톰보이
- 감독
- 셀린 사아마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조 허란, 말론 레바나, 진 디슨, 소피 카타니, 마티유 데미, 요한 베로, 노아 베로, 체옌느 레인, 레이얀 더벡리, 크리스텔 바라스, 발레리 루처
<질투>(한형모, 1960) 촬영 현장, 한형모 감독의 뒷모습 (박승배 촬영감독 기증) 한국영화의 '퀴어함'이 장르나 소재, 영화사적 순간 등에 반영되는 양상을 분석합니다. 감독 한형모 는 1950년대 한국 영화에서 대중성과 통속성에 있어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동시대 유명 감독들 신상옥 , 이만희 , 김기영 , 유현목 같은 자기만의 고유한 주제의식이나 미학을 가진 작가로 평가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여성 인물을 매개해 대중이 쉽게 매혹될 만한 선정적인 스펙터클을 전면에 내세우고 장르적 오락성을 중점에 두면서도, 결말에서 여성 인물에 대한 순치와 처벌의 서사를 통해 보수적인 도덕성을 거스르지 않는 통속 영화들로 이름을 날렸다. 그렇기에 한형모의 작가성에는 늘 매혹과 순응, 현대와 전통이라는 모순된 단어들이 함께 붙게 된다. 감독 데뷔작이자 최초의 반공영화인 < 성벽을 뚫고 >(1949)와 한국전쟁 중 제작된 다큐멘터리 <정의의 진격>( 1부 1951, 2부 1952)을 제외하고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여성이 주인공인 멜로드라마, 로맨틱 코미디, 뮤지컬이 다수를 차지한다. 촬영감독으로 영화 경력을 시작했던 만큼 그의 작가성으로 기술적 유려함, 다양한 장르를 결합시키는 능력(첩보+멜로, 로맨스+코미디, 멜로+뮤지컬 등)을 언급할 수 있지만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여성 주인공에 대한 이중 의식이다. 전후 혼란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던 1950년대에 한형모 영화의 여성 주인공들은 얼핏 보면 당대 가장 진취적인 여성들의 샘플처럼 보인다. (좌) <운명의 손> 중 마가렛/정애 / (우) <여사장> 중 요안나 <자유부인> 중 오선영 첩보멜로물인 < 운명의 손 >(1954)의 주인공 마가렛/정애는 북한 간첩이자 ‘양공주’로 남과 북의 이데올로기 어느 쪽에도 포섭되길 거부하고 개인의 욕망을 끝까지 추구한다. < 자유부인 >(1956)의 오선영은 교수 남편이 있지만 경제적 욕망과 결혼제도 바깥의 성적 욕망을 동시에 드러낸다. 이후에도 스튜어디스인 < 순애보 >(1957)의 인순부터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출판사 사장인 < 여사장 >(1959)의 요안나, 산부인과 의사인 < 남성 대 여성 >(1959)의 윤송희, 유도 유단자인 < 언니는 말괄량이 >(1961)의 안순애까지 여자 주인공들은 경제적 독립 속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아갈 만한 직업과 사회적 위치를 갖고 있다. 세련되고 도시적인 삶을 살아가는 여자 주인공들의 생활 묘사에서 ('남성혐오'를 포함한) 성적 욕망의 적극적인 표현, 서구문화의 소비, 자본주의 상품에 대한 갈망은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전문직 여성의 라이프스타일 혹은 자유분방하고 당당한 개성은 당대 여성 관객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형모의 영화는 일관되게 서사적으로 이들을 결국 순치시키고 처벌하며 가부장제 안으로 복귀시키는 결말을 갖는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하나같이 타락하거나 병적인 인간상으로 그려지며, 가부장의 그늘을 거부하는 경우 살인, 강간, 사기 등에 위협적으로 노출된다. 시대적으로 앞서간 여성 인물을 스크린에 가시화한 반면, 그만큼 처벌하고 순치시키는 과정도 선정적이고 폭력적으로 그려냈던 이중적 태도야말로 그의 작가성이라고 할 수 있다. 흥미로운 것은 현대적 여성의 매혹적 스펙터클은 길고 디테일하게 묘사되는 반면(사실 관객들이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바로 여성 주인공이 화려하게 전시되는 영화적 순간들이기 때문에), 순치의 과정은 서사적 비약이라고 느껴질 만큼 짧고 급작스럽게 그려진다는 것이다. 매혹적 스펙터클을 만들어 내는 긴 시간 동안 독립적이고 자유분방한 여성들은 사회의 성차별과 가부장제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설파하게 된다. 그러다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요구하거나, 남편의 물리적 힘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한 후 갑작스럽게 현모양처로 돌변하고, 자신의 욕망을 모두 헛된 꿈, 허영으로 환원한다. 