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
- 감독
- 안태근
- 제작년도
- 2003
- 출연
- 김서영, 배정민, 최석필, 김용준, 한수림, 최한, 표영재, 고성일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사실은 우리는 서로가 필요 없어 알면서 서로가 이유 없이 그리울 뿐 - 크리스탈 티, 「낭만파A.I.」 나는 내가 어렵다. 어느덧 알람 없이 눈을 뜰 정도로 반복적인 주5일 출퇴근과 아침 공기가 몸에 익숙히 자리 잡았음에도, 그것만으로 나를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가령 근황을 묻는 이들에게 ‘직장인’이나 ‘회사원’이라는 말을 선뜻 건네는 대신, 이력서를 이곳저곳 찌르다 보니 기회가 닿아 어찌어찌 일을 하는 중이고 천만다행으로 장기 백수 타이틀은 면했으며 입에 풀칠은 하고 있다는 식으로 장황하게 답을 하게 되는 식이다. 대답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한사코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결국 나의 태생적 기질에서 튀어나오고야 마는 저 대답의 자조적 뉘앙스가 듣는 이에게 작은 부담을 안겨 실례를 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혹은 저 말이 치장된 겸손처럼 보여 이 사람은 모두에게 친절한 척하는 위선자라고 판단되는 것은 아닌가, 한편으로 간단한 질문에 간단히 답하지 않고 무언가 해명하는 사람 마냥 주절거리는 모양새에 거부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아가 나는 왜 이런 모습마저도 장황하게 기술하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나에 대해 말하는 일은 내게 중대하게 다가오고 중대하게 여긴 바로 그 탓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나는 지나치게 소극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자신감이 없고, 요즘 말로 하면 찐프피(INFP 100%)다. 갑자기 류현진 투수의 이야기를 다룬 책 제목이 떠오른다. 생각이 많으면 진다…… 졌다. 이런 기질은 ‘영화평론가’로서의 나에게도 예외 없이 들러붙어 있다. 공식 지면으로 불릴 만한 부산영화평론가협회를 통해 등단했음에도, 여전히 나는 나를 영화평론가로 소개하는 것이 어렵다. 사실 그 때문에 이 청탁을 받은 뒤 오랜 시간 내적으로 씨름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해 그냥 곤란함을 드러내기로 했다. 다만 분명한 입장도 있는데, 먼저 직업으로서의 평론가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지금의 영화 평론계가 등단 이후 생계를 영위할 정도의 지속적인 활동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고 느낀다. 이 길을 생계로 정했다면, 외부 강의든 메일링 서비스든 독자적인 지면 생성이든, 치열한 부가 활동으로 수익을 창출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어떤 방식의 활동이든 기초가 되는 것은 ‘자기PR’인데, 그런 점에서 나는 시작도 못하고 멈춘다. 멋지게 자기 소개하는 능력이 내게는 부족하고, 부족한 능력은 부족한 욕구에서 온다. 커리어를 쌓는다거나 유명해지고 싶은 마음이 내게 뒷전이기 때문이다. 과도하게 겸손하다는 말과 함께,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나’를 소개해보라는 충고도 종종 들어왔지만, 그 사려 깊은 마음에 부응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고민은 언제쯤 확신이 될 수 있을까? 아직까지 분명한 것은, ‘1인분’의 문제가 내게 큰 동력을 주지 않는다는 사실뿐이다. 이런 고민이 ‘취미로서의 평론가’라고 부를 만한 것으로 이어진다. 세상에. 취미로서의 평론가라니. 너무 무책임한 것 아닌가? 나도 겁이 난다. 그런데‘-가’를 떼고 ‘취미로서의 평론’이라고 하면 조금 괜찮다고 느낀다. 내게는 행위 자체와 행위자라는 그 차이가 일단 중요한 것이다. 영화를 마주한 나의 그 비언어적 체험에 다가가고자 일단 적어내리고, 좀 더 가까워지고자 이 단어가 아닌 저 단어를 고르고, 때로는 영화를 보고 한 대 맞은듯한 저릿함을 표현하고자 미사여구를 나열하는 대신 간명한 문장으로 아등바등 매듭지어보려는, 그 치열한 감탄과 반목의 과정이 내게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다. 