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로렌스
- 감독
- 스테판 프리어스
- 제작년도
- 2016
- 출연
- 메릴 스트립, 휴 그랜트, 사이몬 헬버그, 마크 아놀드, 레베카 퍼거슨
아리 애스터 감독의 < 미드소마 >(2019)의 굿즈는 뱃지 2종이다. <미드소마>의 주인공 대니가 비명을 지르는 얼굴과 감독의 전작인 < 유전 >(2017)의 주인공 애니가 비명을 지르는 얼굴을 일러스트해 만든 디자인이다. 굿즈가 기발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미드소마>를 보는 중에는 문제의 비명 장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플로렌스 퓨가 연기하는 대니는 여동생과 부모님이 함께 세상을 떠난 이후로 수시로 울음이, 슬픔이 터져나오려는 것을 끅끅거리며 참아내곤 한다. 남자친구 크리스티안은 그녀를 위로하는 제스처는 취하지만 슬픔을 이해하거나 나눠갖는데는 실패하는 듯 보인다. 대니는 자신이 호소하는 가족 문제에 질린 남자친구가 이별을 고하지 않을까 두려워하는데, 어느날 그들은 크리스티안의 친구들과 스웨덴 호르가 마을의 ‘미드소마’라는 하지축제에 가게 된다. 그곳에서 대니는 비로소 오열할 수 있게 되는데, 그 직접적인 계기는 남자친구가 다른 여성과 섹스하는 광경이었다. 대니는 그제야 자기가 남자친구를 지겹게 만들지 않을까 근심하는 대신 이전의 울음까지 울어버린다. 큰 소리로. 호르가 마을의 여자들이 대니와 함께 울어준다. 같이 큰 소리로, 같이 얼굴을 맞대고, 한 호흡으로. 죽은 가족과도, 불충실한 남자와도 이별이다. 그런데 그 광경이, ‘얼굴을 (아름다운 방식으로 슬프게) 만들지 않고’ 입을 한껏 벌리고 엉망으로 찌푸린 얼굴을 하고 큰 소리로 울어버리는 모습이 기괴하게까지 느껴졌다. 여자들이 그렇게 우는 모습을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가장 유사한 ‘집단 곡성’이라면 한국에서 상중에 소리 내는 울음인 ‘곡’인 듯하다. 여성의 비명은 영화가 사랑하는 사운드 중 하나다. ‘호러퀸’이라는 말은 한국에서 여름시즌에 개봉하는 공포영화의 여자 주인공을 일컫는 표현인데, 호러퀸의 첫째 요건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살인귀에게 쫓기며 높은 하이톤의 “꺄~!” 하는 비명을 지른다. 도망가기도 쉽지 않아보이는 몸에 붙는 찢어진 스커트나 단추가 두어개 날아간 티셔츠 차림에 높은 굽의 신발을 신게 한다는 점도 빼놓을 순 없겠다. <미드소마>의 대니가 들려준 뱃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듯한 낮고 큰 소리의 오열은 쉽게 들을 수 없다. 벌쳐닷컴(vulture.com)의 레이첼 핸들러는 ‘메릴 스트립과 플로렌스 가 들려준 카타르시스를 주는 비명에 바치는 송가’(An Ode to Meryl Streep and Florence Pugh’s Catharsis Screams)라는 7월10일자 기사에서 여성 배우들의 비명 연기에 대해 논했다. 호텔의 혼령에 사로잡힌 남편을 피해 도망쳐야 했던 < 샤이닝 >(1980)의 셸리 듀발이나 < 사이코 >(1960)에서 알몸으로 칼에 찔린 재닛 리, 거대 고릴라의 손가락으로 가슴을 쿡쿡 찔린 < 킹콩 >(1933)의 페이 레이의 연기는 훌륭했지만 여자들이 죽으면서도 섹시했다며, 최근 두 작품에 등장한 ‘섹시하지도 백설공주같지도 않은’ 시네마틱한 비명이 있다는 것이다. <미드소마>의 플로렌스 퓨와 <빅 리틀 라이즈>의 메릴 스트립이 보여준. ‘백설공주같은’이라는 말은 소리 죽여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을, ‘섹시한’이라는 표현은 교성과 오인이 가능한 높은 하이톤의 비명 혹은 신음성을 뜻한다. 낮은 음성으로 짜증과 화, 놀람을 섞어 욕설과 함께 지르는 비명은 영화나 드라마 속 여성들에게는 좀처럼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미드소마>와 <빅 리틀 라이즈>의 오열이 주목받은 이유는 ‘사운드’만의 문제는 아니고, 다른 사람들 시선은 아랑곳않고 온전히 자신의 슬픔에 집중하는 사람이 보여주는 잔뜩 찌푸려진 얼굴이라는 ‘얼굴의 스펙터클’에도 있다. < 박하사탕 >(1999)의 그 유명한 ‘나 지금 돌아갈래’ 장면에서 설경구 배우가 보여주는 고통받는 인간의 얼굴 그 자체를 클로즈업하는, 그 순간을 아무와도 나눠갖지 않고 관객과 직접 대면하는 순간이 주는 힘을 떠올려보라. 그리고 그런 클로즈업이 여성들에게도 허용되었던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박하사탕>의 이창동 감독이 만든 또 다른 영화 < 밀양 >(2007)에서 전도연 배우가 죽은 아이에 대한 슬픔을 교회에서 소리내 우는 것으로 표현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에서 ‘참지 않은 소리’로서의 곡성은 분명히 전달되지만 그때 카메라는 클로즈업 대신 뒤쪽에 앉아 그런 그녀를 보고 있는 송강호 배우를 흐릿하게 함께 잡아낸다. 극중 다른 인물의 시선으로부터도 영화를 보는 우리로부터도 자유로운, 홀로 화면 한가운데를 장악하는 슬픔의 스펙타클. 여성의 오열. <미드소마>가 보여준 플로렌스 퓨의 특별함은 거기 있었다. 너희들은 압도당하라, 이것은 나의 것이다.
