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 신사
- 감독
- 이혁수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이대근, 박원숙, 이강조, 김민정, 홍유정, 김영인, 김왕국, 최성규, 심상현, 김광일, 임예심, 박동룡, 이해룡, 권일수, 정형진, 백황기, 박양근, 이경우, 정주현, 서평석, 박용팔, 안진수, 홍윤정, 신찬일, 박일, 홍동은, 정미경, 임성포, 최일, 한명환, 길다로, 김희라, 최봉, 최준, 박병기, 홍충길, 김유행, 김용호, 김기범, 윤일주, 백송, 마도식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 특히 민간의 문화영화제작현장에서 40여년을 활동한 감독이다. 드물게 극장 흥행을 한 문화영화를 감독, 제작한 이력을 가지고 있다. 지금은 생소한 용어인 ‘문화영화’ 1) 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화영화가 제작, 유통되던 시기를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 정권은 영화법을 제정하여 영화를 산업화하고자 하였다. 당시 제정된 영화법을 살펴보면 문화영화를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2) 또한 영화법에서는 극장에서 영화를 상영하기에 앞서 문화영화를 상영할 것을 고지하고 있다. 3) 1961년 발족한 국립영화제작소는 정부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한 다양한 문화영화들을 제작하였으며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면서 부터는 새마을 운동을 홍보하기 위한 영화들을 제작, 유통하였다. 박희준 감독이 문화영화제작 분야에 참여하게 된 것은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를 졸업하고 1961년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하면서 부터이다. 박희준 감독은 1954년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 입학하여 재학 중 군에 입대하였다. 육군사관학교 군악대에 배치, 군악병 생활을 하였던 박희준은 5.16 쿠데타가 일어나는 달에 제대를 하였다. 박정희가 군사 쿠데타에 성공, 육군사관생도들이 서울 시내 중심가를 행진할 당시 앞에 있던 군악대에 있었으며 이 행진을 마지막으로 구술자는 군을 제대하였다. 제대 후에는 연기자가 되기 위해 김기영 프로덕션에 연구생으로 잠시 들어간 적도 있었지만 당시 공보원에서 실시한 ‘공보요원 모집’ 공고를 보고 연기자의 꿈을 접고 국립영화제작소에 입사를 결심하였다. 당시 문공부에서는 대대적인 모집을 하였는데 이는 병역기피자들을 단속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퇴사, 공석이 많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100여명이 응시한 가운데 5명이 선발되었는데 입사 당시 직급은 ‘연예사’였다. 입사 동기로는 다보문화사 대표인 황왕수 씨와 김학수 감독, 박정근 감독 등이 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5명이 최종 합격하였고 이중에서 4명이 감독의 보직을 받았다.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당시 시라큐스에서 파견한 교육인원들이 아직 남아있었는데 박희준 감독은 이들로부터 연출 등의 강의를 들었다. 국립영화제작소 근무 당시 양종해 감독, 배석인 감독 등 선배 감독들의 조감독 생활을 3년 정도 한 뒤에 1967년 <삼천만의 불침번>부터 직접 감독을 하게 되었다. 박희준이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감독한 작품인 <가요잔치>는 당시 유명 가수인 이미자, 김부자 등이 출연한 영화로 농촌 계몽영화의 순회상영 당시 활용되었는데 새마을 영화 등 문화영화 가 너무 경직되었다는 의견이 있어 오락성 있는 영화도 보여주자는 의도에서 만들어 졌다고 한다. 그림 1) 국립영화제작소 출신들의 모임인 문영회 회원들과 2007년 기념 촬영한 사진. 오른쪽부터 임학송, 양종해, 이은덕, 신병운, 최봉암, 이성철, 박희준, 봉상균, 박익, 윤기범. 1962년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시행과 함께 기업들이 성장하면서 기업들은 기업 홍보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하였다. 기업홍보영화의 제작은 주로 문화영화 감독들에게 맡겨졌고 이러한 수요를 바탕으로 민간 문화영화 제작사들이 등장하였다. 대부분이 국립영화제작소 출신의 감독들이 설립하였다. 사진2) 탄광촌에서 촬영한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정암골에 새봄이>(1984)의 촬영현장 사진. 