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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지배자들
“나는 영화를 보러 간다기보다는 전례 없는 시간성을 즐기기 위해 간다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군. 그래서 영화관에 자주 간다고 말이야” - 장 루이 세페르,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 중 1. 영화는 처음부터 시간의 마술이었다. 1895년 12월 28일, 뤼미에르 형제가 파리의 그랑카페에서 <열차의 도착>을 처음으로 상영했던 바로 그 순간부터, 그들은 시간의 마술사들이었다. 잘 알려진 일화지만 뤼미에르는 ‘움직임을 기록한다’는 의미의 시네마토그라프를 완성한 뒤, 자신의 공장(뤼미에르 형제는 카메라 부품공장을 소유한 자본가들이기도 했다) 사람들과 일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이내 그것을 유료 공개하였다. 뭔가 흥미로운 볼거리를 보여주겠노라고 그들은 호객했고, 호기심에 휩싸인 사람들이 1프랑의 돈을 내고 자리에 앉았을 때, 그는 카페에 인위적 어둠을 만든 뒤, 공간 정면에 시오따 기차역 사진을 크게 영사했다. 이 순간 사람들은 속으로 ’별거 아니군. 그저 커다란 사진일 뿐이야‘라며 실망했다. 그 시대, 확인되지 않은 볼거리를 위해 1프랑의 돈을 지불할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70여 년 전(1820년대 사진 발명)에 처음 등장한 ’사진 이미지‘에 낯설지 않은 중산 계급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잠시의 시간이 지나고 정지된 사진 속 이미지들이 갑자기 움직이기 시작했다. ’영화적 매혹‘의 탄생이었다. 영화사 초창기를 기록하는 자료들에 의하면 이때 뤼미에르 형제는 의도적으로 ’정지된 순간‘을 연출하였다. 익숙하다고 간주되는 것에 ’시간‘의 마술을 부여함으로써 놀라움과 매혹을 연출한 것이다. 더구나 그들 눈 앞에 펼쳐지는 놀라운 가상의 세계는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의 한 순간을 소환한 것이었다. 지나간 시간을 현재화하는 능력, 영화는 시간을 지배하는 예술이었다. 영화 편집에 관한 다큐멘터리 <컷팅 엣지>(2004)에 인터뷰어로 등장했던 영화 감독, 롭 코헨이 했던 말이 인상적이다. “사람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것은 편집할 수 있기 때문 일거에요.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을 편집하고 싶어 합니다. 나쁜 일, 지루했던 일은 잘라버리고 좋았던 것만 더 들여다보고 싶어 하지요.” 사람들이 정말로 자신의 삶에서 지루했던 일상과 나빴던 일들을 송두리째 들어내고 싶어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영화를 통해 불가역적인 시간을 통제하고픈 욕망을 발현한다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물리적 시간에 감금된 ‘평범한 인간’에게 영화는 (적어도 창작자에게) 시간 지배자의 위상과 경험을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그렇다면 이쯤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을 떠올리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그는 오늘날 할리우드 감독들 중 가장 소란스럽고, 거창하며, 거들먹거리는 태도로 ‘영화적 시간’에 대해 유희하는 인물이다. 늘 언제나 기대를 자극하는 멋지고 웅장한 트레일러를 선보이지만, 정작 본편인 영화는 늘 실망에 마지않는 유아적 영웅주의에서 멈춰서는, 그런 진부한 대작을 만들어낸다. < 인터스텔라 >(2014)와 < 테넷 >(2020)을 통해 그는 관객들로 하여금 병렬적인 세계의 차원과 열역학 엔트로피까지 이해하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그러나 현란한 언사와 스펙터클의 제스처 바로 뒤편에서 그의 영화들, 특히 이번 영화 <테넷>을 지탱하고 구성하는 본질적인 장치들은 팍스 아메리카를 설파했던 80년대식 하드바디 영웅주의 서사에 묶여있다. 팀 버튼의 분열적 반영웅 ‘배트맨’을 초국적 자본의 스펙터클 하드바디로 전락시킨 < 배트맨 비긴즈 >(2005)는 물론이고, 2차 대전의 애국적 영웅주의를 설파했던 <덩케르크> 그리고 이번 영화 <테넷> 역시, 미국의 CIA 요원이 탐욕스러운 구소련의 악당에 맞서 제3차 대전을 막아내는 새로운 위인 서사에 불과한 것이다. 제임스 카메론의 < 터미네이터 >(1984)를 물리학 용어로 재각색한듯한 이 영화에서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화적 스펙터클로서 시간을 재구성한다. 미래의 침입과 인버전, 역행하는 시간의 언캐니한 속도감. 화려한 오페라극장에 대규모로 동원된 관객들이 순식간에 고개를 떨구며 수면으로 빠져드는 초현실주의적 모멘트의 체험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디지털 시대, 아날로그적 물질성에 입각한 세트 촬영의 지표적 이미지라 할지라도 그의 영화는 결국, 프랑스 철학자 랑시에르가 비판하는 ‘시간의 허구’에 불과한 것이다. 