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랜스포머2> 내한 현장
- 제작년도
- 2009
윤가은 감독은 2016년 여자아이들의 우정을 역동적으로 그려낸 < 우리들 >로 큰 주목을 받으며 장편 데뷔를 했다. 이미 단편 < 사루비아의 맛 >(2009), < 손님 >(2011), < 콩나물 >(2013)에서 여자아이들의 감정과 모험을 다룬 윤가은 감독은 최근작 < 우리집 >(2019)에서도 각자 집에 해결할 문제를 안고 있는 하나와 유미·유진 자매를 통해 집과 우리의 의미를 묻는다. 이렇게 여자아이들의 다양한 관계와 삶을 다룬 연작으로 윤가은 감독은 ‘우리 유니버스’라고 칭해지는 하나의 세계를 구축한 새로운 세대의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우리 유니버스’는 10대 여자아이들의 삶이 얼마나 영화적이고 스펙터클한지, 그리고 얼마나 할 이야기가 많은지를 증명한다. <우리들>의 오프닝 장면을 보자. 블랙 스크린이 지속되는 첫 쇼트는 여러 아이들이 각자 자기 팀이 될 멤버를 뽑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하는 소리를 들려준다. 서로 자기를 먼저 뽑아달라는 대사와 뽑히지 못해 아쉬워하는 한숨소리가 뒤섞인다. 그리고 이어지는 두 번째 쇼트에서 관객은 불안과 긴장으로 가득한 선의 얼굴을 만난다. 더티 싱글의 롱테이크로 연출된 이 클로즈업 쇼트는 선의 얼굴 주변 배경으로 프레임 인 & 아웃과 포커스 인 & 아웃이 반복되며 시끄럽게 장난치는 다른 아이들의 무신경함과 말없이 눈치만 보는 선을 대비시킨다. 아이들은 선을 대놓고 따돌리진 않지만 굳이 한 팀이 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선은 속상하지만 티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쓴다. 화면 밖에서 마지막 가위바위보가 이뤄지고 선은 끝까지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선을 데려가게 된 아이는 선을 다른 아이와 바꿔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이 장면은 자존심 상하고 주눅 들지만 끝내 무너지지 않으려는 10대 여자아이의 변화무쌍한 감정을 정확하고 강렬하게 그려낸다. 단 두 개의 쇼트로 구성된 이 오프닝 장면은 10대 여자아이가 은근하게 따돌림 당하는 환경과 감정, 배경과 인물, 외면과 내면을 모두 가시화하며 한 여자아이의 미묘한 감정의 변화를 단숨에 드라마틱하고 스펙터클한 사건으로 만들어 버린다. <우리집>도 이와 유사하게 오프닝을 연다. 블랙 스크린으로 시작한 오프닝 장면은 불안하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 한숨소리, 밥 먹는 소리, 매미소리가 레이어를 만들며 점점 사운드가 쌓여가는 가운데 그 꼭지점에서 엄마아빠가 싸우는 소리와 함께 주인공 하나의 얼굴이 클로즈업으로 등장한다. 이 장면은 온전히 어찌할 바 모르는 하나의 불안한 감정과 수심에 가득 찬 얼굴에 집중하고 있지만 동시에 아이들이 얼마나 주변의 상황에 예민하게 반응하는지를 보여준다. <우리들>이 두 여자아이의 우정에 대한 영화라면 <우리집>은 여자아이들에게 돌봄과 ‘우리’라는 공동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하는 영화다. 이 영화는 10대 여자아이를 통해 돌봄이 고단한 노동일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주변을 살피는 관찰의 제스처이며, 친밀감, 공동체 구성을 통한 안정감, 문제해결의 성취감, 선행의 인정욕구, 서로를 간섭하는 데서 오는 짜증, 자기 욕망과 강제된 성별역할 사이의 혼란 등 다양한 상태와 감정을 포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우리들>에서도 사용되었던 사운드로 화면 안과 밖을 끊임없이 연결하고 서로가 서로를 간섭하고 영향 받는 영화적 연출형식은 돌봄의 제스처와 정동을 체화한다. <우리집>의 주인공 하나는 나이는 어리지만 학교에서 선행상을 받을 뿐 아니라 방학숙제로 요리책을 만들고 실제로 타인을 위해 요리해주는 것을 즐긴다는 면에서 돌봄 능력이 뛰어나다. 하나는 자신의 재능을 발휘해 뿔뿔이 흩어지기 직전의 가족을 다시 ‘하나’로 만들고자 한다. 하지만 아무리 성숙한 하나라도 어른들에게 영향을 미치기란 쉽지 않다. 하나가 할 수 있는 건 밥을 차려 같이 먹자고 반복적으로 요청하거나 좋았던 시절의 추억을 살려 가족여행을 가자고 조르는 정도이다. 하지만 그조차 매번 실패한다. 그래서 하나는 유미와 유진 자매를 발견한다. 대형마트에서 하나는 꼼꼼한 관찰력으로 유미와 유진 자매에게 어른들의 일상적인 돌봄이 부족함을 알아챈다. 