영화는 공장 새마을의 성공사례를 담고 있다. 사진 오른편에 연출 지도를 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박희준 감독 역시 1964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여 민간문화영화제작자,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1965년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 방송사인 동양방송 CM제작부로 자리를 옮겼는데 텔레비전 방송국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지면서 박희준 감독을 포함하여 많은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이 방송국으로 이직을 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박희준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동양방송을 그만두게 되는데 여기에는 광고영화를 낮게 평가하는 당시의 풍토도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하였다. 동양방송 퇴사 후 민간에서 문화영화 감독으로 활동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장편문화영화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 <극동의 왕자 김일>(1966), <허리케인의 대혈투>(1967), <황금의 이마>(1967)을 제작, 감독하였다. 텔레비전의 보급이 시작되던 시기에 스포츠 중계는 텔레비전 콘텐츠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레슬링의 인기가 매우 높은 편이었다. 일본에서 성공한 역도산에 대한 추억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의 대중들에게 김일 선수의 활약상을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 보여주면 인기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영화를 제작하게 되었다. 4)5) 박희준 감독은 보다 박진감 넘치는 화면을 위해 실제 경기를 여러 대의 카메라로 촬영하고 인기 아나운서의 해설을 덧붙였다. 김일은 프로레슬러 1세대 선수로 1960년대 일명 ‘박치기 왕’으로 널리 알려진 스타였다. 박희준 감독은 김일 선수의 경기를 시리즈로 제작하여 극장에서 상영하였는데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이다. 박희준은 직접 실제 경기를 촬영하고 여기에 보태어 김일 후원회에서 촬영한 영상과 스포츠 전문 사진작가인 장점동 씨의 자료를 첨가하여 작품을 완성하였다. 박희준은 판권을 미리 팔지 못해 사비를 들여 영화를 제작하였고, 완성된 영화를 지방 흥행업자들에게 보여주고 판권을 팔아 대구의 국제극장에서 영화를 개봉하였다. 영화의 호응이 좋아 서울의 아세아 극장에서도 상영을 할 수 있게 되었고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다. 1편의 흥행으로 이후의 시리즈는 지방흥행업자들에게 판권을 팔아 제작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림3)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그림 4)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1966)의 대본 표지. 하단에 대명제작사인 신영문화영화사의 이름이 보인다. 김일 시리즈의 2편에 해당하는 <극동의 왕자 김일>은 1편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이 개봉한 해에 제작, 상영되었다. <극동의 왕자 김일>의 포스터를 보면 ‘일본현지촬영’, ‘시네마스코프’ 등의 문구가 보인다. 영화는 일본에서 치러진 김일 선수의 경기 모습을 담고 있지만 열악한 제작 여건 상 박희준이 직접 현지에서 촬영을 하지는 못한 채 김일 선수 측에서 촬영한 분량을 사용하였다. 좀 더 스펙터클한 볼거리를 제공하기 위해 영화는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였고 마치 실제 경기를 중계하는 듯한 실감나는 내레이션을 입혀 상영을 하였다고 한다. 그림 5) 김일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극동의 왕자>(1966)의 포스터 ‘시네마스코프’, ‘해설 이광재’, ‘일본현지촬영감행’, ‘2탄’ 등의 문구가 보인다. 김일 시리지의 마지막 편인 <황금의 이마>(1967)는 김일 선수의 세계헤비급 챔피언 쟁탈전을 담고 있다. 장충체육관에서 열렸던 경기의 현장감을 최대한 담기 위해 4대의 카메라를 동원하여 촬영을 하였고 현장음도 마치 동시녹음을 하듯 녹음을 해 후반 작업에 사용하였다.