현실감을 창출하는 시간적 연쇄의 합리성으로 구성된 허구, 근대적 자본주의 권력과 질서를 인과론과 합리성의 체제 내에서 지각하고 수용케 하는 시간의 허구 말이다. 미래의 침입이라는 SF적 상상력이라면 이미 1962년, 크리스 마르케가 완성한 <환송대>의 영화적 체험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포토 로망으로 호명된 이 영화는 정지된 사진 이미지의 연쇄와 단 한 순간 제시되는 움직이는 이미지의 결합으로 구성된다. 3차 대전으로 폐허가 된 세계, 미래의 과학자들은 한 남자를 대상으로 시간여행을 실험한다. 그는 이미 전쟁으로 사라져버린 과거의 공간, 죽은 자들의 시간으로 침입해가고 그곳에서 한 여인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금지된 사랑은 그를 실험에서 이탈하게 만들고, 결국 그는 미래의 사도들에 의해 쫓기다 살해된다. 1958년에 공개된 알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에 대한 오마쥬와 병렬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시간 이미지, 그리고 그 시간을 살아갔던 남자에 대한 기억과 흔적, 죽음과 소멸에 대한 놀라운 은유로 가득 찬 이 작품은 이미 반세기 전 영화 역사에 등장해 시간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사유와 이미지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이후 등장한 모든 영화는 <환송대>가 이미 성취한 예술적 경지 주변부를 배회할 수밖에 없다. 3. 그런데 개인적으로, 그 진부함에도 불구하고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늘 궁금하다. 예전 사사로운 리스트에 < 덩케르크 >(2017)를 언급하면서, 그 영화를 이마무라 쇼헤이의 < 복수는 나의 것 >(1979)의 한 장면에 견주어 혹평을 했음에도 그 영화가 지닌 과감한 시간 배치의 모험은 흥미로웠다. <테넷>도 다르지 않다.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서사와 이데올로기라는 측면에 있어서 놀라울 정도로 진부하고 보수적이지만, 그는 어쨌든 할리우드의 막강한 자본력과 인력을 동원해 첨단의 영화를 물리적으로 직접 찍을 수 있는 몇 안되는 감독 중 하나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가장 첨예한 방식으로 그리고 동시대적 감각으로 영화를 통해 시간을 사유하고, 구축하고 그리고 압축할 수 있는 감독이기도 한 것이다. 맑스주의 학자인 데이빗 하비가 90년대 발표한 대표 저서 [포스트 모더니티의 조건]은 동시대 문화가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시공간을 압축하고 사유할 수 있는지에 관한 흥미롭고 정치한 논리를 선보인다. 그중 그가 분석 사례로 제시하는 < 블레이드 러너 >(1982)에서 인조인간 ‘로이’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가 욕망하고 동기화하는 시공간 압축의 가장 첨예한 은유로서 분석된다. 로봇에게 부여된 4년의 작동 시간, 고도록 집약된 노동 능력, 그러나 그 시간 동안 축적된 인공지능 로봇의 기억과 감정, 추억과 연민, 공포와 분노 등은 우리가 무심하게 신격화하는 용어 ‘휴머니티’를 반성할 것을 촉구한다. 즉 ‘로이’는 당대의 자본주의 경제가 지향하는 시공간 압축과 기계화된 인간 노동에 대한 욕망의 상징이자, 탁월한 SF 영화의 기념비적 캐릭터이자, 인간 삶에 대한 철학적 반성이 중층된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가 흥미롭다는 것은, 달리 말해 데이빗 하비의 방식처럼(혹은 랑시에르의 방식처럼), 그의 영화가 어떠한 방식으로 신자유주의와 디지털 문화가 집결한 그곳에서 영화적 시간을 구축하고 욕망하고, 재현하고 있는가, 우리에게 지각하고 감각하도록 강요하는지 흥미로운 것이다. 즉, 영화 제작의 최첨단에 선 그가 반영하게 될 지금 세계의 모습, 첨예한 속도전이 지배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시간에 대한 감각, 일방향적 속도를 넘어 이제 모든 차원의 시간을 다 통제하고야 말겠다는 전체주의적이고 전능주의적인 신화, 그리고 그 시간을 서사화하고 스펙터클화하는 전시주의의 욕망.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는 그러한 흔적들을 들여다볼 수 있게 만든다. 4. 다소 러프한 방식으로 ‘영화적 시간’을 정의하다 보면, 2019-20년에 선보인 영화들은 꽤 다양한 방식으로 시간에 대한 흥미로운 감각과 욕망을 드러낸다. 그중에서 가장 아쉽고 이상해 보이는 영화는 샘 멘데스의 영화 < 1917 >(2019)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경이해 마지않는 촬영 감독 로저 디킨스와 함께한 이 작품에서 그는 이냐리투 감독의 < 버드맨 >(2014)과 스탠리 큐브릭의 < 영광의 길 >(1957)에서 보여준 형식적 실험과 주제 의식을 매우 지루하고 나이브하게 모방하고 반복한다. 