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잉휴먼
- 감독
- 손채영, 유서연
- 제작년도
- 2018
- 어떤 이야긴데? - 그냥, 교복영화야. 대충 그렇게 감상을 퉁치고 마는 영화들이 있다. 성의 없어라. 하지만 그것만큼 정확한 비유나 설명도 딱히 없으니까 앞으로도 그 영화가 시시껄렁하면 내 입에선 곧바로 저런 말이 튀어나올 것 같다. ‘그냥 교복영화야, 댓츠 올.’ 그러니까 왠지 주목할 만한 사연이 있고, 들어줄만한 이야기를 갖고 있을 것 같은 (교복차림의) 십대 소년소녀(들)가 주인공으로 나오지만, 하나 같이 천편일률적으로 시시하거나 고통스러울 만큼 가식적인 이야기와 자세로 일관하는 학교/학원 배경의 영화들, 여기서 아이들은 모두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기 때문에 나중에는 다른 교복영화의 아이들과 섞여버려 이름과 얼굴이 아예 실종되어버린다. 여기서 교복이라는 의상은 거의 저주의 코스츔이다. 그러다보니 그 영화의 주인공 소년소녀가 러닝타임 내내 학교나 교실 근처에 얼씬도 안하는 이야기라 할지라도 일단 교복 차림의 아이들이 짠, 하고 등장하는 순간 나는 움찔, 한다. ‘교복영화인가?’ 이젠 거의 하나의 장르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많고도 다양하게 시시해서 좀처럼 아이들의 얼굴과 제목을 기억할 수 없는 교복영화들 가운데, 내가 주인공들의 얼굴을 비교적 또렷하게 기억하는 두 편의 교복영화가 있다. 하나는 이우정 감독의 < 애드벌룬 >, 다른 하나는 지금 소개하는 김희진 감독의 < MJ >이다. <애드벌룬>은 이미 이 코너에 소개된 적이 있으므로, 지금 나는 < MJ >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려 한다. 이 영화가 재밌는 것은 아예 이 ‘교복’이라는 저주의 코스츔을 벽에 걸어놓고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탐구하려는 듯한 시도가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의도적인지 아닌지는 별로 상관없다. 이 영화에서 ‘교복’이 해내고 있는 역할을 생각해보면 말이지. 오죽하면 이 영화의 제목인 ''''MJ(엠제이)''''는 주인공 소녀들이 바꿔 입는 교복의 ‘이름’이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걸핏하면 술 먹고 주먹을 교환하면서 다음날이면 또 술잔을 기울이는 (아주 웃프기 짝이 없는) 아버지들의 딸들인 이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소녀들은, 도난당한 교복을 돌려주고 돌려받는 과정에서 비로소 서로의 진짜 이름을 알게 되고, 술 취한 아버지를 함께 부축하면서 조금씩 마음을 교환한다는... 정리하자면 그런 이야기다. 이 영화의 가장 흥미진진한 부분은 치마 뒷자락에 검은 실로 조그맣게 수놓인 ‘MJ''''라는 이니셜의 교복을, 친구가 보는 앞에서 책상 위에 올라가 보란 듯이 갈아입는 ’민지‘를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야기 구조상으로는, 클라이막스나 다름없는 부분인데, 그전까지 영화가 보여주던 사실적이고 평탄한 흐름에서 이 장면은 갑작스레 연출적인 설정과 의도가 뾰족, 튀어 나오기에 ’응?‘ 하면서 주목하게 된다. 나는 이 영화를 어떤 영화제 상영을 통해서 보았고, 이후 이어진 GV에서 그 장면에 대한 관객들의 질문에 감독의 답변을 들었는데, 그건 (무리수일 수도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찍고 싶었다는 얘기였다. 뭐, 당연한 소리. 