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최진실 빈소 찾은 가족과 동료 연예인들
- 제작년도
- 2010
영화를 사랑하는 이들이라면 모두 그렇겠지만, 해마다 10월이면 마음은 영화의 바다가 펼쳐진 부산을 향한다. 그와 동시에 최진실 이라는 이름의 그늘 또한 마음에 드리워진다. 최진실은 2008년 부산국제영화제가 개막하던 10월 2일, 거짓말처럼 세상에서 사라졌다. 당시 나는 영화제 데일리를 만들기 위해 부산에 내려가 있던 터라 서울에서 들려온 비보가 더욱 비현실적으로 들렸던 것 같다(공교롭게 올해 부산영화제 개막일도 10월 2일이다). 부산과 최진실 사이의 연상작용에는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내가 최진실을 배우로서 처음 접한 곳이 부산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리메이크작으로도 만들어진 그녀의 출세작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는 1990년 12월에 개봉했는데, 마침 부산에 있는 친구 집에 놀러 갔던 나는 남포동의 한 극장에서 이 영화를 봤다. 물론 그녀는 앞서 < 남부군 >(1990)과 < 꼭지딴 >(1990)에 출연했지만, 이들 영화를 미처 보지 못했던 탓에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배우 최진실과의 첫 만남인 셈이었다. 이 영화 속 최진실 의 모습은 제목처럼 너무도 사랑스럽다. 사실 그녀가 연기한 미영은 남자들의 판타지 속에서나 존재하는 ‘나의 사랑 나의 신부’다. 미영은 신혼여행 첫날밤, 남편과의 잠자리가 두려워 호텔 방 문을 걸어잠그는 숙맥이며, 남편의 도시락에 완두콩으로 ‘I LOVE YOU’라는 글자를 새겨넣는 애교쟁이이고, 남편의 외도를 의심하면서도 무리하게 추궁하지 않는 남편 바라기이니 말이다. 불과 2년 뒤 만들어진 < 결혼이야기 > 속 심혜진 과 비교하면 조선 시대 여인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다. 이러한 미영의 모습은 무명이었던 그녀를 일거에 스타 자리에 올려놓은, 하지만 전근대적인 여성상을 대변한다는 비판을 들었던 전자제품 CF 속 대사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에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한 비현실성과 성정치학적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의 최진실 은 아름답고 귀엽게 느껴진다. 거기에는 배우이기 이전에 최진실이라는 사람이 간직하고 있던 특유의 성향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을 터이지만, 이명세 감독의 스타일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그런 느낌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노란색이 주를 이루는 원색 톤의 실내 분위기나 영화 곳곳에서 튀어나오는 말풍선, 철길이나 가로등, 맨홀 같은 도심 변두리의 정취, 기억이나 상상, 그리고 꿈의 자유분방한 혼재 등의 요소가 어우러진 덕분에 최진실의 모습은 리얼리티와 판타지 중간 어딘가에 존재하는 이미지로 남게 된 듯하다.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존재감이다. 이명세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유영길 촬영감독은 당시 촬영 현장에 와서 ‘이거 못 찍을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나리오 볼 때는 서울 변두리 단칸방 같은 공간을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온통 노란색 등 원색 톤이 두드러져서 당황했다는 것이다. 결국 유영길 촬영감독은 촬영을 맡았는데, 나중에는 모든 소품을 노란색으로 칠해놓을 정도로 이명세 감독을 믿게 됐다고 한다. 아무튼 유영길 촬영감독의 유려한 영상은 이 영화의 ‘판타스틱한 리얼리티’를 돋보이게 했다. 또한 유난히 어두운 실내 장면에서도 따뜻한 질감을 살려줬다. 