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종병기 전랑:마약전쟁
- 감독
- 후걸
- 제작년도
- 2018
- 출연
- 부굉명, 임가락
한국 호러 영화가 비루한 조국의 건축 상황 때문에 애를 먹는다는 이야기는 전에도 했다. 성과 대저택이 있어야 제목도 근사하게 뽑고 그림도 나올 텐데, 현대 남한 땅에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박윤교 가 감독하고 이종세가 각본을 쓴 < 마녀성 >에도 성은 안 나온다. 대신 영화는 제목의 성을 대체할 나쁘지 않은 공간을 찾아낸다. 바로 화장장이다. 화장장이라고 특별히 무서운 곳이어야 할 이유는 없지만 그래도 이 공간에 대한 당시 한국 관객들의 편견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면 효과가 꽤 그럴싸했을 것이다. 요새 추모공원에 익숙한 관객들에겐 먹히지 않겠지만. 오프닝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등장하는 것도 화장장이다. 지문을 읽어보자. 뇌성벽력이 일면서 비바람이 사납게 분다. (중략) 번개불에 들어나는 화장장의 검은 굴뚝과 을시년스런 건물. (중략) 어디선가 비 바람결에 들려오는 여인의 애절한 통곡소리. 이후 등장하는 것들은 거미줄, 번개, 비바람, 뇌성, 호롱불. 이 정도면 호러 영화 분위기용 소도구들이 총동원된다고 할 수 있다.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 희정은 아시아 영화에 단골처럼 등장하는 클럽 가수이다. 당연히 미인이고 (‘백옥같이 아름다운 얼굴, 그 어딘가 우수에 가득 찬 얼굴, 무언가 깊은 사연이 있는 눈동자’) 단골 팬들의 충성도도 높다. 지금 희정은 백영민이라는 모 회사의 전무와 연애 중인데, 영민의 청혼을 계속 거절하는 중이다. 그러는 동안 유부남 시절(현재는 상처한 상태)부터 희정을 따라다니는 스토커가 하나 있는데, 그는 상현이라는 악당이다. 여기서 악당이라는 걸 강조하는 이유는 더 이상 내가, 이런 행동을 나쁜 짓으로 인식하는 게 상식인 문명국에 살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여간 대사를 보면 둘이 어떤 관계인지, 상현이 어떤 인간인지, 이 영화가 만들어진 60년대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어떤지 드러난다. 생각 같아서는 2010년대 문명인의 관점에서 마구 비웃어주고 싶지만... 하여간 들어보시라. 상현: 딴 놈이 생긴 모양이군. 허지만 난 아직 널 놓아주질 않았어. 이 김상현이가 그렇게 호락호락 할줄 알았나? 희정: 그래서 어떻게 하실 작정이죠? 상현: 어떡하다니? 결혼을 해야지. 희정: 뭐요? 상현: 왜 놀라지? 네게 있어서 나는 처음 남자라지 않았어? 그렇담 내가 책임을 져야지. 희정: 철면피! 그 수많은 여성을 울리고도 아직도 속이 풀리지 않으세요! 흥, 그림자처럼 날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악마! (중략) 상현: 지금 난 어느때 보다도 네가 필요해. 어린것들이 할머니만을 의지하며 자라가는 게 내겐 견딜 수 없는 부담이거든... 아직도 이런 인간을 ‘효자에 상남자’라고 생각하는 독자가 있을 걸 생각하면 2010년대 문명인의 자존심은 허물어져 버린다. 상현과 헤어진 뒤에 화장장과 희정의 관계가 드러난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희정은 화장장에 산다. 아버지인 이 서방은 화장터의 화부이고 이 직업을 조선 시대 백정처럼 수치스러워한다. 그가 직업 말고 수치스러워하는 건 그의 아내이다. 그에게 “젊은 네가 무슨 죄가 있다구. 어서 네 에미가 죽어야 할 텐데”는 당연한 일상 대화이다. 희정의 어머니이고 이 서방의 아내인 그 인물은 지문에 ‘괴여인’이라고 나온다. 여러 차례 묘사가 나오는데 다음과 같다. 