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의 씨앗
- 감독
- 임태규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임태규, 권영호, 문광백, 김명길, 박지훈, 강찬규, 김동국, 김순자, 노영식, 박정아, 우재욱, 이서희, 이주연, 임정은, 임형섭, 정대기, 임윤비, 김영선, 정희태, 이가섭, 정재윤, 소이, 박성일, 오규철, 박강섭, 김근태, 정재우, 안종섭, 권수진, 강영구, 김효준, 박해오, 김동현, 김원표
장편 < 폭력의 씨앗 >과 단편 <직무유기>는 두 편 모두 군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니, 군대 내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단지 그 사건으로 끝나지 않으며, 해당 인물들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을 경고하고 있는 작품이다. 우선, 2017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최초 공개된 단편 <직무유기>는 경계근무 중인 군부대의 초소 안에서 시작한다. 속칭 갈구는 선임병과 아무 말 못하고 당하는 후임병의 야간근무. 결국 상급부대에 소원 수리가 접수되고 부대가 발칵 뒤집어지는 와중에 그 문제 사병이 불의의 사고로 죽게 된다. 이후, 병사들의 처우에 대해 모른 척 하는 건 직무유기 아니냐며 목소리를 높이던 장교를 포함해 죽은 이의 동료 병사들이 어떤 모습을 보이는지 지켜보는 게 관객의 역할이다. 그리고 올해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주목받으며 개봉한 장편 < 폭력의 씨앗 >은 장난처럼 지속되는 병영 내 폭력사건이 상부에 제보되고, 고참들은 그 제보자를 찾기 위해 또다시 폭행을 저지르는 장면들로 영화의 초반을 가득 채운다.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이빨이 부러진 피해자를 선임병이 치과의사인 자신의 매형에게 데리고 가면서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는 이 영화는 병영내 폭력이 어떤 방식으로 군대 외부로 확장되어 나가는지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꽤나 합리적으로 보였던 주인공이 매형의 가정폭력을 목도하는 순간 그 안에서 이미 자라나기 시작한 ‘폭력의 씨앗’을 발견하게 된다. <직무유기>와 < 폭력의 씨앗 >에서 그려진 부대 내에서 벌어지는 갑작스러운 사고와 그 사고에 대처하는 극 중 인물들의 판단과 선택을 보고 있노라면 그 자체로도 안타깝지만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이 사회를 보는 듯하여 더욱 참담하기만 하다. 국민의 생명을 지키기 위한 군대임에도 전우의 안전은커녕 생명조차 지켜주지 못하는 군대이기도 하거니와, 집단이라는 우산 아래 실상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라면 그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라도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만들어 버리는 군대라는 이 조직의 영향력은 결코 작지 않다. 게다가 군대조직의 이 영향력이라는 것이 과연 군대 안에서만 그 힘을 발휘할 것인가. 집단의 폭력뿐만 아니라 사건을 무마하고 진실을 은폐하려는 크고 작은 사건들과 경험들로 가득한 군대를 그린 영화 <직무유기>와 <폭력의 씨앗>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의외로 단순하다. 당사자들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가해자와 피해자가 속출하는 병영 안에서의 경험들은 결국,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을 상실해가는 과정이며, 폭력이 불러오는 가해와 피해의 결과에 대해 둔감해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사건들을 개인적으로 경험해봤느냐의 유무와는 무관하게 이미 그런 일들의 지속적인 반복으로 구축된 강철의 군대문화가 병영을 넘어 사회 곳곳에서 얼굴만 바꾼 채 되풀이되고 있음을 혹은 되풀이될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 주위엔 사회폭력, 가정폭력, 학교폭력, 군대 폭력, 성폭력, 노인폭력 등 다양한 폭력이 존재한다. 이 중에서 학교와 군대는 집단생활을 하는 폐쇄성, 강한 통제와 이로 인해 압박을 받는 구조란 측면에서 무척 닮았다. 군부 독재 정권의 검열이 서슬 퍼렇던 시절, 문학은 권력의 폭력성과 작동 방식을 은유의 필체로 써 내려갔다. 대표적인 작품으로 전상국의 『우상의 눈물』과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꼽을 수 있다. 이들은 교육 현장에서 우리 사회의 부당한 권력이 어떻게 태어나고 유지되는가를 학교폭력이란 우회로로 접근했다. 시대가 어두웠던 탓에 군대 폭력을 다루는 건 언감생심 꿈도 꾸질 못했다. 