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릴
- 감독
- 황정현
- 제작년도
- 2009
- 출연
- 김효서, 김기연, 이정훈, 이도영
코로나가 가장 심각하던 시기, 팬데믹으로 인해 국가 간의 교류는 거의 단절되고, 국민들은 일부 격리되며 대부분의 문화 활동은 중지되었다. 많은 영화들은 부쩍 한산해진 극장가를 보며 개봉을 미루던가, OTT로 방향을 선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한 사람, 크리스토퍼 놀란 만큼은 고집을 꺾지 않았는데, 그의 신작 < 테넷 >은 이 시기 유일하게 극장에서만 공개된 텐트폴 영화였다. 놀란과 파트너십을 이어오던 워너는 가장 OTT 공개(및 동시 개봉)에 앞장서던 배급사였고, 그래서 놀란의 결정에 난감했던 게 사실이다. 몇 번의 연기를 거쳐(다른 작품들이 창고 영화가 되거나 TV 영화가 되어가는 속에서도) <테넷>은 코로나 속 극장에서 고군분투 블록버스터로 위용을 보였지만 장렬히 산화하고 만다. 할리우드 메이저에 진입했던 < 인썸니아 >부터 오랜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 놀란과 워너의 관계에 금이 간 건 바로 이때였다. 놀란은 워너의 소극적인 홍보를 아쉬워했고, 워너는 놀란의 비협조적인 선택에 섭섭해 했다. 결국 놀란은 워너를 떠나 차기작을 유니버셜과 하기로 결정한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새 프로젝트는 이전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실제 인물을 다룬 전기물이었다. 전 세계에 핵이란 새로운 빛을, 그리고 동시에 두려운 공포를 안겨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원작 제목이다)'이자 천하의 둘도 없던 천재, 바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를 다룬 영화 < 오펜하이머 >였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놀란과 유니버셜의 첫 협업물인 <오펜하이머>는 바로 놀란의 전 파트너였던 워너의 최고 기대작인 그레타 거윅의 < 바비 >와 맞붙게 되었고, <바비>가 < 해리포터와 죽음의 성물 2부 >를 넘어 워너의 최고의 흥행을 기록하는 바람에 <오펜하이머>는 북미 박스오피스에서 한번도 1위를 기록하지 못한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역대급 흥행을 찍은 경쟁작의 방해와 3시간이란 상영시간의 압박, 누드와 욕설로 인한 R등급 등 숱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오펜하이머>는 < 조커 >의 뒤를 이어 R등급 영화사상 두 번째로 흥행한 작품이 되었고, < 보헤미안 랩소디 >가 가지고 있던 전기물 최고 흥행작 타이틀도 빼앗았으며, < 인셉션 >을 넘어 크리스토퍼 놀란의 오리지널 작품으론 최고 흥행작에 올랐다. 루드비히 고란손 안타깝게도 필생의 소망(!)이던 < 듄 > 작업 위해 자리를 비운 한스 짐머가 이번에도 그 속편을 위해 바쁜 관계로, 놀란은 전작 <테넷>을 함께 했던 루드비히 고란손을 다시 한 번 음악적 파트너로 맞이한다. 스웨덴 출신의 고란손은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80년대생 영화음악가들 중 하나로, 이름에서 엿볼 수 있듯 베토벤의 이름을 딴(그의 아버지는 블루스 기타의 신 알버트 킹의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다!) 그의 음악적 소양은 기타 교사였던 아버지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스톡홀름 왕립 음악학교를 졸업한 고란손은 미국 USC에서 영화음악을 전공했고, 같은 대학의 영화과에 다니던 라이언 쿠글러와 의기투합하게 된다. 비슷한 시기 고란손은 영화음악가 테오도르 샤피로 밑에서 견습 생활을 이어가며 시트콤 <커뮤니티>로 자신의 첫 음악 크레딧을 얻는데, 여기서 차일디쉬 감비노로 활동하는 배우 도널드 글로버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이 둘과의 만남은 고란손에게 < 블랙 팬서 >의 오스카와 “This Is America”의 그래미라는 영예를 안겨다주었다. 