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디
- 감독
- 최희서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박소이, 최희서, 조경숙, 신현수, 하루비, 하이안, 홍재민, 김유민, 김남순, 김태은, 박소영, 박수재, 손준영, 원경수, 정승민, 이태양, 김태진, 이소현, 정찬영, 하예설, 이제훈
KMDb 칼럼 연재 제안에 ‘한국 여성영화의 정동들’이라는 주제를 떠올린 건 < 아워 바디 > 때문이었다. <아워 바디>는 어떤 감정이나 의미로 딱 떨어지게 설명하기 어려운 영화다. 처음 봤을 때 인물의 행동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없어 답답함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는 내게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자꾸 모순되어 보이는 말들을 연이어 덧붙이게 했다. <아워 바디>는 심신의 소진에 대해 말하는 가하면 함께 달리는 움직임 속에서 이상한 기운이 넘쳐나는 몸들을 전면화하고, 관습적인 이성애 섹스를 스크린에 반복 재현해 가시화하면서도 영화 전체는 퀴어한 섹슈얼리티를 관통한다. <아워 바디>는 영화와 관람자인 ‘나’,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의 사이-공간에서 영향을 미치며 형질전환을 감행한다. 정동(affect)은 “몸과 몸(인간, 비인간, 부분-신체, 그리고 다른 것들)을 지나는 강도들에서 발견되며, 또 신체와 세계들 주위나 사이를 순환하거나 그것들에 달라붙어 있는 울림에서 발견된다. 의식화된 앎 아래나 옆에 있거나 또는 아예 그것과는 전체적으로 다른 내장의 힘들, 즉 정서 너머에 있기를 고집하는 생명력”에 부여하는 이름이다(<정동이론> 14쪽). 이러한 맥락에서 <아워 바디>는 스크린의 정동 개념을 적용하기에 적당한 사례로 보인다. 대학졸업 후 서른 살이 넘도록 좁은 방에 갇혀 고시에만 매달려온 자영(최희서)은 더 이상 공부도 시험도 볼 수 없는 상태에 처한다. 하나의 목표를 위해서만 사용되어온 심신은 목표가 사라지자 갈 곳을 잃는다. 그야말로 소진(burn-out)되어 버린 것이다. 여기서 <아워 바디>는 일원론을 주장한다. 소진은 마음과 몸, 내용과 형식을 동시에 소멸시킨다. 어떤 정해진 그릇이 있어 그 안의 내용물이 비워지고 다시 채우면 그만인 것이 아니다. 소진된 자영은 아예 존재의 감각 자체를 잃어버린다. 자신의 존재를 소생시키기 위해 자영은 달리기를 선택한다. 갓 태어난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자영은 생동감과 활기로 존재감을 뿜어내는 현주(안지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바닥을 딛는 발바닥, 전진하는 다리, 추진력을 얻기 위해 움직이는 팔, 현주를 뒤쫓는 눈, 그리고 현주의 기를 받는 내장감각까지 그렇게 자영의 심신은 하나 둘 다시 생성된다. 영화는 분절된 신체의 클로즈업과 그 부분-신체들을 쫓는 주관적 시점들을 통해 존재 감각이 통일된 전체의 방식이 아니라 부분적이고 파편적으로 생성됨을 표현한다. 그것들은 각기 자기 용도를 처음 발견한 부분-신체들이다. 고시공부가 아닌 다른 용도를 위해 사용되는 몸을 인지하고 이질적인 에너지를 가진 타인과 조우하며 자영도 소진된 심신을 다시 만들어 갈 힘을 얻게 된다. 하지만 <아워 바디>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더 복잡한 욕망의 문제를 끌어들인다. 자영이 소진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던 이유는 무엇일까. 자영의 심신이 단일한 목표만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목표가 사라지면 그에 종속된 심신도 함께 소멸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그 목표마저 자기의 욕망인지 아니면 타자에 의해 주입된 욕망인지도 구분되지 않는다. 