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가인
- 감독
- 석천
- 제작년도
- 1975
- 출연
- 건 첸, 펑 펭, 풍극안
동시녹음 시대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우의 대명사는 고은정 일 것이다. 고은정을 모르더라도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라는 1970년대 영화의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각종 TV프로에서 패러디되어 마치 후시녹음 시대의 전형처럼 남아있는 그 목소리,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경아의 목소리가 바로 성우 고은정의 소리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않았어도 그 시대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나 말투는 왠지 익숙하다. 고은정을 위시한 많은 성우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와 말투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은정은 영화 후시녹음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 문화영화의 나래이터 때로는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더빙과 텔레비전 방송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고은정은 1936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6년간 일본에서 자랐다. [사진1, 2]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과 모친 김재순,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高犧鼎)과 모친 김재순(金在順),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채 6살이 안된 어린 그녀는 당구를 삼백 정도나 치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줏빛 카페트 위에서 연분홍 와이셔츠에 감색 망사 조끼 그리고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모와 보낸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강렬했다. 음악과 미술에 조애가 깊은 어머니는 사별하기 전까지 어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부지런히 키워줬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서 종소리가 난다 말할 만큼 충만한 감성과 관찰력을 지닌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헌신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와 새어머니로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송과 영화계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근성을 배웠다. 그녀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켰던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일컬어 시대를 살아낸 모성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죽음을, 청소년기에는 한국전쟁과 부친의 죽음을 겪었고 전후 재건기 대학생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그녀 또한 집안의 강인한 모계혈통을 이을 만한 여성이라 할 만한다. 그녀는 1954년 KBS방송극회원 1기 (서울중앙방송극단 연구원 1기) 즉, KBS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전파매체이던 시절, 인기 있는 라디오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후시녹음에서 당시 인기였던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청실홍실>(1956, 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의 전후파 여성 동숙(성우 정은숙 연기)의 말투를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하니 라디오드라마 성우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은정은 KBS방송극회원으로 선발되고 난 뒤 1955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도 합격하여 8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사진3] 1955~56년 KBS 아나운서시절, 국회부의장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장금자, 고은정, 강영숙, 라연수 이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보다는 동화구연에 더 뛰어났던 그녀는 아나운서 생활을 8개월 만에 정리했다. 목소리에 배어있던 바이브레이션은 아나운서의 발성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은 다소 경직되고 보수적이던 아나운서실의 문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발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와 나래이션을 도맡아 했지만,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해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던 시절의 그녀에게는 보도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어울렸다. 실제로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사진4] 1957년 KBS남산 사옥에서 찍은 KBS 방송극회원 1기생들. 