영화도 그들이 자진해서 죄를 고백하고 가부장제가 지정한 자리로 재귀한다는 것이 영화 내적으로 설득력이 없을뿐더러 그저 감독 자신의 혹은 기성 사회의 바람일 뿐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현재 프린트가 남아있지 않아 영화를 확인할 수 없는 < 질투 >(1960)는 이와 같은 한형모의 작가성이 순도 높게 구현된 작품이다. 이 영화에서 현대성은 동성애이다. 동성애는 영화의 가장 선정적이고 호기심 갖게 하는 마케팅 포인트이자 결국은 교정되고 처벌받아야할 대상이다. 당시 신문광고에 실린 영화의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실려 있다. “이성애의 공포가 동성애로 변한 것은 세계적인 풍조일까?” -《동아일보》 1960. 5. 25. “동성연애서 엉크러지는 일대의 질투, 국제무대에 파문을 던질 최고 이색편!” -《경향신문》 1960. 5. 7. 두 번째 문구가 적혀있는 포스터가 1960년 5월 22일자 《동아일보》에도 실려 있다. 즉 동성애를 세계적이고 국제적인 유행과 동시대성으로 연관시키며 선정적인 호기심을 부추긴다(유명한 여성 동성애 영화 두 편, 오드리 햅번과 셜리 맥클레인 주연의 < 아이들의 시간 >(윌리엄 와일러, 1961)이 1961년 할리우드에서, 로미 슈나이더 주연의 < 제복의 처녀 >(게자 본 라드바닐, 1958)가 1958년 독일에서 개봉했다). 동성애는 이 영화의 세련된 차별점이다. <질투>는 한국영화사에서 영화제작과 개봉이 확인된 최초의 레즈비언 영화라고 할 수 있다. 한형모의 다른 여성 주인공들처럼 이 영화의 재순 역시 주장이 분명하고 자기 욕망이 무엇인지 명확하게 알고 있는 여성이다. 한형모는 배우 문정숙에게서 톰보이 기질 혹은 여성의 남성성을 포착하며 <질투>와 <언니는 말괄량이>에 연이어 출연시킨다. 문정숙 이 맡은 재순과 안순애는 모두 부치 레즈비언 혹은 남성성을 드러내는 여성으로 볼 수 있다. 두 영화 모두 그 이유를 '남성혐오'에서 찾는다. 특히 <질투>의 재순은 한국전쟁 당시 강간을 당하고 병적으로 남성을 증오하게 되었다고 대사 속에서 기술된다. 입양된 동생인 금이( 전계현 )에 대한 집착에 가까운 사랑, 즉 동성애는 독자적 욕망일 수 없으며 필히 이성애의 대체제로만 가능하다. 여성 동성애는 '남성혐오'의 병적 증상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모두 재순이나 금이 등 여성 인물이 아닌, 집안의 가부장인 오빠 재수와 정신과 의사의 해석일 뿐이다. 오히려 금이에 대한 자신의 욕망을 분명히 표현하는 재순은 과거의 일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다. 재순은 그저 금이를 사랑할 뿐이며, 그것이 폭력적 집착일지라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금이를 위할 선택을 할뿐이다. 금이에 대한 사랑과는 별개로 이성애 결혼과 남편에 순종하는 아내의 역할을 강요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재순은 여성에게 결혼이 왜 부정적인지 논리적으로 설명한다. 재순은 오빠의 아내인 남이( 김신재 )에게는 “난 여자가 남성의 노예가 돼서 하루 종일 그 봉사만을 위해서 산다는 것이 행복하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요”라고 한다. 또한 금이의 약혼자 광호의 어머니에게는 “어머니도 여자분이니까 그 점을 아실 겁니다. 우리들의 어머니나 할머니가 남성들한테 받아온 압박을 금이한테까지 당하게 할 순 없단 말이에요”라고 말하며 여성들의 동의를 구한다. 놀랍게도 서사적으로 볼 때 적대 관계에 있음에도 광호의 어머니는 “나도 그 마음을 모르는 바가 아니지만”이라고 답한다. 적대관계에 있는 여성들의 동의마저도 얻어내며 여성들을 규합하는 재순의 말은 여성 관객들을 머리와 마음을 흔들었을 것이다. 또 금이의 장래와 관련해 재순은 “훌륭한 음악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재수는 “훌륭한 가정부인이 돼”야한다고 대치한다. 재순은 성폭력 트라우마의 증상을 보이지 않으며 남성과의 만남에서도 두려움이 없고 합리성에 근거해 이성애중심주의와 가부장제를 정확하게 비판한다. <질투> 중 재순과 이금 (박승배 촬영감독 기증) 재순은 친동생처럼 함께 자란 금이와 정서적으로 친밀한 관계를 쌓아왔으며 한 방을 쓰면서 육체적 관계도 가진 것으로 암시된다. 또한 재순의 문제가 “동성연애”냐고 재수가 묻자 금이는 긍정을 표하며, 금이의 옛 이웃 광호가 등장하며 단순한 S 언니-동생 사이에서 “동성연애”로 관계 혹은 욕망이 바뀌었음을 암시한다. 금이와 재수 사이에 이어지는 대사는 재순을 병리적 인물로 보고 있지만, 동시에 재순과 금이의 관계가 단순한 자매애나 여성적 친밀감을 넘어섰음을 분명하게 인지하고 재차 확인한다는 점에서 통쾌하게 느껴진다. 