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으며 흥행을 하였지만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다. 박희준 감독은 <황금의 이마>를 끝으로 김일 선수 영화 제작에 관련된 권리를 다른 문화영화제작업자에게 양도하고 이후 다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복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 복직한 그는 <가요잔치>를 감독하였다. 조금 딱딱한 계몽 영화를 틀어주기에 앞서 관객의 관심과 흥미를 끌기위해 오락적인 요소가 가미 된 영화의 제작이 요구되어 만들어진 영화인 <가요잔치>에는 이미자 등 당대의 유명가수 등이 출연하였다.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당시 국립영화제작소에서 구비하고 있던 동시녹음 카메라인 미첼 카메라를 사용하였다. 계몽적인 성격이 강한 문화영화만 보아오던 관객들의 호응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경험을 되살려 박희준은 관광과 콩트를 접목한 형식의 영화를 구상하였다.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제작한 문화재 관련 영화 촬영차 전국을 누볐던 그는 관광과 노래, 그리고 콩트가 결합된 문화영화를 만들면 흥미로울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박희준은 국세청에서 의뢰한 국세청 홍보영화 <신영균 씨의 하루>를 마지막으로 본격적으로 극장상영용 문화영화 제작을 위해 1971년 국립영화제작소를 퇴사하였다. 퇴사 후 박희준 감독은 1972년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를 시작으로 1973년에는 <노래 실은 금수강산>과 <노래 실은 관광여행>을 1975년에는 <가요대행진>을 제작, 감독하였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는 국립영화제작소 입사 동기인 김학수 감독이 운영하던 문화영화제작사 삼진영화제작소에서 대명제작을 한 작품이다.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는 흥행에 크게 성공하였다. 1970년대 텔레비전의 보급과 함께 가요프로그램도 인기가 높았다. 당대 최고의 가수는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들 인기가수들을 조그만 텔레비전 화면이 아닌 커다란 시네마스코프 화면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관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여기에 보태어 좀 더 다양한 오락거리를 보여주기 위해 콩트를 삽입하였다. 백남봉과 남보원 콤비를 등장시켜 이들이 유명 관광지에서 콩트를 하고 가수가 등장해 노래를 하는 형식을 취했는데 <소양강 처녀>, <금산 아가씨> 등 노래에 등장하는 공간들이 영화에 배경으로 등장하였고 장소와 장소를 고속버스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두 명의 코미디언이 등장하여 콩트를 하였다. 그림 6) 김일 시리즈의 3편인 <황금의 이마>(1967)의 검열대본 대본의 크레디트에는 ‘신영영화사 작품’, ‘시네마스코프’, ‘기획 김윤모’, ‘녹음 이재웅’, ‘음악 정윤주’, ‘구성․ 편집 손익동’ 등이 적혀 있다. 그림 7) 국제극장에서 상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만원사례 봉투이다. 그림 8) 잠실체육관에서 열렸던 김일 선수의 챔피언 쟁탈전을 촬영한 <황금의 이마>(1967)의 극장상영용 포스터 을지극장에 개봉한 영화는 만원사례를 낳았다. 문화영화로는 드물게 극장에서 흥행을 하였지만 당대 최고의 인기 가수였던 남진이 등장하는 장면에 장발이 문제가 되어 검열에서 잘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극장에서 볼 수 없게 되었다. 또한 일반인들에게 볼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았던 워커힐 쇼 장면 역시 노출이 심하다는 이유를 들어 삭제되는 일도 겪어야 했다. 그림 9)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검열대본 대본을 보면 ‘삼진영화제작소 작품’, ‘칼라 시네마스코프’, ‘후원 한국연예협회, 한국경제일보사’ 등의 문구가 실려 있다. 그림 10)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1972)의 초대권 을지극장에서 상영을 하였는데 ‘파라마운트 SHOW'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이를 통해 영화 상영 전 쇼를 하였던 당시의 관행을 알 수 있다. 1972년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흥행으로 박희준 감독에게 극영화 연출의 기회가 찾아왔다. 