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이름으로
- 감독
- 서동훈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양영조, 서동훈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
2. ‘늑대소년’ 에피소드 2011.9.1 ~ 2011.12.20 프리 프로덕션 2011.12.21 ~ 2012.4.15 프로덕션. 총 67회차 후반 작업 후 2012.10.31.(개봉) 프리 프로덕션 너무나 감사하게도 흔히 말하는 대박이 났던 영화. 그러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첫 시작은 전망이 그리 밝지 않았었다. 물론 당시 감독님은 < 남매의 집 > < 짐승의 끝 >으로 한창 주목받는 신예였지만 상업영화 스태프들의 눈에는 여전히 신인 감독이라는 색안경이 있었고 주연이었던 송중기 도 지금은 아시아의 프린스지만 당시는 라이징 스타 정도. 박보영 또한 과거 히트를 친 경험이 있는 배우였지만 몇 년 쉰 후의 복귀작이라 주변에서 불안해하는 이들도 많았다. 더군다나 다른 팀의 영화 만드는 친구들은 이런저런 이야기 중 “뭐 대충은 알겠고, 그럼 너네 영화 내용은 뭐냐? ” 라고 물었을 때 “첫 사랑 이야기고 꽃미남 소년이 늑대로 변신해. 그리고 늙지 않고 나중에 할머니가 된 소녀와 다시 만나는 이야기야” 라고 했을 때 10명 중 9명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늑대로 변신한다고? 누가, 사람이? ...... 그게 되겠냐? 한국에서 판타지는 안돼!” 그들의 예상은 시원하게 틀렸지만 리얼리티의 맹신자! 한국 관객들의 특성을 우리도 알고 있었기에 걱정이 한가득 이었다. 그래서 우리가 프리 프로덕션을 하면서 가장 공을 들였던 것들은 역시나 늑대. 송중기 =철수 역이었다. 관객들이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어떻게 하면 관객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몰입할 수 있는 설득력을 가질까? 였다. 그 첫째가 우선 비주얼 문제. 소년이었을 때 모습과 늑대가 되었을 때 모습. 소년이었을 때야 뭐 중기가 워낙 꽃미남이라 걱정 안 했지만 늑대로 변신한 모습은 중기 본인과 모든 스태프들의 최대 관심사였다. 둘째로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늑대소년이 소녀와의 사랑을 통해 길들여져 가는 과정에 몸짓, 감정의 표현들이었다. 왜냐하면 분명 이 영화는 사랑을 속삭이는 멜로물이었기 때문이다. 더욱 디테일한 연기가 필요했다. 20110906 철수 관련 회의록 중 일부 1. 눈 1안 : 사람 눈 → 늑대 눈 2안 : 늑대 눈 → 늑대 눈 (밝기와 동공모양) 2. 이빨 평소 : 사람이빨 같은데 송곳니가 도드라져있다. / 변했을 때 : 더 부각이 된다.(길어진다) - 4단계 정도 3. 손톱, 발톱 - 자르는 순간:1안. #18씬. (깨져있거나 울퉁불퉁인데 ---- 다듬어진다) / 2안. #28씬 - 자를 필요가 없다. ............................................................... - 평소 : 노말한데 변했을 때 : 더 부각이 된다.(길어진다) 4. 구부정 #12 처음등장은 네 발 짐승 1단계 1안. 처음부터 인간과 만나면서 두 발로 다닌다. 2안. #27부터 두 발이 된다. 2단계 #28씬 --어느새 사람처럼 허리를 거의 핀 철수. 3단계 - #55 이후는 사람에 가까운데 의기소침해서 구부정한 것. 그 이후는 감정에 따라서 구부정의 모습이나 형태가 변한다. - #40에서 인간적인 것보다는 동물적으로 구부정하게 돌아간 철수 단, 순이와 함께할 때는 인간에 더 가깝다. ............................................................... * 개처럼 누워있는 것은 영화 전체적으로 계속적인 철수의 습관이다. 감정에 따라서 그 표현 수위만 조절 (귀엽게 엎드려있기도 하고 화가 날 땐 으르렁 거리면서 엎드려있다) ............................................................... 