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적자
- 감독
- 김선경, 조지 비에이라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마이클 크리스티, 윤일봉, 카렌 영, 샐리 김, 래리 챈들러, 존 노웰, 조춘, 김왕국, 박일, 크리스 밋첨, 권부길, 빅토리아 러브랜드, 윌리암 제카
열여덟 살 소년 한슬기는 남산순환로 통행 매표소 동전함을 털다 걸려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는다. 카메라는 비좁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듯 한슬기가 수감된 소년원의 내부를 관음적인 앵글로 비추고 있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음, 정해진 배우 없음, 정해진 카메라 없음, 정해진 미술 없음, 정해진 음악 없음, 정해진 편집 없음, 정해진 거 다 없음, 이라는 자멸적 어조의 자막이 순서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인디 밴드 ‘삐삐롱스타킹’이 부르는 노래 ‘나쁜 영화’가 울려 퍼진다.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보컬 이윤정의 울부짖는 듯한 보이스가 “책상 위에 수많은 아주 좋은 영화가/ 잠을 자고 있는데 식탁 밑엔 수많은/나쁜 영화...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좋은) 100편 (나쁜) 1편/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로 이어지는 가사를 통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기차 안에서 무리를 지어 본드와 가스를 불고 갈피를 잃은 저들의 내면적 정황이 ‘환각 재현’이라는 제목의 키치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재생된다. 다음 쇼트에서 이어지는 한 장의 영정사진, 가스와 본드를 과다 흡입한 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장에서 지루해진 아이들이 춤을 춘다. 순간 나쁜 조감독의 나레이션이 나쁜 감독을 꼬시기로 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나쁜 조감독이 찍은 단편영화의 러프컷인가? 시험에 든 나쁜 감독. 나쁜 조감독의 꾐에 넘어간 나쁜 감독은 생각나는 대로 사는 아이들에 관한 생각나는 대로 찍는 영화를 시작한다. 나쁜 배우들을 구하는 광고를 통해 모인 아이들은 그들이 쓴 짧은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찍는다. 상술(上述)한 < 나쁜 영화 >(1997)의 도입부는 서울의 10대 청소년들과 그들의 무모하고 환멸에 찬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이야기의 개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서정적이고 영적인 것에서부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뤘던 장선우의 이전 영화들과 달리 <나쁜 영화>는 길을 잃은 아이들처럼 거칠다. <제목이 없는 영원한 나쁜 영화>(Timeless, Bottomless Bad Movie)라고 하는 영문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나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구조화되지 않은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기성 영화의 기준과 규칙, 문법을 따를 생각이 없음을 선언한다. 항상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감독 장선우는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는 놀랍다. 자학과 폭력, 섹스, 환각, 범죄의 만화경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10대 아이들이 쓴 대본을 재연하면서, 때로는 술 취한 거리의 사람들을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특정 장면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삽입하는 예술적 만용으로, 일부는 35mm, 다른 일부는 16mm 내지는 슈퍼 8미리로 촬영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경계를 지우가 위해 다양한 출처의 이야기와 장르, 형식, 캐릭터를 비빈다. 영화의 1/4 지점에서 서사는 기성의 논리와 계율을 거부하는 10대들의 삶에서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바깥에 있기를 선택한 홈리스의 삶으로 건너간다.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1997년 한국의 경제적 투쟁이 버려진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장선우의 방식은 틀에 박힌 사회에 풍요에 저항하는 거리의 방랑자들에 대한 사실과 거짓의 앙상블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거친 젊은이들, 안전하게 부유한 삶을 좇는 체제를 회의하는 홈리스들의 정신적 풍경을 기린다. 