길을 잃어버린 유진을 찾아주며 친분을 맺은 하나는 화목해 보이는 유미와 유진의 집에도 문제가 있음을 알게 된다. 큰 경제적 어려움 없이 아파트에 사는 하나와 달리 옥탑방에 사는 유미와 유진이네 집은 잦은 이사를 다녀야 하는 처지이다. 이혼직전의 부모가 문제인 하나와 안정적인 거주조건이 부족한 유미는 서로의 집을 부러워한다. 셋은 <열차의 이방인>(1951)의 인물들처럼 서로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주기로 한다. 하나는 자신의 문제 해결이 힘들어질수록 유미와 유진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더 집착한다. 하나가 자매를 돌봐주는 데서 오는 기쁨과 만족감은 단순하지 않다. 부차적이긴 하지만 하나는 자매를 돌보고 문제를 해결해주는 데서 영향력과 능력의 성취감을 느끼며 자신의 가족 내에서 느끼는 무력감을 어느 정도 상쇄한다.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부모는 가족여행을 가기로 약속하지만, 하나는 곧 그것이 부모의 이혼여행임을 알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부모는 이혼 합의에 이르러서야 지난한 싸움을 멈춘다. 그러나 이혼이 가족의 해체로 이해되는 하나는 이 결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나는 가족여행 직전에 가출해 유미와 유진 자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행을 떠난다. 엄마 아빠를 만날 기쁨에 셋이 함께 모은 상자로 만든 된 집을 등에 진 어린 유진과 무력함과 상실감에 빠진 하나, 그리고 그 둘 모두를 걱정하며 돌보는 유미는 자매의 부모가 일하는 보리해변으로 떠난다. 길을 잃고 어딘지 알 수 없는 해변에 도착한 셋은 갈등이 폭발하고 유진이 갖고 온 상자집을 발로 짓이겨 부숴버린다. 오랜 시간 공들여 함께 만든 집을 부수고야 셋은 서로에 대한 비난을 멈추고 서로를 돌아보게 된다. 파괴가 오히려 새로운 우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자매의 집의 부동산 계약이 성사되지 않게 하기 위해 방문객들에게 아이들이 집에 대한 악평을 하고 방을 어지르는 해체적 방식을 썼던 것처럼 그들은 정형화된 집을 부수고 나서야 자기들만의 집을 찾는다. 하나는 마침내 새로운 집을 만들기 위해선 때로 해체와 파괴도 필요하다는 것, 집은 하나의 모양과 속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돌봄에 대해서도 하나는 자신이 일방적으로 유미와 유진을 돌봐주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유미 역시 계속 하나의 기분을 살피고 하나가 언니(리더)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돌봐주고 있음을 알게 된다. 돌봄에는 여러 결과 각도가 있다. 하나의 엄마는 직장과 가사 일을 모두 잘하는 수퍼맘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과 가부장제적 압박에 지쳐 하나의 돌봄 행위가 가부장제가 강요하는 성별역할을 벗어난 다른 결과 감정이 있다는 것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하나가 성별고정관념 때문에 돌봄을 순순히 여자아이의 역할로 받아들이거나 문제해결을 돌봄을 통해서만 하려는 건 아닌지를 고민하고 걱정하는 하나 엄마의 감정 또한 여자아이와 관련된 돌봄의 정동이다. 집을 지키고 서로를 돌보고자 하는 세 여자아이의 모험은 집을 고정된 것이 아니라 이동과 모험의 공간으로 변모시킨다. 고전 주류 서사는 끊임없이 여성을 집(돌봄)과 일치시키면서 공간화화하고 정주시키며 모험을 떠나지 못하게 만들었다. 반면 남성은 모험을 떠난 길 위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리더십을 시험하고 개인 영웅으로서의 성장서사를 만든다. <우리집>은 집과 길, 정주와 모험, 유지와 성장 중 양자택일을 강요하지 않는다. <우리집>은 집과 돌봄의 주제, 그와 관련된 감정과 관계를 버리지 않으면서 여자아이들의 모험의 서사를 만든다. 그를 위해 집을 트랜스포머처럼 이동시키고 해체하고 모험의 공간으로 만들며 때로 추상화한다. 유진의 상자집처럼 말이다. 셋이 해변가에서 우연히 만난 캠핑장의 텐트처럼 집은 얼마든지 모험적인 소재와 주제가 될 수 있다. ‘길 위의 집’의 모험을 통해 하나는 ‘우리’를 다양하게 구성할 수 있게 되는 성장을 한다. 하나는 엄마아빠가 이혼해도 다른 모양의 가족을 구성할 수 있음을 받아들이고, 자기 가족 외에 우정으로 이어진 ‘우리’를 소중히 여기며, 물리적 공간이나 제도적 구속력이 ‘우리’를 떠받치는 유일한 조건이 아님을 알게 된다. 