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혼
- 감독
- 양종해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강선영, 송범
<여명> 이후 ‘과부’ 전문 배우로 전환 이민자(李民子)는 이향이나 김동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배우가 되었다. 일본 도호(東寶)영화사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안진상(安鎭相)이 처음 메가폰을 잡은 <여명>(1948)을 통해서였다. 해방 후 <안중근사기(史記)>(이구영, 1946)로 한국영화사의 서막을 연 후 34편째 제작된 작품이다. 뇌물을 받고 밀수를 묵인하려던 경찰관(이금룡 분)이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나머지 이 사실을 자백, 밀수범을 일망타진케 한다는 밀수 근절용 계몽영화로, 이민자는 여기에서 어촌의 처녀 역을 맡았다. ‘이민자의 섬세한 표정은 앞날이 촉망된다’ (정용배, 「영화평 ‘여명(黎明)을 보고’」, 『자유신문』, 1949.3.25) 는 고무적인 평을 들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인천의 건설영화사 대표 최철(崔鐵)은 뒷날 배우가 된 최불암의 아버지이다. [사진] 데뷔작 <여명>에서의 이민자 이민자는 2년 후 신상옥의 감독 데뷔작 <악야>(1952)에 여주인공 양공주 역으로 기용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작이 무산될 뻔했으나 피난지 대구에서 촬영돼 부산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환도 후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1953)을 출발점으로 <미망인>(박남옥, 1955)을 비롯한 <마의태자>(전창근, 1956), <마인>(한형모, 1957), <유혹의 강>(유두연, 1958), <생명>(이강천, 1958), <어머니의 길>(안현철,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행복의 조건>(이봉래, 1959) 등과 <과부>(조긍하, 1960), <내일의 태양>(오영근, 1962),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여인천하>(윤봉춘, 1962), <피리 불던 모녀 고개>(강찬우, 1962),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모녀 기타>(강찬우, 1964), <갯마을>(김수용, 1965), <산호의 문>(엄심호, 1966), <슬픔은 파도를 넘어>(김효천, 1968) 등 모두 140여 편에 출연하게 된다. 절반 이상이 주연이었다. 이 가운데 신경균 감독의 <화심(花心)>(1958), <애모>(1959), <유정무정>(1959), <회정>(1959), <그대 목소리>(1960), <울지 않으련다>(1960), <정조>(1961), <여자의 일생>(1962), <형부와 새 언니>(1964) 등 9편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단골배우가 되었다. [사진] <내가 낳은 검둥이>에 출연한 이민자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에서는 사회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쟁미망인의 삶을, <유혹의 강>에서는 납북된 남편을 잊지 못해 수절하는 여자의 고행을, <내가 낳은 검둥이>에서는 혼혈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차별의 비애를, <마인>에서는 복수를 위해 위장 결혼한 여성의 마성을, <모녀 기타>에서는 모진 삶의 시름을 노래로 사르는 극단 가수의 사연을, <아낌없이 주련다>에서는 연하의 청년에게 모성애적 사랑을 쏟는 30대 미망인의 열정을,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초혼에 과부가 된 큰딸(용숙)의 빗나간 배금주의적 면모를, <갯마을>에서는 풍랑 속에 주체하지 못하는 과부 해녀의 애욕을, 그리고 <산호의 문>에서는 가정교사와 도색행각에 빠진 과부의 회한을 특유의 농염한 몸매와 감정선으로 표출해냈다. 그 대부분이 박복한 미망인, 과부 캐릭터였다. [사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연출작 <미망인>에서의 이민자, 오른쪽은 이택균 이와 같은 그녀의 욕망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배역이 바로 <아낌없이 주련다>의 댄스홀 마담 우정원이였다. “어마! 사내 냄새.” 