사실, 이명세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돌아보면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는 과도기적 영화다. 시대를 앞서가도 너무 앞서갔던 블랙코미디 < 개그맨 >(1988)의 과격한 실험정신에서 빠져나와 상업 영화적 성향을 명확히 드러냈던 영화이며, 이명세식 러브스토리의 최고봉이라 할만한 < 첫사랑 >(1993)으로 나아가는 발판이 된 영화이니 말이다. 기억이나 상상, 꿈 등의 세계를 시각화해 내러티브에 녹여내는 이명세 감독의 스타일이 덜 정제된 형식으로 보여진다는 점이 지금의 시각으로는 도리어 신선해 보이기도 한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박중훈 에게도 과도기적 영화였다. 그는 이 영화로 ‘청춘 스타’ 시대를 마감하고 뉴욕으로 유학길에 올랐고 < 투캅스 >(1993)로 복귀한 뒤 한동안 한국영화계의 유일무이한 블루칩으로 영광을 누렸다. 물론 최진실 에게도 이 영화는 과도기에 해당했다. 여전히 CF 스타의 이미지가 강했던 그녀는 이 영화를 도약대 삼아 본격적인 배우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 수잔 브링크의 아리랑 >(1991)이나 < 숲속의 방 >(1992),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4) 같은 진지한 영화에도 등장했으나 역시 그녀가 주목받았던 것은 < 미스터 맘마 >(1992), < 마누라 죽이기 >(1994) 같은 코미디영화에서 귀엽고 사랑스러운 이미지를 뽐낼 때였다. 이후 그녀는 배우로서 침체와 재기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결혼 생활 또한 그러했다. 24년 만에 다시 본 < 나의 사랑 나의 신부 > 속 최진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 애잔하게 느껴진 것은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 부러진 화살 >에 이어 < 남영동 1985 >가 개봉했던 그때, 이 영화를 둘러싼 대화에서 가장 많이 등장한 말은 ‘돌직구’였다.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에두르지 않고 보여주는 스타일이라는 건데, 여기에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과연 그의 영화는 관객에게 돌직구를 던지고 있는 걸까? 그렇다면 여기서 ‘돌직구’라는 건 이 영화가 어떤 형식도 거부했다는 의미일까? 이 영화가 러닝타임의 대부분을 고문실에서 보내며 관객에게 고문 자체를 체험시키는 것 때문에 영화의 형식마저 ‘돌직구’로 뭉뚱그린 건 아닐까? 이런 질문을 갖게 된 건,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정지영 감독의 1990년 작인 < 남부군 >을 다시 봤을 때였다. 어린 시절 TV로 이 영화를 봤던 내가 기억하는 유일한 장면은 박민자( 최진실 )와 이태( 안성기 )가 낙엽을 쓸어모아 덮고 있는 장면이었다. 총상을 치료 중인 이태에게 민자가 말한다. “점점 추워지는데요. 몸을 따뜻하게 해야 상처가 빨리 아무는데… 절 안으세요.” 당시의 나에게 영화 속 그들의 상황이 어떤 맥락에 있는지는 둘째였다. 아마도 그때의 나는 이 장면에서 악당의 추적을 피해 다니는 액션영화 속 남녀주인공의 ‘케미’를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다시 본 <남부군>에서 내가 기억했던 민자와 이태의 로맨스는 그나마 관객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주려는 일종의 배려에 지나지 않았다. < 남부군 >의 주인공은 ‘조선 중앙통신사’의 종군기자였던 이태다. 그는 “두려움과 호기심이 엇갈리는 새로운 삶과의 만남”이란 태도로 빨치산이 되어 산에 들어간다. 다양한 사람들이 이태가 이끄는 소대로 들어오고, 이태는 그들과 함께 전투에 참여한다. 많은 사람이 죽고, 또 많은 사람이 버려진다. <남부군>은 그렇게 산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난 이태가 결국 혼자 남을 때까지의 이야기다. 이 과정에서 < 남부군 >은 전투와 이동, 굶주림의 상황을 수시로 교차시킨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반복되는 동안 산의 풍경과 빨치산의 생활도 모습을 달리한다. 