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인트
- 감독
- 원유, 임현철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임현철, 윤영균
'스포츠 엔터테인먼트'라고 일컬어지는 프로레슬링은 독특한 형태의 공연 예술이며, 로마의 검투사 대결에 비견할만한 남성성의 신화를 과시하는 이벤트이다. 연행자와 청중이 합의한 사이비 스포츠이자 대중문화의 한 갈래로서 프로레슬링을 통해 전달되는 전언은 ‘남자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확실한 암시를 준다. 영화 < 반칙왕 >(2000)은 이 같은 프로레슬링의 함의 안에 IMF 경제위기가 야기한 여파를 깔아두고 직업인으로서 이중생활을 하며 평범한 생활 방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소심한 은행원을 소재로 한 이야기이다. < 조용한 가족 >(1998)으로 한국 장르 영화의 지형에 변화를 몰고 온 김지운 감독이 얼마나 창의적인 이야기꾼이었는가를 입증하는 색다른 블랙코미디였다. 주인공 임대호(송강호)는 위기의 남자이다. 일상생활의 굴욕과 권태로부터의 안도와 더 큰 굴욕을 겪을 기회를 동시에 찾는 이 사내는 직장에서의 전망이 그리 밝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의욕도 없다. 실적을 쌓아서 연명해야 하는 직업적 세계에 적응하지 못하고, 은행의 부지점장(송영창)은 저조한 실적을 빌미로 그를 괴롭히며, 여자들은 그를 무시하고, 아버지는 그가 실패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때로는 엉뚱하고 유치한 이 남자의 성격이 공감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반칙왕>의 핵심 서사는 자존감을 가진 어른이 되기 위한 대호의 여정에 동행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현대적이고, 고도로 엄격하며, 궁극적으로 온유한 금융의 세계에 견주었을 때 프로레슬링은 저급하고 극단적인 천박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마스크를 쓰고 레슬링을 하는 대호가 추구하는 남성다움의 시뮬라크르는 내러티브 안에서 양극화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 그는 은행 고객들의 비위를 맞추는 복종적인 감성의 소유자이나 마스크를 쓰고 링에 올랐을 때에는 약속과 규율을 위반하는 반칙 레슬러이다. 대민 봉사 및 사무 조력에 익숙한 일상의 대호는 자신의 옛 영웅인 울트라 타이거 마스크 가면을 쓰고 반칙왕이 됨으로써 내성적인 패배자에서 폭력적인 무법자로 변신한다. 새로운 페르소나의 가면을 쓴 그가 열광적인 대중들의 반응을 끌어내는 과정에서 그 자신도 알지 못했던 정체성을 발견하게 된다. 평소에는 소심하고 싸움을 기피하는 성격인 반면 반칙왕으로써 대호는 호전적인 싸움의 신이 된다. 헤드락을 걸고, 손가락으로 눈을 찌르면서 자신의 남성성을 과시하는 대호의 이중생활은 한 장면에서 엘비스 프레슬리 코스프레를 하며 링 위에 선 모습으로 형상화되기도 한다. <반칙왕>의 흥미로운 지점은 이 완벽한 시뮬라르크의 세계에서 프로레슬러들이 배우가 하는 일과 비슷한 과업을 수행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끊임없는 경쟁의 과정에 본래 정체성으로부터 빠져나와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가꾸고 가상의 시나리오에 따라 연기를 해야 한다. 이는 허구의 드라마 안에서 배우가 자신의 캐릭터를 발전시키는 과정에 비견할만하다. 마스크 퍼포먼스가 대호의 성격 전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를 묘사하는 김지운의 서술은 흥미롭다. 그의 나약하고 무기력하며 굴욕적인 일상과 비교했을 때 반칙 레슬러로의 변신은 자존심과 자존감을 향상시킨다. 따라서 개인은 현실 안에서의 열성 페르소나보다 영향력이 있는 수행적 페르소나를 선호하게 된다. 이러한 요소는 <반칙왕>의 코미디 코드에서 핵심이 된다. 가면이나 변장이 왜소한 자아를 방어하는 심리적 보호막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정립된 심리학의 가설이지만, 일상에서 자신감이 떨어지는 대호는 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스크를 쓰고 코치의 딸 민영(장진영)과 데이트할 때조차도 마스크의 힘을 빌린다. 