장선우는 새와 레드변, 감자, 이쁜이, 아이떡 따위의 유치한 별명으로 불리는 10대 등장인물들이 지루함의 공백을 범죄, 학대, 장난, 폭력 및 섹스로 채우려고 하는 맹목적인 행동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연기하도록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서울역 주변을 어슬렁대는 홈리스들의 일상과 10대들의 존재 양식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체제로부터 버림을 당한 이들의 무모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는 것만이 저들의 공통점일까? 10대 청소년들과 홈리스들 사이의 접점을 상상하게 하면서 카메라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와 느슨한 플롯에 의해 사전에 설계하지 않았던 의미가 발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원초적인 분노, 평온한 포기, 특정한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경고를 무시하고 사는 무정부주의적인 삶의 가치를 찬미하는 장선우의 예술적 자의식은 도전적이다. 형식적으로 <나쁜 영화>는 유사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로 거리의 유목민들을 묘사하는 픽션 영화이다. 시네마베리테 양식으로 촬영되었지만 재연 에피소드와 현실, 구성된 이벤트 사이를 오가며 현실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 애쓴다. 계획과 우연을 병합한 사이비 다큐멘터리 형식은 영화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카메라를 든 영화 스태프가 길바닥에 주저앉은 한 소년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자. 이제부터 카메라를 든 사람과 붐 마이크가 화면 안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서 카메라는 스스로 참여적이 되는 동시에 촬영 대상의 개입을 촉발하는 촉매가 된다. 영화적 진실을 생산하는 순간처럼 의도된 그 장면에서 실제적인 세계에 속한 자연인은 허구적 스토리가 요구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실재하는 존재와 대상에게 부여되는 역할이 중첩되어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영화적 실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연출된 무수히 많은 장면들은 상당한 정도의 혼란을 유발한다. 카오스는 캐릭터들의 재현 방식과 그들의 행동 뿐 아니라 운동의 방향에서도 발생한다. 때때로 등장인물들은 의도적으로 화면서 속도를 덧붙이면서 골목길을 질주하거나 추적자들의 추궁을 피하기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섹스와 성적인 방종은 자유로운 행동 양식의 소여(所與)인 것처럼 변덕스러운 스타일로 전달되고 목표나 의도, 지향을 버린 말과 행위, 결과가 수반된다.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습격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태도와 유머, 냉소를 시전하는 특성은 어떤 한국영화도 도달하지 못했던 미학적 혁신의 지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실제 영상과 가공된 재연의 흐릿한 경계가 명확해지는 장면 중 하나는 송강호와 안내상, 기주봉, 이문식 등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홈리스 분장을 하고 실제 홈리스들과 섞여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찬송가를 부르는 거리의 전도자들 사이로 슬금슬금 이동하여 능청스럽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송강호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지우는 전략을 육체적 제스쳐를 통해 몸소 실행한다. 기주봉은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는 서울역의 홈리스가 되어 현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진짜 행려들과 3개월 간 합숙을 한 안내상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10대 아이들, 홈리스들과 달리 이 진짜를 연기하는 가짜들은 오랜 기간 훈련한 스킬을 발휘하여 능숙하게 현실에 자리를 잡는다. 감독과 스태프, 감독과 배우, 배우와 일반인, 진짜와 가짜, 선과 악, 미와 추, 현실과 허구 따위의 기준들을 깔아뭉개는 장선우의 방임적 태도는 야심적이다. 현재 시점에서 회고해 보건대 <나쁜 영화>의 위상은 시네마베리테와 에세이 필름의 언저리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대상들의 세계로 들어가 의도된 구성을 포기하고 그들에 의해 영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직한다. 젊음의 기쁨과 발견의 시기를 거리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장선우는 미학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체의 영화적 형식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간다. 진실(과 진실한 사람)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를 말하고 그 과정에서 매체의 성질을 다시 설정하며, 가치판단의 기준을 재정의하도록 하는 불온한 의도는 시네마의 역량을 시험한다. 