프리 프로덕션 단계 때는 이런 아이디어 회의를 수도 없이 한다. 보니까 초창기, 가장 기초적 회의라 좀 러프하고 정리가 덜 된 상태지만 이러한 아이디어 회의를 기준으로 야생의 철수가 사람이 되는 모습, 행동의 변화를 시나리오 흐름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눠서 그 단계에 맞는 의상과 분장, 배우의 움직임, 자세를 정교하게 만들었다. 또한 동물의 기본적인 움직임을 익히기 위해 배우 이준혁 선배(움직임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두 달가량 중기가 트레이닝을 받았다. 러프 콘티가 나와 있는 상태였고 (기본적인 동선) 이것을 기준으로 씬 별로 준혁 선배가 동물의 기본적인 습관, 움직임을 보여주고 아이디어를 주면 중기는 그 움직임을 베이스로 본인 나름의 재해석한 연기를 했고 우리 연출부는 매번 연습장면을 찍고 감독님과 배우에게 전달했었다. 그리고 각자 그 영상을 보면서 촬영 전에 연출과 액팅을 시뮬레이션했고 조금씩 약점을 개선해 나갔다. 또한 관심사였던 철수가 괴물로 변신했을 때의 모습은 감독님이 직접 디자인을 해서 만들었다. 조성희 감독님의 주특기가 시각 디자인 전공에 CG 회사에서 일한 경험도 있고 워낙 비주얼에 관해서는 본인 생각이 확고한 사람이라 본인이 그린 괴물을 스태프들에게 보여줬을 때 모두들 굉장히 만족해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영상작업에서 단순한 스케치라도 시각화를 해야 이야기를 나누기도 편하고 그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기도 좋은데 괴물의 모습이 탄생하면서 의상, 분장, 특분, CG, 특효, 무술 등의 여러 파트에 준비작업 속도가 매우 빨라졌다. 감독 자신이 생각하는 이미지, 메시지가 분명하다는 것은 영화작업에 있어서 매우 큰 장점이다. 분명 스태프들로부터 더 큰 선물을 받을 가능성이 크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1 2012년 2월 9일. 29회차 촬영 스케줄표 (스태프들끼리는 촬영 달력이라고 부르는데 촬영 내용을 간단하게 표시한 요약집 같은 거다) #41D. 지태( 유연석 )가 순이( 박보영 )를 괴롭히고 때리는 것을 지켜보던 철수가 화를 참지 못하고 영화상 처음 괴물로 변신하던 날이었다. 밤 촬영이었고 지태와 그 친구들이 철수와 복잡한 액션을 찍는 첫날이었고 괴물로 변한 철수의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다가 관객들에게 처음 완전체를 보여주는 날이라 우리 영화에 흥망이 달린 촬영 날이라고 생각했었다. 낮부터 촬영장에는 스태프들, 배우들이 총출동해서 액션 동선을 점검하고 그에 따른 안전장치, 와이어, 와이어 크레인, 액션의 효과를 살리기 위해 사전에 약속된 소품, 특수효과들을 준비하느라 에너지가 넘쳐났다. 나는 감독님들과 찍는 순서, 디테일한 세부 사항을 약속하고서 다시 그 결과를 스태프들과 공유했다. 겨울 촬영이라 해는 금방 넘어갔고 다들 저녁을 먹은 뒤 본격적인 밤 촬영을 준비했다. 촬영장은 전주 양묘장이라고 전주시에서 쓰레기 매립장으로 쓰던 공터였는데 그곳에 순이 집의 외관 껍데기를 만들어 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이 오픈 세트장에서 며칠 촬영하며 안 사실이었지만 쓰레기 매립장이어서 그랬는지 밤이 되면 땅속에서 어떤 가스와 습기들이 올라와서 지표면을 뿌옇게 채웠었는데 이 습기들이 우리에게 엄청난 추위를 선물했었다. 이날도 고작(?) 영하 10도였지만 실제 우리가 느낀 체감 온도는 그 차가운 습기 때문에 더욱 덜덜덜 + 덜덜 이었다. 저 멀리 크레인이 올라가고 영화용 달이 뜨면서 현장 세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이어서 2시간 정도의 특수 분장을 마친 중기가... 아니 늑대소년이 현장에 왔다. 그가 왔을 때 스태프들의 표정은 아직 생생하다. 풀 세트를 장착한 늑대소년을 사진으로만 본 사람도 있고 처음 본 사람도 있었는데 그들 모두의 표정은 말하고 있었다. “맞나...? 