영화음악과 힙합이란 전혀 다른 분야에서 동시에 성공을 거두며 화려한 커리어를 맞이한 고란손의 다음 스텝은 바로 놀란과의 계속된 협업이었다. 루드비히 고란손은 익숙한 세계를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는데 탁월한 식견과 해석력을 보여 왔다. 그래서 빌 콘티가 절대적인 영향력을 끼친 록키 발보아의 세계에서 힙합 리듬으로 새로운 적자 크리드에게 시선을 돌리는데 성공했고, 마블의 고전적이고 영웅적인 심포니가 득세하는 전장에서도 리얼한 아프리칸 사운드를 효과적으로 이식했으며, 마에스트로 존 윌리엄스가 굳건히 세워놓은 갤럭시 사가에서 향토적이고 이국적인 베이스 리코더를 내세운 색다른 만달로리안 사운드로 새로운 여정의 진군가를 완성해냈다. 랜디 뉴먼이나 마이클 지아치노가 꽉 잡고 있던 픽사 애니메이션에서도 흥분하면 래서 판다가 되는 틴에이저의 고충을 끌어안은 그의 음악은 반짝반짝 빛났다. 엔트로피와 양자역학이 판을 치는 놀란과의 첫 만남에선 데이빗 줄리앙과 한스 짐머가 구축해놓은 미니멀한 사운드에서 더 나아가 쉽게 시도하지 않는 실험적인 백마스킹을 통해 앞뒤가 똑같은 회문 구조의 인버전 스코어를 현실에 구현해냈다. 고란손은 감독들이 요구한 사항을 받아들이되 기존의 존재하던 스타일을 반복하지 않고 기꺼이 자신만의 해답을 찾아낸다. 이게 수많은 영화음악가들이 데뷔하고 활동하는 할리우드에서 빠른 시간 안에 그가 자리 잡을 수 있었던 이유다. <인셉션>에서의 에디트 피아프, < 인터스텔라 >에서의 파이프오르간, < 덩케르크 >에서의 시계초침과 엘가, 그리고 <테넷>에서의 인버전된 백마스킹이 핵심적인 사운드 키워드로 자리했던 놀란의 영화음악답게 이번 <오펜하이머>에서 놀란이 영화음악가에게 내민 카드는 바로 바이올린이었다. 오펜하이머가 여러 층위를 가진 복잡한 내면의 천재였고, 일반 전기물처럼 쭉 한사람의 일생을 따라가기보단 원자력협회의 오펜하이머 청문회와 스트로스 제독의 인사청문회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일대기까지 세 가지 시간 선을 엮어낸 다층적인 구조라 레이어 쌓기 가장 좋은 악기인 바이올린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고란손 역시 아름답고 환상적인 선율의 비브라토를 연주하다가도 바로 브릿지로 격한 소리를 만들거나 빠르고 예민한 트릴이나 미끄러지는 글리산도로 신경질적이고 공포적인 효과로 돌변할 수 있는 바이올린이야말로 오펜하이머가 핵무기를 만들면서 가졌던 이중적인 측면을 가장 잘 드러낼 수 있는 악기로 받아들였다. 아내 세레나 맥키니가 바이올리니스트이기도 한 고란손은 놀란이 던진 이 아이디어를 맘에 들어 했고, 1인칭으로 묘사된 시나리오 속 오펜하이머의 내면을 바이올린으로 극대화 시킬 방법들을 다양하게 찾았다. 압도적인 건 바로 오펜하이머가 가진 고뇌와 무게감, 일반인이 받아들일 수 없는 천재성과 감정의 기복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내기 위해 한 큐 안에서 스트링 세션이 변화무쌍하게 4마디마다 템포가 변화해 최대 21번의 빠르기가 가중되는 'Can You Hear The Music'이나 'Destroyer Of Worlds'같은 트랙이다. 처음 시작보다 무려 3배나 빨라지는 연주는 한 테이크 안에 라이브가 불가능하다 생각해 후반 믹싱적 테크닉을 시도하려했으나 아내의 격려와 시도로 실제 연주를 사흘에 걸쳐 이뤄냈으며, 이는 남들과는 전혀 다른 속도로 세상을 바라보는 오펜하이머의 시선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동시에, 이제는 시작돼 멈출 수 없는 핵 개발의 체인 리액션을 표출한 방식이기도 했다. 더욱이 영화상에서 가장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는 트리니티 실험에 흘러나오는 8분에 이르는 대곡 'Trinity'는 폭발에 이르기까지 정신없이 고조되며 심장을 마구 옥죄여오는 킬링 트랙인데, 버나드 허먼이 울고 갈 정도로 격정적으로 휘몰아치는 날카로운 현의 비명들 아래 깔리는 웅장한 관악기와 어두운 일렉트릭의 조화는 폭발 순간 침묵에 휩싸이며 먹먹함을 선사한다. 