이 영화가 아예 교복 그 자체에 대한 이야기라고 보면, ‘MJ''''라는 이름의 교복을 돌려주고 갈아입는 그 씬을 꼭 기억에 남는 장면으로 만들고 싶은 건 연출자로서 당연하고도 정확한 욕구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나온 그 씬이 아주 그럴듯하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이 영화를 떠올리면 딱 그 장면만 생각난다. 여기서 좀 더 넘겨 짚어보자면, 나는 이 영화가 딱 그 찰나의 (교복을 갈아입는) 순간에서부서 비로소 출발했으리라 본다. 두 소녀가 교복을 매개로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말하기 시작하는 것, 그 장면 외의 온갖 설정과 에피소드들은 그 순간을 우선적으로 말이 되게 만들기 위해 공들여 쥐어짜내 조금씩 붙인 것들이리라는 나의 섬세한 추리. 물론 이 영화를, 웃프기 짝이 없는 아버지들을 통해 만나서 그들과의 삶이 무거워 울고 싶다고 얘기하는 아이들의 애틋한 이야기로 보아도 여전히 말은 되지만, 그건 내가 아주 좋아서 호들갑 떨 만큼 독창적이거나 신선한 접근은 아니다. 게다가 그건 나중에 만들어내 붙인 이야기일 것이기 때문이지. 그러니까 이 영화의 심장에 제대로 접근하는 방법은, MJ 라는 이니셜의 교복을 돌려받고 갈아입는, 말 그대로, ‘교복영화’적인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영화제 카탈로그와 GV에서 언급한 감독의 연출의도를 대입해보자. 영화제 카탈로그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여주고 싶었다.’ 라고 나와 있고, 이후 GV에서 감독이 한 이야기는, ‘졸업앨범을 보면서 반에 이런 아이가 있었나?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친구들이 있는데 그들을 생각하면서 만들었다.’ 였다. 뭐, 결국 둘 다 같은 얘기지. 그래, 아무리 오래 한 반에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섞지 못하면서, 똑같은 교복이 주는 그레이존 사이로 얼굴과 이름이 사라져버린 친구들을 나도, 너도, 우리 모두 한 두 명 이상은 알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 MJ >는 그러한 아이들에게 이름을 주고, 피와 살이 있는 사람으로 만들어주려는 시도에 대한 이야기이고, 더 나아가, ‘(그때) 너를 더 잘 알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를 건네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는 그것을 가능하게 다리를 놓는 역할을 아예 ‘그놈의 교복’에게 맡긴다. 그리고 거기에 이름까지 붙여준다. ‘MJ(엠제이)’. 이 제목은 교묘하고도 정확하다. 그것이 ‘민지’가 아니라 ‘MJ''''라는 점이 말이지. 이제는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과거의 그 친구는 사실, 민지가 아니라, 미정일 수도 있고, 명진이나 미자, 문주, 모조, 멍지....? 뭐, 하여간 그 이니셜의 어떤 이름도 가능하다. 치맛자락 뒤에 조그맣게 수놓은 이니셜 ''''MJ''''을 클로즈업해 보여주는 것 정도가 최선이리라. 그러니 구질구질한 아버지들과 그리 상쾌하다고 할 수 없는 가정환경 속에서 최선을 다해 웃고 떠들거나, 외롭게 돌아다니는 이 아이들에게 ’교복‘은 그들이 간신히 삶에 붙어서 기생할 수 있게 만드는, 절박한 갑옷이자 코르셋이다. 이 영화의 아이들은 그러한 교복의 비밀을 알고 있다. 그런 면에서 는 아주 훌륭한 ‘교복영화’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이 사실을 무시해도 상관없을 만큼 그 자체로도 정확하게 아름다운 이야기겠지만, - 어떤 이야긴데? - 교복영화야. - 그렇군, 댓츠 올. - 아니, 그게 다가 아니고. 이 영화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에게, 아마 나는 이렇게 감상을 들려주려 할 것이다.
