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사이?
- 감독
- 김조광수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이제훈, 서지후, 이선주, 이채은, 문성권, 손철민, 고수희, 임지현, 오제키 신야, 이춘형
1980년 서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 영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적인 개성은, 각자의 대사와 (완성형의) 자기 플롯이 있는 인물들이 무려 열다섯 명에 달한다는 것이고, 모두 뚜렷하게 구별이 가면서 그 필요를 인정할 만큼 생생하다는 사실이다. 영화는 시골에서 서울로 상경한 세 청년을 중심으로, 개발이 한창 진행 중인 도시에서 그들이 경험하는 좌절과 상실을 주로 주목하지만, 그들이 만나는 여러 다양한 개성의 이웃들 또한 보기만큼 가볍거나 사소하지 않다. 그것은 무엇보다 이야기의 방향이 잘 설정되어 있고, 그 인물들이 틀림없는 순간과 장소에 정확하게 등장했다가 퇴장하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던 성취인 것이다. 관심이 가고 주목이 되는 수많은 인물들을 스크린 위에 쏟아놓은 뒤, 교통정리를 잘 해가면서 각자가 내려야 할 도착지로 능숙하게 데리고 가는 이야기는 그것이 아무리 오래 전 만들어진 영화의 것이라 해도 매번 놀랍고 감탄스럽다. 세 청년들의 쓰라린 정착 초기 모습을 발랄하게 스케치한 오프닝 시퀀스가 끝나면, 철가방을 든 젊은 얼굴의 안성기 가 등장한다. 덕배라는 이름의 어리숙한 이 중국집 배달부는 이후 유지인 이 연기하는 상류층 여성인 명희와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로맨스를 경험하게 되는데, 이들의 플롯은 덕배로 하여금 결국 권투선수가 되어 이 영화의 유명한 마지막 대사(‘그동안 보이지 않는 누군가에게 줄곧 맞아온 것처럼 생각되는데, 그게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를 내뱉게 하도록 작동한다. 그러니까 다들 엇비슷한 러닝타임을 가져가고 있는 터라, 딱히 누구의 이야기라 정리하기에 애매한 이들 청년의 플롯 중에서도, 굳이 ‘주인공’이라고 부를 만한 캐릭터를 꼽자면, 당시 가장 인지도 있는 배우( 안성기 )가 연기한 이 ‘덕배’라는 캐릭터일 것이다. 즉, 사나운 개가 핥고 있는 빈 그릇을 가져가지 못해 쩔쩔 매다 주인에게 비웃음이나 당하던 중국집 배달부의 앞모습이 이 영화의 오프닝이고, ‘이젠 맞아도 이겨낼 자신이 있다’는 보이스-오버와 함께 벌떡 일어나 주먹을 날리는 권투선수의 뒷모습이 엔딩이라면, 이 영화가 결국 ‘덕배’의 이야기로 수렴되는 이야기라 해도 무리가 없는 해석이 된다. 그리고 그것이 영화의 종착점이었고, 그 마지막 보이스-오버가 이 영화를 정리해내는 한 줄 테마였다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덕배’야말로 수많은 인물들의 플롯이 씨줄날줄로 엮이는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으로 설정되어 있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덕배가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고 영화 밖으로 퇴장하게 되기까지, 그를 조력했던 다른 두 청년의 플롯을 하나씩 짚어보자. 이영호 가 연기한 이발소 직원 ‘춘식’은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미스 유( 김보연 )를 좋아하는데, 그녀는 단골손님이자 땅투기로 벼락부자가 된 김회장의 노골적인 추파를 받는다. 미스 유는 춘식에 대한 애정이 없진 않지만 줄줄이 딸린 동생들과 아픈 아버지를 생각하면 자신과 같은 처지의 춘식과 미래를 약속할 수도 없다. 유럽의 복지국가가 얼마나 살기 좋은 곳인지에 대해 조용히 이야기하며 자신의 꿈을 부끄럽게 고백하는 송전탑 아래 두 사람의 데이트 장면은, 이 영화의 가장 사무치게 아름다운 씬이 될 자격이 있다. 결국 이들의 플롯은 춘식이 김회장을 살인미수하는 마지막 장면을 향해 돌진하는데, 버림받은 아이처럼 자주 울컥하던 춘식의 영화 속 마지막 얼굴이 카메라를 향해 죽을 듯 울부짖는 클로즈업이라는 사실을 적용시켜보면, 온통 공사판인 도시가 내려다보이는 산중턱이나 높은 언덕에서 자주 만나 속마음을 주고받던 이 두 사람이야말로 영화의 진짜 심장이나 다름없다는 생각과 마침내 만나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김성찬 이 연기한 ‘길남’은 여관에서 일하며 근처 미용실 직원 진옥과 연애하는 청년이다. 그의 꿈은 언젠가 평등하게 누구나 입장할 수 있는 호텔을 여는 것이며, 아예 어리숙하거나 자주 울컥하는 다른 두 친구와는 달리, 길남은 세속적이면서도 대체로 긍정적이고 매사에 웃고 다니며 가끔 실없다. 그의 플롯은, 자신이 결혼상대로 생각해 맡겨둔 돈을 진옥이 들고 도망치자 망연자실하고 결국 군대에 끌려가는 것이다. 여기서 ‘끌려간다’는 표현은, 영장이 나왔다는 사실을 모든 희망이 사라졌고 결국 다 끝나버렸다는 듯 오열하며 말하는 장면이 숨기고 있는 감정에서 짐작가능하다. 춘식은 감옥에 갔고, 길남은 입대했으며 덕배는 권투선수가 되었다. 아니, 춘식이 감옥에 갔고, 길남이 군대에 끌려갔기 때문에 덕배가 권투선수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이들이 스치듯 만나고 헤어졌거나 온 마음을 바쳐 사랑하고 미워했던 이웃들도 있었기에 더욱 더 그는 권투선수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으리라. 영화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 안의 인물들도 모두 퇴장한지 거의 40년이 다 되어가는 2018년의 지금, 그들은 여전히 서울에 살고 있을까. 그 사람들은 어떤 현재를 보내고 있으며, 어떤 어른이 되어 있을까. 무엇보다, 아직까지 서로 만나는 친구사이일까. < 바람 불어 좋은 날 >은 볼 때마다 그런 궁금증들을 남기는 영화로 매년 나이 들어간다.