버튼을 누르면 결코 이전으론 되돌아갈 수 없는 결과를 낳는 핵의 운명처럼, 이 모든 소리의 파편들이 쌓여 거대한 침묵을 완성한 건지 모른다. 여기에 가이거 계수기를 비롯한 다양한 펄스파의 소리들과 군중의 발소리를 채집한 효과들이 어우러지는 아방가르드한 공명감은 핵개발 이후의 바뀐, 그리고 멈출 수 없는 세상의 연쇄적인 반응을 담아내는 듯 불길하고 무섭게 다가온다. 간혹 섬세한 하프와 간헐적인 피아노가 덧입혀지며 아내 키티와 동료 과학자들 간의 신뢰를 구축하기도 하지만, 독일과 소련과의 원폭 경쟁이 치열하게 펼쳐지며(또 작중 후반 증인들의 증언이 거듭됨에 따라 불리해지며) 그 초조한 긴장감을 담아내는 규칙적인 초침소리와 금속성의 엠비언트, 현악 오스티나토의 질주감은 별다른 화려한 비주얼 없이도 청각적으로 스크린을 압도해버린다. 기억에 남는 명징한 테마들은 없지만 하강과 상승을 반복하며 켜켜이 쌓이는 현악의 구조와 강도는 점점 완성되어가는 원폭을 보듯, 증언이 쌓이며 점점 인물들을 구체화 시키는 청문회를 보듯 단단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이런 강렬함에도 고란손은 스코어에 드럼이나 팀파니 같은 전통적인 타악기는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활로 현을 때리거나 샘플링된 소리들로 효과를 주었을 뿐이다. 버나드 허먼의 신경질적이고 풍부한 스트링에 나인 인치 네일의 공감각적인 일렉트릭 사운드를 포용한 채 필립 글래스나 막스 리히터의 미니멀리즘과 요한 요한손의 드론 음악을 결합시켜 크시슈토프 펜데레츠키의 현대음악처럼 풀어낸 루드비히 고란손의 추상적이고 과할 정도로 시끄러운 사운드 임팩트는 핵이란 거대 담론이 가진 여러 방향성과 폭발력 그리고 오펜하이머의 복잡한 층위의 감정 스펙트럼을 방사형으로 내뿜어낸 비장의 OST다. Track List 1. Fission 2. Can You Hear the Music 3. A Lowly Shoe Salesman 4. Quantum Mechanics 5. Gravity Swallows Light 6. Meeting Kitty 7. Groves 8. Manhattan Project 9. American Prometheus 10. Atmospheric Ignition 11. Los Alamos 12. Fusion 13. Colonel Pash 14. Theorists 15. Ground Zero 16. Trinity 17. What We Have Done 18. Power Stays in the Shadows 19. The Trial 20. Dr. Hill 21. Kitty Comes to Testify 22. Something More Important 23. Destroyer of Worlds 24. Oppenheimer
이 영화는 공포영화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 안소니와 아픈 아버지를 돌보는 딸 앤의 가슴 저미고도 절절한 얘기가 왜 공포냐고? 그건 바로 ‘관찰자’가 아니라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치매를 다룬 수많은 영화가 인물과 관객 사이에 투명유리창을 세워 놓고 인물의 고통을 관망하게 했다면 이 영화는 맹렬히 그 창을 깨부수고 관객을 화면 안으로 끌어당겨 그들의 모든 의식과 감각을 통째로 붙잡고 흔든다. 3인칭 시점의 1인칭화! 소재의 진부함은 결곡하고도 투철하게 인간을 이해하는 플로리안 젤러 감독의 전위적 시도로 온전히 극복되고도 남는다. 안소니(안소니 홉킨스 분)는 엔지니어로 자수성가하여 근사한 아파트에서 여유로운 노후를 보내는 80대 노인이다. 그의 낙은 자신을 보러 매일 들르는 딸 앤(올리비아 콜맨 분)을 기다리는 일이다. 마침내 딸이 왔다. 그런데 딸의 표정이 좋지 않다. 왜 도우미한테 험한 말을 했느냐고 자신을 추궁하듯 묻기에 그녀가 시계를 훔치려 해서 그랬다고 자못 양양하게 대꾸한다. 그러나 시계는 딸의 짐작대로 욕조 밑에 있다. 엇, 왜 이게 욕조 밑에 있지? 어찌됐든 찾았으니 됐고, 도우미 대신 딸이 옆에 있으니 만족스럽다. 