90년대 초부터 시작된 김소영 의 비평작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다. 나아가 그녀는 이제 영화를 분석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영화를 만들기까지 하고 있다. 무언가가 계속되고 있을 때 그것을 총체적으로 되돌아볼 길은 없다. 따라서 여기서는 다만 90년대의 페미니스트 비평가로서의 그녀의 면모만을 생각해보기로 한다. 사실 90년대에 다른 어느 분야보다도 페미니즘이 약진했던 분야가 바로 영화비평이 아니었나 싶다. 어쩌면 영화 자체가 여성 친화적인 매체인지도 모르겠다. 이를테면 문학이나 미술에 비해 여성 비평가들의 진입이 유독 활발해 보이는 것이 단지 착시현상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김소영 의 활동이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끄는 이유는 그것이 좀더 조직적이고 학문적인 양상을 띠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영화적 이력 초기에 ‘여성영상집단 바리터’를 결성했던 것, 여러 연구자들을 아울러 『시네-페미니즘, 대중영화 꼼꼼히 읽기』(과학과 사상, 1995)를 출판했던 것은 모두 그러한 활동방식의 소산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서구에서 페미니즘 영화론의 부싯돌이 된 것은 68혁명 이후의 담론적 자장 안에서 ‘시각적 쾌락’의 남성적 성격에 주목한 로라 멀비(Laura Mulvey)의 글이었고, 이후 그것을 대리보충하는 논의들이 속속 잇따르면서 시네-페미니즘의 긴 역사를 형성해갔다. 이들은 주로 여성 인물과 그들의 욕망이 영화 속에서 재현되는 방식을 집중적으로 관찰하면서 그것이 어떻게 가부장제 사회의 욕망에 부합하거나 저항하는지를 분석했다. 김소영 의 여성주의 비평도 큰 가닥은 그와 같았다. 동시대 영화에 관한 단평들을 모은 『영화 리뷰』(한겨레, 1997)를 보면 그녀가 4년여 동안 부지불식간에 걸러낸 영화들 중 상당수가 여성영화들임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은 변영주 , 임순례 , 리브 울만, 마사 쿨리지, 제인 캠피온 등의 여성 감독들과 그녀들의 영화들, < 개 같은 날의 오후 > < 코르셋 > < 두 여자 이야기 > 등 남성 감독이 만든 여성영화들, 그리고 할리우드 영화들에서 재현되는 여성 주체성의 문제를 고루 다루고 있다. 한편 『시네마, 테크노 문화의 푸른 꽃』(열화당, 1996)에서 그녀는 아예 한 장을 ‘시네 페미니즘, 성의 정치학’에 할애하며 이론과 비평의 결합을 시도한다. 그리고 이러한 작업은 < 쉬리 >와 < 공동경비구역 JSA > 등 이른바 2000년대 ‘한국형 블록버스터 영화들’에 대한, 페미니즘적 관점에서의 비판적 주목으로 이어진다(「사라지는 남한 여성들」, 『아틀란티스 혹은 아메리카』, 현실문화연구, 2001). 시네-페미니즘에 대한 김소영 의 접근법의 특이성은 그녀가 역설적으로 ‘어떤 페미니즘’으로부터의 거리두기를 추구한다는 데 있다. 여성들 간의 차이를 대문자 여성으로 환원시키는 페미니즘으로부터, 그리고 80년대 이래로 한국사회에서 성취했던 여성해방운동과 단절된 채로 유포되고 있던 페미니즘 담론의 현학으로부터 거리를 둠으로써 비로소 페미니즘 본연의 가치에 도달할 수 있으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대안이 구태의연한 민족주의 담론일 수 없음을 김소영은 이후의 행보를 통해 보여주었다. 2000년대로 들어서면서 그녀는 페미니즘적 관점에 입각하여 내셔널 시네마를 비판하는 작업으로 전환하는 한편, 동아시아 영화를 대상으로 트랜스내셔널리즘의 쟁점들을 제기하는 작업으로 입각점을 옮겨가게 된다. 김기덕 의 < 나쁜 남자 >는 한국의 페미니즘 비평가들을 가장 자극했던 영화였고 그런 의미에서 2001년은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계의 존재를 가장 극적으로 증명한 해였다. 그녀들의 그 열기는 1997년에 창립되어 성공적으로 안착한 ‘서울국제여성영화제’ 속에서 지금까지도 매년 되살아나고 있다. 여성영화제는 어쩌면 한국 페미니즘 영화비평사가 남긴 가장 가시적인 유산일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 가면 누구나 김소영 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