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원 윤현숙의 본능게임
- 감독
- 김성덕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최종원, 윤현숙
영화란 무엇인가. 아주 오래된 질문이다. 이제는 아무도 이런 질문을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한때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손에 들어보았을 앙드레 바-쟁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질문에는 이제는 어렴풋한 향수마저 깃든 느낌이다. 이런 질문을 할 때에는 보통 영화를 알고 싶다는 욕망이 전제된다.(그냥 폼 잡으려고 책장에 비치해놓은 사람도 적지 않은 모양이긴 하지만) 움직이는 그림과 소리가 만들어내는 이 매체는 재미있게도 ‘시간’에 대해서 마술을 부리며 ‘예술’의 이름을 부여받았다. 단순히 활동사진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영화들이 나타나면서 오히려 ‘영화란 무엇인가’란 질문의 답은 점점 더 멀어져만 갔다. 진리와도 같았던 이른바 아트 하우스 영화들이 몰락하고 오히려 쓰레기 취급을 받던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마술을 부리기 시작하고... 아아 도대체 영화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질문에 온몸으로 부딪힌 사람이 있었다. 그 이름도 거칠거칠한 최야성 감독. 그는 무려 20세에 < 검은 도시 >를 감독하며 (아직도 깨지지 않는) 최연소 감독의 기록을 가지게 된 사람이다. 2014년 현재까지 총 7편의 영화를 감독한 그는 충무로의 아웃사이더였고 영화광들의 조롱거리였으며 본인 스스로는 ‘여자 대신 고정관념을 벗기며’ ‘창작, 독창성으로 세계적 쇼부를 치는’이라 말하는 영화감독이었다.(다 본인의 실제 언급이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본인만의 영화제작 3대 원칙을 제시했다. 첫째, 남들이 한 것은 절대로 하지 않는다. 둘째, 최소한의 제작비만을 사용한다. 셋째, 가장 사실적인 것이 가장 영화적인 것이다. 라는 것이다. ( < 로켓트는 발사됐다 >의 DVD 서플먼트에 들어간 이 인터뷰에서 3대 원칙 중 2번째 원칙을 설명하며 술값을 아끼려 사무실에서 김치에 병맥주를 마시는 알뜰 넘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최야성 감독 3대 영화제작 원칙 < 로켓트는 발사됐다 >는 이 세 가지 원칙을 충실하게 지켜나간 작품이다. 이 영화의 홍보 카피이기도 했던 ‘노 시나리오, 스냅무비’(무슨 뜻인지는 잘 모르겠지만)로 남들이 했던 것을 피해갔고, 모든 배우들을 ‘이게 세계적으로 되는 영화예요. 한 번 도와주세요.’로 잠깐잠깐 우정 출연시켰기에 제작비가 거의 안 들었다. 또한 가장 사실적인 것을 위해 최야성 감독은 이 영화의 스토리라인으로 ‘영화를 찍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감독’인 자신의 이야기를 담았다. 일단 본인의 3원칙은 지킨 셈이다. ‘영화를 찍는 것에 대한 영화’를 생각하면 일단 톰 디칠로의 < 망각의 삶 >이 떠오른다. 스티브 부세미가 분한 독립 영화감독은 촬영장에서 발생하는 온갖 변수와 상상도 할 수 없었던(그러나 일단 발생하니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을 겪으며 자신이 그렸던 완성과 점점 멀어져가는 상황을 속 터지게 지켜본다. 그래도, 그런 영화 현장에 대한 사랑과 애정을 버릴 수 없다는 결론으로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웃음과 낭만, 그리고 씁쓸함이 교차하는 수작이었다. 그러나 <로켓트는 발사됐다>는 안타깝게도 그런 영화 만들기의 고단함보다는 땡처리 옷 장사의 어려움이 더 리얼하게 그려져 있었으니... 만약 어떤 영화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상영시간을 비례로 ‘핵심내용’을 말해야 한다는 법 같은 게 있다면 애석하게도 < 로켓트는 발사됐다 >의 내용은 영화를 찍는 것과 별로 상관이 없어진다. 