하나는 마지막까지 가족들에게 밥을 차려주며 새로운 ‘우리’를 만들어갈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하자고 제안한다. 그 모험의 여정에서 하나는 돌봄의 가치를 완전히 버리지 않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의 리더십을 시험하고 ‘우리’를 다양하게 구성하며 성장서사를 이끌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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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1. 2015년, 뜬금없이 눈앞에 다시 나타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의 매혹이 무엇이었는가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36년 만의 귀환이다. 특히 1981년에 개봉했던 < 매드 맥스 2 >와 비교하자면, 이 영화는 크게 새로울 것도 없어 보인다. 이미 이 당시 <매드 맥스 2>는 묵시록 이후, 디스토피아적 미래를 펼쳐내면서 당대 유행했던 사이버 펑키한 미래가 아니라 오히려 흙먼지 날리는 웨스턴의 풍경으로 되돌렸었다.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낙후할 것이며, 이성과 합리성이 아니라 동물적 생존 본능과 폭력의 강인함이 지배할 것이라는 잔혹한 비전은 당대 날것처럼 생생했다. <매드 맥스 2>는 영화의 혼종성이 성취할 수 있는 쾌감을 이미 보여준 작품이었다.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풍경으로 제시되었다. 불모한 서부의 풍경이 미래 사회의 폐허를 대체한 것이다. 보수주의가 득세했던 80년대 초의 살벌한 정치 사회(신보수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공세)는 야만과 폭력이라는 무정부 상태와 디스토피아적 환상으로 제시되었다. 이러한 폐허의 풍경을 지배하는 것은 단 하나! 속도전이었다. 지금 이 영화 속에서 당신이 보고 있는 세계가, 과거가 아니라 미래임을 상기시켜주는 것은 ‘자동차’로 대변되는 문명의 흔적뿐이었다. 굉음과 속도로 질주하는 그것은 그들의 권력과 생존의 유일한 무기이자, 사실 이 영화 <매드 맥스 2>에서 가장 중요한 스펙터클의 동인이 되는 것이다. 2015년에 귀환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다시금 그 지점으로 되돌아간다. 서사의 측면이나 자동차를 중심으로 한 속도전의 전략에서 이 영화는 더 이상 새로울 것도 없다. 이 영화 개봉 이후 많은 글들이 페미니즘적 요소와 대사가 필요 없는 무성 영화적 수사학에 대해 이야기하였으나, 과연 그러한 요소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이 영화를 쾌락할 수 있게 하였는지는 의문스럽다. 이 영화가 즐거웠던 것은 여성들이 연대하고 해방을 이끌어서도 아니었으며, 또한 대사가 억제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무성영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이 영화를 설명하는 좋은 근거도 되지 못한다. 2. 최근 할리우드에서 제작되는 영화들 중 유독 나의 주목을 끄는 작품들이 있다. 할리우드의 대자본과 기술적 숙련도, 그리고 산업 내 작가주의적 성향을 지닌 감독들에 의해 추동되는 일련의 SF 대작 영화들 말이다. < 프로메테우스 >의 리들리 스콧, < 그래비티 >의 알폰소 쿠아론,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 그리고 이미 오래전부터 ‘가능한 미래’를 재현해 왔던 < A.I. > < 우주전쟁 > < 마이너리티 리포트 >의 스티븐 스필버그. 이들과 좀 다른 위치에서 주목할만한 감독으로서는, ‘쾌락’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정치적 올바름이나 이데올로기 문제란 개의치 않는 마이클 베이, 올드한 리버럴리스트 마인드와 고전적 영화 서사를 고수하는 < 아바타 >의 제임스 캐머런, 그리고 애니메이션과 실사(live action) 영화의 경계가 무너졌음을 이미 오래전부터 개의치 않고 작업하고 있는 < 하늘을 걷는 남자 >의 로버트 저메키스. 