좀처럼 자신을 갖지 못하는 나에게는 항상 ‘1인칭’의 문제가 다른 무엇에 앞서는 것이며 그와 씨름하다 어떤 단계에 다다르고 나면 종종 뿌듯함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금 더 분명해지고 싶다. 1인칭. 나만의 시선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남과 다른 나의 관점을 제시함으로써, 나를 소개하고 개성을 뽐내는 것. 자신을 어필하는 과정에서 1인칭에 대한 인식은 중요한 단초가 된다. 타인에게 '나'의 일상을 보여주는 브이로그 콘텐츠의 지배적 양식이 1인칭 시점인 것 역시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보여주는’ 일이란 이 사동적 표현이 담지한 대로, 무엇보다 내가 남을 의식한다는 역설을 전제로 한다. 너를 보는 나의 눈은 항상 너의 눈에 보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종종 ‘나의 시선’ 대신 ‘나만의 시선’이라는 표현을 선택하는 우리의 습관은 그 자명한 사실을 강조한다. 나만의 시선. 나는 이 앞에서 종종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적에, 듣고 싶지 않았지만 사려 깊지 못한 말과 행동으로 인해 기어코 듣고 말았던 한 마디를 떠올린다. “그래 알았어. 내 취향이야. (꺼져)” 각자의 취향이 넘쳐흐르는 동시대의 풍경은 코로나를 기점으로 무한히 확장되었으며, 이는 곧 타인의 취향에 대한 호기심과 자신의 취향을 정당화하려는 의지의 동반사멸로 이어졌다. 게다가 이를 문제라고 느끼는 불편함은 그 자체로 ‘나’의 고된 일상을 짓누를 뿐이니, 이 자리를 채우는 건 누구보다 ‘나’를 잘 알고 있는 유튜브 알고리즘 서비스일 것이다. 어쩌면 뜻이 맞는 쪽으로 향한다는 취향(趣向)은 이제 가능성의 벡터를 상실하고 내 몸에 배어있는 냄새와 다름없게 되었으니, 차라리 취향(趣香)으로 고쳐읽는 편이 쇼츠와 릴스로부터 도파민을 수혈받는 이 시대에 더 그럴듯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내게 평론은 감정과 욕망을 늘어놓는 취향의 잔치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과 욕망에 흠뻑 취하면서도, 대체 그 만족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혹시 그곳에 정반대의 그림자가 도사리는 것은 아닌지, 어쩌면 그 어둠이야말로 아름다움의 원천은 아닌지…… 비유컨대 평론은 빛과 어둠을 오간다는 점에서 고도의 긴장을 요구하는 작업이며, 나를 간섭하는 외부가 없다면 발생하지 않는 기쁨이다. 이것이 분명하다. 더 분명히 하면, 이것이 나의 취미다. 아, 들려온다. 그게 무슨 취미냐, 취미란 그보다 가벼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레와 같은 성원이. 이런 취미의 자리는 하루빨리 ‘연구’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듯, 몇몇 이들은 내게 “대학원 안 가세요?”라고 묻거나, 처음 듣는 각종 영화 이론서와 철학서를 줄줄이 열거하기도 했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그 자리를 어색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응답하며 읽은 척하기도 했다. 미안합니다. 한편으로 이 ‘연구’의 반대편에 있는 ‘애정’과 마주하며 그 과도함에 질식할 뻔하기도 했다. “이 영화 봤어요? 저 영화 봤어요? 그 영화 봤어요?” 혹은, “이 영화를 영화관에서 보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봤다는 소리 하지 마라!” …… 다시 고백한다. 미안합니다. 저 그 영화 본 적 없고, 이 영화는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봤어요. 하지만 당신의 즐거움을 뺏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는 종종 뇌가 멈추거나 숨이 막혀 거짓말을 하는 나약한 관객입니다. 이 자리를 빌려 모두에게 사과합니다. 맨눈의 감상과 두뇌의 관찰, 사적 일기와 시네마의 역사, 시네필리아와 학자의 틈바구니에서 여전히 허우적대는 내 모습을 보며 한 편의 영화를, 아니 인물을, 아니 얼굴을 떠올린다. <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박종원, 1992) 속 한병태. 