헝크러진 기인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허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낡고 땟국이 흐르는 저고리를 입어 흡사 마귀할멈 같은 꼽추. 나중에 이 여인을 목격한 남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쌀자루같은 혹이 가슴까지 내려온 데다가 머리는 산발을 하고 마귀할멈처럼 아주 흉악한 얼굴의... 가장 중요한 외모 특징이 얼굴의 혹인데 처음 묘사에 나오지 않은 건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낀 각본가가 중간에 추가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하여간 희정이 자기에게 무언가 숨기고 있다고 느낀 영민은 한밤중에 희정을 미행한다. 화장장에서 마주친 이 서방이 그를 되돌려보내려 하지만 그는 몰래 화장장 건물로 다시 들어간다. 그의 뒤를 지문이 ‘캡의 사나이’라고 부른 남자가 미행하는데, 그를 뒤에 붙인 건 상현이다. 이 뒤에 벌어지는 소동은 <스쿠비두>의 한 장면 같다. 화장터 테마의 귀신들린 집에서 두 남자가 벌벌 떨며 돌아다니다가 ‘괴여인’을 만나 기겁해 비명을 지르고 기절하거나 달아난다. ‘캡의 사나이’는 용하게 달아나는 데 성공하지만 영민은 그만큼 운이 좋지 못하다. 지문만 읽으면 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택시 안에서 ‘캡의 사나이’의 말을 들은 상현이 ‘어쨋던 눈에 가시같던 그 녀석이 상송장이 되어 화구속으로 들어갔다는 건 좋은 현상이야’라고 말하는 걸 보면 정말 죽었나 보다. 그 뒤로 영민은 그냥 안 나오고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다. Scooby Doo Openings 영민의 실종이 아닌 ‘괴여인’을 갖고 희정을 협박하던 상현은 (“몬도가네의 일급 가수 이희정과...그리고 마귀할멈! 이건 멋있는 탐정소설 감인데 핫핫핫... 어때? 내일 아침 조간에 특종뉴스로 네가 크로즈업 된단 말이야.”) 이번엔 ‘캡의 사나이’와 함께 직접 화장장을 찾는다. 앞에서와 거의 비슷한 소동이 벌어지다가 이번엔 상현이 자기를 공격하는 괴여인을 단도로 찔러 죽인다. 두 남자는 허겁지겁 달아나고 이 서방과 희정은 어머니를 화장한다. 그 뒤의 사건 전개는 어이가 없다. 희정은 정말로 상현과 결혼했다! 이제 이 서방은 화장터 화부 일을 그만두고 상현, 딸, 상현의 어머니 박 씨 그리고 전처가 낳은 아이들과 함께 살고 있다. 아무도 상현이 괴여인의 죽음과 관련 있다고 믿지 않는 거 같다. 이들의 결혼에 상현의 협박이 관여했는지도 알 수 없다. 이후 영화의 무대는 상현의 별장이고, 당연히 귀신이 된 괴여인의 복수가 중심이 된다. 첫 번째 희생자는 ‘캡의 사나이’인데, 지문을 보면... 유리창이 깨어지고 커텐자락이 아무렇게나 바람에 날린다. 그 침대위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처박혀 있는 사나이. 실내의 가구들이 파괴되어 방안이 난장판이다. 암만 봐도 살인 현장인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단지 박씨가 ‘꿈에 볼까 무섭다’며 아들을 현장에 보낼 뿐이다. 화장터에서 사라진 영민의 경우도 그렇고, 60년대 작가들에겐 단역의 죽음 따위는 신경 쓸 필요도 없는 사소한 일이었나? 그 뒤에 벌어지는 일은 주로 전형적인 한국 호러 영화 깜짝쇼의 연속으로, 굳이 자세하게 언급할 생각은 없다. 단지 권선징악이 고픈 독자들을 위해, 영화가 불타는 별장 속에서 괴여인과 상현이 뒹굴면서 끝난다는 것은 밝혀두어야겠지.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상상을 해 본다. 산업통상부 장관이 되어 대국민 기자회견을 통해 그간 정부의 에너지 산업정책에 대한 문제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그에 따른 후속조치로 ‘전국의 원자력 발전소 즉각 폐쇄 및 추가 건설 계획 전면 백지화’ ‘밀양을 비롯한 송전탑 건설계획 전면 철회’ ‘기업들의 산업용 전기요금 인상’ 등을 발표한다면. 