단순과 즉흥, 장우진 의 < 춘천, 춘천 >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두 단어면 충분하다. 춘천 태생인 장우진 감독은 막연하게 자신의 고향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춘천에 대한 장소감과 심상은 그곳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경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아이디어였다. 이후 감독은 우연히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등산복을 입은 중년 커플이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즉시 춘천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영화적인 이야기를 구상한다. < 춘천, 춘천 >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오프닝과 함께 춘천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 한 청년이 중년 커플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다. 그 청년은 중년 커플이 나란히 앉아서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준다. 등산복을 입고 춘천을 향하는 중년 커플의 대화 속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그들의 말 속에는 긴장, 설렘, 사랑, 욕망이 뒤섞여 있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서울에서 취업 면접을 본 다음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춘천으로 돌아온 청년의 이야기와 중년 커플의 춘천 여행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오프닝을 제외하고 청년과 중년 커플은 다시 만나지 않는다. 혹자에게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진부할 수 있다.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 세대의 불안함 그리고 중년 커플의 사랑과 욕망은 이미 동시대 텔레비전과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우진 감독이 진부하고 전형적인 것들로부터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마치 하나인 것처럼 엮기 위해 대칭의 방식을 활용한다. 우선, 영화 전체적으로 청년의 동선과 중년 커플의 동선을 겹치게 했다. 1부에서 청년이 방문한 소양강댐, 선착장, 청평사, 식당 등은 이후 2부에서 중년 커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요 무대로 다시 쓰인다. 그리고 여러 에피소드를 배열하고 화면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데칼코마니의 구조를 따랐다. 한 프레임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서로 마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하나의 쇼트와 다른 하나의 쇼트가 몽타주 될 때 좌우 반전된 이미지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 외에도 1부의 에피소드와 2부의 에피소드는 유비적 관계를 맺는다. 청년의 현재와 중년 남자의 과거, 청년의 미래와 중년 남자의 현재가 닮은꼴이라는 인상을 주는 상황 또는 대화가 종종 있다. 이처럼 장우진 감독은 하나의 건축물이 여러 단위로 세분되어 있으면서도 그 각각이 모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듯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공존할 수 있도록 이미지와 서사를 직조해나가고 있다. 장우진 감독이 추구하는 단순함의 미학은 하나의 작품에 최적화된 카메라의 움직임을 찾으려는 그의 직관과 통찰이 영화 전체를 관통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전작 < 새출발 >에서 불안한 20대 청년들의 물질적 및 정신적 상태를 다르덴 형제 식의 핸드헬드 카메라로 표현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정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선택했다. 