이야기의 밑그림을 제공하는 시나리오에서 은행 부지점장은 비열한 수단을 통해 관객에게 두려움과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려는 악한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는 노골적으로 규칙을 위반하고, 경기 범위 밖에서 상대를 공격하고, 의도적인 부상을 입히고, 때로는 청중을 위협하기도 한다. 부지점장은 이 모든 악행, 내지는 그 이상의 악행을 저지르는데, 김지운은 이를 ‘공포의 헤드락’으로 묘사하며 악한의 시그니처 동작을 서사의 메타포로 만든다. 그의 독재적인 행동과 타인을 괴롭히는 신체적 억압은 비즈니스에 대한 냉혹한 통찰력. 자유로운 개인에 대한 잔인하고 굴욕적인 처벌을 특징으로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의 반칙은 합당한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 대호에 대한 부지점장의 억압적인 처우는 스토리에 완전히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이는 <반칙왕>이 세기 전환기 한국의 경제위기를 바탕으로 한 우화적인 코미디임을 일깨워준다. 주지하다시피 1997년 IMF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위기에 봉착한 업종 중 하나는 금융 업계이며, 이 환란의 시기 동안 은행 직원들은 실적과 과업에 과도하게 집착했을 뿐 아니라 오래되고 부패한 규칙들을 군말없이 따라야 했다. 현대화로 인해 국가는 새롭고 대안적인 문화적 이상을 환영할 수 있지만 은행과 같은 해묵은 기관은 여전히 검증된 계층적 비즈니스 문화 형태를 고수해 왔다. 이러한 코드 하에서 개인이 경영진의 억압에 저항하기 시작할 만큼 자아가 충분히 발달하면 조직에 역효과를 낳고 따라서 조직의 기능에 해를 끼치게 된다. 부지점장으로 특정된 악한의 성격화는 이러한 상황을 반영하여 대호와 부지점장의 갈등 구도를 TV 레슬링 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웅 vs 악당의 구도로 치환한다. 대호는 적어도 승리하기 위해 세상의 악에 맞서 싸우는 영웅적인 약자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진다. <반칙왕>의 파괴적 에너지는 반칙의 황제가 가장 위대한 싸움을 위해 링으로 향하는 종결부에서 절정에 오른다. 사각의 진혼곡’으로 이름 붙여진 영화의 마지막 챕터로 진입하기 전, 우리는 어어부밴드가 부르는 노래 ‘사각의 진혼곡’을 듣는다. “저기 왼쪽 구석에 주전자 바라보다, 일그러진 자신을 보네, 샌드백 흔들리고 흩날리는 먼지를, 혀에다 듬뿍 바르네 ... (중략)... 오버 액션 구경꾼 오버 액션 레슬러, 울트라 썬더 파워 붐 그의 이름은 레슬링 스타”로 이어지는 가사는 초라하고 내성적인 한 남자가 울트라 썬더 파워를 뿜어내는 레슬링 스타로 변신하는 과정을 예찬한다.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20분 동안 김지운은 스파게티 웨스턴에 등장할법한 상투적인 음악과 함께 대호와 유비호(김수로)의 긴장된 대결을 연출한다. 상황을 기술하는 쇼트의 기능에 관련하여 이 시퀀스는 다양한 옵션을 구사하는 연출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다. 탈의실과 복도를 가로지르는 화려한 스윕 쇼트, 신체 연기를 통해 슬랩스틱의 터치를 부여한 배우 송강호의 경이적인 육체 액션은 프로레슬링의 운동성을 인상적으로 묘사하면서 대미를 장식한다. 대호는 주먹을 치켜들고 앞으로 돌진하여 오랜 시간 수련한 백 드롭 기술을 시전하면서 링 너머에 사뿐히 착지한다. 이 비장한 순간조차 슬랩스틱을 유지했다면 영화의 진성성이 의심받았을 수 있었지만 여기엔 참된 레슬링 기술이 전시되어 있다. 텔레비전에서 보는 레슬링은 증폭된 신체 타격과 현란한 카메라 워크로 감각적 과부하를 제공하지만 여기서는 좀 더 절제되고 위엄 있는 안무를 선호한다. 이 신의 하이라이트는 유비호에 의해 대호가 쓴 가면이 찢기고 두 대결자가 링 바깥으로 굴러떨어져 계획하지 않은 난투극을 벌이는 장면이다. 합을 맞추지 않은 마구잡이 싸움이 끝난 뒤 대호의 얼굴 위로 다시 한번 어어부밴드의 ‘슬픈 대호’가 흐른다. 가는 선율이 고통을 가르고 우울의 가면이 벗겨진 대호의 얼굴은 피투성이가 되었다. 자신만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링 위에서 사력을 다하는 대호의 페르소나는 무참스런 모양으로 벌거벗겨진다. 익살과 페이소스가 가득한 <반칙왕>은 진실된 삶 혹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대로 살지 못하는 삶을 전제로 한 만큼 표층과 심층의 합일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원적 열망을 다룬다. 