혹은 광화문 사거리에서 조선일보 특별판을 무료로 배포해 국가보안법 폐지, 박근혜 정부의 통일정책 비판 및 조건 없는 대북 지원 그리고 고 박정희 대통령의 과거 친일 행적이 기사화된다면. 바쁜 출근길, 직장인들이 이 특별판을 보았을 때 표정들이 어떠할까? 그리고 조선일보 관계자들의 표정은? 생각만 해도 실소가 나온다. 이런 상상이 현실로 된다면 어떠할까? 영화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럴수도... 하지만 이 얘기들은 미국 사회에 두 명의 괴짜 예스맨(앤디와 마이크)들이 벌인 일이고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제대로 한방을 먹인 사실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개봉한 다큐멘터리 < 예스맨 프로젝트 >. 이 영화는 흥행에 힘입어 책으로도 발간되어 나름의 인기를 얻었다. 새삼 이 작품을 이야기하는 시간이 길어졌는데, 현재 기획단계인 다큐멘터리 < 핵 마피아 > 제작에 참여한 나로서는 이런 상상들이 제작의 주요 아이디어가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다큐가 앞뒤 떠나 ‘핵 마피아’에 대해 뭔가 한 방 먹여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서 출발하였기 때문이다. 다큐멘터리 제작 방식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리나라 핵 산업의 문제와 그로 인해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이번에는 좀 다르게 풀고 싶었다. 멀쩡히 잘살고 있는 고향을 떠나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도대체 누구를 위한 에너지 정책인지, 여름마다 반복되는 에너지 절전 캠페인은 정작 기업들은 제외한 채 왜 우리만 열심히 해야 하는지. 실체가 보이지 않는 고통의 ‘가해자’가 누구인지 직접 찾아가고, 만나보고 캐묻고 싶다. 그리고 그들에게 실재적 한방은 아니어도 조금은 균열을 낼 수 있는 유쾌한 펀치를 날려보고 싶다. 그렇게 기획되고 있는 ‘핵 마피아’이기에 예스맨 프로젝트의 통근 사기극들에 대해 이리저리 뜯어보며 우리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지 고심하게 된다. 예스맨(앤디와 마이크)들이 벌이는 여러 사기극들은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상을 바꿔보자는 야심 찬 계획에서 출발한 그들의 ‘사기극’은, 현실의 모순들이 갖고 있는 원인과 배경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그들 나름의 행동으로 책임지려고 한다. 인도 보팔 사건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 사과와 물적 보상(120억 $)을 약속하는 다국적 기업 다우(Dow) 대변인이 BBC와 진행한 공식 인터뷰. 특종은 주변 언론들까지 합세해 대대적으로 보도되고 크게 이슈화된다. 물론 이 보도는 대변인으로 분한 예스맨들(앤디와 마이크)이 벌인 사기극이었다. 언론은 자신들의 실수를 덮고자, 예스맨들의 거짓말이 보팔 사건 피해자들을 분노하게 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한다. 그리고 이후에도 이어지는 예스맨들의 사기 행각에 대해 언론은 지속적으로 그들의 거짓말이 피해자들을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실제로 예스맨들이 만난 사건의 피해자들은 이들이 벌인 사기극에 대해 통쾌해하며 즐거워한다. 오히려 피해자들은 정부와 기업, 언론이 긴 시간 거짓말을 했다고 주장한다. 