춘천의 어느 재개발 지역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운무에 잠긴 소양강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빛에 따라 그 형태가 변화하는 청평사의 풍경 등은 모두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회화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더불어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 또한 단순하다. 한 인물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프레임 밖을 벗어나려는 찰나에 혹은 한 인물의 몸짓이 프레임 밖을 넘어가려는 순간에 카메라는 패닝 또는 틸팅을 한다. 이와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은 한 화면에 담긴 상황, 환경, 풍경, 그리고 그것을 포함하는 세계 그 자체의 변화로 이어진다. 즉 영화 속 인물의 움직임 변화, 카메라의 운동, 그리고 상황의 변화가 순차적으로 이어지고,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규칙을 적용해 이야기와 이미지를 구조화해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형식주의에 매몰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한다. 영화 곳곳에는 우연적이고,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이 있다. 극영화적인 세계 내부에 다큐멘터리가 동거하고 있는 양상이랄까. 극과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경계를 순간적으로 와해시켜보려는 감독의 연출적인 충동은 이 영화가 감독 자신의 고향인 춘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실제 감독이 서울에서 춘천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경험한 것을 모티브로 했고, 또 캐릭터의 이름과 배우의 이름이 일치한다는 점으로부터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야외 촬영이 대부분이었던 이 영화는 촬영 현장을 별달리 통제하지 않고 실제 그 현장의 우연적인 요소를 영화 만들기의 한 부분으로 포용했다. 그리하여 이미 구조가 짜인 이야기 안에 실제 현실이 침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청년이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고향 친구와 전화 통화하는 장면, 마라톤 경주 대회가 펼쳐지는 장소를 스쳐 지나가는 청년과 중년 커플의 상반된 모습, 그리고 청년이 친구네 어머니의 식당에서 김장을 도와주면서 마을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각각의 장면은 극영화적인 캐릭터와 다큐멘터리 적인 출연자들이 한 화면에 담긴 경우이다. 장우진 감독은 구조와 틀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감독의 직관, 배우 혹은 출연자들의 즉흥적인 말과 행동, 그리고 현장의 우발적인 상황을 포용하려고 한다. 이 영화가 우연성을 중시한다는 것은 빛의 변화를 다룬 몇몇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조량에 따라서 카메라가 같은 공간을 얼마나 다양하게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청년과 중년 커플이 청평사에서 절을 하러 들어가기 전과 절을 하고 나온 후의 빛의 밝기는 달라진다. 영화는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마음의 짐을 절간에 두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이 절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자연광의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풍경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넌지시 강조한다. 장우진 감독에게 빛은 단순히 화면을 구성하는 이미지의 변화에 국한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빛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상의 변화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우진 감독에게 모든 영화적 순간은 어느 하나의 시공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한 생성을 거듭하는 찰나적 순간이 된다. 이처럼 < 춘천, 춘천 >은 단순한 구성과 촬영에 기초해 현실의 어떤 순간을 영화적인 순간으로 변환해보려는 연출적인 충동이 반영된 작품이다. +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떠오른 고전 영화가 있어 조심스럽게 사족을 단다. 