왼쪽 뒤부터 김수일,고은정, 박용기, 김옥경, 윤미림, 오른쪽아래부터 이창환, 김소원, 심영식, 신원균 당시 KBS 방송극회원 동기생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그녀에게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영화를 즐겼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녀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로 통했을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 능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후에 방송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구술한 사건과 경험들은 늘 흥미롭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들려준 한국전쟁 경험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십대 문학소녀의 시선에서 전쟁과 피난의 여정은 친구와의 아쉬운 이별 이야기로 그려졌고, 9.28 수복 후 여군으로 생활하며 지낸 부산의 훈련소는 소공녀의 방으로 도치되었다. 물론 성장소설의 한 대목처럼 묘사된 그녀의 이야기 속에도 잔인하고 고된 현실은 존재한다. [사진5] 서울 수도여고 1학년 재학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사진. 왼쪽부터 고은정, 최도영, 최순림. 그녀는 9.28 수복 후 서울에서 여자의용군 2기를 모집할 때 예술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동덕여고 무용부, 한성여고 밴드부가 단체로 입대했고 그녀를 포함한 수도여고 학생 4명 또한 중창단으로 들어가 병과 훈련과 예술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정훈대, 첩보대, 전투부대, 예술대에서 활동했고 1, 2기생 중 우수자는 전선에 배치되어 현지 임관되기도 했다. 그녀는 1.4후퇴 때 의용군 예술대 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영도의 학교건물에서 내무반 생활을 이어갔다. 위문공연을 하며 종군할 생각으로 연습과 훈련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여고생 4명은 내무반 건물 한 쪽에 책을 쌓아 소공녀의 방을 꾸미며 막막한 전쟁기를 버텨갔다. 그녀는 내무반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가 제대를 하고 부산에 피난 와 있던 수도여고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신부님 댁에 기숙하면서 장갑을 짜고 수를 놓아 교통비를 마련해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그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쓰던 좁은 방에 씨레이션 박스로 책상을 만들고 보리밥풀로 교복의 각을 세울망정 벽에는 그리어 가슨, 그레고리 펙,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을 붙여 놓고 창 밖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 서정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견디려했다. 전쟁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휴전반대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규율부였던 그녀는 인기 많은 경기고 대대장과 안면을 트고 YMCA 영어강좌에 함께 참석하는 등 설레는 순간들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녀의 전쟁담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6]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 사진. 왼쪽 아래 황양자, 고은정. [사진7]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휴전반대시위 중 규율부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고은정 역사적인 사건을 정서가 도드라지는 개인사와 연결시켜 묘사하고, 감정이 고리가 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방식이 그녀의 구술이 지닌 논리이자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구술 채록문에서 가령 한국전쟁에 관한 사건은 각기 다른 주제로 다른 회 차에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기에 전쟁과 피난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숙명여대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한다. 이때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지원하게 된 KBS방송극회원 모집에 합격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어 친구와 함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도 진학을 결심한다. 그래서 백병원에 줄을 서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라벌예대 입학원서를 내고 남은 돈으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핫케익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기욕심 덕에 매일 정동의 KBS방송국과 남산 서라벌예술대학 그리고 청파동의 숙명여대를 발에 못이 박히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사진8] 1956~7년경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정동사옥 앞. 성우로서의 그녀의 기초체력은 연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은정는 성우란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면도날처럼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그녀는 끝까지 라디오를 떠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뛰어난 성우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데뷔했을 당시 이미 전문 성우로 이름이 알려진 동료들이 있었다. 