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타블로
- 감독
- 장 프랑수아 라귀니
- 제작년도
- 2011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숙련된 장인의 손길이 조립식 미니어처 완구에 민트색 페인트를 칠한다. 노스롭 그러먼(Northrop Grumman), 제너럴 다이내믹스(General Dynamics), 레이시온 테크놀로지스(Raytheon Technologies) 등 완성된 미니어처 외벽의 간판에는 미국의 글로벌 방위 산업체 이름들이 새겨진다. 그 위로 학교에서의 수업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년의 읊조림이 얹힌다. “전쟁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는 걸 배웠어/ 우리가 겪었던 위대한 전쟁들에 대해 배웠어/ 독일과 프랑스에서 싸웠지/ 언젠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거야.” 1964년 발표된 피트 시거(Pete Seeger)의 저항적인 포크 송 ‘오늘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나요?(What Did You Learn At School Today)’는 미니어처 모델의 양식화된 조립 과정과 기이한 대조를 이룬다. 정글의 소리와 멸종된 짐승의 포효가 곁들여진 공룡 뼈의 모형으로 열리는 영화 < 소년 >(2025)은 제임스 베닝의 필모그래피에서 보기 드문 시도로, 의뭉스러운 도입 직후 작가 특유의 엄격한 패턴을 제시한다. 베닝이 묘사하는 것은 실재적인 세계 이미지가 아니다. 베닝은 풍경을 포기하고, 텅 빈 블랙박스를 배경으로 구조물을 만들고 라디오를 듣는 소년의 관점을 취한다. 시간을 횡단하는 이 가상의 소년은 세상에 대해 잘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것들이 잘못되어가고 있으며, 무언가 긴급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다. 구조는 명확하다. 플롯은 8개의 분절로 구성되는데, 각 파트는 미니어쳐 모형을 조립하는 손의 움직임을 따라 흘러가는 시네이드 오코너(Sinéad O'Connor), 샤이렐스(Shirelles), 트레이시 채프먼(Tracy Chapman), 냇 킹 콜(Nat King Cole) 등의 노래, 그 뒤를 이어 완성된 모형을 배경으로 하여 1961년부터 2016년까지의 미국 현대사에서 분기점을 형성한 정치적 연설을 병치한다. 이미지는 순수한 유희처럼 보이지만, 사운드는 군산 복합 비즈니스를 위한 폭력과 전쟁의 연대기를 재생한다. 냉전의 종식과 평화를 외치는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Dwight Eisenhower),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백인 정치인 조지 월러스(George Wallace), 흑인들의 힘에 대해 역설하는 인권운동가 스토클리 카마이클(Stokely Carmichael), 이주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노동운동가 세사르 차베즈(César Chávez), 이란에 대한 미국의 무기 지원을 인정하는 보수의 상징 로널드 레이건(Ronald Reagan), 기후 위기에 대한 각성을 촉구하는 환경운동가 세번 컬리스-스즈키(Severn Cullis-Suzuki), 미군의 지속적인 이라크 주둔을 옹호하는 정치인 힐러리 클린턴(Hillary Clinton). 핵무장 종식을 촉구하는 반핵운동가 헬렌 칼디콧(Helen Caldicott)의 연설과 군산복합체의 성채는 아이러니하게 충돌한다. 