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마르트 파파
- 감독
- 민병우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민형식, 이운숙, 김은섭, 오기환, 김영세, 서보경, 마누 마누엘, AMANDINE, 김정애, 김진수, 박준현, 김진순, 이인기, 이춘수, 손, CATHERINE LE ROUX, 김광재, 김무현, 김재규, DOUCHAN, JEROME, 민병우, 최은지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사건′의 기억은 어떻게 해서든지 타자. 즉, ′사건′의 외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 갖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사람들에게 그 기억이 공유되지 않으면 ′사건′은 없던 일로 되어버리고 만다. (…) ′사건′의 기억이 타자에게 공유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되지 않으면 안 된다.” - 『기억 서사』 중에서, 오카 마리 - 1990년대 이후 한국 공포 영화의 출발은 1998년 개봉한 < 여고괴담 >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개봉 당시 전국 200만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의 흥행으로 충무로에도 본격적인 ‘젊은’ 공포 영화들이 제작되었다. < 자귀모 >(1999) < 링 >(1999) < 여고괴담 두 번째 이야기 >(1999) < 해변으로 가다 >(2000) < 찍히면 죽는다 >(2000) < 가위 >(2000) < 세이 예스 >(2001) 등의 공포 영화들은 1999년부터 2001년 사이에 제작된 공포 영화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 공포 영화의 르네상스라고 불러도 좋을 이 시기를 지나 2003년에는 < 장화, 홍련 >이 역대 공포 영화 중 최고 흥행을 기록하고, 그해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에 공포영화 < 아카시아 >가 선정되면서 그 부흥기는 정점을 찍었다. 그 이후 2000년대 중반부터 그 흐름은 다소 주춤해졌지만 여전히 관객의 사랑을 받는 공포 영화들은 종종 제작되어 < 알포인트 >(2004) < 기담 >(2007) < 고死: 피의 중간고사 >(2008) 등의 작품이 흥행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런 한국 공포 영화의 계보에서 이상하게 대중에게 잊힌 작품이 있다. 바로 윤종찬 감독이 2001년에 만든 < 소름 >이다. < 소름 >이 대중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은 비단 이 영화가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소름>으로 데뷔한 윤종찬 감독은 이후에도 (공포 영화와는 전혀 관련 없는) < 청연 >(2005)과 < 나는 행복합니다 >(2008) < 파파로티 >(2012) 등의 영화를 만들어서 커리어를 이어온 대중 영화감독이며, <소름>의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 장진영 과 김명민 은 누구나 다 아는 배우들임에 틀림없다. 거기다 이 영화는 2014년 한국영상자료원이 선정한 한국 영화 100선에도 선정이 되었는데, 신기한 것은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이 영화로 영화 데뷔를 한 배우 김명민이나 혹은 어떤 평론가도 이 영화가 마치 사라진 것처럼 이 영화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이 영화는 2001년에 만들어졌고 그런 의미에서 대중과 평단의 기억에서 사라진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소름>을 다시 본 후에 나는 이 영화가 잊힌 것이 이 영화의 불길한 느낌과 교묘하게 맞닿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 영화는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들에게 회자되지 못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묘하게 이 영화가 공포를 그려내는 방식과 맞닿아 있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소름>이 취하고 있는 공포의 방식은 피가 난무하는 슬래셔 방식이거나 관객의 트라우마를 자극 시키는 심리적 방식이거나 혹은 한국 영화에서 흔히 취하는 혼귀의 방식이 아니라 기억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영화는 용현( 김명민 )이 504호에 이사를 오면서 시작되는데, 그 504호는 전 입주자인 광태가 불타 죽은 곳이다. 