도전적이지만 의도적으로 한계를 두지 않는 이 이야기는 체제에 저항하는 존재들의 삶과 예술적 반항의 태도를 일치시킨 현대 한국영화의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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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은 영화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덕력자다. 그는 비디오 가게 점원으로 일하면서 섭렵한 온갖 영화들을 자산으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쌓았는데, 다시 말해 정규교육의 도움 없이 오롯이 영화 그 자체만을 교재 삼아 스스로를 훈련시킨 씨네 키드인 것이다. 일본이나 홍콩 등에서 도착한 액션 및 무협 영화나 미국 B급 영화들을 사랑했던 쿠엔틴 타란티노의 영화 세계는 수다스럽기 그지없고, 유혈 낭자한 폭력이 가득하며, 지나치게 얽히고설킨 실타래 속에서 좌충우돌하는 인물들을 다수 포함한다. 또 그는 팝 음악으로 구성되는 OST를 비롯해 왕왕 대중문화에 대한 사랑과 논평을 표출하고, 씨네 키드답게 다른 영화의 장면을 인용해오고는 한다. 이와 함께 타란티노 월드를 지탱하는 한편에는, 초기 < 저수지의 개들 >이나 , < 펄프 픽션 >부터 시작된 비선형적 서사구조가 있다. 여기서 하나의 사건은 캐릭터들의 다양한 시점별로 자꾸 반복되며 시간 진행을 멈춘다. 다른 한편 < 킬빌 > 시리즈부터 복수를 테마로 다양한 변주들을 선보이고 있는 그는 여성, 흑인, 유대인 등 역사적으로 핍박받은 존재들을 불러들여 극도의 카타르시스를 선사하는 복수극을 완성한다. 그중 이번에 소개할 작품은 우리나라에서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한 < 재키 브라운 >(1997)과 <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2) 이다. 두 영화는 좀 더 직접적으로 이전에 제작된 작품의 설정에 기반을 두거나 그에 대한 오마주를 포함하고 있는데, 예를 들면 두 영화의 제목 모두 그가 열광했던 영화 및 그 주인공의 이름을 호명한다. <폭시 브라운>(1974), < 재키 브라운 >(1997) 포스터의 동일한 제목 타이포 < 재키 브라운 >은 70년대 흑인 B무비에서 활약한 팸 그리어를 스크린으로 소환한다. 원작소설의 재키 버크가 영화로 오면서 재키 브라운으로 이름이 바뀐 이유는 팸 그리어가 70년대 분한 <폭시 브라운>(1974) 이란 영화 때문이며, <재키 브라운> 포스터의 글씨체도 그 영화에서 따온 것이다. 이러한 오마주와 관련해서 영화의 첫 장면은 단연 인상적인데, 수평 에스컬레이터를 탄 팸 그리어(재키 브라운 역)를 따라 트래킹으로 진행되는 롱테이크 장면은 그녀를 누구보다 당당하고 우아한 존재로 각인시킨다. 이 밖에도 명품 중년 배우들의 안정적인 연기와 70년대 분위기의 조화는 영화 전체가 마치 70년대 영화에 대한 오마주처럼 느껴지게 한다. 또 마치 쿠엔틴 타란티노가 유명세로 인해 부과된 짐을 뒤로하고 여기서 유유자적 자신의 영화 취향을 즐기고 있는 것도 같다. 영화를 정말 사랑하면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말했던 그의 말처럼 감독의 사랑은 관객에게도 느긋하고 즐거운 시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 장고: 분노의 추적자 > < 장고: 분노의 추적자 >의 경우 쿠엔틴 타란티노의 미국 최고 흥행작이기도 하다. 여기서 감독의 재기는 현상 수배범을 잡는 다양한 에피소드들에서 발휘된다. 상대방의 수를 읽고 이를 제압하는 능수능란한 전략전술은 시원스럽고 호탕하다. 한편 감독은 1966년 작 <장고>에서 장고가 홀로 적진에 둘러싸여 절대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다가 갑자기 엄청난 기관총을 꺼내 한 번에 적들을 무찌를 때의 통쾌함을, 노예 시대와 관련한 카타르시스로 연결 짓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는 서부극의 영웅 장고를 미국 남부 노예 시대의 풍경에 분연히 일어서는 영웅의 모습으로 재해석한다. 로버트 포스터( 재키 브라운 ), 크리스토프 왈츠( 장고: 분노의 추적자 ) 그런데 두 영화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각각의 영화에 등장하는 조력자 캐릭터다. 주인공보다 더 영화를 중심에서 이끈다 생각될 정도로 멋진 그 조력자들의 태도에는 어떤 기품이 흐른다. < 재키 브라 운>에서 로버트 포스터(맥스 체리 역)는 재키를 향한 열정과 연륜에서 비롯된 체념을 현명한 중년의 눈빛과 자태 속에 함께 녹여낸다. 영화에서 느껴지는 품위는 어쩌면 로버트 포스터가 보여주는 그 자태에 많은 부분 기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 장고: 분노의 추적자 >를 이끄는 조력자는 크리스토프 왈츠(닥터 킹 슐츠 역)이다. 장고가 개인적인 복수를 목표로 앞만 보고 달리는 인물이라면, 슐츠는 노예제도나 각종 부당함에 대한 분노와 환멸 및 조롱 등을 복합적으로 드러내는 전략가이다. 타란티노 감독은 노예제 사회 백인들을 역겹고 우스운 존재들로 만들어 비판을 대신하는데, 이런 정서를 표출하는 인물인 슐츠는 극의 절정에 달해 침착한 면모를 버리고 피비린내 나는 복수극의 서문을 연다. 슐츠의 기품이 극 전체를 이끌며 노예제 사회에 대한 평가와 태도를 써 내려 가게 되는 것이다.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작품이 얼마나 산만하고 시끄러우며 폭력적이든지 그것들은 통쾌한 감정적 해소 한방을 위해 발휘된다. 그 한방은 모순과 우연으로 점철된 치열한 인간사 및 그 폭력성에 대한 감정분출이다. 그는 B무비들이 펼쳐놓은 판타지를 이런 감정분출의 출구로서 재해석하고 업데이트한다. 그리고 이러한 판타지는 피로하고 짜증 나는 현실에 극도의 카타르시스를 제공한다. 그의 영화들과 함께 답답한 기분에 상상의 기관총을 난사해 보겠는가?