폭격을 막기 위한 지령을 들고 목적지까지 질주하는 병사의 시간을 추적하는 이 작품이 구사하는 카메라 워크는 이미 이냐리투 감독이 2014년, 뛰어난 촬영감독 엠마누엘 루벳츠키와 함께 선보였던 <버드맨>의 아류처럼 보이며, 전쟁의 불모함과 광기, 병사들에 대한 연민과 공포는 스탠리 큐브릭의 걸작 <영광의 길>에서 선보인 참호전의 잔혹함과 기만성을 통렬하게 성찰했던 것에 전혀 가닿지 못한다. 과거로 향하는 시간 여행에서 눈에 띈 또 다른 영화는 켈리 레이카트의 < 퍼스트 카우 >(2019)와 폴 그린그래스의 <뉴스 오브 어 월드>이다. 이 두 편은 모두 1870년대 서부를 배경으로, 전통적인 서부 역사의 결을 거스른다. 그러나 폴 그린그래스의 영화는 자상한 백인 중년 아버지상을 대변하는 톰 행크스를 서부로 데려간 것 이외엔 아무 특이점이 없다. 반면 켈리 레이차트의 <퍼스트 카우>는 그녀의 전작 < 믹의 지름길 >(2010) 못지않게 완연히 새로운 서부의 시간과 사건을 기록한다. 서부 영화 속에서 한 번도 주목하지 않았던 가난하고 비루한 백인 남성과 중국계 남성. 이들이 살아가는 서부의 시간과 공간은 정복과 개척으로 포장된 승리의 서사도 아니고, 흑과 백, 문명과 야만이 이분법적으로 명확히 선을 긋는 신화적 공간도 아니다. 빈곤과 공포 속에서 오직 생존하기 위해 서부를 배회해야 했던 가련한 사람들, 그들에 대한 연민과 기억, 그리고 그들의 흔적을 상기하고자 하는 영화이다. 그 외 2019년 칸 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던 마티 디옵 감독의 < 애틀란틱스 >(2019)는 매우 심플하지만 시선의 지형과 주체를 바꾼다는 점 그리고 현실의 시간과 초현실적 시간(죽은자의 시간)을 교차시킨다는 점에서 강렬하다. 이주 노동, 난민 등의 문제는 언제나 유럽 1세계 백인의 관점에서 서술되곤 하였다. 정치적 올바름으로 난민 문제를 포용하거나, 그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을 문제시하거나, 혹은 휴머니즘과 낭만적 서사를 결합하거나. 그러나 마티 디옵은 1세계의 시선이 아니라, 이주노동자 혹은 난민의 대지 바로 위에서, 그들 계급의 시선으로 ‘이주’와 ‘착취’를 묘사한다. 경제적으로 불모한 땅에 사는 젊은 청년들. 그리고 그들을 사랑하는 젊은 여성들. 그러던 어느 날 아무런 예고도 없이 마을 청년들이 자취를 감춰버린다. 영문 몰랐던 여인들에게 들려온 소식으로는 그들 모두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바다를 건너던 중, 사고로 목숨을 잃었다는 것.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그녀들의 비통함과 부재의 흔적들. 그러던 어느 밤. 청년들이 돌아온다. 더 이상 산자가 아닌, 죽은 자의 영혼이 되어 그들은 자신을 사랑했던 여인들의 육체에 강신된다. 그리고 강신된 육체가 향하는 곳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고향의 착취적 자본가들. 바다 저편에서 죽은 자가 귀환해 그들의 원통함을 해결하는 것은 흡사 존 카펜터의 호러 < 안개 >(1980)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마티 디옵의 <애틀란티스>는 오컬트 호러라는 장르적 포뮬라나 컨벤션을 외면하고 철저하게 신자유주의 시대의 지정학과 계급 저항이라는 관점에서 서술한다. 새로운 ‘제 3영화’적 포지션 속에서 포개지는 산 자와 죽은 자의 시간은 처연하면서도 인상 깊은 계급 정치학을 피력한다. 2020년, 압축된 시공간의 논리를 보다 현대적 감각으로 풀어냄으로써 간과할 수 없는 작품은 샤디프 형제의 < 언컷 젬스 >(2019)일 것이다. 그들의 전작 < 굿타임 >(2017)에 이어 숨 가쁘게 이어지는 사건과 사운드, 대사, 움직임 등은 이번 영화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된다. 모두의 찬사를 받았던 아담 샌들러의 연기는 곤혹과 절박, 신경증과 불안, 허세와 짜증에 관객까지 연루시키는데 여지없이 성공한다. 5. 그러나 2020년 영화 중 가장 정서적으로 공명할 수 있는 시간 이미지를 선보인 작품은 클로이 자오의 영화 < 노마드랜드 >(2020)이다. 사실, 사사로운 리스트를 제출한 이후에 접하게 된 이 영화는 매우 강렬한 하나의 이미지를 기억에 각인시킨다. 그것은 주인공 프랜시스 맥도맨드(극 중 캐릭터, 펀)가 텅 빈 사막지대를 배경으로 무심하게 서 있거나 걸어가는 옆모습을 클로즈업으로 팔로잉하는 장면이다. 영화는 제목 그대로 유목적 삶을 선택한 노년의 여성을 따라간다. 60대 여성 ‘펀’은 낡은 자동차 한 대에 자신의 모든 짐을 싣고 1년 단위로 노동과 공동체를 찾아 이주하며 살아간다. 특별한 사건이랄 것도 묘사하지 않는 이 영화는 다만 유목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노동, 얼굴, 회한, 소망 등을 가끔씩 응시할 뿐이다. 만들어진 모든 쇼트들에 유기적인 사건과 시간의 의미를 채워놓고자 했던 크리스토퍼 놀란의 <테넷>과 이 영화가 대비되는 지점은 이 영화가 모든 쇼트들로부터 시간의 강박을 지워버리고, 특정 의미를 채우려 하거나 평가하지 않으며, 무한히 열어 놓는다는 점에 있다. 이 영화를 보고난 직후, 우연히도 읽게 된 글이 있었다. 앙드레 바쟁이 자크 타티의 영화 < 윌로씨의 휴가 >(1953)를 분석하며 썼던 평론 “윌로씨와 시간”.