일찍이 인터넷 서핑에 익숙했던 나는 초등학교 시절, 좌우가 잘려나간 화면비와 일본어 자막이 달린 버전으로 이 영화를 만났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화질. 다행히 한국영상자료원이 박종원 감독과 진행한 복원 작업을 통해 이제는 깨끗한 화질 로 만나볼 수 있고, 나 역시 오랜 매혹의 정체를 얼마간 더듬거릴 수 있었다. 일그러진 화질의 복원과 함께 일그러진 얼굴이 복원되었다. 나는 이 영화를 틈이 날 때마다 주변에 추천하고는 했는데, 그들의 첫 마디는 모두 동일했다. “어, 홍경인 이다!” 그렇다. 우리는 영화 속 캐릭터 엄석대를 만나기 전에, 영화 바깥의 명배우 홍경인부터 만나는 것이다. 그는 무표정을 통해 엄석대가 된다. 방금 학교에 첫 발을 들인 한병태에게 급장 엄석대가 명령한다. “상고 머리, 이리 와 봐.” 하지만 서울 출신의 이 당돌한 녀석은 답한다. “할 말 있으면 쟤가 이리 와도 되잖아!” 처음 맞닥뜨렸을지 모를 저항 앞에서도, 엄석대는 상고머리를 지그시 응시할 뿐이다. 엄석대의 침묵과 무표정은 고압적 언행 없이도 모두를 통제한다는 점에서 그를 차별화하는 중심이 되고, 모르긴 몰라도 당시 엄석대를 연기한 홍경인은 그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홍경인은 메소드를 훌륭히 수행하며 엄석대가 된다. 이 세계의 분위기를 장악하고 이끈다는 점에서, 그를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드라마적 주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그런 탓에 앞서 말한 것과 모순되지만, 나는 홍경인을 잘 모르는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나면 거꾸로 홍경인을 보고 이렇게 말할 것 같다. “어, 엄석대다!” 다른 한편, 이름 모를 수많은 아역이 화면을 채운다. 얼마나 많냐고? 유튜브에 접속해 이 영화의 설명란에 ‘5학년 2반 아이들’이라는 역할로 얼마나 많은 이름이 기재되어 있는지 확인해 보시라. 여전히 나는 저 아이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화면을 채운 그들의 뒤통수와 앳된 얼굴에서 발생하는 힘은 느낀다. 때때로 저 ‘5학년 2반 아이들’ 중 몇몇은 이야기의 감초가 되기도 하지만, (김영팔을 제외하면) 전반적으로 이들에게는 서사의 국면을 뒤집을 만한 개별적 플롯이 없다. 더불어 이 아이들이 비전문 배우들이었을 것이라는 심증까지 더해지는데, 그러고 나면 이들에게 ‘연기를 잘한다’라는 관습적 평가는 썩 어울리지 않는다. 사실 나는 이 영화의 절정 부분, 새로 부임한 김 선생(“어, 최민식 이다!”)이 엄석대의 왕국을 무너뜨리는 과정에서 아이들이 그의 악행을 낱낱이 고발하는 대목이 다소 간지럽다고 느끼는데, 사이다 같은 “저 새끼 순 나쁜 새끼예요!”의 노골성에 덧붙여, 아이들의 목소리가 소위 말하는 연극톤에 가깝기 때문인 것 같다. 진지한 대목에서 ‘연기를 하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쩔 수 없이 귀엽다고 느끼면서 흐뭇해지는데, 요컨대 드라마를 벗어난 리얼의 기습에 웃음이 툭툭 새어 나오고야 마는 것이다. 차라리 아이들의 말과 몸짓은 엄석대가 장악한 공기에 상쾌함을 불어넣는 매력적 실패에 가깝다. 서로 다른 얼굴을 마주한 한병태는 어쩔 줄 모른다. 그는 시종 고개를 떨구거나 주위를 둘러본다. 음악시간. 선생님이 풍금을 켠다. 다들 노래를 따라 부르지만, 한병태는 아이들을 둘러본다. 엄석대를 바라본다. 선생님을 바라본다. 그러나 갈 곳 잃은 눈길은 결국 음악 교과서에 머물 뿐이다. 그의 방황하는 시선은 말꼬리를 흐리는 목소리와 짝을 이루며 한병태의 얼굴을 완성한다. 그래서인지, 내게는 청소 검사를 합격 받고자 엄석대 앞에서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려는 그의 얼굴이 인상 깊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은 그저 배우를 통해 원작의 인물들을 재현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각기 다른 얼굴을 선연하게 포착하며 세계에 대한 직관을 심화한다. 불타버린 재와 같이, 어린 시절의 곤혹스러운 표정은 무기력과 공허로 변모해 어른 한병태의 얼굴을 뒤덮고 있다. 당시의 까까머리 아이들은 몰라볼 정도로 저마다의 직업과 풍채, 목소리를 가진 보통 어른이 되었지만, 김 선생의 매질로 추방되었던 엄석대는 단지 무성한 소문과 근조화환으로만 그 존재가 환기되며 진정한 신화가 되었다. 