작은 녹음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들이 경쟁하고 상처받고 번민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연습하던 대본들을 주워와 매일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역할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순간 귀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체 내부의 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듣는 소리로 인식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KBS 라디오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7)의 미라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박남옥 감독의 남편인 연출가 이보라의 연기지도로 관습화된 연기와 언어가 아닌 현장의 연기와 실제 언어를 반영하는 훈련을 통해 KBS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에서 19살 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어서 KBS 라디오드라마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9)에서 독한 장희빈의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 10년 뒤 텔레비전드라마 <장희빈>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9] 1959년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서있는 이들 왼쪽부터 성우 박동근, 백성희, 고은정, 정애란, 박순옥, 작가 이서구, 김소원, 오정환, 앉아있는 이들 왼쪽부터 나옥주, 오승룡, 장서일. 1959년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나온 사진 속 화사한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1954년에 KBS 성우로 발탁된 뒤 5년 만에 주연급 성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인기 라디오드라마가 방송 직후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성우 즉, 라디오연기자였던 고은정이 동명 영화의 후시녹음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술자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 자신이 했던 19살 경희를 연기한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 [사진10] <동심초>에 미망인의 딸 경희역으로 출연한 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고은정이 더빙했다. 애초에 좀 더 큰 비중의 역을 추천받았지만 본인에게는 라디오에서 했던 역의 연결이 중요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작이 돋보이는 엄앵란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경희 역을 고집했다고 한다. 엄앵란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그녀의 목소리 연기가 간절했기에 배우 엄앵란과 성우 고은정의 콤비 관계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엄앵란이 영화제 연기상 수상을 목적으로 후시녹음을 직접 했던 작품에서도 그녀의 도움과 보완이 필요했을 정도로 고은정은 엄앵란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영화텍스트 안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움직였고 때때로 개인사적인 궤적 또한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마저 닮아 보인다. [사진11]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이 축하연을 즐기고 있다.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에서 주최한 고은정과 엄앵란 사진전에서 보듯 대학 동문인 둘은 오랜 기간 동안 연기자로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대표적인 배우-성우 콤비로 자리매김한다. [사진12] 1960년대 초반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동아리 숙미회의 엄앵란·고은정 사진전에 참석한 고은정과 엄앵란 1963년 8월 방송문화상을 수상하는 고은정은 이미 당시 최고의 성우였다. [사진13] 1963년 8월 15일 방송문화상 수상식 현장. 공보부장관 임성희, 고은정. 엄앵란 뿐만 아니라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 까지 당대의 내노라할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전부 고은정을 거쳐 갔다. 영화 후시녹음에서 목소리 연기는 입모양에 맞춰 대사를 넣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배우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연기를 완성시켜주어야 했다. [사진14] 1960년대 후반 남산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1960년대 후반 남산에 있던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그녀의 표정을 보면 성우 또한 연기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영화 속 여배우의 표정에 소위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펑펑 쏟게 해달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을 때면 여배우가 얼굴을 가리거나 커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연기자가 대사를 실수한 채로 어영부영 넘어갈 경우 입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그 장면을 살려내는 것은 전부 성우의 몫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으로 연기의 몰입도가 부족하거나, 빠르게 진행되는 촬영현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은 후시녹음 단계에서 성우들의 연기로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후시녹음 된 한국영화에서 배우가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대사가 대본과 맞지 않아 성우가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이고 또 컷이 바뀔 때 웃음소리 등이 이어지는 경우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아 목소리로 연결을 맞춰 준 장면들이라 하겠다. 