잠시의 휴식, 갑작스러운 이동, 또 잠시의 평안함, 다시 갑작스러운 전투와 도주. 추위는 굶주림과 함께, 봄의 따뜻한 햇볕은 전염병과 함께 찾아온다. 그 과정에 민자와 이태의 로맨스가 있고, 전쟁 중에서 시를 읽는 김영( 최민수 )의 고뇌가 있고, 마을주민을 강간한 죄로 자살을 강요받은 빨치산의 비열한 표정이 있으며 골수 빨치산인 여자 김희숙( 이혜영 )과 이태의 사이에 놓인 묘한 연정의 관계가 있다. 에피소드는 파편적으로 나열되지만, <남부군>의 그러한 불규칙한 리듬은 오히려 이들의 고통을 끝까지 체험하도록 만든다. 어떤 순간에는 일말의 기대를 갖고, 다시 그 기대가 무너지기도 하고, 긴장의 순간에 호흡을 멈추기도 했다가 어느 순간에는 웃기도 하는 희한한 리듬이었다. 과거 정지영 감독이 「키노」와 했던 인터뷰에 따르면, 빨치산이 토벌군을 후퇴시키는 장면에서 극장 안의 고등학생들이 박수를 쳤다고 한다. 감독의 의도이든, 아니든 간에 그 또한 이 영화의 불규칙한 리듬이 가져온 효과일 것이다. 어떻게 끝날지 모르는 이 전쟁의 한복판에 놓여있는 경험이었을 테니까. 무엇보다 < 남부군 >은 극단적인 허탈감을 체험시키는 영화다.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낙오하고, 또 누군가는 탈출하면서 이태는 결국 혼자 남아 눈밭을 헤맨다. 죽음을 결심하고 턱밑에 갖다 댄 소총의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이태의 눈에 빨치산들이 쓰는 표식이 들어온다. 동지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이태가 다시 눈밭을 헤쳐 그곳에 갔을 때, 보이는 건 시체뿐이었다. 아마도 한국영화사상 가장 춥고 고통스러운 겨울이었을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울지 않고, 소리 지르지 않았던 이 남자도 그제야 괴성을 지른다. 영화를 보는 동안 꾹꾹 눌렀던 한숨을 터트린 것도 그 순간이었다. 집요하고 징글징글하다 못해 이가 갈리는 상황까지 관객을 끌어다 놓는 영화의 박력이라니. 나도 모르게 157분에 달하는 러닝타임을 하얗게 불태운 것 같았다. < 남부군 >을 다시 보던 그때, 나는 영화 속의 지리산과 < 남영동 1985 >의 고문실이 매우 흡사한 느낌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남영동 1985> 또한 고문의 고통을 진이 빠지도록 체험시킨다. 고문을 시작한 이두한( 이경영 )은 김종태( 박원상 )에게 할 말이 있으면 발가락을 움직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가 발가락을 움직인다고 해도 이두한은 고문을 멈추지 않는다. 김종태는 고문의 고통을 이기지 못하고 굴복하지만, 그럼에도 고문은 계속된다. 고문의 클라이맥스에서 결국 모든 걸 내려놓았을 때, 이두한은 말한다.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야.” 고문이 언제 끝날지 누구도 모르는 영화 속 상황은 지리산을 헤매는 <남부군> 속 빨치산의 운명과 똑 닮아 있었다. 당시 인터뷰에서 정지영 감독은 자신이 “마음에서부터 문제를 똑바로 보기를 원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예술가들이 상징성을 통해 메시지를 녹여내는 걸 더 예술로 평가하잖아. 그런데 나는 그게 성에 안 차요. 약간 피해 가는 것 같으니까.” ‘돌직구’라는 표현 또한 피해 가는 게 싫은 그의 태도에서 비롯됐을 것이다. 하지만 < 남영동 1985 >와 < 남부군 >뿐만 아니라, < 부러진 화살 >이나 <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나 < 하얀전쟁 >이나 그의 대표작들은 어차피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을 하는 사람의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여정을 그렸다는 점이 더 중요해 보인다. 은유나 비유를 덜어냄으로써 그들의 여정은 더 많은 질문과 감정을 채워넣도록 만드는 압도적인 박력을 가진다. 그것이 ‘돌직구’란 말에 숨겨진 정지영 감독의 형식이다. 그의 영화가 지닌 리듬이고, 매혹이다.