그런데 광태는 마치 용현과 선영( 장진영 )의 과거 사연을 알기라도 하듯, 미금아파트에 관한 소설을 쓰고 있었고 그 소설을 완성하기 전에 죽어 용현이 그 집으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어떻게 광태가 그 소설을 쓸 수 있었는지에 주목할 것이 아니라 왜 그 자리에 용현이 찾아오게 됐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 소설이라는 가상의 허구를 완성하기 위해 그 이야기의 실체적 기억이 들어온다. 여기서부터 영화는 가상의 허구와 실체적 기억 사이를 맴돈다. 영화에 세 번 등장하는 롱테이크는 그런 허구와 기억 사이를 더욱 몽롱하게 만드는 뛰어난 장치이다. 재밌는 것은, 이 롱테이크 장면이 나올 때 주인공들은 본인의 기억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기억은 허구 같은 느낌이고, 불길하고 누설하면 안 되는 금기와도 같은 것이다. 용현과 선영의 기억은 차이가 있다. 용현은 자신의 기억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용현은 차라리 기억을 덮어버리면서 그 기억을 소멸시키는 방법을 택한다. 용현은 동급생을 죽인 후 산에 파묻었고, 선영이 죽인 선영의 남편을 본인 손으로 매장하고 선영을 죽인 후 선영마저 산에다가 매장한다.(그리고 직접적으로 묘사는 안 됐지만 형사들이 용현과 전에 만난 여자의 행방을 찾는 것이나, 용현의 이야기를 미뤄보았을 때 용현의 전 애인도 매장하여 실종된 것으로 보인다.) 용현이 자신의 입으로 말하는 기억은 본인이 고아라는 사실 밖에 없다. 다시 말해, 용현이 가지고 있는 원(原)기억은 자신이 고아라는 것이다. 반면 선영은 그 기억을 용현처럼 묻지 못하고 잊지 못해 고통받는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가 죽은 것도, 아버지가 도망간 것도 기억하며 자신이 아들을 잃어버렸다는(죽였다는) 것도 기억하며, 남편을 죽인 것도 모두 기억한다. 그래서 선영이 죽고 나서도 그녀의 기억이 플래시백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녀는 죽어서도 그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묻히는 것은 본인 자신이다. 영화의 전환점은 바로 용현이 그 기억을 다시 떠올렸을 때다. 글의 처음에 언급한 오카 마리의 글처럼 용현은 사건의 기억을 외부와 함께 공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기억은 없던 사건이 되었지만 선영이라는 타자에게 자신의 기억을 하나 둘 씩 공유하게 되자 그의 비밀은 이 작가(그리고 504호에서 불타 죽은 광태)에 의해 소설의 형태로 완성된다. 미금아파트를 둘러싼 용현과 선영의 비밀을 어떻게든 이야기를 하려고 한 사람은 죽거나 미쳐버린다. 영화는 기억을 잊지 못해 고통받는 선영의 기억과 기억을 묻어버리는 용현의 기억 중에서 용현의 기억. 다시 말해 소설의 발간이 실패하고, 용현이 선영을 죽이는 방법을 택한다. 영화가 용현의 방법을 택하게 된 것은 이 영화에서 밝혀지는 기억의 실체가 이 영화를 보는 우리도 떠올리고 싶지 않은 불길하고 끔찍한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이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화는 미금아파트의 불빛이 깜빡거리는 모습을 찍은 롱 샷을 마지막 쇼트로 장식한다. 용현은 그 기억을 묻어두려고 했지만 미금아파트라는 공간은 이 기억을 덮지 못한 것이다. 곧 재개발을 앞두고 있어 폐가처럼 보이는 이 공간은 살아 있지만 죽은 공간이고, 기억을 머금고 있지만 곧 사라지는 공간이다. 