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결문
- 감독
- 안상율
- 제작년도
- 1991
- 출연
- 김광영, 박상호, 박현아
<춘몽> 촬영 현장, 감독 유현목과 배우 박수정.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이만희를 옹호한 유현목, 반공법 위반 혐의를 받다 1965년 초 <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이만희, 1965) 사건으로 이만희 감독이 옥고를 치르고 반공법 위반 혐의 조사가 진행되며 영화계를 떠들썩하게 만드는 도중 또 하나의 검열 관련 사건이 발생했다. 1965년 3월 23일, 세계문화자유회의 한국 본부가 신문회관에서 주최한 ‘은막의 자유’라는 세미나에서의 유현목의 발언이 문제 되었던 것이다. 이 자리에서 유현목 은 헌법 제14조 에 의해 학문과 예술의 자유가 규정되어 있음에도 “후진국이면서 ‘미묘한 사정’에 처해있는 나라의 국민은 아니 작가는 엄밀한 의미에서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라며 당대 상황에 대한 비판의식의 일단을 내비쳤다. 이와 같은 발언이 정권 당국자를 불쾌하게 할 수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다음의 인용 구절들이 문제가 되었다. 또 이를 즈음해서 반공을 국시로 하는 나라로서 반공사상을 보다 고차원적인 면에서 제공․주입할 시점에 놓여 있다. 일련의 반공법 위반혐의 사태는 이러한 때의 변화에 대해서 외면했거나 아니면 편협적인 것으로 밖에 해석되지 않는 애국행위라 해둠이 옳을 것이다… 최고의 예술은 최고의 정치와 통한다는 말이 있다.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그래서 생명을 부여하지 않는 것이 반공이라면 언제까지나 영화예술의 차원을 높여갈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영화예술의 차원 높은 표현의 수단을 빌지 않고 국시를 최고로 주입할 수는 없을 것이다. *주1 - 유현목, “은막의 자유”, 《경향신문》, 1965. 3. 24. “괴뢰군을 인형으로만 설정하고…” 운운이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의 감독 이만희가 반공법 위반으로 처벌 대상이 된 정황 을 겨냥하고 있음은 누가 보더라도 손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이었고, 특히 “반공을 국시로…” 운운의 발언이 특히 문제가 되었다. 1965년 초 반공법 위반 혐의로 <7인의 여포로(돌아온 여군)> 상영이 중지되고 감독이 투옥되었다. 반공법 위반 혐의로 감독이 투옥된 첫 번째 사례다. 발표 후 3개월 반이 지난 7월 13일 유현목은 서울 지검에 의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다.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문제 삼은 대목은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일 수 없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였다. 또한 그가 그간 감독한 < 오발탄 >(1961), < 잉여인간 >(1964), < 순교자 >(1965) 등 일련의 영화 역시 문제가 되었다. *주2 이러한 검찰의 입장 발표로 인해 유현목은 반공이 한국의 국시임을 부인한 감독으로 이후까지 유명해졌다. 당시 원문이 없는 상태에서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려우나 검사가 인용한 이 워딩이 정확한지 의문이 든다. 당시 기사의 축약본에서 유현목은 반공이 국시임을 명확히 인정하고 있고, 이후 판결문 역시 검찰의 논고 내용을 인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마도 검찰 측이 문제를 과장하기 위해 인용문을 왜곡한 것이 아닌가 짐작된다. 당시 검찰이 근거로 삼은 법규는 반공법 제4조 (“찬양 고무 등”)였는데 이는 이만희 감독에게 적용되었던 조항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검찰이 입건을 발표한 시기가 상당히 절묘하다. 반공법 위반과 함께 음란죄로 동시에 기소될 유현목의 연출작 < 춘몽 >(1965)이 개봉 중이었던 기간이었기 때문이다. 