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부스 콰르텟
- 감독
- 신태연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김재영, 김영욱, 김규현, 문웅휘
비장의 OST가 연재되고 거의 십년이 지나 시즌2를 앞둔 지금,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의례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 코로나라는 팬데믹 상황으로 심각한 위기를 맞이했던 극장가와 더불어 넷플릭스로 대표되는 OTT의 약진은 문화산업의 지형도를 크게 변화시켰다. 하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영화들은 제작되고 있고, 새로운 감독들과 스타들도 어김없이 탄생한다. 영화음악도 마찬가지. 돌아오는 비장의 OST 시즌2에선 이제 막 신인의 티를 벗고 활발히 활동하는 젊은 영화음악가들에게 눈을 돌려, 그들의 비장의 OST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 클로버필드 10번지 >의 독특한 점은 영화에 참여했던 그 어떤 누구도 이 영화가 8년 전 깜짝 히트한 파운드 푸티지 방식의 ‘클로버필드’ 프랜차이즈가 될 줄 몰랐다는 사실이다. 각본을 쓴 작가 조시 캠벨과 맷 스투큰, 연출을 맡은 댄 트라첸버그는 물론, 주연 배우들마저도. 할리우드에선 종종 전혀 상관없는 원작을 들고 와 속편으로 뜯어고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월터 웨이저의 스탠드 얼론 소설 <58시간>은 < 다이하드 2 >가 되었고, 조너선 헨즐리가 쓴 ‘사이먼 세즈’란 각본은 < 다이하드 3 >로 탈바꿈되었다. 하지만 <클로버필드 10번지>는 영화가 제작되던 중간까지도 ‘the Cellar’라는 각본을 바탕으로 한 소규모 스릴러가 될 예정이었다. 최연소 오스카 감독상에 빛나는 데이미언 셔젤은 이 히트리스트에 올랐던 각본을 각색하며 연출까지 고려했는데, 그가 고친 부분이 바로 지상에 나온 후 펼쳐지는 뒷부분, 이른바 반전의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셔젤은 애초 계획대로 < 위플래시 >의 기회를 거머쥐었고, 댄 트라첸버그 감독에게 바톤이 넘어간 이 프로젝트는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가 클로버필드와의 연관성을 떠올리며 프로덕션 중에 세계관 확장(?)이라는 놀랄만한 방향전환을 맞이하게 된다. 베어 맥크레리 이에 당황한 건 영화 촬영 전부터 참여해 후반을 앞두고 있던 영화음악가 베어 맥크레리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그는 TV쪽에서 꽤 잘 나가던 것과 달리 영화 쪽에선 호러나 스릴러, SF 등 b급 장르에서 행보를 이어온 신인에 가까웠는데, 모처럼 손 내민 파라마운트라는 메이저 스튜디오와 J. J. 에이브럼스라는 거물과의 협연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대학 시절 할리우드 영화음악 레전드인 앨머 번스타인에게 사사 받고, 영화음악가 리처드 깁스 밑에서 견습 생활을 했는데, 리처드 깁스가 스케줄 충돌로 인해 TV시리즈 <배틀스타 갤럭티카>에서 물러나게 되자 그의 대타로 메인 음악가로 들어가게 되며 작곡가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이후 <휴먼 타겟>과 < 터미네이터: 사라 코너 연대기 >, <유레카>, < 워킹 데드 >, <쉴드 오브 에이전트>, <아웃랜더> 등 손대는 작품마다 반향을 일으키며 TV시리즈 음악에서 괄목할 만한 성장과 행보를 이어왔는데, 이런 광폭적인 업자들의 인기에 대해 선수 중에 선수인 제작자 쌍제이 에이브럼스도 모를 리 없었다. 베어 맥크레리는 매주 반복되는 TV를 넘어 더 큰 스케일에 도전을 원했고, 갑작스런 클로버필드 세계관으로의 편입은 그래서 그에게 터닝 포인트가 될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 점에서 베어 맥크레리가 <클로버필드 10번지>에 온갖 정성과 야심을 갈아 넣은 건 당연했다. 