2009년 오바마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미국 역사상 최초로 아프리칸 아메리칸을 수장으로 하는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할리우드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1960년대 남부 지방의 인종 차별을 다룬 < 헬프 >(2011)가 큰 사랑을 받더니, < 노예 12년 >(2013)은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 < 셀마 >(2014)는 1965년 투표권 획득을 위해 행진하던 마틴 루터 킹의 모습을 담아냈다. < 버틀러: 대통령의 집사 >(2013)는 1952년부터 1986년까지 30년 넘게 8명의 대통령과 함께했던 집사의 이야기다. 스필버그는 노예제 폐지 당시의 역사를 다룬 < 링컨 >(2012)을, 타란티노는 흑인 히어로를 내세운 < 장고: 분노의 추적자 >(2013)를 만들었다. 우연일까? 아니다. 레이건 시절 람보나 코만도 같은 이른바 ‘하드 바디’ 액션 영화들이 등장했듯, 이런 변화는 분명 ‘오바마 효과’의 결과이며, 1980년대 말~1990년대 중반의 이른바 ‘블랙 시네마’(black cinema)를 떠올리게 한다. 차이는 있다. 스파이크 리, 존 싱글턴, 휴즈 형제 등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던 ‘블랙 시네마’가 현실을 토대로 사회적 모순을 때론 과격한 방식으로 파고들었다면, 오바마 시기의 이 영화들은 과거로 돌아간다. 노예 제도가 존재했고, 흑인들에겐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았으며, 그들은 하녀와 집사와 유모로 살아가야 했던 시절. 이 영화들은 흑인의 고통스러운 역사를 환기시키고, 그들의 투쟁을 복기하며, ‘오바마’라는 현재의 성과를 되새긴다. 이런 현상은 북미 대륙에 한정되지 않는다. 대서양 건너편, 영국에서 제작된 < 만델라: 자유를 향한 머나먼 여정 >(저스틴 채드윅, 2013)(이하 <만델라>)은 일종의 반성이다. 이 영화는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노골적인 인종 차별 정책이 자행되었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역사를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을 통해 바라보면서, 영국의 폭력적인 식민 통치의 과거사를 바라본다. 만델라의 자서전을 토대로 꼼꼼하게 엮어나간 이 영화는, 한 인물에 대한 전기 영화이면서, 매우 선명하게 재현한 역사적 폭력의 영화이기도 하다. <만델라>는 자료 화면과 기록 사진들을 삽입하며, 이 영화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가 픽션이 아님을 수시로 일깨운다. 영화를 보기 위해 플레이 버튼을 누른 후, 우린 작은 당혹감에 부딪힌다. 나름 잘 알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던 ‘넬슨 만델라’에 대해, 정작 우리가 알고 있는 건 거의 없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전기 영화의 ‘기본적 미덕’인, 한 인물에 대한 연대기적이며 개괄적인 설명에 충실하다. 말 그대로 ‘일대기’라고 할 수 있는 < 만델라 >는 유년기와 청년기에서 시작해, 변호사가 된 후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 리더로서 투쟁의 전선에 서고, 27년 동안 감옥에 갇히며, 1994년 76세의 나이에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이 되기까지의 만델라를 보여준다. 이 과정은 만델라의 개인사이며 동시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현대사다. 만델라를 연기한 배우들: (상단좌측부터 시계방향) 대니 글로버(만델라), 데이빗 해르우드(미세스 만델라), 시드니 포이티에(만델라와 클레르크), 모건 프리먼(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전기 영화의 이런 서술 방식 지니는 가장 큰 난점은, 긴 시간을 주마간산 격으로 훑어가다 보면 드라마의 밀도가 떨어지면서 지루한 스토리가 되기 쉽다는 것이다. < 만델라 >도 예외는 아니며, 때론 교육용 역사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하지만 제작진과 저스틴 채드윅 감독의 ‘신의 한 수’는 만델라 역에 < 토르 > 시리즈(2011~ )의 헤임달이자 < 퍼시픽 림 >(2013)의 사령관인 이드리스 엘바를 캐스팅한 것이다. 