남산의 한양녹음실 위층에는 다방이 있어 녹음하다 잠시 다방에서 쉴 때면 연예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하니 녹음실과 주변 풍경 또한 영화촬영 현장만큼이나 분주했던 듯하다. 때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고 더빙을 탁월하게 잘 해준 성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역설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인 입도선매와 입도선매로 투자받을 수 있는 조건인 특정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그리고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지탱해야 하는 빠른 제작 속도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제작의 악조건은 촬영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성우들이 메워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성우들은 낮 시간에 라디오방송 녹음을 마치고 영화녹음실로 출근해 밤새 영화를 녹음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일하며 1960~70년대를 보내게 된다. [사진15] 1963년 만리동 녹음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며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 마지막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그들의 역할은 영화 텍스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녀의 영화후시녹음 작품목록을 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와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딧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연하고 공공연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채, 타인의 연기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녀는 1983년도를 마지막으로 영화후시녹음을 그만둔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도 동시녹음으로의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장비, 자본과 제작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1980년대 내내 여전히 성우들의 후시녹음은 이어졌다. 연기에 갈증이 있는 그녀는 영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온전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라디오가 항상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진16] 1963년 동아방송 개국 시 동아일보사 정문 모습. 그러나 방송계 또한 1960년대 초중반부터 민영방송국들이 대거 등장하며 성우와 탤런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속제를 추진하다보니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고수해 온 그녀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자, 엄연히 성격이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라디오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안타까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시리즈 <법창야화>(MBC, 최풍 각본, 고무송 연출, 1977)나 <고백>(MBC, 1975~76)같은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17] 1975년 2월 M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한 MBC 라디오드라마 <법창야화>팀.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고은정, 최풍, 김현직, 변웅전, 고무송PD, 아랫줄 왼쪽 두 번째부터 최선자, 김성옥, 홍성민. [사진18] MBC라디오 1인 드라마 <고백>팀. 성우 고은정이 홀로 엮어 나가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왼쪽부터 고무송PD, 첫 회 주인공이었던 가수 문주란, 고은정, 유현종 작가. 뿐만 아니라 인기 텔레비전 외화시리즈 <왈가닥 루시>(1971)의 루시, <사랑스런 지니>(1977)의 지니 역을 더빙해 텔레비전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1950년대 말 종각에 있던 한국 최초의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에서 이순재, 김승호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 성우가 아닌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목조건물인 HLKZ방송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로 목소리가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1970년대 다시 텔레비전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일치시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했던 그녀가 방송 매체의 변화와 보이지 않는 역할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1977년 작가로서의 이력을 새롭게 시작한다. MBC 라디오 각본공모에 <대니 할머니>로 당선되며 성우에서 작가로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2년간 동아방송의 동명 프로그램에서 직접 집필했던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 <고운정 미운정>을 출간한다. 