시대의 아젠다를 초점으로 한 연설의 선집은 인종 분리와 시민권, 이주 노동자 착취, 중동 위기, 복지와 환경 문제, 전후 미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문제들을 연대기 순으로 망라하면서 권력과 자본 또는 둘 다에 대한 욕망의 결과를 보여준다. 노래가 연설에 응답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인지, 아니면 모두가 풍자와 야유의 찬양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제임스 베닝의 작품은 역사의 무게와 집단 기억 속에서 예술의 역할을 끊임없이 탐구해 왔지만 이번에는 사뭇 노골적인 어조와 직설적인 정치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제임스 베닝의 영화를 정의해 온 사색적 무드를 탈피한 생동감이다. 언제나처럼 생각할 거리가 많지만, 유머를 가미한 표현 요소들, 예컨대 붓질을 하는 손동작, 리드미컬한 음악, 그리고 풍부한 질감의 연설 대사 때문에 활력이 넘친다. 이미지, 소리, 단어의 조합은 언뜻 보기에는 무작위적으로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모호한 통일감을 전달한다. 한편으로 지난 10년간 베닝의 작업들처럼, 구조나 내용과 관련이 없어 보이는 디테일에 대한 궁금증도 피어난다. <소년>의 경우, 설정을 알아차리고, 패턴에 대해 상상한 뒤, 곧바로 질문을 던지게 된다. 미니어처 모형에 색칠을 하는 손은 같은 사람의 것일까? 저들은 평소에도 모형을 조립하고 색을 칠하는 사람들인가, 아니면 장면을 위해 고용된 배우들인가? 정치 연설과 ‘손’의 소재(所在), 정체성은 관련이 있을까? 질문에 대한 답은 엔딩 크레디트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소년>은 의식의 흐름에 따른 게임을 통해 하나의 모델-패턴을 제시하고 노래와 연설이라는 발화 형식의 의도적인 병치를 창조하여 ‘청취’에 깊은 주의를 기울이도록 유도한다. 엄격한 구성, 역사와 기억을 유희하는 개념적 구조로 관객의 인식에 도전장을 내밀면서 권력과 파시즘의 은유이자 현재에 재건되고 있는 과거의 망령들을 형상화함으로써 예술과 정치의 교차점을 탐구하는 것이다. <소년> 중 (사진: " 소년 ", 전주국제영화제 / © James Benning) 베닝은 <소년>을 “수십 년 동안의 일기를 읽으며 만든, 친밀하고 개인적인 작품”이라고 해설했다. 하지만 영화는 사적인 노스탤지어를 넘어서며, 꼰대의 한탄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감정도 초월한다. 베닝이 제시하는 8개의 스토리는 군국주의의 포괄적인 역사를 회고적으로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라, 피상적인 엿보기와 수사적 장식을 제공하는데, 이와 같은 병치의 전략은 계보학의 차원을 서사에 부여한다. 베닝은 과거의 렌즈를 통해 현재를 진단하고, 무엇이 우리의 삶을 위태롭게 하는지를 명확히 드러낸다. 6천5백만 년 전 공룡을 사라지게 하는 대절멸의 도래, 뼈와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다음에 소멸할 종(種)은 인류가 될 것, 이라고 경고한다. 개선의 여지가 없는 인간과 그들의 위협받는 미래에 대한 근심을 담은 이 영화는 말과 행위의 불일치가 초래할 것들에 대한 전망도 보여준다. 투쟁과 몰락, 재건에 익숙해진 것처럼 계속해서 모형을 칠하고 조립하는 손들의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파괴적이다. 마지막에 베닝은 군산 복합 비즈니스의 최종 장을 화면 중앙에 배치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를 초토화한 원자 폭탄 ‘리틀 보이’의 모형은 소문자 영어 제목(<little boy>)에 담긴 ‘소년’의 순수성을 폭파한다. 