이 영화가 불길하고 음침하며 떠올리고 싶지 않은 느낌을 주는 것도 바로 그 끔찍한 기억을 기억하고 있는 공간이 남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도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을 영화 스스로가 잔존하게 만드는 결론으로 완성했을 때 그것은 이 저주가 아직도 유효하다는 것을 영화 스스로 되새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 소름 >은 그 저주를 덮어버리지 않고 다시 되새기면서 관객들로 하여금 비극적 진실의 공포를 직면하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관객으로 하여금 기억하고 싶지 않은 기억. 잊고 싶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그 끔찍한 기억은 결국 잊을 수 없다는 무시무시한 결론에 다다르게 만든다. 어쩌면 이 이유가 이 영화를 누구도 다시금 기억하고 싶지 않게 만드는 것일까? 이 영화는 그런 의미에서 <소름>은 한국 영화사에서 진정한 의미의 ‘저주받은’ 걸작인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북아현동의 금화아파트는 2015년에 완전히 철거되었다. 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물리적 공간은 실제로도 완전히 사라진 셈이다.
1. 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우선 몇 가지 해설이 필요할 듯하다. 애니메이션을 보는 사람들이라고 해도, 웬만큼 마니악하지 않으면 보지 않는 장르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독립애니메이션 등 일반 관객은 잘 보지 않는, 주로 업계인이나 특수한 소수의 팬`층이 존재하는 애니메이션 분야는 실제로도 많이 있겠으나 그런 계열도 아니고 일종의 ‘팬무비’로서 성장해온 분야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극소수의 사람들밖에 접하지 못하는 것이다. 바로 동영상 사이트를 통한 아마추어 팬 애니메이션을 말하고자 한다. 사실 아마추어 팬 애니메이션은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다. 애니메이션 역사의 초기에 있어서 만들어졌던 수많은 단편 애니메이션은, 사실 딱히 금전적 수입을 만들 방도가 별로 없었을 테니 ‘프로’라고 하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따라서 전부 다 아마추어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필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패러디’라든지 아니면 어떤 특정한 ‘팬’으로서의 요소를 갖춘 팬 애니메이션 쪽이다. ‘패러디(풍자)’ 요소를 갖춘 아마추어 팬 애니메이션으로서는, 1969년 제작되어 1973~74년에 미국에서 화제를 모았던 <밤비, 고지라를 만나다 Bambi meets GODZILLA>를 빼놓을 수 없다. 캐나다의 애니메이터 마브 뉴랜드(Marv Newland)가 만든 이 작품은, 단 2분 남짓의 매우 짧은 단편으로서 디즈니의 밤비가 일본의 괴수 고지라를 만나는(?) 독특한 내용이 특징적이다. (참고로 IMDb에는 이 작품의 릴리즈 연도가 1974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자세히 보면 1974년 9월 25일에 미국 애리조나에서 상영되었다는 표시일 뿐이다.) 이 작품의 감독 마브 뉴랜드는 이후 프랑스 동화 원작의 짧은 애니메이션 <바바파파 Barbapapa>(과거에 국내에서 TV 방영되었고, 최근에는 편의점 등에 캐릭터가 그려진 식품이 유통되고 있는 바로 그 작품이다)에 참여하는 등 애니메이션계에서 계속 활동해왔다. (‘마브 뉴랜드’에 관해 검색하다 보니 네이버 지식백과의 『세계 애니메이션 백과』 항목을 찾게 되었는데, 여기 기술된 내용이 전부 영문판 위키피디아에서, 인용이 아니라 문장을 거의 그대로 ‘옮겨놓은’ 수준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영어 위키피디아 내용을 읽기 힘든 분이라면 번역판(?)으로서 참고해볼 수도 있을 것 같다.) 2. 