이 책은 1996년에 다시 재간되기도 했다. 작가로 데뷔한 뒤 성우 일을 접고 세계를 돌며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은 성우의 명망 뒤에 숨겨지게 된다. 1977년 이후 그녀는 방송작가와 성우를 겸했고 영화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를 각색하고 정지영 감독의 권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19, 20]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에서 각색을 맡았고 수명(정윤희)의 정신과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그녀는 연극을 통한 연기활동을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왔다.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이보라 연출, 1958)와 <장희빈>(박동근 연출, 1959)으로 한창 바쁠 때에도 그녀는 제작극회 초기작인 연극 <불모지>(김경옥 연출, 1958)와 현대극회의 창립작인 연극 <칵테일파티>(이보라 연출, 1959)에 출연했다. 현대극회는 중앙방송국(KBS)과 기독교방송국(CBS)의 성우들과 작가 및 연출가인 이보라, 임희재, 조남사가 모여 만든 극단이다. [사진21] 1958년 7월 제작극회 4회 발표작 연극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왼쪽부터 효과 최창봉, 건너 띄고 이두연, 박현숙, 조동화, 건너 띄고 작가 차범석 작가, 연출 김경옥. 아랫줄 가운데 노인 분장을 한 고은정, 아랫줄 오른쪽 끝 안평선. [사진22] 1959년 10월 공연한 현대극회 창립기념 작 연극 <칵테일파티>(T.S 엘리엇 작, 이보라 연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꽃을 들고 있는 이가 박용기, 고은정, 연출 이보라, 이미경, 박기선, 오승룡. 둘째 줄 안경을 쓴 이가 각색 윤병일, 최을선 가운데 위쪽 분장하고 꽃을 들고 있는 신원균, 이우영, 최난희. 1962년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66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오사량 연출)에는 나타샤 김역으로 1968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동굴>(유인형 연출)에는 유애 역으로 열연했고 197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1972, 권오일 연출)에는 첼레스티나 역으로 유인촌과 함께 출연했다. [사진23] 1966년 5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 오샤랑 연출) 중 한 장면. 왼쪽이 나타샤 역의 고은정이다. [사진24] 1968년 4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동굴>(김승규 작, 유인형 연출)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정철, 민지환, 고은정, 백성희. [사진25] 1972년 7월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막스 프리쉬 작, 권오일 연출)의 출연진. 왼쪽 상단 유인촌, 아랫줄 가운데 첼레스티나 역의 고은정, 오른쪽 옆에 최병학, 건너 띄고 이수나, 고은정 뒤로 돈 후안 역의 황일청, 그 오른쪽에 미란다 역의 노경자. 그뿐 아니라 막역한 사이인 최은희 선생의 배우극장 멤버로 꾸준히 공연을 올렸고 지방 순회공연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성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공적인 영역의 활동 또한 활발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성우 에이전시를 만들어 처우개선에 힘썼고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성우, 작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전문성을 펼쳐왔다. 그러한 전문성과 노련함이 그녀의 구술채록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26] 1977년 단행본 『고운정 미운정』에 실린 작가 고은정의 소개 사진. 1950년 말 우미관에서 개봉한 서부영화들을 극장 영사실에서 더빙한 기억, 1971년 개봉 영화 <러브 스토리>(아더 힐러, 1970)의 영화홍보용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했던 경험, 영화후시녹음의 다양한 기술, 성우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 스타일,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녹음 방식 등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술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적 없고 영화와 관련된 수상을 해본 적 없는, 영화의 공적 기록과 역사에서 부재된 채 남아있는 그녀의 역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미인은 아니었다. 남성처럼 호방하고 활달했지만 달필에다 의외로 섬세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박남옥 (朴南玉) 감독에게서 받은 인상이다. 내가 박 감독을 처음 뵌 것은 1981년 4월 20일 오후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유현목 감독의 소개로 서울 서대문 화양극장 뒤쪽에 있는 한 경양식집에서였다. 나는 그때 <일간 스포츠>의 청탁을 받고 기획 연재물 ‘인물영화사’에 대한 자료를 정리 중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박 감독에 대해 쓰고 싶었으나 관련 자료가 빈약해 일차 집필 대상에는 빼놓은 상태였다. 