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왕
- 감독
- 박찬홍
- 제작년도
- 2007
- 출연
- 엄태웅, 신민아, 주지훈, 정동환, 최덕문, 윤혜경, 김영재, 한정수, 오용, 조재완, 주진모, 박그리나, 김영준, 이보희, 이은, 김규철, 임승대, 박광정, 유연수, 이도련
2017년 대한민국 사회에서 ‘좋아하는 일을 위해서’라고 말하는 순간은 위험하다. 순진하다고 여겨지는 그 말을 내뱉는 순간, 경제적인 위협은 물론이고 사회적인 비난까지도 분연히 개인에게 다가오기 때문이다. 전고운 감독의 장편 데뷔작 < 소공녀 >는 그 위험한 ‘지금 여기 개인’의 편을 드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주인공 미소를 바라보는 시선은 ‘우정’에 가깝다. 묵묵히 스스로의 길을 걷는 친구의 등을 토닥거리듯이 연출자는 스스로가 만든 캐릭터의 옆과 뒤를 든든히 떠받치고 간다. 프랜시스 호지슨 버넷의 아동 소설 <소공녀>는 부유했던 한 소녀의 극적인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 사라는 부유한 집안의 ‘소공녀’에서 아버지의 죽음으로 갑작스레 하녀로 전락하지만 결말에는 다시 부자로 돌아간다. 그러나 전고운 의 영화 < 소공녀 >의 주인공 미소는 부자였던 적이 없다. 일당 사만 오천 원에 가사도우미 일을 하는 미소의 유일한 행복은 하루의 일을 마무리한 후 마시는 위스키 한 잔과 손가락에 반지처럼 끼워진 담배뿐이다. 난방이 전혀 되지 않는 작은 방에서의 연애는 시리도록 슬프고 갑자기 오른 담배 값은 미소의 삶에 절체절명의 위기가 된다. 좋아하는 것을 위해서 집을 포기한 그녀는 오래 전 친구들의 집을 찾아다니기 시작한다. 집을 짐처럼 메고 떠돌이로 살지만 그녀는 여전히 일을 하고 위스키를 마시고 담배를 태운다. 영화 < 소공녀 >의 영어 제목은 <Microhabitat>다. ‘미생물, 곤충 등의 서식에 적합한 곳’이라는 뜻이다. 눈앞의 현실을 긍정적인 환상으로 극복한 소설 <소공녀>의 사라와는 달리 영화 <소공녀>의 미소는 거대한 사회 속 개인으로서 하루를 버티어 기어코 앞으로 나아가는 존재다. 성인 동화의 외피를 입고 있는 <소공녀>가 놀라운 유머감각, 따뜻하게 인물을 감싸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때때로 저릿한 추위처럼 보는 이를 놀래게 하는 건 지금 이 사회의 개인들의 존재를 명징하게 비추고 있어서다. 무언가를 포기해야 무언가를 가질 수 있다는 첨언들과 왜 궤도에 오르지 않고 비틀거리냐며 부유하는 충고들은 각자의 삶을 택해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무례한 화살이 된다. 기원을 알 수 없는 이 사회적 합의에서 조금이라도 비켜선 이들이 마치 과녁처럼 누군가의 대상이 되는 사회, <소공녀>의 인물들은 그 과녁에 함께 서서 서로를 보듬는다. 집을 찾아 떠도는 사람, 미래를 위해 떠나는 사람, 과거를 품고 잠드는 사람, 빚더미에 앉아 눈물 흘리는 사람 등 주변 어디에나 있는 소시민들의 퍼즐을 맞춰 나가듯 영화 <소공녀>는 세심하게 삶의 조각들을 모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전사를 나열하지 않으면서도 캐릭터의 지난 순간들을 쌓아 올리는 스토리텔링의 마법을 보여준다. < 1999, 면회 > < 족구왕 > < 범죄의 여왕 >을 제작한 광화문시네마의 신작 < 소공녀 >는 무구한 가치와 무해한 꿈의 힘을 믿는 제작사의 인장이 또렷한 영화다. 또한 < 마담 뺑덕 > < 하이힐 > 등의 작품을 통해 개성과 연기력을 선보였던 배우 이솜 의 근사한 대표작인 동시에 안재홍 , 최덕문 , 김재화 , 강진아 , 이성욱 , 김국희 등 모든 배우들의 이름을 찾게 되는 훌륭한 앙상블의 영화이기도 하다. 마치 술 좋아하고 사람 잘 챙기던 친구가 우편으로 보내온 크리스마스 카드 같은 영화인 < 소공녀 >는 시리도록 추운 겨울이 올 때마다 생각날 영화다. 담배 한 개비에, 술 한 잔에, 반가운 이의 안부에 눈 녹듯 얼었던 마음이 녹는 것처럼 앞으로의 겨울마다 이 영화의 순간들이 그런 위로가 되어줄 것 같다.