이 애니메이션은 (보통이라면 상업성을 담보하기 힘든) 엄청나게 짧은 단편이기도 하고, 또 내용상 디즈니로부터도 고지라의 판권사인 일본 토호로부터도 허락을 받기가 대단히 어려울 과격성을 갖춘 작품이기에 그냥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일본에서는 상업적으로 제작된 패러디 애니메이션도 존재한다. 원작 제작사가 직접 만든 경우도 있고, 그냥 과격하지 않은 패러디의 일종으로서 암묵적으로 묵인될 것으로 여기면서 만든 작품도 있는데, 그런 상업 패러디 애니메이션은 제외하고 이 글에서는 주로 현대에 와서 인터넷을 통해 발표되는 팬무비 애니메이션에 관해 써보려고 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2007년 1월 베타서비스판이 시작된 일본의 동영상 플랫폼 ‘니코니코동화’를 통해 발표되어온 팬무비 애니메이션군(群)이다. 본래 인터넷상에서는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상에 있는 콘텐츠가 다수 업로드되곤 하지만,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고 만들어지는 애니메이션도 분명히 존재한다. 니코니코동화도 마찬가지로, 기존 상업애니메이션 작품을 편집하거나 음성을 바꾸는 정도만 처리해서 올리는 ‘회색’ 콘텐츠(말은 회색이라고 하지만 분명한 저작권 침해 콘텐츠이다)로서 패러디 동영상이 올라오곤 하는데, 그 한편으로는 저작권자(주로 작곡가)가 허락한 곡을 스스로 부르는 형태의 ‘불러보았다’ 동영상이라든지, 본인이 작곡한 음악을 멜로디만 올리거나 노래를 잘하는 이라면 직접 불러서 올리는 등 저작권 측면에서 아무런 문제가 없는 동영상도 많이 존재해왔다. 그중에서도 2007년 일본의 소프트웨어 업체 크립톤 퓨처 미디어(Crypton Future Media, Inc.)가 발표한 음성합성 보컬 음원 ‘하츠네 미쿠’의 등장이 가져온 변화는 매우 컸다. 일본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자면 하츠네 미쿠는, 야마하가 개발한 음성합성 시스템 ‘보컬로이드(VOCALOID)’에 대응되는 보컬 음원인데, 멜로디를 달아서 가사를 적으면 합성 음성으로 보컬 파트와 백코러스가 만들어지는 프로그램이다. 게다가 프로그램의 발전에 따라 노래 도중에 숨을 고르거나 음성의 강약 조절 등도 가능한 등 리얼리티를 살린 보컬의 표현이 가능해졌다. 보컬로이드 시스템은, 여성 보컬인 하츠네 미쿠 말고도 여러 다른 캐릭터를 통해 다양한 목소리가 발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이 하츠네 미쿠의 인기가 일본의 인터넷상에서 크게 높아지면서 하나의 무브먼트, 하나의 장르로서 만들어졌다. 일본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하츠네 미쿠 관련 음악은 이미 10만 곡 이상 발표되었다고 하며, 일러스트나 애니메이션을 포함하여 다양한 유저 창작 콘텐츠(소위 UCC)가 만연하고 있다. 기존에는 아마추어가 작곡을 했을 경우, 작곡가 스스로가 보컬 실력이 좋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거나, 혹은 본인은 남성인데 여성 보컬 곡을 만들었다거나 그 반대의 경우 등의 곤란함이 존재하고 있었다. (보컬을 섭외해야만 곡을 공개할 수 있게 되니까…. 프로 작곡가라면 평소에 거래하던 회사라든지 알고 지내는 가수에게 돌리면서 곡을 팔 수도 있겠지만, 아마추어에겐 그마저도 높은 벽이 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하츠네 미쿠를 필두로 한 보컬로이드 시스템의 등장은, 그런 곤란함을 타개하여 아마추어 작곡가들이 쉽게 스스로의 보컬 곡을 인터넷상에서 공개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줬던 것이다. 또한 이 하츠네 미쿠 보컬 음원에 맞춰 발표된 하츠네 미쿠의 캐릭터를 가지고 2차 창작 형태로 동인지나 CG일러스트도 많이 등장하였는데, 이는 하츠네 미쿠 캐릭터의 저작권을 갖는 크립톤 측에서 2차 창작에 ‘오픈’ 마인드를 갖고 있었던 덕분이었다.(애초에 하츠네 미쿠 캐릭터의 인기가 높아진 배경에는 2차 창작 동인 문화와의 연계성이 컸다는 점이 있었으니, 오픈 마인드를 갖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에 따라 하츠네 미쿠와 관련하여서는 인터넷상에서 온갖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그중 하나가 2008년 공개된 ‘미쿠미쿠댄스 MikuMikuDance’라는 프리 소프트웨어(약칭 ‘MMD’)이다. 