그러나 그 날의 일은 가벼운 해프닝에 불과했다. 그의 상태가 그럭저럭 괜찮았던 날이었던 것이다. 딸은 계속해서 도우미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더니 급기야 자신은 런던을 떠나 프랑스로 가게 됐다고 말한다.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프랑스로 떠난다고? 그럼 나는? 갑자기 겁이 나기 시작한다. 이 와중에 둘째 딸은 왜 보이지 않는지 모르겠다. 본 지가 오래된 것 같은데 말이다. 다음 날은 갑자기 못 보던 남자가 거실 소파에 앉아 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사위라고 답한다. 앤은 이혼했는데 사위는 무슨? 한 술 더 떠 이 집이 자신의 집이라고 말하는 낯선 남자. 잠시 후 장을 보러 나간 앤이 들어오는데, 아니다. 앤이 아니다. “아빠, 저예요. 저 앤이에요!”라는데 처음 보는 여자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란 말인가. 이 집은 분명히 내 집인데 내 집이 아니라 하고 모르는 남자가 사위를 자처하며 앤마저 얼굴이 바뀌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꿈일 것이다, 그래, 분명 꿈일 것이다. 안소니의 상태는 날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아닌가? 혹시 안소니의 말이 다 사실인 건 아닐까? 안소니가 느끼는 감각은 분명 그의 감각이 맞을 텐데 그것을 어떻게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는가. 낯선 남자가 그의 뺨을 때려 그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아픔을 느꼈다. 그런데 그것이 오해이며 착각이라고 우리가 어찌 장담할 수 있겠는가. 누군가의 기억의 오류와 소실이 망상이라고, 현재로 느껴지는 누군가의 과거가 단지 과거일 뿐이라고, 누군가에게 틀림없는 진실이 거짓투성이라고 우리가 규정할 근거가 대체 무어냔 말이다. 감독은 집요하고 밀도 높게 관객을 긴장시킨다. 당신이 느끼는 혼란이, 혼란의 반복으로 발생하는 자기 불신이, 마침내 그 무엇도 신뢰할 수 없게 되는 공포가 바로 안소니가 경험하는 그 자체라는 것을, 추체험할 수 없다고 여겼던 일을 핍진하게 우리 내부로 침투시키며 우리를 안소니화하는 데 성공시킨다. 그러나 밀어붙이기만 하는 게 아니다. 감독의 탁발한 연출은 속도의 조절과 적절한 밀당에 있다. 여백을 과감하게 이용하는 것이다. 이 영화는 2012년 프랑스에서 초연해 연극으로 이미 성공을 거둔 작품이다. 자신이 쓴 연극을 직접 영화로 만들면서 감독은 영화를 한 편의 연극처럼 환원시키는 데 성공한다. 연극이 막으로 무대를 전환한다면, 영화에서는 인물 없이 다양한 공간을 천천히 훑는 기법으로 시공을 변환한다. 이 같은 기법으로 감독은 관객에게 어떤 시간을 제공하는데, 하나는 얼기설기 복잡해진 감정을 소강시켜 감정이 사유로 넘어갈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시간이다. 어느 시점에서 우리는 진실게임이 더 이상 소용이 없다는 걸 알게 된다. 그것은 우리에게 응당 선이어야 할 것들이 안소니에게는 수많은 점으로 흩어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 결과이다. 또한 그 선과 점이 굳이 같은지 다른지를 물을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아서이며, 지고한 사랑의 가치를 행위로써가 아닌 고작 인식 따위로 이해하려드는 우리 자신이 가소롭다는 걸 알게 되기 때문이다. 또 다른 시간은 미세하게 바뀐 집의 공간이 안소니의 심리변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를 추측케 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엄마가 보고 싶어!”하며 우는 마지막 장면에 가서야 해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더 이상 자신의 공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는 아이가 되었다. 