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스패스
- 감독
- 조엘 슈마허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니콜라스 케이지, 니콜 키드먼, 캠 지갠뎃, 벤 멘델슨, 조다나 스피로, 대쉬 미혹
※<어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내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야 지당하다. 주인공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 이하 애디)가 아름다운 발레 동작을 선보이면 그림자가 따라서 춤추듯이. 그러나 그림자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휘청이며 자신만의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애디를 찾아와 귀를 긁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너야말로 내게 묶인(tethered) 그림자라고. <어스>는 전형적인 공포 영화다. 날씨 좋은 시기에 휴가를 떠나면 아주 혼쭐난다는 것을 우리는 <호스텔>에서, <트루스 오어 데어>에서, 혹은 <미드소마>에서 이미 봤다. 한밤중에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집을 침입하는 경우는 <더 퍼지>나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에서 본 것 같다. 인물들이 통통 튀는가 하면 글쎄. 이 가족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구면이다. 애디 가족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국인’들이다. 꼭 심슨네 가족들처럼, 아둔한 아빠와 모성이 강한 엄마, 똑 부러지는 딸과 조금 덜 큰 아들의 조합은 영화 초반부에 이미 관객을 완벽히 영화 속 세계에 적응하게 한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전형적인 가족이 전형적인 장소에서 전형적인 사건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면 이 전형적인 영화의 공포는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어스>의 스토리는 전형적이지 않은 반전을 수반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사실 어린 시절 지상으로 탈출한 복제 인간이며, 레드야말로 지상 출신의 ‘진짜 애들레이드’란 것을 알게 된다. 레드와 사투 끝에 납치당한 아들을 구출한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고, 뒷자리에 앉아 진짜 애디가 길을 잃고 자신과 만나 뒤바뀌었던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문득 아들을 쳐다보다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들은 늘 가지고 다니는 주황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족이 탄 차는 계속 달리고 길에는 복제인간들의 퍼포먼스가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찝찝한 공포감은 끝나지 않은 채, 손에 손을 잡고 선 복제인간들처럼 불길하게 늘어져 있다. 이 영화가 독창적인 지점은 침입자에 대한 공포로 시작해서 자신에 대한 공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야기 초반부에서 의문의 침입자는 나와 닮은 남이었다. 물론 얼굴이 닮은 기이한 자들에 대고 아들 제이슨은 “그들은 우리잖아. (They are us.)”라고 말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한번이라도 주인공 가족이 침입자들을 ‘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게이브는 에이브러햄을 처치할 때 주저했나? 제이슨은 플루토의 화상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나? 백인 친구의 집에서 그들의 복제 인간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얼굴을 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고민은 일 분도 할 수 없다. 사유지를 침입하지 말라던 중산층 가족은 이제 다른 중산층 가족의 사유지에서 복제인간 일가족을 전멸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그들은 우리지만, 우리는 그들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애디의 숨겨진 과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애디만이 죽어가는 엄브레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플루토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애디가 레드를 처치하는 장면에선 그녀는 웃으며 괴성을 지르는데 그 모습이 언뜻 지하인처럼 난폭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 제이슨은 안아주는 엄마에게 팔을 두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엄마의 미소에 화답하는 대신 가면을 쓰고 얼굴을 숨긴다. <어스>의 공포는 여기에 있다. 