이것은 하츠네 미쿠를 필두로 한 캐릭터 3D 모델을 조작해서 일종의 3D 애니메이션을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일본의 개인(온라인상의 닉네임 ‘히구치M’)이 하츠네 미쿠를 가지고 3D 애니메이션을 만들려고 제작한 것이다. 그 소프트웨어의 기본 모델로서 하츠네 미쿠가 내장되어 있는데, 이 역시도 일종의 2차 창작으로서 캐릭터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MMD 프로그램 자체는, 캐릭터 모델만 집어넣으면 하츠네 미쿠 외에 다른 캐릭터를 사용해서도 3D 애니메이션 제작이 가능하다.) 이 프로그램이 나온 이후에는 니코니코동화를 통해 하츠네 미쿠를 3D애니메이션으로 사용한 동영상이 다수 발표될 수 있게 되었고, 기존의 하츠네 미쿠 보컬을 덧입히면 일종의 ‘캐릭터 아이돌’로서 기능할 수 있게 되면서 수많은 작품이 쏟아져 나오게 되었다. 3. MMD 외에도, 기존 2D 애니메이션 방식을 채용하여 뮤직비디오 형식의 짧은 동영상으로서는 애니메이션이 몇몇 제작된 바 있다. 즉, 캐릭터디자인은 널리 알려진 하츠네 미쿠를 사용하고, 배경 음악의 보컬 역시도 하츠네 미쿠 음원(물론 나름대로의 개조를 가한 경우도 있음) 보컬로이드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형태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슈퍼셀(supercell)의 곡들이다. 슈퍼셀은 일종의 음악 집단인데, 일본 위키피디아의 설명에 따르면 작곡가 료(ryo)를 중심으로 일러스트레이터와 디자이너가 함께 활동하는 크리에이터 집단(동인음악 활동 중심)이라고 한다. 멤버 중에 보컬이 없기 때문에, 슈퍼셀 명의의 활동에서는 하츠네 미쿠를 보컬로 대체하여 곡을 발표했다. (현재는 이미 프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에, 작곡가 료 개인으로서는 타 보컬에게 곡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 슈퍼셀의 활동에 관해서는, 이런 형태의 온라인에서의 아마추어 곡 발표가 그 전까지 일본에서 흔했던 것은 아니기에 (한국에서는 이미 1990년대 말에 PC 통신 동호회를 통해서 조PD, 싸이 등이 자작곡을 발표한 후 프로 데뷔를 한 사례가 있었다) 초기에는 료가 자작곡에다가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던 그림을 무단으로 붙여서 동영상을 만들어 발표했었다. (2007년 12월 니코니코동화에 업로드한, 료 두 번째 자작곡인 <멜트>.) 그 곡이 1년 만에 조회수 300만을 기록할 만큼 인기를 얻었고, 하지만 댓글에서 해당 일러스트는 허락을 받고 사용한 것인지 지적을 받자 료는 일러스트를 그린 일러스트레이터에게 사죄하는 연락을 했다가, 결국 마음이 맞아서 함께 활동하기로 한 것이 바로 슈퍼셀 결성의 발단이 되었다고 한다.(일본어 위키피디아 참조) 그 후 2008년에 <사랑은 전쟁> <월드 이즈 마인> <블랙★록 슈터> 등의 곡을 연속적으로 발표하면서 슈퍼셀은 그 유명세를 확고부동한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멜트> <월드 이즈 마인>의 경우엔 일러스트(정지화)가 그냥 곡의 처음부터 끝까지 동영상의 배경으로 깔려 있을 뿐이었고, <사랑은 전쟁>은 정지화를 약간 편집한 정도의 애니메이션이었을 뿐이었다. <블랙★록 슈터>에 와서 일러스트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 움직임이 있는, 그나마 뮤직비디오 형태의 애니메이션으로서는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다. 물론 움직임은 매우 적은 수준에 머물렀지만, 어차피 상업애니메이션이 아니라 아마추어 동인 활동으로서 제작한 것 인만큼 사실 그 이상을 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자체 제작한 음반을 코믹마켓 등 동인지 판매전에서 판매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서서히 하츠네 미쿠와 그 관련 음원을 이용하여 니코니코동화를 통한 자작곡 발표가 늘어나면서, 조금씩 어느 정도 이상의 애니메이션을 배경에 집어넣는 경우도 늘어났고, 이번 글에서 마지막으로 소개하고자 하는 <모래의 혹성 feat. 