엄마가 보고 싶은 아이. 기억을 잃어가며 점점 낯설어지는 공간이 될지언정 집은 그에게 자궁이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공간을 되찾고 싶어 하는 그의 마음은 ‘시계’가 메타포가 되어 잃어버린 시간들을 붙잡고 싶어 하는 마음과도 꼭 닿아 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그의 집착은 상실감이 주는 고통의 깊이와 완벽히 정비례한다. 거개의 사람들은 치매가 암보다 더 두렵다고 말한다. 망각은 신의 선물이라고 하면서도 망각에 빠져드는 질병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절대 받고 싶지 않은 선물로 치부한다. 어쩌면 죽음은 그 자체로 무(無)가 되는 일일 수도 있는데, 명멸하는 자기 자신을 마주하는 일은 그 無와 대체 무엇이 다른 걸까. 육체는 쇠할지언정 영혼은 꺼트릴 수 없다는 마음이라면 그것은 부질없는 욕심이 아닐까? 좋다. 그것이 순수한 바람이든 욕심이든 나아가 탐욕이든 그것의 정체를 굳이 알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이 영화의 메시지를 사회적으로 확대해 치매환자를 대하는 시선의 변화를 촉구하고, 치매환자를 돌보는 가족의 고통을 헤아려 복지체계에서 이들을 포용해줄 것을 역설하면 되는 걸까. 그것으로 충분한 걸까. 인간에게 기억이란 시간 속에 존재를 새긴 결과물일 것이다. ‘살아 낸’ 시간의 결과물이다. 병에 걸려 아파한 시간이나 그저 살아진 시간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다시, 질문은 ‘어떻게 살 것인가’로 돌아온다. 삶의 본질적 질문은 결국 이 질문 하나로 수렴되듯. 이 영화로 치매를 경험한 덕분에 답을 찾는 것은 더 쉬워진 것 같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모습으로 살아내는 것이다. 동시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것 그대로 그 존재를 기억해주는 것이다. 그것이 가는 자와 남은 자가 할 수 있는, 또 해야 할 전부가 아닐는지. <더 파더>는 2021 아카데미 시상식에 작품상, 남우주연상, 여우조연상, 각색상, 미술상, 편집상 등 6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고, 이 중 안소니 홉킨스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플로리안 젤러 감독이 각색상을 수상하였다.
영화가 시작되기 전, 우린 코 위에 필름 릴을 올려놓은 멧돼지가 검푸른 바닷물에서 솟아오르는 이미지를 접한다. 제작사 ‘바라히 찰라나 치트람’의 로고 필름이다. 이때 이미 짐작했어야 했다. < 나는 파리다 >는 범상치 않은 영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일관 ‘오버’한다. 최근 < 바후발리: 더 비기닝 >(2015)으로 인도 박스오피스를 휩쓸었고 한국에도 알려진 S.S 라자몰리 감독이 2012년에 만든 이 영화는 ‘괴작’이라고 하기엔 보편적이고, ‘졸작’이라고 하기엔 상업적인 미덕이 상당하며, ‘걸작’이라고 하기엔 너무 노골적이다. 콘셉트 하나로 처음부터 끝까지 밀고 나가는 ‘뚝심작’이랄까? 코드가 맞는 관객만 조금 확보되면 충분히 후세에 컬트로 추앙받을 만한 영화다. 참신하면서도 충격적인 로고 필름이 지나가면 영화가 시작된다. 무지 화면 위로 아빠와 딸의 대화가 오간다. 딸은 잠자기 전에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아빠는 귀찮아한다. “거 참, 파리처럼 앵앵거리네. 가만있자… 옛날 옛날에 파리 한 마리가 살았어. 그런데 파리 주변엔 악당도 살고 있었지.” < 나는 파리다 >는 아빠가 딸에게 해주는 ‘베드 타임 스토리’다. 하지만 따뜻한 동화 같은 걸 기대해선 안 된다. 첫 신부터 영화는 우리의 기대를 산산조각낸다. 한 남자가 클레이 사격을 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수딥(키차 수디파). 