맞을 거야... 맞나? 맞을 거야... 아닌가...? 맞을 거야.” 상상하던 모습을 사진으로 보는 것과 실물로 보는 것. 그것을 다시 영화적으로 만져서 극장에서 보는 모습은 전혀 다르다. 본인들도 경험상 매우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몇 개월 동안 시나리오라는 같은 글을 수십 번 읽으면 각자가 상상한 늑대소년의 모습은 서로서로가 다르고 내심 자신의 판타지를 닮았기를 바란다. 감독이 결정한 모습이 있음에도 말이다. 참 재밌는 현상인데 스태프는 작업자이자 동시에 이 영화의 첫 관객이기도 하다. 영화 스태프를 하며 자신의 상상과 현실을 이어보려고 하는 모습들을 볼 때면 참 진귀한 풍경이다. 꿈속에서 보던 백마 탄 왕자를 현실에서 만나고 싶은 마음. 농담이 아니고 딱 그거다. 그리고 그래서 영화를 만드는 거라 생각한다. 여담인데 마찬가지 이유로 스태프들은 영화 작업을 하는 몇 개월을 시나리오를 통한 반복 학습을 하며 각자만의 상상 속에서 살게 되는데 이 효과가 얼마나 강력하고도 강력한지 나는 알고 있다. 한 예로 이전 멜로영화를 만들다 보면 현장에서 탄생하는 커플들이 유독 많았고 액션 하드코어를 찍다 보면 현장 분위기가 우울하고 드셌다. 공포 영화를 찍다 보면 꼭 세트장에서 귀신 봤다는 스태프들이 등장했고 한때 섹시 코미디 영화를 작업했던 나는.................. 흠. 어쨌든 그 날은 현장 스태프가 100명이 훌쩍 넘었고 모두가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대규모 전투를 치르듯이 찍기 시작했다. 나는 속으로 관객들이 제발 괴물이 된 늑대소년을 처음 보고서 “에이 이게 뭐야! 말이 돼?” 라는 반응만 안 하길 빌며 촬영을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럴 새도 없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또 난이도가 있던 촬영이라 그랬는지 예상치 못한 사고들도 발생하기 시작했다. 괴물이 된 늑대소년이라 컬러렌즈를 꼈고 송곳니가 달린 가짜 치아를 끼고 있었는데 찍은 지 얼마 안 된 시점에 액션 중 송곳니가 부러졌고 그 조각이 중기 목에 걸리는 사고도 났었고 눈에 낀 칼라렌즈 때문에 많이 힘들어 했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한 컷 한 컷 찍어가며 철수가 나쁜 놈들을 이리 던지고 저리 물리치던 #41D는 3일이 걸려서야 끝이 났다. 지금도 사랑하는 여자를 구하기 위해 괴물이 된 철수가 차가운 입김을 내뱉으며 카메라 쪽으로 다가오다가 전주 밤하늘을 향해 있는 힘껏 포효하던, 그 새벽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중기가 용기 있게 잘해낸 씬 이라고 생각한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2 2012년 1월 3일. 9회차 촬영 스케줄표 #38B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철수와 순이. 둘 만의 데이트. 순이가 철수를 위해 자신이 만든 노래를 기타연주와 함께 들려준다. 보영이는 현장에 마스코트. 분위기 메이커였다. 싹싹했고 누구와도 거리낌 없이 잘 어울렸고 의외로 터프했다. 이날은 보영이가 프리 내내 연습하고 연습했던 기타연주와 노래를 뽐낼 시간이었다. 순이가 된 보영이는 거실 소파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고 철수는 마룻바닥에 앉아 두 손을 모으고 노래를 하는 순이를 지긋이 바라본다. 둘의 감정이 싹트기 시작하는 중요한 씬이었고 아름다운 감정씬이었다. 두 대의 카메라가 순이를 향해 있었고 멜로의 뽀샤시한 그림을 만들기 위해 조명 감독 형은 앉아있는 순이의 뒤통수가 정말 타들어 갈 정도로 강력한 HMI 조명들을 몇 개나 설치했다. 연주를 시작하는 순이. 그 날의 첫 샷. 첫 테이크를 찍을 때의 그 순간. 그 순간이 기억에 많이 남는다. A캠이 트래킹을 하며 순이의 메인 컷을 찍고 있었고 B캠은 약간 옆쪽에서 기타를 연주하는 순이의 손과 얼굴 위주로 FOLLOW 하며 찍었고 대부분의 스태프들은 거실 바닥에 앉은 체 그녀의 단독 콘서트를 숨죽이며 보고 있었다. 