지난했던 <춘몽>의 검열과정 유현목의 연출작 <춘몽>은 일본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의 리메이크작으로 원작 자체가 상당한 수위의 노출을 포함하는 문제작이었다. 애초 유현목은 이 영화의 파격적 노출 수위가 부담되어 거절하였으나 표현상의 전권을 부여하겠다는 제작사 측의 설득으로 결국 영화를 만들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주3 치과에 들렀다 잠이 든 남성이 꿈속에서 병실에 있었던 여성이 치과의사에게 육체적, 정신적, 성적 학대를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해 그녀를 구해내고자 하는 줄거리의 이 영화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내용과 노출, 독일 표현주의를 연상케 하는 실험성으로 주목받았다. 그 검열 과정이 쉽지 않았던 것은 물론이다. 우선 이 영화가 일본영화 <백일몽>의 번안이라는 점이 문제가 되었다. 현재 한국영상자료원에 남아있는 <춘몽>의 서류철 에 포함된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라는 내무 보고 문서를 통해 보건대 남아있는 제작신고 서류 이전(1964년 12월)에 이미 “일본인 원작 ‘백일몽’ 제작신고”가 접수되었으나 이듬해 1965년 1월 분과위원회 심의를 거쳐 반려되었다. 아마도 일본 원작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65년 2월 16일에 원작을 개작한 후 <춘몽>으로 제목을 바꾸고 제작신고가 되었으나 4월 22일 공보부는 다시 <백일몽>의 표절이라는 점과 내용이 비속하다는 점을 들어 반려하였다. 이에 제작사는 “전위적인 영화 표현”이라는 작품의 취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열네 군데의 수정 사항을 기재한 건의서를 제출하였고, 이후 공보부는 제작신고를 수리하였다. 영화 완성 후 본편의 검열신청은 1965년 5월 1일(접수는 5월 24일)에 이루어졌다. 본편 검열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5월 26일에 있었던 초심에서 중앙정보부는 이 영화에 대한 재심을 판정했고, 5월 31일 재심에서 역시 허가를 보류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공보부 자문위원회는 3개처 제한 후 상영허가를 하면 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6월 5일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244조 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하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공보부는 “본 작품이 외설이라 판단되는 부분을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중앙정보부에 통보한 후, 상영을 허가했다. (좌)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백일몽>의 표절, 내용의 비속으로 제작신고를 반려한 문서) (우) "방화 '춘몽' 상영허가 경위" (<춘몽>의 본편 검열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내부 문서) 음란죄로 기소되다 지난한 검열과정을 거친 <춘몽>은 마침내 1965년 7월 3일 명보극장 에서 개봉했다. 이 영화가 개봉 중인 7월 14일 유현목이 반공법 위반으로 입건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다. 그런데 1966년 1월 4일 검찰은 유현목을 반공법 위반뿐 아니라 음화반포(혹은 제조) 혐의까지 더하여 기소하기에 이른다. *주4 한 감독이 반공법과 음란조항 위반으로 동시에 기소되는 초유의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한국영화 사상 감독이 반공법 위반으로 기소된 경우는 이만희에 이어 두 번째, 음란죄로 기소된 것은 첫 번째 사례였다. <춘몽> 개봉 당시 신문광고(《조선일보》, 1965. 7. 2.) 