오늘 학교에서 배운 것을 새기는 소년의 사색은 얼마나 헛된 것인가. 진보와 그 대가, 역사의 폐쇄적 순환 궤도에 대해 성찰하는 <소년>은 인류의 서사가 주요 사건뿐 아니라 사소하고 개인적인 결정들을 통해 구성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시청각 요소들의 조합은 일관된 패턴을 따르고 베닝의 전작들에 비해 해석의 어려움이 덜 하지만, 이 영화의 시청각 은유는 개별 요소들의 총합을 능가한다. 상징적인 연설과 정적인 이미지를 병치함으로써, 베닝은 시적인 환기와 정치적 명제 사이를 왕래한다. 스토클리 카마이클의 시민권 연설이나 헬렌 칼디콧의 핵에 대한 경고처럼, 언어의 힘이 이미지를 이기는 순간들은 깊은 영감을 준다. (상) <엘.코헨>(2018), <알렌스워스>(2022) (사진: " L. COHEN ", " ALLENSWORTH ", VIENNALE) (하) <미국>(2022), <브레스리스>(2023) (사진: "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 " BREATHLESS ", RÉEL Archives) 제임스 베닝이 지속적으로 헌신해 왔던 ‘풍경’에 관한 에세이로 영화를 읽을 수도 있다. <소년>에는 두 가지 경관 양식이 작동한다. 먼저 파랑, 노랑, 갈색 등의 채색으로 지속하여 변동하는 경관이다. 두 번째는 완성된 미니어처 모형을 길게 비추는 타블로 쇼트가 자아내는 인상으로 여기서 연설은 일종의 음성 해설처럼 기능한다. 환경음과 음악의 지배를 받는 베닝의 영화들(< 엘.코헨 >, <알렌스워스>, <미국>, < 브레스리스 >)처럼 <소년>은 역사적 풍경에 대한 인내심 있는 응시가 된다. <미국>(2022)은 <소년>과 매우 유사한 도식을 구현한 영화이다. 같은 길이의 정지 이미지 50장이 순서대로 배열되어 있으며, 각 이미지 앞에는 검은 무지의 배경에 미국의 50주를 나타내는 캡션이 붙는다. <미국>은 베닝의 다큐멘터리 실천이 세상을 향한 창, 즉 화면 속 현실을 재구성하려 하지 않고 관객에게 경험을 창조하고 전달하려는 시도임을 보여주는 분명한 예이다. <소년>은 <미국>의 전략을 확장한다. 정지 카메라로 촬영한 롱 쇼트, 역동적인 요소들이 섞인 정적인 피사체를 포착하는 베닝의 스타일 서명은 <소년>에서 개별 쇼트의 구성과 프레임 안에서 단조로운 요소들의 기하학적 배치로 대체된다. 대중음악과 정치 연설이 어우러진 미국의 작은 풍경들을 기록하는 단조로운 타블로를 통해 베닝은 미국 역사의 토대를 재구성하기 위한 풍경화를 제시한 것이다. 역사를 미니어처로 관람하는 <소년>의 시청 경험은 시간의 지속과 인내를 요구한다. 베닝은 언제나처럼 우리들이 개념적 퍼즐을 조립하도록 내버려두고, 조립을 위한 부품들만을 제공한다. 그가 모델을 구축했듯이 관객은 부품들을 조립해야 한다. 국방비 지출, 인종 정치, 노동운동, 핵전쟁, 기후 위기에 대한 사전 지식과 선입견, 그리고 음악적 취향에 따라 <소년>은 베닝의 가장 흥미로운 작품이자, 그의 필모그래피를 풍성하게 만들어줄 걸작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장병원(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 l 영화주간지 《필름 2.0》 편집장, 전주국제영화제 프로그래머를 거쳐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수석 프로그래머로 일하고 있다. 영화글을 쓰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발터 벤야민의 이야기대로 인간의 역사치고 야만의 기록이 아닌 것은 없다. 인간이라는 단어에 함축된 휴머니즘, 이성, 합리, 교양 등 번지르르한 의미들이 새빨간 거짓말로 밝혀진 사례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미국 사법재판 중 가장 기괴한 판례로 꼽히는 O.J. 