자신이 좋아하던 제리 골드스미스와 버나드 허먼이라는 불세출의 영화음악가가 들려줘왔던 장르의 토대를 자양분 삼아 그는 고전 할리우드 장르 스코어가 가진 장기와 미덕이 <클로버필드 10번지>에서도 십분 발휘되길 원했다. 영화 후반이 프로덕션 과정에서 변경되긴 했어도 여전히 주된 무대가 되는 건 벙커였고, 그는 여기서 음악 색채에 대한 전체적인 모티브를 얻었다. 촬영이 진행되는 뉴올리언스의 벙커 세트장에 방문해 며칠을 보냈고, 어두운 통풍구, 답답한 콘크리트 감방, 비좁은 복도 등을 경험하며 그 공간 안에서 나올 소리들에 집중했다. 그리고 자신의 사운드 팀을 동원해 양철 쓰레기통, 환풍기소리, 전동기구 고주파, 벽돌, 유리, 톱, 체인, 징, 에어로졸 스프레이, 각종 기계 등 다양한 소리들을 채집해 샘플링하고 왜곡·변형하며 음악 전반에 효과로, 타악기로, 그리고 엠비언트로 상당수를 녹여냈다. 이 사운드 디자인이 가미된 스코어는 벙커 안에 벌어지는 세 주인공들의 불안한 심리 싸움은 물론, 벙커 밖에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상황을 상상하게끔 만들며 들려주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스코어의 확장을 불러일으킨다. 이런 독특한 소리들이 <클로버필드 10번지> 스코어의 근간이 되었지만, 베어 맥크레리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특별히 더 주안점을 둔 지점이 있었으니, 바로 벙커라는 공간 그 자체를 들려줄, 아니 바로 그 공간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블래스터 빔’이란 악기와 주인공 미셸의 캐릭터를 형상화하기 위해 동원된 터키의 민속악기 ‘야일리 탐부르 yaylı tambur’다. 제리 골드스미스가 <스타트렉: 극장판>에서 사용해 충격과 명성을 안긴 블래스터 빔은 페달 스틸기타를 큼지막이 확장시킨 것과 같은 대형악기(길이가 무려 3-5m에 이른다)로, 수많은 와이어가 연결된 본체를 손가락이나 막대, 활, 파이프 혹은 타피 같은 물체로 치거나 문지르거나 튕기며 연주한다. 이름만큼이나 어둡고 불길하며 환상적인 특유의 깊은 음색으로 SF나 호러 장르에서 사랑을 받았고, 제리 골드스미스의 뒤를 이어 제임스 호너가 <우주의 7인>에서, 존 배리가 <블랙홀>, 모리스 자르는 < 드림스케이프 >에서 사용하기도 했다. 그렇게 7-80년대 인기를 끌었지만 최근 20년간은 어느 영화에서도 사용된 적이 없다는 이 독특한 악기를 전면에 내세우며 새 생명을 부여했다. 그랜드 피아노나 업라이트 베이스, 콘트라 바순의 가장 낮은 음보다 훨씬 더 깊은 아래의 저음을 으르렁 울리며 저돌적으로 휘몰아치는 긴장감 넘치며 파워풀한 소리는 가히 이 스코어의 백미로, 지하라는 공간을 더 실감나게 표현하는 동시에 빠져나갈 수 없는 벙커 안에서 느껴지는 답답함과 무력감, 그리고 지상의 인류 전멸에 대한 공포심을 조장하는데 큰 일조를 한다. 반면 야일리 탐부르의 깊고 신비스러우며 풍부한 음색은 영화에서 가장 빈번하게 흐르는 ‘장조와 단조의 경계를 넘나드는 다섯 노트 주제부’와 결부되며 주인공 미셸의 미묘한 심리를 표출하는데 큰 공헌을 한다. 이 이질적이고 이국적인 소리는 모든 상황에서 도망만 다니던 피동적인 모습에서 점차 적극적으로 의지를 드러내며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취적인 자세로 변해가는 성장형 캐릭터의 이중적인 면모를 담아내기에 탁월한 효과를 발휘한다. 앨머 번스타인은 영화가 시작될 때 비주얼도, 스토리도 진행되지 않을 찰라 음악만이 관객들의 모든 관심을 가질 수 있다며 영화를 대표하는 악기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베어 맥크레리는 이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여 배급사와 제작사 크레딧이 뜨는 동안 야일리 탐부르의 기묘한 소리로 연주되는 테마를 통해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한다. 물론 뒤로 갈수록 두텁고 큰 스케일의 관현악이 합류하고, 이른바 ‘미스터리 스트링’이라 이름 붙인 여덟 노트의 휘몰아치는 오스티나토(어떤 일정한 음형을, 악곡 전체에 걸쳐, 같은 성부에서 같은 음고로 끊임없이 되풀이하는 것)가 덧입혀지며 벙커 안의 긴장감 넘치는 주도권 싸움과 탈출 과정의 빌드 업을 묘사해 가는데, 영화 내내 단 3명의 등장인물과 하나의 공간만이 나오는 단출한 구성임에도 다이내믹하며 지루하지 않게 만드는 마력을 선사한다. 