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윌로씨가 1년 중 10개월은 사라졌다가 7월 1일, 임시적인 시간이 형성될 때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나타남과 사라짐, 그러한 반복의 시간은 무용한 행위가 반복되는 시간이지만 그것은 그 자체로 리듬을 지닌 ‘의식의 시간’이라고 바쟁은 명명한다. “일반적인 영화에서 시간의 방향은 원인에서 결과로, 시작에서 끝으로 향해 간다. 하지만 <윌로씨의 휴가>는 이런 것들과는 반대로 나아간다. 아마도 시간은 그 점에서 이 영화의 소재가 아니라 이 영화의 목적 그 자체가 아닌가 한다.”(앙드레 바쟁, “윌로씨와 시간” 중) 바쟁은 따띠가 창출한 ‘윌로씨의 시간’에서 그가 영화 속 근대 사회 체제에 순응해 살아가는 사람들의 시간 감각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움직인다는 점에 주목한다. 영화는 윌로라는 캐릭터를 통해 근대적 시간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새로운 영화적 시간과 감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노마드랜드>가 감히 자크 타티의 영화에 비견될 수 있겠느냐마는, 크리스토퍼 놀란의 영화를 반복 관람한 직후, 우연히 접한 이 영화의 리듬과 움직임, 그리고 무엇보다 영화 속에서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노동 이외에 다른 것을 갈구하지 않는 ‘펀’의 무심한 시간들과 표정은 <테넷>에서 묘사된 필사적인 그 모든 것들을 가볍게 눌러버리며, 놀라운 정서적 공명을 만들어낸다. 특정한 방향으로 질주하길 재촉하는 시간 이미지들에 대비되어 <노마드랜드>에서 프랜시스 맥도맨드의 얼굴 이미지가 선택하고 열어놓은 시간은 그 모든 시간에 대한 강박을 털어버리게끔 하는 것이다. 장 루이 세페르의 말처럼, 영화는 전례 없는 여러 시간을 체험하는 여행이다. 그 시간은 때로는 영화 창작의 주체가 치밀하고 꼼꼼하게 채워 넣은 플롯들과 서사의 시간이기도 하고, 지금 내가 들어가 관람하는 극장이 존재하는 동시대적 시간이기도 하고, 또 지극히 주관적이고 사적인 기억을 끄집어내어 영화라는 외부적 이미지와 접촉해 만들어내는 감각 경험적 시간이기도 할 것이다. <테넷>부터 <퍼스트 카우> 그리고 <노마드랜드>까지, 영화는 그 모든 다양한 시간에 대한 체험과 기억, 욕망과 불안을 모두 열어놓는다. 그것이 무엇이든 영화가 구성하는 시간의 매혹이다.
바쿠라우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우리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엄청난 수의 영화들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다. 그 정점은 2019년이었다. 2019년 한국 영화 및 해외영화 제작/수입 편수는 총 2,207편, 이 중 1,740편이 개봉했고, 다시 이 중에서 647편이 실제 극장에 걸렸다. 대략 하루에 5편의 영화가 어떤 식으로든 새롭게 공개되고 매일 1.8편의 영화가 실제로 극장에서 개봉한 셈이다. 여기에 프리미어 상영 원칙을 가지고 있는 국고 지원 7대 국제영화제에서 2019년 한 해 동안 상영한 영화는 장편, 단편 합쳐 총 1,432편. 이외의 상당수의 작은 영화제들과 다양한 상영회들도 프리미어 영화나 국내 미개봉작들을 상영하곤 하니 이런 식으로 공개된 새로운 영화까지 다 합하면 이미 셀 수 없을 지경이다. 더구나 넷플릭스, 와챠 등의 OTT 플랫폼을 통해 공개되는 오리지널 영화들과 독점 공개작까지 더하면 우리는 이미 평생을 봐도 다 볼 수 없는 영화 더미 속에서 살고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올해 2월부터 갑자기 상황이 달라졌다. 코로나19는 영화산업과 극장, 극장과 관객이 만나는 길목을 틀어막고 누구도 쉽게 오갈 수 없게 만들었다. 관객은 극장에 가는 걸 꺼리고, 관객이 없으니 개봉하지 못하는 영화들이 점점 많아지고, 개봉 영화가 없어서 관객이 극장을 찾질 않은 악순환은 수개월째 반복되고 있다. 영화제 역시 대부분 축소 또는 온라인으로 운영되면서 상영작 수도, 참여 관객 수도 확연히 줄었다. 산업 구석구석에 이익을 분배하며 순환하던 영화산업의 움직임은 눈에 띄게 둔해졌고, 겨울과 함께 3번째 대유행이 시작되자 산업은 거의 멈출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던 고통 섞인 신음소리는 더 커졌다. 그러나 IT 기술과 자본을 기반으로 전통의 극장산업과 경쟁하던 OTT 플랫폼만은 이 와중에도 홀로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여주고 있다. 순환이 멈추고 산업과 극장이 위험에 처하자 사람들은 갑자기 그동안 별로 상상해본 적 없었던 극장의 죽음에 대해, 극장과 영화의 상관관계에 대해, 그리고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모두가 영화산업과 영화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지금은 명백히 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영화산업의 위기다. 