대중문화에서 다뤄진 군대는 줄곧 애국심과 남자다움, 그리움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1970~1980년대엔 <배달의 기수> <동작 그만> <우정의 무대>, 최근엔 <푸른 거탑> <진짜 사나이> 등이 그랬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의 대다수가 체험한 군대는 청춘의 강렬한 기억이지만, 한편으론 폭력으로 얼룩진 시간이 아닌가. 대중은 망각을 꿈꾸며 전자만을 보길 원했을지도 모른다. 군대의 감춰진 문제는 시사 고발 프로그램에서 가끔 접할 따름이었다. 2005년에 이르러서야 군대에 만연하는 사병 간의 폭력 사슬을 제대로 응시한 첫 영화 < 용서받지 못한 자 >가 도착했다. 2012년에 공개한 < 창 >은 군대가 어떤 방식으로 폭력과 부조리함을 축소, 은폐하는지를 생생히 증언했다. < 폭력의 씨앗 >은 <용서받지 못한 자> <창>을 잇는 또 한 편의 군대 영화다. < 폭력의 씨앗 >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임태규 감독은 “무심코 지나친 일상의 폭력에 대해 다시 돌이켜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란다”고 연출 의도를 밝힌다. 영화는 휴가를 나온 일병 주용( 이가섭 )이 하루 동안 겪는 사건을 통해 폭력이 인간 내면에 스며드는 과정을 다룬다. <폭력의 씨앗>은 군대라는 울타리를 벗어나 가정으로 범위를 넓히며 앞선 군대 영화와 차별을 이룬다. 감독은 “데칼코마니처럼 둘을 나란히 놓은 뒤 폭력을 군대에서 가족으로 확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며 “군대 폭력과 가정 폭력 사이의 접점을 포착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다”고 강조한다. 그는 군대와 가정, 나아가 국가의 폭력이 본질에서 같다고 본 것이다. 군대와 가정을 나란히 조명하기 위해 영화는 식사하는 장면을 두 차례 배치한다. 도입부에 나오는 식사 장면엔 주용이 다른 사병들과 함께한다. 중반부에 나오는 식사 장면엔 주용, 누나 주아( 김소이 ), 매형 수남( 박성일 ), 매형의 아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두 번의 식사 장면에 나타나는 계급 구조는 무척 비슷하다. 상명하복으로 대표되는 군대는 사소한 일까지 철저히 ‘명령하는’ 형태다. 명예, 권력, 자본으로 형성된 사회는 ‘알아서 기며’ 상하관계를 드러낸다. 힘을 쥔 자는 아래에 놓인 사람들에게 무리에서 이탈하지 말고 철저히 복종하며 동화하길 요구한다. < 폭력의 씨앗 >은 4:3 화면비를 선택했다. 과거 화면비는 영화가 TV와 경쟁하면서 극장만이 주는 색다른 체험을 제공할 요량으로 만들어진 산물이다. 현재 대다수 영화는 비스타비전(1.85:1)과 시네마스코프(2.35:1)로 만들어지고 있다. 다른 화면비로 제작된 영화는 작가가 어떤 연출 목적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임태규 감독은 4:3 화면비로 만든 이유를 “갇혀 있는 느낌을 주고 싶었다”라고 설명한다. 옥죄어오는 느낌을 위한 4:3 화면비의 결심은 자비에 돌란이 < 마미 >에서 감방에 갇힌 듯한 심리를 전달하고자 1:1 화면비를 결정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또한, < 사울의 아들 >이 4:3 화면비를 통해 본 것과 보지 못한 것을 다루었던 태도와도 연결된다. <폭력의 씨앗>은 눈앞의 사실을 못 본 척하거나 정말 몰랐던 주용의 입장을 화면비로 이야기하는 셈이다. 오롯이 인물에 몰입할 수 있는 4:3 화면비의 장점은 덤으로 챙겼다. 흔히들 영화를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일컫는다. < 폭력의 씨앗 >은 개인과 집단의 무의식에 새겨진 군사주의 문화와 근대적 폭력의 논리를 있는 그대로 비춘다. 폭력을 거부하는 자에게 다른 이는 “그냥 해. 그래야 나중에 네가 편해져”(< 용서받지 못한 자 > 중에서)라고 속삭인다. 가해자와 피해자는 ‘원래부터 그런 것’이라면서 당연시하거나 체념한다. 폭력을 지켜본 사람은 “싸우면서 크는 것이다”라고 방관할 뿐이다. 그렇게 가족을 위해서, 또는 조직(국가)에 충성한다는 핑계를 대며 저질러진 폭력은 합리화된다. 점차 내면화된 폭력은 다른 폭력을 잉태한다. 그렇게 폭력의 뫼비우스는 완성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는 선택의 기로에 놓인 주용을 묵묵히 바라본다. 폭력의 사슬에 묶인 자신을 알게 된 그는 혼란스럽다. 순응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 그 순간 한나 아렌트가 그의 저작을 통해 이야기했던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 떠올랐다.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은 채로 무조건 따르기 시작하면 누구나 쉽게 ‘악의 평범성’에 빠질 수 있다고 그녀는 경고했다. 극 중에서 주용이 누나에게 던지는 대사는 고스란히 ‘해결의 씨앗’으로 돌아온다. “나갈래, 여기 있을래?” < 폭력의 씨앗 >은 불편한, 하지만 당연한 질문을 우리에게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