오케스트레이션에도 다양한 시도와 고전적인 방식을 교차로 활용했는데, 영화 초반의 미묘한 신경전이 펼쳐지던 불안한 상황에선 현악 콰르텟 편성을 위주로 디테일한 지점 묘사에 신경 쓴다면, 중반부에 이르러선 벙커의 깊이감이나 풍부한 미스터리함 그리고 등장인물들의 무력감을 묘사하기 위해 바이올린과 비올라가 전혀 없는 30대의 첼로와 8대의 업라이트 베이스만 편성해 저음 위주의 공격적이고, 강력한 무게감으로 관객들을 압도한다. 그리고 지상으로 탈출을 시도하고 모든 비밀들이 밝혀지는 영화 후반에 이르러선 90인조 풀 관현악단을 활용해 전통적인 할리우드 스케일의 영화음악으로 대장정을 마친다. 새로운 시도를 펼쳤던 < 혹성탈출 >과 < 에이리언 >, <스타트렉>의 제리 골드스미스와 긴장감 넘치는 현악으로 대표되는 < 싸이코 >와 < 현기증 >의 버나드 허먼에게 경배를 바치는 이 놀라운 작업물은 베어 맥크레리를 단순한 TV시리즈에서 활약하던 일개 젊은 작곡가 유망주에서 단숨에 차세대 할리우드 영화음악을 이끌 다크호스로 평가받게 만들었다. 그런 점에서 <클로버필드 10번지>는 베어 맥크레리가 현재 위치까지 오게 된 초석이자 가장 야심 있고 강력한 비전을 발휘해냈던 승부수이자 비장의 OST였다. 그는 계속해서 <클로버필드 패러독스>와 < 해피 데스데이 > 시리즈, < 고질라: 킹 오브 몬스터 > 등 메이저 영화 작업을 이어가는 동시에, <콜 오브 듀티: 뱅가드>나 <갓 오브 워: 라그나로크> 등 인기 게임은 물론, 코로나로 인해 OTT 세상이 도래한 현재 가장 비싼 드라마 중에 하나인 아마존의 <반지의 제왕: 힘의 반지>와 애플TV+의 <파운데이션>, 넷플릭스의 <위쳐: 블러드 오리진> 등 새 미드에서도 꾸준히 음악을 만들며 눈코 뜰 새 없는 활약을 보이고 있다. Track List 1. Michelle 2. The Concrete Cell 3. Howard 4. A Bright Red Flash 5. At The Door 6. Two Stories 7. Message From Megan 8. Hazmat Suit 9. A Happy Family 10. The Burn 11. Up Above 12. Valencia 13. The New Michelle 14. 10 Cloverfield Lane
<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 >를 보기 전, 주목한 이름은 감독 도이 노부히로가 아니라 시나리오를 쓴 사카모토 유지였다. 도이 노부히로도 뛰어난 감독이다. < 지금 만나러 갑니다 >(2004)를 연출했던 도이 노부히로는 영화보다 드라마를 주로 만들었다. <이상의 결혼> <파랑새> <스트로베리 온 더 숏케이크> <운명의 사람> <잠자는 숲> <중쇄를 찍자> 등등. 화제를 모은 최근작으로는 2016년에 찍은, 연애와 결혼에 부담을 느끼는 남녀의 다정하고 은근한 사랑 이야기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가 있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는 친밀한 관계를 원하면서도 정작 실천에는 힘들고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요즘 일본 젊은이들의 마음과 현실을 정확하고 예리하게 그려내 호평을 받았다. 사카모토 유지는 일본 드라마의 흐름을 바꿨다는 평가를 받은 <도쿄 러브 스토리>(1991)의 각본을 쓴 작가다. 당시 월요일 밤 9시가 되면 거리에서 젊은 여성을 볼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인기였고, ‘게츠큐’라고 불리는 월요일 밤 9시의 후지드라마는 최고의 인기 드라마 산실이 되었다. 1967년생이니, <도쿄 러브 스토리>를 쓴 것이 25세. 자기 세대의 일과 사랑을 리얼하게 그려내 찬사를 받았고, 트렌디 드라마 열풍을 가져왔다. 그런데 정작 사카모토 유지는 밝게만 그려내는 TV 업계에 질렸다며 96년, 돌연 일을 그만둔다. 한동안 연극과 소설 등을 파고들던 사카모토는 2002년 다시 각본을 쓰며 돌아온다. <라스트 크리스마스> <우리들의 교과서> <마더> <그래도, 살아간다> <최고의 이혼> <언젠가 이 사랑을 떠올리면 분명 울어버릴 것 같아> <콰르텟> <아노네> 등 화제를 모은 작품이 즐비하다. 