그리고 드디어 36년 만에 자신의 존재를 새삼 입증한 < 매드 맥스 >의 조지 밀러가 그중 한 명이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위에서 열거한 작품들 중 어느 한 지점과 유사점을 찾아야 한다면, 아마도 손쉽게 언급될 수 있는 것이 리들리 스콧의 < 프로메테우스 >일 것이다. 70년 이상의 삶을 훌쩍 살아낸 두 노장들이 할리우드 내에서 여전히 대규모 예산의 SF영화들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할리우드 시스템의 노련함과 영악함에 경탄하게 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두 감독은 이제는 ‘아날로그’로 치부되는 이미지의 ‘물질성’에 천착하는 감독들이다. 흔히 ‘실재의 힘’ 또는 ‘지표(index)의 힘’(퍼스와 마노비치의 개념으로서)이라고 부를법한 그들의 영화적 스펙터클의 공통점은, 영화란 여전히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찍는 것’이라는 데에 방점을 둔다는 점이다. 70년대부터 영화계에 적용되기 시작한 디지털 테크놀로지는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훨씬 더 급진적으로 영화계 전반을 대체해가기 시작했다. 필름의 역사로 대변되는 영화의 프로-필르믹한 속성(실재를 기록-촬영한 것)은 디지털카메라와 제반 기술의 변화로 더 이상 ‘찍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에 기반한 ‘그리는’ 작업으로 대체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캐머런 감독의 판도라 행성도, < 스타워즈 >의 우주공간도, 마이클 베이의 ‘트랜스포머’도 모두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실체일 뿐이다(이런 점에서 애니메이션과 차이가 없다). 그러나 < 프로메테우스 >와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두 노장들은 여전히 영화적 이미지를 ‘찍는’ 행위에서 창조하고자 한다. 그들은 카메라 앞에 실재하는 대상이 발휘하는 물질적 크기와 중력의 힘을 믿는다. 그 묵직한 존재감이 카메라를 통해 포착되면 관객에게 이미지와 시각 사이의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음을 그들은 증명한다. (< 인셉션 > < 인터스텔라 >의 크리스토퍼 놀런도 대부분 실제 이미지를 찍는다) 그리고 시네필임을 자처하는 이들은 그 긴장이 여느 그려진 세계들과는 차원이 다른 체험이었다고 믿는다. 그러나 간혹 의구심도 생겨난다. 괴력의 영화적 체험을 제공했던 <프로메테우스>나 < 매드 맥스 >의 힘은 정말 ‘실재의 힘’, ‘찍는’ 영화적 힘에서 생겨난 것일까? <인톨러런스>(위) <카리비아>(아래) 3. 폴 비릴리오의 「전쟁과 영화」 중, “영화, 그것은 ‘나는 본다’가 아니라 ‘나는 난다’이다”라는 흥미로운 대목이 나온다. 비릴리오는 비행술과 영화가 19세기 말, 거의 동시에 등장했다는 사실과, 미래파의 속도와 운동에 대한 집착이 어떻게 영화적 비전과 유사한지, 무엇보다도 전쟁과 비행과 시각 사이의 접합으로서 항공투시법의 순간성과 ‘질주하는 관찰’이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특히 이를 설명하는 중에 D.W 그리피스의 좌절에 대해 언급한다. 그리피스가 < 인톨러런스 >라는 작품으로 위대한 걸작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무렵, 뒤늦게 미국에서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 지오바니 파스트로네의 1914년 작 < 카비리아 >를 보고 의기소침해진다. 그 영화에 비하면 자신의 영화가 너무 뒤처졌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카비리아>는 “기술효과와 시점 촬영의 역동적 완벽성을 높이기 위해 시나리오의 내러티브적 특성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작품이었다. 파스트로네는 3차원적 공간에 집착하면서, 카메라를 지속적으로 움직여 시각적 구도를 분리함으로써 깊이의 환상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다. 또한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동 촬영기(카렐로)를 사용하고 남용하면서, 카메라가 사물의 크기와 차원을 조작하고 위조하는 것임을 보여주었다”(전쟁과 영화, 60-62p) 나에게 흥미로운 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영화가 창조하는 시간과 운동. 그리고 속도의 문제. 