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티김 SHOW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패티 김, 카밀라
짝퉁 이소룡의 역사에서 가장 현기증 나는 대목은, 그들의 다채로운 영어이름이다. 이소룡의 ‘Bruce Lee’ 라는 원래 이름에서 ‘L’을 돌림자 삼아 이렇게나 많은 변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랄 수밖에 없다. 나훈아 로부터 너훈아, 나운하, 나운아, 나윤아, 노훈아가 파생된 것처럼 말이다. 지난 회 < 일소일권 >으로 소개한 거룡은 ‘Bruce Lei’이고, 또 다른 짝퉁 이소룡 배우들인 하종도 는 ‘Bruce Lai’, 유가영은 ‘Bruce Lau’, 장정의는 ‘Bruce Lea’, 우양은 ‘Bruce Ly’, 그리고 이번에 소개할 여소룡 은 이러한 부동산 ‘알박기’ 경쟁에 뒤늦게 뛰어든 관계로 ‘Bruce Le’라는 어딘가 이름을 짓다 만 것 같은 소심한 이름을 썼다. 물론 유가영은 이후 자신의 독자적인 활동으로 더 유명해졌고, 거룡 의 경우 ‘Dragon Lee’라는 보다 멋진 이름을 함께 사용했다. 이미 포화상태인 ‘Lee’를 리모델링하느니 굳이 ‘Bruce’라는 단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대한남아의 기개를 보여준 신선한 발상의 전환이었다. 물론 그들은 패티김 과 패튀김이 함께 활동했던 것처럼, 이소룡이 죽기 이전부터 짝퉁으로 활동했다. 여소룡 은 수많은 짝퉁들 중 가장 진짜와 닮았던 배우다. 쌍꺼풀이 없어서 클로즈업을 하면 곤란하지만, 멀리서 보면 전혀 분간하지 힘들 정도로 체격이나 움직임이 오리지널 이소룡과 판박이다. 쉽게 말해 ‘얼굴만 가리면’ 이소룡이다. 그런데 여소룡은 한국인이 아니다. 대만 출신으로 홍콩에서 활동하던 중, 역시 홍콩으로 건너가 쇼브라더스에서 활약했던 수많은 한국 액션배우들 중 하나인 남석훈 의 눈에 띄어 한국에서도 활동하게 된 것. 이수현 주연 ‘아시아 슈퍼히어로’ 영화 <중국초인>(1975) 등에 출연했던 그는 이소룡의 < 당산대형 >(1971)의 흥행에 힘입어 나열, 진혜민 등과 함께 그 아류작인 <당산제자>(1976)에 출연했고 이후 <용문비지>(1976), <충렬정무문>(1977), < 벽력용권 >(1978) 등 주로 강홍 감독의 영화에서 짝퉁 이소룡으로 활동했다. 바로 여기서 남석훈을 만나게 됐다. 한편 <황금첩혈>(1979) 등을 연출하는 등 나중에는 감독으로도 활동했다. 화천공사가 거룡을 발굴했다면, 여소룡 은 남아진흥공사에서 만든 남석훈 의 < 속 정무문 >(1977), 태창흥업에서 만든 최우형 의 < 십자수권 >(1978) 등에 출연했다. 역시 홍콩 액션배우 진성이 함께 출연한 <속 정무문>은 단성사에서 개봉해 6만 관객을 동원했으니 제법 성공을 거둔 셈이다(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에서 VOD로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요즘 식으로 말하면, 미국 메이저리그에 진입하지 못한 마이너리거가 한국 프로야구팀에서 와서 활동하는 경우랄까. 지금껏 한국 액션배우들이 홍콩으로 ‘수출’되기만 한 것으로 알지만, 그런 반대의 역사도 있었던 것이다. <십자수권>은 최우형 감독의 데뷔작으로 홍콩, 대만 등지로도 수출되어 <사망마탑>(死亡魔塔)이라는 제목으로 개봉했다. 그는 나름 ‘정통’ 무술영화를 만들려고 했던 감독으로 < 사형사제 >(1982), < 여걸 청나비 >(1983) 등을 만들었으며 < 기문사육방 >(1983)의 경우 유일하게 영상도서관 멀티미디어석에서 VOD로 관람 가능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쉰 살이 되기 전에 세상을 떴다. < 십자수권 >에서 여소룡 은 독립운동을 하다 죽은 한국인의 아들로 나온다. 