아, 임성민 ! 누군가 내게 한국영화계 최고의 미남배우가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고(故) 임성민이라 말할 것이다. 물론 남궁원도 잘 생겼지만 임성민이 좀 더 섹시했다. 고교 육상선수 출신의 탄탄하고 매끈한 체격, 그야말로 훤칠한 조각미남의 대명사였던 그는 ‘변강쇠’ 이대근 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후반 토속에로 장르의 반대편에서 치명적인 도시 남자의 ‘지골로’(gigolo)스러운 매력을 뽐냈다. 물론 마흥식 , 이영하 처럼 비슷한 계열의 다른 배우들이 있었지만 역시 그가 가장 섹시했다. 마치 ‘한국의 미키 루크’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섹시함을 과시하며 < 달빛 멜로디 >(1984)에서는 안소영 , < 바람난 도시 >(1984)에서는 이미숙 , < 탄드라의 불 >(1984)에서는 오혜림 , < 무릎과 무릎 사이 >(1984)에서는 이보희 , 그리고 < 색깔있는 남자 >(1985)에서는 무려 오수미 , 오혜림 , 오경아 트리오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입지를 다졌다. 이즈음, 요즘 한창 잘 나가는 TV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 류수영 의 본명인 ‘어남선’처럼 뭔가 수산업을 연상시키는 ‘임관배’라는 본명을 내던진 것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달빛 멜로디 , 무릎과 무릎 사이 , 그리고 장사의 꿈 세월이 흘러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4)에서 최진실 에게 납치당한 한국 최고의 미남 배우도 바로 그였다(당시 최진실의 지시로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무명의 신인배우가 바로 유오성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5년 8월 17일, 어린 딸을 하나 남겨둔 채 간경화 악화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사의 찬미 >(1991)에서 윤심덕( 장미희 )과 사랑에 빠진 와세다대학 영문과 학생 김우진으로 출연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모습을 뽐내며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하는 등 배우로서의 원숙미를 서서히 드러내던 시기였다. 그렇게 남자배우로서 한창 뻗어 나갈, 불과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한국형 하드보일드 장르가 안착한 지난 몇 년간 멋진 고참 형사나 보스로 출연한 그의 모습을 가끔 상상해본다. 공교롭게도 임성민 은 역시 세상을 뜬 장국영과 1956년생 동갑인데, 그보다 한 살 많은 1955년생 임달화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임성민이 살아있다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헛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황석영 원작, 신승수 감독 < 장사의 꿈 >(1985)은 ‘털보’ 임성민 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씨름 선수 차일봉(임성민)은 서울에 올라와 방황하던 중 돈을 벌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선다. 당연히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다. “어이, 거기 털보! 덩치가 좋구먼. 나랑 같이 일하러 갑시다.” 하지만 공사판의 한 할아버지가 그의 육체가 부러운 듯 점잖은 표정으로 독설을 내뱉는다. “힘이란 믿을 게 못 되지. 늙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 힘은 별로 쓸모가 없을 거외다. 용이 뭍에 오르면 개미가 덤비는 법이지.” 그러자 일봉은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는 쌓아놓은 벽돌 탑을 단숨에 넘어트리며 장사의 희열에 젖는다. 고향에서는 황소를 독차지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전국 규모의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크게 명함을 내밀 수준이 못 되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더 큰 도전의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 식의 B무비스러운 고속촬영 판타지 장면은 영화 내내 반복되는데, 아마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장사의 꿈>이 흉내 낼 수 없는 영화적 효과를 위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 털보 임성민 이후 그는 불고기를 사주는 돈 많은 게이( 남포동 )의 유혹에 넘어갈 뻔하면서 도시의 삭막한 공기에 눈뜨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영문도 모른 채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지는 에로영화에까지 출연하게 되는데, 그 촬영현장에서 맨 처음 맞닥뜨린 헐벗은 애자( 금보라 )를 보고는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바지가 부풀어 오른(-_-;) 일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대로 된 ‘합’을 맞춰보기도 전에 애자의 기둥서방 마대수( 송경철 )는 애자를 데리고 누드캘린더를 촬영하는 곳으로 휭 떠나버린다. 그래도 일봉의 남다른 체격과 외모 때문인지 곧 두 사람은 음지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 부기 나이트 >(1997)의 덕 디글러(마크 왈버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그전까지 대머리 중년 남자배우와 뒹굴던 애자 역시 싱싱한 일봉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당연히 최고의 에로배우를 얻은 감독( 정진 ) 역시 신이 난다. 