음악 감독님 작곡. 감독님 작사에 ‘나의 왕자님’ 이란 노래가 시작되었고 이 넓은 전주 세트장에 아름다운 기타 연주와 순이의 수줍은 목소리만이 울려 퍼졌다. 나는 뒤쪽으로 살짝 빠져서 이 촬영장 전체의 풍경을 감상하고 있었는데 뭔가 뭉클하고 알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스태프들 얼굴을 보니까 구경하는 남자 스태프들은 이미 눈이 달나라, 별나라로 향해 있었고 여자 스태프들은 ‘흥, 칫, 뿡’. 괜한 팔짱을 끼면서도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재미났던 것은 노래가 끝나고 몇 초의 적막이 흐른 뒤 감독님의 컷 소리가 났는데도 보통 때 같았으면 컷 소리와 함께 다음 컷 준비로 소리 지르며 바로바로 소란스럽게 움직였을 사람들이 쥐죽은 듯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레드 썬! 과 동시에 별나라 여행을 갔던 사람들이 최면이 풀리면서 지구에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던가 보다. 그 후로도 몇 초가 지나서야 조심스레 다음 컷을 준비하기 시작한 스태프들. “이보게나, 정신들 차리게.” “아... 네. 네. 배시시” 미소 짓는 그들의 얼굴은 뭔가 밝고 따뜻하며 다정다감한, 원래 항상 착했던 사람들처럼 변신해 있었다. 조감독을 하면서 겪게 되는 이런 순간들은 참으로 신비하고도 놀랍다. 다음 컷을 준비하는 스태프들이 평소보다 더 신중하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어이쿠야. 안 하던 양보도 하고 어울리지도 않는 애기 미소를 지으며 따뜻한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 여기저기서 보영이의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하고. 행복해진 것이다. 이 뜻은 그 장면이 본인들이 상상해왔던 것만큼 잘 찍혔다는 이야기고 관객들에게 보여줘도 부끄럽지 않을 씬이 탄생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모습을 ‘영화 현장의 마법’이라 부른다고 생각한다. 이 만족감에 취해 아드레날린이 급상승한 스태프들은 다시 최선을 다해 영화의 장면에 좋은 에너지를 불어 넣는다. 이렇게 촬영을 하는 날은 안 봐도 뻔하다. 그 날 촬영 회차에 점수를 매기라면 분명 10점 만점에 100점이다. 프로덕션: 기억에 남는 촬영 3 2012년 2월 18일. 35회차 촬영 스케줄표 우리가 아무리 준비를 잘해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있다. 그것은 자연이다. 조감독들의 가장 큰 숙제이자 적. 촬영장에 생기는 대다수의 변수들은 정말 정 안되면 스태프들이 으싸으싸 하던지 그것도 안 되면 결국 돈으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자연은 답이 없다. 촬영 스케줄이라는 것이 100명의 사람들, 그리고 각각의 팀들이 세팅하고 작업하는데 필요한 적절한 시간, 수십 명의 배우들에 개인 스케줄들, 촬영 장소별 섭외 여건, 세트의 완공 시기, 비싼 소품과 장비의 대여 기간 등등등등.... 하물며 야식 먹는 시간까지. 거짓말 안 하고 수십, 수백 가지의 요소와 가능성을 생각해서 짠 거대한 테트리스 같은 건데 인간의 일들은 설득이란 게 있고 섭외라는 것이 있을 수 있지만 자연은 말이 없다. 그리고 이 변수 때문에 스케줄이 꼬이기 시작하면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도미노처럼 발생하고 어마어마한 제작비가 초과되기 일쑤다. 한 예로 여름 장마 기간, 태풍에 크게 잘못 걸린 팀은 보름 가까이 쉬는 팀도 봤었다. 제작자, 피디 형들의 가슴은 타들어 가고도 타들어 갔을 것이다. 그리고 보통 날씨가 오락가락하면 그 날을 애초에 쉬는 날로 하느냐, 아니면 현장에 나가서 상황을 지켜보며 대기를 타느냐의 판단도 늘 촬영 때마다 있는 가슴 졸이는 일이다. 