이 영화가 음화반포(제조)죄 혐의를 받은 구체적인 정황은 영화를 제작할 당시 신인 여배우를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만들어 그녀의 뒷면을 촬영, 음화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 혐의는 논쟁의 여지가 다분했다. 촬영 당시 신체의 앞부분은 가린 상태였고, 뒷모습의 누드를 담은 6초 정도에 해당하는 이 분량은 검열 신청 전 이미 감독에 의해 삭제되었기 때문이다. *주5 즉 이 장면은 대중은커녕 검열관에게까지 공개되지 않은 장면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검찰은 징역 1년 6개월 및 자격정지 1년 6개월의 유죄 취지로 구형한다. 판결은 1년이 지난 1967년 3월 15일 내려졌는데, 당시 서울형사지법은 반공법에 대해서는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유죄 취지로 벌금 3만원을 선고하였다. 반공법 위반 부분에 대해 법원은 “①유피고인의 연설내용이 적성국가를 이롭게 할 구체적인 사실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었고 ②영화 「7인의 여포로」에 대해서도 어느 특정 장면을 지적한 것이 아니며 단지 예술가의 일반자세를 논한 것이기 때문에 반공법 위반죄를 물을 수 없다”라고 판시했던 반면, *주6 음화반포(제조)죄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유죄의 취지를 밝혔다. 이 영화는 상대방 여자에게 폭행, 린치, 전기고문 등 가혹한 행위를 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하는 현상을 보고 또 이와 같은 행위를 당하고 남녀가 서로 성적인 자극과 만족을 얻는 것을 그린 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변태성욕자에게 기어 완전 나체로 달아나는 장면을 촬영한 것이므로 우리 사회의 건전한 양식에 비추어 정상인에게 이상한 성적 자극을 주고 수치, 혐오의 감정을 일으키게 함에 족하다고 인정된다. 헌법에서 보장된 학문•예술 및 표현의 자유도 헌법 제32조가 정한 공공복리에 의하여 제한되고 이 한도 내에서만 허용되는 것이므로 이 범위를 벗어난 권리행위는 권리 남용에 해당하여 헌법의 보장을 받지 못한다고 할 것이다. *주7 - 서울형사지법 판결, 1967년 3월 10일 선고. 이 판결에 대해 당시 언론을 비롯한 법조계와 예술계 인사들은 대체로 비판적인 반응을 보였다. 문제가 된 장면을 검열 전에 삭제했다면 그것은 음화 반포로 볼 수 없고, 촬영 당시 불과 10여 명의 스탭 앞에서 나체로 여배우가 등장했다고 했던 점 역시 음란물의 전시에 해당할 수 없으며(제243조 관련), 해당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해도 검열 전 삭제된 이상 그것은 완성품인 영화라 볼 수 없으므로 음화 제조라 볼 수 없다(제244조)는 것이다. *주8 이에 검찰과 유현목 감독은 공히 항소하였고, 항소의 결과는 다시 2년이 훌쩍 지난 1969년 10월에 나왔다. 당시 항소심을 맡은 서울형사지법 합의 2부는 반공법에 대해서는 역시 무죄, 음화제조죄에 대해서는 “영화예술에서도 예술성과 음란성이 양립될 수 없으며 아무리 예술성이 높은 작품이라도 음란성이 있을 때는 외설이라고 볼 수 있다”라는 취지로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주9 비록 선고유예이긴 하지만 유죄가 판결된 것이다. <춘몽> 중 한 장면 반공과 음란의 결합 “은막의 자유” 세미나 발표와 <춘몽>을 엮은 이 사례는 한 재판 대상에 반공과 음란이 결합되어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롭다. 그것은 단순히 우연한 별개 사건에 대한 병합 재판의 사례일까? 아니면 일정한 연관관계에 의해 검찰에 의해 작위적으로 만들어진 결과일까? 굳이 음모론의 입장에 서지 않더라도 두 사건의 연관성을 짐작하기란 어렵지 않다. 말하자면 세미나 발표의 불온성을 문제 삼고 싶었던 검찰의 입장에서 해당 사건만으로 사법적 처벌이 내려지기 어렵다는 판단에서, 비슷한 시기의 <춘몽>에 대한 음란죄를 함께 문제 삼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정황은 당시 한 신문기사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다. 검찰은 이러한 『춘몽』에 대한 판결에는 대체로 만족했다. 유감독을 반공법 위반으로 다루다가 우연히 인지하여 부산물(?)