그랬는데 뜻밖에 미국에 살고 있던 그가 잠시 귀국했던 것이다. 만나고 헤어진 지 5일쯤 지났을까 그가 편지를 보내왔다. 엷은 미농지 넉 장에 볼펜으로 쓴 달필의 편지에는 추가 내용과 함께 간곡한 부탁이 들어 있었다. 비록 그의 표현대로 ‘일제(日帝) 교육 덕에 철자법’이 틀리긴 했지만 주요한 부분에는 삼각표시(△)를 하는 등 인상과는 달리 매우 꼼꼼한 성품의 일면을 보여주었다. 이를테면 그가 광복 전 세운 투포환 한국 신기록 수립 연도를 재확인하면서 광복 후는 백옥자지만 광복 전은 박남옥 이라고 기재하거나, 집필에 참고가 될 만한 자신의 과거사 게재 잡지<신여원>를 알려 주었다. 심지어 데뷔작 < 미망인 >의 스틸까지 지정하고, 이혼한 남편(방송연출가 이보라 )에 대한 얘기는 되도록 쓰지 말아달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리어카 이동차’를 탄 사진은 흥행 가치가 없으니 내지 마세요 하거나, 제7회(1960년) 동경 아시아영화제 때 일본배우 미후네 도시로(三船敏郞)가 그에게 담뱃불을 붙여주는 스냅 사진에 대해서는 “멋은 있어도 좀 건방질까?” 이렇게 타진하는 식이었다. 1955년은 6.25전쟁 복구와 함께 영화행정 업무가 국방부에서 문교부로 이관되고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흥행에 크게 성공해 국산영화가 기업의 기틀을 마련한 해였다. 그 뿐만 아니라 무성영화 시대부터 활약해온 배우 이금룡이 별세하고 그를 기리는 최초의 민간 영화상인 금룡상(錦龍賞)이 제정돼 시상되기도 했다. 이런 시기에 이 나라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 박남옥 이 탄생했다. 그의 처녀작이자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이보라 원작 각본 < 미망인 >은 6.25전쟁에서 남편을 잃은 한 여성의 욕망과 좌절을 그린 것이다. 박남옥 감독은 1923년 2월 24일 경북 경산군에서 섬유업을 하는 박씨 집안의 10남매 중 셋째 딸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달리기를 잘해 초등학교 때 이미 도대회에 선발될만큼 운동감각이 뛰어났다. 그래선지 경북여고 재학 중일때 단거리 달리기와 높이뛰기 선수로 뽑혀 경기에 나가 입상했고, 1939년 제2회부터 41년까지 투포환 선수로 조선신궁봉찬체육대회에 참가해 3년 연속 우승, 한국최고기록을 보유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 반면 미술과 문학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여주었다. 3학년 무렵 그는 최인규 감독의 < 집없는 천사 >(1941)를 보고 꽃 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 에게 반하면서 영화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이 무렵 그는 장차 화가가 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런 희망과는 달리 집안의 압력에 굴복해 미술이 아닌 가정과에 진학하게 된다. 광복 전인 1943년이었다. 정작 남들이 부러워하는 이화여전(梨花女專)에 들어가기는 했으나 공부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오히려 헌책방을 뒤지거나 영화를 보는 일에 더 열을 올렸다. 그래서 기숙사감의 눈총을 받기 일쑤였다. 이 무렵 그는 성장기 여학생들의 감성을 다룬 <제복의 처녀>(레온티에 사간, 1931)와 레니 리펜슈탈 감독의 베를린올림픽 다큐멘터리 < 민족의 제전 >(1936)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게 된다. 특히 그가 이 영화를 각별히 좋아하게 된 이유는 두 편 다 여자가 연출했다는 점이었다. 박 감독은 결혼을 강요하는 부모에게 맞서 가정과를 중퇴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1944년 일본인이 경영하던 대구 일일신문의 기자로 입사했다. 그는 여기서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2년도 안 돼 다시 서울로 올라와 본격적인 영화의 길에 들어선다. 첫발을 내디딘 곳이 조선영화사(사장 이재명 ) 광희동 촬영소였다. 그는 거기서 뉴스 편집 일을 거들며 최인규 감독의 < 자유만세 >, 이규환 감독의 < 똘똘이의 모험 >과 < 민족의 새벽 >(이상, 1946)의 편집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이후 최은희 를 데뷔시킨 신경균 감독의 < 새로운 맹세 >(1946)의 스크립터 일을 맡게 된다. 50년 초여름 박남옥 은 부모의 성화에 못 이겨 고향으로 선을 보러 갔다가 6.25전쟁을 겪는다. 그는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한형모 감독을 따라 국방부 촬영대의 일원으로 김석원 장군이 지휘하는 영천작전에 참여했다. 그가 방송극작가 조남사 의 소개로 방송극 연출가인 이보라 (李保羅)와 백년해로를 기약한 것은 1954년 서른세 살 때인 부산에서였다. 9.28수복 후 관훈동 종로학원 자리에 신혼살림을 차리고 첫딸 경주를 낳았다. 그가 언니 돈까지 끌어들여 제작한 < 미망인 >은 낳은 지 두 달도 안 된 딸을 들쳐업고 찍은 영화였다. 20여명의 스태프에게 밥을 해먹이고 리어카 이동차에 올라 앉아 고무신 차림으로 레디고를 외치는 그의 모습은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중앙극장에서 개봉된 영화는 4일만에 간판을 내리는 참패로 끝났다. 게다가 결혼생활마저 순탄치 못했다. 심한 성격 차이로 남편과도 3년 만에 헤어지고 말았다. 1956년이었다. 영화 실패와 파경으로 인생에 회의를 느낀 박 감독은 <시네마 팬>이라는 월간 영화잡지를 창간해 스크린 대신 활자로 승부를 내고자 했다. 그러나 이마저 쉽지 않았다. 제3자에게 판권을 넘기고 57년 둘째 형부 김상문(金相文)이 운영하는 동아출판사에 들어갔다. 78년 퇴사할 때까지 21년 동안 관리과장으로 근무했다. 2년 뒤 그는 이화여고를 졸업하고 드라마센터에서 연극을 공부하다가 UCLA 디자인과를 나온 딸이 있는 로스앤젤레스로 떠났다. 박남옥 감독은 소주 2~3병은 눈 깜짝할 새에 마시는 주량과 ‘골초’라는 말을 들을 만큼 대단한 애연가였다. 또한 웬만한 권투 중계 프로는 놓치지 않았던 복싱 팬이기도 했다. 나는 박 감독과 만나기 전에 그의 남편이었던 이보라 선생을 먼저 알았다.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사이 문인들이 즐겨 찾던 명동의 ‘갈채다방’과 기독교방송국이 있던 종로 2가의 ‘시온다방’ 시절이었다. 그는 스포츠형 머리에 미소 머금은 모습으로 나타나 주태익 , 조남사 등 주로 방송극작가들과 자주 어울리고는 했다.