보통 촬영장에 기본적으로 있는 스태프의 수가 70명가량이고 움직이는 차량이 십여 대가 훌쩍 넘는다. 서울에서 대기를 타고 있는 수십 명의 배우들은 계속해서 전화를 건다. “우리 촬영장 가요, 말아요? 찍는 겁니까, 안 찍는 겁니까? 언제 결정이 나나요?” 글을 쓰면서도 스트레스가 확 밀려온다. 어쨌든 우리는 겨울 촬영이었고 우리의 변수는 비. 눈. 한파였다. 그래서 애초에 메인 촬영 장소를 강원도나 북쪽이 아닌 남쪽 지방에서 찾았고 전주를 중심으로 촬영 장소를 선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기상청을 통해 전라도 지역에 도시별 5년간 적설량, 강우량을 뽑아서 촬영 스케줄에 반영했다. 예를 들어 2008년부터 쭉 데이터를 뽑아보니 우리가 찍는 2012년. 짝수년이 더 추워서 비보다 눈 위주로 많이 왔고(다행히) 그 짝수년들을 보니까 12월 중순부터 1월 말까지 눈이 많이 내렸고 2월부터는 간간히 눈이 오더라. 라는 나름의 통계를 뽑을 수 있었다. 물론 100프로 확신할 수는 없지만 결국 기댈 수 있는 것은 반복적인 데이터였다. 그래도 갑자기 내리는 비와 눈은 하늘의 뜻이니 불만을 가질 필요도 없고. 어쨌든 이 자료를 디테일하게 반영해서 전주에 내려간 12월 중순부터 1월 말까지는 야외 촬영 없이 전주 세트장 안에서 내부 세트만 촬영을 하고 1월 이후에 야외로 나간다, 라는 큰 그림을 그렸고 만약 야외 촬영 중 눈이나 비의 변수가 생길 경우 당장 가까운 거리에 점프해서 촬영할 수 있는 예비 촬영 장소와 찍을 것들도 2안으로 준비했었다. 그런데 우리 영화에 또 다른 숙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위 스케줄 표에 나와 있는 눈 배경 장면이었다. 그것도 영화의 마지막 시퀀스. 눈이 와 있는 추억의 별장을 노인이 된 순이가 찾아가는 장면과 영화의 에필로그. 혼자 남은 철수가 여전히 순이를 추억하며 눈사람을 만드는 모습. 그래서 이 장면들은 고창 청보리밭에서 찍기로 했었는데 그 이유는 콘셉트에도 맞는 목가적 풍경을 가지고 있었고 전라북도 지역에서 눈이 자주 오는 곳이기도 했고 메인 거점이었던 전주에서 차량으로 한 시간 반 거리라 전주에서 변수가 생길 시에 언제든 점프를 할 수 있는 장소였었다. 촬영 스케줄 상 이 씬들은 어느 날짜라고 픽스를 짓지 않았고 전주 야외 촬영 중 고창에 충분한 눈이 내리면 언제든 점프한다는 각오로 준비했다. 그러던 중 첫 번째 기회가 찾아 왔다. 2012년 1월 31일. 전주 양묘장 오픈 세트장에서 야외 촬영을 시작한 지 두 번째 날, 일기예보와 다르게 낮인데 하늘이 어둑어둑해지더니 마당에서 감자를 우걱우걱 집어 먹는 철수의 머리 위로 함박눈이 내렸다. 이곳의 촬영은 이미 불가능한 상태였고 긴급회의를 열어 고창 쪽 상황을 알아보니까 그쪽에도 눈이 내리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미 이때 시간이 오후 1시 무렵이었고 고창 쪽에 지금 내린 눈이 쌓인다면 내일 점프한다는 계획이었지만 다음 날 까지 눈이 유지될 가능성도 낮아 보였다. 결국 그 날은 모두가 만세를 외치는 휴차(쉬는 회차)가 되었다. 두 번째 기회가 찾아 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는데 전주에는 저녁부터 비가 내리고 있었고 전라북도 전 지역에 걸쳐서 내리는 비였다. 그리고 고창지역은 늦은 밤부터 비가 눈이 돼서 적설량이 5cm가 넘는다는 애매하고도 애매한 예보였다. 다시 긴급회의가 열렸고 제작부장과 내가 고창 쪽에 넘어가서 새벽 2시까지 상황을 지켜본 후 다음 날 고창에서 촬영을 할지 말지에 대해 상황보고를 하기로 했다. 사실 이 계획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는 시선이 다수였지만 내 입장에서는 2월에서 3월로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어쩌면 눈 내린 들판 장면을 못 찍지나 않을까 하는 또 다른 걱정에 밀어붙이기로 했었던 기억이 난다. 당연히 스태프들 또한 전주 숙소에서 편히 쉬지도 못하고 새벽까지 대기를 타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밤 12시부터 고창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폭설이었다. 