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귀타귀
- 감독
- 최동준
강근식 구술을 통해 보는 1970년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 주지하다시피 1970년대 한국영화에서 가장 주목받고 연구가 많이 이루어진 분야는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과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등으로 대표되는 영상시대의 영화들일 것이다. 이들의 영화는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영화들로 1970년대 한국의 정치‧사회적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보여줄 뿐만 아니라 스타일의 측면에서도 새로운 인력의 구성을 통해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구별되는 다양한 형식을 시도하며 시대의 흐름과 변화를 보여주었다. (그림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포스터 (그림2)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포스터 특히 이 영화들은 1970년대 각광받기 시작한 다양한 대중문화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1960년대와는 달라진 새로운 청년세대의 등장을 강조하였다.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세대의 등장은 매 시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50년대에는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서 이민이 연기한 춘호가 전쟁 직후 미국문화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은 ‘아프레게르’ 세대를 보여주었고, 1960년대에는 <맨발의 청춘>(김기덕, 1964)에서 신성일과 엄앵란이 연기한 두수와 요안나가 4.19 이후 새롭게 등장한 방황하는 ‘청춘’ 세대를 보여주었다. 이 영화들은 흥행 면에서 큰 성공을 거두며 한국영화산업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별들의 고향>에서 안인숙이 분한 경아와 <바보들의 행진>에서 신인 신분으로 파격적으로 기용된 윤문섭, 하재영과 아역배우 출신의 이영옥이 연기한 병태, 영철, 영자는 이들 세대와는 또 다르게 구별되는 새로운 세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바로 세계적인 청년문화의 중심에 놓여있던 히피 세대의 등장이었다.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의 음악을 담당했던 강근식이 “히피 감성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했고, 서양의 그것과는 동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했다”고 해도 세계적인 유행은 다양한 대중문화의 흐름을 타고 한국의 콘텐츠에 녹아들었다. (그림3)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의 문오와 경아 (그림4)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의 병태와 영자 다양한 분야에서 새롭게 유입된 인력들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이 영화들의 이야기, 연출의 스타일 그리고 음악에서 대중문화를 향한 젊은이들의 열망에 부응하는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강근식은 이와 같은 한국영화의 새로운 흐름에 합류한 대표적인 음악인이었다. 그는 일본문화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영화와 미국음악에 오롯이 영향을 받은 전후 세대를 대표하는 대중문화예술인으로 볼 수 있다. 특히 재즈와 사이키델릭 사운드에 영향을 받은 음악적 취향은 이들 영화를 동시대 세계적으로 유행한 영화와 음악 등의 대중문화 콘텐츠와 연관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지점을 만들어놓았다. 이렇듯 강근식을 비롯하여 당대 청년 세대에게 호응을 받은 소설가 최인호, 음악인 이장희, 송창식 등의 대중문화예술인들이 이장호, 하길종 감독 등과 협업으로 만들어낸 이 영화들은 특정 개인에 의한 예술작품이 아니라 1970년대 대중의 열망을 가장 적확한 방식으로 보여준 대중문화의 결과물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강근식의 프로필은 시대를 읽어내는 데 매우 유용하고도 흥미로운 지점을 제시한다. 청소년 시절, 역사의 큰 분기점인 4.19와 5.16을 겪고, 1960년대 중후반에는 미국음악에 심취해 학내 밴드로 음악활동을 시작하고, 1970년대에는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한 음악살롱에서 프로 음악인으로 성장하며 상업영화와 상업광고음악계까지 진출한 그의 음악 프로필은 1960~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음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의 흐름까지 살펴보는 데 일조한다. 특히 1970년대 TV산업의 확장과 성장으로 동반 성장한 광고산업과 이에 따른 하위문화의 번성이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에 직‧간접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가늠해보는 데 유용한 구술이기도 하다. 강근식의 구술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1970년대 대중문화의 또 한 가지 중요한 특징은 ‘매체의 넘나듦’이다. 이 시기 영화와 TV 그리고 공연이 서로 영향을 받으면서 기존의 무대와 영화의 영향관계 내에서 활동한 기성세대와는 또 다른, 새로운 유형의 멀티 엔터테이너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으로 소설가 최인호의 영화작업이 그러하며 (최인호는 자신의 원작이나 각색 영화에 항상 카메오 출연을 하기도 했으며 <걷지말고 뛰어라>(1976)를 직접 감독하기도 했다), 강근식을 비롯한 이장희, 송창식 등의 음악인들 또한 본업인 음악작업 외에도 영화음악과 광고음악을 넘나들면서 음악적 영향력을 확장했다. 