공포를 야기하는 원인과 그것을 느끼는 대상의 경계는 일차적으로 서로 꼭 닮은 겉모습을 통해 흔들리며, 반전을 통해 완전히 전이되어 버린다. 나와 똑같은 존재인 ‘도플갱어’에 대한 공포는 사실 퍽 오래된 소재다. 이 소재를 가지고 가장 대중적으로 어필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나온 게 벌써 1886년의 일이니까. 이렇듯 나를 닮았으나 더 흉포한 존재, 말하자면 무의식 속 리비도에 대한 불안은 오랫동안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변주되어 왔다. 도플갱어 호러는 좀비나 언데드에 대한 공포를 닮았다. 한때 죽어 묻혔던 것들이 기이한 모습으로 귀환하는 좀비 호러처럼, 도플갱어라는 소재에는 내 손으로 목을 졸라 무의식 깊은 곳에 묻어 놓은 흉측한 나, 열화된 나, 어두운 나의 귀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어스>는 이 불쾌한 공포감을 극대화하여 귀환하는 자와 나 자신의 위치를 전복 시켜 버린다. 애초에 내가 귀환한 자다. 내가 바로 흉측한 나, 열화되고 어두운 자다. 그래서 관객은 애디의 시점을 공유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다가, 애디가 과거를 떠올리고 미소 짓는 그 순간 함께 미소 짓는 어정쩡한 처지에 놓여야만 한다. 당황스러운 이 순간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경험이다. 주인공의 시점이 도플갱어의 시점으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우리도 그 순간 도플갱어의 시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영화 속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하던 ‘저들’의 이야기가, 나와 나의 무의식 속 도플갱어인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지옥은 나와 나 사이의 가느다란 경계를 따라 존재한다. 그러므로 애디의 불길한 미소는 우리가 ‘진짜 나’라고 느끼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빼앗기는 순간이다. 조던 필 감독의 전작 <겟 아웃>이 신체 강탈의 공포를 담았다면 <어스>는 정체성 강탈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말 부분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애디는 누구인가? 애디가 지하인이라는 이유로 이제껏 살아온 모든 일상을 부정해야 하는가? 그러나 애디라는 존재가 분명 따로 존재했는데, 애디의 이름으로 애디의 삶을 살았다고 그가 진짜가 되는가? 한편 레드는 가여운 피해자인가, 미친 사이코패스인가? 그러면 이제까지 애디를 응원한 나는 누구 편인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래서 <어스>는 무섭고 거북하다. 쿨한 음악과 강렬한 색감으로 무장했지만, 정체 모를 터널처럼 어둡고 끝이 없다. 영화 초반으로 돌아와서, 의미심장한 인상을 남기는 예레미야 11장 11절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니••••••.” 아무렴, 우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이 내린 최악의 재앙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테니.
오재형 감독은 주로 다른 예술을 수단으로 활용하는 작품을 만들어왔다. <쇼팽이미지에튀드>(2008), <강정 오이군>(2015), < 덩어리 >(2016), < 블라인드 필름 >(2016), <봄날>(2018)과 같은 그의 영화는 때로는 애니메이션, 회화, 음악, 춤, 퍼포먼스 중 하나를 지향하지만, 때로는 여러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뒤섞이는 상황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는다. 창작자로서의 오재형은 보수적이면서도 급진적이다. 그는 기존의 어떤 예술의 순수성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이 다른 것과 뒤섞여 오염되는 결과를 낳더라도 크게 죄책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순수하면서도 불순하다. 비교적 최근에 공개된 <모스크바 닭도리탕>은 서로 이질적인 사운드, 이미지, 텍스트를 조합해 자아의 내면이 외부의 낯선 세계와 만나는 과정을 그린다. 이 작품은 오재형 감독이 어머니와 함께 떠난 북유럽 패키지여행에 기초한 것이다. 