2016년은 균질적이고 매끈해 보이는 다양한 표면들이 울퉁불퉁해진 해다. 정권 퇴진을 말하는 광장에 “나라 구하는 호모”와 “혁명하는 헬페미”가 등장했다. 이들은 30-50대 비장애인 이성애자 남성으로 상상되어 온 ‘시민’의 얼굴을 바꾸고 있다. < 캐롤 >이나 < 아가씨 >, < 연애담 > 같은 영화에 대한 대중적인 호응은 마찬가지로 이성애 비장애인 남성들의 스펙타클로만 짜여졌던 한국의 지루한 스크린에 다채로운 구멍을 뚫었다. 한국 사회는 확실히 형질 전환되고 있다. 다양한 목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 혁명의 완수는 아니지만, 변혁의 시작임은 분명하다. 한국게이인권운동단체 ‘친구사이’의 20주년 기념 프로젝트이자, ‘친구사이’ 내부 소모임으로 시작해 “인권 운동계의 아이돌”이 된 게이 코러스 ‘지보이스’의 10주년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 위켄즈 >. 이 작품은 이런 형질 전환의 시대에 적절하게 찾아온, 그 변화를 견인하는 힘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놀라운 작업이다. <위켄즈>는 변화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시간들 속에서 서서히 다가왔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니까 친구사이가 버텨낸 20년, 지보이스가 목소리를 키워온 10년. 우리 앞을 가로막은 벽을 아주 조금씩 천천히 밀어온 그 시간들이 ‘우리의 지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위켄즈 >는 10년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래를 못하는” 지보이스 멤버들의 연습실에서 시작된다. 지보이스는 10주년 기념 공연을 준비 중이다. 매주 일요일마다 모이는 것은 즐겁지만 고역이고, 생계를 위한 노동은 고단하며, 연애는 언제나 달콤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지보이스의 대표곡들이 이런 “우리들의 평범한 게이들”의 삶을 노래하기 때문에, 그 노래들을 연습하는 과정은 단원들의 ‘자기고백’, ‘커밍아웃’, 혹은 ‘수다’와 자연스럽게 엉킨다. 그래서 <위켄즈>를 ‘음악 다큐’가 아니라 ‘뮤지컬 다큐’라고 부르는 것은 정확하다. 그들의 노래, 그 음악이 다큐의 서사이자 곧 형식이기 때문이다. < 위켄즈 >가 따라가는 지보이스의 삶, 그 ‘사람 냄새 나는 이야기’는 한 명의 영웅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기실 한국 사회에서 성소수자가 얼굴을 드러내고 커밍아웃하는 것은 1인 영웅담으로 이야기되어도 부족함이 없기는 하다.) 그것은 서로가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야기, 튕겨져 나가거나 지쳐 쓰러지는 이야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놓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걸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보이스의 10년을 함께 더듬고 있다 보면 홀로 영웅이 되기는 오히려 얼마나 쉬운지, 함께 ‘우리’가 되어 세계를 바꾸어 나가기는 얼마나 어려운지 절감하게 된다. 그리하여 <위켄즈>는 관계를 위한 고군분투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관계는 내부의 관계 혹은 친목에 머물지 않고 외부로 확장된다. 화음이 쌓이고 쌓여 하나의 ‘합창’으로 완성되듯이, 지보이스의 활동은 게이인권운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른 운동들 위에 살포시 얹혀진다. 그렇게 지보이스는 한국 사회의 다양한 투쟁의 현장에 함께 했다. 팽목항에도, 쌍차 투쟁 현장에도, 혐오 세력들이 설쳤던 광장에도, 그리고 온전한 인권헌장 제정을 위한 서울시민들의 점거투쟁에도, 지보이스의 노래가 울려 퍼졌다. 노래가 터져 나온 순간 세계의 공기에는 새로운 파동이 섞여 들어가고, 그리하여 그것이 아무리 미미하더라도 더 이상은 과거와 같은 공기가 아니듯이. < 위켄즈 >가 섞여들어 간 한국의 스크린은 아마도 더 이상 과거의 스크린과는 같지 않을 터다. 그런 의미에서 <위켄즈>는 진정한 판타지이자 꿈의 장르로서의 뮤지컬이라 할만하다. 그리고 여기에서 판타지는 ‘기만’이 아니라, ‘닥쳐올 미래’를 의미한다.