이 영화의 대부분은, 땡장사(‘사장님이 미쳤어요!’류의 문구로 호객하여 떨이로 의류를 판매하는 형태) 옷 장수 최야성 사장이 경영난에 허덕이다가 결국 아르바이트로 위장한 양아치들에게 뒤통수를 맞고 옷을 도둑맞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90분의 상영시간에서 60분이 대충 이런 내용에 유명 배우들의 우정 출연으로 연출된 ‘썰렁 때리는’ 개그들이다. 우리는 시나리오 없이도 충분히 훌륭한 영화가 제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로켓트는 발사됐다>는 그런 류의 영화가 아니다. 이 영화의 감독이자 제작자이며 주연배우이기도 한 최야성 감독이 당시로선 신선한 시도를 한 것은 그럭저럭 인정해줄 수 있다. 한 가지 그가 착각했던 것은, ‘아무도 안 한 것’이 ‘아무도 생각 못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에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이름이 자주 호명된다. 독창성, 신선함의 상징으로 최야성 감독이 닮고 싶어하는 감독인데, 그는 옷가게 구석 소파에 누워 < 저수지의 개들 >을 보며 ‘타란티노를 재끼는’ 영화를 만들겠다며 중얼거린다. 문제는 그 중얼거림이 영화를 만들기 전의 다짐 같은 것이 아니라 관객이 보고 있는 영화의 한 숏 이라는 것이 문제다. 어찌어찌 유명 배우들을 만나 영화출연을 타진하며 ‘세계적으로 쇼부를 보겠다’고 수 없이 다짐을 하지만 그 다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 다짐하는 과정을 봐야만 하는 관객은 그래서?? 어쩌라고?? 뭐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다. 영화는 <로켓트는 발사됐다>의 크랭크 인 장면에서 끝난다. “하여튼 영화 하나 찍기 되게 힘드네.” 라고 지나가듯 말하는 그 장면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봤던 배우들이 사실 영화의 스태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내가 본 장면들의 촬영이 이제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끝과 시작이 맞붙어 있는 순환구조. 돌고 도는 인생사. 색즉시공 공즉시색. 감독이 자신만만(사실 그리 자신만만하지도 않다. 영화상 보이는 그의 태도나 말투는 거의 기어들어가다시피 하다. 안쓰러워...) 하게 말한 것 같은 영화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28살의 어린 영화감독이 뭔가 다른 것을 하고자 하는 안간힘을 볼 수 있어 재미있다. 카메오 비슷하게 출연하는 중구난방의 배우들. 그 리스트는 다음과 같은데, 최종원 , 김보성 , 현석 , 독고영재 , 허준호 , 박준규 , 조상구 , 박상면 , 가수 정광태 , 개그맨 김용 (이 분은 아예 조연급 분량이다), 시인 원태연 , 영화감독 김기덕 , 김두영 (영화 마니아들의 압도적 지지를 받는 < 주글래살래 >의 바로 그 감독이다.) 등 그야말로 다국적군이라 불릴만한 우정의 무대를 보는 재미가 있다. 어떻게 캡쳐 뜨나 했더니... 감사한 포스터 1997년은 한국 영화 르네상스의 스타트 같은 해였다. 이창동 감독의 < 초록물고기 >, 김성수 감독의 < 비트 >, 송능한 감독의 < 넘버 3 >가 차례로 개봉했고 장윤현 감독의 < 접속 >, 임권택 의 < 창 >, 배용균 감독의 < 검으나 땅에, 희나 백성 > 역시 이해에 개봉했다. (흥행은 못했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박찬욱 감독의 < 3인조 >도 같은 해 공개되었다.) 이런 좋은 작품들이 쏟아질 때, < 로켓트는 발사됐다 >는 개봉관을 한 곳도 잡지 못하고 3주간의 무료 상영을 했다. 다시 언급되어야 할 가치가 있다거나 당시 평가받지 못한 좋은 점이 있다고 말하긴 어렵지만, 영화가 이상이며 꿈이었던 시절의 향수가 남아있는 작품 같아 길티 플레져 비슷한 호감이 생긴다. 신선한 시도와 트래쉬 무비 사이 어디쯤에 어정쩡하게 서 있는 이 영화를 뭐라고 평가하든 별로 중요한 일은 아닐 것이다. why not? 아님 말구! 감독 최야성 은 <로켓트는 발사됐다> 이후 2편의 영화를 더 제작, 감독하고 현재는 MC야성 이라는 이름의 가수로, 3건의 특허를 등록한 발명가로, 중견화가 조범제 화백의 매니저로... 하여간 바쁜 삶을 살고 계신다. 과연 도전의 귀재라 불리는 사내답다. 최야성 독고영재 김보성 감독: 최야성 각본: 최야성 개봉극장: 시네마천국(서울) 관람인원: 693명