그리고 돈에 팔려간 누이동생을 찾아 군벌들이 일본과 내통하여 혼란스러운 중국 땅에 나타나, 부패 군벌이 주관하는 무술대회에 출전한다. 한국식 ‘만주 웨스턴’ 장르에 < 용쟁호투 >(1973)와 < 사망유희 >(1978)가 적당히 뒤섞인 이 이야기에서 여소룡을 두고 이소룡과 가장 닮았다고 말하는 건, 바로 노란색 트레이닝복 ‘간지’가 그와 무척 흡사했기 때문이다. < 일소일권 >의 거룡의 노란색 트레이닝복, 혹은 역시 거룡이 출연했던 <쾌권괴초>(1979)에서 장일도가 입었던 노란색 트레이닝복이 지나치게 굵은 옆줄로 인해 동일시를 방해했다면, 여소룡은 정말 비슷하다. 하지만 같은 의상이라도 홍콩의 도심이 아닌 한국의 용인 민속촌을 배경으로 삼았기에, <속 정무문>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와 눈 내리는 민속촌을 거닐며 담소를 나누는 모습은 다소 어안이 벙벙하다. 그나마 <십자수권>은 <사망유희>의 마지막 액션신이 펼쳐지던 5층 구조를 그대로 모방했기에 나름 실감나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런데 오리지널보다 더 강한 볼거리를 액션을 선보여야 한다는 강박 때문인지, 한 층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고수는 수십 마리의 뱀을 내던지며 그 뱀으로 목을 조르며 싸우는 기괴한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액션 연출이 뛰어나건 어쨌건 간에 어쩔 수 없는 B급의 향기랄까. 그럼에도 다른 짝퉁 이소룡 영화들과 차별점을 갖는 부분이라면, 역시 ‘흑형’과의 대결이다. 사실 이소룡이 < 용쟁호투 >에서 실제 가라데 고수이자 배우인 짐 켈리, < 사망유희 >에서 카림 압둘 자바 등 흑형들과 싸우는 장면은 꽤 중요한 이미지다. < 십자수권 >에서 다채로운 권법을 사용하고 화려한 돌려차기를 구사하는 흑형과의 대결은 꽤 볼만하다. 가령 <쾌권괴초> 등에 등장했던 흑인 배우는 단지 구색 맞추기였을 뿐, 너무나 어이없는 무술 동작으로 실망만 안겨준 것에 비하면 상당한 퀄리티다. 이렇듯 왠지 서오릉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노란색 트레이닝복을 입은 중국인 여소룡 과 머리에 두건을 두른 흑형이 쿵푸 대결을 벌이는 기묘한 풍경에 괜히 숙연해진다. 오른쪽 칼을 든 사람이 양사 더 숙연해지는 이유는 당당한 체구의 배우 양사 때문이다. < 용쟁호투 >(1973)에서 이소룡과 대결을 펼쳤던 그는 < 십자수권 >에서는 여소룡 과 싸웠고, <쾌권괴초>에서는 장일도와 싸웠다. 급기야 < 용재강호 >(1986)에서는 이소룡의 아들 브랜든 리와도 싸웠다. 말하자면 이소룡과 그의 아들, 그리고 그의 아류들과도 다 싸웠다. B무비이기에 가능한 설정일 텐데, 세상 어디 그런 배우가 있을까. 또 하나, ‘백옥과도 같은’ 피부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미모로만 따지면 개인적으로 역대 한국 여배우 중 세 손가락 중 한 명으로까지 꼽고 싶은 여수진의 존재다. 박노식 의 < 광녀 >(1975)에서 박노식의 연인이었고, < 폭력은 없다 >(1975)에서 박형사(박노식)가 오랫동안 지켜봐온 광일(원선)의 연인으로도 등장한다. 그야말로 이런저런 B무비에서만 활동하다 사라졌던 안타까운 배우다. 여수진 여소룡 감독: 최우영 각본: 허진 개봉극장: 청계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를 보고 있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영화여 멈춰라 비디오를 끄고 싶다 라는. 그렇다면 어째서 이 영화가 떡하니 이 칼럼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궁금해질 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단 하나. 