유림흥업주식회사에서 대명제작한 극영화 <그녀>에는 남진, 하춘화, 신성일 등 당대의 스타들이 캐스팅되었다. 하지만 영화는 아쉽게도 완성되지 못했다. 대명제작에 대해 엄격해지는 영화계 분위기와 문화영화와는 다른 극영화의 제작과정에서 오는 어려움 때문에 촬영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장편 극영화 <그녀>는 <강산에 노래 싣고 웃음 싣고> 시리즈 2편에 대한 제작과 함께 제작비를 투자 받은 것이었고 때문에 장편극영화의 중단에도 불구하고 그 남은 제작비로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의 후속편인 2편을 제작할 수 있었다. 그림 11) <노래실은 금수강산>(1973)의 촬영현장. 가수가 노래하는 장면을 촬영 중인데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973년 제작, 감독한 <노래 실은 관광여행>과 <노래 실은 금수강산>은 아쉽게도 전편의 흥행에 미치지 못하였다. 1편 격인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에 출였던 백남봉, 남보원 콤비의 섭외에 실패하여 서영춘, 남성남 콤비를 등장시켰지만 전편의 인기를 넘어서기는 힘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영춘, 남성남 콤비의 인기에 힘입어 지방에서 꽤 흥행을 할 수 있었다. 이들 영화에는 한려수도, 부산, 경주, 제주도 등 전국의 유명 관광지가 등장한다. 박희준 감독은 당시 관광 책자에서 장소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그림 12)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장면. 은방울 자매가 ‘삼천포 아가씨’를 노래하는 장면이다. 카메라 옆에서 연출을 지도하고 있는 박희준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박희준 감독은 당대의 청년문화의 스타들을 대거 등장시켜 <가요대행진>(1975)을 만들었다. 영화에는 조영남, 김세환, 송창식 등 통기타 가수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콩트가 빠진데다가 지방에서 통기타 가수들의 인기는 트로트 가수보다는 덜 대중적인 탓에 영화의 흥행은 그리 좋지 않았다. 그림 13) <가요대행진>(1975)의 촬영 현장. ‘안동 놋다리 밝기’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쇼와 같은 오락, 흥행적 요소를 가진 문화영화를 제작한 문화영화의 흥행감독이다. 문화영화는 주로 계몽, 교육에 목적을 두고 있는데 박희준 감독은 스포츠와 가요, 콩트, 공연 등 당시의 관객들이 흔히 볼 수 없는 볼거리를 제공하는 문화영화를 제작하였다. 박희준 감독은 스스로 이들 영화들의 흥행이유에 <강산에 노래싣고 웃음싣고> 시리즈는 워커힐 쇼, 당대의 인기 가수, 전국 팔도의 경관 등의 볼거리가 재미의 요소였다고 설명을 하였다. 6) 극영화와 텔레비전에서 줄 수 없는 시각적인 스펙터클, 가요와 스포츠라는 대중문화,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으로 새로운 레져로 떠오른 관광 등 이러한 시대적 요소들이 박희준 감독의 작품들이 흥행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1975년 <가요대행진>을 끝으로 박희준 감독은 극장상영용 문화영화의 제작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텔레비전의 보급으로 스포츠와 가요를 극장에서 즐기기 보다는 가정에 즐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박희준 감독은 이후 기업 홍보 영화와 전통문화를 담은 문화 영화의 연출에 주력하였다. 영화업이 허가제에서 등록제로 바뀌어 본인의 회사를 설립하기 전 까지 박희준은 12년 간 프리랜서 감독으로 활동하였다. 그림 14) 박희준 감독이 한일홍보에 근무하던 시절 사진. 감독 뒤로 마네킹들이 보이는데 한일홍보의 투자사가 마네킹 제조업체였기 때문이다. 이 당시 만들었던 영화들로는 부산시청 민원 창구 계몽영화인 <민원서류는 이렇게 처리됩니다>(1975), 새마을운동 홍보 영화인 <어떤 휴일>(1976), 전라북도 산업 및 관광홍보영화 <밝아오는 내 고장>(1977), 농촌새마을 홍보영화 <꿈이 열리는 땅>(1981), 리비아 수출 홍보 영화 <동아콘크리트>(1982), 대구시 홍보 영화 <대구의 향기>(1982) 등이 있다. 한국의 전통 문화를 소개하는 문화영화로는 <돌의 문화>(1984), <한국의 목조 건축>(1985)등이 있다. <한국의 목조 건축>은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에서 우수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그림 15)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이다. 