영화는 두서없이 모스크바, 코펜하겐, 오슬로, 스톡홀름, 헬싱키 등에서 찍은 영상을 보여준다. 이 영화의 제목은 실제 오재형 감독이 어머니와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당시 어느 식당에서 닭도리탕이 만찬으로 나온 것에 착안했다고 한다. 오재형 감독에게는 이국적인 장소에서 익숙한 음식과 마주하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했을 것이다. 영화 속에서 잠시 등장하는 모스크바에 위치한 닭도리탕이 나오는 그 식당은 한국인 관광객들로 가득한 가운데 금발의 외국인이 어눌한 발음으로 부른 한국 노래가 흘러나오고 있다. 한국의 닭도리탕과 대중가요는 그 자신의 뿌리를 잃고 모스크바로 강제 이주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물들이 고정된 장소를 잃고 새로운 장소에서 전혀 다른 의미를 획득한다는 말과도 같으며 영화는 바로 그 논리를 따라서 이미지들을 배치한다. 영화가 진행되면서 익숙한 것과 낯선 것 사이에서 일어나는 상호 침투가 벌어진다. 서로 다른 성격의 것들을 대위법적으로 배치시키는 이러한 연출 방식은 약 8분 남짓한 러닝 타임 동안 영화 전체에 걸쳐 일관되게 적용된다. 영화가 시작하면 모차르트의 <주를 찬양하라(Laudate Dominium)>는 곡이 흐르고, 갓 잠에서 깬 것 같은 목소리로 맥락 없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연출자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들려오고, 이러한 사운드 또는 텍스트들과 함께 여행 중에 찍은 영상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에서 단연 우리의 눈을 끄는 것은 영상이다. 간혹 감독은 여행 중에 찍은 영상을 고풍스러운 느낌의 액자 속에 집어넣는다. 그것은 무성 영화 시절 화면 프레임 가장 자리에 화려한 장식을 입혀 놓은 것을 떠올리게 한다. 겉보기에 평범한 이미지들은 액자화된 프레임과의 그것의 장식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예술적인 가치를 획득한다. 마치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이 그림 그 자체가 아니라 그림을 둘러싼 화려한 액자인 것처럼 말이다. 영화 속 관광객 무리는 미술관을 방문해서 여러 작품을 관람한다. 그러나 정작 영화는 그 관광객들이 본 작품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아마도 오재형의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또한 그 그림의 정체에는 무심할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오늘날 모든 사물들의 가치는 그것이 놓여 있는 장소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결정된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오재형 감독은 이방인 혹은 관광객의 눈으로 바라보는 낯선 세계의 사물들은 그것의 본질과는 무관하게 그저 낯설고, 이국적이고, 신비롭고, 경이로울 뿐이라는 것을 꼬집는다. 감독 자신을 포함한 관광객들의 시선과 위치는 이 영화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이다. 모차르트의 곡이 자아내는 장중한 분위기는 북유럽의 관광 명소와 그곳을 집단적으로 점거하듯이 배회하는 한국 관광객들의 몸짓과 계속적으로 충돌한다. 복장만 놓고 봤을 때 한국의 어느 동네 뒷산을 올라야 더 어울릴 것 같은 한국 관광객들은 명화가 놓여 있는 미술관, 값비싼 상품들이 놓여 있는 상점, 도시민들이 산보하는 거리와 강변을 문자 그대로 점유한다. 이들은 흡사 점령군이나 게릴라처럼 보인다. 실제로 그들은 비행기를 타고 바다와 대지를 건넜고, 버스를 타고 도시의 거리를 가로질렀고, 유람선을 타고 강물의 흐름을 거슬렀다. 그들은 낯선 세계에 틈입하는 침입자들이다. 한편, <모스크바 닭도리탕>은 관객들로 하여금 꿈의 요소들을 해석하는 정신분석학자가 될 수 있는 여지를 둔다. 이를 위해 마련된 장치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단연 이 영화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다. 오재형 감독의 목소리를 빌어 전달되고 있는 무의식의 흐름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자연스럽게 상상의 나래가 펼쳐진다. 흡사 초현실주의의 자동기법을 차용한 것 같은 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꿈속에서 본 장면들에 관한 이야기들을 파편화된 상태로 흩뿌려 놓고 있다. 그 이야기들은 의미의 완전한 폐기보다는 의미 없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실험에 더 가깝다. 그 두서없는 이야기를 대략적으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꿈속에서 ‘나’는 천을 잡아당겨주는 사람이었고, 어느 날 자신의 고용주의 와이프와 함께 초대장을 받아 어느 연회장으로 갔다. 