이것은 영화사적으로는 TV 산업의 성장으로 기존의 한국영화산업이 급격히 쇠퇴한 단점으로 볼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매체의 경계에 영향을 받지 않는 새로운 세대들이 등장함으로써 매체 간의 영향이 다각화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준다. 따라서 밴드음악과 영화음악 그리고 광고음악이 모두 포괄되어 있는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의 대중문화를 이해하는 데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다. (그림5)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최인호 출연 장면(아래 왼쪽) ‘평생 음악인’ 강근식의 음악이야기 이 부분은 『영화천국』Vol. 60에 실린 「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청춘의 음악 만들어낸 영원한 청년 음악인」을 수정·보완했다. 강근식은 1946년 평양 출생으로 한국전쟁 때 월남해 탄광촌인 강원도 상동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오락거리라고는 아무 것도 없던 환경에서 기타를 치던 형님들과 나무에 그린 피아노 건반으로 연습하는 누이를 보며 음악을 배웠다. 가수 활동을 하던 삼촌 손인호는 때때로 악극단 활동에 얽힌 무대 이야기를 해주었다. 변변한 악기 하나, 제대로 된 음반 한 장 없었지만 어린 시절부터 음악에 둘러싸여 생활한 덕에 그는 평생 음악을 업으로 하는 예술가가 되었다. (그림6) 홍대강당에서 이루어진 5인조 밴드 홍익캄보의 첫 공연. 왼쪽에서 두번째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그림7) 밴드 홍익깜보 시절 신입생 환영회. 가운데 기타연주자가 강근식 홍익대학교 도예과 재학 시절 학내 밴드인 홍익 캄보의 기타리스트로 음악 활동을 시작한 강근식은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에서 수상하며 본격적인 음악인의 길로 들어섰다. 수상 후에는 당시 가장 인기 있던 음악프로그램 <TBC 쇼쇼쇼>에도 출연할 만큼 유명인사가 되었다. 이후 1970년대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다양한 음악의 산실이라 부를 수 있는 오리엔트프로덕션 소속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이장희와 동방의 빛>, <조동진>, <현경과 영애>를 비롯한 다수의 음반 작업에 참여했다. <이장희와 동방의 빛>의 기타리스트로 이화여자대학교 강당에서 공연을 할 때는 디자이너 앙드레김이 직접 무대의상을 제작해줄 정도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그림8) TBC 전국 남녀 대학생 재즈페스티벌 공연 사진. 2회 연속 그랑프리를 수상하였다. 당시에는 무대 모니터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아 밴드 공연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림9) <쇼쇼쇼> 출연 사진. 왼쪽부터 이장희, 진행자 곽규석, 강근식 (그림10) <동방의 빛> 공연 사진. 앙드레 김 선생이 맞춰준 옷을 맞춰입고 공연하였다. 이후 강근식은 1970년대 변화하는 대중문화의 다양한 영역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새롭게 등장한 음악인으로서, 새롭게 등장한 영화인들 그리고 광고인들과 협업하게 된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과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음악과 영화에서 청년문화를 대표하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화천공사의 만남으로 탄생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은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적인 면에서도 신선한 충격과 파장을 끼쳤다. 당시로서는 흔치 않던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은 이 영화들이 현재까지 회자되는 데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림11)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OST (그림12) <바보들의 행진> OST 영화음악과 더불어 그가 작업한 광고음악은 음악인 강근식을 소개하는 데 중요한 프로필이 되었다. 김세환이 부른 “부드러운 껌”(<해태껌>)과 정훈희, 윤석화 등이 부른 “열두 시에 만나요”(<부라보콘>), 지금까지도 패러디되는 “멋진 남자 멋진 여자”(<트라이>) 등은 CM송을 넘어 시대를 소환하는 아이콘이 되었다. 197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30여 년 동안 광고음악을 창작하며 경험한 대중문화와 사회변화의 관계는 그의 구술을 통해 생생하게 전달된다. 1970년대 충무로가 영화의 거리에서 광고의 거리로 변화하는 모습, 영화가 아닌 광고를 통해 새로운 스타가 탄생하는 모습, 광고의 종류가 식료품 위주에서 전자기기로 변화하는 모습 등은 광고를 통한 한국사회의 변화를 잘 보여준다. (그림13) <부라보콘> 광고 (그림14) <부라보콘> 광고 (정윤희와 신일룡이 출연한 부라보콘 광고는 시리즈로 만들어졌다) 1970년대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시도로 탄생한 새로운 청년영화 강근식이 작업한 영화음악은 총 13편으로 데뷔작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1970년대 작업한 영화가 6편(<바보들의 행진>, <너 또한 별이 되어>(이장호, 1975), <미스 영의 행방>(박남수, 1975) <걷지말고 뛰어라>(최인호, 1976)(편곡), <내마음의 풍차>(김수용, 1976)), 영화음악으로는 마지막 작품인 1986년 작 <가슴을 펴라>(최원영)를 포함해 1980년대 작업한 영화가 8편(<하얀미소>(김수용, 1980), <강변부인>(최동준, 1980), <겨울로 가는 마차>(정소영, 1981),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 <별들의 고향 3>(이경태, 1981), <이별없는 아침>(이경태, 1985))이다. 