아빠가 말했던 ‘파리 주변의 악당’이다. 그가 등장한 첫 신부터 관객들은 견뎌야 한다. 라자몰리 감독의 악취미인지, 캐릭터를 설명하기 위한 방식인지, 이 배우 특유의 향기인지, 인도 영화의 전반적인 관습인지 알 수 없지만, 영화는 ‘느끼함’의 극단을 보여준다. 중년 관객이라면 오래전 어느 개그 프로에 나왔던 ‘리마리오’라는 ‘느끼남’을 기억하실 거다. 놀라지 마시라. 수딥은 리마리오를 능가한다. 수딥은 근처에서 클레이 사격을 하는 칼라(함사 난디니)라는 글래머러스한 미녀에게 다가간다. 처음 보는 여성인 듯한데… 그는 다짜고짜 그녀에게 몸을 밀착하고 클레이 사격을 교습해준다. 대단한 자신감이다. 맞다. 수딥은 악당이자, 그 어떤 여자도 무너트릴 수 있다는 자기 확신으로 살아가는 녀석이다. 이후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대사는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린다. 여자가 먼저 도발한다. “여기 매일 오세요?” 남자, 기다렸다는 듯 받아친다. “오길 원해요?” 여자, 순식간에 진도를 나간다. “몇 시에?” 남자, 결정타를 날린다. “당신이 올 때.” 단 네 줄의 대사로, 시작한 지 5분도 안 된 영화는 관객을 강력하게 빨아들인다. 그리고 조금은 두려워진다. 과연 이 거대한 아우라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지만 당신은 아직 다음 신을 보지 않았다. 장면이 바뀌면 한 여성이 조심스레 무엇인가를 만들고 있다. 작은 세공품을 만드는 ‘마이크로아트’다. 그녀의 이름은 빈두(사만다 루스 프랍후). 이때 갑자기 정전이 된다. 그 모습을 길 건넛집 옥상의 나니(나니)가 바라본다. 나니는 2년째 빈두를 따라다니는 짝사랑의 주인공. 수딥 못지않게 느끼한 녀석이다. 정전이 그에겐 기회다. 재빨리 위성 접시에 은박지를 붙이고 그 위에 플래시 빛을 비추어 발광체를 만드는 나니. 그는 서서히 접시를 빈두의 창문 쪽으로 돌린다. 세상이 어둠에 잠기더라도 나만은 당신의 한 줄기 빛이 되겠다는 순애보의 행동이다. 낭만적이다. 마음을 표시하진 않지만, 빈두도 싫은 눈치는 아니다. 이후 둘은 결국 연인이 된다. < 나는 파리다 >는, 궁금해 미칠 것 같은 제목을 뒤로 한 채, 일단 남자 캐릭터들의 과한 매력으로 시작한다. 정말 이 영화의 초반부는, 관객을 기어이 토하게 만들려고 작정이라도 한 듯, 쉴 새 없이 느끼하다. 모든 여자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돈 많은 악당 수딥. 폭죽 만드는 일을 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난한 순애보의 청년 나니. NGO에서 활동하는 아름다운 여인 빈두. 빈두는 기부금을 받기 위해 수딥을 찾아가고, 흑심을 품은 수딥이 그녀에게 적극적으로 접근하고, 이때 빈두와 나니 사이의 미묘한 기류가 수딥에게 감지되면서,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이런 관계를 해결하는 악당의 방법은 정해져 있다. 상대편 남자를 제거하는 것. 나니는 그렇게 목숨을 잃는다. 영화는 급변한다. < 나는 파리다 >는 여기서부터 제목에 충실해지며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죽는 순간, 나니의 억울한 영혼은 마침 근처에 있던 파리 알로 들어간다. 정말 놀라운 설정이다. 이후 알에서 태어난 파리. 나니의 환생이다. 여기서 몇몇 텍스트가 떠오를 것이다. 혹시… 카프카의 「변신」? 아니다. 이 영화를 실존주의와 연결시키는 건 수딥의 윙크하는 얼굴보다 더 ‘오버’다. 파리가 된 나니는 고뇌하지 않는다. 그는 의외로 빨리 적응하고, 나름 삶의 의욕에 넘친다. 그렇다면…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 플라이 >(1986)? 일견 통하는 구석도 있다. <나는 파리다>도 심각한 대목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는 복수극이자 로맨스다. 그런 면에서 <나는 파리다>는 의외의 영화와 만난다. 