팡파레
- 감독
- 이돈구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임화영, 박종환, 남연우, 이승원, 박세준, 김기정, 양조아, 한명수, 박성남, 박상아, 이승주, 김경욱, 고기혁, 이하주, 최윤주, 이유아, 송은정
내 생각에, 우리나라 사람들은 장르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되는 걸 본 적이 별로 없다. 이런 종류의 영화들은 장르의 컨벤션 안에서 다양한 주제와 캐릭터들이 뛰놀기 때문에 비슷한 색깔을 가지면서도 그 정취가 제각각이다. 음식으로 비교하면 만두 같다. 밀가루 피는 다 비슷하지만 그 안에 고기, 김치, 두부, 야채, 새우 뭐 하여간 뭐든지 집어넣어 쪄버리면 만두이지 않은가.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속 내용물은 보지 않고 밀가루 피로 싼건 다 똑같다며 무시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인지 우리나라에서는 제대로 된 장르 영화가 잘 안 나온다. 나와도 망한다. 가끔은 ‘한국형’이라는, 일단 붙으면 뭐든 후져보이게 만드는 수식어를 붙여서 등장하는 작품도 있는데 이것도 대충 망한다. 아마 많이 안 만들어 봤으니 노하우도 적고, 노하우가 적으니 잘 만들어지기가 어렵고, 잘 만들어지기가 어려우니 관객들도 잘 안보고.. 의 악순환이 진행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독립영화에서 이런 작품들을 꾸준히 제작하고 경험을 가진 감독들이 상업 영화로 넘어가 규모와 재미를 확장시킨다면 아주 괜찮은 그림이 나올 것 같은데 이것도 참 안 된다. 2000년대 초중반, 단군 이래 영화계에 돈이 가장 많이 몰렸다던 그때. 이런 시도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감독들은 상업 영화로 넘어오면서 더는 그런 장르의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 종종 공포, 스릴러의 영화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왜인지 대체로 신인감독이 연출을 맡는 경우가 많았고 결과물도 신통치 않은 것이 대부분. 한국에서 장르 영화는 정말 안 되는 걸까? 이돈구 감독의 < 팡파레 >(2019)는 그래서 참 반가운 영화였다. 상업, 독립 영화를 통틀어 이런 유의 장르를 만난 것이 정말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할로윈 밤. 제이( 임화영 )은 우연찮게 막 할로윈 파티가 끝나고 영업을 정리 중인 술집에 들어가게 된다. 데킬라를 한 잔 시켜서 마시고 있으니 2인조 형제 무장 강도가 들이닥쳐 제이는 인질이 된다. 그러다 동생 희태( 박종환 )은 우발적으로 가게 사장을 살해하게 되고, 양아치로 평생을 살아온 자신과 달리 전과도 없고 무려 사이버 대학까지 나온 집안의 기둥, 희태를 지켜야하는 강태( 남연우 )는 이 일을 무마하려 평소 알고 지내던 깡패 쎈, 졸라 쎄서 쎈이라고 불리는 쎈( 이승원 ) 형을 부르게 된다. 현장에 도착한 쎈은 시체를 토막 내 유기하기로 하고 자신이 자주 이용하는(무려 VIP 고객이란다.) 살인청부업자 백선생( 박세준 )을 또 부르게 된다. 이렇게 한 공간에 모이게 된 5명은 시체를 처리하고 깔끔하게 정리를 한 후 나가기만 하면 되는데, 생각처럼 일이 잘 안풀린다. <팡파레>의 재미 정도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영화를 좋아해서 맨날 비디오 가게를 들락거리는 삼촌이 유명하거나 볼 만한 영화는 이미 다 봤고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골랐는데 의외로 꽤 재미있었다. 는 이야기에 등장하는 그 아무거나 표지만 보고 고른 영화에 해당한다. 유명하지도, 어마어마한 뭔가가 숨어 있지도 않다. 다만 한 공간 안에서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다섯 명이 서로 해치거나 혹은 살아남기 위해서 머리를 굴리는 모습을 즐기면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저예산 독립 영화이니 완성도 면에서는 아쉬움이 남는게 사실이다. 하지만 깡패, 살인청부업자, 사이버 대학을 나온 집안의 기둥 등 뻔할 수 있는 캐릭터들이 묘하게 나사가 빠져있거나, 기존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주면서 생기는 재미가 있고 또 캐스팅이 상당히 잘 되어있어 연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보는 맛도 좋다. 특히 쎈 역의 이승원과 백선생 역의 박세준이 보여주는 능청스러운 모습을 상당히 즐겁게 보았다. 이돈구 감독은 데뷔작 < 가시꽃 >(2013)으로 주목받은 후 곧장 꽤 큰 규모의 차기작 < 현기증 >(2014)을 발표하며 여러 사회문제를 다소 강한 톤으로 그려왔다. 그런 그가 5년 만에 오로지 재미만 생각한 것 같은 <팡파레>를 내놓았다. 묘하게 다른 사람들과는 반대의 행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어 흥미롭다. 앞으로의 활동이 궁금하다.