이러한 키워드는 위에서 언급한 최근 할리우드 특수 장르 영화의 디지털 미학으로서 주목받는 지점과 다시금 연결된다. < 그래비티 >의 탈육화된 롱테이크 쇼트와 유동적 프레이밍, 이냐리투가 < 버드맨 >에서 위장된 롱테이크를 통해 만들어내는 공간의 통제와 시간의 재창조, < 인터스텔라 >에서 과학적 근거를 제시하며 병렬하거나 중첩된 어떤 것으로 간주되는 시간적 디제시스, 그리고 이 영화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제시되는 속도와 시간. < 매드 맥스 >에서의 시간 역시 여러 층위로 구성된다. 일단 두 시간에 달하는 러닝 타임으로서의 시간, 영화적 디제시스에서 제시되는 비확정된 미래사회-포스트 묵시록적 세계의 시간, 그리고 각 쇼트가 각자의 자율성(고속과 저속 촬영 등)을 통해 획득하는 파편화되고 분리된 시간. 그런데 이 모든 시간에 대한 창조와 감각은 하나의 목표로 집중된다. 그것은 ‘속도’라는 개념이다. 다시 비릴리오로 돌아가자면, 그는 영화가 사진과 다른 지점을 카메라의 운동이 만들어내는 시점의 유동성에서 읽어낸다. “영화에서 가짜인 것은 원근법의 효과가 아니라, 깊이 그 자체이며, 투사된 공간의 시간 거리다. 여기서 속도는 이미지의 본원적 위대함으로써 나타나며, 깊이의 근원으로서 나타난다” <제너럴>과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의 기계 4.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를 초창기 영화와 연결짓는 지점은 대사의 억제가 아니라 이 영화가 온전히 영화라는 매체의 시간체험(속도체험)을 목표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초창기 영화연구에서 제기된 일명 ‘매혹의 시네마’라는 개념은 오늘날 디지털로 재구성된 영화 전략의 주요 수사학이기도 하다. 초창기 영화 관객들에게 영화가 제공했던 것은 서사나 주제의식이 아니라, 영화라는 매체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였다. 이전에는 경험하지 못했던 새로운 매체-시각 ‘체험’, 그리고 그 체험의 핵심에는 영화가 현실의 속도와는 대비되는 새로운 속도를 구성하고 질주한다는 점이 중요하게 자리 잡았다. 열차 체험이 근대적 시각 경험의 혁명이었던 것처럼, 영화 역시 <열차의 도착>과 함께 관객들에게 도착했다.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라프 상영관에서 관객들이 정면으로 다가오는 열차에 놀라 뒤로 도망쳤다는 그 유명한 일화는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당대 관객들 역시 자신들이 보는 것이 환영이고 가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이 놀란 것은 이미지의 사실성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지각하는 이미지 매체의 낯섦이었다. 낯선 이미지 형식이 제공하는 두려움과 경이. 그것이 근대의 새로운 ‘경험 형식’으로 자리 잡게 된다. 이후 초창기 영화는, 할리우드가 영화를 서사적 체계로 표준화하기 이전, 지각과 경험의 새로운 ‘형식 그 자체’로서 소구되었다. 이 형식은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새로운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구성하는 경이로운 매체였다. 버스터 키튼의 < 셜록 주니어 >에서, 꿈을 꾸는 영사기사가 스크린 내부의 세계로 들어가 경험하게 되는 시공간의 불가해 한 전환능력은 초기 영화적 매혹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리고 어쩌면 버스터 키튼이 < 제너럴 >에서 당대의 관객에게 전달하고자 했던 증기기차의 육중한 무게와 속도감, 무엇보다도 그 거대한 기계를 움직이는 인간의 지배능력은 2015년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가 취하고자 하는 것과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인다. 경험하는 영화: <그래비티>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하늘을 걷는 남자> 5. < 제너럴 >에서 버스터 키튼은 질주하는 증기 기관차를 빈번하게 부감의 롱숏으로 제시한다. 이 거대한 기계와 그것을 담아내는 공중에서의 롱숏은 관객에게 이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지배하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부여한다.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영화의 많은 쇼트들은 나미비아 사막을 조망하는 공중 쇼트로 구성된다. 