그중 1970년대 작업한 6편은 한국 대중문화의 시대적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들 수 있다. 특히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상기한 것처럼 1970년대 한국영화의 트렌드를 이끈 화천공사와 대중음악의 새로운 흐름을 선도한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을 주목해보아야 한다. 한국영화의 제작 시스템이 국가의 제도로 제약을 받고 있던 1970년대, 화천공사는 젊은 층을 공략하는 영화들을 통해 새로운 메이저 제작사로 등극했다. 이 영화들이 원작의 인기에 크게 힘입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각 분야에 새로운 인력을 영입해 활용한 것 또한 주효했다. (그림15)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신문광고 (그림16)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신문광고 특히 음악은 기존의 영화들에 비해 현격하게 비중을 높임으로써 스타일적인 측면에서 차별화를 꾀했다. 화천공사는 도시 중심의 청년 세대에게는 절대적인 호응을 받았지만 대중 전체에게 어필했다 볼 수 없는, 밴드와 통기타를 기반으로 ‘젊은 음악’을 선보이는 오리엔트프로덕션과 협업했다. 이와 같은 시도는 이장호, 하길종, 최인호 등을 중심으로 한 인맥 기반의 우연한 기획이 아니라 영화와 음악의 협업을 통해 특정한 관객층을 공략하기 위해 세밀하게 계획된 작업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획의 결과물을 잘 보여주는 사례가 강근식이 구술에서 언급하는 <별들의 고향>의 음악살롱 장면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가 연주되는 장면에서 관객석에 앉아있는 이들은 당시 강근식, 이장호, 최인호가 드나들었던 음악살롱 등의 아지트에 항상 자리하고 있던 대중문화예술인들이다. 이들 앞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이는 원곡의 가수인 이장희도, OST를 부른 김세환도 아닌 가수 백호빈이다.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곡을 부르는 장면에서 여러 명의 가창자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 장면은 실제 존재하는 대중문화 그룹에 가상의 가수와 극 중 인물들을 동시에 투입시킴으로써 허구와 현실을 함께 녹여내는 장면이라고 볼 수 있다. 관객은 허구의 인물들과 함께 그들의 아지트로 들어가 당대 새롭게 등장한 대중문화예술인 그룹을 직면하게 된다. (그림17)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를 부르는 백호빈) (그림18)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 음악쌀롱 장면 <바보들의 행진> 또한 비슷한 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실제 대학생 신분인 배우들의 학교명을 광고에 활용하여 마치 이들의 실제 이야기인 것 같은 효과를 노린다. 경찰의 장발 단속을 피해 열심히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의 모습이 송창식의 <왜 불러> 가사와 박자에 맞춰 편집된 장면은 이러한 효과를 배가시킨다. 이 장면은 인파 속에서 도망치는 병태와 영철과 시민들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과 교차 편집을 통해 현실감을 높인다. (그림19)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장발단속 중인 경찰에게 붙잡힌 장면) (그림20)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 (그림21)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왜 불러> 장면 (경찰을 피해 도망가다 육교에 매달린 장면) 이처럼 영화의 대표적인 장면들에서 음악은 단지 배경이 아니라 영화와 관객의 거리감을 조절하는 주요 소재로 활용된다. 화천공사와 오리엔트프로덕션의 협업의 관계처럼 이 영화들의 장면 장면들은 이야기와 음악이 공동작업으로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두 편의 영화는 명확한 관객층을 대상으로 새로운 대중문화 콘텐츠를 시도해 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음악인 강근식 구술의 의의 강근식의 구술은 1970년대 <별들의 고향>, <바보들의 행진> 등 화천공사가 제작한 청년영화의 음악작업 배경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인 동시에 당시 청년문화를 직접 겪은 문화예술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는 구술이다. 또한 1960년대 후반 대학생 밴드 활동과 이장희, 송창식, 조동진 등의 음악을 작업한 오리엔트프로덕션(사장 나현구)의 작업 방식과 회사의 분위기, 대중문화예술인과의 관계도 살펴볼 수 있는 구술이다. 말하자면 강근식 선생의 구술은 일본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고 미국문화의 영향을 받아 새롭게 등장한 1960~1970년대 젊은 대중문화예술인의 모습을 가장 잘 보여주는 구술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그의 이력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광고음악의 역사를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는 구술이기도 하다. (그림22) 쎄시봉의 현장. 왼쪽 아래에 안경낀 사람이 이백천. 이백천은 쎄시봉에서 '대학생의 밤'을 기획하였다. 더불어 음악활동에 영향을 준 대중문화의 경험과 초기 문선대의 공연 모습도 주목해보아야 할 부분이다. 1975년 첫 번째 대마초파동에 얽힌 뒷이야기도 흥미로운 부분이다. 강근식은 이 사건에 엮여 고초를 받은 당사자로서 당시 대마초가 불법으로 지정되기 전후의 과정과 어느 날 갑자기 연행되어 물고문을 받고 정신병원에 수감된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이 일로 인생의 목표 설정이 많이 변해버린 것을 담담하게 소회하기도 한다. 그리고 밴드음악부터 영화음악, 광고음악까지, 평생을 음악 ‘일’을 해온 백발의 노신사는 현업에서 은퇴한 후 다시 기타를 잡았다. 평생 음악과 함께한 음악인 강근식의 모습은 이제 무대 위 ‘기타리스트 강근식’으로 만나볼 수 있다. (그림23) 강근식