복귀 이후 사카모토 유지의 작품은 화제작보다 문제작이라는 말이 더 어울린다. 사카모토가 다루는 드라마의 소재는 이지메, 아동학대, 싱글 마더, 직장내 괴롭힘 등등 현실에 존재하는 모든 어둠을 그대로 보여준다. 트렌디 드라마의 원점이 사카모토 유지였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다. 사카모토의 드라마는 마주보기 불편한 이야기를 밑바닥까지 파고들어 대중의 눈앞에 들이민다. 그렇다고 무작정 어둡기만 하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 인간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어둠에 먹히지 않고, 스스로 생각하게 한다. 사카모토 유지가 쓴 드라마를 좋아했기에, 그가 보여주는 청춘의 사랑은 어떨지 궁금했다. 영화 작업은 오랜만이었다. 사카모토는 2004년 <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 >의 시나리오에 참여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는 당시 일본 영화계의 흐름을 바꾼 역작으로 평가된다. 이후 <김미 해븐>(06)과 <서유기>(07)의 시나리오를 쓴 후 15년 만에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로 영화에 돌아왔다. 도이 노부히로와는 이전에 드라마 <엽기적인 그녀>와 <콰르텟>을 함께 작업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20대 초반 남녀의 사랑을 그린다. 2015년부터 2020년까지 이어지는 작은 사랑 이야기. 대단할 것 없고,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울림이 큰 바로 우리들의 이야기. 스물한 살의 키누는 말한다. 토스트를 바닥에 떨어트리면, 늘 버터를 바른 면이 바닥에 닿는다고. 살면서 유별난 행운이 찾아온 적 없고, 누군가 관심 있게 쳐다봐 준 적도 없는 평범한 인생. 그래서 언제나 조용히 지내고, 흥분하는 일도 거의 없다. 아무리 좋아하고, 열광해도 나에게 좋은 일로 돌아오지 않을 테니까. 무기는 일러스트레이터가 꿈인 대학생이다. 구글 스트리트 뷰를 보다가 자신이 찍힌 것을 보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며, 내 인생에서 이보다 더한 흥분이 있을까 생각한다. 좋아하는 동급생은 자기를 무시하는 듯 관심 있는 듯 거리를 두며 지낸다. 키누도, 무기도 눈에 띄지 않는 유형이다. 그렇다고 아주 보통은 아니다. 키누와 무기는, 일본식으로 말한다면, 그들은 문화계다. 책, 영화, 만화, 음악, 전시 등을 많이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전철 막차를 놓치고, 우연히 같이 있게 된 그들은 공통점을 발견한다. 심야 카페에서 ‘신’을 발견한 것이다. 그들과 함께 있던 직장인 남녀는, 마니아로 불릴 정도로 영화를 좋아한다면서도 오시이 마모루를 알아보지 못한다. 그들은 <마녀 배달부 키키>를 실사로 보고 좋아하는 부류다. 함께 있던 자리에서 뭐라 말할 수 없었던 키누와 무기는, 밖에서 ‘오시이 마모루’를 떠올리며 즐겁게 대화한다. 그들의 대화는, 만남은 이렇게 ‘문화’로 시작되고 흘러간다. 좋아하는 작가가 같고, 같은 만화를 보며 즐거워하고, 마침 신고 있는 신발도 같은 브랜드다. 무기의 집에 간 키누는 마츠모토 타이요와 나난 키리코, 모치즈키 미네타로, 오오토모 가츠히로의 만화와 나가시마 유, 호무라 히로시, 이시이 신지, 오가와 요코의 소설이 꽂힌 책장을 보며 말한다. ‘거의 내 책장이잖아’라고. 같은 것을 보고 듣는다는 호감으로 시작된 사랑은 같은 것을 함께 경험하면서 점점 커져간다. 그러나 관객은 이미 알고 있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2020년에서 시작한다. 카페에 앉은 남녀가 음악을 듣는다. 이어폰을 한쪽씩 자신의 귀에 꽂고, 같이 음악을 듣기 시작한다. 뒤편에 앉은 키누가 말한다. 저건 음악을 듣는 게 아니야. 다른 자리에 앉은 무기가 또 말한다. 엔지니어는 섬세하게 양쪽에 다른 소리를 배치하여 함께 들으면 하나의 음악이 완성되는 거야. 