그 사이의 한병태는 여전히 제자리에 머물 뿐이다. ‘엄석대’ 이름 석 자가 적힌 화환을 확인하고 나서야 한병태는 느지막이 자리를 뜬다. 힘없는 발걸음 위에 내레이션이 얹힌다. “… 내가 사는 오늘도 여전히 그때의 5학년 2반 같고, 그렇다면 그는 어디선가 또 다른 급장의 모습으로 5학년 2반을 주무르고 있을 게다.” 우수와 권태에 젖은 한국영화사의 남성이 (또) 완성되는 순간이다. 뚜렷한 자리 없이 곤혹스러움으로 세계를 지탱하고 다시 보게 하는 한병태가 주인공이라는 점은 퍽 인상적이다. 그의 곁에는 김영팔이 그때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함께하지만, 여전히 한병태는 방금 전학 온 학생처럼 쭈뼛거린다. 그는 김영팔과 5학년 2반 시절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는 대신, 입을 닫는 쪽을 선택한다. 30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마치 김영팔은 과거에서 시간 여행을 한 듯 그때 그 얼굴로 이곳에 있는데, 용의주도한 캐스팅이 암시하듯 한병태는 30년 전 김영팔의 해맑은 얼굴을 보존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가 동이 틀 때까지 침묵을 지킨 것이 못내 아쉬웠다. 갖은 고초를 겪는 와중에도 항상 곁을 함께했던 김영팔과의 재회도 그에게는 고민거리였던 것일까? 물론 한병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 건 또 하나의 낯섦과 충돌을, 나아가 변화를 마주하는 시간이라는 것을. 어쩌면 그는 대화를 통해 과거를 갱신하는 대신, 적당히 견딜 만한 자신의 정서에 몸을 맡기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영화는 그런 선택을 지지하기라도 하듯, 우연히 엄석대를 마주치는 원작의 결말 대신 그의 존재를 간접화하는 방식으로 중년 남성 한병태의 비극적 파토스를 한 층 강화한다. 그렇게 한병태의 세계는 굳세어진다. 자기만의 정서로 침잠하는 한병태를 보면서, 이상하지만 자주 영화를 보고 가끔 쓰는 내 모습을 떠올렸다. 사실 나는 언제부턴가 “영화는 이제 재미없다”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꺼내고 다녔다. “나는 시네필이 아니야”라고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모종의 관객과 나를 구분하는 오만함을 부리기도 했다. 나아가 “영화 보다가 인생 망했다”라는 자조 섞인 농담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 뒤 “영화를 진짜 좋아한다는 것은 뭘까?” 하는 관념에 빠지면서 진짜 망하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몇 번 망한 적이 있다. 언젠가 어떤 영화글을 좋아하냐는 물음에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이 쓴 것 같은” 글이 좋다고 답한 적이 있다. 요즘따라 떠오르는 말이다. 과잉정보의 시대에 사전지식 없는 관객이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연구자와 평론가와 시네필과 직장인 모두 한 편의 영화 앞에서 벌거벗은 관객이 된다는 공상에 자주 빠진다. 이와중에 대한극장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렇게 하나 둘 극장이 사라지면, “내 옆에서 같이 영화 본 사람”도 사라지겠지. 그렇다. 나는 혼자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가 원칙 없이 상영관과 방구석, 스크린과 모니터, 소셜미디어와 극장 로비에서 환멸과 행복을 오고 가는 이유도 거기에 있지 않을까? 영화 평론에 대한 글을 쓰겠다고 용을 쓰다 원점으로 돌아온 것 같다. 나는 내가 어렵다. 그래서 네가 궁금하다. 호기심과 질문을 던지는 일이 도박에 가까운 시대라고 느끼지만, 그럴수록 네가 궁금하다. 물음표를 껍질로 두른 확신의 언어가 난무하는 탓에, 네가 궁금하다. 영화 평론은 애정과 연구만을 결과로 남기는 양자택일의 바벨탑이 된 걸까? 모르겠다. 나는 이리저리 치이는 당구공이 되어 어디론가 오갈 뿐이다. 여전히 영화가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 홍상수 )이라면, 영화를 닮은 그 몸짓을 1인칭이라 부르고 싶다. 이광호(영화평론가) l 1996년생, 다양한 방식으로 영화 주변을 오가고 싶다. 2018년 부산영화평론가협회 비평공모 당선. 반연간지 《크리틱b》, 월간 서비스 '비평의 편지' 필진.