임권택 감독의 < 화장 > 개봉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반세기 전에 만든 초기작 한 편을 소개한다. 이대엽 (얼마 전에 사망한 전 성남시장 말이다)과 구봉서 가 주연한 < 남자는 안팔려 >. 그렇다고 이 1963년 작 영화와 <화장>을 연결하는 예술적인 일관성 따위를 찾을 생각은 말기 바란다. 60년대 초 임권택은 말 그대로 아무 거나 닥치는 대로 만들었다. 그가 이 영화를 제대로 기억하고 있을 가능성도 낮다. 무엇보다 지금 소개할 시나리오 요약에서 임권택을 찾는 건 부질없는 일이다. 이 시나리오의 각본가는 곽일로. 아직 임권택은 일을 시작하지도 않았고 나중에 일을 해서 만든 작품을 우린 볼 수 없다. 상상이야 할 수 있지만 그 상상의 결과물과 실제 임권택의 영화는 아무 관계도 없다. 제목과 캐스팅만 봐도 알 수 있겠지만 여장 남자가 소재인 코미디다. 아마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은 당장 IMDb로 달려가 빌리 와일더의 < 뜨거운 것이 좋아 >가 언제 영화인지 검색하고 싶을 것이다. 거기까지 갈 필요 없다. <뜨거운 것이 좋아>는 1959년 작이다. 뻔뻔스러운 모방작이고 그건 보는 사람, 만드는 사람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긴 <뜨거운 것이 좋아> 역시 프랑스 코미디 <사랑의 팡파레Fanfaren der Liebe>(1951)와 그 영화의 독일판 리메이크를 모방한 영화이니 이 모방의 사슬은 더 길어질 수 있다. 다른 점이 있다면 < 남자는 안 팔려 >와는 달리 빌리 와일더는 판권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이다. 이대엽 은 병칠이고 구봉서 는 칠복이다. 병칠은 배우가 되고 싶고, 칠복은 무용수가 되고 싶다. 하지만 지금은 모두 서울에서 백수로 놀면서 직장을 찾으러 다니는 중이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들은 응모하려던 회사에서 딱지를 맞는데, 알고 봤더니 여자 직원을 뽑고 있었던 것이다. 순전히 자기네의 바보 같은 실수 때문인데도 그들은 세상이 여자판이라고 자기네는 희생자라고 우기고 다닌다.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그래도 그들은 취직이 된다. 간판을 걷어차려다 날아간 칠복의 신발이 달리는 삼륜차에 떨어지고 그들은 그걸 찾으러 대소동을 벌이는데, 그들을 눈여겨 본 자칭 사장이란 사람이 그들을 운전사와 조수로 고용한 것이다. 그 소동 중 칠복은 악보를 들고 걷던 남옥이라는 여자와 충돌하게 되고 첫눈에 반한다. 아, 그리고 병칠은 이미 영애라는 여자 친구가 있다. 그건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입 큰 백만장자와 연애를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여기서부터는 두 남자 주인공에게 여장을 시키려는 준비과정이다. 알고 봤더니 사장은 수상쩍은 범죄자였고, 사장을 노리던 다른 범죄자들에 의해 칠복과 병칠은 사장의 돈을 털리고 만다. 둘은 경찰에 신고하지만 사장은 사라졌고 아무도 그들이 취직했다는 말을 안 믿는다. 우연히 둘과 마주친 사장은 여성국극단 속으로 숨었다가 변장해 빠져나가고 사장을 찾아 들어온 둘은 거기 취직하려다 남자라는 이유로 쫓겨난다. 남자라서 안 팔린다는 핑계가 또 생겼다. 둘은 여자로 변장한다. 그 모습이 어땠는지는 포스터가 있어 대충 짐작할 수 있다. 그림만 보면 꿈에 나올까봐 두렵다. 하지만 구봉서 의 여자 연기는 꽤 그럴싸했을 가능성이 높고 어떤 스타일이었을지 상상도 간다. 구봉서가 여장연기를 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70년 작인 < 남자와 기생 >에서 그는 여장을 하고 기생일을 하는 실직자로 나온다. 이 영화에서 < 뜨거운 것이 좋아 >보다 설득력 있는 부분이 있다면 여성국극단의 설정이다. <뜨거운 것이 좋아>의 여성악단은 그냥 무난한 핑계다. 하지만 이 영화의 여성국극단 설정은 거의 완벽하다. 