키누와 무기의 옆에는 다른 남자와 여자가 앉아 있다. 그러니까 그들은 이미 헤어진 것이다. 관객은 두 사람이 이제는 헤어졌다는 것을 알게 된 후에, 그들의 사랑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어떻게 동거를 하는지 보게 된다. 궁금하다. 이렇게 비슷한 취향을 가진 남녀는, 어떤 과정을 통해 헤어지는 것일까. 무엇이 그들이 서로 다른 길을 택하게 한 것일까. 키누와 무기는 보통의 남녀다. 키누는 대학을 졸업하고 평범하게 취업을 하려 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프리터가 된다. 무기는 일러스트를 그리기 시작하지만 대가가 너무 작다. 자신의 꿈을 찾겠다는 무기의 말에, 니이가카에 사는 아버지는 이제 생활비를 주지 않겠다고 답한다. 동거를 시작한 키누와 무기는 알바를 하고, 그림을 그리면서 생활을 유지해간다. 하지만 알고 있다. 알바만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일러스트 일만으로 안정적인 미래는 없다는 것을.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현실에서 조금씩 지쳐가는 남녀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리고 하나의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같은 경험을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방식으로 온전하게 각자의 생활을 유지해야만 ‘동거’가 가능하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삶 없이 함께 하는 삶은 가능하지 않다. 돈을 벌기 위해 무기는 영업직으로 취직한다. 키누는 회계 자격증을 따서 병원에서 일한다. 무기의 바람은 현상유지다. 키누와 함께 이대로 주욱 살아가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한다. 책도, 영화도, 게임도 이제는 즐길 여유가 없다. 봐도 재미가 없다. 일하는 틈틈이 핸드폰 게임을 하는 정도다. 키누는 책을 보고, 영화를 보기 위해 일한다. 되도록 좋아하는 것들에 더 가까워지고 싶다. 그림도 못 그리고, 글도 못 쓰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들과 가깝게 지내며 살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모두 버리면서, 현상유지를 하고 싶지는 않다. ‘꽃다발 같은 사랑’ 이야기다. 빛나는 순간, 너무나 행복했던 순간. 하지만 그들의 매순간이 완벽해서 그런 아름다운 사랑이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키누가 좋아하는 미라 전시를 무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관심도 없는 가스탱크이지만 무기가 좋아하기 때문에, 키누는 함께 보러 간다. 모든 것이 똑같기 때문에 상대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다. 좋아하지 않아도, 즐겁게 같이 할 수 있는 것이 사랑이다. 그가 좋아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좋으니까.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사랑의 미묘한 순간들을 부드럽게, 정서적으로 느끼게 해 준다. 서서히 어긋나는 과정을 보여줄 때도 마찬가지다. 거대한 사건과 충돌이 아니라 미묘하게 어색하거나 낯선 공기를 일상적인 시선으로 보여준다. 키누는 엄청 좋아할 때도 막 흥분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 영화도 그렇다. 그렇기에 더욱 진하게 감정이 밀려든다. 관객이 그들의 마음을 상상하며, 자신의 경험이나 생각을 영화 속 일상의 공간에 채워 넣는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사랑의 과정을 세세하게 보여주는 대신, 함께 하는 것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를 스쳐 지나가며 관객이 상상하게 만든다. 스스로 깨닫게 한다.