의 얘기를 구구절절 들려준다. 어려서 살던 섬을 떠난 그녀는 부푼 꿈을 안고 뭍으로 나왔지만 결국 건달과 엮여 인생이 꼬이게 됐다. “저 하늘에 구름이 왜 이리 많을까요”부터 “인간은 고무공과 같을지 몰라. 이리저리 튕겨나가고 싶으니까”라며 거의 시적인 대사들을 남발하기 시작한다. 자신에게는 관심도 없이 걷고 있는 문을 향해 “지금 우리는 어디로 가는 건가요? 천당인가요? 지옥인가요? 아니면 좀 쉬어서 가요”라고 말하는 그 모습이 처음에는 지겹다가도 어느덧 적응하게 되는데, 김형자 역시 이 작품으로 대종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어쩌면 이 영화의 주제도 떠다니는 삶에 대한 회한을 담은 숙의 대사다. “저 기차는 어디로 가는 기차일까요. 기차를 오래 타면 엉뎅이가 아파요. 그래서 마음 내키는 대로 걷다가 다시 타고 내리고 반복하죠. 그러다 해가 저물고 다음날이면 트렁크를 들어다주는 말없는 사내를 만나게 되요. 그게 인생인 거예요.” 그런 숙이 기어이 문을 성(性)적으로 굴복시킨 다음, 자신의 기둥서방과 문이 뒤엉켜 싸우는 장면과 숙이 화장을 고치는 모습을 교차 편집시키는 대목은 압권이다. 마치 ‘에라이, 남자들이 원래 그렇지 뭐’ 라는 생각으로 지켜보던 숙은 “됐어요, 이제 그만!”하며 불쑥 그 싸움을 말린다. 싸우는 남자들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다. 괜히 큰 사고라도 나면 자기만 귀찮아지니까. 그리고는 문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바이바이” 떠난다. “여기가 우리들의 종착역인가 봐요. 어차피 내릴 곳이 정해져 있지 않다면 첫 번째 정거장에서 내리는 게 나아요. 어쨌건 당신은 내 가슴이 여전히 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 멋진 남자에요. 세월이 흐르면 별난 추억이 될 거에요. 그럼 안녕~.” 실로 멋진 퇴장이다. 그렇게 <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는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를 보고 그 속편의 느낌으로 정윤희 에게 하트를 뿅뿅 발사하며 본 영화였다가, 뜻하지 않게 김형자 를 발견하게 된 영화였다. 김형자 , 김형자, .... 김형자 끝으로 어린 시절, 이 영화를 도저히 볼 수 없는 나이로 이 영화를 보면서 충격 받았던 두 개의 장면을 얘기하며 마무리할까 한다. 알부자로 소문난 최영감이 동료 철도노동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던 중, 최영감을 흠모하고 있던 술집 여주인이 “과부 사정은 홀애비가 안다”며 느닷없이 최영감의 바지를 풀어 손을 쑥 집어넣는다. “과부 사정은...” 운운하는 대사야 워낙 익숙했지만 사람들이 가득한 술집에서, 그러니까 파티션도 쳐져 있지 않은 술집에서 직접 바지를 풀어버리는 그 여주인의 기개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또 하나는 최영감이 귀갓길에 사온 핑크빛 ‘신식 고쟁이’를 정윤희 에게 선물하고 바로 입어보는 장면이다. 그 장면을 전후한 이야기의 진행을 전혀 떠올리지 못할 만큼 강렬했다. 그러니까 정윤희가 초반에 나뭇잎으로 몸을 두를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란제리가 없었기 때문인 것. 게다가 아무리 딸이라도 피 하나 섞이지 않은 딸이 그 차림새로 아버지의 등도 밀어주고 비누칠도 해주니, 그 장면이 줬던 묘한 긴장감은 그야말로 살벌했다. 그야말로 어린 나 또한 그 장면에서 몸으로 울고 말았다. 정윤희 황해 최윤석 김형자 감독: 정진우 각본: 김강윤 , 김성화 개봉극장: 피카디리(서울) 관람인원: 169,38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