작게 열려진 방문 틈새로 누군가가 거실을 엿보고 있다. 나이프와 크리스탈 같은 식기류부터 식탁까지 온갖 가구들을 둘러보며 품평하는 여자와 그에 응대하는 여자가 보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놓치지 않으려 고집스럽게 염탐하는 이 주관적 시점은 시선을 통해 대상을 소유하는 힘을 갖기보다는 지극히 두렵고 불안해 보인다. 심지어 이 시선은 곧 손님을 응대하던 여자에게 들켜 차단당한다. 이 주관적 시점의 주인은 첼라이고, 문을 닫은 이는 그녀의 오래된 연인 치키타이다. 여성 주인공에 의해 서사가 추동될 뿐만 아니라 단역까지 거의 모든 등장인물이 여성들로 이루어진 세계를 엄청난 밀도감으로 그려낸 파라과이 영화, <상속녀>는 이 첫 장면을 통해 바라보는 자와 바라보이는 자, 그리고 그것의 권력 관계의 이분법을 내파하고 새롭게 창조하며 시작한다. 훔쳐보는 첼라의 시선은 왜 힘을 갖지 못하고 불안한가, 그녀의 시선을 차단하는 손은 보호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통제와 지배를 위한 것인가? 여성들의 세계에서 권력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가? 50대 중반의 레즈비언 커플, 첼라와 치키타는 부유한 엘리트였지만 현재는 빚더미에 올라 갖고 있는 물건을 팔아야 하는 치욕적인 상황에 처한다. 더 이상 구겨질 자존심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에서 설상가상으로 대외적 관계와 재정을 책임져 왔던 치키타가 은행과의 소송에 휘말려 감옥에 가게 된다. 치키타는 특유의 적극성과 사교성으로 감옥에 금세 잘 적응한다. 반면 수줍고 내성적인데다 치키타 덕분에 세상물정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살았던 첼라는 그 존재감을 더 잃어가는 듯 보인다. 여전히 철없는 부잣집 소녀 같은 첼라는 그저 방안에서 아침마다 마시는 차의 찻잔의 위치와 쟁반 종류를 트집 잡으며 탐미주의적인 일상을 보존하는 데 집착한다. 현재에 마주한 재난-늙음, 시들시들한 연인관계, 다 써버린 재산-을 인정할 수 없는 그녀는 아름답고 풍요로운 과거의 어느 시간에 고착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끊임없이 자기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젊은 시절의 사진에 눈을 돌린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견고한 치키타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오히려 첼라에게 마법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다. 아버지에게 상속받은 차를 갖고 첼라는 운전기사 노릇을 하며 생전 처음 돈을 벌어 보고, 젊고 매력적인 앤지에게 강렬한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살아있음을 느끼며 자기 인생의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저 나이든 한 여자의 성적 욕망에 대한 영화만은 아니다. 또한 계급, 노동, 정치 혹은 자기 삶의 통제력에 대한 사회적 풍자이기도 하다. 파라과이의 독재가 오래 지속되는 동안 첼라와 치키타는 오히려 안온한 삶을 살았던 것처럼 보인다. 자신들만의 오랜 친구와 공동체 속에서 레즈비언 연인들은 어떤 동성애 혐오도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아마도 그녀들이 상속받은 부와 계급 덕택이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가능했던 우정마저도 치키타의 것이지 첼라의 것은 아니다. 사실 치키타가 큰 잘못을 했다기보다는 오랜 관계가 그들의 역할을 고정시키고 서로의 모든 것을 안다고 확신하며 서로의 잠재성을 갉아먹고 녹슬게 만들었을 것이다. 부, 계급, 오랜 연인 등 모든 방어막이 사라지자마자 첼라는 바로 도전을 맞닥뜨린다. 그것은 가려놓았던 혐오와 계급의 재위치화이며, 사회적 역할과 위치의 재조정은 그녀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고 여겼던 새로운 욕망과 열정을 불 지핀다. 