많은 사람들이 김수용 감독에게 문예영화의 대부라는 호칭을 사용한다. 그만큼 그는 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를 많이 만들었고, 그 성취 또한 뛰어났다. 그러다보니 인구에 회자되는 그의 대표작들은 대부분 문예영화들이 차지하고 있다. 더불어 김수용 감독은 한국에서 가장 많은 영화를 만든 감독으로도 고영남 감독에 이어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일까? 그의 작품세계는 멜로, 코미디, 드라마를 비롯, 심지어 국책영화까지 실로 다양한 장르가 혼재하고 있다. 이토록 다양한 그의 필모그래피의 정글에서 60년대 창작의 황금기에 발표된 혈기왕성한 예술세계에 경탄했고, 70년대 후반 < 야행 >, < 화려한 외출 >, < 웃음소리 >등에서 보여준 스타일 실험에 감탄했다. 하지만 대표작들이 뿜어내는 아우라의 틈바구니에서 주목 받지 못하고 기억에서 사라진 몇 몇 작품들을 통해 받았던 감동은 짙다. 1980년 작품 < 하얀 미소 >가 바로 그 영화들 중의 하나다. 젊은 날의 금보라와 김영철이 주연으로 출연하고, 이혜숙의 앳된 미모를 새삼 느껴보고, 조금 더 눈썰미가 있다 싶으면 단역으로 출연하고 있는 최종원의 모습을 발견하는 재미는 덤이다. < 하얀 미소 >는 정규학력을 인정받지 못했던 전수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를 70년대 후반 대세였던 하이틴 영화의 모양새로 만든 작품이다. 그러나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채 판타지와 코미디로 점철되고 말았던 하이틴 영화들과는 달리 이 영화는 당대 한국사회의 폐부를 직시한다. 당시 한국사회는 국가적 경제성장에 한창 열을 올리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경제적 약자를 보듬을 수 있는 사회적 제도에 대한 의식이 부족했다. 그러다보니 이런 아이들의 문제를 단순히 개인의 열등감에서 비롯된 반항심으로 축소해 단순화시키려는 경향이 있었다. 즉, 사회적 책임을 개인에게 묻고 있다는 것이다. < 하얀 미소 >는 명문대학을 졸업했지만 다리를 절고 있다는 이유로 정규학교로 발령받지 못하고 전수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유선희 선생( 금보라 )과 반항아 권투선수 김종팔( 김영철 )의 스토리를 중심에 두고, 학교라는 공간과 같은 반 아이들의 이야기를 씨줄과 날줄로 엮으며 당시 한국사회의 문제였던 가난과 열등감, 차별의식을 보여준다. 김수용 감독은 전수학교 뒤로 서울시가지를 배치시키지만, 그 빌딩숲은 그들에게 희망을 꿈꾸게 만들진 못한다. 오히려 서울이라는 공간으로 대표되는 한국이라는 사회는 그들에게 폭력적이다. 그래서 그들은 서울이라는 공간에 무관심하다. 석래명 감독의 < 고교얄개 >가 가난한 호철( 김정훈 )의 옥탑방 문밖으로 보이는 빌딩숲을 통해 희망을 이야기 하는 것과는 대조적인 방식이다. 하이틴 영화가 동세대의 관객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은 아마도 막연하다 할지라도 내일에 대한 희망을 꿈꿀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김수용 감독은 막연한 희망 대신 그 희망 속에 감춰진 사회의 비정함을 먼저 보길 원했던 것 같다. 그래서 내일에의 희망을 저 너머에 있는 어딘가가 아니라, 지금 발 딛고 있는 이 땅위에서 피어 올리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전수학교 아이들의 스토리는 리얼리티로 다가오게 된다. 