엄마와 전 애인은 ‘사람구실’이라는 말로 그녀의 욕망을 가두려 한다. 정규직 혹은 공무원 같은 정해진 궤도를 걷지 않는 이들은 의미를 갖지 못하고 실패로 낙인찍히며 존재의 가치를 끊임없이 의심받는다. 영화는 소진되지 않는 존재로 자영을 변신시키기 위해 급진적으로 방향을 튼다. 갑작스러운 현주의 죽음 이후 자영은 기이한 일을 겪는다. 방바닥에 누워 있는 자영 옆으로 나체인 현주가 눕는다. 균형이 잘 잡힌 현주의 탄탄한 뒷모습이 흡사 외계생물처럼 빛이 난다. 그리고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소리와 함께 현주는 사라진다. 꿈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환상적인 방식으로 연출된 이 장면은, 외계인이 지구침공을 위해 지구인의 마음과 신체에 침투해 구분불가능한 이질적인 신체들이 하나의 존재에 공존하게 되는 <신체강탈자의 침입> 같은 SF 호러를 연상시킨다. 자영은 현주를 삼킨 것일까, 현주가 자영을 차지한 것일까? 아니면 둘의 공존인가? 현주는 달리기를 힘들어하는 자영에게 자신의 ‘기(氣)’를 빨아먹으며 따라오라고 말한다. 함께 달리기에서 그녀들은 서로의 에너지와 리듬을 나누고, 신체의 경계가 무너지고 살‘들’이 구분되지 않는 체험을 한다. 마찬가지로 이 장면은 자아와 타자가 구분되지 않는 ‘아워 바디(our body)’가 생성되는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또는, 관습적인 성기 중심의 이성애 섹스에서 벗어나 생각해 보면, 매우 위험하고도 에로틱한 퀴어한 섹스 장면일 수 있다. 외계인과 지구인의 섹스 장면처럼 말이다. 만약 <아워 바디>에 이성애 섹스 장면들만 가시화 되어 있다고 한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퀴어 에로틱한 순간들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것이 된다. 이 순간을 통해 자영은 하나의 존재에 다양한 욕망과 미결정된 (비)의미를 품는 다양체가 된다. 이후 영화 후반부에서 자영은 ‘자기 몸에 도취되지 않는 나이든 남자와 자고 싶다던’ 현주의 은밀한 욕망을 실천한다. 그리고 자신이 바라는 길이 아니라던 인턴과 정규직 되기도 시도해본다. 이렇게 타자의 욕망들을 실험하고 수행하며 욕망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경험하는 과정을 거친다. 동일한 행위라도 수행하는 주체가 달라지면 동일한 의미로 떨어지지 않을 수도 있으며, 때때로 자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과 구분불가능하기도 한다. 우리의 삶과 존재는 고정된 약호들 이상이다. 결국 자영은 현주의 질문을 경유해 끌어낸 자기의 성적 욕망을 실천한다. 고급 호텔에서 어떤 의미나 목표도 두지 않고 혼자 자위를 즐기는 자영은 이미 혼자가 아니며 둘 이상이다. 다양체로서의 자영은 고정된 범주와 이분법을 해체하며, ‘아워 바디’로서의 강도를 발견한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한 번 쯤은 달리기를 해봤을 것이다. 운동회의 릴레이든, 체력장의 오래달리기든 하다못해 트레이드 밀을 달린 경험일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호흡의 중요성이야 모두가 인정할 것이다. 릴레이를 할 때는 바통을 움켜쥔 채 단박에 내달렸을 것이며, 오래달리기를 할 때는 앞으로의 거리를 생각하며 페이스를 조정하지 않았을까. 뭐가 됐든 너무 많이 삼켜서도 너무 빨리 내뱉어서도 안 된다. 적절한 호흡이 있다. 다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여기 성긴 듯 급박한 호흡으로 나아가는 영화가 있다. 