그림 16) 1983년 연출한 군정홍보영화 <풍요로운 남해>의 촬영현장 사진 그림 17) 1988년 <돌과 한민족>으로 제5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을 수상할 당시의 사진 그림 18) 1985년 <한국의 목조 건축>으로 제2회 금관상영화제 순수문화영화 부문 우수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 한 뒤 영화진흥공사 직원과 환담을 나누는 모습 영화업이 등록제로 바뀌면서 박희준은 희보영상을 설립하여 2008년까지 운영하였다. 제6회 금관상영화제 홍보영화 부문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독립기념관>(1989)을 비롯해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와 함께 열린 세계청소년캠프의 기록영화도 제작하였다. 그림 19) 1988년 열린 서울올림픽 국제청소년 캠프의 기록영상을 촬영할 당시 박희준 그림 20) 1986년 아시안게임 주관 방송사인 KBS와 계약을 하고 아시안게임 기록영상을 제작할 당시 기념 촬영한 사진이다. 가운데가 박희준. 1970년대 활발하였던 문화영화제작사들은 1990년대 이후 서서히 사라졌다. 박희준 감독은 텔레비전이라는 거대한 미디어의 등장이 가장 큰 요인이었다고 설명하였다. 또한 필름이 사라지면서 필름을 기반으로 하였던 문화영화사들도 사라지게 되었다고 회고하였다. 1960년대와 70년대 영화가 국가 및 기업의 주요 흥보 미디어로서 기능하던 시기에 민간의 문화영화는 성장하였다. 자연히 문화영화는 국가와 기업의 요구에 맞춰 만들어졌고 극장상영용으로 만들어지기 어려웠다. 박희준 감독은 이러한 환경에서 드물게 극장상영용 문화영화를 만들어 흥행을 하였다. 스포츠, 관광, 쇼 등의 요소를 활용한 볼거리들은 당시 관객들에게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후 텔레비전이라는 강력한 미디어의 등장이 이러한 볼거리에 대한 관객들의 욕망을 담아가기 전까지 이는 한국영화사에서 보기 드문 시도였다. 박희준 감독은 문화영화의 조금 경직된 경계를 허물고 관객에게 다가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였다. 참고문헌) 1) ‘문화영화’란 일반적으로 극장에서 흥행을 목적으로 공개하는 극영화의 상대적인 개념으로서 논픽션 필름(nonfiction film), 다큐멘터리 필름(documentary film), 기록영화와 유사한 개념으로 사용된다. ” 이하나, 「정부수립기~1950년대 문화영화와국가정체성」, 역사와 현실제74호, 한국역사연구회, 2009. 12, 521쪽. 2) 1962년도에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2조에서는 문화영화와 극영화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④본법에서 극영화라 함은 배우를 출연시켜 연극화한 영화로서 문화영화 및 뉴우스 영화이외의 영화를 말한다. ⑤본법에서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 경제, 문화의 제현상중에서 교육적, 문화적 효과 또는 사회풍습 등을 묘사설명하기 위하여 사실기록을 위주로 제작된 영화를 말한다. 이와 같은 법령상의 정의는 문화영화를 설명하는 또 다른 용어인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의 정의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극영화(非劇映畫, Non-theatrical film)를 국어사전에는 ‘극영화가 아닌 영화를 통틀어 이르는 말. 학술영화, 교육영화, 기록영화 따위가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이영일의 글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단편영화로 픽션을 곁들인 극영화와 대립되는 의미를 지닌다. 독일어 Kultur film을 직역한 말에서 왔으며 대체로 다큐멘터리영화의 총칭으로 사용되어 왔으며 극영화・뉴스영화를 제외한 모든 비극영화(非劇映畫)의 총칭으로 쓰여 왔다. 그러나 교육영화・계몽영화 등 그 제작 목적에 따라 명칭이 세분화되기 시작한 뒤부터는 점차 문화영화라는 말이 소멸된 감이 있고, 기록영화라는 명칭으로 불리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다. 역사적으로 문화영화의 효시는 제1차 세계대전 직후 독일이 만든 위생영화(衛生映畫)이며, 독일은 그 뒤 UFA사가 Kultur Film이라는 이름으로 단편의 과학영화를 잇따라 제작하여 문화영화의 전통을 세웠다. 우리나라에서 최초의 기록영화는 1919년 당시의 서울 시가지 풍경을 수록한 <경성 전시(全市)의 경(景)>이다. 