다국적 기업 다우(Dow)의 윤리적 행동이 주주들의 이탈을 필두로 한 주가 하락으로 귀결될 때 예스맨들은 새로운 결론을 내린다. 시장경제체제의 원리 안에서는 기업의 윤리가 경제적 이윤으로 귀결되지 못함을. 그렇다면 기업만이 아니라 기업의 수익을 보장하는 정부와 주류 경제학자들의 이론적 지원까지 사기극의 대상으로 지명되면서 영화는 정부와 언론으로 확대된 예스맨들의 사기극들을 보여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실소를 금할 수 없었던 것은 밖에서 보면 뻔히 보이는 거짓말과 말도 안 되는 논리와 상품들이 실제로 그 내부에서는 말이 되고 돈이 된다는 것이다. 대안에너지로 발표한 시체 에너지?, 미래 환경의 모든 위험으로부터 보호 가능한 거대 풍선 옷 등... 야유와 비난의 대상이 될 거라 예상한 예스맨들의 발표와 상품에 대해 관련자들은 너무나 진지하고 때로는 적극적인 관심을 표한다. 이것이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맹목성이 갖는 아이러니와 비극이 아닐는지. 영화는 예스맨 스스로도 인정했듯이 그들의 사기극이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여전히 다우(Dow)는 보팔 사건 피해자들을 모른 체하며 기업 홍보에 천문학적인 액수를 쏟아 붓고 뉴올리언스 이주정책은 가난한 주민들을 여전히 거리로 내몰고 있으며, 언론은 정부와 기업의 오래된 거짓말 보다 예스맨들의 작은 거짓말에 더욱 분노한다. 그러나 영화의 마지막은, 뉴욕타임즈의 거짓 특별판을 보며 짧게나마 행복함과 웃음 짓는 시민들을 보여준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예스맨들의 사기극이 결코 끝나지 않을 것임을 알 수 있다. 영화가 세상을 바꿀 수는 없지만 적어도 다른 세상을 꿈꿀 수 있는 희망을 전해준다면 이들의 사기극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영화는 이야기한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이와 같은 사기극이 현실적으로 가능할지 아닐지 한번 해보자며 막무가내로 시작한 ‘핵 마피아’ 다큐멘터리도 (물론 예스맨이 갖고 있는 국제 변호인단의 지지도 없다) ‘핵 마피아’들에게 유쾌한 한방의 사기극을 벌이길 원하는 수많은 잠재 관객들이 있기에 용감한 다큐멘터리 제작에 한번 박차를 가해 보고자 한다.
1. 근대 부르주아 사회의 가장 익숙한 문예 양식이자 사회적 제도이기도 한 로맨스는 그 어원에서부터 통속 혹은 진부함(banality)을 속성으로 갖고 있다. 영화 장르로서의 로맨틱 코미디는 바로 이 진부함의 요소들을 중심으로 재미를 만들어내며 그 핵심에는 로맨스를 로맨틱한 것으로 구성하는 통속적인 조건들의 질서가 있다. 그런 점에서 로맨틱 코미디는 여느 대중 장르보다 다채로운 색깔로 채색된 풍속화로서의 지위를 얻는다. 풍속화를 보는 첫 번째 재미는 젠더관계와 계급, 몸짓과 패션, 매너와 에로티시즘 등 다양한 토픽들을 재현하는 그 표면의 이미지들에 있다. 그러나 진짜 재미는 이러한 이미지들을 배열하는 내부의 질서를 탐색할 때 등장한다. 당대의 삶을 포착하는 어느 한 순간은 무엇과 무엇이 연결되고, 그 연결에서 어떤 힘의 관계가 소묘되며, 이를 바라보는 것은 누구인가라는 내적인 질서에 의해 그 역동적인 힘을 발휘한다. 풍속화로서의 신윤복의 그림에서 그 결정적인 동인이 늘 화폭 구석에 숨어있는 관음적 구경꾼이며 그를 통한 응시가 그 소우주를 통합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점에서 이용민 의 < 서울의 휴일 >은 1950년대 한국의 흥미로운 풍속화인데 특히 풍속의 이미지들과 이를 바라보고 통합하는 응시 사이의 메워지지 않는 간격들 그리고 그로 인한 불안이라는 맥락에서 그렇다. 