그러나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지난 10년간 영화산업은 일정한 틀에 맞춘 비슷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하고 있었고, 극장은 모든 영화를 똑같이 대한 적이 없었다. 독립예술영화는 스스로 순환할 수 있는 생태계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영화계 전반에 걸친 불평등의 문제는 사회의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최근 몇 년간 더욱 심화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난 2월 이후 코로나19로 초토화되어버린 극장을 지킨 태반의 영화는 산업과 자본이 만든 상업 영화들이 아니라 극장이 평소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던 독립예술영화들이었다. 코로나19가 촉발시킨 산업의 위기는 손해 보는 걸 견디지 못하는 산업이 자초한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무렵 다시 떠오른 질문. 지금이 영화의 위기인가? 다큐멘터리 전문 계간 웹진 <DOCKING>의 2020년 겨울호에는 지난 11월 6일 세상을 떠난 아르헨티나의 영화감독 페르난도 솔라나스를 기억하는 김성욱(서울아트시네마 프로그램 디렉터)씨의 글이 실렸다. (http://www.dockingmagazine.com/contents/21/177/) 이 글의 일부를 공유한다. 1970년 글라우버 로샤, 장 마리 스트라우브, 미클로스 얀초, 사이먼 하르톡이 로마에서 만나 정치 영화에 대한 토론을 벌였다. 이 자리에서 하르톡은 로셀리니가 '영화는 죽었다'는 말에 동의하는지를 물었고, 장 마리 스트라우브는 이렇게 대답한다. “산업이 사라지면 영화가 시작됩니다. 기다리고 있지만, 우리는 2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겁니다.” 이어지는 글라우버 로샤의 대답: “내 생각에 위험한 것은 바로 산업의 원리인 것 같습니다. 영화는 생산과 소비의 시스템에 의존하는 유일한 예술 활동입니다. 왜냐하면 돈이 들기 때문에, 시나 소설을 인쇄하기 위해 편집자가 필요하더라도, 반면에, 각본은 출판될 수 없기 때문에, 회전하지 않으면 시장 가치가 없습니다. 오늘날 영화제작자가 겪는 어려움은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1970년 혈기 넘치던 최고의 청년 감독들이 통찰한 영화와 영화산업 사이의 모순은 20년 하고도 30년을 더 기다렸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코로나19는 지금 영화산업이 처한 위기의 결정적 요인이 분명하지만, 근본적인 요인이라고는 할 수 없다. 누군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가 도래하면 상업 영화 만이 살아남지 않겠냐는 어두운 전망을 내놓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는 1895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후 지난 125년간 끊임없이 위기를 겪어왔다. 그 위기는 대부분 신기술과 자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지만 창작자들은 매번 실패를 반복하며 그 위기를 극복했다. 지금의 이 위기 역시 누군가에겐 절망의 시간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기회의 시간일 것이다. 산업의 지형도가 달라질 순 있겠지만 영악한 지금의 산업이 쉽게 폐허가 될 리 없고,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떤 영화든 예외 없이 산업일 뿐 아니라 창작의 산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어떤 영화는 폐허 속에 묻히겠지만, 어떤 영화는 살아남아 계속될 것이다. 따라서 모두가 위기라고 생각하는 지금, 우리는 산업이 아니라 창작자들을 지켜내는 데에 더 집중해야 한다. 올해의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일 년 내내 머리 속에 가득했던 이런 생각들과 함께 골라낸 영화들을 담았다. < 공포분자 >(1986), <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 >(2020), < 라이트 하우스 >(2019), < 바쿠라우 >(2019), < 분화구의 두 사람 >(2019), < 애틀란틱스 >(2019), < 언컷 젬스 >(2019), < 트랜짓 >(2018), < 퍼스트 카우 >(2019), < 휴가 >(2020). 영화이기 때문에 가능한 영화들의 리스트이며, 산업의 징후 같은 영화이거나 산업이 없으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이거나 산업 같은 거 없어도 얼마든지 생명력을 이어갈 영화의 이름들이다. 리스트를 만들다가 다른 분들이 소개하지 않을 것 같아 자세하게 소개하고 싶어진 영화가 두 편 있었다. 첫 영화는 아라이 하루히코의 <분화구의 두 사람>. 이상한 제목을 가진 이 영화는 인간의 육체와 사랑을 말랑말랑하고 끈적이게 담아내면서도 인간의 내면을 잘 들여다보고 있었다. 