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수권
- 감독
- 최우영
- 제작년도
- 1978
- 출연
- 여수진, 여소룡, 박동룡, 심상천, 한명환, 김왕국, 피터, 마도식, 태일, 양사, 남석훈, 김기범, 장력, 유성, 나갑성, 정영국, 이석구, 정주현, 마이클 B. 크리스티
대한민국 입시를 다룬 다큐멘터리나 보도물은 수없이 많다. 그만큼 대입이란 이슈는 한국사회의 모든 문제, 모순과 갈등을 응축한 중요한 사건이라는 얘기다. 수능 시험일은 한국사회의 일상이 잠정적으로 중단 내지 조정되는 시간이다. 군부대도, 경찰서도, 민간기업도, 하물며 항공 운항조차도 입시를 위해 각자 일상의 스케쥴을 조정한다. 원활한 입시 진행을 위해 민관이 동원되는 상황을 국민들은 기꺼이 이해한다. 참으로 이해할 듯하면서도 이해하기 힘든 현실이다. 그저 대학 시험일 뿐인데! 힘들어 죽겠다고 모두들 아우성을 치는 데도 나아질 기미 없이 수십 년 이상 지속되고 있는 것을 보면, 확실히 ‘대입’이라는 사건은 대한민국 모두가 연루된 거대한 사건인 것만은 분명하다. 영화는 대학 입시 하나에 대한민국 전체가 울고불고 요동치는 그로테스크한 현실을 더더욱 낯설고 기괴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스타일 면에서 압도적이다. 이 영화를 통해 우리가 접하는 것은 교육 관련 다큐들이 진즉에 지적해온 문제점들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거대한 미로에 갇혀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집단적 악몽의 곤혹스러움 자체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범죄 드라마적 서스펜스와 초현실주의적 악몽의 분위기를 물씬 풍기면서 헤어날 수 없는 음모론적 세계의 폐소공포증을 선사한다. 이러한 세계-시스템 속으로 절대 끌려들어 가고 싶지 않지만 자신 역시 예외일 수 없음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는 관객의 등줄기를 타고 올라오는 스멀스멀한 불안함이야말로 이 영화의 관객들이 체험하는 낯선 감정의 실체다. 시스템 밖으로 탈출하기 위한 소수의 몸부림에도 불구하고 결국 대부분 순응하고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거대한 개미지옥. 영화가 조여오는 묵직함은 관객 역시 그 지옥을 벗어나지 못하고 허우적거리게 만든다. ‘열심히 공부하라’는 현실논리만으로 대한민국 ‘입시’라는 관문을 헤쳐 나가기는 버겁기 짝이 없다. 그래서 대입이라는 필생의 통과의례에는 수험생을 둔 가족을 비롯해서 사회 전체가 가담하는 준 종교적 제의가 따라붙는다. 영화는 종파를 초월해 아이들의 입시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범종교계의 기도와 제의 장면들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모습과 수시로 교차시킨다. 목사와 승려는 아이들의 이름을 부르며 그들의 대입 성공을 기원하고, 부모들은 정성을 모아 삼보일배를 하고 눈물로 기도한다. 사실 한국인이라면 누구에게나 익숙한 풍경이다. 그러나 이질적인 색감과 사운드를 통해 재현된 이 이미지들은 그 익숙함을 잃고 한없이 낯설고 기괴한 풍경으로 변모한다. 영화는 수능 시험일이라는 시간을 D- day, 즉 심판의 날로 설정하고 그 심판의 날에 맞춰 모든 일상을 셋업한 아이들과, 각계각층을 망라한 집단적 기원의 장을 기괴한 색감과 소리로 표현한다. ‘SKY’는 이러한 집단적, 종교적 열망을 상징하는 주술적이고 중의적인 기표이다. 학생도 부모도 모두가 ‘SKY’라는 허상을 향해 기약 없는 줄달음을 칠 때, 그들의 불안함을 어루만지는 것은 다름 아닌 거대 사교육 시장의 스타 강사들이다. 과거 공자나 예수, 부처와 같은 신과 성인의 자리를 차지한 이들 스타 강사들은 갈대처럼 흔들리는 불안한 고3들을 SKY라는 낙원으로 이끄는 사제 역할을 자처한다. 영화의 중간중간 삽입된 현실과 괴리된 공자의 말씀이 종종 현실의 부조리를 도드라지게 하면서 헛헛한 웃음을 유발할 때, 영화는 이 사교육 시장의 스타 강사들이 대입이라는 통과의례를 주관하는 신흥 교주 내지는 사제가 되었음을 은연중에 암시한다. 영화에 사용된 사운드는 이 영화의 기괴한 낯섦-이화효과(異化效果)를 극대화하는 증폭기 역할을 한다. 필립 글래스고의 음울한 음악이 시종일관 영화 전체에 불안함과 어두운 그림자를 강하게 드리우면서 관객의 무의식에 파고들던 에롤 모리스의 작품 < 가늘고 푸른 선The Thin Blue Line >(1988) 처럼, 이 영화 음악 역시 영화의 분위기, 톤을 주조하면서 전반적인 영화의 인상을 각인시키는 데 핵심적인 기능을 한다. 이 영화의 스태프 상당수는 외국인들로 이루어졌다. 