게다가 금이는 “사랑은 역시 이성에게서 느끼는 애정만이 인생을 즐겁게” 한다며 재순과의 동성애 관계와 광호와의 이성애 관계를 비교적 대등하게 놓고 비교한다. 한형모가 견지하는 선정성과 현대성, 서구의 유행에 대한 호기심과 물신화, 그리고 언제든지 순치시킬 수 있다는 가부장제적 자신감은 동성애라는 욕망을 매우 선명하고 직접적으로 가시화할 수 있게 한다. 게다가 재순의 (이해 불가능한) 동성애를 설명하려는 의도는 곧장 가부장제와 결혼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으로 이어진다. 관객들은 재순의 사랑에 공감하는 것을 넘어서, 혹은 그에 앞서 그의 논리에 설득당하게 되는 것이다. 재순의 질투와 집착은 지나치게 커지고 금이와 광호의 결혼을 막기 위해 살해 시도까지 간다. 재순의 폭력성은 그의 남성성의 표현이 된다. 재수와 금이는 재순을 정신병원에 입원시켜 약물치료를 통한 동성애전환치료를 받게 한다. 명목상으로는 성폭력 트라우마와 '남성혐오'를 고치는 것이라고 나오지만 결국은 동성애를 이성애로 교정하고 순치시키는 폭력이 된다. 재순의 사랑의 원인은 재순 스스로 말하듯 그저 사랑에 기인할 뿐이다. 그것이 파괴적 사랑이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 폭력적 교정은 매우 짧은 하나의 결말 장면으로 묘사된다. 시간을 건너뛰어 급하게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면에서 동성애전환치료를 ‘성공적으로’ 마친 재순은 금이와 재수, 재순을 좋아하던 영기와 의사가 모인 앞에서 “꿈에서 깬 것 같다”라고 말한다. 공격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 많고 논리적이던 재순의 저 응축된 한 마디 대사는 문자로만 표현되어 있지만 공허한 눈을 목격한 것처럼 느껴진다. 병원장면은 논리와 설득력이 부재한 데우스 엑스 마키나이며 아이러니한 연극이며 그로테스크한 악몽이다. 재순은 앞의 긴 시간이 꿈이라고 했지만, 실은 병원장면이야말로 허상이자 꿈처럼 느껴진다. 한형모가 반복적으로 결말에서 여성들을 처벌하고 순치시키며 가부장제와 강제된 이성애로의 자리로 보내려는 시도는 실은 반복적으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다. 관객들이 결말의 보수적 안전함 속에서 주목하고 환호했던 것은 바로 ‘꿈’과 '병증'으로 취급된 동성애 욕망이기 때문이다. 조혜영(영화평론가) l 영화적 순간들을 공유하고자 글을 쓴다. 영상문화 기획연구 단체 '프로젝트38' 연구원, 『원본 없는 판타지』(2020), Mediating Gender in Post-Authoritarian South Korea (2024) 등 공동 집필.
* 본 글에는 < 연애소설 >과 < 텔 미 썸딩 >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 한국 장르영화에 이전에는 볼 수 없던 성소수자들의 가시화가 갑작스럽게 늘어나기 시작했다. 특히 한정된 시공간에 허용된 젊은 여성들의 낭만적 동성애는 대중적 정서를 크게 위협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움을 가미해줄 수 있는 장르적 도구로 종종 사용되었다.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김태용, 민규동, 1999)와 <텔 미 썸딩>(장윤현, 1999)이 그 시작이었다. 두 영화는 2000년대 장르영화에 등장한 레즈비언 캐릭터들의 원형을 잘 보여준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는 학교라는 억압적 시스템과 어린 여성들의 사랑, 우정, 질투, 불안, 분노 등의 복잡한 감정을 공포영화의 장르적 약호로 그려내 컬트팬을 양산했다. 이 영화에서 여성 동성애는, 그들 관계의 주 무대가 되는 학교 옥상이라는 열려 있지만 비밀스러운 공간처럼, 불안정하고 비규범적인 저항 가능성의 지점이 된다. 그러나 십대와 학교라는 특정 시공간에 한정된 여성 동성애의 초상이 ‘여고괴담 시리즈’와 이후 유사 영화들에서 반복되면서 역설적으로 여성 동성애에 대한 상상력이 제한되는 효과를 낳기도 했다. 이러한 반복된 재현은 여성 동성애가 강력한 규범 체제에 대한 십대 사춘기의 반항이자 안정된 이성애 체제로 편입되기 위한 일시적 통과의례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여성 동성애는 학교 밖에서는 불가능하거나 허용되지 못한다.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에서 시은(이영진)과 동성애 관계에 있던 효신(박예진)의 자살 후 아이들은 전염병처럼 귀신에 들린다. 여기서 동성애 욕망은 쉽게 감염되고 임시적이고 제의적인 것이며 그래서 정체성으로는 기입할 수 없다. 엔딩에 등장하는 학교 지붕을 덮칠 정도로 거대해진 효신의 유령은 아이들이 학교라는 공간을 떠나지 못하게 만든다. 