영화는 산부인과 의사인 희원( 양미희 )과 신문기자 재관( 노능걸 ) 커플이 겪는 휴일 하루 동안의 모험과 그 주변 캐릭터들의 앙상블이 빚어내는 에피소드의 연쇄로 전개된다. 1950년대의 여느 한국영화와 마찬가지로, <서울의 휴일> 역시 당대 한국영화를 관통하는 운동, 즉 근대적 가치의 전지구화와 1950년대의 한국이라는 로컬의 특개성이 절합되는 폭풍 안에 놓여있다. ‘프랜(plan),’ ‘에고이스트’ 등 대화에서 넘쳐나는 영어, 디올(dior) 풍의 튤립 스커트, 맥주와 호텔 라운지,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중산층 주부들의 요트 놀이 등 이른바 ‘서양 라이프스타일’의 품목들(commodities)을 당대 일상의 풍경 안에 빼곡히 채워 넣으면서, 영화는 3세계 포스트 식민경험에서 대중문화가 수행하는 전시(exhibition)의 전형적 양태를 보여준다. 서구화에 대한 판타지적 열망과 로컬 현실의 절합을 매개하는 이 품목들은 고전 할리우드 서사와 양식적 세련미에 대한 이용민 (그리고 1950년대 대부분의 한국 영화감독들)의 열정 안에서 그 매력을 발산한다. 후암동 살인사건의 단서를 쫓는 재관의 카 체이싱 장면이나 살인범과의 육탄 액션 장면은 (당시 열악한 제작조건을 감안했을 때) 제한적이나 다양한 카메라의 움직임과 앵글, 장식적 미장센 등의 시각적 양식에 대한 이용민의 영화적 재량과 취향을 잘 보여준다. 여기에 프랭크 카프라와 프레스톤 스터지스를 오가는 걸작 스크루볼 코미디의 꼼꼼한 참조나 (종종 서사의 흐름을 훼손할 정도로 각각의 장르적 재미가 강조되는) 로맨틱 코미디와 가족 멜로드라마, 액션과 미스터리의 혼용 등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 서울의 휴일 >의 고전 할리우드 양식은 (미리엄 한센의 말을 빌자면) 20세기 초 전지구적 영향력을 갖게 된 미학적, 산업적 규준이자 (미국적) 근대 가치 체계의 운반체인 이른바 ‘통속적 모더니즘(vernacular modernism)’의 장치로 기능한다. 요컨대, <서울의 휴일>에서 형식적 매끈함과는 거리가 먼 채 강박적으로 모방되는 고전 할리우드 양식은 로맨스를 구성하는 판타지의 품목들이 배치되는 재현의 격자, 풍속화를 구성하고 통합하는 ‘응시’의 장소다. 2. 로맨스라는 서사의 우주 안에서 응시가 통합하려는 대상은 바로 성관계다. 대중서사로서 로맨틱 코미디는 성관계를 규정하는 남근적 질서에 대한 대항하는 운동과 이를 다시 그 질서 안에 재포획하여 안정시키는 힘이라는 모순적 관계 안에서 그 재미를 만들어간다. 이른바 ‘신세대’ 엘리트 커플인 희원-재관 부부는 이러한 모순적 힘 관계를 체현하는 주인공이며, 여기에 옆집 부부나 재관의 동료 기자들, 임신한 앞집 처녀와 재관이 우연하게 만나는 ‘살짝 정신 나간 그녀’ 등 그들 주변의 인물들 역시 1950년대 한국의 서구적 근대화를 대표하는 변화 중 하나인 성관계 질서의 변화와 대항을 체현한다. 대개 여성을 중심으로 한 이 성차의 만화경은 (5,60년대 여타 한국영화에서처럼) 돈 버는 아내, 공부 많이 한 여자, 연애하다가 임신한 처녀, 남편 속이고 총각들과 ‘엔조이’하는 주부 등 ‘노는 언니들’에 노골적으로 집착한다. 요컨대, < 서울의 휴일 >의 로맨스 서사 역시 짐짓 20세기 중반 한국 로맨틱 코미디와 멜로드라마를 관통하는 욕망인 ‘즐겨라!’ 명령을 수행하는 언니들이 - 돌아와 반성하거나, 너무 즐기다 쫓겨나면서 - 그 핵심을 구성하고 있으며 이를 다시 기존의 질서 안에 통합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행복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사랑을 확인하는 희원과 재관 위로 서울의 야경과 보름달이 장관을 이루는 이중노출 쇼트는 응시의 시각화 중에서도 가장 일반적으로 뻔뻔한 종류의 이미지다. 그런데 < 서울의 휴일 >을 흥미로운 텍스트인 것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에 대한 강렬한 의지와 그 불완전한 구축, 그리고 서구 근대가치와 로컬의 경험 사이에서 메워지지 않는 구멍, 납득되지 않는 흔적으로 얼룩진 이 응시 때문이다. 영화의 플롯은 ? 