최우영 감독과 함께 공동 연출자로 이름을 올린 벨기에 출신의 스티븐 두트 감독을 비롯한 다수의 외국인 스태프들, 그들의 시선은 한국사회의 풍경을 한층 더 낯설게 보면서 영화의 이질성을 강화하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가 바라본 한국사회의 입시 광풍은 도처에서 질병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지만, 나 역시 저 대열(SKY)에 합류하고 싶다는 우리들의 분열적 욕망으로 인해 해결 불가능한 무한 반복의 폐쇄회로를 맴돌고 있다. 이 영화의 궁극적인 힘은 사회적 질병을 명료한 언어로 진단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대신, 우리 욕망의 맹목성을 무의식의 언어로 파고들었다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로 인해 영화의 소재가 충분히 익숙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생경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데 성공했다. 그저 남보다 우월하기 위해 끝없이 달리는 욕망의 맹목성에 대한 자각에도 불구하고, 이 경주가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은 우리를 사로잡는 근본적 두려움이자 좌절감이다. 지옥이란 그런 것이다. 이 영화는 ‘대학입시’라는 현상을 통해 우리 사회의 욕망의 지옥을 그려낸다. 그 지옥의 낯설고도 강렬한 인상 때문에 우리는 한동안 영화 앞에 멈추어 그 지옥의 불구덩이를 응시하게 된다.
짝퉁 이소룡의 역사에서 가장 현기증 나는 대목은, 그들의 다채로운 영어이름이다. 이소룡의 ‘Bruce Lee’ 라는 원래 이름에서 ‘L’을 돌림자 삼아 이렇게나 많은 변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나훈아 로부터 너훈아, 나운하, 나운아, 나윤아, 노훈아가 파생된 것처럼 말이다. 지난 회 < 일소일권 >으로 소개한 거룡은 ‘Bruce Lei’이고, 또 다른 짝퉁 이소룡 배우들인 하종도 는 ‘Bruce Lai’, 유가영은 ‘Bruce Lau’, 장정의는 ‘Bruce Lea’, 우양은 ‘Bruce Ly’,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여소룡 은 이러한 부동산 ‘알박기’ 경쟁에 뒤늦게 뛰어든 관계로 ‘Bruce Le’라는 어딘가 이름을 짓다 만 것 같은 소심한 이름을 썼다. 물론 유가영은 이후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으로 더 유명해졌고, 거룡 의 경우 ‘Dragon Lee’라는 보다 멋진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이미 포화상태인 ‘Lee’를 리모델링하느니 굳이 ‘Bruce’라는 단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대한남아의 기개를 보여준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물론 그들은 패티김 과 패튀김이 함께 활동했던 것처럼, 이소룡이 죽기 이전부터 짝퉁으로 활동했다. 여소룡 은 수많은 짝퉁들 중 가장 진짜와 닮았던 배우다. 쌍꺼풀이 없어서 클로즈업을 하면 곤란하지만, 멀리서 보면 전혀 분간하지 힘들 정도로 체격이나 움직임이 오리지널 이소룡과 판박이다. 쉽게 말해 ‘얼굴만 가리면’ 이소룡이다. 그런데 여소룡은 한국인이 아니다. 대만 출신으로 홍콩에서 활동하던 중, 역시 홍콩으로 건너가 쇼브라더스에서 활약했던 수많은 한국 액션배우들 중 하나인 남석훈 의 눈에 띄어 한국에서도 활동하게 된 것. 이수현 주연 ‘아시아 슈퍼히어로’ 영화 <중국초인>(1975) 등에 출연했던 그는 이소룡의 < 당산대형 >(1971)의 흥행에 힘입어 나열, 진혜민 등과 함께 그 아류작인 <당산제자>(1976)에 출연했고 이후 <용문비지>(1976), <충렬정무문>(1977), < 벽력용권 >(1978) 등 주로 강홍 감독의 영화에서 짝퉁 이소룡으로 활동했다. 바로 여기서 남석훈을 만나게 됐다. 한편 <황금첩혈>(1979) 등을 연출하는 등 나중에는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화천공사가 거룡을 발굴했다면, 여소룡 은 남아진흥공사에서 만든 남석훈 의 < 속 정무문 >(1977), 태창흥업에서 만든 최우형 의 < 십자수권 >(1978) 등에 출연했다. 역시 홍콩 액션배우 진성이 함께 출연한 <속 정무문>은 단성사에서 개봉해 6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제법 성공을 거둔 셈이다(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에서 VOD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입하지 못한 마이너리거가 한국 프로야구팀에서 와서 활동하는 경우랄까. 