문화영화와 기록영화라는 용어는 서로 혼동되어 사용되어 왔는데, 문화영화가 우리나라에서 공용어로 정착하게 된 것은 1973년 전면개정된 영화법에 보면 “문화영화라 함은 사회・경제・문화 등 제 분야에 있어서 교육적・문화적인 효과 또는 사회풍습을 묘사, 설명하기 위하여 제작한 영화를 말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encykorea.aks.ac.kr.) 따라서 문화영화의 범주에 광고와 만화영화가 포함된 배경에는 이러한 극영화와 비극영화의 구분과 정의가 있다고 보여진다. 3) 1962년 제정 시행된 영화법 제11조 (문화영화동시상영)에는 “공연자가 영화를 상영하고자 할 때에는 문화영화를 동시에 상영하여야 한다.”고 고지되어있다. 4) 1965년 3월 9일《경향신문》4면의「연예메모」에 단성사에서 개봉하는 일본 수입 영화인 <역도산>에 대한 안내 기사가 실려 있다. 5) 박희준 감독이 제작 ,감독한 김일에 관련된 영화는 다음과 같다. <역도산의 후계자 김일>(박희준, 1966, 신영문화영화제작사), <극동의 왕자, 김일>(박희준, 1966, 민양프로덕션 제작), <허리케인의 대혈투>(박희준, 1967), <황금의 이마>(박희준, 1967, 신영문화영화제작사). 6) 이정아,「박희준·김청기·한호기」,『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한국영상자료원, 2012, 114~152쪽 참고.
572돌 한글날이 며칠 지나긴 했지만 이번 호에서는 한글 관련 영상을 소개하려 한다. 한국인 감독 김인태 (1931~)가 1967년 캐나다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 NFB)에서 만든 애니메이션 <Korean Alphabet(한글) >이다. 파스텔 보드를 이용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아름다운 동화처럼 표현한 이 작품은 NFB를 대표하는 작가 노먼 맥라렌(Norman McLaren, 1914~1987)이 음향을 맡아 자신의 트레이드마크인 인공 사운드(synthetic sound)를 삽입해 완성도를 높였다. 노먼 맥라렌은 1952년 아카데미 최우수 단편을 수상한 < Neighbours >를 비롯해 다수의 실험적인 작품들을 통해 세계적인 애니메이션‧실험영화 감독으로 알려진 인물로, NFB가 애니메이션과 실험영화의 뛰어난 작품과 작가들을 배출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세계적인 작가 노먼 맥라렌의 참여로 더욱 주목을 받은 <한글>은 1968년 제3회 테헤란 국제어린이영화제에서 금상을 받았다. <한글>의 오프닝 크레디트 <한글>은 오랜 시간 알려지지 않다가 2002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가 주관한 ‘캐나다 애니메이션 특별전’에서 상영되며 발굴된 작품이다. 김인태 감독은 NFB 최초의 한국인 소속작가로 활약한 것이 알려지며 화제를 모았고, 이듬해인 2004년 제8회 서울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에서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은 어떤 배경으로 NFB에서 <한글>을 만들게 된 것일까? 이 글에서는 <한글>이 탄생하기까지 여정을 대한(對韓) 원조 사업과 연계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한글>의 장면들 <한글> 제작 당시 김인태는 한국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Production Center) 소속 감독으로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 연수 중에 있었다. 김인태 감독이 소속되어 있던 국립영화제작소는 1961년 법령에 의해 독립되기 전까지 통칭 ‘영화제작소’라 불렸는데, 이는 1958년 UN과 미국에 대한 원조로 설치된 공보실 영화과의 뉴스와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영화제작 스튜디오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1950~60년대 한국의 공보 선전은 미국에 대한 원조 정책과 긴밀한 연계를 맺으며 진행되었는데 이 영화제작소 역시 카메라, 인화기, 애니메이션 촬영기인 옥스베리(Oxberry) 등의 기계 설비를 구축하는 것부터 인력의 양성까지 다방면에 걸쳐 원조를 받았다. 그리고 NFB를 역할모델로 하여 한국의 교육영화 제작 시스템을 완성하고자 했다. 이 원조 사업에 따라 미국의 전문 인력들이 ‘시러큐스 계약(Syracuse Contract)’이라는 ‘팀’을 이뤄 영화제작소에서 연출, 촬영, 녹음, 미술 등 분야별로 3~5년에 걸쳐 영화 인력을 양성했다. 