마스크를 쓰는 행위를 통한 자아의 완성에 관한 이야기에서 가면은 그 안에 진짜 얼굴을 감춘 은폐의 도구이지만 숨겨진 야성을 되찾는 데 도움을 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대호는 말끔한 정장을 입고 은행으로 출근하는 길이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고, 이제 막 만개한 이중생활에 만족하며, 억압으로부터 해방된 그의 카타르시스적인 여정은 직업적 세계의 속박을 초월하려는 소시민의 헛된 시도와 규율의 지배로부터 탈주하는 주체할 수 없는 에너지 안에서 울트라 썬더 파워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6.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뒤늦게 < 잉투기 >를 보았다. 우리 극장, 서울아트시네마에서도 상영한 적이 있는 이 영화를, 호평을 익히 들었음에도 개봉 당시엔 보지 못했다. 최근 < 택시 운전사 >에 짧게 등장하는 배우 엄태구 의 존재가 참 강렬해서, 낯설지 않은 얼굴의 이 배우가 어디서 나왔더라, 기억을 더듬다 검색을 해보니 < 밀정 >에도 나왔고 <잉투기>에도 나왔다. 그렇게 확인해 보고서야 <잉투기>의 감독이 엄태구의 형이자 < 가려진 시간 >을 연출한 엄태화 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뒷북도 이런 뒷북이 있나! < 잉투기 >를 고른 데엔 배우만이 아니라, 최근 SNS와 여러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뜨거웠던 몇몇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몇몇 BJ가 자신의 방송에서 여성 BJ 한 명을 겨냥해 살인 예고를 한 뒤 그중 한 명은 실제로 그 피해자를 찾아가는 과정을 중계했다. 범칙금 5만 원으로 마무리된 이 사건이 참담했던 건 두 가지 때문이다. 첫 번째, 이 사건 자체가 드러내는 순도 높은 여성 혐오 때문이다. 여성 혐오는 역사적으로도 유구했고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더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지목된 여성 BJ는 게임 내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여성 게임 유저들에 대한 광범위한 비하와 멸시를 ‘미러링’해서 유명해진 이였다. 두 번째, 누군가를 향해 “죽여버리겠다”고 예고하고 그것을 실제로 실행에 옮기려는 듯한 시도가 일종의 ‘놀이’ 형태로 수행된다는 점이었다. 놀이는 고의를 감추는 포장일 수도 있고 소위 ‘뻥카’ 내지 연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뻥카에 연기라고 해서 심각성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아니, 오히려 다른 형태의 심각성을 드러낸다. 우리는 이미 가상과 실제를 넘나들며 그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데에 익숙하다.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들이 한국에 안착해 높은 인기를 누린지도 이미 10년이 훌쩍 지났다. SNS는 어떤 측면에서는 유명인들이 아닌 평범한 개인들이 자신의 캐릭터를 만들어 자기 자신을 연기하는 미디어이기도 하다. 누구나 쉽게 자신의 ‘콘텐츠’를 만들고 이를 방송 형태로 송출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취미처럼 시작해 아예 직업으로 삼기도 하고, 이 바닥에서 ‘성공’하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한다. 그 커뮤니티 안에서 그들은 나름 ‘유명인사’다. 그러나 이러한 광범위한 ‘놀이’가 언제나, 또 누구에게나 적정한 놀이의 선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살인 예고를 받고 찾아가는 이들과 그를 ‘응원’한 이들에게는 장난이자 놀이일지 몰라도, 살인 예고의 대상이 된 당사자, 그리고 당사자로 오인됐던 다른 여성들에게도 이 과정이 ‘그냥 좀 무서운 놀이’에 불과했을까. 직접 피해를 본 당사자뿐 아니라 이 사건을 접한 무수한 불특정 여성들에게는? 당하는 사람은 폭력인데 하는 사람은 연기이고 지켜보는 이들에게는 장난이며, 나아가 당하는 이들에게도 놀이로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는 이런 사건들의 폭력성. 