로 기소했던 것이 맞아 들어갔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산물인 반공법 위반 부분이 무죄가 되었으니 시무룩… - “춘몽의 일장춘몽, 음화라고 유죄판결 나오게 된 사연”, 《신아일보》, 1967. 3. 16. ‘주산물’과 ‘부산물’을 나누고 있는 위 인용문은 당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권당국의 인식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아 흥미롭다. 말하자면 반공법을 비롯한 사상 혹은 사회적 문제는 정권당국이 ‘주’되게 관심을 가진 영역, 풍속은 ‘부’수적인 관심을 가진 영역이라는 의미일 터다. 이는 당대에 사상통제가 엄격히 이루어졌던 반면 풍속에 대한 검열은 상대적으로 완화되어 있었다는 검열 연구자들의 인식과 연결될 수 있다. 그러나 외적으로 분리되어 보이는 두 주제가 내적으로 연결되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풍속에 대한 통제는 사상에 대한 통제를 정당화하거나 구실이 될 수 있으며, 그 반대의 효과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은막의 자유”와 <춘몽>의 병합 사례라 할 것이다. 검열은 최종적으로 인적 통제를 통해 완성된다. 검열의 최후의 수단이자 목표는 창작자를 향해 있다. 그것은 단일 작품에 대한 검열과 달리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 이 사건의 유죄 판결 이후 동료인 김수용 은 “감독의 입장에서는 이 판결이 있은 이후 표현에 많은 심리적인 제한을 받게 되어 부득이 예술적으로 필요한 러브신이나 나체 면의 제작이 위축될 것 같다”라는 발언을 한 바 있다. *주10 그러나 이러한 위축은 유죄를 선고받은 음란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 주1. 이 기사에 실린 내용은 발표문의 원본이 아니라 축약본이다. 주2.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발표”, 《동아일보》, 1965. 7. 14,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말썽”, 《조선일보》, 1965. 7. 14, “만물상”, 《조선일보》, 1965. 7. 15 등. 주3. “인터뷰, 40년만의 감개무량한 복원, <춘몽>의 유현목 감독”, 맥스무비, 2004. 7. 29. 주4. 당시 언론에 따르면 검찰이 음란죄의 근거로 삼았던 조항은 형법 제243조(음화등의 반포)였다. 그러나 당시 정황을 감안컨대 음화 등의 제조를 규정한 244조 역시 해당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형법 제 243조는 “음란한 문서, 도화 기타 물건을 반포, 판매 또는 임대하거나 공연히 전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244조는 “전조의 행위에 공할 목적으로 음란한 물건을 제조, 소지, 수입 또는 수출한 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만환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라고 규정되었다. 주5. 이 부분에 대해서는 검열 전 삭제했다는 기사와 나일론 네글리제를 입힌 같은 신의 다른 대체 장면을 썼다는 기사가 병존하여, 판단하기 어렵다. 정황 서술의 구체성을 감안할 때 아마도 후자가 진실에 가깝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주6. “영화 춘몽 음화로 판결, 유현목 감독에 벌금 3만원 선고”, 《한국일보》, 1967. 3. 16. 주7. 김재훈, 「음란성 개념 변화에 관한 연구: 대법원 판례를 중심으로」, 전남대학교대학원 신문방송학과 석사학위논문, 2003, 100쪽. 주8. “영화 춘몽의 법 적용 시비, '공개 전 삭제... 유죄론 보기 힘들어'”, 《조선일보》, 1967. 3. 21. 주9. “춘몽은 '외설영화', 유현목 감독 선고유예”, 《서울신문》, 1969. 9. 25. 주10. “법 이전의 검열기구 활용을, 표현에 심리적인 제한”, 《동아일보》, 1967. 3. 18.