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마음은 호수
- 감독
- 박성복
- 제작년도
- 1964
- 출연
- 신성일, 엄앵란, 문정숙, 김진규, 박암, 남미리, 윤일봉, 조항, 트위스트 김, 성소민, 최희준
< 맨발의 청춘 >( 김기덕 , 1964)에 대한 평론과 연구는 이미 차고 넘친다. 1950~60년대 한국영화와 대중문화사에 대해 한 마디 얹으려면 피해갈 수 없는 영화가 < 자유부인 >( 한형모 , 1956), <맨발의 청춘>, < 미워도 다시한번 >( 정소영 , 1969)이고, 그런 만큼 논문과 평론 등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청춘영화의 본격적 출발, 신성일 ‧ 엄앵란 콤비의 시작, 방황하는 밑바닥 청춘의 울분과 좌절, 과장되게 미국화하여 전시된 화려하고 발랄한 질감 등, 이 작품에 새삼스레 한 마디 말을 더 얹을 필요가 없을 정도다. 한국영상자료원 사이트에 국한해도 <영화천국> 18호에 수록된 이길성의 글 「 한국 청춘영화의 아이콘, 레전드가 되다 」 같은 충실한 글이 이미 있다. 그런데 각도와 폭을 좀 달리해서 보면 좀 다른 것들이 보인다. 1964년이란 시기이다. 대중예술 작품의 인기는 해당 작품 하나의 극본과 연출의 완성도, 배우의 매력, 혹은 유통 과정에서의 우연 등 다양한 요소에 좌우된다. 하지만 전후를 함께 살펴보면 그 작품이 인기 있을 만한 조짐이 이미 한두 해 전부터 축적되고 그것이 임계점에 도달한 시점에 그 작품이 놓인 경우가 많다. <맨발의 청춘> 역시, 한 해 전에 일본 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 < 청춘교실 >( 김수용 , 1963)‧< 가정교사 >(김기덕, 1963)라는 전조가 있었고, 더 길게 보면 전쟁 중 소년기를 보낸 아이들이 청년기를 맞으며 자기 세대 얘기를 시작하는 전 세계적 현상이 유럽‧미국에서 일본의 태양족까지 차근차근 영향을 주고 있었다. 한국에서 1964년은 더 생각할 지점이 있다. 그 해에 주목할 만한 대중문화의 새로운 흐름이 솟아오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간지 시대의 시작, 민영 TV의 본격화 등 여러 매체 환경이 변화한 것도 이 해인데, 작품 경향으로 보아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미자의 <동백 아가씨>를 계기로 트로트가 부활한 것이다. 대중가요사 시작 이래 한 번도 제1주류 양식의 자리를 내준 적이 없던 트로트는, 1961년 <노란 샤쓰의 사나이>의 인기로 몇 년 간 확실한 침체를 보였다. 그 사이 제1주류 양식의 자리를 차지한 것은 미국풍 가요인 스탠더드팝, 그 중에서도 손석우 작곡의 명랑하고 반듯한 질감의 작품들이었다. 1964년을 계기로 트로트가 다시 부활하고, 스탠더드팝 역시 최희준이 부른 주제가 <맨발의 청춘>(유호 작사, 이봉조 작곡)이 몰아온 어두운 뒷골목 냄새 풍기는 재즈 분위기의 작품이 부상하는 변화를 보인 것이다. 대중가요계에서 1964년 부상한 이 두 가지 흐름은 완전히 상반된 경향처럼 보인다. 하지만 공통점이 있다. 손석우 노래가 주도하던 모범생처럼 건전‧명랑한 분위기가 아닌, 어둠과 절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1960년부터 1963년까지를 주도했던 건전하고 명랑한 가족 멜로드라마(‘ 김승호 영화’라 할 만한)가 주춤거리면서, 어두움과 절망이 깃든 <맨발의 청춘> 같은 청춘영화가 부상한 것과도 비견될 만하다. 영화계에서도 < 모녀기타 >( 강찬우 , 1964) 같은 복고적인 신파적 영화가 함께 부상하고 있었으니 사실 가요계와 비슷한 흐름이 나타나고 있었던 셈이다. 말하자면 청소년 취향과 성인 취향 양쪽에서 모두 몇 년 동안 잠복되었던 어두운 절망‧퇴폐 같은 감성이 이 해에 일제히 수면 위로 올라온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즈음에 대중의 사회심리가 바뀔 만한 사회적 변화가 있었다고 추정하는 게 옳다. 1960년대 초에 영화와 가요계에서 모두, 과거의 어둡고 퇴폐적이던 흐름을 청산하고 명랑하고 반듯한 질감의 작품이 인기를 끈 것은 확실히 4‧19와 5‧16, 본격적인 경제개발과 산업화의 시작 등과 무관하지 않다. 어느 정도 정부의 통제가 개입되어 있다 할지라도, 1960년대 말과 1970년대의 억지스러운 관제적 건전성과는 확연히 다르게, 대중 스스로 기꺼이 동의한 건전‧명랑‧희망의 질감이 1960년대 초의 작품에는 넘쳐난다. 