1976년 쇼브라더스의 합작영화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의 주연으로 데뷔한 신인 배우가 있다. 바로 태권도와 무협 액션이 가능했던 연기자 김정란이다. (그림1) <여신탐>(최훈·파오시에리, 1976) 국내 포스터 그녀는 다양한 액션과 대규모 폭파장면이 등장하는 블록버스터 영화 <여신탐>에 결코 운으로 캐스팅되지 않았다. 연기력과 액션 실력에 더해 해외 거주 경험과 여권까지, 이 영화에 필요한 모든 것을 갖춘 배우였다. 그녀가 22세에 <여신탐>의 주연으로 캐스팅되기까지 과정을 살펴보자. 그녀의 아버지는 유명 원로 방송작가 김희창 선생으로 <로맨스 빠빠>(신상옥, 1960), <열두냥짜리 인생>(이만희, 1963), <또순이>(박상호, 1963) 등의 영화 각본을 집필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어린시절부터 연출자와 배우들을 접해왔고 이런 점은 그녀가 영화나 방송계에 편입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하지만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워낙 엄격하고 작품당 휴지기를 길게 두는 편이라 실질적인 생활은 어머니가 이끌었다. (그림2) 부친 김희창 작가와 연출가 허규 1960년대 중반 한국해외개발공사가 동남아 등 해외 각국으로 기술 이민을 권장하던 때, 그녀의 어머니는 부르나이 여학교에 교사로 파견된다. 그래서 그녀는 어머니를 따라 청소년기를 부르나이에서 보냈고 19세에 귀국한 뒤에는 외국으로 미술 유학을 결심하고 준비한다. 그런데 마침 다니던 화실 아래층에 연출가 허규의 극단 새문화스튜디오 연습실이 있었다. 그녀는 호기심에 극단에 발을 디뎠고 문하생이 되었으며 수련과정을 거쳐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와 극단 민예 소속 배우로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에 도시코 역으로, <고려인 떡쇠>에는 찌몽 역으로 출연하며 연기를 시작한다. <고려인 떡쇠>는 아버지인 김희창 작가의 작품이다. (그림3) 1973년 새문화스튜디오의 연극 <사할린스크의 하늘과 땅>의 한 장면 1974년에는 스승인 연출가 허규의 제안으로 KBS 오디션 프로그램 <신인탄생>에 출연해 입상하며 KBS 탤런트로 데뷔하게 된다. 그러나 엄격한 부친인 김희창 작가는 그녀의 활동을 반대했고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으며 방송국 내에서도 거리를 두었다. 부친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인 시절을 보내던 중 그녀는 태권도 도장을 다니게 된다. 태권도 도장에서 요가를 알려주는데 요가를 하면 살이 빠진다는 당시의 속설 때문이었다. 하다 보니 송판 두어 장과 기와 일곱 장 정도는 깰 실력이 되었고 국기원에서 초단 단증도 받게 된다. 꽃꽂이와 뜨개질이 아닌 태권도가 특기라 하니 기자들은 당장 과장을 섞어 그녀를 태권도 3, 4단의 실력자로 소개했다. 1974~5년은 태권도 액션 영화가 등장해 흥행했고 발차기가 아름다운 챠리 셀(한용철) 같은 신인 남자배우가 인기를 얻던 시절이다. 태권도가 특기인 그녀에게도 곧 기회가 찾아온다. 그녀는 1976년 태권도 도장 관장님의 다급한 부탁으로 해외에 태권도를 소개하기 위해 제작한 문화영화에 출연한다. 원래 예정되었던 여자선수가 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대신 나갔던 것인데 ‘KBS 탤런트 김정란, 태권도 문화영화 <동과정>에 출연’이라는 소식이 작게 신문에도 실리게 된다. 얼마 후 영화사인 우성사로부터 연락이 왔고 긴급하게 우성사 사무실에서 오디션을 보게 된다. 홍콩 쇼브라더스로 가 영화를 찍을, 액션이 되는 여배우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우성사 사무실에는 김용덕 대표와 홍콩영화계에서 활동하고 있던 배우이자 <여신탐>에 함께 출연한 남석훈이 그녀 앞에 있었다. (그림4)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남석훈과 김정란. 뒤편으로 불타는 홍콩 쇼브라더스의 오픈세트가 보인다. 우성사에서는 오디션이랄 것도 없이 함께 인삼차를 마시며 몇 마디 나눈 게 전부였다. 그녀가 외국 유학을 준비 중이라 이미 여권을 가지고 있다는 말에 김용덕과 남석훈은 더욱더 그녀를 반겼다. 당시는 여권을 발급받으려면 외국에 거주 중인 신원보증인의 초청장과 재무보증 등이 필요해 여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드물었다. “너 외국 갈 수 있니?” “네”. “당장 갈 수 있니?” “네” “그러면 준비해라” 너무 쉽게 끝난 것 같지만 사실 그녀는 우성사가 찾던 배우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오디션 프로 <신인탄생>에서 검증한 연기력과 태권도 실력은 물론 여권까지 가지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녀는 홀로 홍콩 쇼브라더스로 출발한다. 홍콩 쇼브라더스는 어마어마한 규모를 자랑했다. 오픈세트에는 강과 산, 탑, 폭파시킬 별장과 여러 건물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고 촬영은 여러 대의 카메라를 동시에 사용해 이뤄졌다. 가히 동양의 할리우드였다. 그리고 그녀는 쇼브라더스 영화의 주연배우 대우를 톡톡히 받았다. 숙소와 자동차, 의상과 분장 그녀에게 제공된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녀가 아침에 일어나면 자동차가 대기하고 있다가 그녀를 스튜디오 분장실로 데려갔다. 