옆집에 사는 부자 노부인 피투카는 치키타가 어디에 갔는지를 캐물으며 카드게임 모임에 자신을 데려달라고 부탁한다. 사실상 그건 자신의 요청을 들어주지 않는다면 안 좋은 소문을 내겠다는 은근하지만 공공연한 위협이다. 그렇게 평생 부모, 연인, 하녀 등에 의해 돌봄을 받던 첼라는 생전 처음 자신 스스로를 포함해 누군가를 돌보는 역할을 하게 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과 운전을 하는 것은 자신의 성적 역할의 재조정이자 계급의 추락이다. 그녀는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소비하는 자에서 노동하고 생산하는 자로, 욕망 받는 자에서 욕망하는 자로 이동한다. 그녀는 피투카 뿐만 아니라 함께 카드를 치는 다른 노부인들을 차로 데려다주고 돈을 받으며, 고속도로를 달려 앤지와 앤지의 엄마를 병원에 데려다준다. 점점 더 자신감을 얻게 된 첼라는 앤지에 대한 마음도 함께 키워간다. 과거에서 현재로, 고립된 방 안에서 외부 세계로, 이자 관계에서 다자 관계로 나아가는 전진의 서사는 어떤 면에선 고립되고 무기력하고 위선적이었던 파라과이의 엘리트를 풍자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기 삶의 통제력의 회복이든, 꺼져가던 욕망의 부활이든, 아니면 엘리트 계층에 대한 사회적 풍자든 이 전진의 서사는 강렬한 영화적 쾌감을 선사한다. 마르셀로 마르티네시 감독은 이 전진의 서사를 그려내기 위해 첼라의 주관적 시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초반에는 프레임 대부분이 문으로 가려져 있고 종종 완전히 차단당하던 첼라의 시선은 운전을 하고 자신감을 얻어가면서 점점 넓어진다. 식기와 가구를 둘러보기 위해 찾아오는 손님을 훔쳐보기 위해 열어두었던 방문의 틈은 점점 더 넓어지다 마침내는 방에서 나와 하녀 대신 직접 가격 협상을 한다. 식탁을 비싼 값에 판 첼라는 급기야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고 보기 싫다고 버렸던 식탁을 들인다. 단순히 방 밖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집과 취향에 이질적인 것을 들이며 자신의 계급성을 흩트린다. 한편 초반에 첼라의 시점으로 보이는 앤지는 얼굴이 프레임에서 잘린 채 몸만 보였다. 그러나 눈도 못 마주칠 정도로 부끄러워하던 첼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그녀에게 잘 보이기 위해 선글라스를 찾아 끼고 자신을 숨기기보다 타인의 시선을 적극적으로 초대한다. 앤지를 향한 그녀의 욕망이 강해질수록 그녀의 시선과 공간은 바람이 부는 베란다로, 밤거리로 점점 더 열리고 확장된다. < 상속녀 >는 첼라의 주관적 시선 폭의 확장, 이동성의 확대, 서사의 진전을 정교하게 연계한다. 나는 마음의 문제든, 뇌 속의 작동이든, 내장이 뒤흔들어지는 감각이든, 내적인 것을 외화하는 능력은 영화라는 기계의 가장 중요한 역량 중 하나라고 믿는다. 하지만 최근에는 영화의 그러한 역량을 잘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다. <상속녀>는 다른 이에게는 감지되지 않을 수도 있는 한 인간의 휘몰아치는 내적 변화-모멸감, 슬픔, 수치심, 우울감, 이기심, 활력, 욕정, 사랑 등-와 모험을 회피하지 않고 전진하는 운동성을 당사자의 시점과 구도를 통해 드러낸다. 그건 굉장한 영화적 쾌감이다. 거울을 비추거나 대립적인 방식이 아니라 그녀만의 시점과 운동성을 통해 만들어 내는 내적 변화의 시청각화는 한 나이든 레즈비언 여자를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 버린다. 갑작스럽게 치키타가 돌아와 다시 그녀의 삶을 지배하려 하자 첼라는 단호하게 거부한다. 그녀는 치키타가 팔아버리려 했던 차를 갖고 떠나버린다. 치키타가 첼라를 찾지만 그녀는 더 이상 프레임에 있지 않다. 시선을 좁히거나 떨어뜨리며 자기 주변의 공간도 제대로 확보하지 못했던 첼라는 아예 프레임 밖으로 나가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나갔던 그 영화적 우주를 폭파하고 확장한다.