1960년대 한국영화계에서 활극 액션 영화의 현저한 융기는 장르의 국제적 경향이 로컬 시네마의 정체성과 교착되어가는 진기한 풍경을 보여준다. 서부극과 필름 누아르,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한국적 수용은 관객의 기호에 따라 장르의 양식과 스타일이 어떻게 내셔널 시네마의 아이덴티티로 변환되어가는 지를 보여주는 흥미로운 사례들을 낳았다. 임권택 감독의 < 사나이 삼대 >(1969)는 이러한 한국영화계의 정황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작품이다. 장르 연출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임권택의 액션 감각은 < 황야의 독수리 >(1969), <의리의 사나이, 애꾸눈 박 >(1970),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1971) 같은 평판작들에 뚜렷이 새겨져 있지만 나는 그 시절 최고작은 <사나이 삼대>라고 생각한다. 일본 동경에서 조총련 계 하수인 조직의 행동대장을 맡고 있는 금철( 김희라 )은 절친했던 친구 상현( 강민호 )이 조직에 의해 죽음을 당하자 조직을 이탈하려 한다. 보스 호남( 박노식 )은 민단과의 세력싸움에 전투력이 탁월한 금철을 필요로 하지만 그가 명령을 거부하자 친구의 여동생이자 금철의 아내인 미연( 문희 )을 납치한다. 과거와 절연하고 새 삶을 찾으려는 금철은 연인과의 미래를 위해 피할 수 없는 대결을 벌이게 된다. 서사의 표층은 일본 야쿠자 영화의 익숙한 플롯을 따라가고 있지만 < 사나이 삼대 >는 당대 한국영화로서는 드물게 필름 누아르의 비전과 스타일을 뚜렷이 구현한다. 조직 생활에 염증을 느끼고 암흑가를 떠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갱스터의 고단한 여정을 그린 플롯은 야쿠자 영화의 전형이다. 임권택 감독은 여기에 누아르 적 인물과 스타일을 적절하게 배합하여 충만한 장르적 쾌락을 창조하고 있다. 갱스터는 비극적인 영웅이고, 도덕적 모호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하며, 제도화된 법 집행기관인 경찰은 정의를 실현하는데 무력하다. 금철과 호남의 스토리를 좇는 형사반장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그는 사건을 해결하는 역할보다는 관찰자에 머문다. 장면의 대부분이 밤이나 실내에서 벌어지고, 인물들은 퇴락했으며, 운명론적인 주제로 기우는 이 영화에는 창조적인 어둠의 장르인 누아르의 원형질이라고 할 만한 요소들이 곳곳에 있다. 종교적 구원을 갈망하는 인물, 돌이킬 수 없는 과거와 미리 결정된 운명, 무기력의 정서가 팽배하고, 불안정한 사선 앵글은 위태로움을 조장한다. < 사나이 삼대 >는 임권택 이 얼마나 뛰어난 장면 연출가인지를 입증하는 작품이기도 하다. 계산적인 커트의 분할과 표현주의적인 조명의 사용, 적재적소에서 끼어드는 대담무쌍한 클로즈업, 인물의 심리에 동기화된 시점 쇼트, 반복 재생되는 음악의 라이트모티프(전설의 작곡가이자 평론가였던 황문평이 음악을 맡았다) 등 버려질 것이 없는 형식적 완결성을 구축하고 있다. 풋풋한 신인 시절 야성미가 넘쳤던 김희라의 생기와 절도 넘치는 박노식의 액션도 뇌리에 강하게 남는다. 무엇보다 몸담았던 호남의 조직으로부터 곤죽이 되도록 린치를 당한 뒤 비척거리며 거리를 걷는 금철의 육체 위에 어리는 낙오자 정서는 잊히지 않는 잔상을 남긴다. 쇼트의 구성적 긴장이 감각되는 장면도 여럿 있다. 상황에 대한 긴박하고 압축적인 제시, 어둠과 그림자의 적절한 활용, 공간의 심도를 활용한 맥락화는 스타일이 주제를 밝히는 누아르적인 룩의 전범이다. 영화가 열리자마자 자동차를 탄 네 명의 괴한들에게 상현이 쫓길 때 카메라는 자동차에 탄 이들의 시점과 도주하는 상현을 오가면서 긴박한 상황을 조성해낸다. 상현의 초조한 얼굴과 좁은 골목의 담벼락에 어리는 그림자만으로 우리는 별 설명 없이 필름 누아르의 검은 세계 안으로 들어갈 수 있다. 필사즉생의 각오로 최후의 일격을 준비한 금철이 호남의 아지트에 잠입했을 때 그림자에 가려진 그의 얼굴이 드러나지 않다가 어둠 속에서 스윽 나타나면서 작렬하는 육박전, 암전된 사무실의 어둠 아래서 금철과 호남이 총격전을 벌이는 장면도 뛰어나다. 장르 캐릭터에 대한 명징한 구축 위에 거칠고 눅눅한 누아르의 비전을 이식한 < 사나이 삼대 >는 오늘날의 임권택 영화를 떠올렸을 때 상전벽해(桑田碧海)의 감상을 전해준다. 장르에 대한 투철한 의식이 있었다고 말하기는 곤란하나 정확한 쇼트의 분할과 장면전환, 공간(특별히 심도)에 대한 통제와 연출의 능란함에서 대가의 뿌리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