파도가 밀려오는 송도 바닷가에서 막냇동생과 같은 11세 연하의 지배인 하지송(신성일 분)의 품에 안기며 놀란 듯이 쏟아낸 우 마담의 대사는 육감적인 그녀의 개성을 함축한 것으로, 제6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의 트로피를 쥐게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사진] 이민자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현한 <아낌없이 주련다>의 한 장면 학업마저 포기하고 들어선 배우의 길 이민자는 1929년 4월10일 서울에서 한의사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이용량(李容瑯)이다. 다음은 그녀가 언급한 과거 회상기. “우리 집은 11대 선조가 충무공 할아버지였다는 사실 때문에 가정적으로 항상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편이었다. 그러기에 귀여움을 받는 초등학교 때도 나는 쾌활하고 성미 급한 버릇 때문에 항상 어른들의 꾸중을 많이 들었다. 물론 내적으론 무척 귀여워했겠지만 외형적으로는 항상 근엄한 아버지였다. 내가 서울에서 방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학여중(경성 무학여자고등보통학교 : 필자)을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밤 친구들과 같이 한복으로 옷을 바꿔 입고 부모님 몰래 극장에서 현대극장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 마음속으로 “저렇게 화려한 배우가 되어 보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현대극장을 찾아가서 책임자를 만났는데 의외로 반가워하면서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는 소양이 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의 길을 선택한데는, 선천적으로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민자. 「나의 데뷔 시절을 회상한다」 , 『스크린』, 1964년 9월호) 이용량이 학업을 중단하고 찾아간 곳이 현대극장 연구부였다. 1944년이었다. 현대극장은 1941년 유치진이 함세덕과 함께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며 설립한 극단이다. 이민자라는 예명이 알려질 무렵 영화 <태양의 아이들>(최인규, 1944)에 출연하게 된다. 종을 치는 학교급사로 두세 컷에 불과한 단역이었다. 16세 때였다. 이 영화는 섬마을 초등학교 여교사(김신재)가 학생들에게 내선일체 교육을 시켜 군 입대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제작(1944년 11월4일 명치좌 상영)된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해방 이듬해, 서울 동양극장에서 조선악극단의 뮤지컬 <카츄샤>의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의 음악 지휘를 맡은 김형래는 김진규와 숙질간이었다. 그는 조카를 단역으로 출연시키고 이민자를 발탁했다. 그녀는 잇따라 같은 해 6월 현대극장과 아랑이 통합해 만든 낙랑극회의 창단공연 <산적>(함세덕 작, 연출)에 황철, 이해랑 등과 함께 출연하고 2개월 후 <산홍(山紅)아, 너만 가고>에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눈이 크고 살결이 고운 이민자는 이 무렵 7살 연상인 김진규와 결혼하고 첫 아들을 낳았다. 이 같은 행복감 속에서 영화 <여명>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배우나 다름없던 남편(김진규)이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로 부각돼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녀는 두 아들을 둔 채 이혼하게 되는 시련을 겪는다. 1959년이었다. 30대 중반에 이른 남편이 영화 <옥단춘>(1955, 권영순)으로 배우의 길에 나선 열아홉 살 처녀 김보애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에바 가드너’로 불렸던 고혹적인 관능미의 소유자 이민자는 1968년 은퇴 후, 5년 만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룸살롱을 경영하며 재일 한국인과 재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했으나 이혼 끝에 198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신사의 봄은 역설적이게도 벚꽃이 만발한 완연한 봄기운으로 아름답기까지 하다. 거기에 고령의 어머님을 휠체어에 모시고 한 여인이 천천히 들어선다. 바람에 떨어지는 벚꽃 잎이 술잔 위에 떨어진다. 