바로 제리 주커 감독의 < 사랑과 영혼 >(1990)이다. 유령이 된 남자가 아내를 지키기 위해 곁을 맴도는 것처럼, 나니는 파리가 되어 빈두 곁을 머문다. ‘파리/나니’는 빈두에 대한 수딥의 야욕을 막기 위해 애쓴다. 그깟 파리 한 마리가 무슨 힘이 있겠느냐고? 아니다. 영화는 파리와 수딥 사이의 ‘다윗과 골리앗’ 싸움을 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여기서 라자몰리 감독의 놀라운 솜씨가 발휘된다. 앵앵거리면서 괴롭히던 수준에서 점증되어 차량 전복 사건까지, 둘의 대결은 버라이어티 쇼를 방불케 한다. 여기서 감독은 훌륭한 균형 감각을 보여준다. 대결에만 집중하면 영화의 감정은 메마르게 되는 법. 파리는 자신이 곧 나니임을 빈두에게 증명하기 위해 애쓴다. < 사랑과 영혼 >에서 동전을 끌어올리던 샘(패트릭 스웨이지)의 안간힘을 연상케 한다고나 할까? 기회를 잡은 ‘파리/나니’는 빈두의 탁자 위에 물로 글씨를 쓴다. “나니에요. 다시 태어났어요.” 빈두는 받아들인다. < 나는 파리다 >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적 요소는 ‘파리 CG’다. 약 2,000개에 CG 숏이 사용된 <나는 파리다>는 전형적인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exploitation film), 즉 ‘영화의 특정 요소를 노골적으로 이용하는 상업영화’다(거의 모든 해상 신을 CG로 만든 < 명량 >(2014)도 1,500~1,600숏 수준이다). 굳이 신조어를 만든다면 플라이플로이테이션(flyploitation) 필름? 파리 등장 이후 영화는 애니메이션과 실사의 결합처럼 느껴지며, 90% 가까이 인도 기술로 이루어진 컴퓨터그래픽은 과시하듯 드러낸다. 실제 소스 촬영 없이 오로지 컴퓨터그래픽으로 만들어진 파리 캐릭터는 지나치게 큰 눈, 말벌 크기는 되어 보이는 볼륨, 강렬한 색감 등 꽤나 과장된 크리처인데 이후 점입가경으로 들어선다. 파리는 복수를 위해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고글을 쓰고, 손엔 쇠로 된 무기를 장착한다. 모두 ‘마이크로아트’를 하는 연인 빈두 덕분이다. 그러면서 대결은 점점 화력을 더하고, 클라이맥스에 가면 거의 재난영화 수준으로 치닫는다. 그런데 이 말도 안 되는 과정이 흥미진진하다. 쉴새 없이 몰아치기 때문이다. 작위적 설정과 우연의 남발은 큰 흠이 되지 않는다. 놀라운 건, 이 영화가 절정 대목에선 감정적으로 자극한다는 점이다. 파리의 위대한 순애보와 희생을 접하는 순간, 아주 잠깐이나마 우린 장엄함을 느낀다. 파리가 주인공인 영화에서, 이것은 진정 예기치 못한 감정이다. ‘인도의 스필버그’를 꿈꾸는 S.S 라자몰리 감독이 ‘약 빨고’ 만든 듯한 < 나는 파리다 >는 ‘병맛’처럼 시작해 점점 관객을 빨아들이다가 결국엔 “발리우드 만세!”를 외치게 만드는 영화다. 인터넷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거의 간증에 가까운 댓글들이 증명하듯, 3년 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상영되었을 때의 흥겨운 반응이 이미 입증했듯, <나는 파리다>는 충분히 즐기고도 남을, 넉넉한 즐거움의 영화다. 여기에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후 3분도 안 되어서 엔딩 크레디트를 올려 버리는 그 성급한 엔딩이라니! 그런데… 이 영화의 시작이, 아빠가 어린 딸에게 해주는 베드 타임 스토리 아니었던가? 잠자기 전에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아빠라니… 후덜덜한 설정이다. P.S. 1 안타깝게도 IPTV에선 만날 수 없어서 녹색 창이 유명한 포털 사이트를 통해 다운로드 받아 모니터로 볼 수밖에 없었다. 이 글을 통해 IPTV의 조속한 서비스를 촉구한다. P.S. 2 원래 버전은 145분이지만 국내에선 107분 버전으로 줄여서 유통되면서 과도한 편집이 있었던 모양이다. 이 글을 통해 풀 버전의 공개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