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전에는 평화로웠습니다 조카들은 톰과 제리를 보았습니다 남동생 내외는 조용히 웃었습니다 여동생은 연한 커피를 마셨습니다 어머니는 아주 조금만 늙으셨습니다” 시인은 시를 썼고, 애니메이터는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시인은 몇 해 전, 애니메이터들이 꾸리는 영화제에서 심사를 했다. 건조하고 위엄있는 판결문 같은 심사평 대신, 시인은 감성을 촉촉이 담아 선정의 변을 들려주었다. 문장을 읽어내는 시인의 목소리는 낭송의 울림 그대로 잔잔히 스며들었다. 해당작 < 디스크 조각모음 > ( 황보새별 , 2014)은 이미 그 자체로 훌륭한 애니메이션 작품이지만, 내게는 시인이 읊조리던 단어와 음색과 표정과 체온이 고스란히 늘 함께 떠오른다. 아마도 그 시간, 그곳에 함께 했던 많은 이에게도 마찬가지일 테다. 그래서였을까, 애니메이터들은 여전히 시인을 잊지 않았고, 올해는 그가 쓴 시로 애니메이션을 만들고자 하였다. 시인이 다수의 애니메이션 속에서 하나의 수상작을 골랐듯이, 이번에는 애니메이터들이 이미 발표된 시인의 시 속에서 하나를 찾아낸 셈이다. 시인은 기꺼이 그 시를 자신의 목소리에 담아서 오디오 트랙으로 건넸고, 애니메이터들은 목소리 속에 담긴 시를 이미지로 풀어내고자 했다. < 휴일의 평화 >는 그렇게 탄생하였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오후 또한 평화롭습니다 둘째 조카가 큰 아빠는 언제 결혼할 거야 묻는 걸 보니 이제 이혼을 아나봅니다 첫째 조카가 아버지 영정 앞에 조용히 서 있는 걸 보니 이제 죽음을 아나봅니다” 시인과 애니메이터의 ‘콜라보’인 < 휴일의 평화 >는 2017년 인디애니페스트 개막식에서 첫선을 보였다. 해마다 이 영화제는 ‘릴레이 애니메이션’라는 특별한 프로젝트를 꾸려왔다. 다수의 애니메이터가 참여하는 집단 창작의 형태이며, 이제껏 줄곧 ‘평화’를 주제로 삼았다. 물론 릴레이 애니메이션이 인디애니페스트만의 발명품이나 전유물은 아니다. 전 세계 애니메이터들이 국제적으로 교류하기 시작할 무렵부터 이러한 집단 창작은 기획되고 시도되었다. 국적을 불문하고 대체로 은둔형 창작을 지향하는 소박한 애니메이터들의 성향을 고려하건대, 릴레이 애니메이션은 (수줍음을 많이 타면서도 저마다 장난기 한 보따리씩은 지닌) 애니메이션 종족의 성대한 의례와도 같았다. 그렇다고 그것이 우주정거장을 짓는 엄청난 프로젝트는 아니다. 릴레이라는 말뜻 그대로, 앞선 작업자의 마지막 프레임 이미지을 이어받아서 자신만의 영상을 자유로이 펼쳐내고는 마지막 프레임의 장면을 그다음 작업자에게 넘기는 식이다. 모든 것을 이어 붙이기 전까지는 누구도 최종 결과물을 가늠할 수 없다. 이렇게 애니메이터들은 자신들의 영화제를 즐겨왔다. 인디애니페스트도 마찬가지다. 어쩌면 릴레이라는 형식은 컨베이어 벨트로 상징되는 분업 시스템 (1920년대, 이러한 제작 공정은 포드 자동차 공장 이상으로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지배했다)을 뒤집어엎는, 애니메이션다운 유쾌한 전복의 기획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저녁 내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 부재중 전화가 두 건입니다 아름다운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사랑하는 그대를 떠올려봅니다 문득 창밖의 풍경이 궁금합니다 허공이라면 뛰어내리고 싶고 구름이라면 뛰어오르고 싶습니다” 심보선 시인의 시 < 휴일의 평화 >는 화려하지도, 애써 심오해 보이려 하지 않다. 그저 담담히 때론 독백으로, 때론 흘려 말하는 고백처럼 ‘어느 보통의 휴일’을 읊조린다. (애니메이터들이 그 시에 눈이 간 이유가 <톰과 제리>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지만, 그래도 휴일 오전의 활력은 < 톰과 제리 >와 제법 잘 어울린다). 참여한 애니메이터들이 저마다의 몫으로 시를 나누어 접근하면서, 시는 활자 속에 품어두었던 섬세한 결을 비로소 드러낸다. 처음 <휴일의 평화>를 읽을 때, 거기에는 그저 ‘특별한 일이 벌어지지 않은 평화’가 있다고 여겼다. 그러나 여러 번 되뇔수록, 평화로운 풍경 밑에는 긴장의 에너지가 한껏 농축되어 깔려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저녁 내내 평화롭기를 바랍니다”라는 소망처럼, 휴일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다. 