심슨의 ‘세기의 재판’ 역시 야만 중의 야만의 기록이었다. < O.J.: 메이드 인 아메리카 >(이하 ‘<O.J.>’)는 이 야만적 기록의 속살을 들추어내는 영화이다. 영화감독 에즈라 에델만은 1995년 10월 3일 초조한 마음으로 TV 앞에 앉아 O.J. 심슨 사건에 대한 최종 평결을 지켜보고 있었다. 역사학 석사 출신의 에델만은 심슨에게 무죄가 선고되기를 기도했다. 당시의 에델만에게 심슨 스캔들은 범죄 스토리가 아니라 인종재판으로 비쳤기 때문이다. 4년 전 네 명의 백인 경찰관이 과속을 하고 도주하던 흑인 건설업자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폭행했던 사건에 무죄가 선고된 후 에델만은 흑인 남성이 강고한 미국의 인종주의 시스템을 파괴하는 순간을 고대해왔다. ‘심슨에게 힘을 주세요!’ 에델만의 기원은 현실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 후 에델만은 스스로의 신념을 근본으로부터 뒤집는 영화를 만들게 된다. 그 자신의 편협과 무지에 대한 반성적 고백성사라고 할 수 있는 < O.J. >를 통해 에델만은 비열하고 치욕적인 속임수에 의해 각색된 역사를 도발적으로 전복한다. O.J. 심슨은 누구인가? 전미풋볼리그(NFL)을 호령했던 최고의 스포츠 스타이자 흑인으로서 가장 높은 단계의 명사로까지 도약했다가 일급 살인혐의를 받고 급속히 추락한 사나이. 천부적인 신체 능력을 타고난 ‘하드 바디’ 스포츠맨인 심슨은 인종의 장벽을 초월하여 전국구 지지를 받았던 슈퍼스타였다. 스포츠계에서 얻은 명성을 후광으로 삼아 심슨은 TV와 광고, 영화에서도 자신의 이미지를 전시하면서 영향력 있는 셀러브리티로 진화해간다. 그러나 심슨의 유명세를 정점에 올려놓은 사건은 따로 있었다. 전 부인 니콜 브라운과 내연남을 도살한 혐의로 기소된 후 치른 이른바 ‘세기의 재판’을 통해 심슨은 낯선 모습으로 재등장한다. 총 3개의 부분으로 이루어진 < O.J .>는 심슨의 흥망사를 추적한다. 거칠게 분류하면 1장은 심슨의 성공기, 2장은 ‘세기의 재판’을 둘러싼 논쟁, 3장은 심슨의 현재에 해당한다. 서사시적인 웅장함을 유지하면서 에델만은 백인 중산층을 동경했던 말썽꾸러기 흑인 소년에게 주어진 제한된 선택의 기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생득적인 운동능력, 흑인 시민권 운동에 동참하기를 거부한 심슨의 정체성 부정, 미식축구 선수로서 성공 가도와 영예, 범죄용의자로의 전락, 그리고 돈과 권력, 편향된 여론에 의해 불의하게 결론이 난 재판의 과정을 훑는다. 이 30여 년의 시간은 흑인의 영웅이 아닌 미국의 영웅으로 이미지를 육성해가는 심슨의 수완을 다각적으로 보여준다. 한 인물의 생애에 대한 전 방위 지도 그리기에 동참하면서 관객들은 먼발치에서 그를 바라보게 된다. 심슨의 인생유전에는 ‘반(反)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인종혐오도 포함되어 있다. 한 인물을 구성하는 이토록 다채로운 이미지는, 새로운 관점에서 심슨 사건을 조망하는데 탄력을 줄 뿐 아니라 미국 사회를 장악한 무의식, 합법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을 통해 유지되는 신화를 전복하려는 이 영화의 토대가 된다. 전기적 인물을 따라가는 연대기적 기록이라고는 하지만 < O.J. >는 인물연구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은폐된 사건의 진상을 밝혀가는 진실탐사 다큐멘터리도 아니다. 1994년 6월 17일 심슨이 벌인 사건,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은 자동차 추격전은 명백하게 그가 살인을 했다는 증거였으나 심슨 재판의 최종 결과는 ‘무죄’였다. 8개월 넘도록 이어진 재판, 100명이 넘는 증인, 4만 5천 페이지가 넘는 입증 기록에도 불구하고 심슨은 어떻게 무죄를 받았는가? 