여자들만이 있어야 할 핑계로도 좋지만 구봉서 처럼 생긴 여자가 바로 그런 외모와 목소리 때문에 발탁될 수 있는 핑계로는 그냥 완벽한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시나리오는 이 국극단 설정을 그리 깊이 다루지는 않는다. 이 뒤로도 영화는 < 뜨거운 것이 좋아 >의 길을 따른다. 예상했겠지만 남옥은 이 극단의 단원이라 칠복은 여장한 미쓰리와 남자인 칠복의 이중생활을 하면서 남옥과 만난다. 한참의 소동 끝에 사장과 강도는 모두 체포되고 둘의 여장은 폭로된다. 사장은 위폐범임이 나중에 밝혀지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사실이 아니다. 엔드 크레딧이 올라갈 때까지 파격적이었던 원본, < 뜨거운 것이 좋아 >와는 달리 < 남자는 안팔려 >의 결말은 심심할 정도로 교훈적이고 무난하다. 너무 무난해서 신기할 지경이다. 두 주인공은 자신의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고 그들을 주연으로 삼겠다는 영화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과수원을 하겠다면서 고향으로 돌아간다. 영화의 결말이 스스로의 내용뿐만 아니라 배우들까지 부정하는 것이다. 이 결말을 읽고 있으면 여장만 해도 방송금지를 먹었던 옛날을 회상하며 ‘창작의 자유’가 있는 <개그 콘서트>의 후배들을 부러워하던 구봉서 의 모습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오미 의 연기 활동 기간은 2년 6개월에 불과했다. 영화배우로서 결코 긴 세월은 아니었다. 그래서 당사자인 나오미나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팬들 모두 추억의 그림자가 길다. 1971년 일세를 풍미했던 스타 신성일 이 제작, 감독한 영화 < 연애교실 >에 신영일 과 함께 주연으로 데뷔, 한창 배우 활동이 무르익어 갈 무렵인 1973년 가을 충무로를 떠나 미국으로 건너가서 재미동포 사업가인 최명광 씨와 결혼했다. 그녀의 갑작스런 은퇴에 대해 영화계난 팬들은 아쉬워 했는데 정작 당사자인 나오미는 그때의 심경은 의외로 담담했다고 술회했다. 미국에 있는 나오미는 전화 통화에서 '결혼 때문에 영화를 떠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싫어져서 결혼을 택했다. 그무렵 내가 의도한 대로 영화 일이 풀리지 않아 실망했고 영화가 싫어져서 결혼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나오미는 1973년 최무룡 의 소개로 최명광을 만나 집안의 반대를 무릎쓰고 그해 10월 미국으로 가서 6개월 동안 사람됨을 살펴본 후 그 다음해 결혼했다. 당돌하면서도 섬세한 행동이었다. 나오미 는 1971년 < 연애교실 >로 화려한 데뷔를 했다. 이 영화는 서울 국도극장 개봉에서만 10만 3천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로서는 대단한 흥행 성공이었다. 1970년대로 돌입하면서 한국영화는 TV수상기의 보급 확산과 저질 국산영화의 생산 과잉으로 관객들의 외면을 받고 침체기로 들어갔다. 1971년에 제작된 국산영화는 총202편이었는데 그 중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겨우 7편에 불과했다. 최고 관객 동원 국산영화는 < 내일의 팔도강산 >으로 15만 명이 고작이었다.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국산영화 7편 중 신성일 이 감독한 <연애교실>과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 2편이 차지했다.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역시 나오미, 신영일 주연으로 서울 국도극장에서 개봉하여 13만 5펀 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당시에는 서울 개봉관에서 5만 명의 관객만 동원해도 제작자는 희색이 만면했는데 13만 명이란 관객 동원은 대단한 흥행 성공이었다. 