이 유희성을 핑계로 현실 세계의 법은 가해자에게 고작 범칙금 5만 원을 부과할 뿐이고, 가해자와 방조자들은 일말의 죄책감조차 아예 느끼지 못하거나 스스로 지운다. 그러면서도 피해자 당사자와 이를 지켜본 다수의 불특정한 이들에게는 매우 효과적으로 공포와 위협을 전달한다. 게다가 끔찍한 사건은 그만큼 악랄한 악의와 고의를 가진 악당의 손만이 아니라, 장난과 놀이의 과정 한순간에 사고처럼 벌어지기 마련이다. 우리에겐 한강에서의 투신을 놀이처럼 기획하고 예고해 당일 이를 중계하기도 했던 이가 정말로 시신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 잉투기 >는 이미 4년 전, 이러한 인터넷 놀이 문화를 꽤나 생생하게 다루었다. 주인공인 칡콩팥( 엄태구 )은 중고 노트북을 팔러 간 자리에서 일방적으로 폭력을 당하고, 이는 ‘현피(온라인에서 싸우던 이들이 현실에서 직접 대면하는 것)’에서 진 것으로 인터넷 생중계된다. 현실 세계의 어법으로 하자면 그는 불시에 일방적으로 무차별 폭력을 당한 피해자이다. 그러나 사이버 세계에서 그는 허풍을 떨다가 현피에서 지고 이를 통해 허풍이 까발려진 ‘찌질이’에 불과하다. 피해자가 도리어 수치심을 느끼고 손가락질을 받는다. 심지어 피해자 자신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자신을 폭력의 피해자가 아니라 ‘현피에서 져서 쪽팔린 패배자’로 규정하고 복수를 위해 자신을 때린 이를 찾는 데에 골몰한다. 이 과정에서 그를 알아보고 접근해 ‘복수’를 부추기는 영자( 류혜영 )는 고등학생이자, ‘먹방’을 진행하는 BJ이기도 하다. 칡콩팥은 자신을 때린 이를 만나면 쑤셔버리겠다며 식칼을 챙겨 한 달 동안 가방에 넣고 다닌다. 게다가 친구에게 이 장면을 찍어서 방송해 달라고 부탁하기까지 한다. 무기를 준비해 사람을 찌르고자 하는 고의가, 그에게는 ‘살인 행위’가 아니라 방송으로 증명해야 하는 ‘현피 2라운드’이다. 영자는 어느 순간 칡콩팥에게 외친다. “너한테나 심각하지, 남들은 네가 벌벌 떨면서 복수하겠다고 설치는 거 다 재미있다고 생각해!” 그렇다. 폭력의 피해자가 폭력을 당하는 것도, ‘복수’를 하겠다는 것도, 칡콩팥이나 영자나 그들이 상정한 시청자들에게는 그냥 재미있는 ‘콘텐츠’이다. 아마 개봉 당시였다면 나는 이런 장면들을 그저 인물들의 허풍이라고, 혹은 위악적인 영화적 설정일 뿐이라고 가볍게 넘기고 말았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들을 접한 뒤에 본 이런 장면들을 재미로 넘길 수가 없었다. 무서웠고 끔찍했다. 아무리 폭력이 난무해도 픽션이 재미있고 이를 죄책감 없이 향유하는 건 우선 전제가 가상과 현실의 분명한 경계선 때문 아닌가? 또한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위태롭게 넘나들거나 이 경계를 지우고 다시 긋는 것이야말로 창작의 재미 아닌가? 그런데 경계를 지우고 다시 긋는 행위들에 대한 다중의 합의 자체가 어느 순간부터 계속 모호해지고 그 안에서 우리는 점점 길을 잃는 듯한 느낌이다. < 잉투기 >는 이러한 인터넷 놀이 문화를 생생하게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는 않는다. 영화는 주인공들과 그들을 익숙하게 둘러싸고 있는 놀이 문화를 섣불리 훈계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그렇다고 마냥 옹호하지만도 않는다. 대신 이들의 행보를 차분하고 냉정하게 따라붙는다. 칡콩팥과 영자는 일련의 사건을 거치며 놀이 문화 속 가상과 현실의 괴리를 직시하거나, 그럼에도 그 경계를 더욱 적극적으로 지우며 가상의 캐릭터를 현실로 끌어와 버리거나 한다. 감독의 카메라가 이 인물들에 품고 있는 애정이 분명 느껴지는데, 이 애정은 참으로 이상하고 냉정하다. 그리고 영화의 이러한 균형 감각과 냉정한 애정이야말로 <잉투기>를 처절한 성장 영화로 만들어내는 힘인 듯하다. 한심하다면 한심하달 수 있고 감정 이입도 잘 안 되는 이 인물들이 더없이 짠하고 애처로워 보이는 것도. 그들의 행보는 결국 자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처절한 몸부림이다. 그러한 증명은 비로소 복수에 성공하는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적으로 실패한 순간’에 이뤄진다. 자신의 찌질한 모습을 스스로 인정하고 자신의 의지로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의 청춘 영화들에서도 바로 이것이 주인공들이 성장의 관문을 통과하는 힘이었다. 다만 불특정 다수가 보는 ‘인터넷 방송’을 통해 이 순간이 완성되는 것이, 이 영화가 포착한 이 시대의 특징일 것이다.