그곳에는 수많은 연예인들이 있었고,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음식이 차려진 뷔페가 있었다. 그러던 중 연회장의 꼭대기로 올라간다. 그곳에는 누군가가 피아노를 치고 있었고, 사람들은 합창을 하고 있었고, 줄을 잡아당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중국 왕에게 샌드위치 먹는 법을 배운다. 이러한 비논리적이고 이야기는 낯선 장소에 서 있는 이방인의 시선으로 묘사된 것이며 그 서술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지다가도 뭔가 그럴듯하게 들리는 이유는 전체를 관통하는 차원에서 상승의 궤적이 그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상승의 궤적과 그것에 대한 감각은 영화 초반부와 후반부에 등장하는 하나의 푸티지를 통해서 보다 구체화된다. 실제 이 영상은 스페인 극단 라 푸라 델 바우스(La fura dels baus)의 공연 <휴먼 넷(Human Net)>을 찍은 것이다. 그 공연의 핵심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긴 줄로 몸을 묶고 다시 그 줄을 거대한 기구 장치에 연결한 다음 공중에서 곡예를 펼치는 데 있다. 중력의 법칙을 거스르는 이 퍼포먼스는 음화로 처리되거나 화질이 저하된 상태로 오재형 감독의 작품 속에 기입되었다.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이 지시하는 높은 곳과 꼭대기는 공중에서 곡예를 펼치는 사람들의 모습과 겹쳐지면서 천상의 세계에 다다르려는 열망을 암시하게 된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모스크바 닭도리탕>은 어둡고 무거운 지하 세계로부터 밝고 가벼운 천상의 세계로 수직 상승하는 것처럼 이해될 수 있다. 게다가 그 상승의 이미지가 홀로 외로이 비상하는 것이 아닌 다 함께 비상하는 형상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집단적인 꿈을 구체화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의 핵심은 상승하는 이미지만이 아니라 여전히 지상에 머물고 있는 어떤 사람의 이미지 또한 포함한다는 의심이 든다. 다시 영화의 출발점으로 돌아가자 보자. 오재형이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으로 가장 먼저 발화한 것은 “꿈에서 나는 천을 대신 잡아당겨주는 사람이었다”였다. 그리고 그가 꿈속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은 연회장의 높은 곳에서 줄을 당기는 사람들이었다. 그 줄잡이들은 하늘로 비상하는 일군의 무리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들은 지상에 발을 디디고 있어야만 했다. 그들은 조력자이다. 그들은 타인들의 비상을 돕고, 그리하여 천국의 기운이 현세에 드리울 수 있도록 한다. 예술은 늘 영웅이나 주인공 곁에 조력자를 두었다. 조르조 아감벤은 여러 예술 혹은 문학 작품 속에서 등장하는 조력자(조수)들에게서 메시아적인 시간이 존재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조수는 사라지는 것의 형상이다. 아니, 오히려 우리가 잃어버린 것과 맺는 관계의 형상이다. 이 관계는 집단적 삶뿐만 아니라 개인적 삶에 있어서 매 순간 망각된 모든 것과 관련된다.” 아감벤의 지적처럼, 조력자는 자기 자신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가운데 다른 세계가 도래하는 것을 받아들일 여유를 갖고 있는 자들이다. <모스크바 닭도리탕>을 포함해 오재형 감독이 자신의 전작들에서 줄기차게 그려왔던 조력자들은 어두컴컴한 망각의 세계에서 다른 세계가 도래하기를 기꺼운 마음으로 기다린다. 어쩌면 그 조력자들이야 말로 오재형 감독이 꿈속에서 찾고자 하는 영웅의 형상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최초의 칸느영화제 초청작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탄 < 기생충 >( 봉준호 , 2019)이 800만 명의 관객을 모으고 있는 2019년 6월 중순 현재, 한국영화로서는 처음으로 칸느영화제의 초청을 받았던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 이두용 , 1983)를 되돌아보는 건 분명 흥미롭다. 1983년 11월 제작이 완성되자마자 제2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작품상 등 6개 부문을 수상한 이 영화는 다음해인 1984년, 빔 벤더스의 < 파리 텍사스 Paris, Texas >(빔 벤더스, 1984)가 황금종려상을 받은 제 37회 칸느영화제에서 ‘주목할 만한 시선’ 11편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이두용 감독은 영화제 기자회견에서 “한국 여인상의 존엄성을 표현하려 했다”고 밝혔는데, 봉건적 가부장제 하 여성의 ‘피맺힌 한’은 이렇게 국제 무대에서 ‘한국적인 것’을 대표하기 시작한다.