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는 서서히 잠겨드는 영화다. 키누와 무기가 사회의 완강한 벽에 부딪쳐 좌절할 때에도, 세상 안에서 키누가 자신의 ‘취향’을 붙잡고 종종걸음을 칠 때에도, 공감을 느끼며 바라보게 된다. 이건 멋진 사람들의 화려한 연애담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작고 흔들리는 순간들의 이야기다. 결코 끝나지 않을 인생의 이야기. 언제나 내 주변 어딘가에서 진행되고 있는 이야기.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은 어렵다. 어렵기 때문에, 그 순간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답다. 키누와 무기는 헤어지고도, 여전히 같은 취향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후회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돌아보지 않고, 손을 흔들며 서로의 행복을 빌어줄 뿐이다. 사카모토 유지는 67년생, 도이 노부히로는 63년생. 둘 다 50대 중반의 나이다. 이제 장년을 넘어 노년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지금 20대의 이야기를 너무나 신선하고 따뜻하게 그려낸다. 연구조사취재만으로 가능한 일이 아니다. 그들이 언제나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20대를 보는 것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을 언제나 경이로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새로운 세대가 만드는 세상은 언제나 경이로우니까. 여전히 젊음이 사카모토 유지에게는 있다. 사카모토 유지의 젊은 대사, 장면을 보는 것은 너무나 생생하고, 마음이 끌린다. 젊다. 젊음의 빛나는 순간이 한껏 나의 세상에 비치는 영화가 <꽃다발 같은 사랑을 했다>다. 그래서 즐겁고, 또 슬프다. 그들의 사랑이 그랬듯이.
아홉 살 마사오에게 여름방학이 찾아온다. 그러나 마사오는 즐겁지 않다. 친구들은 저마다 산으로 바다로 가족들과 떠나는데, 부모 없이 일하는 할머니와 사는 마사오에겐 함께 떠날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공놀이할 친구도, 학원에 갈 급우도 없고, 심지어 선생님마저 일찍 퇴근하는 여름방학이 마사오에겐 못내 섭섭하게 느껴진다. 누군가 같이 떠날 수 없다면 혼자 가면 된다고 생각한 건 바로 그때.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빠만큼이나 갑작스럽게 날아든 엄마의 택배에 적힌 주소 덕분이었다. 여름방학 숙제와 그림일기를 넣은 가방을 챙겨 든 마사오는 엄마를 찾아 먼 길을 떠난다. 하지만 곧 난관에 부딪히고 말았으니 얼마 못 가 동네 양아치들에게 돈을 빼앗기고 만다. 이를 해결해준 건 이웃집에 살던 씩씩한 아줌마. 혼자 엄마를 찾으러 가는 마사오를 걱정하던 그녀는 자신의 전직 야쿠자 백수 남편 기쿠지로를 보호자로 붙여준다. 그러나 그는 마사오의 엄마를 찾아주기는커녕, 모처럼 자신이 얻은 여름방학을 만끽하기 위해 더 열을 올린다. 경마장과 술집에서 돈과 시간을 탕진하고 마사오를 한번 잃어버린 후에야 비로소 대책 없는 여행길에 오르게 되는데, 윽박지르고 욕과 손부터 먼저 나오는 그의 성질 때문에 잠시도 편안할 순간이 없다. 이에 대한 뒤치다꺼리는 오롯이 어른스런 아이 마사오의 차지다. 하지만 뜨거운 여름날 길 위에서 더위를 뒤로 한 채 추억과 여정을 공유한 그들은 서로를 의지하고 위로하며 한 걸음 한 걸음 성장해간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폭력과 피의 의미를 묻는 기자들과 평론가들의 공세가 지겨워 기타노 다케시가 차기작으로 폭력이 전무한 영화를 찍겠다고 했을 때, 이를 솔직히 받아들인 사람은 드물었다. 하지만 그는 <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 >와 < 키즈 리턴 >에 이어 필모에서 가장 잔잔하고 따뜻한 로드무비 < 기쿠지로의 여름 >을 8번째 작품으로 들고 나왔고, 이 영화는 제52회 칸 국제 영화제 경쟁 부문을 비롯해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돼 좋은 평가를 받았다. 