기묘하게 자유로웠고, 기묘하게 공허했으며, 기묘하게 시대의 공기를 담아내며 공감을 이끌어냈다. 언젠가 조금 더 자세하게 소개할 기회를 만들어볼 생각이다. 또 하나의 영화는 클레버 멘도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가 공동으로 연출한 브라질 영화 <바쿠라우 Bacurau>다. 이 기묘한 영화에 처음 관심이 갔던 건 클레버 감독이 연출한 두 편의 전작 < 네이버링 사운즈 >(2012)와 < 아쿠아리우스 >(2016) 때문이었다. 사실 <바쿠라우>는 클레버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이자, 줄리아노 감독의 장편데뷔작이다. 하지만 오랫동안 함께 일해온 영화적 동료로서의 두 감독의 관계(줄리아노는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에서 프로덕션 디자인은 전담했다)와 클레버 감독의 전작들과 연결되는 영화의 세계관을 고려하면 <바쿠라우>는 실질적으론 클레버 감독의 영화라 해도 무방하다. 영화는 내 예상과 달랐지만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고 싶어진 건, 피칠갑을 한 이 영화가 지난 몇 년간 봤던 몇몇 중요한 장르 영화에서 발견한 징후와도 같은 특징-가장 파괴적이고 상징적인 형태로 정치적 사안에 대해 발언할 수 있는 장르 영화의 특성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식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쿠라우>는 <기생충>이 작년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 <레 미제라블>과 함께 공동으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았다. 브라질의 정치적 이슈 때문에 칸영화제 기간 꽤 화제가 되었고, 쟁쟁한 경쟁작들을 제치고 결국 큰 상을 받았기 때문에 <기생충>과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작년과 올해 훨씬 더 화제를 되었을 영화였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올해의 베스트 영화 리스트가 본격적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요즘, <바쿠라우>는 각종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다시 회자되고 있다. <바쿠라우>를 연출한 클레버 멘돈사 필루는 최근 10년간 등장한 남미 출신의 가장 주목할만한 감독 리스트를 만들 때 가장 위쪽에 놓을 수 있는 몇 개의 이름 중 하나다. 남미 출신 감독으로는 2016년 이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그것도 두 번이나. 1968년생. 올해로 53세다. 20대 중반부터 단편 작업을 하며 영화평론가와 영화 저널리스트로 활동했다. 그의 모든 장편영화의 오프닝에서 볼 수 있는 CinemaScopio는 자신의 제작사 이름이지만 평론가 시절 만든 자신의 홈페이지 이름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45세가 되던 2012년, 첫 장편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를 연출했다.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첫 공개된 이 영화는 국제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하며 전 세계 평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4년 후에 완성한 두 번째 장편영화 <아쿠아리우스>는 2016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으로 직행했다. 여우주연상의 강력한 후보였지만 수상의 기쁨을 누리진 못했다. 그러나 2016년 전 세계 거의 모든 베스트 영화 리스트에 이름을 올리며 정식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지 4년 만에 전 세계 영화계와 평단에 자신의 이름을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그리고 다시 3년 후 세 번째 장편영화 <바쿠라우>를 완성했고, 다시 한번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대받았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바쿠라우’는 브라질의 오지에 있는 가상의 지명이자 마을의 이름이다. 이 마을에는 다양한 인종, 연령, 성향의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고 있다. 이 공동체를 이끌던 고령의 흑인 여성 리더 카르멜리타가 세상을 떠나자 마을 사람들은 함께 장례식을 치른다. 식이 끝나자 마을 주변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지역 정치인의 무능으로 진작에 수도가 끊긴 바쿠라우에 물을 나르던 물탱크 트럭이 총격을 받고, 통신 장애가 발생하고, 인터넷 지도에서 바쿠라우가 사라지더니, 느닷없이 낯선 외지인들과 함께 원반 형태의 드론이 목격된다. 