(한국 관객들도 이것을 공공연히 받아들이게 되는 건 약 10년 후 신드롬을 일으키는 < 서편제 >( 임권택 , 1993) 즈음일 것이다.) ‘한국적 한’의 영화적 탄생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의 애초 아이디어는 세 토막의 옴니버스로 구성된 ‘전설따라 삼천리’류의 이야기였다고 한다. 제목만 봐도 1969년의 옴니버스작 < 이조여인잔혹사 >( 신상옥 )>를 떠올리게 하는데(당시 최일남도 소재가 “어디서 많이 보고 들은 것처럼 느껴”진다고 지적했다 1) ), 그래서인지 이두용 감독은 이 세 토막을 길례라는 한 여인의 이야기로 연결시키기로 했다. 몰락한 양반가문의 딸인 길례가 김진사의 죽은 아들과 영혼결혼을 하는 방식으로 팔려나가 수절하며 살다가 예기치 않게 시동생에게 성폭행을 당해 쫓겨나는 첫 부분, 머슴 윤보를 만나 하층민으로서 행복하게 살았지만 길례를 탐내는 채진사를 결국 윤보가 살해함으로써 야반도주를 하게 되는 중간 부분, 그리고 갑자기 윤보가 억울하게 역적으로 몰린 세도가의 자제였음이 드러나 길례가 윤부사집 며느리가 되었다가 씨내리를 당하고 자결하게 되는 마지막 부분. 그 연결의 억지스러움은 길례가 물레 돌리는 장면들의 미학적 실루엣으로 무마하고자 했으나, 김종원이 지적했듯 “울림의 공감을 주는 메타포로서 살아나지 못했다.“ 2) 저 기구한 삶의 결절마다 그 육체가 하릴없이 성적 대상으로 전락하는 길례가 물레를 돌릴 때, 그녀는 자기 자신과 대면하는 주인공이기보다는 침입자들 앞에 무방비 상태에 놓인 취약한 존재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 ‘한(恨)’의 취약한 이미지는 오히려 이제 막 국제 무대에 등장하기 시작한 한국영화의 위치에 대한 메타포에 가깝다.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갑자기 등장한 것이 아니라 1981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이두용 감독의 < 피막 >이 특별상을 수상하고 베를린 영화제에서 임권택 감독의 < 만다라 >가 본선에 진출했기 때문에 탄생한 것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한국적인 것’(혹은 ‘아시아적인 것’)은 근대성과 길항하기도 하고 종교적인 것과 융합하기도 하는 어떤 미적인 것으로 (재)발견되기 시작했고, 이 (재)발견을 공들여 전유한 결과물이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였다고 할 수 있다. 영국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평자가 “30년전 일본 미조구치 겐지”를 연상케 한다고 지적했듯, 오랫동안 미지의 대상이었던 한국영화는 이 국제무대의 관객들을 위해 일본영화와 비슷하기도 하고 다르기도 한 어떤 ‘한국적인 것’을 전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길례의 육체가 그다지도 자주 폭력에 노출되었던 것은 이 전시를 위한 이미지, 즉 물레를 돌리는 한맺힌 여성의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시안 게임과 올림픽 시대의 관객들 어쨌거나 영화를 통해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하려던 이 작업은 해외에서는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한국은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올림픽 게임 개최를 앞두고 그 인지도를 높여가고 있었다. <여인잔혹사:물레야 물레야>는 만하임 영화제, 런던 영화제, 페사로 영화제 등에 초청되고 일본의 ‘스튜디오 200’에서 ‘현대한국영화주간’을 개최할 때 상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해외 거주 한국인들이 주관한 각종 행사에도 소개되었다. 일본 쓰까사에는 15만 달러에 수출되었는데, 1983년 한국영화의 총수출 편수(21편)의 총액이 25만7천 달러였던 걸 염두에 두면 놀라운 가격이다. 하지만 한국의 관객들, 즉 이미 < 적도의 꽃 >( 배창호 , 1983)>, < 바보선언 >( 이장호 , 1983)>, < 고래사냥 >(배창호, 1984)에 호응하고 할리우드의 <이티(E.T.,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 1982; 한국에서 1984년 개봉하여 역대 최고 흥행성적 3위를 기록했다)>의 자장 안에 있던 관객들에게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는 그저 “우수영화 및 대종상 겨냥영화” 3) 의 하나였던 듯하다. 28일간 상영되었던 명보극장에는 3만5천여 명의 관객만이 방문했다. 1) 최일남, “최일남 산책: 생활문화론,” <동아일보> 1984.3.14. 2) 김종원, “1983년도 한국 (극)영화,” 영화진흥공사 편, <1984년도판 한국영화연감>, 1984. 3) 김종원, 앞의 글. >> 여인잔혹사 물레야 물레야 VOD 보러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