나오미 가 데뷔작에 이어 계속해서 서울 개봉관에서만 1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신성일 이란 브랜드 이미지 후광과 나오미, 신성일 청춘 콤비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감 때문이라고 나는 진단한다. 신성일은 스타의 후광을 안고 감독으로 전환하면서 제2의 신성일, 엄앵란 을 탄생시켜 배우 공백기를 채우려 했는지 모른다. 나오미, 신영일 을 콤비 청춘스타로 내세운 신성일의 영화적 전략은 성공했다. 그러나 그 성공 뒤에는 영화의 시대적 상황이 작용했다고 본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한국영화는 전성기의 황금시절이 끝나고 걷잡을 수 없는 불황의 쇠퇴기로 접어든다. 뿐만 아니라 1971년에는 그동안 5년간 한국영화계를 점령하다시피 했던 문희 , 남정임 , 윤정희 의 첫 번째 트로이카 중 문희와 남정임이 결혼으로 은퇴함으로써 여배우 판도에 혼돈과 공백이 생긴다. 두 정상 여배우의 갑작스런 결혼과 은퇴로 한국영화계는 이들을 대치할 여배우 인적 자원을 준비하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국산영화 제작계는 극심한 불황에 돌입한 터여서 더블 팁의 고통 속으로 빠져든다. 1971년에서 1975년 사이는 한국영화사에서 상징적인 여배우 공백기였다. 문희, 남정임은 은퇴해서 첫 여배우 트로이카 체제는 붕괴되고 윤정희만 외롭게 남았으며, 제2기 여배우 트로이카로 불리운 유지인 , 정윤희 , 장미희 는 1975년 전후해서 데뷔했기에 그 중간 4~5년은 여배우 공백기로 무수한 여배우들이 꿈을 안고 데뷔했지만 포말 스타로 사라지고 말았다. 유지인 은 1974년 < 그대의 찬손 >( 박종호 감독), 정윤희 는 1975년 < 욕망 >( 이경태 감독), 장미희는 1976년 < 성춘향전 >(박태원 감독)으로 데뷔했다. 유지인, 정윤희 , 장미희 세 여배우는 제1기 트로이카인 문희 , 남정임 , 윤정희 의 살인적인 경쟁과 폭발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지만 1977년부터 그런대로 각축전을 펼쳐갔다.그 공백기에 가장 화려한 데뷔의 팡파레를 울린 여배우가 나오미 였다. 흥행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그나마 데뷔작이 서울 개봉관에서 10만 명이 관객을 동원했기에 3년도 채 안된 연기생활 동안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과도기에 활동했던 나오미로선 불운이었다. 그리고 영화적으로 힘든 상황의 시기였기에 그녀는 영화계에 실망하고 영화게 싫증을 느껴 일찍 스크린을 떠날 결심을 했는지 모른다. 나오미 는 본명이 정영일(鄭英一)로 1951년 5월 29일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고향은 목포 인근 굴비로 소문난 영광이지만 나오미가 태어나기 전부터 목포에서 정미소를 했다. 그때만 해도 시골에서는 정미소와 양조장을 하면 행세께나 하는 부자였다. 집안이 부유한 탓인지 형제가 많았다. 모두 열남매로 6남 4녀였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는 고향인 목포에서 다녔지만 고등학교는 서울 덕성여고로 진학했다. 집에서 서울에 집을 사놓고 오빠 언니부터 고등학교는 서울로 보냈다. 나오미는 어려서부터 성격이 활달하고 운동을 좋아했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 때까지 육상선수였다. 달리기, 허들, 높이뛰기 종목은 소년 체전이나 전국대회에 나가 입상하기도 했다. 어려서부터 날씬하고 몸이 날렵하다는 소릴 들어왔다. 오빠와 언니들이 많아 어려서부터 동네에서 기가 살아 사내아이들과 대등하게 놀았다. 덕성여고를 졸업하고 홍익대 공예과로 진학했다. 1970년 한국일보가 주최한 미스 영 인터내셔널 대회에 출전, 2등으로 입상했다. 평소에 미인대회에 출전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오빠가 적극적으로 권해서 용기가 생겼다. 