그렇게 김수용 감독은 젊은 관객들에게 희망을 판타지가 아닌 살아있는 현실로 제시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멋지게 시각화하고 있다. 나는 그 어떤 외국의 유명한 영화에서도 < 하얀 미소 >에 등장하는 해바라기만큼 아름답고, 예쁜 해바라기를 보지 못했다고 감히 생각한다. 비토리오 데 시카의 영화에 등장했던 그 압도적인 해바라기 숲도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몇 포기의 해바라기의 아름다움엔 비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이런 장면이다. 정학을 맞은 종팔이 교도소에 있는 아버지를 면회하고 집으로 가는 길에 본. 몇 포기의 해바라기는 바로 종팔의 순수함을 우회적으로 드러낸다. 그리고 집에는 유선희 선생이 해바라기 같은 미소로 종팔을 기다리고 있다. 종팔은 비로소 열등감과 패배감 대신 희망이라는 단어를 떠올린다. 종팔이 선생을 배웅하는 버스정류장 장면에서 질서 없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해바라기 꽃은 어떤 컴퓨터 그래픽도 절대 만들어낼 수 없는 감성을 향기 대신 풍기는 명장면이다. 그야말로 희망을 이야기하는 가장 멋진 미장센 중의 하나다. < 하얀 미소 >는 김수용 감독이 심혈을 기울인 문제작들 틈바구니에서 잠시 호흡을 위해 쉬면서 툭 던져놓은 작품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흥행에도 대참패를 했고, 그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잊혀진 작품 속에서 진주를 발견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도 없다. 다만 한 개인의 맑은 심성에 기대어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고자 하는 감독의 관점은 역시 시대의 검열이 심어놓았던 한계였던 것일까? 아니면 김수용 감독의 세계관인 것일까? 우리는 어쩌면 이런 작품들 속에서 진정한 감독의 무의식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금보라 김영철 이영호 이대로 감독 김수용 각본 정지영 촬영 안창복 음악 강근식 미술 김유준 편집 김희수 1980년 95분 칼라 판매원 한양비디오프로덕션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0058
시절이 하수상하니 잠도 잘 오지 않는다 했던가? 요즘의 영화판을 보자면 도무지 어떤 법칙으로 흘러가는지 알다가도 모를 판이다. 상업영화들도 투자가 메말라 작품수가 줄어들고 있고 좀처럼 신인작가나 실험적인 작품들이 나올 수 없는 구조에서 마케팅에 더 열을 올리는 작품들이 양산되고 독립영화는 그야말로 완전히 독립된 조건에서 영화를 만들어야하는 극단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상황이 이러하니 시장의 위축이 기본적인 전제이지만 독립영화 역시도 예전의 작품들에 비해 도전과 모험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형국이다. 더군다나 지원은 아예 바라지도 않고 탄압만 하지 않기를 바라는 지경이니 세월의 시계가 한참이나 되돌려진 것 같다. 다른 예술영역들도 고전하기는 마찬가지겠지만 기술의 발달로 많은 부분의 일손을 덜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영화는 기본적으로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예술장르다보니 더욱 어려운 지경이다. 문화체육관광부로 위시되는 정부의 문화정책 전반이 퇴행적 기조로 흐른다는 사실을 모르는 분은 없겠지만 영화의 영역에만 한정해서 보면 영화진흥위원회가 갈지자 행보를 걷다 못해 이제 더 걸을 수도 없을 것 같으니 ‘아님 말고’식으로 아예 없애자는 발표까지 나오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예술이라는 것과 정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상충되는 가치라 할 수 있다. 