그녀가 분장과 의상을 마치면 때로 옆 방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서 기자들과 간단하게 촬영과 인터뷰가 진행되었다. 인터뷰가 끝나고 다시 차에 오르면 그녀를 촬영장으로 데려갔다. 촬영장에서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나있어 그녀는 감독의 지시대로 연기에만 집중하면 되었다. 연기가 끝나고 그녀가 카메라 뒤로 빠져나오면 현장의 전담 매니저가 김정란 이름이 새겨진 의자를 펴주며 따뜻한 차를 건네주었다. 식사시간과 휴식시간이 보장되었고 촬영은 늘 일정대로 진행되었다. (그림5)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벨트에서 화살을 꺼낸 뒤 석궁을 쏘는 장면이다. (그림6)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의 한 장면. 한국 형사 고은미(김정란)가 오토바이 액션을 보여주고 있다. <여신탐>은 일본과 홍콩, 한국의 여형사로 구성된 특별수사반이 스코틀랜드 출신 형사반장과 함께 보석밀매와 납치를 일삼는 범죄조직을 소탕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여형사들에게는 각자의 장기가 있는데 김정란이 연기한 한국형사 고은미는 석궁과 태권도가 특기이다. 영화 중반에 등장하는 국내장면에서 범죄조직에 위장 잠입한 그녀는 한국의 악당들을 태권도로 홀로 소탕하며 몸을 사라지 않는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 후반에도 오토바이를 타고 석궁을 쏘며 몸을 날리는 등의 화려한 액션이 등장한다. (그림7)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포스터 <여신탐>은 홍콩개봉 당시 영어 제목이 <Deadly Angels>였는데, 세 명의 미녀들이 악당을 퇴치한다는 설정이 1976년에 방영된 미국 abc 방송국의 드라마 <Charlie's Angels(미녀삼총사)>와 유사하다. 당시 쇼브라더스는 헐리우드에서 제작된 <킹콩>(1976)의 흥행을 보고 <성성왕>(1977)이라는 영화를 만들기도 했다. 쇼브라더스는 국제적인 흥행의 흐름을 발 빠르게 파악하고 제작, 배급하는 체계를 갖추고 있었고 한국의 영화사들도 이런 흐름에 공동제작 혹은 투자의 형태로 참여하고 있었다. (그림8) <여신탐>(최훈· 파오시에리, 1976) 홍콩 촬영 중 이한상 감독에게 출연 섭외를 받은 김정란. 1) 그녀는 내심 홍콩에서 촬영을 마친 후 바로 유학을 가려 했지만 촬영 중에도 영화출연 섭외가 쇄도했다. <여신탐> 촬영 중 홍콩의 명감독 이한상으로부터 <백사전>(이한상·최동준, 1978)의 출연제의를 받았지만 노출장면 때문에 거절했는데 그 역할은 대만 배우 임청하에게 돌아갔다. 국내 영화사들의 계속된 출연요청으로 그녀는 <여신탐>의 촬영이 끝나자마자 <특명>(김선경, 1976),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정무문(속)>(남석훈·초석, 1977), <금호문>(김선경, 1977), <용왕 삼태자>(최동준, 1977) 등 쉴 새 없이 작품을 이어갔다. (그림9)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 포스터. 검은 옷을 입은 이가 상관영봉이고 흰옷을 입은 이가 김정란이다. 상관영봉의 화려한 손모양이 포스터에도 드러난다. 1977년 출연한 <소림사 흑표>는 당시 무협영화의 히로인이었던 대만 출신 배우 상관영봉과 공동 주연한 작품이다. 상관영봉은 이미 <소림사 18동인>(1976) 등의 영화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무협 배우였고 쿵푸 액션을 하다 보니 이 작품에서는 그녀보다 유리한 점이 많았다. 쿵푸는 손동작이 화려하고 사전 동작이 많다 보니 카메라 앞에서 주목을 받기 쉬운 반면 태권도는 발차기 위주여서 액션을 열심히 할수록 오히려 화면에서 얼굴이 멀어진다는 점 때문이다. 일단 중국식 의복을 입으면 연기가 달라졌다. 액션을 하려면 목을 한 바퀴 돌려 긴 머리카락을 감아서 정돈한 뒤 옷을 접고 대사를 하고 손동작을 하는 식으로 사전 동작이 많았다. 그러다보니 얼굴이 화면에 더 오래 나갈 수 있었지만 태권도는 한번 자세를 잡으면 바로 발차기를 하고 주먹이 나가는 식이었다. 이런 동작의 차이 때문에 화면에서 돋보이기 힘들어 그녀로서는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으로 기억한다. (그림10) <소림사 흑표>(이혁수, 1977)의 한 장면. 검은 옷을 입은 상관영봉과 흰 옷을 입은 김정란 쿵푸가 익숙하지 않았던 그녀는 액션의 합을 그대로 외우는 방식으로 촬영했다. 국내촬영은 장비도 열악하고 준비도 오래 걸리다보니 무조건 몰아찍기를 해야 되었기에 한번 찍을 때 최대한 길게 촬영했다. 그러니 액션도 길어져 합은 열 동작 이상이었다. 사전에 액션 연습도 없이 촬영 직전 현장에서 처음으로 열 동작 이상을 알려주면 그대로 외워 촬영했고 한 동작이라도 틀리면 사고와 부상으로 이어졌다. 큰 사고는 <금호문>(김선경, 1977)에서 발생했다. 소품이 부족해 촬영용 칼이 아닌 육중한 무쇠칼을 사용했던 게 화근이었다. 상대 배우가 무쇠칼로 액션을 하다 타이밍을 놓쳐 그녀의 머리를 내려치게 된 것이다. 머리에 둘렀던 진주 장식이 터지고 머리에서 피가 나기 시작했다. 촬영지가 고창 정읍의 선운사다 보니 열악한 교통상황에서 급히 갈 수 있는 병원조차 없었다. 제작진은 담배를 으깨 피가 나는 머리를 지혈한 뒤 그녀를 리어카에 실어 가축병원으로 옮겼다. 마취도 없이 환부를 꿰매는 것으로 처치를 마친 후 현장으로 돌아온 뒤 그녀는 다음날부터 촬영을 계속해야만 했다. 이미 개봉일이 잡혀있다는 이유에서였다. 현장 스태프들은 그나마 진주 머리 장식이 있어 큰 화를 면했다고 위로했지만 그녀는 부은 얼굴로 고통 속에서 촬영을 이어갔다. 촬영을 마쳐갈 즈음 꿈을 꾸고 찾아온 어머니와 함께 겨우 서울로 올라와 제대로 된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안전장치 하나 없던 열악한 촬영 환경에서 사고의 위험은 도처에 있었고 사고 후의 수습마저 제대로 이뤄지지 않던 시절이다. 그녀뿐 아니라 무협액션장르 영화에 출연했던 배우들 모두 이런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다. 영화사나 작품의 규모에 따라 다르겠지만 무협액션영화 촬영현장의 조건이나 대우는 국내가 홍콩이나 대만보다 훨씬 열악했다. 당시 무협액션영화에 대한 국내 영화계의 천대가 촬영현장의 열악함으로 연결되었을 것이다. (그림11) <금호문>(김선경, 1977)의 한 장면. 