이재웅 감독의 1974년 작품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는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뮤지컬 이라면 이전에도 있지 않았습니까? 라는 의문을 표시할 수 있다. 그렇다. 먼저 한형모 감독의 1956년 작품 < 청춘쌍곡선 >을 떠올릴 수 있다.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작곡가 박시춘 의 멋진 기타연주에 김시스터즈가 흥겨운 노래를 부른다. 동네 이웃으로 출연한 김희갑 은 당시의 유행가 몇 곡을 부른다. 여주인공 정옥도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른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 노래는 대사를 대신하거나 상황을 이끌어 가지는 않는다. 본격적인 뮤지컬이라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여기에 있다. 이후에도 한형모 감독은 <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 < 엘리지의 여왕 >에서 당시 인기가수들의 공연장면을 영화의 중간 중간에 삽입하는 방식으로 뮤지컬이 아닌 뮤직영화를 만든다. 이러한 뮤직영화는 노래가 내러티브에 유기적으로 스며드는 것이 아니라 종종 흐름을 끊으면서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다. 이것은 60년대 오디오나 TV의 보급이 제대로 안 된 상태에서 대중가요를 쉽게 들을 수 없는 상황을 역이용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어쩌면 시대가 요청했던 장르였다는 생각도 든다. 이런 흐름은 70년대를 건너 80년대 초반까지 이어지다 차츰 편수가 줄어들기 시작한다. 이렇듯 가수가 직접 나와 노래를 부르는 방식의 뮤직영화는 70년대에는 인기가수들이 직접 주인공으로 극중 인물을 연기하면서 좀 더 사실성을 부여하는 방식으로 변한다. 즉, 남진 , 나훈아 , 하춘화 , 패티김 등 일반 성인대중에게 친숙한 가수들이 < 가수왕 >, < 속 이별 >, < 숙녀 초년생 >등의 영화에서 직업이 가수인 극중 인물로 등장하여 공연모습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핍진성을 강화한다. 그리고 다른 청년문화가 움트면서 새롭게 등장한 포크송이나 록을 불렀던 가수들인 김세환 , 장미화 , 신중현 등은 < 청춘대학 >. < 맹물로 가는 자동차 >, < 미인 >등에 등장하여 대학생이나 돈 없는 청춘들로 등장하여 노래를 부르며, 좌충우돌 하는 영화가 다른 한 경향을 이룬다. 이후 80년대에도 조용필 , 전영록 , 송골매, 백영규 등 젊은이의 우상으로 불렸던 가수들은 영화에서 직업가수로 등장해 자신의 히트곡을 불렀다. 어쨌든 이 영화들은 모두 노래를 중심에 두고 있지만, 그 노래들이 극을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런 영화들은 뮤지컬이라기보다는 뮤직영화라고 부르는 게 맞는 것 같다. 사실 한국영화는 일제강점기에 처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면서부터 다양한 장르가 존재했다. 심지어 가장 미국적인 장르라는 서부극마저 만주웨스턴이라는 이름으로 변형되어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유독 한국화에 실패했던 장르가 뮤지컬일 것이다. 노래와 춤이 대사를 대신해 인물의 감정을 드러낸다는 측면이 뮤지컬 장르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유독 이 장르만이 한국화에 성공하지 못한 것은 혹시 한국인이 유난히 뮤지컬에만 거부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이런 논리는 < 사운드 오브 뮤직 >이나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의 흥행성공이 말해주듯 그다지 신빙성은 없는 것 같다. 