쌓이지 않는 폭설. 싸리 눈이었다. 제작부장과 나는 쓸쓸히 전주로 돌아갔다. 이번에도 실패였다. 2월이 가고 있었다. 3월이 되면 우리는 다른 촬영 관계상 전라도를 떠야 하는 상황이었고 이제는 오히려 눈이 내리기를 빌고 또 빌었다. 그러던 중 날짜가 서서히 박혔다. 2012년 2월 18일. 이미 일주일 전부터 전북 지역 전역에 걸쳐 폭설이 예보돼 있었고 그 날이 하루하루 가까워질수록 일기 예보의 확률은 더욱 높아져만 갔다. 하루 전날 연출부 세컨 동생과 제작실장이 이전과 마찬가지로 고창 청보리밭으로 급파됐다. 이날의 일기예보는 늦은 밤부터 다음날 오전까지 폭설이 예보되어 있었고 그 예보가 몇 일째 변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숙소에서 콩닥 콩닥 마음 졸이며 삼십 분에 한 번꼴로 체크 전화를 걸어서 욕을 먹던 중, 열 시를 넘을 무렵 희망찬 메시지가 날아왔다. “조감독님, 눈 옵니다. 폭설입니다.” 그리고 몇 시간 뒤에 현장 사진이 날라 왔다. 대략 3cm 정도의 눈이 내린 상태였고 내일 오전까지 내리고 기온도 영하라고 하니 긍정적인 상황이었다. 빠르게 키 스태프들과 의논을 했고 다음 날 촬영을 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낮 촬영이고 이동 거리가 한 시간 반이라 스태프들은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부랴부랴 촬영장을 향했고 촬영장을 향하는 동안 오히려 폭설을 해치며 가느라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했을 때. 그 넓고 넓은 평야에 하얀 눈이 소복하게 쌓여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이때 저 멀리서 선발대로 와있던 연출부 동생이랑 제작실장이 새벽어둠을 뚫고 뚜벅뚜벅 눈을 맞으며 걸어오는데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가장 넓은 샷을 우선 찍었다. 함박눈이 내리는 넓은 벌판 위에서 철수가 열심히 눈사람을 만들고 있었다. 그 날, 그리고 그다음 날 눈 내린 배경에 촬영은 순조롭게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찍었던 엔딩 장면을 우리는 추후 3월 14일. 대관령에 가서 재촬영을 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뭐 그런 것이 촬영이라고 생각한다. 실제 영화 마지막에 눈사람 굴리는 철수의 장면은 대관령 촬영 분량이 쓰였고 그 외에 노인이 된 순이 장면은 고창 청보리밭 촬영 분량이 쓰였다. 3 마무리 영화 스태프들이 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촬영 때는 늘 피곤하고 스트레스 만땅 이지만 촬영이 끝나고 시간이 조금 지나면 다시 근질근질해지고 그리워지는 게 현장이라고. 그리고 다음 작품은 보다 내 취향과 잘 맞는 시나리오, 감독님과 작업하기를 늘 꿈꾼다. 내 취향에 맞는 일을 할 때, 나랑 잘 맞는 사람들과 일을 할 때만큼 행복한 순간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나의 손때가 뭍은, 내가 찾은, 내가 캐스팅한, 내가 찍은, 내 손으로 만든 나의 아이디어가 들어간 장면들이 스크린에 펼쳐질 때 그 희열이란 한 번이라도 맛을 보고 나면 중독이 돼서. 그래서 다시 영화 촬영장을 그리워하고 꿈꾸는 것 같다. 감독님들. 배우. 스태프들. 정해진 시간 속에서 같이 밤을 새우고 같은 비바람을 견디며 영원히 기억될 영화를 만든다. 뭐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사실 모두가 좋아서 이 일을 할 뿐이다. 앞으로도 좋은 영화가 많이 만들어지길,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2012년 유바리판타스틱영화제의 그랑프리는 폭력 전문 감독 이시하라 타카히로의 <오사카 폭력 사건>에게 돌아갔다. 