전쟁이 끝난 지 10년이 다 되어 가고 정치까지 바뀌면서 사람들은 ‘허니문 현상’의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1963년에 군정이 끝나고 대통령 선거를 치른 후 1964년에 박정희의 민정 제1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이제 대중의 심리에서도 몇 년 간의 허니문의 거품 희망이 서서히 꺼지면서 잠복되어 있던 절망‧불안‧소외감‧퇴폐 같은 감성이 다시 부상하게 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1950년대로 되돌아 간 것은 아니다. 세상살이가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은, 거품이 조금 가라앉았을 뿐 여전히 오랫동안 힘을 발휘했다. 1950년대의 자유주의와 화려함이 전후의 엉망진창 한국사회에서 풍기는 허무주의의 냄새를 품고 있다면, 1960년대 <맨발의 청춘> 속의 주인공 두수는, 비록 좌절되었을지라도 진정한 사랑과 계층상승이 동시에 가능하다는 꿈을 지니고 있는 ‘신데렐라 맨’이었다. 물적‧성적 욕망의 질감 역시 1950년대의 <자유부인>이 보여주는 그것이 아니었다. 영화 <자유부인>이 ‘두루뭉술하게 서양적인’ 질감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맨발의 청춘>은 신성일의 청바지와 트위스트김의 스윙댄스, 화면 뒤로 흐르는 색소폰의 재즈 연주와 프로레슬링, 현대적이고 실용주의적 디자인의 미국대사관 건물에 이르기까지 확연히 미국적 질감을 과시한다. 대중가요계에서도 그랬다. 1964년에는 한국 최초로 록그룹의 음반이 두 장이나 출시됐다. 차중락‧윤항기 등의 키보이스, 신중현이 이끄는 애드훠의 음반(<빗속의 여인> 수록)이 그것이다. 서수남‧하청일이 이끄는 컨트리뮤직 그룹인 아리랑부라더스의 음반(<동물농장> 수록)도 이 해에 나온다. 물론 이것들이 다 흥행에 성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 방향성은 분명하다. 1960년대는 이렇게 두 번째 시기로 넘어가고 있었고, 바로 그 지점에 <맨발의 청춘>이 위치한다. 그리고 1960년대의 세 번째 시기로 넘어가는 즈음에 < 미워도 다시한번 >이 놓여있다. 한국영화사의 ‘대박히트’ 작품은 이렇게 한국현대사와 기막힌 조응을 보여주고 있다. <맨발의 청춘> VOD 보러가기
영화인 가운데서도 최금동 (崔琴桐) 선생과는 아주 가깝게 지냈다. 나이는 나보다 두 자릿수나 많은 대선배였지만 동연배의 친구처럼 살갑게 대해주었다. 이렇게 지내다보니 서로 비밀까지 털어놓는 사이가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둘만이 통하는 암호 같은 은밀한 지칭도 나누게 되었다. 가령 단골 다방이 있는 명동 거리에서 예쁜 여성과 마주치게 되면 선생은 나의 손등을 툭 치며 “조너스가 온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나는 으레 “그러네요.” 하고 맞장구를 쳤다. 자연히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는 취향이 비슷했고, 작은 체구에 술을 마시지 못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여기서 ‘조너스’란 ‘좋다’는 표현과 ‘도너스’라는 명사의 합성어로, ‘좋은 도너스’란 뜻이다. 첫 자를 그대로 옮기면 “좋너스”가 돼 야한 비속어가 되므로 ㅎ 발음을 빼고 그냥 ‘조너스’라고 했다. 그 시절, 그러니까 1960년대 후반 명동에 도너스 가게가 생기며 도넛을 좋아하게 된 최 선생이 이를 연상해 붙인 것이다. 최금동 선생과의 떼어놓을 수 없는 인연은 1969년 나의 결혼식때 청첩인이 돼준 일이다. 지금은 이런 일을 찾아볼 수 없지만 당시만 해도 결혼 청첩에 양가를 대표하는 4, 5인의 청첩인이 들어가는 게 관례였다. 그래서 나는 신랑 측 청첩인으로 대학의 은사인 김동리 (작가) 선생, 영화계의 유현목 감독과 함께 최 선생의 이름을 올렸다. 주례는 박목월 선생이 맡았다. 최 선생은 청첩인 임에도 불구하고 친구들과 찍는 기념 촬영에도 당연하다는 듯이 내 곁에서 포즈를 취해주었다. 또 한 가지 잊을 수 없는 일은 선생이 집필한 시나리오 < 푸른 별 아래 잠들게 하라 >( 유현목 , 1965)의 주제가( 박춘석 작곡, 최희준 노래) 작사자로 내 이름이 들어갔다는 사실이다. 나중에 알게 됐지만 자신이 써놓은 노랫말에 나를 내세운 것은 “김형이 시인이기도 하니” 그리했다는 것이었다. 이제야 실토하지만 나도 그 뒤에 이와 비슷한 일을 한 적이 있다. 월간 학생 잡지 <학원> 편집부에 근무할 땐데 ‘지붕 없는 학교’란 제목의 사진소설을 최 선생 명의로 발표했던 것이다. 배우나 학생을 모델로 내세워 찍는 화보 형식의 소설이었다. 