사고에서 그녀의 목숨을 구해준 진주머리 장식이 눈에 띈다. 대만에서는 로웨이가 제작한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과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을 촬영했다. 두 편 모두 성룡과 함께 출연했는데 <사학비권>에서는 성룡에게서 권보를 빼내기 위해 소년처럼 남장을 하고 접근하는 역할이었다. 홍콩이나 대만에서 진행되는 합작영화의 경우 사전에 시나리오를 보기가 힘들었다. 보통 합작영화 제작 시 한국 영화사가 전담했던 한국 로케이션 장면의 대본 정도만 미리 받아볼 수 있었다. 그러다보니 대만의 영화사가 전담한 대만 촬영분량에서는 역할에 대한 사전정보 없이 현장에서 캐릭터를 파악하고 연기해야 했다. <사학비권> 또한 대만 촬영현장에서 당일 그날의 의상을 보고서야 남장소년 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현장 통역조차 한국말이 서툰 화교라 대부분 눈치껏 해석하고 연기해야 했다. 가령 “여자인데 남자로 분장했어. 배고파. 빵 먹고 싶어.” 라는 통역된 감독의 말만 듣고 ‘남장을 하고 빵을 훔쳐먹어야 하는 장면’이라 판단하고 연기했다. 그러다 옆에서 한국말을 조금 아는 성룡이 “귀여워” 라고 첨언하면 그녀는 귀여운 표정이나 코를 치는 연기를 더하는 식이었다. 정보 없이 현장에서 눈치껏 연기하다 보니 촬영 중인 화면의 사이즈를 알리도 만무했다. 그 덕에 자신이 찍히지 않는 쇼트에서도 혼자 열심히 연기해 감독이 몇 장면 더 찍어주기도 했다고 한다. (그림12)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소년처럼 남장한 모습이 잘 어울린다. (그림13) <사학비권>(진지화·김진태, 1978)의 한 장면. 비호성주의 딸 황주로 돌아온 모습이다. <사학비권>과 <오룡대협>의 대만 촬영현장은 의사소통이 어려울 뿐 분위기나 대우는 좋았다. 분야별로 준비가 잘 되어있어 진행이 순조로웠고 식사를 굶거나 밤을 새는 경우도 없어 좋은 컨디션에서 촬영할 수 있었다. 촬영장에서 그녀 뒤에는 언제나 발받침과 차를 담은 보온병이 졸졸졸 쫓아왔는데 키가 작은 그녀를 위해 전담 스태프는 그녀가 가는 곳마다 발받침을 가지고 따라다녔다. 뿐만아니라 대만 제작팀은 당시 국내에서는 구할 수 없는, 스폰지 속굽이 있는 키높이 부츠를 특별히 제작해줄 정도로 세심하게 그녀에게 필요한 것을 준비해줬다. (그림14) <오룡대협>(진지화·김진태, 1978) 대만 촬영현장. 방수일, 성룡, 진지화 감독, 김정란. 김정란의 오른쪽에는 촬영장에서 항상 그녀를 따라다니던 발받침과 보온병이 있다. 하지만 액션에 대한 부담은 여전했다. 덤블링을 하고 2층 높이에서 뛰어내리는 정도의 액션은 직접 연기해야 되었고 그 수준을 넘는 경우는 대역이 대신했다. 중국에는 무술 인구가 많아 대역을 찾는 게 어렵지 않았지만 한국에는 무술이 가능한 키 작은 사람이 없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의 후반부에서 그녀는 보물이 든 궤를 차지하기 위해 남자배우들과 결투를 벌이다 죽임을 당하는데 결투 내내 맞고 쓰러지는 액션을 해야 했다. 대역이 있다 해도 어지간한 액션은 모두 해야 되었기에 비가 오면 아파서 울 정도로 늘 근육통에 시달렸다. (그림15) <혈육마방>(김영효·포학례, 1979) 촬영현장에서 김정란과 대만의 무술감독.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야 하는 상황에 난감해 하는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녀는 몇 편의 멜로드라마 장르의 영화에도 출연했는데 김수용 감독의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이 그중 한 편이다. 술집 작부와 정신이상자라는 1인 2역을 맡았는데 조연이긴 했지만 개성 있는 역할이라 선뜻 응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세파에 시달린 인물을 천연덕스럽게 표현해냈다. 무엇보다 연기만 하면 된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즐거웠고 ‘어우, 나도 막 이런 연기가 되네.’ 라며 신나서 한 역할이었다. (그림16) <화려한 외출>(김수용, 1977)의 한 장면 <신궁>(임권택, 1979)에서는 술집 주인으로, <짝코>(임권택, 1980)에서는 짝코의 애인 역으로 출연해 인상적인 연기를 남겼다. <짝코>는 출연 분량이 많지는 않았으나 능청맞은 연기로 어둡고 진지한 극의 분위기를 재치있게 살렸는데 그녀는 이 작품으로 대종상 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그림17) <짝코>(임권택, 1980)의 한 장면 연기에 재미를 느낀 그녀는 작은 역이라도 열심히 참여했다. <물보라>(김수용, 1980)에서는 동네 아낙으로 출연했는데 바닷가에서 여자들이 뛰어와 서는 장면에서 그녀는 제일 끝에 서 있었다. 하지만 카메라는 그녀에게까지 오지 않았다. 촬영 전, 다른 배우들에게만 땀처럼 보이도록 얼굴에 물을 뿌려준 상태였다. ‘나도 땀을 흘렸어야 되는데…’ 걱정이 된 그녀는 얼른 바위틈 웅덩이로 뛰어가 고여있는 물을 찍어 얼굴에 뿌렸다. 그걸 본 김수용 감독이 웃으며 “정란이까지 찍어줘”라고 해서 출연장면을 사수할 수 있었다. (그림18)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의 한 장면 (그림19) TBC 드라마 <대춘향전>(1980)의 한 장면. 왼쪽 끝이 향단 역의 김정란, 오른쪽 끝이 춘향 역의 이경표이다. 그녀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텔레비전 방송 활동도 겸했다. TBC 어린이 드라마 <달려라 차돌이>(1977)에는 정순누나 역으로, TBC 특집 드라마 <대춘향전>(1980)에는 향단역으로 출연했으며 꾸준히 방송 섭외를 받았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어머니의 건강이 악화되자 집안에서 그녀의 결혼을 서둘렀고 1981년 결혼 후 남편의 반대와 육아로 자연스럽게 은퇴하게 된다. 그녀는 영화계에서 약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굵직한 무협 액션 영화에 출연하며 1970년대 액션 여배우의 발자취를 남겼다. 그녀의 작품활동은 국내 무협액션영화의 특징과 여성 연기자의 조건, 합작영화의 제작 관행 등에 대해 생각해 볼 여지를 준다. 그녀의 지난 활동이 앞으로도 꾸준히 조명받기를 바란다. 1) 경향신문 1976년 9월 20일 8면.