장면은 어느새 그 잔을 들고 둘러앉아 노래를 부르며 목숨을 거는 조종사들의 복종의식으로 바뀐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는 군가 ‘동기의 사쿠라’로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하는 특공대의 생을 벚꽃으로 비유한 노래다. 1.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같이 훈련소(군사 학교)의 정원에 핀 꽃. 그렇다면 지는 것은 각오하자. 멋지게 지자 나라를 위해. 2.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같이 훈련소의 정원에 핀 꽃. 혈육 나눈 사이는 아니지만 왠지 마음이 맞았지. 3.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같이 항공대의 정원에 핀 꽃. 바라봅니다 노을 진 남쪽 하늘을. 아직도 돌아오지 않는 1 번 비행기를 기다리며... 4.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같이 항공대의 정원에 핀 꽃. 그만큼 맹세한 그 날을 기다리지 못하고 어째서 죽어 떨어져야 하는지 5. 너와 나는 동기의 사쿠라. 그처럼 흩날릴지라도. 꽃의 도시, 야스쿠니 신사의 봄날. 그 가지에 피어 다시 만나자. 야스쿠니 신사는 1869년(메이지 2년), 군 희생자의 넋을 달래기 위해 설립한 초혼사가 그 전신으로 일본 천황을 위해 싸우다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신으로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적 공간이다. 한일 간 역사인식은 참으로도 그 출발부터가 다르다. 일제강점기의 강압적인 통치와 수탈에 이어서 2차 대전(태평양전쟁) 당시 일본군에 의해 운영된 위안부가 그렇고 강제징용이 그랬다. 김준기 감독은 위안부 문제를 다룬 애니메이션 <소녀이야기>를 제작 국내외적으로 피해여성의 육성 녹취록을 바탕으로 실상을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두 번째 역사고발 애니메이션 <환> 은 실화에 픽션을 더해 보다 예술적으로 표현하고자 노력한 작품이다. 천황을 위한 죽음을 통해 신사에 ‘가미’ 즉, 신(神)으로 모셔진다는 사상은 일본 전통신앙에 국수주의와 군국주의 지배 사상이 결합하여 왜곡된다. 보잘것없는 민초가 위대한 전쟁의 영웅들과 함께 나란히 묻혀 숭배받는다는 것은 현생을 뛰어넘는 영생불사 신의 환생인 것이다. 가미카제 [kamikaze, 神風(신풍)]는 신이 되는 의식으로 기능하게 되고 여기서 개인의 인간성과 주체성은 말살되어 비참하게 산화하게 된다. 실제로 가미카제용 비행기는 착륙장치와 탈출장치가 없이 폭탄만 가득 싣고 목표지점에 겨우 갈만큼의 기름만 주고 나는 방법만 익힌 어린 조종사들이 강제로 태워졌다는 증언 속에 징용조선인이 육탄방어와 공격에 대부분 희생되었을 것으로 본다. 주인공 또한 당시 가족을 지키고자 강제로 조종석에 앉혀져 다음 생에서나마 조국의 가족과 함께하고자 하였을 것이리라... 야스쿠니신사와 일본항모 갑판 위에서 치러지는 출격 전 복종의식은 그들에게 개인에서 신이 되기 위한 경계를 넘는 숭고한 의식이지만 조선인으로 참전한 주인공에겐 망국의 식민지 노예나 다름없는 처지에 참담함은 이루 말로 표현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의 제국주의 전쟁에 어쩔 수 없이 끌려가 희생당한 참전 조선인들의 넋이 야스쿠니 신사에 봉인된 체 70여 년이 넘게 매일 출격하는 악몽에서 그들을 자유롭게 해야 한다고 이 작품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애타게 호소하고 있다. 그네들이 애국심과 전우애로 목숨을 바쳐 사쿠라 가지에 다시 피어나길 염원하였듯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되어 오늘날도 끝나지 않고 계속 반복되는 순환의 전쟁터에서 산화한 징용 조선인의 넋이라도 구해오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익히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사실적인 이미지로 우리 앞에 강렬히 재현하되 감성적인 터치를 하고자 애쓴 스토리 설정은 마지막에 도달해 주인공의 넋마저 욱일기의 방어벽에 막혀 어머니와 부인과 만나지 못하며 더욱 간절하게 한다. 주인공에 좀 더 감정이입이 되기 위한 설명과 이야기가 부족한 점을 빼고는 민감한 역사적 소재를 예술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으며 단편이지만 스케일적인 면에서나 영상적 완성도 면에서 매우 훌륭한 작품이라고 본다. 이미 이탈리아에서 개최된 제17회 퓨처필름영화제에서 관객상을 받는 등 해외에서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안타까운 것은 단편이라 영화제나 특별 상영회에서나 만나볼 수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