아니면 효신은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고 지속하기 위해선 유령이라는 형상으로라도 학교에 남아야 하는 것일까? 학교를 떠나지 못하는 레즈비언 유령은 이후 ‘여고괴담 시리즈’에서 반복된다. 동성애 관계가 2세대에 걸쳐 등장하는 < 여고괴담 4-목소리 >(최익환, 2005)처럼 말이다. 심지어 성인이 되어서도 자신의 동성애 욕망을 재자각하기 위해서는 교사로서 학교로 돌아와야만 한다. 그들은 레즈비언이 되기 위해 그 공간을 떠나지 못한다. 한편 스릴러 장르인 <텔 미 썸딩>은 캐릭터와 서사에 여성 동성애가 기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게 비밀로 꽁꽁 숨겨놓다가 연쇄살인의 전모가 마침내 밝혀질 때 핵심적 실마리로서 폭로된다. 사실 남자 주인공인 조형사(한석규) 입장에서나 폭로이지 채수연(심은하)과 그녀를 사랑해 남자연쇄살인을 도운 오승민(염정아)은 영화 내내 진실을 말한다. 여기서 관객들은 그 관계를 진작 상상할 수 있었던 자들과 그렇지 않은 자들로 나뉘게 된다. 영화는 분명 타겟 관객을 조형사에 동일시되어 동성애 관계를 알아채지 못한 이들로 상정한다. 그렇지 않으면 동성애가 반전으로 작동할 수 없다. 냉철한 추리력으로 정평이 난 조형사도 여성 동성애는 상상력 밖에 있다. 채수연은 승민과의 동성애 관계를 조형사에게 여러 번 흘린다. 심지어 수연은 아버지에게 성적 학대를 받던 자신의 집에서 승민을 처음 만나던 순간을 자세하게 진술한다. 그 아이가 승민이라는 사실을 제외하고서 말이다. 여기서 플래시백이 삽입되고 아이의 성별이 남자인 것처럼 묘사되면서 의도적 오인을 유도한다. 그래서 그 주관적 플래시백이 수연의 것인지, 아니면 수연의 이야기를 듣고 상상한 조형사(와 동일시된 관객)의 것인지 모호하다. 여자 둘과 남자 한명의 관계 속에서 여성 동성애 관계를 숨겨놓았다가 뒤늦게 폭로하는, 그래서 동성애는 과거의 비밀이 될 수밖에 없는 이러한 서사구도는 2000년대 영화들에서 종종 발견된다. <연애소설>(이한, 2002), < 철없는 아내와 파란만장한 남편 그리고 태권소녀 >(이무영, 2002), < 주홍글씨 >(변혁, 2004), < 끝과 시작 >(민규동, 2009)이 그 영화들이다. 이 영화들 역시 결국은 이성애 관계가 서사를 추동시키는 큰 틀이 되면서 ‘여고괴담 시리즈’처럼 여성 동성애를 한 때의 ‘순수한 감정’으로 보존하는 동시에 대상화한다. 흥미롭게도 이 영화들에서 여성 동성애는 과거의 것이고 변하지 않기 때문에 순수의 결정체로서 대상화 되지만 그래서 궁극의 진정성을 갖게 되고 언제든 내부로부터 서사를 불안정하게 만들 잠재성을 갖는다. 위의 영화들 중 이십대 초반의 여성 두 명과 남성 한 명이 주인공인 <연애소설>은 오랜 투병생활로 아직 성인이 되지 못한 십대들을 보는 것 같은 풋풋함을 그리고 여성 동성애라는 비밀의 폭로가 영화 전체의 서사구조를 뒤흔드는 측면에서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와 <텔 미 썸딩> 모두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오프닝부터 프레임 속 프레임으로 창문 밖 풍경을 비춰주며 시작하는 이 영화는 사진을 주요한 소재이자 주제적 메타포로 사용한다. 사진은 순수했던 순간을 결정화하는 동시에 그 프레임 바깥에 있는 맥락이나 다른 진실을 지워버린다. 서사구조에 있어서도 프레이밍은 중요한 장치가 된다. <연애소설>은 영화 전체가 지환(차태현)의 지속적인 플래시백, 즉 지환의 주관적 프레이밍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영화가 시작하는 시점에서 20대 후반인 지환은 택시기사를 하며 등록금을 벌어 어렵게 학업을 이어가고 있다. 어린 시절 순수하게 좋아했던 사진도 그만두었다. 그러던 중 직접 찍은 흑백사진에 하얀색 물감으로 쓰인 편지 한 장을 받는다. 주소도 이름도 없지만 짐작 가는 이가 있다. 사진은 과거를 상기시키고 이때부터 지환의 플래시백이 시작되며 영화는 현재와 5년 전을 오고간다. 5년 전 지환은 아르바이트하던 카페에서 수인(손예진)을 보고 한 눈에 반해 뒤따라가 고백하지만 곧 거절당한다. 이후 수인과 늘 함께 다니는 경희(이은주) 그리고 지환은 절친한 친구가 된다. 지환은 처음에는 청순하고 조용한 스타일의 수인에게 반하지만 이내 활발하고 명랑한 경희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경희는 처음부터 지환을 좋아했기에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일만 남게 된다. 그러나 어린 시절 내내 몸이 아파 늘 조심하며 살았던 수인과 경희가 일생의 일탈처럼 지환과 여행을 갔다 온 이후 수인과 경희는 연락이 끊기고 지환은 영문을 알 수 없는 채로 홀로 남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 요약된 서사는 지환의 관점에서 기술된 것이다. 이 영화에는 두 개의 비밀과 폭로가 등장한다. 