다른 환경에서 자라온 대척점의 두 사람이 같이 여행을 떠나며 성장하고 교류해간다는 이야기 자체는 전혀 새롭지 않지만, 이 평범한 이야기에 기타노 다케시의 색채가 덧칠돼 독자적인 매력을 갖췄다. 영화는 기존의 관습적인 문법과 틀을 거부한 채 투박하고 거칠게 붙어있지만, 특유의 만화적이고 생뚱맞은 점프와 관조적인 시선을 통해 독특한 리듬과 유머를 부여하며 천진난만하면서도 감동적인 삶의 동질성과 유대감을 포착해냈다. 물론 이전의 < 그 남자 흉폭하다 >나 < 소나티네 >, < 하나비 >에서 보였던 단초들이 모두 사라진 건 아니며 여전히 불완전하게 연소한 채 남아 그 근간을 살짝 비추는데, 그런 지점들이 단선적일 수 있는 영화를 입체적으로 만든다. 대오각성을 가져다준 일생일대의 획기적인 여행은 아니지만, 적어도 삶에 있어 이런 방학과도 같은 휴식이 만들어준 치유와 관계의 소중함만큼은 오래 남아 두고두고 그들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았을까. 여기에 그럴듯한 악센트를 남겨주는 건 (지금은 비록 깨졌지만) 기타노의 뛰어난 음악적 파트너 히사이시 조의 존재감이다. 기타노 다케시와 지브리의 영화음악 1950년 일본 나가노에서 태어난 히사이시 조는 국립음악대학의 학생이던 시절부터 모더니즘과 미니멀리즘 음악에 심취했다. 본명은 ‘후지사와 마모루’지만 무대에서 쓰기 위한 예명을 위해 ‘퀸시 존스’의 일본어식 발음에서 따와 ‘히사이시 조’란 이름을 만들어냈다(퀸시의 일본어식 발음인 ‘쿠이시’를 히사이시(久石)라고 읽은 것에 존스의 애칭인 조 역시 한자어 음독(讓)을 붙여 완성했다). 졸업 후 일본 필하모니 교향악단과 뉴 사운드 인 브라스의 오케스트라 편곡을 맡는 한편 틈틈이 원더 시티란 회사를 세워 다양한 앙상블과 솔로 작업을 병행하며 독자적인 사운드를 완성해갔다. 그의 지명도가 높아지게 된 건 1983년 음반사로부터 애니메이션 감독인 미야자키 하야오의 장편 애니메이션인 < 바람계곡의 나우시카 >의 이미지 앨범의 작곡을 제안 받았을 때부터다. 원래는 YMO출신의 호소노 하루오미가 음악을 맡기로 했지만, 작업한 곡이 영상과 어울리지 않자 미야자키 하야오는 과감히 당시 잘 알려지지 않은 음악가 히사이시 조를 선택한다. 영화를 제작하는 동안 그가 작곡한 이미지 앨범을 듣고 감명을 받았기 때문인데, 그 후로도 콤비를 이루며 < 천공의 성 라퓨타 >, < 이웃집의 토토로 >, < 마녀 배달부 키키 >, < 붉은 돼지 >, < 모노노케 히메 >, < 하울의 움직이는 성 > 등 지브리 스튜디오 애니메이션 음악을 도맡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영화음악가 반열에 올라선다. 1992년에는 자신의 고향에서 벌어진 나가노 동계 패럴림픽을 위한 테마송을 작곡하며 총책임자로의 역할도 수행했고, 야마다 요지 감독을 비롯한 여러 편의 실사 영화에서 탁월한 멜로디를 선사했다. 2001년에는 직접 음악영화 < 콰르텟 >의 연출을 맡기도 했고, 프랑스 판타지 <엄지 동자>의 음악을 담당하며 세계로 활동반경을 넓혀 박광현 감독의 < 웰컴 투 동막골 >과 김종학 피디의 < 태왕사신기 > 그리고 중국영화 <이모의 포스터모던 라이프>와 <해양천국>, <삼장법사의 모험> 등의 음악을 작곡했다. 히사이시 조가 기타노 다케시와 다섯 번째로 작업한 <기쿠지로의 여름>은 그들의 파트너쉽 중 가장 큰 변화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그전까지의 영화들이 미니멀한 색채를 짙게 품고 절제된 테마를 반복, 변주해가며 미묘한 변화를 통해 캐릭터의 심리와 극적인 전개를 다루고 있다면, 이 영화에선 아예 그런 방식을 포기하고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에서 나올 법한 아름다운 선율의 테마를 정면에 배치해 분위기를 일신한 것이다. 대사와 음악이 없을수록 순수한 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하던 기타노 다케시였기에 <그 남자 흉폭하다>나 < 3-4x 10월 >같은 초기작들에선 영화음악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히사이시 조를 만나 작업하며 영상이 가진 매력을 200% 끌어올려주는 음악의 효과를 체험하고 나서 그는 점점 변해갔다. 