수첩에 제목이 빼곡할 만큼 많은 영화에 출연한 고기환은 출연작 DVD를 받기 위해서 길을 나선다. 의외로 여겨질지 모르나, 실제 감독들은 완성 후 배우나 스태프들에게 DVD를 잘 건네지 않는다고 한다. 한편으론 이유를 알 듯도 하다. 제작과 동시에 와이드릴리즈 되는 상업영화의 룰과 달리, 독립영화의 유통은 지극히 제한적인 것. 누군가의 장롱과 서랍 속에 고이 담겨 있는 영화 또한 무수히 존재하고 있다. 기환과 감독의 만남은 각각 독립적인 챕터를 통해 구성되어 있다. 코미디의 외피를 가지고 있는 ‘영화에 관한 영화’임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된 설정을 곳곳에 드러낸다. 총을 겨누는 소품 스태프, SF영화를 연상시키는 공간과 앵글, 실패한 영화감독을 상징하는 다양한 설정들, 제작현장에서 펼쳐지는 연출과 배우 사이 극도의 긴장까지. 기환은 그들 각자의 자리를 이동하며, 상황을 담담하게 마주하거나 혹은 기억한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는 뜻밖에 리얼리티를 만나게 된다. ‘영화는 페니스다.’ 라는 궤변을 펼치던 학회장 선배는 치약외판원이 되어 있고, ‘팀보다 위대한 선수는 없다.’ 라던 세쌍둥이 감독은 이젠 뿔뿔이 개인 작업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천재감독 이상일은 스스로 패배자라 칭하고, 사교왕 오대교는 두문불출하는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다. 아날로그만을 고집하던 순지는 디지털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다. 디지털은 반칙인 것 같다는 필름에 대한 아련한 로망은 낭만적이지만 부질없는 투정이다. 룸메이트인 동신 또한 그에게 DVD를 주지 않았던 감독으로 드러난다. 노란 체크무늬의 빈티지 종이가방에 DVD가 쌓여 갈수록, < 왜 독립영화 감독들은 DVD를 주지 않는가? >의 사연은 늘어간다. 웃음이 잦아질수록, 마냥 유쾌할 수 없는 서늘함이 동시에 밀려온다. 영화 만들기의 치열한 과정과 그 앞의 첩첩산중을 조금이나마 공감한다면 말이다. 세계를 창조할 것만 같던 자신감도, 협업의 위대함도, 아날로그의 기원성도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지 않았다. 시스템은 견고하고, 감독들은 가난하고 무력하며, 매체는 무엇을 위해서인지 모른 채 너무 빨리 변해가고 있다. 배우이자 감독인 구교환 은 작품에 직접 출연하고 연출하며,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감독들의 사연을 능청스럽게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 영화라는 욕망 앞을 서성거렸던 이들에 대한 일종의 우정 어린 헌사라고나 할까. 영화는 희극적인 설정과 더불어, 위트 있는 대사와 배우들의 감칠나는 연기로 코미디 영화의 전형을 이어나간다. 순지역의 고보결과 세쌍둥이 감독역의 백성철은 전작 < 거북이들 >에 이어 출연하여 반가움을 더한다. 구교환 을 포함한 이들의 연기는 전형적인 코미디영화의 과장법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것만으론 충분하지 않은 독특한 정서적인 리듬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엉뚱하고, 모자라고, 외로운 캐릭터들로써 영화의 서사구조상 완전한 패배자이다. 이를테면 쓰레기들과 함께 담겨 있는 종이가방 속에 DVD들과 같은 처지이다. 언뜻 독립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들이다. 그러나 구교환의 영화에서 그들은 전혀 다르게 조직된다. 각각의 캐릭터들은 역할에 충실한 듯하지만, 무거운 역할놀이를 한순간 벗어던진다. 구교환은 그 짧은 찰나를 통해 그들을 완전히 새로운 관계망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전혀 다른 생명력을 갖게 된다. 연기하는 기환의 메소드 그 자체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