가장 자유로워야할 창작의 영역에 어떤 하나의 방향과 기조를 골간으로 하는 정책이라는 개념은 어울리기 힘들고 어울린다 해도 불륜을 피하기 힘들다. 그런 면에서 일정하게 시계추가 기우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을 보면 영화문화 그 자체에 대한 몰이해와 밀어붙이기식 행정이 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 문화의 중요성을 한류나 걸그룹으로 대표되는 상업적 수출로만 인식하는 사람들이 정책을 만드는 자리에 있고 그나마 그런 사람들도 다 채울 수 없어 그 지향을 떠나 기본소양과 전문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인사들이 행정을 좌지우지하니 이런 결과는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해도 해도 너무하지 않은가? 아시아에서 가장 우수한 영화정책과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영화진흥위원회를 없애고 시장기능을 중심으로 단순한 행정지원센터 정도를 만든다는 발상은 어떤 뇌구조에서 나올 수 있는 발상인지 정말 개연성과 서사가 떨어지는 장르영화 한편을 보는 듯하다. 산업적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부분은 시장기능을 중심으로 행정규제를 대폭 줄이고 간접지원을 하는 방식을 취하고 예술성과 창작성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들은 다양한 소재로 많이 만들 수 있게 직접적인 지원과 이러한 영화들이 다양하게 유통될 수 있게 각 주제별로 해당 부처와 함께 지원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하면 양과 질에서 우리 영화는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것인데 이런 상식이 통하지 않는 이 현실은 정말 악몽이 아닐 수 없다. 제발 순수이성으로 돌아가 보자. 비단 영화뿐만 아니겠지만 얼마 전 보궐선거에서 당선된 민주당 최종원 의원의 경우 한 평생 연극에 몸바쳐온 예술인이자 한국영화에 다양한 캐릭터를 심은 뛰어난 배우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자신의 고향에 예술촌을 만들려고 심혈을 기울였는데 이를 문화부가 관광중심 사업으로 만들면서 계획안이 완전히 달라져서 제도개혁이 없이는 안 되겠다는 판단 하에 출마해서 당선되었다고 한다. 물론 양자의 입장이 판이하게 다르니 그 사실 진위를 여기에서 판단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평생을 예술인으로 살아온 사람이 예술이 아닌 정치의 영역으로 가서 문제를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뭔가 뒤틀려도 한참 뒤틀린 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배우의 손에 대본이 들려있지 못하게 하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호프 한잔 마시며 갑론을박하는 영화인들의 모습이 그리워진다. 시민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와 지하철에서 휴대폰으로 단편영화를 보고 웃기도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거대한 무언가가 아니라 일상에서 함께하는 영화와 그 영화가 일상에 힘을 주고 그 일상이 영화를 만들어 나갈 때 우리는 영화로 행복한 세상이 될 것이다. 이런 소박한 바람이 이루어질 수 있게 북돋우는 정책이 나와야 하지 않을까? 비극의 시나리오를 쓰고 싶지 않기에 영화인들의 손에는 시나리오와 촬영장비와 영사기가 들려 있어야 한다. 그들의 손에 촛불이 들려 있을 때 영화는 이미 영화가 아닌 현실이 되어 버리고 만다. 이 불행의 서곡이 계속 울려 퍼지지 않기를 간절히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