심사위원 대상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도 상영된 바 있는 스즈키 타이치의 <네 멋대로 해라!>였다. 가장 큰 대중적 호응을 얻은 관객상은 작년에 한국에서도 개봉되었던 < 울트라맨 사가 >였다. 하지만 영화제 내내 평론가와 관객들이 “그 영화 봤어?”라며 수군거렸던 영화는 따로 있었다. 오하타 하지메라는 신인 감독이 만든, 단편이라고 하기엔 길고 장편이 되기엔 부족한, 53분짜리 중편 영화 < 기묘한 사랑 >이다. 원제는 ‘へんげ’(?化). ‘원래의 모습을 바꾸어 나타남’, ‘괴물’, ‘요괴’ 등의 뜻을 지닌 ‘헹게’라는 제목은 매우 직접적이며 정직하지만, 중의적이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 요시아키(아이자와 카즈나리)는 괴물로 변해간다. 제목 그대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진짜로 끊임없는 변이를 보여주는 사람은 감독인 오하타 하지메다. 한 시간도 안 되는 짧은 러닝 타임 안에서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호러 관련 인덱스를 끊임없이 펼쳐간다.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라는 부제로 시작하는 영화는 어느 병원 기록 화면을 보여준다. 2008년에 촬영된 영상엔 구속복을 입은 요시아키가 있다. ‘최면 요법 및 관념 운동’이라는 제목의 영상 속에서 요시아키는 바닥을 뒹굴며 극도의 발작 증세를 보인다. 카메라는 뒤로 빠지면, 그 장면을 모니터로 보고 있는 요시아키가 있다. 과거 자신이 받았던 모습을 마치 추억을 되새기듯 다시 보는 남편이 케이코(모리타 아키)는 불만스럽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과거를 떠올리지 말라며, CD를 부숴 버린다. 그렇다면 요시아키는 완치된 걸까? 아니다. 후배이자 의사인 사카시타(노부쿠니 테루히코)는 정기적으로 방문해 병세를 체크한다. 요시아키는 여전히 3일에 한 번씩은 발작을 하며, 제대로 된 외출을 못 한 지 2년이 넘었다. 그리고 수많은 벌레 같은 것이 자신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말한다. 과연 그는 어떤 상태인 걸까? 발작의 원인은 무엇이며, 그의 정신세계에 대한 정확한 의학적 진단은 무엇일까? 하지만 < 기묘한 사랑 >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는 의외의 행보를 보여준다. 어느 날 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킨 요시아키의 한쪽 발이 괴물처럼 변한다. 저예산 영화인지라 조악한 특수 분장으로 한눈에 합성수지로 만든, 마치 고릴라 가면 같은 고무 질감이 느껴지는 가짜 발임을 한눈에 알 수 있긴 하지만, 그의 변신은 예상치 못했고 자못 충격적이다. 여기서 우린, 혹시 이 영화의 모티브가 카프카의 「변신」은 아닌가 살짝 의심하게 된다.(게다가 요시아키는 벌레가 자신의 의식을 지배한다고 말하지 않던가!).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의 침울한 톤과 카프카가 만난 영화? 그런데 영화는 예상을 빗나간다. 다음 날 사카시타가 방문해 최면 요법을 걸자 요시아키는 소리를 지른다. “이소니레가니마레아모!” 그러자 유리잔이 깨지고, 요시아키는 발작을 일으키며 오른팔의 변이를 일으킨다. 결국 다시 병원에 격리되는 요시아키. 이후 의사 사카시타는 케이코를 찾아와 이상한 말을 한다. 요시아키가 내뱉은 말이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 언어라는 것이다(이 단어의 의미는 이후 ‘세계의 총의(總意)’, 즉 인간을 제외한 모든 존재의 의식으로 밝혀진다). 동물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았던 시기의 존재로 회귀하는 인간? 여기서 갑자기 영화는 오컬트 장르나 < 캣 피플 >(폴 슈레이더, 1982) 류의 호러를 연상시킨다. 하지만 영화는 여기서 머물지 않는다. 