그는 문학청년적인 감성과 우국지사적인 민족의식을 지니고 있다. 놀랍게도 그의 감성은 진부하지 않으며 민족의식 또한 보수적으로 기울지 않은 균형 감각을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칠순이 가까울 때까지 연애 감정을 유지했고 실천으로 옮기기도 했다. 그러나 최금동 선생은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미였다. 아니, 역겨운 일, 눈꼴사나운 일을 그냥 지나쳐버리지 못했다. 남의 눈총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모난 돌임을 자처했다. 1960년대 극장가에 일본색 표절 영화가 범람하자 지상을 통해 ‘왜색 영화를 방화하라’고 외쳤고, 이익을 재투자하지 않는 영화제작자에게는 ‘몰염치한 전주(錢主)’라며 몰아세웠다. 그런 탓으로 그는 주위의 눈총을 받을 때가 적지 않았다. 1975년 3월, 내가 박정희 유신 정권 아래서 자유언론운동에 참여, 제작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동료 30여 명과 함께 조선일보사의 기자직에서 해직됐을 때는 누구보다도 먼저 전화를 걸어 장차 일을 걱정하며 위로해주었다. 그런가 하면 설날에는 특유의 친필 연하장을 잊지 않고 보내주었다. 이렇게 최 선생은 1958년 처음 알게 된 이후 1995년 6월 5일 79세의 나이로 돌아가실 때까지 37년 동안 일관되게 강직한 성품과 섬세한 마음을 보여주었다. 한쪽 눈으로 감당한 작가의식과 민족정신 1916년 7월 3일 전남 함평군 상교면 대동리에서 태어난 최금동 선생은 어릴 때 본명이 거문고 금(琴)자에 아이 동(童)자 금동이었다. 형은 일곱 살 때 죽고 한말의 의병에 가담해 도망 다니던 아버지 때문에 그는 거의 어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런 탓으로 그는 지겨울 만큼 이사를 자주 했다. 그러다보니 학교도 여러 번 옮겨야 했다. 이런 가운데 선천적인 백내장으로 한쪽 시력을 잃었다. 그는 동네 아이들로부터 ‘눈 병신’이라는 놀림을 받으며 완도보통학교와 경성예비학교를 졸업했다. 동국대학교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교로 진학할 무렵, 이런 열등감에 자극받아 쓴 ‘누나’라는 글이 조선중앙일보에 가작으로 뽑혔다. 이에 힘입은 그의 문학적 열정은 1936년 이 학교 3학년 때 동아일보 제1회 시나리오 현상모집에 투고한 <환무곡(幻舞曲)>이 당선되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이루게 된다. 시나리오작가로서의 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작품은 김유영 (金幽影) 감독에 의해 < 애련송(愛戀頌) >이란 제명으로 1939년 명치좌에서 개봉되었다. 내용은 그가 인상 깊게 본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악>(윌리 폴스트, 1933)의 경우처럼 젊은 음악가의 사랑과 시련을 그린 것이었다. 그는 중앙불교전문학교를 나오자 1937년 6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기자로 언론계에 투신하게 된다. 이후 서울신문 사회부장(1945), 독립신문 편집국장(1947)을 거쳐 1949년 한성일보 편집부국장직을 끝으로 12년간의 언론계 생활을 마감한다. 광복 시기에 직장을 떠난 그는 최은희 의 영화 데뷔작 < 새로운 맹서 >(1947)를 비롯해 < 3.1독립운동 >(1958), < 8.15전야 >(1959), < 이름 없는 별들 >(1959), < 아아, 백범 김구선생 >(1960), < 유관순 >(1961), < 동학란 >(1962), < 석가모니 >(1963), < 이성계 >(1967), < 상해임시정부 >(1970), < 의사 안중근 >(1971), <미처 못다 부른 노래>(1973), <팔만대장경>(1973), < 에밀레종 >(1974), <사명대사>(1980) 등 45년의 작가 생활을 통해 필름으로 옮겨진 오리지널 시나리오만 50여 편을 남겼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최 선생의 작품은 일제 지배 아래서 항일운동을 주도한 애국지사의 활동상과 기미년 독립만세, 광주학생 항일운동 등 역사적인 사건과 존재, 그리고 투철한 국가관과 정체성을 강조한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들 작품의 특징은 큰 스케일을 바탕으로 강렬한 주제의식과 민족정신을 추구한 것이었다. 