3편이 끝난 후, <애마부인> 시리즈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간다. 영화제작 자유화의 분위기 속에서 정인엽 감독은 ‘두손필름’이라는 프로덕션을 차렸고 < 파리 애마 >와 < 짚시 애마 >(1990. 이석기)를 내놓은 것. 판권이 연방영화에 속해 있기에 ‘애마부인’이라는 제목을 사용하지 못했고, 캐릭터 이름도 애마 대신 오해리( 유혜리 ), 필라 김( 이화란 ) 등으로 설정해야 했지만, 이 두 편의 외전은 이후 이어지는 정전보다 오히려 더 ‘애마 정신’을 구현하는 작품이었다. <파리 애마>의 유혜리, <짚시 애마>의 이화란 두 영화는 프랑스 파리와 스페인이라는 이국적 배경 속으로 들어간다. 1~3편에서 정인엽 감독과 호흡을 맞춘 이석기 촬영감독은 <파리 애마>에서도 기존의 애마 시리즈와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화면을 선보였고, <짚시 애마>에선 직접 메가폰을 잡기도 했다. 이 영화들은 나름 당대의 파격이었다. <파리 애마>의 설정은 오해리가 이혼한 남편을 찾아 파리로 찾아간다는 이야기. 외국에서의 낯선 성적 경험을 통해, 그녀는 비로소 ‘강한 남자’였던 전남편( 현석 )에게서 벗어난다. <짚시 애마>의 필라는 나이 많고 남편 몰래 짚시 남자와 욕정을 불태우지만 결국 다시 가정으로 돌아간다. 패션 모델 출신의 이국적 외모를 지닌 여배우를 캐스팅해 당시로선 이례적이던 유럽 로케이션을 감행한 이 영화들은, 내용보다는 비주얼의 업그레이드를 노렸고, 두 편 모두 서울 관객 10만 명 이상을 동원하며 성공했다. 여기서 ‘애마 프랜차이즈’의 연대기를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애마의 남편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1편의 현우(임동진), 2편의 현우(최윤석), 3편의 노 박사(이정길) 그리고 <파리 애마>의 장석환(현석). 특히 장석환은 가장 강한 성적 능력을 지닌 남편이었다. 1편의 문호(하명중)와 2편의 성현(신일룡). 애마의 옛 애인과 현재 애인. 1편과 2편의 동엽(하재영), 4편과 5편의 호진(김호진). 애마를 사랑하는 연하남들. 3편에서 애마의 첫사랑과 현재 애인, 1인 2역으로 등장한 장승화. 11편과 12편의 김주철. 그들은 13편의 이대준과 함께 <애마부인> 시리즈의 ‘헝크’(몸 좋은 남자) 계보를 잇고 있다. 장승화는 외전인 <겨울 애마, 봄>(1991)에도 출연했다. ‘<애마부인> 2기’는 1990년에 시작된다. < 은하에서 온 별똥동자 > 시리즈(1987~88)의 석도원 감독이 < 애마부인 4 >(1990)의 메가폰을 잡았는데, 이후 그는 10편까지 총 6편의 <애마부인> 시리즈 정전과 외전인 < 드라큐라 애마 >(1994)를 연출한다. 석도원 감독이 등장하면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진화를 일단 멈추고 불균질적인 시기를 맞이한다. 어떨 땐 황당할 정도로 급진적이고(5편의 남편( 최동준 )은 하나코( 민희 )라는 정부에 의해 일본도에 찔려 살해된다), 어떨 땐 1960년대 신파 멜로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이었다(7편의 애마( 강승미) 는 성불구 남편( 이무정 )에게 돌아가 행복한 표정으로 그의 품에 안긴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건 중요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1990년대 초반은 한국의 에로 영화는 극장이 아닌 비디오 대여점에서 경쟁하고 있었고, 흥행 성적도 서울 관객 5만 명 이하로 떨어져 있었다. 게다가 이 시기 에로 영화 지형도에서 <애마부인> 시리즈는 어느새 ‘올드 스타일’로 밀릴 상황이었다. < 복카치오 > 시리즈(1991~94) 같은 새로운 감각의 프랜차이즈가 등장했고, <애마부인> 시리즈도 경쟁을 위해 변해야 했다. 석도원 감독의 뮤즈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4편의 주리혜, 5편의 소비아, 6편의 다희아, 7편의 강승미, 8편의 루미나, 10편의 오노아. 소비아는 이후 비디오 영화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배우 임옥경의 동생인 주리혜는 이후 비디오 영화 <쌍파울로 애마 신바람 났네>(1996. 유진선)의 주연을 맡았다. 소비아는 ‘10대 애마’ 진주희와 함께 <애마 섹시 월드>(1998. 조명화)에 출연했다. 오노아는 역시 석도원 감독이 연출한 <드라큐라 애마>(1994)에 출연했다. 이때 석도원 감독이 끌어들인 것이 바로 퍼포먼스다. 애마나 그녀가 우연히 만나는 남자들의 직업적 설정(행위예술가, 현대무용가 등)을 통해 구현되는 스테이지는, 전체적인 스토리와 분리되면서도 이 시리즈가 지니는 에로틱한 면모에 대한 메타포로 작용하고, 때론 섹스 신에 실제적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7편엔 사도마조히즘 섹스 컨셉트가 도입되는데, 이때 아티스트 원석( 원석 )은 애마를 묶으며 “이것도 예술입니다”라고 말한다(이 영화에 등장하는 아티스트 그룹의 토론 장면엔 브레히트의 연극 이론과 아르토의 잔혹 미학과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거론된다). 5편에서 시작되는 퍼포먼스의 전통은 이후 김성수 와 조명화 로 감독이 바뀌어도 유지된다. 여기서 하나의 혐의는, 잘만 킹 영화의 영향력이다. <애마부인> 1편에 실비아 크리스텔 주연의 <엠마누엘>(1974. 쥐스트 자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느껴지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면,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에선 당시 한국 에로 콘텐츠 시장에서 인기를 끌던 < 레드 슈 다이어리 >(1992. 잘만 킹) 스타일의 에로틱 느와르 톤이 묻어나며, 이것은 다소 난폭한 섹스와 결합된다. 퍼포먼스는 <애마부인> 시리즈의 중요한 행위이자 모티프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7편에선 바닷가에서 벌거벗은 두 남자가 퍼포먼스를 한다. 6편엔 4대 애마 주리혜와 5대 애마 소비아 그리고 6대 애마 다희아가 자매로 나온다. 