이 모든 일은 지역 정치인의 사주를 받고 중무장한 미스터리한 백인 일당이 저지른 일이다. 이들은 마치 사파리에 가서 돈을 주고 사냥을 즐기는 관광객처럼 보인다. 차이가 있다면 이 사냥의 대상이 동물이 아니라 사람일 뿐이다. 선발대를 보내 마을을 살펴본 이들은 별 죄책감 없이 게임을 즐기듯 바쿠라우를 습격하여 마을 사람들을 학살하려 한다. 위기를 감지한 바쿠라우 주민들은 도망자인 트랜스젠더 룽가를 중심으로 함께 힘을 모아 외부에서 온 잔인한 이방인들을 처단하고 결국 삶의 터전을 지켜내는 데 성공한다. 사실 ‘바쿠라우’는 노예제도가 존재했던 17세기 브라질, 농장에서 도주한 노예(시마론 Cimarron)들이 건설한 공동체 마을 ‘낄롱부 Quilombo’를 연상시킨다. 낄롱부를 건설한 시마론들은 생존을 위해 외부와 단절하고, 내부를 결속시켰다. 때때로 노예들의 도주를 돕거나 농장을 습격하기도 했다. 현재 브라질에는 2천 개가 넘는 낄롱부 형태의 공동체가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하자면 영화 속의 ‘바쿠라우’는 ‘리믹스된 낄롱부 remixed quilombo’라고 할 수 있다. ‘바쿠라우’가 낄롱부에서 영감을 얻어 창조된 공간이라는 건 주민들이 밤에 모여 희생자를 추모하며 브라질의 전통 무예인 카포에이라를 추는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백인, 원주민, 흑인, 트랜스젠더 등으로 이루어진 주민들은 이 의식을 통해 저항의 역사를 공유하고 새로운 싸움을 준비한다. 그렇게 ‘바쿠라우’는 가난하지만 존엄한 공동체, 저항의 역사적 공간으로 변모한다. 클레버 감독은 이 장면에서 <더 워드>(2010) 이후 음악가로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존 카펜터의 인더스트리얼 뮤직 ‘Night’를 그대로 활용한다. 그리고 이 음악의 뮤직비디오에서 백인 일당의 시각적 이미지를 차용한다. 공포 영화의 거장에 대한 이같은 오마주는 이 영화가 어떤 장르적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바쿠라우>는 마치 민족지 영화처럼 가상의 역사적 공동체가 놓인 지리적 환경과 주민들의 일상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한다. 하지만 영화의 1/3지점부터 장르 영화의 조짐을 보이더니 중반에 접어들면서 SF, 스릴러, 호러, 웨스턴 등 온갖 장르가 뒤섞이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스파게티 웨스턴을 떠올리게 하는 영화적 배경(선인장, 말, 총, 인종차별적 악당) 속에서 마지막까지 긴장과 힘을 유지하며 정부의 무능과 부패, 식민주의의 모순 같은 정치적 주제까지 그 세계를 점차 확장해 나간다. 점점 피범벅으로 변해가는 이 영화에서, 잔혹한 폭력은 약자의 생존과 권리가 위협받을 때 권력과 힘에 저항하여 공동체를 지켜내는 필수 도구로 묘사된다. 앞에서 언급했듯 장르 영화는 기본적으로 가장 파괴적인 형태로 정치적 발언을 할 수 있고, 평론가 출신의 클레버 감독은 이런 장르의 관습과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다. 종종 이 영화를 설명하면서 ‘디스토피아적 웨스턴’이라는 수식어가 붙고, 유사한 장르 영화나 타란티노의 몇몇 영화들의 이름이 먼저 떠오르는 이유다. 그러나 <바쿠라우>는 물론 장르적 쾌감으로 가득한 장르 영화지만 오히려 장르의 전통과 관습을 최대한 활용하여 완성한 강력한 정치 영화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영화는 부조리한 현실을 바탕으로 한다. 2019년 브라질의 남동부 리우데자네이루의 주지사는 범죄자를 잡는다는 명목으로 무장 요원과 스나이퍼들을 시내 빈민가에 은밀하게 배치하여 비판을 받았다. 2018년 10월 브라질 대통령으로 당선된, ‘남미의 트럼프’로 불리는 극우 정치인 자이루 보우소나루는 경찰이 더 많은 범죄자를 사살해야 한다면서 범죄자들을 재판 회부보다는 약식 처형(총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BBC의 보도에 따르면 브라질 경찰의 총격으로 사망한 시민들의 숫자는 2019년 한해에만 하루 평균 5명, 총 1,810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바쿠라우>가 담으려고 하는 건 동시대 브라질의 이러한 현실이다.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현실을 은유적으로 담아내면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영화의 시점을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로 설정하여 ‘영화 속 현실이 곧 다가올 실제 현실과 별다를 게 없다’는 강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아내는가 하면, 무능하고 부패한 지역 정치인 토니 주니어와 그의 사주를 받은 잔인한 백인 그룹을 통해 브라질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영화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간다.