하나는 수인의 첫 사랑이 경희로 첫 만남부터 죽을 때까지 경희를 사랑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수인과 경희가 서로의 이름을 바꿔 불러왔다는 것이다. 즉 수인의 본명은 경희이고, 경희의 본명은 수인이다. 이 사실을 알지 못했던 지환은 현재 시점에서 수인과 경희를 수소문할 때 경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라게 된다. 그러나 곧 (경희가 본명인) 수인(손예진)이 죽었다는 진실을 알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상상 가능한 일부 관객들은 여성 동성애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아챌 수 있게 하면서도 대부분의 관객들에게는 비밀이 폭로되지 않도록 의도적인 오인 장치들을 흩뿌린다. 그것은 스테레오타입을 뒤집는 것이다. 긴 생머리, 프릴 달린 흰색 블라우스와 치마, 기운 없는 목소리, 얌전하고 의존적인 태도를 가진 수인은 겉보기에는 이성애 남성의 관습적인 이상형을 구현해 놓은 모습을 갖고 있다. 반면 짧은 머리에 늘 바지를 입고 히피 스타일의 장신구를 착용하며 직설적이고 크게 웃는 경희는 상대적으로 더 병약한 수인을 챙긴다. 경희는 전형적인 톰보이다. 전형적인 스테레오타입에 따르면 수인은 이성애자이고 경희는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 맞다. 그러나 정작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는 수인이고 경희는 지환을 사랑하는 이성애자(혹은 양성애자)이다. 영화는 수인과 경희가 이름을 바꿔 부르고 지환의 사랑이 수인에서 경희로 바뀌는 것처럼 관계와 욕망을 지속적으로 부인하고 불안정하게 만든다. 영화는 전체적으로 지환의 주관적인 플래시백으로 구성되지만 유일하게 지환의 것이 아닌 플래시백 장면이 있다. 수인과 지환이 단둘이서 각자의 첫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수인은 경희와의 첫 만남을 묘사한다. 그러나 그 아이가 경희라는 사실은 밝히지 않는다. 플래시백에서 경희는, 분홍색 환자복을 입고 머리가 긴 수인과 비교해 파란색 환자복을 입고 민머리를 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남자아이로 오인되게 만든 이 장면에서 <텔 미 썸딩>의 조형사처럼 지환에게 동일시된 관객은 수인의 플래시백을 관람하게 된다. 이 플래시백 역시 수인의 주관적 플래시백인지 지환이 수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시각화한 것인지는 모호하다. 하지만 여기서 지환이 그 아이를 남자아이로 오인하고 있으며 수인의 첫 사랑이 경희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은 분명하다. 두 남자와 한 여자의 로맨스 이야기는 대부분 둘 다 사랑하는 여자를 교환하는 것으로 남성 동성관계를 공고히 한다. 그러나 지환은 교환되지 않는다. 수인은 지환을 욕망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수인과 지환 모두의 욕망의 대상이 되는 경희가 교환되는 것도 아니다. 경희는 초반에는 수인과 지환이 서로 좋아한다고 착각하고 지환의 사랑을 깨달은 후에는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랑은 오인의 과정에 놓이고 결국은 실패로 끝난다. 그럼에도 분명하게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고 발화하는 유일한 관계는 수인과 경희다. 수인은 경희에게 죽기 전 분명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경희도 수인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죽음으로 결부되고 서로의 이름을 바꿔가며 생존을 격려했던 둘의 사랑은 이성애적 사랑을 초과한다. 심지어 수인은 지환에게 자신의 사랑인 경희를 부탁하는 러브레터를 보낸다. 그 편지엔 경희가 좋아하는 것들이 적혀 있다. 아마도 잡지에 나와 있는 성격운세가 말했던 것처럼 수인은 한 사람에게 집착하는 성향이기 때문에 시한부가 아니라면 경희에 대한 사랑을 놓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수인과 경희를 시한부로 만들면서 여성 동성애 관계의 가능성을 한정시키는 한편, 시한부로 인해 역설적으로 그 욕망을 단단하고 숨김없이 드러낼 수 있게 한다. 오히려 가장 실패하고 가능성 없고 끝까지 무지에 빠져있는 것은 지환의 이성애적 욕망이다. 이 영화에서 여성 동성애는 가장 진정하고 순수한 사랑으로 이성애가 도달하지 못한 혹은 개발해야 할 (영화학자 레이 초우가 개념화한) ‘원시적 열정’의 장소가 되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더 선명하게 가시화될 수 있는 조건에 놓이게 된다. 