미래사회의 폐허를 증명하는 쇼트들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관객에게 쇼트-이미지에 대한 지배의 위치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미지-지배에 대한 감각은 초기 영화에서 골똘했던 ‘경험’의 사실주의와 연결된다. 즉 자신이 보고 있는 이미지가 가짜임을 인식하면서 동시에 그 허구적 이미지를 진짜 경험으로 쾌락하는 이중적 인식의 문제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전략. 영화라는 매체를 진짜 경험처럼 느끼기 위해서는, 역설적이게도 매체의 흔적 자체를 지워야 한다. 매체의 새로운 형식을 쾌락하면서도 매체 자체를 지우는 일, 즉 ‘비매개적 매체’의 환각-가상성을 획득하는 일이다. 최근 디지털 시네마의 최전선에 있는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이 주력하는 것은 서사의 촘촘함이 아니라, 거대한 스펙터클의 속도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들이는 일이다. < 그래비티 >에서 한없이 지속되는 공중회전의 순환이나,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에서 단순하게 반복하는 추적의 스펙터클과 카니발적 회전운동을 구성하는 쇼트들에는 서사적 요소가 개입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메키스 감독의 <하늘을 걷는 남자>의 후반부, 오로지 텅 빈 공간을 오가는 행위 말고는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는 장면에 대해 관객들이 긴장을 늦추지 않고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힘과 결국은 같은 것이다. <그래비티>와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가 가속화된 시간에 대한 지배를 제공한다면, <하늘을 걷는 남자>는 위태롭게 한발 한 발 내딛는, 지연된 시간의 감각을 제공한다(영화의 후반부를 지배하는 이 시퀀스들은 두 개의 경험적 위치를 제공하는데 하나는 줄 위를 걷는 남자의 주관적 시선으로 관객을 연루시키는 자리이며, 다른 하나는 빌딩 아래에서 그를 올려다보는 관람객들의 자리이다. 극장의 관객은 두 자리의 시선을 교차하며 3D 체험의 미장센으로 극대화된 영화적 시간을 경험한다). 그러나 그 속도가 어찌하든 이러한 영화들은 모두 영화적 시간성을 영화의 비매개적 경험의 핵심 장치로서 구축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관객들은 오인한다. 영화, 그것은 ‘내가 본다’가 아니라 ‘내가 경험한다’라는 것이라고 말이다. 여기서 비릴리오의 말을 살짝 비틀자면, ‘난다’라는 개념은 ‘경험’의 자리를 관객에게 전지적으로 제공하는 주요한 쇼트들이다. 물리적 현실에서 발생할 수 없는 시간과 공간을 점유하며, 쇼트와 프레이밍의 새로운 자리를 지배하는 자리이다. 2015년 첨단의 전략으로 무장한 <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는 결국 초창기 영화에 해당하는 < 제너럴 >과 유사한 쇼트의 시간 감각에 집중한다. 버스터 키튼은(존 포드 역시 그랬던 것처럼) 남북전쟁이 한창인 광대한 공간들 사이를 통과하는 기차의 물질적 거대함과 속도를 강화하기 위해 개별 쇼트들의 속도를 전략적으로 달리한다. 즉 빨리 감는 방법으로 대상의 긴박감을 배가하는 것이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에서 워보이들을 소개하는 쇼트들은 자동차들의 질주학과는 다른 방식으로 속도를 조작한다. 마치 다른 종류의 인류를 목격하는 듯한 엑조티즘을 강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철저하게 전쟁기계로 작동하고 있음을 강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후 이 영화는 질주의 숙명을 위해 내달린다. 육중한 기계들이 자신들의 물질성을 증명하듯, 폐허의 사막을 모래바람과 함께 질주하고,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폭풍 속 자기장 속으로 질주한다. 거대한 폭발들과 그 순간 누군가의 시점인지 모를 상태로 제시되는 파편화된 쇼트들 (오로지 폭발의 외양을 가장 스펙터클하게 제시할 수 위치에서 구성된 쇼트들)은 이미지의 지배적 위치를 보장하기 위해 주로 공중 부감 쇼트와 롱숏들로 구성된다. 