지금껏 한국 액션배우들이 홍콩으로 ‘수출’되기만 한 것으로 알지만, 그런 반대의 역사도 있었던 것이다. <십자수권>은 최우형 감독의 데뷔작으로 홍콩, 대만 등지로도 수출되어 <사망마탑>(死亡魔塔)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그는 나름 ‘정통’ 무술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감독으로 < 사형사제 >(1982), < 여걸 청나비 >(1983) 등을 만들었으며 < 기문사육방 >(1983)의 경우 유일하게 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에서 VOD로 관람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쉰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 < 십자수권 >에서 여소룡 은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한국인의 아들로 나온다. 그리고 돈에 팔려간 누이동생을 찾아 군벌들이 일본과 내통하여 혼란스러운 중국 땅에 나타나, 부패 군벌이 주관하는 무술대회에 출전한다. 한국식 ‘만주 웨스턴’ 장르에 < 용쟁호투 >(1973)와 < 사망유희 >(1978)가 적당히 뒤섞인 이 이야기에서 여소룡을 두고 이소룡과 가장 닮았다고 말하는 건, 바로 노란색 트레이닝복 ‘간지’가 그와 무척 흡사했기 때문이다. < 일소일권 >의 거룡의 노란색 트레이닝복, 혹은 역시 거룡이 출연했던 <쾌권괴초>(1979)에서 장일도가 입었던 노란색 트레이닝복이 지나치게 굵은 옆줄로 인해 동일시를 방해했다면, 여소룡은 정말 비슷하다. 하지만 같은 의상이라도 홍콩의 도심이 아닌 한국의 용인 민속촌을 배경으로 삼았기에, <속 정무문>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와 눈 내리는 민속촌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다소 어안이 벙벙하다. 그나마 <십자수권>은 <사망유희>의 마지막 액션신이 펼쳐지던 5층 구조를 그대로 모방했기에 나름 실감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리지널보다 더 강한 볼거리를 액션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한 층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고수는 수십 마리의 뱀을 내던지며 그 뱀으로 목을 조르며 싸우는 기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액션 연출이 뛰어나건 어쨌건 간에 어쩔 수 없는 B급의 향기랄까. 그럼에도 다른 짝퉁 이소룡 영화들과 차별점을 갖는 부분이라면, 역시 ‘흑형’과의 대결이다. 사실 이소룡이 < 용쟁호투 >에서 실제 가라데 고수이자 배우인 짐 켈리, < 사망유희 >에서 카림 압둘 자바 등 흑형들과 싸우는 장면은 꽤 중요한 이미지다. < 십자수권 >에서 다채로운 권법을 사용하고 화려한 돌려차기를 구사하는 흑형과의 대결은 꽤 볼만하다. 가령 <쾌권괴초> 등에 등장했던 흑인 배우는 단지 구색 맞추기였을 뿐, 너무나 어이없는 무술 동작으로 실망만 안겨준 것에 비하면 상당한 퀄리티다. 이렇듯 왠지 서오릉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중국인 여소룡 과 머리에 두건을 두른 흑형이 쿵푸 대결을 벌이는 기묘한 풍경에 괜히 숙연해진다. 오른쪽 칼을 든 사람이 양사 더 숙연해지는 이유는 당당한 체구의 배우 양사 때문이다. < 용쟁호투 >(1973)에서 이소룡과 대결을 펼쳤던 그는 < 십자수권 >에서는 여소룡 과 싸웠고, <쾌권괴초>에서는 장일도와 싸웠다. 급기야 < 용재강호 >(1986)에서는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와도 싸웠다. 말하자면 이소룡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아류들과도 다 싸웠다. B무비이기에 가능한 설정일 텐데, 세상 어디 그런 배우가 있을까. 또 하나, ‘백옥과도 같은’ 피부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미모로만 따지면 개인적으로 역대 한국 여배우 중 세 손가락 중 한 명으로까지 꼽고 싶은 여수진의 존재다. 박노식 의 < 광녀 >(1975)에서 박노식의 연인이었고, < 폭력은 없다 >(1975)에서 박형사(박노식)가 오랫동안 지켜봐온 광일(원선)의 연인으로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이런저런 B무비에서만 활동하다 사라졌던 안타까운 배우다. 여수진 여소룡 감독: 최우영 각본: 허진 개봉극장: 청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