거리로 나간 고다르가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찍었던 똑같은 16밀리 볼렉스 카메라로 골방에서 에로영화를 찍고 있는 처지일지언정,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에로영화에 대해 진지한 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별건가, 바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 그중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때의 아름다움이 가장 아름답다. 사랑 앞에서는 어떤 가치도 무의미하다. 어서 옷을 벗고 그 폼 나는 육체를 아낌없이 뽐내고 자랑하라!” 급기야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의 야외 로케이션도 감행하게 되는데, 쇠사슬을 두른 ‘타잔’ 임성민 이 쇠사슬을 끊고 하얀 천을 날리며 헐벗은 채 뛰어오는 ‘선녀’ 금보라 를 향해 달려간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야성을 되찾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감독의 하나 마나 한 개소리가 이어지는데 어쨌건 북한산에서 이뤄진 ‘타잔과 선녀의 합궁’이라는 아찔하고 키치적인 동서양의 만남 앞에 그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순간 이마무라 쇼헤이의 < 인류학 입문 >(1966)이 살짝 떠올랐다고 고백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타잔 임성민 , 선녀 금보라 임성민 도 그렇지만 ‘cute’와 ‘sexy’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금보라 의 매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장사의 꿈 >에서 일봉이 과거 시골 읍내를 주름잡던 천하장사였다면 애자는 바닷가 마을의 해녀였다. 그래서 “애자 씨는 너무 차가워요”라는 일봉의 질문에 “어려서부터 해녀로 자라서 피가 차가운가 봐요”라는 나름 그럴듯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 차가운 매력은 에로 연기가 서투른 일봉의 연기를 교정하는 데 있어서도 능수능란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게 아니라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라는 충고는,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에로영화들에서도 깨닫지 못한 최고의 ‘연기론’과 ‘형식미’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그 차가움 속에 서울로 올라와 산전수전 다 겪었을 애자의 깊은 슬픔이 묻어나온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친절한 몽타주 역시 가슴을 후벼 판다. “서울은 캄캄한 어둠 속의 동굴과도 같다. 줄곧 어둠 속에서 살았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올 때는 친절하게도 그 건너편에서 시각장애인 두 명이 지팡이를 짚고서 걸어가고 있다. 암흑과도 같은 도시생활을 시각장애인의 그것과 비교하며 B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EBS스러운 몽타주라고나 할까. 또한 서울을 헤매고 다녔다는 말에는 곧장 벌거벗은 채 새벽 명동거리를 질주하는 애자의 싱싱한 뒤태를 보여준다. 정말 충격적인 몽타주가 아닐 수 없다. 앞서 김수용 감독의 < 도시로 간 처녀 >(1981)를 비롯해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1) 등으로 깜찍한 신인의 미모를 뽐냈던 그녀는 <장사의 꿈> 이후 < 금달래 >(1986), <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 >(1988) 등에 출연했다.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지고 난 다음부터가 문제다. 촬영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못된 대수를 일봉이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 에로영화 촬영장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두 사람은 떠돌이 신세가 된다. 우연히 만난 약장수 태산거사( 김인문 )과 함께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펠리니의 < 길 >(1954)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애처롭고 정감이 넘친다. 하지만 그들에게 행복은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애자가 유산한 이후 1년 동안 떨어져 지내기로 한 것. 일봉은 남창으로, 애자는 그 문제의 기둥서방을 다시 만난다. 이때부터 영화에서 애자는 사라지고 일봉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뚜쟁이인 방배동 오여사( 김영애 )의 안내로 산속에서 (둘 만의 암호인) 초록색 물통을 든 여사님( 김애경 )을 만나 격렬한 정사를 나눈 뒤부터 산에서도 하고, 호텔에서도 하고, 기차에서도 하고, 아이를 원하는 여자의 대리부 노릇도 한다. 수많은 여사님들에 둘러싸여 자라피도 마시며 승승장구하지만 이내 정력은 고갈되고 만다. 급기야 그는 함께 샤워를 하며 정사를 나누던 한 여사님으로부터 “이거 병신이잖아. 어쩌다 이따위를 보냈지”라는 씁쓸한 환불요구에 직면하는 신세가 된다. 병원의 의사로부터 “몸도 마음도 황폐해졌어요. 좀 쉬어야 합니다”라는 진단까지 받고 보니, 마치 그 모습이 혹독한 연예계 생활에 지쳐 간경화로 쓰러진 현실의 임성민 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아프다. 말하자면 < 장사의 꿈 >은 고 임성민의 레퀴엠처럼 느껴지는 슬픈 에로영화다. 나이트클럽에서 수많은 남자들의 담배 연기에 파묻혀 나체쇼를 하고 있는 애자와 일봉이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 또한 실로 충격적이다. 성인이 되어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그 마지막 장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더랬다. 1980년대 에로영화에 대해 막연한 조소와 냉소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장사의 꿈>은 그야말로 감동의 명편이다. 마지막 장면 임성민 금보라 정진 김영애 감독: 신승수 각본: 신승수 개봉극장: 코리아, 동아 관람인원: 12,601(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