그러나 에델만의 관심은 심슨이 유죄인지, 무죄인지가 아니었다. 대서사의 초점은 어떻게 재판이 인종주의라는 이슈를 따라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는가로 모아진다. 스포츠맨으로서의 재능 외에도 미디어에 의해 재현되는 심슨은 가공할 매력의 소유자로 포장된다. 심슨은 유명인사가 되기 위해 사인을 하고, 자동차 렌탈 기업 ‘헤르츠’의 모델로 활약하면서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번개 같은 달리기 능력을 뽐냈다. 그는 백인 소비자들에게 어필한 최초의 흑인 모델이었다. 인종의 경계를 넘은 우상이 희대의 살인 용의자로 나타났을 때 미국이라는 다인종 공동체는 다시 정의된다. 백인들이 심슨을 품어준 것은 아량일까, 신화에 대한 그들의 강박일까? 관대함과 카리스마를 갖춘 스포츠맨이자 셀레브리티로서 심슨의 모든 활동이 겨냥한 것은 미국의 백인 중산층에 내재된 무의식이었다. 심슨의 영웅적 풍모가 절정에 올랐을 때 미국인들은 그가 의도한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아카데미시상식 역사상 가장 긴 러닝 타임을 기록한 수상작이자 첫 TV 시리즈 수상작, 800시간에 달하는 푸티지, 72명의 인터뷰,’ 2017년 2월 치러진 89회 아카데미시상식에서 최고 다큐멘터리상을 받은 < O.J .>가 뿌린 미증유(未曾有)의 기록들은 이 영화에 내포된 웅대한 야심을 모두 말해주지 않는다. 7시간 47분에 달하는 이 매머드 시리즈는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형성과 몰락, 거짓과 광기로 유지되는 가짜 이미지, 끝내 드러나고야 말 이면의 이데올로기를 폭로한다. 최근 미국영화의 화두 중 하나는 ‘블랙 무비’이다. < 노예 12년 > < 국가의 탄생 > < 문라이트 > <O.J.> < 겟 아웃 >으로 이어지며 러시를 이루고 있는 ‘블랙 무비’에는 미국 사회 안에서 흑인들이 공유한 체험, 의제들이 진하게 녹아 있다. <O.J.>는 지나치게 많은 자료와 의미가 들어있는 서사 다큐멘터리의 맹점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길을 잃지 않고 논점을 유지한다. 에델만은 한 나라에 대한 초상을 그려내기 위해 신화가 발아하고 진화하는 과정, 그 아성이 깨어지기를 두려워하는 무의식, 그 위에 똬리를 튼 허구적 이상화를 폭로한다. <O.J.>는 미학과 윤리, 양식의 측면에서 강력한 논쟁을 야기한다. 아마도 그 잔향을 숙고하는 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에델만은 여기서 심슨의 전기를 통해 인종 차별, 가정 폭력, 뉴스 매체의 과잉 등 미국의 모든 병들어가는 신경세포를 건드렸다. 심슨을 매개로 묘사되는 폭력의 역사는 차별과 특권의식, 화합할 수 없는 인종갈등의 골을 파헤쳐 보인다. 또한 최고의 논픽션 영화들이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것처럼, 대상에 매몰되지 않는 거리 두기, 성실한 리서치, 그리고 다루고자 하는 테제에 대한 심오한 성찰을 보여준다. 이는 빈틈없는 조사와 핵심을 찌르는 인터뷰, 자로 잰 듯 정교한 편집이 이루어낸 위업이라고 할 수 있다. ‘세기의 재판’ 과정은 내레이션 하나 없이 심슨의 친구와 적, 동료들의 인터뷰로만 중계된다. 상세하게 기술되는 에피소드들의 태피스트리는 심연의 구조와 시스템을 건드리고 몇몇 이미지들에서는 몽상적인 힘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슨의 이야기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영화의 결말에서 그는 강도와 유괴 혐의로 33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2017년 10월 가석방되었다)인 상태로 묘사된다. 