그것은 D. W. 그리피스가 만든 두 편의 단편이었다. 하나는 플로렌스 로렌스가 주연으로 나오는 < 시골 의사The Country Doctor >(1909)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이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질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패닝을 통해서 영화 속 풍경과 영화 속 이야기를 통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릴리얼 기쉬가 주연으로 나왔던 < 피그 앨리의 총잡이 The Musketeers of Pig Alley >(1912)이다. 이 영화의 한 장면은 당시 뉴욕 빈민가가 위치했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촬영되었다. 행인 중 대다수는 그곳에서 영화가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카메라 앞을 지나간다. 그중 한 여인이 자신과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던 릴리언 기쉬와 어깨를 부딪치고는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 여인의 표정, 즉 실제 거리의 행인과 배우 릴리언 기쉬의 충돌 때문에 나타난 그 찰나적 순간은 그리피스의 극영화 속에 다큐멘터리적인 순간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장면들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그리피스의 패닝과 그의 현장 연출이 장우진 의 패닝과 그의 현장 연출과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 감독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과거 영화 언어를 새로이 만들어보려던 힘과 오늘날 한 작품에 최적화된 영화 언어를 찾아보려는 힘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과거의 앞으로 나아가려는 영화적 힘과 오늘날 뒤로 돌아가려는 영화적 힘은 분명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도 그 두 개의 서로 다른 힘이 느슨하게 이어져 있거나 100년이 넘는 시간적 차이를 극복하고 영화라는 세계 안에서 공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
‘홍콩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홍콩 장르영화가 아시아 극장가를 호령하던 1980년대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그 영화들의 밑바닥에는 ‘1997년 홍콩 반환’이라는 당시로서는 불안한 미래를 향한 근심이 자리해 있었다. 체제의 변화라는 거대한 물결 앞에서 한편으로는 동시대 홍콩영화의 보편 정서를 과잉 해석하는 하나의 틀이 만들어졌다고도 할 수 있다. 그만큼 그것은 아시아에서 가장 고도 자본화된 홍콩 영화산업이 공산 중국을 바라보며 느낄 수밖에 없는 근원적인 공포가, 영화의 속살에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반영된 것일 게다. 바로 그때로부터 20년의 세월이 흘렀다. 당시의 전망은 맞으면서도 틀렸다. 홍콩영화는 1997년을 전후로 화려한 전성기를 뒤로 한 채 긴 침체기에 들어갔고, 중국 본토의 자본과 함께 새로운 돌파구를 찾은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처럼 홍콩 반환은 홍콩영화계에 있어 긍정과 부정 모두를 껴안은 양날의 검으로 존재한다.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이번 홍콩영화제는 지나간 20년과 다가올 20년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회다. 홍콩의 중국 반환 20주년을 기념해 7월 26일(수)부터 8월 8일(화)까지 열리는 한국영상자료원의 특별전 ‘영화와 공간: 홍콩’은 Create Hong Kong, 홍콩국제영화제협회와 공동으로 주최하는 ‘창조적 비전: 홍콩 영화 1997-2017’ 섹션과 한국영상자료원의 시네마테크KOFA에서만 특별히 상영하는 ‘KOFA 특별 상영’ 섹션으로 나뉘어 총 17편으로 풍성하게 꾸려졌다. ‘창조적 비전: 홍콩영화 1997-2017’은 홍콩, 중국을 제외하고는 아시아에서 한국영상자료원이 유일하게 개최하는 글로벌 프로젝트이며 런던, 베를린, 밴쿠버 등 주요 10개 도시에서 진행 중이다. 지난 20년간 큰 변화를 겪은 홍콩영화계의 현재가 바로 여기 있다. 