여기에는 제작상의 어떤 한계가 분명히 존재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뮤지컬에 도전했다는 그 자체만으로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를 완성도를 떠나 그 자체로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 영화의 감독이 녹음기사 출신인 이재웅 감독이라는 것도 재미있는 부분이다. 그는 이미 임권택 감독의 68년 작품 < 몽녀 >에서 4본 입체녹음을 시도했다. 이후 이성구 감독의 < 춘향전 >에서는 6본 입체녹음을 시도하며 한국영화 기술 발전에 공헌한 인물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가 영화 자체의 퀄리티 보다는 이재웅 녹음기사의 사운드 실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작품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래서일까? 영화에 스토리를 녹여내는 작업에는 너무 무관심하다. 당시 인기폭발이었던 올리비아 핫세의 < 로미오와 쥬리엣 >풍의 비극적 스토리를 살짝 가져오고, <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의 안무 스타일을 대충 흉내 내서 중구난방의 댄스를 보여준다. 하지만 그것도 중반 이후에는 모두 사라지고 스토리는 < 썸머타임 킬러 >를 연상시키는 오토바이 액션을 잠시 보여주는 듯 싶더니, 갑자기 이 모든 소동이 알고 봤더니 꿈이었습니다, 로 마무리해버린다. 그렇다. 녹음기사의 사운드에 대한 욕망은 한국 최초의 뮤지컬 영화를 탄생시켰지만 지나치게 낮은 완성도는 한국에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뿌리내리게 하지 못한 아쉬움을 동반하고 말았다. 이재웅 감독은 70년대 최고 인기가수였던 남진 과 리리 시스터즈의 김성아 를 주연으로 기용하여 한국최초의 뮤지컬을 만들어 보겠다는 야망과 그동안 축적해왔던 기술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는 도전정신은 있었다. 그러나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대학생을 주인공으로 스토리를 진행하면서도 젊은 감성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했다. 일단 주인공인 남진과 김성아의 창법이 당시 젊은이들의 노래였던 포크 감성이 없어 마치 트로트를 듣는 것 같아 당황스럽다. 게다가 사랑의 감정을 분출하는 장면에서의 군무는 또 어떤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와 춤추는 엑스트라들의 동작이 지나치게 어설퍼 몰입을 방해한다. 결국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는 영화의 기본이라 할 스토리를 지나치게 소홀히 다루면서 실패작이 되었고 잊혀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 >는 제작진의 의욕만은 충분히 느껴지는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단지 그 의욕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대한 연구 없이 녹음기사의 욕심으로 끝난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한국에서 장르는 멜로가 신파가 되고, 웨스턴이 만주웨스턴이 되듯 나름대로 토착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뮤지컬만은 트로트 뮤지컬로도 뿌리내리지 못했다. 이후에도 뮤지컬 장르에 대한 시도가 있었지만 아직까지 뮤지컬은 한국영화계의 변방에 있다. 하지만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가 제대로 된 뮤지컬이었다면 이후의 양상은 조금은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 리리 남진 박상규 감독 이재웅 각본 김경일 촬영 팽정문 1974년 86분 칼라 판매원 삼화비디오프로덕숀 영상도서관 배가번호 1267