이 순간 관객들이 체험하는 영화적 속도는 일명 ‘라이딩 영화’라 불리는 체험 영화로서 구성된다. (실제로 1950년대, 미국에서 영화산업이 위축되자, 산업은 TV와 다른 영화적 체험을 강조하기 위한 거대한 스펙터클 구성에 골몰한다. 이때 등장한 것이 3D의 광범위한 활용, 와이드 스크린,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네라마나 아이맥스와 같은 그 어떤 매체도 제시할 수 없었던 거대한 크기의 제공이었다. 특히 시네라마나 아이맥스는 서사가 아니라 주로 공중에서 촬영한 나이아가라 폭포나 롤러코스터 같은 이미지들을 롱테이크로 포착해 관객들로 하여금 체험을 하는 듯한, 라이딩 영화 경험을 제공하였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6. 2015년, 최근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서사를 배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거의 유아적 수준의 지능만 있다면 이해하고도 남을 스토리와 캐릭터가 제시되고 영화의 대부분은 거대한 ‘스펙터클’로 구축된다. 이 스펙터클이 가 닿고자 하는 끝점에는 롱테이크 전략(탈육화된 시선의 전능성과 지배의 감각) 혹은 극단적 쇼트 분할(주로 극사실주의에 기반한 클로즈업 쇼트들)로 제시되는 ‘영화적 체험’의 쾌락이 자리한다. 영화는 백 년 이상의 역사적 서클을 한 바퀴 순환하고 결국 초창기 영화가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테크놀로지 매체가 구성할 수 있는 형식적 쾌락으로 되돌아왔다(매혹의 시네마). 디지털을 동원한 할리우드 영화들이 가 닿고자 하는 것은 결국 3D와 이미지의 극사실주의(라이브 액션과 CG의 구분이 불가할 정도의 사실주의)를 통해 비매개의 환상을 획득하는 영화적 체험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과연 영화의 최전선일까? 초창기 영화가 그랬고, 50년대 극장의 위기와 함께 찾아왔던 영화체험의 극대화가 그랬듯, 지금 영화도 어떤 전환점(디지털의 광범위한 확장과 산업 시스템의 전환, 그리고 결정적으로 다매체 시대에 반복되는 극장의 위기)을 돌파하는 하나의 방법처럼 보인다. 디지털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혁신이 강조하는 테크놀로지 그 자체의 경이로움과 매혹에 탐구하는 역사적 순환의 한 국면 말이다. 어쨌거나 산업이 추동했던 영화 미학과 매혹은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된다. 초창기 영화나 지금 영화나 그것은 마찬가지인 듯하다. 영화는 운동이며, 질주이며, 그래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경험하는 매혹의 스펙터클이라는 사실 말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황금알을 낳는다”는 말은 더이상 솔깃하지 않다. “애니메이션 (산업)이 황금알을 낳지 않는다”라는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황금알 여부를 떠나, 애니메이션이 과연 알 자체를 낳을 수 있는가라는 극단적인 비관론도 있다. 이런 진부한 논쟁을 정리하려면 전 세계 애니메이션 산업을 꼼꼼히, 냉정하게 따져봐야 하지만, 각 진영의 논거를 뒷받침할 만큼 정확하고 투명한 (게다가 솔직하기까지 한) 데이터를 접하기란 쉽지 않다. 마치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아서, 산업의 속살을 드러내는 순간 애니메이션을 둘러싼 모든 이들은 일대 패닉에 빠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산업의 장밋빛 전망을 믿는 이들이건, 예술의 고단함을 감내하는 이들이건, 애니메이션은 무언가를 약속해야 한다. 이번 칼럼은 산업의 실체를 (여전히 진부하게 되풀이하여)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고부가가치 성장동력 지식/창의산업이여, 문화를 융성케 하라, 비비디바비디붑!”이라는 주술의 약빨을 논하는 대신, 애니메이션 작품 속에서 황금알이 어떤 식으로 다루어졌는지를 살펴보려 한다. 그러니까, 아주 가벼운 발걸음으로 전장 위를 산책하려는 글이다. 첫 번째 작품은 찰리 보워스Charley Bowers라는 코미디언이 1930년에 만든 <잇츠 어 버드It’s a Bird>(위 사진)다. 사업 욕심이 가득한 한 사내가 ‘쇠를 먹는 새’를 찾아낸다. 새는 기꺼이 사내 앞에서 꿀꺽꿀꺽 쇠 쪼가리들을 먹어치우고는 알을 하나 낳는다. 급하게 부화시킨 알에서 나온 조그만 금속 덩어리는 점점 커지면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 마침내는 근사한 자동차로 완성된다, 와우~! 