그가 평소 영화 < 아리랑 >(1926)을 자주 언급하며 ‘춘사 나운규 의 정신’을 강조한 점과도 무관하지 않은 지향점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후라이보이 를 처음 만났던 것은 1969년경이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중학교 3학년 때 아동극단 시험 보러갔다가 떨어지고 고등학교 때 연극부를 학교에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하는 억양이 이상하다고 너는 배우가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심지어는 빳다를 치는 선배도 있었다. 배우가 안되더라도 이바닥(?)을 떠날 수 없었다. 대학교는 연극과에 입학하여 전공을 연출로 바꾸었다-연출전공자에겐 억양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는다- 그래도 배우 꿈은 못버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탈렌트 시험을 보러 다녔다. 4번이나 떨어졌다. 챙피해서 죽고 싶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탈렌트 시험에 턱턱 붙는 거다. 내가 연출할 때 정말 재능 없어 보이던 아해들까지 탈렌트가 되어 여기저기 엑스트라로 나오는데 정말 미치지 않은 게 세계평화를 위해서 다행이었을 거다. 방송국 불지르고 싶었으니까! 뭐야 갑자기 이런 얘기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TV에 출연하는 길은 탈렌트. 가수, 코미디언이다. 지금은 리포터까지 합해서 한 가지 더 늘었지만!!! 탈렌트는 각 방송국마다 돌아가며 떨어졌으니 텄고 가수도 노래를 못하니 텄다. 한 가지 남은 게 코미디언이었다.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졸업 즈음해서 돌린 사인지에 나에게 부쳐주고 싶은 별명이 있다면에 ' 후라이보이 2세'라는 별명을 부쳐주고 싶었단다. 그래 결심했어! 후라이보이를 찾아가는 거야! 후라이보이는 지금도 쇼의 대명사가 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동양방송의 간판프로그램 ''쇼 쇼 쇼''의 명사회자, 대사회자였다. 그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동양방송의 ''쇼 쇼 쇼''는 그 당시 지금의 운형궁이 되어버린 자리에 운현궁스튜디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녹화를 했었다. 지금도 방송국 출입하는 게 일반인들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더 했던 것 같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경비와 말다툼도 여러 번했던 거 같은데 경비의 이름이나 혈액형, 출신학교를 물어본다면 하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후라이보이 가 녹화하는 운현궁스튜디오에 가보니 김상희, 최희준 , 패티김 , 윤복희 등등을 구경하게 되었고 그 가수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꿈결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후라이보이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주위에 워낙 사람들도 많았고 대기실에선 포카 같은걸 하고 계셨다. 포카를 안하고 있은들 내가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었겠는가? 녹화날만 되면 찾아가기를 일고 여덟 번!!!!!!!!!! 화장실을 가시는 거다. 소변보시러. 나는 무작정 따라가서 옆에 섰다. 볼일도 없으면서 볼일보는 척하면서 나의 첫 대사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코미디 원고는 누가 쓰세요?' 볼일보시다 말고 그자세대로 나를 쳐다본다. 아무말도 없으시다.'제가 써올께요'하고 대답도 안 듣고 바로 화장실을 나왔다. 아흐!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처음뵙을때의 얼굴이 생각나네요!!! ''쇼쇼쇼''는 ''쇼쇼쇼'' 주제가가 나오면서 무용단의 무용이 시작되고 멀리서 뛰어나오는 후라이보이 가 카메라 앞에 와서 멈춰 서면서 골프스윙을 맨손으로 한 번하시면서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오프닝을 시작하고 봄이면 봄에 관해 어쩌구 저쩌구 다음에 가수의 노래! 