두 여자가 한 남자를 사이에 두고 겨루거나 혹은 우정 때문에 양보하는 삼각 구도로 보였던 영화는 수인의 사랑의 대상이 경희라는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서사를 재구성하게 만든다. 언제 서사를 재구성하게 되느냐는 관객마다 다를 수 있다.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서 지환의 주관적인 플래시백으로 점철되어 있는 이 영화를 관객들 역시 다시 쓰게 된다. 지환은 그 새로운 정보를 끝까지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관객들은 지환에게서 벗어나 가장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레즈비언인 수인의 시점을 갖게 된다. 관객들은 수인의 레즈비언 편집술에 동화된다. 이 영화에는 시계바늘을 돌리는 행위가 반복되어 등장한다. 지환은 첫 눈에 반한 수인에게 고백 후 거절당하고 관계를 우정으로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 시계바늘을 거꾸로 돌리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경희는 수인이 죽은 후 장례식장에서 이유를 알 수 없는 후회와 슬픔에 벽에 걸린 시계의 바늘을 되돌린다. 수인은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시계바늘을 되돌리는 행위를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수인이 분명하게 자기 욕망을 발화하고 응답을 들은 인물로 후회 없는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 그 자체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성애 지배적인 사회에서 늘 자기만의 편집술을 육화할 수밖에 없는 동성애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자기 주변의 서사와 이미지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는 수인은 이 삼각관계에서 가장 많이 아는 자로(지환과 경희의 욕망, 그리고 자신의 욕망) 주어진 것들을 재편집해 사용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래서 수인은 지환의 플래시백으로 구성된 이 영화에 오인의 가능성을 품은 채로 자신만의 플래시백을 트로이 목마처럼 침투시킨다. 어떤 면에선 자기만의 (레즈비언) 편집술을 일상화하고 육화한 수인은 시계 그 자체가 되어 있기에 물리적으로 시계바늘을 돌릴 필요가 없다. <연애소설>은 결말에서 지환과 경희의 재회를 서사화하면서 뒤늦게 이성애 프레임으로의 봉합을 시도하지만, 이미 레즈비언 편집술의 역량을 경험하게 한 작은 플래시백의 침투는 의심과 실패 속에서 서사의 솔기가 끊임없이 뜯어지게 만든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흰 캔버스 위에 흑연을 든 손이 나타난다. 화가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그림을 지시하던 중 어떤 작품과 마주치고 누가 저것을 꺼냈냐며 묻자 카메라는 그 그림을 클로즈업한다. 그림의 제목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여인이 젖은 몸을 이끌고 섬 깊이 들어가 거대한 저택에 다다른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 저택에 온 여성 화가다. 언니의 운명을 물려받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와 그의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는 마리안느. 그는 모델이 되길 거부하는 엘로이즈에 의해 ‘산책 친구’로 위장하곤 엘로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며 초상화를 그린다. 엿본 얼굴의 조각들을 짜 맞추듯 완성한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그것이 자신과 비슷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혹평에 마리안느는 그림엔 ‘규칙과 관습’이 있다고 자신을 변호하지만, 그에 엘로이즈는 ‘생명력과 존재감’은 없냐며 되묻는다. 마리안느는 분에 차 그림을 뭉개버리고, 영화의 2막이 시작된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며 본격적인 초상화 작업에 들어간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응시하며 불꽃이 번져오르듯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엘로이즈는 응시하는 존재다. 