벌써 12년 전이다. < 몬스터 주식회사 >를 보면서 박장대소했던 기억이. `괴물들이 사는 나라‘의 대기업 ’몬스터 주식회사‘는 참 깜찍한 설정을 지녔었다. 괴물들이 인간 아이들에게 겁을 주고, 그 아이들의 비명을 밤새 수집해 에너지를 만드는 비명 발전소였으니까. 그 와중에 최고 엘리트 사원인 털 뭉치 ’설리‘와 파트너 ’마이크‘, 인간 꼬마 부의 뭉클한 교감은 더없이 사랑스러웠고, 몬스터 주식회사 직원들의 과도한 실적경쟁은 흥미진진했다. 그리고 12년 후. 할리우드 애니메이션의 과열 경쟁 속에서 픽사는 <몬스터 주식회사>의 프리퀄 < 몬스터 대학교 >를 내놓았다. 마치 일에 찌든 직장인들이 풋풋했던 대학 시절을 그리워하듯. < 몬스터 대학교 >의 핵심은 먼 훗날 ‘고수’가 될 설리와 마이크, 그들도 한때는 대학생이었고, 겁주기를 배웠다는 얘기다. 몬스터들의 대학 생활을 아이비리그 캠퍼스 생활에 적용시켜 캐릭터들의 배경을 쌓아가는 솜씨가 맛깔스럽다. 누구보다 열심히 겁주기 공부를 하지만 웃기게 생겨서 문제인 외눈박이 공부벌레 ‘마이크’. 겁주기로 뼈대 굵은 가문 출신에다가 생긴 것도 무서워서 별 노력을 않고도 주목받는 ‘설리’. 극과 극의 두 괴물이 4년제 명문 사립대학 ‘몬스터 대학교’(이하 ‘몬대’)의 신입생이 되어, 겁주기 전공 수업에서 처음 만난다. 훗날 명콤비가 될 두 라이벌이 만나기만 하면 싸우면서 드러나는 ‘몬대’ 생활의 면면은 재치가 넘친다. 몬대의 캠퍼스, 강의실, 운동장, 도서관, 남녀 클럽 등등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는 물론, `몬스터 리그‘의 라이벌 대학 공포공대와의 신경전, 그리고 학내에서 벌어지는 ’겁주기 대회‘까지. 대학 생활의 모든 것이 몬스터 세계에 적용되는 것이다. `몬대’의 전반적인 모습은 미국 동부 대학인 하버드와 MIT, 스탠포드, UC버클리의 캠퍼스 모습이 바탕이 됐다. 드림웍스나 블루 스카이 등 다른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들도 물론 이런 치밀한 자료 조사와 노력을 한다. 다만, 현실 세계의 리얼리티를 애니메이션 속 세계에 세세하게 적용하는 부분에서 픽사 애니메이션이 지니는 독특한 정서가 있다. 바로, 우리가 ‘잃어버린 것, 지나가 버린 것 대한 그리움’이다. 그리고 그 정서야말로 픽사 애니메이션의 정수다. 장난감과 놀던 유년 시절(< 토이 스토리 >,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던 삶(< 월.E. >), 되찾아야 하는 부자 관계(< 니모를 찾아서 >)처럼. < 몬스터 주식회사 > 직원들이 겁주기 초과근무까지 하느라 잃어버린 대학생활의 낭만은 신선하고 즐겁다. 신입생 때부터 겁주기 스펙을 쌓아야 하는 몬대생들의 고충이 현실의 대학생들 못지 않지만, 그래서 더 유쾌하고 뭉클하다. 대학생활에서 사회생활까지 이어지는 타고난 능력과 노력의 차이, ‘겁주기’ 프로페셔널이 되기 위해서 대학 졸업장이 반드시 필요한가에 대한 논란, 몬스터도 대학을 다녀야 인정받는 사회의 허세도 곰곰이 되짚게 된다. 12년이 지났어도 늙지 않은 ‘설리’ 역 존 굿맨과 ‘마이크’ 역 빌리 크리스탈의 목소리 또한 한몫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고개가 끄덕여지는 건 픽사 스토리의 탄력성이랄까. 마이크와 설리가 어떤 사회생활을 하는지 아는 입장에서도 < 몬스터 대학교 >의 스토리는 매력적이다.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에 리얼리티와 상상을 결합해 새롭고도 팽팽하게 끌어가기 때문이다. ‘설리’를 포함한 괴물들의 털이 얼마나 부드럽고 생생한가 하는, 기술의 완성도는 부럽지 않다. 역시 부러운 건 스토리를 만드는 상상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