음악을 의뢰할 때 항상 “자신의 작업이 아니다”라며 히사이시 조에게 전적으로 맡기던 기타노도 이번 <기쿠지로의 여름>만큼은 제작 전에 “피아노 위주의 부드러운 곡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주문할 정도로 구체적이고 직접적인 요구가 있었다. 히사이시 조와 첫 만남 자리에서 “영화에는 반드시 음악이 들어갈 자리가 있죠? 그런 곳의 음악은 일체 뺍시다”라고 대놓고 밝혔던 그였기에, <기쿠지로의 여름> 음악 쓰임은 거의 혁명에 가까운 수준으로 변모한 셈이다. 음악적 사용에 대한 혜안과 자유를 얻은 지금의 기타노 다케시는 더 이상 히사이시 조가 없어도 이케베 신이치로나 스즈키 케이지, 카지우라 유키, 후지카와 쇼고 등 다양한 뮤지션들과 작업을 진행할 만큼 개안했다. 히사이시 조 로드무비답게 그리고 기타노 다케시 영화답게 음악은 에피소드보다 주로 길 위 장면에서 흘러나온다. 영화 전반을 관통하는 주된 테마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Summer’라는 곡인데, 영롱한 피아노는 도로에 갓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경쾌하고 시원한 스트링은 한 줄기 바람처럼 산들산들 영혼을 간질이며 이들의 여정에 부담 없는 미소와 흐뭇함을 안겨준다. 히사이시 조의 마력이라면 절제됐지만 명료하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있는데, ‘Summer’는 그 효과가 가장 극대화돼 발휘된 곡이기도 하다. ‘Going Out’과 ‘Mad Summer’, ‘Angel Bell’, ‘River Side’와 ‘Summer Road’ 등으로 다양하게 변주되며 영화 내내 활용되었다. 빼놓을 수 없는 트랙이라면 마사오와 기쿠지로가 어머니의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흐르는 ‘Real Eyes’를 꼽을 수 있는데, 잔혹할 수도 있는 현실에 대해 서늘한 스트링으로 무겁게 짓누르는 선율이 만만치 않은 삶의 벽을 실감하게 만든다. 이런 풍부한 서정 속에 가려진 외로움과 허무함을 담아낸 감성은 이전 작품들 속에서 언뜻언뜻 등장했던 부분들과 유사하다. 하지만 쉽게 함몰되지 않는 건 평화롭고 여유로운 사운드로 이를 치유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이전의 <그 여름 가장 조용한 바다>와 비슷하면서 다른 부분이기도 한데, 관조와 냉소의 시선이 조금은 부드러워지고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Two Hearts’와 ‘Mother’가 그런 정서적인 분위기의 큐들이다. 그 외 영화에서 마사오가 꾸는 악몽에 등장하는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Nightmare’와 또 다른 아름다운 테마 ‘Kindness’나 ‘The Rain’도 잊을 수 없는 트랙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올해 < 바람이 분다 >를 마지막으로 은퇴했다(은퇴만 벌써 5번째지만). 기타노 다케시 또한 이제 다른 작곡가들과 호흡을 맞추는데 어색하지 않다. < 동경가족 >과 < 작은 집 >을 함께 한 야마다 요지 감독은 여든을 훌쩍 넘겼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을 듣게 될 기회는 점차 줄어드는데 반해 그의 새로운 영화음악을 기다리게 되는 심정은 늘어만 간다. 영화예술과학 아카데미(AMPAS) 멤버로 선출되고, 2015년 완공 예정인 새로운 나가노 시민 회관의 예술 감독으로도 뽑혀 더욱 바빠질, 일본의 현존하는 최고 마에스트로 중 하나인 그의 신작을 고대해본다. ‘Summer’ Track List 1. Summer 2. Going Out 3. Mad Summer 4. Night Mare 5. Kindness 6. The Rain 7. Real Eyes 8. Angel Bell 9. Two Hearts 10. Mother 11. River Side 12. Summer Roa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