노래 중간중간에 꽁트가 3~4개 나온다. 나오는 사람은 후라이보이 곽규석에 장고웅 , 양영일, 세 사람이 꽁트를 한다. 주로 세태풍자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가끔 특집일 땐 후라이보이 혼자 마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꽁트 대본을 내가 써가지고 간 거다. 잔머리 머리 굴려서 20여 개를 써가지고 갖다 바쳤다. 경비가 '어디가?'하고 물으면 '후라이보이 원고가지고 왔어요' 하면 무사통과다. 기다렸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내가 써준 원고를 어떻게 하는가를 집에서 토요일 ''쇼쇼쇼'' 시간에 하는가 안하는가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얼씨구 !절씨구! 내가 써다드린 원고를 가지고 꽁트를 하는 거다(물론 더 재미있게 고쳐서!)그러나 내가 써준 원고에 나온 대사 몇 마디는 오리지널 그대로 하시는 거다. 지화자! 좋네 !풍년이 왔네! 조바심이 생겼지만 이삼 주인가를 안갔다! . 왜? 그냥 쑥스럽기도 하고 날 못 알아보면 어떻하나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얼마 만엔가 ''쇼쇼쇼'' 녹화장을 갔다. 쭈빗거리고 복도에 있는데 '야!임마! 왜 안왔어' 하시는 게 아닌가? 날 알아보다니! 풍년이 또 왔네!!!!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아흐! 짠돌이 이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 그 당시 택시비 기본 요금이 90원이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내리면서 백원을 내고 내리신다. 택시비는 기본요금 90원이 나왔다. 백원을 내시고 방송국 안으로 사라지시면 나는 잔돈 10원을 받아 들고 후라이보이 뮤직프로덕션이 있던 정동사무실로 간다. 바쁘시니까 매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사무실엔 출근해서 여러 가지 잡다하게 할 일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야 10원줘!' 하시는거다. '10원이요? 왜요?' '야 임마 3주 전에 택시비 90원 나왔을 때 내가 100원내고 내렸잖아! 잔돈 안 받았어?' '받았는데요!' '그럼 내놔!' 하시는 분이다. 아주 오래된 일인데도 10원을 기억하시고 달라시던 분! 정동사무실에서 남산KBS까지 시간 남으면 자가용이 있는데도 걸어가시던 분! 다방에서 약속 안하고 꼭 중국집에서 약속하시면서 커피값에 조금 보태면 한 끼 먹을 수 있는데 다방에서 커피는 왜 마시냐고 핀잔주시던 분! 가끔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싸와서 정동사무실에서 드셨는데 -그때만 해도 샌드위치로 식사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서양스러운 일이라 멋있고 앞서 나가시는 분이구나 하며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봤다 - ' 야! 너도 좀 먹어' 아이고 황송해라 이걸 어떤 방법으로 먹어야하나? 고민하던 시절! 어느 날은 ' 유성이 점심 안 먹었지? 빵 사다 먹을까?' '네' 하고 달려나가 빵을 사오면 맛있게 드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빵은 간식이지 식사대용이 아니었다. 나는 - 얼마가 지나 월급날이었다. 월급에 꼬리표가 붙었다. 지금은 월급이 생각 안나지만 예를 들어 만원이라면 만7백원을 주시는 거다. '선생님 7백원이 뭐예요?' '응 얼마 전에 니가 나가서 니돈으로 빵 사왔잖어! 빵 값이야' 그걸 기억하시고 챙겨주시던 후선생님! 이렇게 짠돌이셨지만 후라이보이 곽선생님의 기사는 내게 자랑하는 말이 있었다. '연예인 기사중에는 내가 월급이 제일 많아!' 아흐! 가까이하기엔 너무 어려웠던 곽선생님! 외국오케스트라 지휘도 하셨고 외국의 유명연예인이 오면 국적불문하고 사회를 도맡아 하셨던 5개 국어를 하신 명사회자 ! 총소리, 대포소리, 기차소리 못내는 소리가 없었던 원맨쇼의 개척자!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종합광고대행사를 차렸다가 징그럽게 운영이 안 돼어 부도나서 일본으로 도망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 곽선생님! 다시 돌아오자 채무자들이 용서해줘서 놀랐던 일! 