김인태 감독은 바로 이 교육 인력 양성 사업을 위해 1958년 선발된 영화제작소의 제1기 공채 인력이었다. <Welcome to Motion Picture>(1959)에 등장하는 영화제작소의 전경과 스튜디오 촬영 모습 (좌) 시러큐스 계약 인력과 영화제작소 행정관들의 회의 모습 (우)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들 (이성철 소장자료) 영화제작소는 1958년, 최신식 기재 설치와 시러큐스 계약 인력이 파견되는 것에 맞춰 연출, 촬영, 편집, 미술 등 각 분야의 공채 직원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중 미술부의 인력들은 실사영화에 필요한 제목, 자막 등의 기본적인 미술 작업뿐만 아니라 애니메이션 제작법을 교육받았고, 이에 따라 1958년부터 문화영화에 부분적으로 애니메이션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한국 애니메이션의 큰 줄기 중 하나는 이러한 대한 원조로 진행된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 사업에 맞춰 국립영화제작소에서 이루어졌다. 1950년대 애니메이션 광고를 제외한 소위 ‘최초의 순수 애니메이션’으로 기록되고 있는 작품이 바로 국립영화제작소가 1962년에 제작한 흑백 단편 애니메이션 < 개미와 베짱이 >( 박영일 연출, 정도빈 작화) 이다. <개미와 베짱이> 이후에도 국립영화제작소는 미술부의 박영일과 정도빈 그리고 한성학 등을 중심으로 여러 편의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했다. <개미와 베짱이> 홍익대학교 미대 출신의 김인태 감독은 아쉽게도 국립영화제작소에서는 애니메이션 제작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대신 그는 교육영화 전문 인력 수련 후 <전화가설>(1959), <전화도수제>(1961), <자동전화는 이렇게>(1962), <전화를 쓸 때는>(1962) 등의 체신 교육영화와 <치아와 건강>(1961), <기생충을 없애자>(1963) 등의 보건위생 교육영화를 비롯해 다수의 문화영화를 감독했다. 그는 국립영화제작소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NFB에서 <한글>의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특히 한국에서 이미 작품을 통해 깊은 인상을 받은 노먼 맥라렌과의 만남은 이 작품의 완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 김인태 감독의 국립영화제작소 시절 영화들 그렇다면 김인태 감독의 노먼 맥라렌 작품 관람과 NFB 연수는 어떠한 과정으로 이루어진 것일까? 그 배경에는 1961년 12월 NFB와 국립영화제작소 간에 맺어진 문화영화 교환협정이 있었다. 양측은 이 협정에 따라 서로의 영화를 교류했는데 일례로 국립영화제작소는 NFB에 <새로운 고향>(양종해, 1961)을 배급하고, NFB의 <협동조합>과 <의자공과 소년들>을 들여와 우리말로 내레이션을 녹음해 상영하는 식이었다. 이와 같은 문화교류 배경에는 원조 사업 초기 영화제작소가 모델로 상정한 NFB의 제작 시스템이 큰 영향을 끼쳤다. NFB는 분야별 소재에 따른 분업화와 1인 제작 시스템을 적용하는 데 역할모델이 되었다. 이에 따라 국립영화제작소의 문화영화 감독들은 NFB의 영화들을 시사하고 제작에 참조했으며, 최봉암, 김인태 등의 감독들이 1960년대 중후반 캐나다 외무성의 지원을 받아 NFB에서 연수를 받게 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의자공과 소년들>의 오프닝 크레디트: 문화영화 교환협정을 사전 공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식 영화제작 시설로서 시청각에 의한 매스컴의 총아로써 영화가 지닌 사명을 다하는”(<Welcome to Motion Picture>) 목적하에 설립된 영화제작소는 교육영화 분야에서 애니메이션 인력을 비롯한 다재다능한 인력을 양성하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지만 박정희 정권하에서 국립영화제작소로 확대 개편되며 원조사업 진행 당시 집중되었던 교육영화 제작 인력 양성이라는 목표를 넘어 정부 선전을 위한 영화제작에 치중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 이 글은 공영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선전 애니메이션과 1950~60년대 한국 국립영화제작소 애니메이션의 관계」, 한국영상자료원 엮음, 『지워진 한국영화사 – 문화영화의 안과 밖』, 한국영상자료원, 2014와 공영민, 「<의자공과 소년들> 해제」, 허은 엮음, 『영상, 역사를 비추다: 한국현대사 영상자료해제집 7-국립영화제작소 문화영화해제집 1』, 선인, 2017에서 일부 발췌하여 엮었음을 밝힌다. 출처 <Korean Alphabet> - NFB 누리집 https://www.nfb.ca/film/korean_alphabet / ; 한국영상자료원 소장자료 < 개미와 베짱이 > < 전화를 쓸 때는 > < 치아와 건강 > < 의자공과 소년들 > -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Welcome to Motion Picture >(1959) - 한국영상자료원 테드 코넌트(Theodore Richards Conant) 콜렉션 소장자료 이순진, 「김인태 편」, 한국영상자료원 편, 『2012년 한국영화사 구출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문화영화 1: 김인태‧이지완‧이정섭』, 한국영상자료원, 2012.