어머니가 “아주 조금만 늙으셨다”는 오전처럼, 삶의 시간은 서서히 흘러간다. 아주 느리게 진행되는 삶의 속도는 바로 애니메이터가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창작’의 속도와 다름없다. 미세한 결, 틈, 마디는 릴레이라는 형식 속에서 비로소 드러난다. 각각의 창작자는 자신마다의 프리즘으로 하나의 풍경 속에 감춰진 다양한 색을 분리시켜 스펙트럼으로 펼쳐놓았다. <휴일의 평화>라는 시는 애니메이션으로 제 모습을 마주한 셈이다. 시 속에는 가족을 이루는 여러 인물의 모습이 담겨 있다. 그들은 자기 나름의 속도로 삶을 살아가면서 ‘휴일, 그곳’에서 모여 있다. 참여한 애니메이터들은 각자의 스타일과 감수성으로 ‘휴일, 그곳’을 시각적으로 그려낸다. 누군가는 담백한 스케치로, 누군가는 추상적 움직임으로, 누군가는 내면의 침잠으로, 누군가는 경쾌한 운동으로 말이다. 마치 시를 이루는 시어들 하나하나가 각각의 농도와 밀도를 지니듯이...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은” 평화로운 휴일은 그렇게 잠시 잠깐 균형의 순간으로 우리 앞에 머물다 사라지게 마련이다. “오늘은 휴일입니다 이토록 평화로운 날은 도무지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습니다” 가족이 모처럼 모였을 때, 마냥 평화롭지는 않다. 누군가의 죽음이 드리워져 있다면 그 상황을 채우는 숨소리마저도 편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 일 없는 듯싶지만, 그 평화는 영구적인 것이 아닌 지극히 일시적인 것이다. 시도 마찬가지이고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이다. 단단하게 결합된 전체의 통일성이란 불가능하다. 시어는 자유로이 떠돌며 매 순간 읽는 이의 감흥에 따라 새롭게 조직되기 마련이다. 릴레이 애니메이션이라는 집단 창작 속에서 시는 결코 일관된 전체를 지향하지 않는다. 각자는 시의 일부분을 자기식으로 이해했고, 휴일 어느 날의 시간대를 채웠으며, 그곳을 교차하는 시선 중 하나만을 따랐다. 그럼에도 (혹은 그러하기에) < 휴일의 평화 >는 이번 인디애니페스트에서 상영된 가장 뛰어난 성취로 꼽힐 자격이 있다. 영화제 개막식의 구색을 애써 꾸리는 요식 행위가 아니라, 온전히 독립된 가치를 지니는 창작품 자체로 말이다.
영화사가 이영일은 스릴러-액션 영화가 1963년에서 67년까지 5년간, 한국 영화제작의 “주조가 되다시피 했다”고 썼다. 하지만 당대에 누린 상당한 인기나 산업적 파급력에 비한다면 이 장르에 대한 후대의 관심은 그다지 큰 편이 못된다. 이만희 나 정창화 같은, 이 장르에서 활동했던 ‘작가’들이 연출한 몇몇 영화가 작가주의적인 맥락에서 조명되거나 합작영화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장르로 거론되는 정도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회고전 이후 작가로서 재조명된 정창화 감독의 작품들은 이 두 가지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라고 하겠다. 여전히 한국영화사에 대한 작가주의적인 접근이 지배적인 탓도 있겠지만, 다른 한편으로 이는 해당 시기 스릴러-액션 영화의 대표작 대부분이 남아 있지 않은 때문이기도 하다. 요컨대 오랫동안 장르 영화를 폄하하는 시선을 견지해왔던 한국영화 비평담론에 의해 그저 그런 상업영화로 치부되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대표적인 영화들이 사라짐으로 해서 재평가를 받을 기회마저 갖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범구 감독은 매우 불운한 경우다. 1964년 당시 이만희 , 김수용 과 함께 “현역 젊은 감독의 대표선수 격”으로 꼽혔던(경향신문, 1964년 7월 13일) 강범구 감독은, 그러나 문예영화 붐을 이끌면서 영화작가로 입지를 굳혀간 이만희, 김수용과는 달리 상업적인 영화를 만드는 감독으로 남았다. 