최근 한 편의 독립영화가 영상물등급위원회(이하 영등위)로부터 또 다시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다. 곡사의 영화 < 자가당착: 시대정신과 현실참여 >(이하 자가당착)가 바로 그 주인공. 왜 이 영화는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았을까? 영등위의 사유는 이렇다. ‘과도한 신체훼손과 폭력성, 잔혹함이며 국민정서상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친다’는 것이다. 사실 이 영화는 이미 작년에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바 있는데 그 때의 사유는 이렇다. ‘대사 및 주제에 있어 특별계층에 대한 경멸적 또는 모욕적 표현을 사용하고 개인의 존엄을 해치는 표현 수위가 극심하다’는 것. 그렇다면 <자가당착>이라는 영화는 과연 인간의 존엄을 해치는 영화일까? 어느 정도의 폭력성과 잔혹함이어야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것일까. 그리고 왜 같은 영화에 다른 해석의 결정이 내려지는 것일까. 사실 영등위의 등급심의 문제는 매해 거론되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애매모호한 판단기준으로 심의 결정을 강요받고 있다. 또한 제한상영관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우리나라의 경우 이미 ''''''''제한상영가'''''''' 자체가 비민주적인 처사임은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특히, 정치적, 사회적 이슈, 그리고 표현의 새로운 영역을 계속적으로 확장하고 있는 독립영화의 경우 이미 계속해서 ''''''''검열''''''''당하고 있는 것과 같다. 비단, < 자가당착 > 뿐 아니라 올해 초 개봉된 < 줄탁동시 >의 경우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고 몇 장면의 편집을 거친 후에야 개봉이 되지 않았던가. < 자가당착 >은 이미 전주국제영화제와 인디포럼, 서울독립영화제 그리고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초청 상영되어 관객에게 선보였었다. 경찰의 마스코트인 포돌이를 주인공으로 정치인 박근혜, 현직 대통령 이명박을 자유롭게 풍자, 비판한 작품으로 영등위의 제한상영가 판정은 정치적 심의로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영등위의 첫 번째 제한상영가 판정에는 ''''''''특별계층에 대한 경멸적 표현''''''''을 문제 삼은 반면, 두 번째 제한상영가 판정의 이유가 ''''''''폭력성과 잔혹함''''''''인 걸 보면 영등위 심의의 판단 기준이 얼마나 주관적인 것인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1999년 < 둘 하나 섹스 >가 등급보류에 반발, 헌법재판소로부터 위헌판정을 이끌어 낸 이래 2002년 < 죽어도 좋아 >는 제한상영가 등급의 모순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사회적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최근에도 여려 편의 영화가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고, 편집, 수정을 거친 후에야 상영될 수 있었다. 곡사의 < 고갈 >(이유: 과도한 선정성), < 악마를 보았다 >(감독 김지운 / 이유: 인간의 존엄과 가치 훼손), < 트로피컬 >(감독 이상우 / 이유: 사회통념상 비윤리적 폭력성), < 아버지는 개다 >(감독 이상우 / 이유: 폭력성, 선정성), < 불륜의 시대(바라나시) >(감독 전규환 / 이유: 사회통념 및 국민정서상 받아들이기 무리) 등이 영등위의 판단에 의해 제한상영가 판정을 받은 바 있다. 그리고 문제는 제한상영가 뿐만은 아니다. 김조광수 감독의 < 친구사이? >는 선정성과 모방위험의 이유를 들어 동성애에 대한 심각한 차별적 관점을 드러낸 바 있고, 별다른 노출신이나 폭력신이 없는 < 반두비 >(감독 신동일 )의 경우,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한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여고생이 불법 스포츠마사지업소에서 일한다는 내용이 선정적으로 묘사됐다고 판단, 청소년들의 영화 볼 권리를 박탈한 바 있다. 최근 민병훈 감독의 < 터치 >는 선정성, 폭력성, 약물, 모방위험 등을 이유로 청소년관람불가 판정을 받았다.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제시한 제한상영가의 기준은 이렇다. ''''''''선정선, 폭력성, 사회적 행위 등의 표현이 과도하여 인간의 보편적 존엄, 사회적 가치, 선량한 풍속 또는 국민 정서를 현저하게 해할 우려가 있어 상영 및 광고, 선전에 일정한 제한이 필요한 영화''''''''. 그러나 언제까지 영등위가 영화의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고, 관객의 볼 권리를 제한할 것인가. 영등위, 제발 강요하지 말아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