병원에서 탈출한 요시아키는 괴물로 변해 밤에 사람들을 해치는 연쇄살인마가 된다. 사람을 죽여 인육을 먹는 그의 모습은 좀비와 다를 바 없으며, 밤에 변한다는 점에서 늑대인간을 떠올리게 한다. 집으로 찾아온 요시아키. 아내는 퇴마사를 불러 남편 안에 있는 악령을 내쫓으려 하고, 영화는 갑자기 < 엑소시스트 >(윌리엄 프리드킨, 1973) 같은 퇴마 호러가 된다. 여기서 방심하면 안 된다. < 기묘한 사랑 >의 콘셉트는 앞으로도 서너 번은 더 변해가며, 후반부엔 급기야 도시 재난 영화와 괴수 영화와 만난다. 초반부에 순진하게 카프카의 「변신」을 떠올렸던 관객을 무색하게 만드는, 과격한 결말인 셈이다. 데뷔작을 맞이하는 오하타 하지메 감독의 태도는 쿨하면서도 야심 차고 진실하다. 이 영화에서 발작이나 변이 같은 현상은 맥거핀에 지나지 않는다. 마치 요시아키가 어떤 외부적인 초현실적 존재에 의해 사로잡혀 이런 증상을 드러내는 것처럼 냄새를 피우지만, 솔직히 감독은 그 이유를 밝히는 것 따위엔 관심 없어 보인다. 대신 그에게 중요한 건 눈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다리가 변하고, 팔이 변하고, 온몸이 변해 괴물처럼 되고, 사람을 죽여 시체를 뜯어 먹고, 얼굴이 뭉그러지고, 괴수가 되고…. 이 과정에 따라 영화는 ‘호러 판타지’라는 테두리 안에서 미친 듯이 요동치고, 관객은 빠른 걸음으로 따라가야 한다. 부족한 제작비 안에서 최선을 다한 특수효과와 특수촬영이 가상하고, 너무 티 나는 컴퓨터 그래픽이 조금 안쓰럽기도 하지만, 장르적 역동성이라는 콘셉트만 놓고 본다면 < 기묘한 사랑 >을 능가하는 영화는 좀처럼 만나기 힘들다. 그러면서 영화는 일본 영화의 장르적 전통과 B 무비의 유산을 소중히 계승한다. 우린 < 기묘한 사랑 >을 보면서 이 영화가 한 부부의 러브 스토리라는 걸 상기해야 한다. 그리고 ‘극단적 사랑 이야기’라는 일본 영화 특유의 정서는 <기묘한 사랑>에서 진정한 극단을 만난다. 영화 첫 장면, 케이코는 뭔가 악몽을 꾸는 듯하지만 자세히 보면 자신의 몸을 더듬고 있다. 욕구 불만 상태다. 그녀의 욕망은 남편이 괴물이 된 후에 해소된다(직접적인 섹스 신을 보여주진 않지만). 그러면서 영화는 < 킹콩 >이나 < 미녀와 야수 > 같은 괴물-여성의 순애보 성격을 띠기도 하며, 케이코는 밤거리에서 남자를 유혹해 집으로 데려와 남편에게 ‘먹이’로 주기도 한다. 곤란한 정도로 뒤섞인 결합이며, 심각한 장르적 오지랖이다. 츠카모토 신야의 < 철남 >(1989)를 떠올리는 것도 그다지 무리는 아니다. <철남>이 사이버 펑크의 테마 안에서 저예산 영화의 상상력을 드러낸다면, < 기묘한 사랑 >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부터 카프카의 소설과 오컬트 무비와 괴수 영화를 가로지르는 신체 변형의 이야기다. 여기서 오하타 감독은 그 신체에, “현대 일본 사회의 병폐” 운운하며 사회적 의미를 담는다거나, “존재의 타자성” 등을 들이대며 철학적 화두를 던지는 무리수를 두진 않는다. 대신 괴물이라는 크리처를 각종 클리셰의 격전지로 만들고, 오로지 그 결과물과 장르적 쾌감 속에서 만족한다. 오타쿠의 과시적 욕구? 혹은 아날로그적 B 무비의 상상력에 대한 오마주다. 장르 영화의 매끈하고 판타스틱한 이미지에 익숙한 관객이라면 < 기묘한 사랑 >의 어두운 화면과 조잡한 특수효과가 불편하고 낯설 수도 있겠다. 하지만 겨우 53분이며, 이 시간만 투자하면 당신은 근래 들어 가장 ‘경제적인’, 홈 쇼핑 용어로 바꾼다면 ‘구성이 알찬’ 호러 한 편을 만나게 될 거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 이 영화는 내내 호러인 척 하지만, 감독은 서두부터 이 영화가 ‘어느 부부의 사랑 이야기’임을 못 박았고, 다소 기묘하긴 하지만 영화는 이 선언에서 단 한 순간도 이탈하지 않는다. 그리고 우린 믿는다. 그들의 사랑은 변하지 않을 것임을. 케이코의 사랑을 통해 언젠가는 요시아키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갈 것임을. 그렇게 그들은 영원히 행복할 것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