지금 봐도 꽤나 근사한, 트랜스포머의 원형을 보는 듯한 장관이다. 이 모습을 지켜본 사내는 대박 사업 아이템이라며 동업을 권한다. 고철 덩어리만 먹여주면 그 어떤 생산 설비 없이도 차를 뽑아낼 수 있겠다는 계산이다. 그러자 새가 한마디 던진다. “그런데, 어쩌나, 우리는 저런 알을 100년에 한 번 낳는다, 깔깔깔!” 그렇다, 황금알을 낳기는 하는데 매일, 매번이 아니라 100년에 한 번이다. 잘 새겨두자. 앨리스의 달걀 공장Alice’s Egg Plant (1925) 두 번째 작품은 황금알의 화신으로 여겨지는 월트 디즈니의 첫 애니메이션 시리즈 ‘앨리스 코미디Alice Comedies’ 중에서 <앨리스의 달걀 공장Alice’s Egg Plant> (1925)이다. 이재에 밝은 소녀이자 농장주 앨리스는 대량 주문에 한껏 들떴있다. 그러나 암탉들은 고된 할당량과 사생활 통제에 불만을 품었고, 때마침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잠입한 붉은 암탉스키 (Little Red Henski)가 총파업을 유도한다. 발주 물량을 채우기 위해 앨리스는 나름의 묘안을 떠올린다. 사이가 좋지 않은 두 수탉에게 권투 경기를 주선하고, 입장료로 달걀 하나를 받기로 한 것이다. 파업 중이던 노동자 닭들은 기꺼이 비용을 지불하며 즐거운 볼거리를 소비하였고, 그 덕에 앨리스는 주문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디즈니의 노동관이나 정치관을 둘러싼 논쟁을 떠나서 (사실 이 작품은 30년대 디즈니 스튜디오의 대량 해고 사태나, 할리우드에 불어닥친 매카시즘 광풍에 동조하던 후기 월트 디즈니의 태도에 비하면 순진한 편이다), 애니메이션 산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든 지 얼마 안 된 그가 애니메이션을 노동자의 지친 일상에서 소비될 수 있는 대중 오락 상품으로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황금알은 대중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을 때 비로소 교환, 획득할 수 있다는 사실! (1930년대, 발터 벤야민과 아도르노가 미키 마우스의 정치적 전복성에 대해 논쟁을 벌인 적이 있는데, 이 작품도 봤다면 훨씬 심도 깊은 논의가 이루어졌을 테다) 트럭 가득 실린 달걀이 다 떨어져 깨진다는 결말은 덤이다. 보캉송의 ‘기계 오리’ (1739) 세 번째 경우는 영화가 탄생하기 한 세기 반 전, 1739년에 발표되었다는 기계 오리이다. 오토마타의 전설인 보캉송Vaucanson이 만들어낸 이 기계 오리는 당시 세인의 주목을 한껏 받은 경이로운 설치물이었다. 일반적인 오토마타가 외양과 동작을 흉내 내는 정도인 데 비해, 이 기계 오리는 ‘관람객’이 주는 음식물을 받아 먹고 소화 시켜 배설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기계 오리의 ‘알’이 아니라 ‘응가’에 열광한 것이다 (그래도 기계 오리는 구리판 겉면에 금박을 입힌 ‘황금 오리’였다). 물론 기계 오리의 배설물은 실제 똥이 아니라, 인공 모조품이었다. 대부분의 마술쇼가 그러하듯, 사람들은 마술쇼 자체를 즐길 뿐 아니라, 그 트릭의 원리가 밝혀진 후에도 여전히 그 즐거움을 유지한다. 먹고 싸는 오토마타 오리가 세인에게 어필한 사실은 단지 실제의 모사/복제/흉내가 아니라 관람객과의 상호작용에 놓여 있다고 볼 수 있다. 자기가 직접 주는 먹이를 받아먹을 줄만 안다면, 그 결과물이 똥이든, 알이든, 실제이든, 모사이든 상관없는 것이다. 위의 세 사례들 중 어떠한 황금알에 집중하고 원하는지에 따라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가치에 대한 평가가 달라질 것이다. 요즘 개인적으로 즐기기 시작한 것은 산업적 회의론보다는 여전히 황금알을 좇는 이들의 발언이다. ‘정말 그렇다고 믿고 있는 건가’, 아니면 ‘스스로도 장담 못 하지만 그래도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서 (자기) 최면을 걸고 있는 건가’, 내심 궁금하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거기에는 꽤나 근사한 퍼포먼스가 가미되어야 한다. 적어도 마술사는 마술쇼가 이루어지는 동안에는 모두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붙잡아 두는misdirecting 퍼포먼스의 숙련도와 쇼맨십이 필요하다. 20년 전부터 되내던 주술과 주문 말고, 좀 더 그럴싸한 황금알 시전이 나와줘야 구경할 맛이 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