바로 홍원찬 감독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이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두 가지 흐름의 호흡을 통해 방콕에서 펼쳐지는 두 남자의 살인극을 그린다.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성긴 호흡과 감정적 이음새로 이뤄진 액션의 급박한 호흡이 바로 그 두 가지이다. 그렇다면 먼저 내러티브적 헐거움이란 어떤 의미일까. 엄밀히 따져 영화는 극을 견인하는 치밀하고 뚜렷한 개연성을 제시하진 않는다. 그러나 영화 속 개연성은 부족할지언정 분명 존재하며 그가 진정 필요한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된다. 정보를 전하는 영화의 흐릿한 흐름이 전략적 호흡으로 거듭나기 때문이다. 관객은 러닝타임을 따라가는 내내 이야기의 명확한 인과성을 얻을 수 없다. 영화는 ‘인남(황정민)’이 왜 하필 일본으로 떠났는지, 어쩌다 암흑가의 일을 하게 되었는지, 심지어 복수의 원인이 되는 ‘영주(최희서)’와 과거 어떤 특별함을 가졌는지도 제시하지 않는다. 불안한 미래를 암시하는 인남의 대사와 엘리베이터 속 단 하나의 총격 씬만이 둘의 과거를 압축한다. 그 외의 모든 것은 불분명하다. 인남은 그저 시간이 흘러 영주가 죽었다는 전화 한 통과 그녀의 아이가 행방불명되었음을 듣고 방콕으로 향한다. 인남의 대척자 ‘레이(이정재)’ 역시 마찬가지이다. 레이는 인남이 자신의 형을 죽였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인남을 쫓는다. 형제의 과거가 간략히 언급되긴 하나 그들만의 특별한 무언가는 끝내 등장하지 않는다. 이렇게 영화는 흘러가는 줄곧 맹목적 복수의 이유를 뒷받침할 형제의 우애나 연인의 사랑 더 나아가 조명될 법한 인남의 부성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저 죽어버린 과거의 인연만이 복수를 헐겁게 부여잡을 뿐 복수를 담아두는 줄거리의 개연성과 호흡은 다소 느슨하고 성겨 보인다. 이는 영화가 복수극이 아닌 살인극으로 전환되는 이유기도 하다. 더하여 이런 전개에 앞서 느슨한 개연성은 하나의 전략으로 영화적 전환을 뒷받침한다. 치밀한 복수의 이유와 계획이 제시되었다면 영화는 호쾌하게 질주할 수 없다. 설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부족한 개연성은 극을 이끄는 하나의 주요한 호흡으로 거듭난다. 이는 급작스레 시작되는 복수의 긴장감을 내뱉는 날숨의 과정이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터 몰아쳐 올 액션의 시작을 전제하는 주요한 바탕으로서 영화의 장치가 된다. 영화는 이렇게 개연성의 필요를 물으며 새로운 대안을 제시한다. 바로 속도감 있는 액션이다. 듬성하니 채워진 복수의 뒤를 짚어 가던 관객은 점차 희미해지는 복수 대신 새로운 선택지를 제공받는다. 바로 인남과 레이의 쫓고 쫓기는 액션 활극이다. 사실 이런 영화적 변환은 복수의 과정에서도 나타난다. 영화의 장소가 방콕으로 옮겨온 뒤 인남은 복수의 단서를 얻기 위해 사람들을 고문하며 살해하지만 결국 영주의 복수라는 근원에 닿지 못한다. 레이 역시 인남을 향한 살의의 이유를 잃어버린다. 즉 이들의 파괴 행위는 곧 복수라는 행위의 파괴이다. 결국, 관객과 두 인물이 새로운 선택지를 택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하다. 영화는 그렇게 둘의 파괴 행위를 호쾌한 액션으로 재생하며 이전의 헐거운 개연성은 오히려 복수를 벗어던질 장점이 된다. 아이만은 살려 줄 수 없느냐 말하던 인남이 어느 순간 태도를 바꾸는 점 역시 의미심장하다. “더 이상 쫓아오면 넌 내 손에 죽는다.” 인남이 레이에게 전하는 대사이다. 이는 곧 영화의 내적 전환을 확언한다. 관객은 레이에게 향하는 인남의 태도 변화를 통해 그의 목적성이 변화하였음을 깨닫는다. 