그는 소피의 임신중절수술 현장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마리안느에게 고개를 돌려 마주하라고 말하며, 관찰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묘사하려는 마리안느에게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거듭 평등을 강조한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 세 여성이 나란히 담긴 부엌 신과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해 논쟁하는 신은 18세기 프랑스의 신분 제도를 배제해버린다. 한 폭의 명화 같기도 한 수평 앵글은 그 어떤 굴곡도 확대도 없이 고요하게 그들을 투과한다. 오직 타닥거리는 난롯불 소리, 세찬 파도 소리, 캔버스 위를 방황하는 붓 소리와 때때로의 정적만이 존재하는 화면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동등하고 평등하게 응시한다. 이러한 응시는 여태껏 남성적 시각에서 배척받아 온 여성의 이슈인 생리와 임신중절 또한 굴곡 없이 묘사한다. 소피의 임신중절수술을 재현해 그리자며 일어서는 엘로이즈를 따라 기억은 기록으로 진화하는데, 이는 여태껏 외면받아 온 여성의 역사에 대한 추상이기도 하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이는 복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 영화의 오프닝 속 마리안느다. 그는 엘로이즈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학생들 앞의 모델이 된다. 두 번째로 연주회장에서 울 듯 우는 엘로이즈의 옷은 저택서 조율이 안 된 피아노를 연주하던 마리안느의 옷과 닮아 있으며, 심지어 정사를 나누던 중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마리안느의 것처럼 검게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지속적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일체화함으로써 화가와 모델,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관계를 뒤집는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평등의 메시지와도 맞닿아있다. 뒤돌아봐. 마리안느는 자신 이전의 화가가 완성하지 못한, 얼굴이 지워진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불을 지른다. 마리안느가 붙인 가슴께의 작은 불씨가 캔버스에 번져 올라 엘로이즈를 삼키는 모습은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를 빨아들이는 지하 세계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지하 세계에서 자신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던 중 하데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뒤를 돌아봐 또다시 아내를 잃는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엘로이즈의 재해석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실상은 이렇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게 한 것은 그의 얕은 인내심이나 충동이 아닌, 에우리디케의 “뒤돌아봐요”라는 한마디 작별 인사다. 시간은 흐르고, 마리안느는 작별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담긴 그림을 출품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그림 속 오르페우스의 것과 같은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으며 에우리디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이는 마리안느가 마주한 엘로이즈의 마지막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헤어짐의 순간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말했다. “뒤돌아봐.” 엘로이즈는 지하세계에 남겨진 것일까? 그 옛 신화 속 에우리디케처럼. 뭐예요? 좋아하는 곡이요. 영화는 이들의 사랑을 다분히 정적으로 묘사한다.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절제된 채 묘사된 감정선은 영화 내에서 음악과 함께 두 번 고양되는데, 첫 번째는 하모니 신이다. 