나오미가 배우가 된 것도 이 미인대회 출전이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미스 영 인터내셔널 대회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신성일 이었다. 그리고 그후 신성일은 < 연애교실 > 제작, 감독을 하기 앞서 주연할 남녀 배우를 공모했다. 나오미 는 응모하지 않았지만 우연히 만날 기회에서 신성일 의 눈에 들어 픽업된 것이다. 미인대회 심사위원으로 심사할 때 나오미를 눈여겨 두었는지 모른다. 비교적 쉽게 영화에 데뷔한 나오미는 데뷔작 흥행 성공이라는 행운까지 따랐다. 배우가 된 나오미는 대학을 중퇴하고 배우 활동에 전념했다.(나오미란 예명은 그 당스 이스라엘 혼성 듀엣이 부른 히트송 '꿈속의 나오미'에서 따온 것이다.) 데뷔작 < 연애교실 >과 두 번째 작품 <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 >을 신성일 감독으로 히트한 후 흥행 배우라는 날개를 달고 다른 감독 영화에 출연하기 시작했다. 키 163cm, 적은 얼굴에 검고 인상적인 눈의 서구적인 마스크, 보호본능을 일으킬 정도로 가날펴 보이는 날씬한 체격의 나오미는 한국의 오드리 햅번이란 칭송을 들었다. 동양적이라기 보다는 서구적인 체취를 발산하는 나오미는 종래와 다른 새로운 이미지의 청춘상을 보여 주었다. 앞서도 언급했지만 나오미가 데뷔할 때는 제1기 여배우 트로이카가 와해되는 시기로 그들과 다른 이미지의 여배우 형이 나타날 것을 영화계나 관객들은 기대하고 있었다. 나오미가 영화계 안팎의 이런 기대를 완벽하게 충족시켰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시기에 데뷔한 신인 여배우 중에서는 가장 근접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 가치를 나오미 본인 스스로 적극적으로 개발했으면 배우로서 대성할 수 있었을 텐데 중도에서 하차한 것이 자못 아쉽다. 그래서 그녀를 관망한 추억의 그림자는 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최무룡이 소개한 최명광을 따라 미국으로 가서 미국에서 결혼식을 올린 나오미 는 아들 셋을 낳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행복하게 살았다. 1974년 결혼해서 15년 만인 1989년 남편이 미국에서 사망했다. 그때부터 나오미는 아들 셋을 열심히 키우면서 아들들이 성장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을 행복으로 알고 살아왔다. 남편이 가고 없는 빈 자리의 공백이 컸지만 이를 악물고 참으면서 지금까지 혼자 살아왔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나오미는 남편 사망 후 1992년 한국에 나와 SBS-TV에서 드라마 <가을여자>에 출연하기도 했다. 아들 셋이 이젠 성년이 되어 미국과 한국을 자유스럽게 왕래하면서 욕심없이 살아가고 있다. 장남은 29세로 사업을 하고 있고 차남은 27세로 작곡을 하고 있고 3남은 한때 한국에 나와서 가수 활동을 했으나 지금은 미국에 들어가 대학에 다니고 있다. 나오미는 '이제는 영화에 애정이 솟아나 출연하고 싶지만 내 나이에 맞는 배역이 없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보니 요즘 제2의 르네상스를 구가하고 있다는 한국영화가 너무 특정 연령층에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지금 한국영화계 안팎이 정치계보다 더 세대 간의 갈등이 심하고 독점이 편중되어 있는 것 같다. 김화(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1951년 5월 29일 전남 목포 출생 홍익대 공예과 중퇴 1973년 10월 결혼과 함께 은퇴 <주요 경력> 1970년 MISS영 인터내셔날 대회 2등 1971년 신성일 감독 < 연애교실 > 데뷔 <수상 경력> 72년 '인기상', '신인상' 등 다수 <주요 작품> 연애교실 , 벽속의 남자 , 봄여름가을 그리고 겨울 , 사랑하는 아들딸아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