내가 후라이보이 를 처음 만났던 것은 1969년경이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가 되고 싶었다. 배우가 되고 싶어서 중학교 3학년 때 아동극단 시험 보러갔다가 떨어지고 고등학교 때 연극부를 학교에 만들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말하는 억양이 이상하다고 너는 배우가 안 된다고 많은 사람들이 말했다. 심지어는 빳다를 치는 선배도 있었다. 배우가 안되더라도 이바닥(?)을 떠날 수 없었다. 대학교는 연극과에 입학하여 전공을 연출로 바꾸었다-연출전공자에겐 억양을 가지고 시비하지 않는다- 그래도 배우 꿈은 못버리고 학교를 다니면서 탈렌트 시험을 보러 다녔다. 4번이나 떨어졌다. 챙피해서 죽고 싶었다.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이 탈렌트 시험에 턱턱 붙는 거다. 내가 연출할 때 정말 재능 없어 보이던 아해들까지 탈렌트가 되어 여기저기 엑스트라로 나오는데 정말 미치지 않은 게 세계평화를 위해서 다행이었을 거다. 방송국 불지르고 싶었으니까! 뭐야 갑자기 이런 얘기는?????????????????/지금도 마찬가지지만 그때도 TV에 출연하는 길은 탈렌트. 가수, 코미디언이다. 지금은 리포터까지 합해서 한 가지 더 늘었지만!!! 탈렌트는 각 방송국마다 돌아가며 떨어졌으니 텄고 가수도 노래를 못하니 텄다. 한 가지 남은 게 코미디언이었다. 중학교 때 알고 지내던 여학생이 졸업 즈음해서 돌린 사인지에 나에게 부쳐주고 싶은 별명이 있다면에 ' 후라이보이 2세'라는 별명을 부쳐주고 싶었단다. 그래 결심했어! 후라이보이를 찾아가는 거야! 후라이보이는 지금도 쇼의 대명사가 되어 영화로 만들어지고 있는 동양방송의 간판프로그램 ''쇼 쇼 쇼''의 명사회자, 대사회자였다. 그 사람을 어떻게 만나는가? 동양방송의 ''쇼 쇼 쇼''는 그 당시 지금의 운형궁이 되어버린 자리에 운현궁스튜디오가 있었는데 그곳에서 녹화를 했었다. 지금도 방송국 출입하는 게 일반인들에겐 어려운 일이지만 그때는 더 했던 것 같았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고 아무튼 경비와 말다툼도 여러 번했던 거 같은데 경비의 이름이나 혈액형, 출신학교를 물어본다면 하나도 모르겠다. 하여튼 후라이보이 가 녹화하는 운현궁스튜디오에 가보니 김상희, 최희준 , 패티김 , 윤복희 등등을 구경하게 되었고 그 가수들을 가까이에서 본다는 것 자체가 나에겐 꿈결같은 일이었다. 그러나 후라이보이에게 말을 걸 수는 없었다. 주위에 워낙 사람들도 많았고 대기실에선 포카 같은걸 하고 계셨다. 포카를 안하고 있은들 내가 어떻게 말을 걸 수 있었겠는가? 녹화날만 되면 찾아가기를 일고 여덟 번!!!!!!!!!! 화장실을 가시는 거다. 소변보시러. 나는 무작정 따라가서 옆에 섰다. 볼일도 없으면서 볼일보는 척하면서 나의 첫 대사가 시작되었다. '선생님 코미디 원고는 누가 쓰세요?' 볼일보시다 말고 그자세대로 나를 쳐다본다. 아무말도 없으시다.'제가 써올께요'하고 대답도 안 듣고 바로 화장실을 나왔다. 아흐!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처음뵙을때의 얼굴이 생각나네요!!! ''쇼쇼쇼''는 ''쇼쇼쇼'' 주제가가 나오면서 무용단의 무용이 시작되고 멀리서 뛰어나오는 후라이보이 가 카메라 앞에 와서 멈춰 서면서 골프스윙을 맨손으로 한 번하시면서 '안녕하십니까 안녕하십니까 후라이보이 곽규석입니다'로 오프닝을 시작하고 봄이면 봄에 관해 어쩌구 저쩌구 다음에 가수의 노래! 