신준 감독의 장편 데뷔작 < 용순 >을 보았다. 영화의 주인공인 용순( 이수경 )이 영화 내내 짓는 찌푸린 표정과 그 표정의 성격에 대해 잠시 생각해보고 싶어졌다. < 용순 >은 기본적으로 성장 영화의 외양을 갖추고 있다. 고등학생인 용순은 여름방학 동안 체육 교사( 박근록 )와의 연애와 이별, 새어머니(얀츠카)와의 갈등 등을 겪은 뒤 사람과 세상을 예전과는 조금 다른 눈으로 보게 된다. 관객은 이 변화한 모습을 본 후 용순이 철이 들었다며 작은 감동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할수록 < 용순 >의 방점은 용순의 성장에 찍혀있지 않은 것 같다. 내 생각에 이 영화는 용순이 성숙해지는 과정보다는 어른과 불화하는 용순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더 공을 들인다. 이때 먼저 이야기하고 싶은 건 영화 속 용순의 캐릭터다. 이 영화에서 당황스러운 점 중 하나는 용순이 그리 ‘좋은 아이’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전형적인 모범생 캐릭터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용순은 정말 사람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인물처럼 보인다. 그녀는 아버지를 항상 짜증으로 대하며, 새어머니에게는 아무 이유 없이 증오를 보낸다. 특히 몽골 출신의 새어머니에게 피부색과 돈 얘기를 꺼내며 신경질을 내는 장면은 용순이 인격적으로 그리 성숙하지 않다는 걸 단적으로 보여준다. 용순은 다른 어른들에게도 날을 세운다. 비공식 연인 관계인 체육 교사에게 짜증과 화를 내는 건 어느 정도 이해하더라도 체육 교사의 약혼자인 영어 교사( 최여진 )에게 보이는 공격성은 일반적인 상식을 넘어선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영어 교사와 용순이 서로 머리를 뜯으며 싸울 때는 영어 교사의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정도였다. 용순은 자기주장이 강한 정도를 넘어 자신의 기분에 따라 타인을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는, 성장이 필요한 인물로 보인다. 하지만 용순을 비난하기에 앞서 꼭 고려해야 하는 건 < 용순 >의 어른들 역시 용순에게 좋은 모범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용순의 삐딱한 성격과 과도한 공격성의 원인으로 어른들의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꼽을 수도 있다. 이를테면 용순의 어머니( 이은우 )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 용순을 두고 떠났으며, 반대로 아버지( 최덕문 )는 아내를 붙잡아 두기 위해 용순을 일정 정도 이용했다. 그 뒤로도 아버지는 용순에게 자신의 솔직한 속마음을 얘기하지 않았고 용순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지도 않았다. 그런가 하면 체육 교사는 용순이 임신했다는 얘기를 듣고도 우유부단한 태도를 취하며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고, 영어 교사는 용순의 사연을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는 다른 어른들과 함께 그 문제를 대충 덮어두려고만 했다. 즉 용순이 살고 있는 세계의 어른들은 용순의 성장을 돕기는커녕 그녀의 성격을 더욱 모나게 만드는 데 일조했다. 용순은 어른들의 애정과 보살핌이 필요했지만 짐짓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기적인 어른들에 의해 반쯤 버려져 있었던 것이다(그런 면에서 용순 대신 영어 교사와 몸싸움을 벌이며 용순의 편에 서준 새어머니의 행동이 더욱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이런 맥락에서 다시 생각하면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불편하게 만들었던 용순의 찡그린 표정이 조금은 새롭게 눈에 들어온다. 만약 용순의 저 표정이 성숙한 어른인 척하지만 실은 이기적인 어른들에게 받을 상처를 미리 차단하는 보호막이라 생각하면 어떨까. 용순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어른들의 위선과 무관심에 전혀 익숙해지지 않은 채, 매번 새롭게, 진심을 다해 자신이 지금 얼마나 화가 나 있는지 표현해왔다. 비록 그 과정에서 미숙한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나는 그것만을 두고 용순을 쉽게 비난할 마음이 들지는 않는다. 오히려 용순이 여름방학이 끝난 후에도 ‘적절한’ 순간마다 그 찡그린 표정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