문예영화 감독이 되지 않거나 될 필요가 없었던 것은 그가 스릴러-액션 영화 장르에서 아주 잘 팔리는 감독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초기 대표작들이 남아 있지 않은 이유 또한 역설적이게도 그 영화들이 ‘국제적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탓이었다. < 검은 꽃잎이 질 때 >(1962) < 안개 낀 거리 >(1963) < 창살 없는 감옥 >(1963) < 유랑극장 >(1963) 등이 대만과 동남아 시장으로 수출되었고 그는 곧 대만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의 영화감독이 되었다. 1966년 그가 한국-대만 합작영화 < 탈출명령 >을 연출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전작들이 대만에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기 때문이었다. 강범구 감독의 네 작품은 1963년과 64년 사이에 대만과 동남아시장을 묶어 작품당 만 달러에 수출되었다. 같은 시기에 신상옥 감독의 < 성춘향 >이 5천 달러를 받고 일본시장에 판매되었음을 상기해보면, 이것이 당시로서는 얼마나 성공적인 해외시장 진출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만으로 보내진 것이 영화의 원판이었다는 데 있었다. 강범구 감독에 따르면 대만은 원판과 프린트를 가리지 않고 작품 편수에 따라 관세를 매겼기 때문에 대만 쪽에서는 원판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대만과 동남아 시장을 포괄할 여러 벌의 프린트를 한국에서 만들어 내보내는 것보다는 원판을 가져가 대만에서 만드는 것이 훨씬 경제적이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1964년 작 < 동굴 속의 애욕 >과 < 소만국경 > 두 편뿐이다.(물론 1960년대 말 이후의 영화들은 몇 편 남아 있다. 하지만 한국 장르영화의 전성기이자 감독 강범구 의 전성기였던 196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의 영화 가운데는 이 두 편만이 남아 있다.) 사라져버린 다른 작품들에 비해 당대의 평가가 높지 않았던 이 영화들을 통해서도 감독의 솜씨를 확인하는 것은 물론 어려운 일이 아니다. < 동굴 속의 애욕 >은 권순영 판사가 춘천지방법원에 있을 당시 재판했던 사건들을 바탕으로 쓴 이른바 ‘법정 수기’가 원안이다. “법은 보호할 가치가 있는 여성의 정조만을 보호한다”는 악명 높은 판결문을 남긴, 이른바 ‘박인수 사건’의 담당 판사가 바로 권순영이었다. 그는 박인수 사건 재판으로 전국적인 유명세를 탔던 그 해에 「법창(法窓)의 봄」(정문사, 1955)이라는 수필집을 내놓았다. 그 책에는 그가 판결을 맡았던 사건들의 내막이 때로는 소설 형식으로, 또 때로는 수기 형식으로 서술되어 있다. 원안 <동굴 속의 애욕>은 한국전쟁 이전에는 북한 땅이었다가 전쟁을 거치면서 남한의 땅이 되었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에서 있었던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다. 한반도의 많은 지역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민군과 국방군이 번갈아 지배했던 그곳에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산(山)사람’, 이른바 빨치산이 되어야 했다. 적군에게 협력한 전력이 드러나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는 공포가 그들을 산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이 살인사건의 세 주인공인 유동록과 안태선, 그리고 이옥녀도 그런 사람들이었다. 공산치하의 마을에서 리(里) 세포위원장으로 권세를 누리던 동록은 태선의 아내 옥녀를 겁탈한다. 세 사람의 치정에 얽힌 관계는 9.28수복 이후 북으로 진격해오던 국방군이 마을을 점령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동록의 동생 동관과 그의 애인이자 여맹위원장인 정숙, 그리고 세 사람은 국방군을 피해 대성산 산마골의 동굴로 숨어들고, 그곳에서 그들의 ‘짐승 같은’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공포가 지배하는 그곳에서 옥녀의 마음은 점차 우유부단하고 유약한 남편 대신 억세고 강인한 동록에게 기울어간다. 사건의 폭발은 태선이 마을로 내려가 자수하겠다고 하면서 시작된다. 옥녀는 인민군에 나간 전력을 가진 남편이 자수한 뒤에 겪게 될 불안한 미래보다는 지금 당장 자신의 공포를 잠재워줄 억센 팔을 가진 동록을 택한다. 