노래 중간중간에 꽁트가 3~4개 나온다. 나오는 사람은 후라이보이 곽규석에 장고웅 , 양영일, 세 사람이 꽁트를 한다. 주로 세태풍자적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고 가끔 특집일 땐 후라이보이 혼자 마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 꽁트 대본을 내가 써가지고 간 거다. 잔머리 머리 굴려서 20여 개를 써가지고 갖다 바쳤다. 경비가 '어디가?'하고 물으면 '후라이보이 원고가지고 왔어요' 하면 무사통과다. 기다렸다. 어떤 반응이 나올까? 내가 써준 원고를 어떻게 하는가를 집에서 토요일 ''쇼쇼쇼'' 시간에 하는가 안하는가를 숨죽이고 기다렸다. 얼씨구 !절씨구! 내가 써다드린 원고를 가지고 꽁트를 하는 거다(물론 더 재미있게 고쳐서!)그러나 내가 써준 원고에 나온 대사 몇 마디는 오리지널 그대로 하시는 거다. 지화자! 좋네 !풍년이 왔네! 조바심이 생겼지만 이삼 주인가를 안갔다! . 왜? 그냥 쑥스럽기도 하고 날 못 알아보면 어떻하나하는 두려움도 있었고! 얼마 만엔가 ''쇼쇼쇼'' 녹화장을 갔다. 쭈빗거리고 복도에 있는데 '야!임마! 왜 안왔어' 하시는 게 아닌가? 날 알아보다니! 풍년이 또 왔네!!!!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다. 아흐! 짠돌이 이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 그 당시 택시비 기본 요금이 90원이었다. 같이 택시를 타고 내리면서 백원을 내고 내리신다. 택시비는 기본요금 90원이 나왔다. 백원을 내시고 방송국 안으로 사라지시면 나는 잔돈 10원을 받아 들고 후라이보이 뮤직프로덕션이 있던 정동사무실로 간다. 바쁘시니까 매일 만나지는 못하지만 사무실엔 출근해서 여러 가지 잡다하게 할 일이 많았다. 어느 날 갑자기 '야 10원줘!' 하시는거다. '10원이요? 왜요?' '야 임마 3주 전에 택시비 90원 나왔을 때 내가 100원내고 내렸잖아! 잔돈 안 받았어?' '받았는데요!' '그럼 내놔!' 하시는 분이다. 아주 오래된 일인데도 10원을 기억하시고 달라시던 분! 정동사무실에서 남산KBS까지 시간 남으면 자가용이 있는데도 걸어가시던 분! 다방에서 약속 안하고 꼭 중국집에서 약속하시면서 커피값에 조금 보태면 한 끼 먹을 수 있는데 다방에서 커피는 왜 마시냐고 핀잔주시던 분! 가끔 점심식사로 샌드위치를 싸와서 정동사무실에서 드셨는데 -그때만 해도 샌드위치로 식사를 한다는 게 너무나도 서양스러운 일이라 멋있고 앞서 나가시는 분이구나 하며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봤다 - ' 야! 너도 좀 먹어' 아이고 황송해라 이걸 어떤 방법으로 먹어야하나? 고민하던 시절! 어느 날은 ' 유성이 점심 안 먹었지? 빵 사다 먹을까?' '네' 하고 달려나가 빵을 사오면 맛있게 드시던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 빵은 간식이지 식사대용이 아니었다. 나는 - 얼마가 지나 월급날이었다. 월급에 꼬리표가 붙었다. 지금은 월급이 생각 안나지만 예를 들어 만원이라면 만7백원을 주시는 거다. '선생님 7백원이 뭐예요?' '응 얼마 전에 니가 나가서 니돈으로 빵 사왔잖어! 빵 값이야' 그걸 기억하시고 챙겨주시던 후선생님! 이렇게 짠돌이셨지만 후라이보이 곽선생님의 기사는 내게 자랑하는 말이 있었다. '연예인 기사중에는 내가 월급이 제일 많아!' 아흐! 가까이하기엔 너무 어려웠던 곽선생님! 외국오케스트라 지휘도 하셨고 외국의 유명연예인이 오면 국적불문하고 사회를 도맡아 하셨던 5개 국어를 하신 명사회자 ! 총소리, 대포소리, 기차소리 못내는 소리가 없었던 원맨쇼의 개척자! 우리나라에서 제일 먼저 종합광고대행사를 차렸다가 징그럽게 운영이 안 돼어 부도나서 일본으로 도망가셨다가 다시 돌아오신 곽선생님! 