세기의 재판이 종료된 후 심슨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영화의 마지막 장은 보기에 고통스럽다. 타블로이드 잡지에나 등장할법한 누추한 범죄자로 네바다 교도소에 수감 중인 심슨은 참혹한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수심이 가득한 초로의 노안(老顔), 그의 피부는 나무껍질처럼 푸석해 보인다. 이 세세한 여정의 끝에 목격하게 되는 것은 미국이 조형한 신화의 엔트로피이다. 한 흑인 스포츠 스타의 영락을 보여주기 위해 8시간이 필요했는가? 그 불가피함에 대해서는 내가 보증할 수 있다. 4시간 40분에 달하는 마르셀 오퓔스의 < 슬픔과 동정 >(1968), 10시간 동안이나 상연되는 클로드 란츠만의 < 쇼아 >(1985) 같은 기나긴 다큐멘터리와 마찬가지로 역사를 가로질러 무의식의 밑자락을 드러내기 위해 시간의 누적은 필요조건이었다. 또한 그것이 인종갈등과 정치, 미디어, 쇼 비즈니스가 혼재된 이 비극적 서사 드라마의 성취를 보증하는 힘이라고 확언할 수 있다.
“우리 아빠는 최고야. 우리 아빠는 무서워하는 게 하나도 없다. 커다랗고 험상궂은 늑대도 안 무서워한다… 우리 아빠는 최고야… 고릴라만큼이나 힘이 세고, 하마만큼이나 늘 기분이 좋다. 우리 아빠는 최고야… 그리고 나를 얼마나 웃겨 주는지 모른다. 나는 우리 아빠가 정말 좋다. 왜 그런지 알아? 아빠가 나를 사랑하니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우리 아빠>라는 제목을 듣는 순간, 대다수의 영국 관객들은 위와 같은 이야기를 떠올릴 것이다. 2000년에 발표한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 말이다. 출간과 동시에 아이를 둔 가정의 필독서가 되었고, 이후로 매년 아버지의 날이면 아이들은 ‘우리 아빠가 최고!’라는 머그잔을 선물한다. (때마침 앤서니 브라운의 전시회가 지금 서울에서도 열리고 있다) 마커스 아미티지의 2014년 단편 < 우리 아빠 >도 비슷한 대사로 진행된다. “우리 아빠는 나를 학교에서 데려오고… 이발소에 함께 가기도 하지… 우리 아빠는 신문을 볼 때면 늘 불평을 늘어놓고… 금요일에는 항상 피시 앤 칩스를 먹고… 휴일에는 잉글리시 브랙퍼스트를 먹지...” 초반만 하더라도 주인공의 아빠는 그림책 속 아빠처럼 멋지지는 않더라도, 그럭저럭 평범한 (혹은 전형적인 노동자 계급의) 아빠로 여겨진다. 크레용으로 그린 이미지는 그다지 그림 실력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아 보이는데, 여기에 담긴 모습에도 아이다운 천진난만함이 느껴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야수파의 회화처럼 그 속에는 뭔가 거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다. 거친 기운은 이내 핸드헬드 카메라로 급박하게 찍은 영상처럼 불안정하게 끊임없이 부유한다. 아이가 바라보는 아빠의 모습과 동네 풍경은 왁자지껄하다. 처음엔 그저 활기 넘치는 소란스러움으로 여겨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빠에 대한 설명이 반복되면서 표현은 강렬해지고, 움직임에는 가속도가 붙는다. “우리 아빠는 신문을 볼 때면 늘 불평을 늘어놓지… ‘빌어먹을 세상, 내 탓이 아니야’… ‘영어도 할 줄 모르는 것들, 우리 나라에서 당장 꺼져버려’…” 소란스러운 거리의 풍경 속에 10대 또래들의 일탈이 언뜻 보이기도 하고, 어른들은 아이들을 방관, 방치하는 듯하며, 이주민과의 갈등이 담기기도 한다. 