이 영화가 재관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 로마의 휴일 >의 오드리 헵번-그레고리 펙 커플의 로맨틱한 휴일과는 정반대로 ? 휴일 하루조차도 함께 할 수 없는 부부의 상황에 기초한다. 특종에 눈이 멀어 아내와의 로맨틱한 휴일도 반납한 재관은 전형적인 목적지향의 히어로로, 문제의 ‘보름달 장면’에서 그가 행복할 수 있는 건 우여곡절 끝에 획득한 특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다. 반면 ‘즐길 준비’가 다 된 희원에게 재관의 목적은 방해물일 뿐이다. 그녀의 로맨틱한 휴일은 오직 일벌레 남편을 기다리다 지친 나머지 펼쳐지는 공상 안에서만 가능하다. 공상하기를 그만둔 희원은 남편 없이 외출을 하지만. 친구들과 다과를 하고 우연히 마주친 남편 동료들과 미니 골프를 즐기고 맥주 한잔을 해도 남편이 없으니 로맨틱할 리가 없다. 영화는 ‘남편 없이 나간 아내’의 화려한 외출을 애써 지루한 것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한마디로, 희원은 놀아도 즐겁지가 않은 여자다. 그녀가 이 이상한 휴일을 행복하게 마감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우연히도 후암동 살인범 아내의 출산을 돕게 된 ‘일’이다. 결국 부부 모두 즐기라는 명령을 온몸으로 신경증적으로 거부하면서 질서정연한 남근적 일상 안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런데 이 지루하기 짝이 없는 플롯 안에서 휴일 내내 어딘가 아리송해하는 희원의 묘한 표정이 자꾸 눈길을 끈다. 친구들과의 다과, 남편 친구들과의 음주라는 발랄한 장면 안에서 희원은 대사도 목적도 없는 묘한 클로즈업으로 종종 포착된다. 그녀의 표정만큼이나 그녀의 휴일이 어리둥절해지는 순간이다. 서사의 용도에 의한 정확한 그림값을 부여받는 재관과 기타 캐릭터들과는 달리, 희원을 둘러싼 이 이상한 장면구성은 고전 할리우드 양식의 불완전한 구현이라 치부하기에는 그녀의 묘한 얼굴을 지나치게 각인시키는 효과를 낳는데 이는 영화의 후반부 살인범 아내의 출산이 끝난 후 링거를 바라보는 희원의 클로즈업에서 가장 도드라진다. 웅장한 음색의 교향악 음색(그녀는 로맨틱한 휴일의 피날레를 이 연주회로 끝내고자 했다)이 깔리는 이 장편은 서사 기능으로는 턱없이 넘치고 성애적 이미지이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 곤혹스러운 무의미의 얼굴은 불쾌의 흔적, 분노의 공격 마냥 그녀의 엔조이를 허락하고 방해하고 통제하는 서사와 응시에 대한 대항하는 것 같다. 이러한 희원의 존재는 무의미로서의 ‘정신 나간 여자,’ 그리고 ‘진격의 엔조이 걸’인 옆집 주부로 인해 더욱 부각된다. 무의미로서의 분열증은 차치하고서라도, 옆집 주부는 < 서울의 휴일 > 아니 당대 한국영화에서 아마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 중의 하나임에 분명하다. 영화의 초반 희원에게 임신 3개월임을 고백하면서 ‘애가 다 뭐람, 귀찮게...“라며 불평하던 그녀는 로맨틱한 휴일을 기대하며 아내를 기다리는 남편을 저버린 채 미용실에서 만난 친구들과 함께 남편 몰래 총각들과의 ‘썸씽’을 즐기다 저녁이 다 되어 귀가한다. 골난 남편을 달래 함께 외식을 즐기는 두 사람의 모습은 금슬 좋은 부르주아 부부의 교과서적 이미지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정자에서 어깨춤을 추는 남편을 귀찮다는 듯 쳐다보며 무심하게 태평가를 부르는 그녀의 얼굴은 ‘유부녀가 엔조이하기엔 정말 피곤한 세상이야’라고 푸념하는 ‘자유부인’의 완전범죄를 대변하는 것 같다. 이렇게 질서의 바깥에 선 무의미와 질서를 교란시키는 쾌락 (그리고 범죄자의 아내와 미혼모라는 주변성) 사이에서, 서구적 근대 여성 희원의 어리둥절한 얼굴은 <서울의 휴일>이라는 풍속도에 덧칠된 흔적, 통합하는 응시가 미처 통제하지 못하는 불안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