다시 돌아오자 채무자들이 용서해줘서 놀랐던 일! 어느 날 목사님이 되었다는 소문과 함께 진짜 목사님이 되어 나타나신 선생님! 우리나라에 전자라이터가 처음 나왔을 때 그 전자라이터를 처음 수입하신 분의 아버지 환갑잔치에 사회 보러 갔다가 출연료 외에 보너스로 전자라이터를 선물로 받았다. 아버지가 달라고 해도 안 주던 전자라이터였다. 스위치를 누르면 타타닥! 하고 불꽃이 튕겨져 나와 가스에 불이 붙던 지금은 흔해 빠져서 담배 피우는 고등학생들도 가지고 다니는 전자라이터가 그 당시에는 너무너무 신기한 물건이었다. 누구나 그 라이터를 보면 탐내고 켜보고 뺏어 볼려고 하던 전자라이터였다. 어느 날 녹화장에 가지고 갔더니 장고웅 선배가 라이터에 눈독을 들인다. '안돼요! 아버지꺼라!!'일단 고비는 넘겼다. 다음 관문은 후라이보이 곽규석 선생님차례다. 타타닥! 불붙는 게 신기해 보였던지 던힐 라이터주시면서 바꾸자고 하신 곽선생님! 역시 아버지를 팔아서 안된다고 했는데 그 라이터를 집에서 뒷주머니에 넣고 갔다가 재래식화장실에 빠트렸다. 얼른 건져내어 씻고 또 씻고 또 씻어 말려서 그 다음날 자진해서 곽선생님에게 바쳤다. -이 사실은 처음으로 밝히는 나만의 비밀이다-지금은 금연운동이 한참이라 상상도 못하지만 전자라이터로 불을 타타닥 부치면서 ''쇼 쇼 쇼'' 마지막을 장식하시던 선생님! 대신 당신이 사용하시던 던힐 라이터를 나에게 주셨다. ( 그 비싼 던힐 라이터를 장고웅에게 빼았겼음) 언젠가 꽁트 원고를 갖다드리니까 원고를 읽어보시고 구봉서 선생님께 갖다주라는 겁니다. 왜 그러셨는지 이유를 몰랐지요! 나중에 물으시는 겁니다. 구봉서선생님이 하는 그 원고의 코미디를 봤냐는 겁니다. 물론 저는 봤다고 대답했지요! 봤으니까! 우리팀이 했으면 그만큼 재미있게 못했을 꺼야! 하시던 후선생님! 아흐흐! 곽규석 선생님 뵙고 싶어요,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미국가실 때 제가 쓴 원고를 다시 한번 읽으셨대요! 감격했지요! 한 마디 하시더군요! '유성이 니가 쓴 원고를 보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돈이 없어서 생긴 일만 썼냐?' 하시던 말씀이 지금도 귀에 쟁쟁 울립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돈이 없었던 시절이니 렇뭬티? 생기는 일은 상상이 안 되었던 거지요! ' 전유성 이가 내 마지막 제자야' 하시던 말씀! 원맨쇼도 못하고 외국어도 못하고 노래도 못하고 억양도 이상한데 ! 마지막 제자라니요! 황공무지하지요. 한국에 가끔 나오시면 찾아가면 잘 있니? 예수 믿어라 널 위해 기도 많이 한다. 그 기도 덕분에 아직도 버티고(?)있습니다. 지금도 사회자들이 가수나 누구를 소개할 때 누구 씨하면 씨자를 도르를 말아 이름보다 씨자를 더 크고 높게 발음할 때면 선생님 생각이 납니다. 보고 싶습니다. 대본 중에는 곽선생님이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와' 전유성 '네'라고 써놓고 녹화 들어가서 '야 백 원짜리 한 개 가지고 와' 하시면 '저... 오십원짜리 두 개로 가지고 와도 되지요?'했다가 녹화 끝나고 장고웅 형한테 대본으로 뒤통수 맞던일! '야 임마! 한 마디라도 더하면 낫냐?' 하시면 죄송합니다 대답하면서 속으론 '그럼 자식아 한 마디 더하면 낫지!!!' 뒤통수 맞는 거 보시며 '유성이 한 마디 더하게 해줘라'하시던 곽 선생님 보고 싶어요 만지고 싶어요 한번 안겨 울고 싶어요 ! 지금은 이 세상에 안 계신 곽규석 선생님! 전유성 (개그맨) / 2003년 <프로필> 1928년 11월 22일 경기도 안성 출생 1999년 8월 31일 타계 1951년 공군군악대창설로 데뷔 희극인으로 사회자, 악극, 영화 등 다방면으로 활동 <주요 작품> 후라이보이 박사 소동 , 후라이보이 무전여행기 , 식모 삼형제 , 남자미용사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