어느 날 목사님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진짜 목사님이 되어 나타나신 선생님! 우리나라에 전자라이터가 처음 나왔을 때 그 전자라이터를 처음 수입하신 분의 아버지 환갑잔치에 사회 보러 갔다가 출연료 외에 보너스로 전자라이터를 선물로 받았다. 아버지가 달라고 해도 안 주던 전자라이터였다. 스위치를 누르면 타타닥! 하고 불꽃이 튕겨져 나와 가스에 불이 붙던 지금은 흔해 빠져서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들도 가지고 다니는 전자라이터가 그 당시에는 너무너무 신기한 물건이었다. 누구나 그 라이터를 보면 탐내고 켜보고 뺏어 볼려고 하던 전자라이터였다. 어느 날 녹화장에 가지고 갔더니 장고웅 선배가 라이터에 눈독을 들인다. '안돼요! 아버지꺼라!!'일단 고비는 넘겼다. 다음 관문은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차례다. 타타닥! 불붙는 게 신기해 보였던지 던힐 라이터주시면서 바꾸자고 하신 곽선생님! 역시 아버지를 팔아서 안된다고 했는데 그 라이터를 집에서 뒷주머니에 넣고 갔다가 재래식화장실에 빠트렸다. 얼른 건져내어 씻고 또 씻고 또 씻어 말려서 그 다음날 자진해서 곽선생님에게 바쳤다. -이 사실은 처음으로 밝히는 나만의 비밀이다-지금은 금연운동이 한참이라 상상도 못하지만 전자라이터로 불을 타타닥 부치면서 ''쇼 쇼 쇼'' 마지막을 장식하시던 선생님! 대신 당신이 사용하시던 던힐 라이터를 나에게 주셨다. ( 그 비싼 던힐 라이터를 장고웅에게 빼았겼음) 언젠가 꽁트 원고를 갖다드리니까 원고를 읽어보시고 구봉서 선생님께 갖다주라는 겁니다.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몰랐지요! 나중에 물으시는 겁니다. 구봉서선생님이 하는 그 원고의 코미디를 봤냐는 겁니다. 물론 저는 봤다고 대답했지요! 봤으니까! 우리팀이 했으면 그만큼 재미있게 못했을 꺼야! 하시던 후선생님! 아흐흐! 곽규석 선생님 뵙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미국가실 때 제가 쓴 원고를 다시 한번 읽으셨대요! 감격했지요! 한 마디 하시더군요! '유성이 니가 쓴 원고를 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 없어서 생긴 일만 썼냐?'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 울립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돈이 없었던 시절이니 렇뭬티? 생기는 일은 상상이 안 되었던 거지요! ' 전유성 이가 내 마지막 제자야' 하시던 말씀! 원맨쇼도 못하고 외국어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억양도 이상한데 ! 마지막 제자라니요! 황공무지하지요. 한국에 가끔 나오시면 찾아가면 잘 있니? 예수 믿어라 널 위해 기도 많이 한다. 그 기도 덕분에 아직도 버티고(?)있습니다. 지금도 사회자들이 가수나 누구를 소개할 때 누구 씨하면 씨자를 도르를 말아 이름보다 씨자를 더 크고 높게 발음할 때면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보고 싶습니다. 대본 중에는 곽선생님이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와' 전유성 '네'라고 써놓고 녹화 들어가서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 와' 하시면 '저... 오십원짜리 두 개로 가지고 와도 되지요?'했다가 녹화 끝나고 장고웅 형한테 대본으로 뒤통수 맞던일! '야 임마! 한 마디라도 더하면 낫냐?' 하시면 죄송합니다 대답하면서 속으론 '그럼 자식아 한 마디 더하면 낫지!!!' 뒤통수 맞는 거 보시며 '유성이 한 마디 더하게 해줘라'하시던 곽 선생님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한번 안겨 울고 싶어요 !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곽규석 선생님! 전유성 (개그맨) / 2003년 <프로필> 1928년 11월 22일 경기도 안성 출생 1999년 8월 31일 타계 1951년 공군군악대창설로 데뷔 희극인으로 사회자, 악극, 영화 등 다방면으로 활동 <주요 작품>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 , 후라이보이 무전여행기 , 식모 삼형제 , 남자미용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