하츠네 미쿠>도 그런 ‘뮤직비디오형 애니메이션’으로서 발표된 동영상인 것이다. 니코니코동화와 유튜브에서 2017년 7월 21일 동시에 발표된 이 곡은, 하츠네 미쿠의 이벤트인 「매지컬 미라이 2017」의 테마송으로서 작곡가 하치(ハチ)가 만든 곡(작사·작곡·편곡)에 CG나 프로모션비디오 제작 단체인 남방연구소(南方硏究所)가 뮤직비디오 애니메이션을 담당한 작품이다. *하치 MV 「모래의 혹성 feat. 하츠네 미쿠」 동영상 ‘하치’는 온라인 활동을 할 때의 닉네임이고, 음악가로서는 본명인 요네즈 켄지로 활동을 하고 있는데, 본인이 직접 작곡과 보컬도 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이지만 하츠네 미쿠 보컬로도 자작곡을 많이 발표했다. 2008년에 처음 자작곡을 니코니코동화에 올렸으나 그 당시 곡들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 후에 전부 삭제했고,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오리지널 곡을 발표했다. 그러면서 높은 인기를 끌게 되어 2013년 메이저 데뷔를 하게 되었다. 메이저 활동을 하면서 CF송이나 개인 음반을 발표했고, 2016년엔 <3월의 라이온>, 2017년엔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등 애니메이션 주제가도 담당하게 되었다. 한동안 프로로서의 활동이 중심이었는데, 이번 <모래의 혹성>으로 4년 만에 다시금 ‘하치’ 명의로 곡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4. 이 <모래의 혹성>은 뮤직비디오의 애니메이션 내용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 여러 가지 의견이 표출되었다. 아마추어 작곡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지 10년째를 맞이한 하치가, 자신의 활동기간과 거의 겹쳐지는 니코니코동화, 그리고 하츠네 미쿠를 통한 아마추어 작곡가들의 ‘인터넷 무브먼트’에 대해 ‘총괄’하는 의미에서 만든 곡이 아닌가 하는 의견이 대부분이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고 있지만, 그중에서 상당히 겹쳐지는 내용을 납득이 가게 설명하고 있는 페이지로 한 블로그를 소개하겠다. 이 블로그에서는 뮤직비디오와 가사를 통해서 내용에 관하여 고찰을 하고 있는데, 이 곡과 뮤직비디오가 가진 엄청난 ‘정보량’을 상당히 납득이 가게 설명해놓고 있어서 일본에서도 꽤 화제가 된 바 있다. 예를 들어 곡의 제목인 ‘모래의 혹성’이란 ‘전성기와 비교해보면 이미 황폐해져버린 보컬로이드계의 상황’을 가리킨다든지, 애니메이션 초반부에 집단으로 걸어가는 가면의 사람들 맨 앞에 하츠네 미쿠가 있는 모습은 바로 보컬로이드의 대표격인 하츠네 미쿠를 선두에 놓고 다른 보컬로이드 음원이나 작곡가들이 같이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지 않겠는가 하는 부분은 꽤나 설득력이 있다. 왜 모두들 가면을 쓰고 있는가 하면 바로 인터넷상에서 본명이 아니라 닉네임으로 활동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고, 실제로 가면 쓴 집단의 일부는 악기를 등에 메고 있기도 한다. 중간에 하츠네 미쿠의 모습 중에서, 위에 설명한 슈퍼셀의 <멜트>에서의 미쿠 디자인이 그대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것은 바로 앞서 언급한 대로 하츠네 미쿠 초기의 최대 히트 작곡가였던 료가 처음으로 그 이름을 날리게 된 명곡 <멜트>가 현재까지 10년간 이어져 온 일본의 보컬로이드 붐의 계기를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인 셈이다. 그다음, 가면의 집단 중 몇몇이 갈림길에서 집단과는 떨어져 나와 따로 걸어가는데, 이것은 말하자면 10년간의 기간이 지나면서 보컬로이드계에서 멀어져 버린 이들, 혹은 사망해버린 이들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고 블로그에서는 설명하고 있다. 