영화의 초반 영주의 복수와 아이의 행방을 위해 피를 흘렸던 인남에게 새로운 목적이 부여된 것이다. 이는 당연한 결과이자 내러티브적 선택이다. 앞서 언급했듯 영화는 연인의 복수(그 이유 역시 확실치 않고 불친절한)를 성긴 호흡으로 채워 왔다. 남은 시간 앞으로 내달리기에는 그 이유도 호흡도 부족하다. 새로운 숨을 들이마셔야 한다. 그렇기에 인남은 복수가 아닌 살인을 선언한다. 자신과 작은 아이의 몸뚱이 하나 간수하기 힘든 곳에서 그는 인간의 살인을 목표로 새롭게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그렇게 인남과 레이의 싸움은 후반부로 향할수록 속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변화했고 헐거운 복수는 사라졌다. 그렇다면 피 끓는 투쟁을 이끌어가는 새로운 호흡의 매개는 무엇일까. 둘의 이야기가 액션을 위주로 변화되었다고 해도 영화는 분명 그 원동력을 가져야만 한다. 영화의 줄거리가 다소 힘을 잃었다고 해도 단지 그렇게 둘 수 없음만은 분명하다. 벌어져 가는 영화를 단단히 부여잡는 것은 바로 인남과 레이 두 주인공이 내뿜는 뜨거운 감정이다. 이것이 바로 점차 벌어져가는 복수를 접합시킬 아교이자 호흡이다. 이들이 가지는 맹목적 살의와 파괴성은 피를 연료로 삼아 영화를 불태운다. 하늘을 적시는 붉은 노을과 둘의 싸움으로 불타는 거리의 연기는 두 남자의 매연인 것이다. 영화는 두 인물의 대치와 그들이 표출하는 감정으로 달려가는 관객의 호흡을 다시 한번 정렬시킨다. 많은 대사는 필요치 않다. 둘의 눈빛과 부딪히는 육체만으로도 다소 심심했던 영화의 흐름은 활기를 띈다. 이런 영화적 흐름은 레이의 대사를 통해서도 구체화된다. 왜 그렇게 인남을 죽이고 싶어 하냐는 질문에 레이는 “더 이상 이유는 중요치 않아.”라고 답한다. 그렇다. 이는 곧 영화적 변화를 매듭짓는 결정타이며 극의 마무리를 내정하는 한 줄이 된다. 줄곧 언급했듯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복수와 그 과정에서 살인과 생존으로 옮겨갔다. 두 인물은 더 이상 복수의 원인과 결말을 따라가지 않는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 혹은 살리기 위해 서로를 죽이고자 한다. 끈적한 살의를 품은 액션은 성기던 영화의 호흡을 급박하게 바꾼다. 치밀하지 못했던 복수로 비어있던 스크린의 빈틈은 이렇게 투쟁적인 들숨으로 가득 찬다. 마침내 숨은 영화의 말미 턱을 뚫고 뛰쳐나온다. 영화의 마지막, 인남과 레이는 부서진 자동차 속 피투성이가 된 채 나란히 죽어간다. 레이의 대사가 인상 깊다. “결국엔 이렇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잖아?” 인남은 레이를 그저 조용히 바라볼 뿐 어떤 말도 행동도 없다. 이는 곧 인남의 긍정이자 레이의 긍정이다. 둘은 죽어가는 와중 서로의 곁을 벗어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단순히 생명력을 잃어가는 몸은 문제가 아니다. 인남도 레이도 어느새 복수의 이유를 잃은 채 그저 서로를 죽이고자 달려왔다는 것을 알고 있는 탓이다. 조용히 앉아있더라도 더는 숨을 들이마셔 달릴 힘이 없다. 달릴 수 없다면 멈춰야 한다. 성긴 호흡으로 시작된 발걸음이 이리도 빠른 헐떡거림으로 바뀌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이다. 느린 듯 성큼성큼 나아갔던 영화는 어느 순간부터 전력을 다하는 달음박질이 되었다. 호흡 역시 그에 따라 조금씩 거칠어져 흐트러진다. 영화가 빨라지는 만큼 거칠게 변하는 이유기도 하다. 그 어떤 달리기라도 결승선은 존재한다. 무엇을 보았든 무엇을 위해 달렸든 주자는 결국 결승선에서 멈춰 선다. 복수로 시작해 살인이란 생존으로 달려갔던 인남과 레이. 둘은 단지 죽음이란 선에 멈추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