어두운 밤 모닥불 앞에 모인 여성들은 ‘그들은 도망칠 수 없다.’라는 노랫말을 반복해 부르며 하모니를 이룬다.(이 의문스러운 하모니는 상당히 성스럽고 웅대하게 들린다.) 이 음성과 함께 마리안느를 응시하던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이 붙고, 마리안느는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본다. 이 장면은 곧 마리안느에 의해 기억, 기록되며 추후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회상하며 그려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두 번째는 엔딩 신이다. 이별 후 마리안느는 연주회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를 마주한다. 영화가 시작된 이래 줄곧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던 음악은 일방적인 재회의 현장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외딴 작은 섬에서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소리로 연주되던 비발디: 사계 여름이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재연주되고, 동시에 관객은 줌 인하는 카메라를 통해 빨려 들어가듯 엘로이즈의 내면세계와 동화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배제되던 음악이 절정의 순간에 느닷없이 튀어 오르는 연출은 셀린 시아마의 전작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 걸후드 >에선 ‘Diamonds’가, < 톰보이 >에선 ‘Always’가, 그리고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에선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이 화면 밖으로 솟구치며 굴절을 만들어낸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 외딴 섬이라는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18세기 프랑스라는 시간적 배경과 맞물려 영화의 피륙을 낭만적으로 직조한다. 해안가와 저택을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독 공간적 배경이 강조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포스터 속 파도 신이다. 이별을 앞둔 것을 실감한 후 다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거센 파도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흐느낀다. 이때 그들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파도와 파도 소리는 이들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허나 이 판타지적인 시공간적 배경과 대조적으로 이들 멜로의 결말은 꽤나 사실적이다. 이 파도 앞에서 마리안느는 용서해달라 말한다. 결혼하지 말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손을 잡고 몰래 섬을 빠져나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같은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이별을 선택한 것처럼 사랑의 도피가 아닌 일주일간의 추억을 택하며,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기를 약속한다. 사랑에 빠진 순간은 결코 명확할 수 없다. 그들이 처음 얼굴을 마주한 바닷가에서였는지, 은밀히 훔쳐본 얼굴을 되짚어보며 캔버스에 옮기던 낮이었는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던 밤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을 후회하지 않고 기억할 뿐이다. 나아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함께 행하는 그리기는 휘발성을 지닌 기억을 영구적이며 쌍방향의 입체성을 띠는 기록으로 승화시켜낸다. 어떠한 굴곡도 확대도 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그려진 사랑. 고요한 응시와 약간의 흑연으로 ‘기록’된 28페이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