그녀는 태선의 자수 의사를 은근슬쩍 정숙에게 흘리고 정숙은 이를 곧바로 동록에게 고발한다. 인민재판을 통해 동록은 태선을 반동으로 낙인찍고 낫으로 그를 살해한다. <선데이서울> 같은 주간지에 ‘짐승과도 같은 빨치산의 생태’ 류의 제목을 달고 실렸을 법한 이야기, 또는 얼핏 1950년대의 < 피아골 >을 연상시키는 이야기가 강범구 감독의 영화에 와서 법정드라마의 외피를 입으며 전혀 다른 질감을 확보했다. < 검사와 여선생 >에서 < 어느 여대생의 고백 >에 이르는 한국 법정드라마들은 그 장르 특유의 심문(審問)의 형식을 기구한 운명을 감당한 여인네들의 고백의 장치로 흔히 활용하곤 했다. 죄지은 여성의 억울한 사연에 대한 공감이 차가운 법의 논리를 압도하면서 흥건한 눈물이 법정을 채우는 것이 한국 법정드라마의 관습이었다. < 동굴 속의 애욕 >은 그런 면에서 예외적인데, 이는 비정한 도시 뒷골목에서 벌어지는 범죄를 능숙하게 다뤄온 강범구 감독의 영화적 수완이 발휘된 결과다. 살인사건이 일어났던 바로 그 순간의 정황이 동록의 자백으로 먼저 재현되고, 이후부터 검사의 논고와 피고의 자백, 그리고 증인들의 증언이 이어지면서 간부(姦夫)와 내통하여 남편을 죽였다는 이 치정 살인사건은 조금씩 그 내막을 드러낸다. 법정드라마의 장치들은 이야기의 정보들을 적절히 안배하고 그로부터 서스펜스와 스릴을 만들어내는데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특히 여러 명의 화자(話者)가 각자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풀어놓는 형식은, 그 사건에 연루된 어느 누구도, 심지어는 철저한 공산주의자며 정부(情婦)의 남편을 잔인하게 살해한 동록조차도 절대적인 악의 화신이 아니라 인간적인 연민을 자아내는 존재로 그려지도록 한다. 사건의 핵심 당사자인 옥녀의 증언 거부가 이야기 정보를 지연시키는, 서스펜스 영화의 고전적인 장치도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재판이 벌어지는 현장의 관객 역시 정서적 공감을 자아내는 중요한 장치로 기능하는데, 특히 신문기사로 사건을 접하고 호기심을 느껴 법정을 찾아가는 젊은 부부를 배치한 것은 탁월한 설정이다. 전계현과 방수일이 맡은 이 부부는,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은 짧지만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서 사건을 소개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맡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이야기에 대한 객관적인 시선을 확보하도록 한다. 전계현은 옥녀의 마지막 진술을 듣고 난 후에 “다른 사람들은 저 여자를 미워할지 모르지만 전 동정해요”라고 말하는데, 이는 곧 그 사건에 대한 관객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전후 남한사회가 품어야 했을 수많은 이적행위자들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물론 현실 속에서는 관철되지 못했지만) 그려지는 순간이라고 하겠다. 3선 개헌에서 유신체제의 출범으로 이어지는 1960년대 후반 이후의 정세 속에서 한국사회는 점점 더 경직되고 억압적으로 되어갔다. 이와 비례하여 한국영화에서 ‘반공’은 어떠한 경우에도 침범될 수 없는 영역으로 공고해졌다. 인민군의 묘사를 문제 삼아 감독 이만희 를 구속까지 했던 < 7인의 여포로 > 사태 이후에, 많은 영화감독, 비평가들이 반공의 이념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라도 공산주의자의 재현에 유연성을 보여줄 것을 검열 당국에 호소하곤 했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도시범죄에 한국전쟁의 경험이나 간첩의 소재를 활용했던 스릴러-액션 장르는 1960년대 후반이 되면 공산주의자의 비인간성을 전면에 내세우는 철저한 반공영화로 변모하면서 점차 대중의 공감을 잃어갔다. 강범구 감독의 < 동굴 속의 애욕 >은 그 이전, 그러니까 한국의 장르 영화들이 대중의 정서를 반영하고 때로는 사회의 통념에 도전할 수도 있었던, 그럼으로써 장르 영화의 활력을 발휘할 수 있었던 시대의 수작(秀作) 가운데 한 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