하치, 즉 요네즈 켄지는 일본의 웹매거진 「Real Sound」와의 인터뷰에서 <모래의 혹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보컬로이드를 둘러싼 환경도, 제가 즐기던 때와는 많이 달라져 버렸다고 느낍니다. 테마곡을 만들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은 것을 계기 삼아, 지금 하치로서 하츠네 미쿠와 곡을 만든다면 어떤 형태를 취하는 것이 가장 적합할까? 하고 고민한 결과, 이렇게 만들었습니다. 제가 직접 보아온 보컬로이드의 원점이 되는 풍경, 그 시절에 모래밭에서 우리들이 만들었던 성을 되새기면서, 그리운 마음과 새로운 마음 사이의 딱 맞는 지점을 찾아보았더니 거기에 <모래의 혹성>이 있었습니다."(「Real Sound」 2017.07.21) 이제는 프로가 되었고 프로로서 활동해나갈 수밖에 없겠지만, 그래도 본인은 “보컬로이드 출신이고 보컬로이드를 통해 음악을 추구하던 시절이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보컬로이드 시절의 악곡이나 경험이 지금의 요네즈 켄지를 분명히 받쳐주고 있을 것이다”(위 블로그)는 이야기이다. “보컬로이드는 쇠퇴의 일로를 걷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힘들지도 모른다”(위 블로그)고 여겨지는 것 역시, 지금까지 보컬로이드나 니코니코동화를 쭉 보아온 사람들에겐 분명히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일 것이다. 이 뮤직비디오와 곡은 바로 그런 상황을, 지난 10년간의 보컬로이드 붐을 총괄하는 의미를 갖는 애니메이션이고 곡이라는 말이다. 애니메이션과 직접적 연관은 없지만, 필자 역시도 1990년대 한국의 PC 통신 ‘동호회 문화’를 겪으면서 많은 경험을 해왔고 추억하는 입장에서 <모래의 혹성>이란 뮤직비디오와 곡이 가진 이런 측면이 꽤나 친숙하게 느껴져서, 약간 좀 매니악한 분야이긴 하지만 이 글을 쓰기로 했다.
6, 70년대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의 중국을 무대로 한 이야기를 좋아했다. 솔직히 이 좁아터진 한반도에선 할 수 있는 이야기의 한계가 있으니까. 만주벌판을 누비면서 싸나이의 기상을 과시하려면 일단 대륙으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상상하는 건 그렇다고 쳐도 시나리오에 ‘광활한 만주벌판’이라고 나와 있는 걸 어떻게 찍는다? 걱정도 팔자지. 그들에겐 한강 고수부지가 있었다. 한강을 개발한다고 고수부지를 시멘트로 발라버렸을 때 얼마나 많은 영화쟁이들이 피눈물을 흘렸을까. 주동운 이 각본을 쓰고 이신명 이 감독한 < 지평선은 말이 없다 >의 액션도 대부분 중국에서 벌어진다. 이미자의 노래와 제목이 같은데, 둘 다 66년에 나왔으니 주제곡으로 쓰인 게 아닌가 추측해본다. 지금도 자주 들리는 노래와는 달리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필름도 사라져버렸지만. 영화 포스터 영화의 주인공은 윤명철이라는 싸나이다.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그는 헌병 대장을 총으로 쏴 죽이고 상해행 특급열차에 몸을 싣는다. 그는 할 일이 참 많다. 우선 상해에 있는 임시 정부 동지와 접선해야 한다. 다음엔 외삼촌 한진산이 어렸을 때 데려간 여동생 명숙을 찾아야 한다. 아버지를 밀고해 죽게 한 원수인 엄성칠이란 악당도 상해에 갔는데 그를 찾아 복수 하려던 형 명덕도 생사를 알 수 없으니 그 역시 찾아야 한다. 명철이 탄 열차는 진영방이라는 두목이 이끄는 마적의 습격을 받는다. 마침 헌병에게 의심을 받던 터라 위기에서 벗어날 좋은 기회이긴 했는데, 명철은 한 수 더 뜬다. 자기 물건을 빼앗기고 진영방을 쏘려는 일본인 상인을 쏴 죽이더니 이번엔 진영방이 강탈한 가방을 다시 훔쳐서 마적 떼의 말을 타고 달아난다. 한참 추격전을 벌이던 그들은 서로가 모두 일본에 맞서 싸우는 항일투사임을 알게 된다. < 카사블랑카 >의 험프리 보가트라면 ‘이것이 우리들의 아름다운 우정의 시작’이라고 말했을 장면이다. 물론 당시 한국 시나리오 작가들은 보가트식 냉소 같은 건 몰랐다. 이 영화의 각본은 72페이지 정도로, 보통 50페이지 안팎인 다른 작품에 비해 긴 편이다. 러닝타임 때문이 아니라 지문이 차지하는 분량이 많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액션이 엄청나게 많다. 