이미 다른 선택들도 있었다. HBO의 TV 영화 <만델라>(1987)의 대니 글로버는 무난했다. 역시 TV 영화였던 <만델라와 클레르크>(1997)의 시드니 포이티에는, 포이티에 라는 인물이 할리우드에서 지니는 역사적 의미를 떠올려 보면 상징적인 캐스팅이었다. < 우리가 꿈꾸는 기적: 인빅터스 >(2009)의 모건 프리먼은 최고의 싱크로율이었다. 이드리스 엘바와 넬슨 만델라 그렇다면 이드리스 엘바는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의 진짜 모습에 가장 근접하려는 노력이다. 엘바의 만델라는, 우리가 표면적으로 알고 있는, 인자하고 온화한 이미지의 넬슨 만델라와 거리가 있다. 190cm의 키에 탄탄한 근육질인 엘바는(만델라는 185cm였다) 대중 앞에서 뜨거운 어조로 선동하고, 육체적 욕망 앞에서 솔직한 만델라를 보여준다. 이런 모습은 긴 세월 동안 감옥 생활을 견디는 인동초 같은 이미지로 만델라를 바라봤던 일반적인 관객들에겐 꽤 신선하다. 이드리스 엘바는 묵직한 카리스마와 섬세한 감성을 통해 50년이 넘는 세월을 훌륭하게 연기해내며, 어쩌면 그의 존재감이 이 영화의 전부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도 있다. 자서전을 토대로 한 만큼, < 만델라 >는 저항적 정치 지도자뿐만 아니라 좀 더 다각적인 모습의 만델라를 담아낸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이자, 아버지이자, 동료인 만델라. 이런 접근 역시 이야기를 분산시킬 수 있지만, 두 번째 아내인 위니 만델라(최근 007시리즈의 머니페니 나오미 해리스가 역할을 맡았다)와의 관계는 후반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갈등 구도다. 22세 때 18세 연상의 만델라와 결혼했지만, 남편은 38년의 결혼 생활 중 27년을 감옥에 있었고, 그동안 그녀는 투쟁의 선봉에 서서 갖은 고초를 당했다. 출옥한 후 남편과는 노선 갈등을 빚으며 결국 이혼하게 되는데, 영화는 그녀가 겪었던 일과 넬슨 만델라와의 공적, 사적 관계들을 담담히 보여준다. 이런 대목들은 만델라라는 인물을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 아닌, 인간관계 속에서 고뇌하고 힘겹게 결단하는 평범한 인간임을 보여준다(만델라와 친분이 있었던 U2가 주제가를 맡았다. 제목은 ‘Ordinary Love’. 즉 ‘평범한 사랑’이다. 물론 그것이 결코 쉬운 건 아니지만). < 만델라 >는 그렇게 뛰어난 전기 영화는 아니지만, 채드윅 감독의 영화적 리듬은 분명 좀 더 다듬어야 할 구석이 있지만, 넬슨 만델라라는 인물의 진짜 얼굴을 알고 싶다면 반드시 접해야 할 작품이다. 영화는 만델라라는 인물뿐만 아니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피의 현대사’를 기교와 가감 없이 있는 그대로 보여 준다. 증오의 마음을 품었고, 그래서 투쟁의 선봉에 섰고, 그 대가로 긴 세월 동안 갇혀 있었고, 결국은 적들을 용서하고 공존의 길을 모색하며 새로운 역사의 문을 연 넬슨 만델라. 영화 <만델라>는 이 과정을 평이하지만 정직하게 그려낸다. PS: < 만델라 >는 2013년 12월 5일 런던에서 시사회를 가졌고, 이 자리엔 관계자는 물론 윌리엄 왕자와 캐서린, 그리고 만델라의 딸인 진지와 제나니 등도 참석했다. 영화가 상영되던 도중, 만델라의 두 딸의 휴대전화엔 당시 병원에서 투병 중이던 넬슨 만델라가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는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하지만 시사회는 계속되었고, 두 사람을 제외한 관객들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영화를 보고 있었다. 상영이 끝난 후 소식을 전해 들은 이드리사 엘바는 무대에 올라 관객들에게 만델라의 부음을 알렸고, 2분 동안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