어쩌면 그건 그저 축구 경기에 열광하는 와중에 빚어진 후끈함의 여파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미 주인공인 아이는 그림책의 감성을 가진 ‘순수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반복되는 목소리를 듣다 보면 어느새 아이의 말이 꽤나 어리숙하게 들린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다. 말을 더듬는 횟수가 잦아지고, 발음도 뭉개진다. 오프닝에서 굵은 활자로 “My” “Dad”라는 제목이 등장한 것처럼, “My” “Dad” “Says”라는 대사는 단단하고도 투박한 글꼴로 이야기 사이에 줄곧 등장한다. 이러한 전개 속에서 이미지에는 차츰 균열이 생긴다. 크레용 그림 한가운데에 구멍이 뚫리거나 프레임 이미지가 찢어지면서, 그 아래로 활자가 정신없이 지나간다. 이미지를 비집고 등장하는 활자는 신문 기사를 뜯어 붙인 입체주의의 콜라주처럼 보이기도 하며, 다다의 활자 차용처럼 의미를 없애버리는 장치로 보이기도 한다. 아빠에 대한 언급이 되풀이되고 가속도가 붙을수록 활자의 개입도 더 강도를 높인다.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개입하는 이 활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짐작하듯 ‘아빠가 늘 보는 신문’이 뱉어내는 표식들이다. 줄기차게 선정적이고도 자극적인 기사를 쏟아내는 타블로이드 신문들의 옐로우 저널리즘. 아빠는 신문을 안 읽어서 거칠고 무식한 게 아니라, 너무 열심히 읽어서 거칠고 무식하다. 신문이 처음부터 아빠를 거칠고 무식하게 세뇌시켰다기 보다는, 아빠의 불만을 신문이 ‘이민자의 문제’로 여기도록 ‘프레임’을 짜줬다. 불안을 불만으로, 불만을 분노로, 분노를 혐오로, 그리고 증오로. 거세게 휘몰아치는 크레용 그림과 활자의 뒤엉킴, 반복되면서 겹치고 뭉개지는 내레이션이 카오스를 이루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아빠를 비롯한 어른들이 경찰과 맞서고 있다. 훌리건의 모습을 한, 반이민자 집회의 장면. 양측의 충돌이 벌어지는 순간 영상은 정지한다. 멈춘 그림이 찢어져 나가면서 그 아래로 거친 흑백 사진이 드러난다. 포토저널리즘에 전형적으로 쓰이는 사진 이미지이다. 이를 통해 < 우리 아빠 >는 이 이야기가 현실 세계에서 일어난 ‘사건’임을 지칭한다. 사진이 크레용 그림의 실체를 폭로해내는 과정에서 가장 마지막에 드러내는 것은 바로 주인공의 얼굴이다. 마침내 보여지는 아이의 얼굴은 생각보다 앳되다. 돌이켜 보면, 이 작품의 주인공은 처음에는 10살 안팎의 아이로 여겨지다가, 중간에 10대 중후반의 청소년인 듯싶었는데, 다시 10살 초반대로 변한다. 아이는 아빠라는 어른의 세계 속에서 어느덧 닮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 마지막 장면은 앤서니 브라운의 <우리 아빠>와는 정반대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림책의 마지막은 아빠와 아이가 두 팔 벌려 꼬옥 끌어안은 장면인데 반해, 마커스 아미티지의 < 우리 아빠 >에서는 한껏 겁먹은 아이가 아빠 뒤에 숨어있는 모습이다. 개인적으로 지난해 (2015년) 한국에 소개된 외국 단편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고작으로 꼽는다. 애니메이션이 여전히 만들어져야 하는 이유를 증명한 작품이기 때문이고, 새로운 형식의 애니메이션이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보여준 작품이기 때문이다. + < 우리 아빠 > 감상하기 https://vimeo.com/978125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