읽다 보면 각본가가 머릿속에서 돌아가고 있는 가상의 영화를 보면서 필을 받아 흥분한 게 보인다.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열차가 전복되고 총알이 날아다니고 말 탄 사나이들이 만주벌판을 질주한다. 총알 날아가는 소리도 예사롭지 않다. 빠-- 빠-- ㅇ! 파파파--ㅇ! 시나리오 48페이지 이걸 어떻게 다 찍었을까.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말 달리는 장면에서는 마법의 고수부지가 도움을 주었을 거라 생각해본다. 만주 서부극 장면이 끝나면 명철은 상해에 와 있다. 하필이면 호텔에서 접선하려는 애꾸눈 동지는 살해당했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던 그는 인신매매범에 쫓기던 카바레 가수 미향을 위해 맞서 싸우던 미향의 오빠 대열을 돕는다. 애꾸눈 동지의 이름을 빌려 임시 정부 동지와 접선한 그는 또 정체불명의 악당들의 습격을 받는다. 무기를 운송 중이던 독립군의 정크선과 악당이 탄 보트의 007스러운 액션이 양자강에서 펼쳐진다. 동지들은 모두 죽고 명철만이 간신히 살아남는다. 아무리 봐도 일본군은 아닌 거 같은 그 악당들의 정체는 무엇인가. 한진산이라는 이름을 기억하시나? 명철의 동생 명숙을 데리고 떠났다는 외삼촌 말이다. 그도 상해에 살고 있다. 그는 각본에는 영란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젊은 여자 때문에 골치가 아픈데, 영란은 당연히 명숙의 다른 이름이다. 하필 영란은 미향과 같은 클럽에서 일하고 대열과 그렇고 그런 사이다. 한진산은 역시 카바레를 운영하는 마천호라는 중국인에게 조카를 천 원 받고 넘겨주는데, 그 마천호라는 사람은 바로 정크선 안에 있던 독립군 무기를 판 친한파다. 중국 대륙이 넓다고 누가 그랬는가. 한편 아편굴에서는 마천호의 경쟁자인 홍대선이라는 자가 헌병 대장 사천과 음모를 꾸미고 있다. 그의 계획은 금괴 안에 구멍을 파 그 안에 아편을 숨겨 한국 땅으로 밀수하는 것이다. (“누가 봐도 금덩어리로밖에 안 보입니다. 이 속에 아편이 들었다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하겠습니까.”) 안다, 안다! 말이 안 된다는 거. 그러나 잠시 기다리시길. 인물 관계도 한진산이 영란뿐만 아니라 미향까지 마천호에게 넘겨주었기 때문에 대열은 마천호의 카바레로 쳐들어가고 명철은 그를 도우러 같이 들어간다. 깽판. 그런데 위기일발의 순간에 명철을 구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그동안 명철에 미행을 붙여놨던 진영방이다. 명철은 당연히 깽판 치는 동안에도 영란이 동생인 걸 모른다. 그가 모르는 것이 또 하나 있었으니 지금은 마약중독자가 된 형 명덕이 홍대선의 부하로 일하고 있었고 얼마 전에 동생을 만나러 한진산을 찾아갔다가 동생이 병으로 죽었다는 거짓말을 들었다는 것이다. 분명 목표는 미향 구출작전이었을 텐데, 그 소동 이후 얼떨결에 명철은 박철이라는 가명을 쓰며 마천호의 부하로 들어가게 된다. 금괴 안에 아편이 들었다는 말을 들은 명철은 열차 강도질을 해서 금고를 탈취한다. 누가 훔쳤는지 알아낸 홍대선은 마에게 연락해 물건을 돌려달라며 약속장소를 잡는데 그 장소에 나타나 명철의 총에 맞는 건 하필이면 명덕이다. 명덕은 명철에게 외삼촌이 있는 곳을 알려주며 죽는다. 명철이 찾아가자 한진산은 이번엔 동생을 홍대선에게 팔아넘겼다고 또 거짓말을 한다. 슬슬 속도를 내자. 알고 봤더니 홍대선이 보내려고 했던 건 독립군 군자금으로 쓰려 했던 진짜 금괴였다. 알고 봤더니 마천호는 아버지의 원수 엄성칠이었다. 명철과 영란은 아직 둘이 남매 사이란 걸 모르고 연애감정을 느낀다. 명철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간다. 진영방이 명철을 구출한다. 영란은 자기를 괴롭히던 마천호로부터 박철이 오빠임을 알게 된다. 명철은 영란을 구출하고 역시 동생임을 알게 된다. 작가가 필 받아 쓴 10페이지의 액션 신이 이어진 뒤 총에 맞은 명철은 결국 마천호를 죽여 원수를 갚고 진영방의 품에서 죽어간다. 알고 봤더니 진영방은 한국인으로 지금까지 모은 돈은 다 한국 독립군에 전달했고... 하지만 지금 독자들은 둘 사이의 브로맨스에만 신경 쓰고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