시각 예술의 소명이 문학의 재현에서 탈피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었다. 예술의 자율성을 극단까지 밀어붙인 것이 추상 회화였고, 애니메이션계에서 궤를 같이한 것이 오스카 피싱거의 작품을 비롯한 추상 애니메이션이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애니메이션은 서사에 종속적인 매체로 여겨졌다. 상당수 작가들이 그에 동의하지 않았고 새로운 창작방법론을 제안하기도 했다. 예컨대 캐나다의 노먼 맥라렌이 제창한 ‘메타모포시스’는 NFBC 소속의 많은 작가에게 영향을 미쳤다.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란 한 화면에서 다른 화면으로(혹은 한 사물이 다른 사물로) 마치 의식의 흐름처럼 이어지는 연출법으로, 영화의 디졸브 등과 달리 애니메이션만이 가능한 프레임 단위에서 조절되는 창작 방법론이었다. 메타모포시스는 애니메이션의 기본 문법으로 장착되기에 이른다. 프레데릭 백의 < 나무를 심은 사람 > 역시 그 흐름의 한 가운데서 창작된 작품으로, 그 분석과 평가에서 메타모포시스에 대한 언급이 빠지지 않는다. 문학을 재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가장 고전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지만, 동시에 당대 첨단의 창작 이론을 수용했다. 장 지오노 원작의 < 나무를 심은 사람 >은 그 자체로 이미 고전이지만, 동시에 프레데릭 백이 제작한 동명의 단편 애니메이션 역시 고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 작품은 화자이자 관찰자인 여행자가 발견한 엘제아르 부피에의 이야기다. 고독한 노인 엘제아르는 황량한 땅에 꿋꿋이 참나무를 심었고, 결국 결실을 맺어 그 지역을 풍요로운 마을로 되살린 것이다. 프레데릭 백은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환경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은 자연히 원작에 대한 존경으로 이어졌으리라 짐작된다. 실제로 < 나무를 심은 사람 >의 애니메이션화는 그의 오랜 염원이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시각적 재해석보다는 충실한 재현이 주를 이룬다. 일반적으로 메타모포시스가 심오한 의식의 흐름 혹은 자유로운 이미지의 연쇄로 연출되는 반면, < 나무를 심은 사람 >에서는 문학 서술의 직접적인 반영에 그친다. 흥미로운 재해석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노련한 장인의 솜씨다. 보기 드문 장인 정신과 원작의 엘제아르 부피에가 보이는 헌신적인 노력이 맞물려 절묘한 감동을 자아낸다. < 나무를 심은 사람 >에서 느껴지는 이러한 감회는 작품의 마지막 장면에서 특히 잘 살아난다. 노인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는데, 카메라의 줌인을 쓰지 않고 한 장 한 장 새로 그려 더 세세하게 묘사한 얼굴이 다가온다. 부피에의 눈까지 이어지는 이 클로즈업은 우리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듯한 착각까지 불러일으킨다. 영화에서 클로즈업은 카메라 렌즈의 줌인 방식과 카메라 자체를 이동하는 방식 두 가지로 나뉜다. 큰 차이가 없을 것 같지만 영화감독들 사이에서는 상당히 중요한 방법론의 차이로 언급된다. 애니메이션의 경우, 그려놓은 그림을 카메라 줌인하느냐, 한 프레임 한 프레임 새로 그리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 차이는 극명하다. 한 프레임 단위로 다가오는 엘제아르 부피에의 얼굴은 그의 존재를 물적으로 존재하게끔 하고 그의 정신까지 엿보게 만든다. 주름진 얼굴에서 오버랩되며 이어지는 장대한 숲은 그의 인간적 위대함을 환기한다. 한 인간의 깊이를 포착해낸 뛰어난 연출로서 개인적으로 손꼽는다. 끈기와 인내라는 미덕을 충실히 묘사할 수 있었던 것은 역시 그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애니메이션 창작에 임한 프레데릭 백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 작품이 감동적인 것은 단지 작품 속 주인공이 거둔 위업과 그 내용에 국한되지 않고, 프레데릭 백의 헌신적인 창작 태도가 겹치며 작품의 주제를 강화하기 때문이다. 삶과 작품의 일치, 그것이 필수 불가결한 미덕은 아니지만 선량한 가치를 추구하는 작가가 이룬 드문 성취이기에 더욱 뜻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