영화 초반부, 그들은 철로 위에 눕는 퍼포먼스를 보여준다. 8편엔 밴디지 컨셉트가 등장한다. 11편의 오프닝을 장식하는 공연 장면. 조금은 장황한 모놀로그나 대사를 통해 영화의 테마를 전달하려는 시도도 영화의 감성적 측면을 고려한 석도원 감독의 의도로 여겨지는데, 그 의미가 모호하여(게다가 비문이 많다) 그다지 효율적이진 않았다. 6편은 ‘말 잔치’인데 애마( 다희아 )는 언니( 소비아 )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지금의 언니의 모습은 정상궤도를 이탈한 빗나감이며, 사랑의 배신에 대한 반항이고, 결국은 후회하게 될 독선의 모습이야.” 이후 이혼을 결심한 애마의 독백은 이렇다. “순수와 영혼의 진한 사랑의 연습이, 크고 작음을 모두 잉태해낸 너는, 이제 허공에 익숙해진 사랑의 노래다. 높은음 외마디 끓어오르는 진실, 사랑의 한 맺힌 신음으로 고뇌하는 아픔, 네 귀를 후려치는 듯한 울음소리로, 울음소리로, 사랑의 바람을 잠재운다.” 그리고 이렇게 영화를 마무리한다. “슬픔이여, 내 앞에서 그대 눈물이었다. 어떤 고통의 미움이 들었나. 독하디독한 미움을 마시고 보면 새까만 허공, 침묵의 계절. 무거운 돌 바위 무너져 내리듯 슬퍼하자, 슬퍼하자.” 영화의 시작이나 끝은 선언적이면서도 감상적인 문장들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8편은 “에로티시즘은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대립시킴으로써 우리를 구원한다. 에로티시즘은 우리들을 착각적 행복감에 빠지게 하는 또 다른 활력소일 수도 있다”는 문구로 시작해 “시가 없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시를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시가 있는 세상으로 돌아가서 사람을 보니 그 또한 시더라. 사람이든 시든 모두가 사랑이었나”라는 자막으로 끝난다. 이외에도 “우리의 사랑은 짧게 빛나는 불협화음이었나.”(4편) “그대 영혼으로 그리움 엉기어 우리의 사랑은 눈꽃이 되었나.”(5편) 같은 한탄조의 대사들이 영화를 마무리한다. 김성수 감독이 발굴한 9대 애마 진주희. 최연소 애마였다. 이후 그녀는 소비아와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이때 등장한 김성수 감독은 < 애마부인 9 >(1993)을 연출하며 혁신을 일으킨다. < 색깔 있는 남자 >(1985)로 유명한 그는 ‘최연소 애마’ 진주희를 캐스팅하는데, 그녀는 기존의 애마들과 다른, 차라리 하이틴 아이돌이나 로맨스 히로인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여기에 감독 특유의 범죄 스릴러 요소와, <색깔 있는 남자>의 반전 엔딩을 장식했던 레즈비어니즘의 터치가 결합되면서, <애마부인 9>는 석도원 감독이 이식한 사변적 톤을 걷어내며 “몸은 주더라도 마음은 주지 마라? 그따위 논리가 어딨어!”라는 직설법으로 승부한다. 특히 두 발의 총성과 함께 “애마는 이제 여기 살지 않는다”라는 자막이 뜨는 대목은, ‘애마 프랜차이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인 엔딩일 것이다. 조명화 감독의 11편에 출연한 이다연과 12편에 출연한 서지은. 10편으로 다시 석도원 감독에게 메가폰이 넘어간 시리즈는 11편과 12편에서 조명화 감독을 만난다. 액션 요소를 대거 도입한 조명화 감독은(그는 < 우뢰매 >와 < 슈퍼 홍길동 > 시리즈의 연출자 중 한 명이었다) 아마도 가장 거친 스타일의 <애마부인> 시리즈를 연출한 감독일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기 이 시리즈는 에로 비디오 시장에 거의 잠식 당한 상태였고, 마지막 13편은 김성수 감독이 돌아와 대미를 장식했다. 1990년대 중반은 ‘애마 프랜차이즈’의 대혼란기였는데, 1995년을 보면 11편과 12편이 나왔고, 외전인 < 애마와 변강쇠 >(김문옥) < 애마와 백수건달 >(김문옥)이 등장했으며, 비디오 시장엔 <적도 애마>(김인수)와 <빨간 애마>(유세기)가 출시되었다. 정전과 외전과 비디오 시장을 아우르는 상황. 이후 그 주도권은 완전히 비디오 시장으로 넘어갔지만 대세는 진도희 의 < 젖소부인 > 시리즈였고, 1998년 이후 ‘애마’라는 이름을 붙인 영화는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다가 2016년 < 애마부인 2016 >이 나왔다. IPTV 시장의 확산을 통해 18년 만에 애마가 부활한 셈이다. 외전의 여주인공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겨울 애마, 봄>의 애리(박엘리자), <애마와 변강쇠>와 <애마와 백수건달>에서 애옹(애마+옹녀)과 애미/미치코 역을 맡은 박양희, <빨간 애마>의 설희(정세희), <애마부인 2016>의 은혜(류현아). 애마 프랜차이즈의 조연들. (상단 왼쪽부터 지그재그로). 독고영재는 6편에서 주희(주리혜)의 전남편으로 등장하고, 이후 <애마 섹시 월드>에 출연한다. 원석과 유병완은 석도원 감독의 단골배우였다. 그들은 인상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주었고, 원석은 종종 애마의 애인으로 등장했다. 맹찬재와 노현우는 후기 <애마부인> 시리즈와 외전에서 남편 역할을 주로 맡았다. 4편에서 에리카의 결혼 파트너였던 신성하는 12편과 13편에 남편으로 등장한다. 주마간산 격으로 살펴본 ‘애마 프랜차이즈’의 역사는 한국 에로티시즘 영화의 테마와 스타일과 산업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영화의 여성들이 절규하듯 내뱉었던 대사들은, ‘에로 영화’라는 장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때론 강렬한 울림을 주었다. < 애마부인 9 >에서 강희가 애마에게 던지는 충고는 아마도 프랜차이즈 전체의 테마를 요약할 것이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고민하는 애마에게 강희는 말한다. “진정 네가 필요한 남자를 선택해. 윤리, 도덕, 이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어.” 그리고 못을 박는다. “본능이 움직이는 대로.” 최초로 ‘진솔한 욕망’과 ‘원초적 본능’의 세계를 가져왔던 <애마부인>과 그 후예들. 한국영화의 ‘위대한 유산’까지는 아니라도, ‘역력한 흔적’ 정도로는 평가해주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