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잔혹한 복수극으로 영화를 끝낸 다음 마지막 엔드 크레딧이 올라가기 직전 검은 화면 위로 3줄로 된 자막이 뜨는데, 이런 문장이 쓰여 있다. “이 영화는 800개 이상의 일자리와 함께 국가와 문화, 산업의 정체성을 직간접적으로 창출했습니다.” 과거 국책영화에서나 볼 법한 이 낯선 문구는 건조하고 단정하게 씌여있지만 칸영화제가 개최되기 약 4개월 전에 열린 다보스 포럼에서 보우소나루 대통령이 한 연설에 대한 감독의 답변이자 풍자이며 냉소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바쿠라우>가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전달하는 프로파간다식의 정치영화는 아니다. 클레버와 줄리아노의 방식은 훨씬 정교하고 유희적이며 영화적이다. 그들은 정치적 메시지를 담기 위해 영화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정교하게 구축된 영화적 서사를 중심에 두고 다양한 장치를 통해 정치적 의미를 창조해낸다. 특히 클레버 감독은 과거의 시간이 축적되고 압축된 공간을 영화적 공간으로 활용하는 데 능하다. 장편 데뷔작 <네이버링 사운즈>는 감독의 고향인 헤시피의 한 중산층 동네를 배경으로 한다. 동네 건물의 반 이상을 소유하고 있는 지주 프란치스코와 그의 조카 주앙을 중심에 두고 동네의 안전을 위해 사설 경비 업체가 들어오면서 생기는 마을의 미세한 변화를 담는다. 이 영화에서 쇠창살과 철제 대문, 감시 카메라와 사설 경비원 같은 현대적 안전장치들로 대표되는 기술적 모더니티는 이웃의 접근을 차단하고 중산층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 동네는 피로 물든 식민주의 역사의 산물이다. 폐허가 되어버린 과거의 공간, 피로 물든 폭포 속에 선 지주의 후예인 주앙의 모습, 그리고 역사적 피해자의 후손과 지주와의 직접 대면하는 장면은 감독이 담아내고 싶었던 정치적 의미를 극적으로 창조해낸다. <아쿠아리우스>의 핵심 공간인 주인공의 오래된 빌라도 마찬가지다. 음악 평론가 클라라는 지속적인 철거의 위협 속에서도 과거의 기억이 켜켜이 쌓여있는 집을 자본가에게 내주지 않기 위해 싸운다. 문화와 역사의 아이콘인 클라라의 고집과 싸움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역사를 지키려는 저항과 투쟁의 몸짓인 셈이다. 영화는 유려하게 과거와 현재, 클라라의 집과 외부를 오가며 이 모든 걸 담아낸다. 클레버 감독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영화의 핵심이 되는 공간의 실제 과거 사진을 활용하여 자신의 영화적 의도를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는 영화의 배경이 되는 헤시피의 옛 지명 페르남부쿠에 살았던 당시 사람들의 모습이 담긴 흑백사진을 연달아 보여주는 시퀀스로 시작하고, <아쿠아리우스>는 오버헤드숏으로 찍힌 해변 도시 헤시피의 과거의 모습 - 보아비아젱 해변의 모습과 오래된 차들로 가득한 길게 뻗은 거리, 거대한 고층 건물이 슬럼가를 대체하는 부감 쇼트의 흑백사진들을 연달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리고 <바쿠라우>에서는 마을의 작은 역사박물관에 전시되어있는 과거 사진들과 리더 카르멜리타의 젊은 시절 사진을 보여준다. 특히 <바쿠라우>는 공간의 지리적인 면을 중요하게 다루는데, 우주의 인공위성에서 남미, 브라질, 바쿠라우로 하강하며 좁혀들어오는 오프닝숏은 로컬리티가 고스란히 담긴 공동체를 세계의 중심, 서사의 중심에 놓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네이버링 사운즈>에서 시작되어 <아쿠아리우스>를 경유한 다음 <바쿠라우>로 수렴된 클레버 멘돈사 필루와 줄리아노 도르넬레스의 세계는 시간이 축적된 영화적 공간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과 함께 역사를 소환한 다음, 강력한 저항을 촉구한다. 이 세계는 영화적 전통과 관습, 현실의 로컬리티와 커뮤니티를 기반으로 과거와 현재, 미래가 정교하게 뒤섞여 있으며, 무엇보다 변하지 않는 기존 부조리한 질서에 대한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믿음으로 가득하다. 그리고 뜻밖에도 이 세계는 1970년 브라질의 선배 감독 글라우버 로샤가 가졌던 영화산업의 모순과 산업 논리가 가진 위험성, 이를 극복해야 하는 영화제작자의 숙명에 대한 문제의식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계승하고 있으며, 코로나 시대가 영화산업과 영화에게 던지는 질문과도 그 맥이 닿아있다. 저항이 우리를 구원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리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하지 않으면 세상은 어떤 답변도 알아서 내놓지 않는다. 따라서 장르 영화의 전통 속에서 저항과 투쟁으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과정을 담아낸 <바쿠라우>는 다시 한번, ‘저항만이 우리를 구원하리라’는 선언과도 같은 이 문장이 명제가 아니라 믿음이 되어야 하고, 우리의 삶은 그 믿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