그리고 여전히 홍콩영화가 흥미진진한 세계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될 것이다. < 매드 월드 > 포스터 “홍콩은 미쳐가고 있다”는 영화 속 황 선생(증지위)의 말처럼, 웡 춘 감독과 플로렌스 챈 작가의 < 매드 월드 一念無明 >(2016)는 바로 그 홍콩 서민의 참담한 현재를 담담하고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칫 무미건조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이 작품이 올해 4월 초 < 공각기동대: 고스트 인 더 쉘 >이 홍콩 박스오피스 1위를 질주할 때 4위에 기록됐다는 사실은 당대 홍콩영화계의 희망적인 시그널이라 할 수 있다. 더불어 올해 홍콩 금상장영화제에서 남우조연상(증지위), 여우조연상(금연령)을 비롯해 신인감독상(웡 춘)을 수상했다는 사실 또한 고무적인 일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황 선생(증지위)의 집에 장남 퉁(여문락)이 들어온다. 퉁은 정신병원에 있다가 이제 막 나온 참이다. 조울증으로 인해 친구들 사이에서 ‘미스터 사이코’라 불리던 그는 어머니(금연령), 아내 제니(방호민)와 함께 살았다. 그와 아내는 부지런히 일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싶었지만, 치매에 걸린 어머니로 인해 팍팍한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다. 어머니와 아들은 하루도 싸우지 않는 날이 없었다. 어머니가 세상을 뜨면서 고통은 끝날 줄 알았건만,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인해 퉁은 정신병원으로 가게 됐던 것. 그리하여 오랫동안 떨어져 살던 아버지와 해후하게 됐지만 이미 망가져 버린 삶은 별달리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어머니가 아플 때 대체 어디 있었던 거냐”며 아버지를 비난해 보지만, 평생 트럭운전을 하며 가난하게 살았던 아버지 또한 말 못 할 사연이 있다. 그리고 그들과 뚝 떨어져 미국에서 잘살고 있는 차남 춘은 가족의 연락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여전히 서먹서먹한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세상을 등진 남편 퉁 대신 빚을 갚느라 영혼까지 피폐해진 아내까지, 그들은 그렇게 어떻게든 홍콩에서 살아가야 한다. 굳이 계보를 짚어 보자면, < 매드 월드 >의 웡춘 감독은 홍콩 사회파 영화의 대가라 할 수 있는 허안화 감독을 잇는 것으로 보인다. 혹은 역시 아버지와 아들의 이야기를 통해 산업화의 격랑을 관통하는 당대 홍콩 사회를 그려낸 < 부자정 >(1981)의 방육평 감독, 일찌감치 홍콩과 중국 본토 사이의 문화적 괴리감을 그려냈던 <사수유년>(1984)의 엄호 감독도 떠오르게 한다. <매드 월드>라는 영어 제목부터 이른바 ‘닭장 아파트’로 유명한 홍콩 하층민의 피폐한 삶을 정면으로 다룬다. 그 아파트 공간 내부의 아버지와 아들을 부감으로 잡아낸 영화 포스터는 무척 인상적이다. 변변한 창도 없는 좁은 방 안에 이층 침대가 있고, 공동으로 화장실과 욕실을 이용하며, 부엌이 없는 구조라 대부분 포장 음식을 사와 끼니를 해결한다. 이웃 주민들 또한 종종 이상한 행동을 보이는 퉁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본다. 공간은 관계마저 악화시킨다. 그에 비하면 이번 영화제 상영작이기도 한 허안화의 < 천수위의 낮과 밤 >(2008)에 등장하는 홍콩의 재개발 지역인 천수위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는 차라리 호화롭게 느껴진다. 그처럼 반환 이후 홍콩의 삶은 과연 이전보다 더 나아졌다 말할 수 있을까. < 담배연기 속에 피는 사랑 > (펑하오샹, 2010) < 심플 라이프 > (허안화, 2011) < 미드나잇 애프터 > (프루트 챈, 2014) < 매드 월드 >는 최근 두드러지는 홍콩 감독들의 ‘로컬 시네마’ 경향을 보다 첨예하게 드러낸다. 성룡을 비롯해 서극, 진가신 감독 등이 본토 자본과의 결합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한편으로(물론 변화하는 현실에 적응한 이들의 행보를 긍정과 부정의 이분법으로 볼 것은 절대 아니다) 허안화, 이동승을 비롯해 이번 영화제에 각각 상영되는 < 메이드 인 홍콩 >(1997), < 담배연기 속에 피는 사랑 >(2010)을 만든 프루트 챈과 펑하오샹처럼 보다 홍콩의 현실에 천착하는 작품을 내놓는 감독들이 있다. 역시 이번 영화제 상영작인 허안화의 < 심플 라이프 >(2011)가 보여주는 홍콩 요양병원의 풍경은 그 어떤 영화 속 홍콩의 모습보다 쓸쓸하다. 프루트 챈의 < 미드나잇 애프터 >(2014)는 닭장 아파트만큼이나 홍콩을 대표하는 교통수단인 미니버스를 정체성이 희미해져 가고 있는 홍콩의 축소판처럼 묘사했고, 펑하오샹의 <애버딘>(2014)은 실제 홍콩 해안지역인 애버딘을 중심으로 삼대(三代)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이들을 포함해 <매드 월드>는 바로 ‘그럼에도 우리는 홍콩에서 영원히 살아갈 것’이라는 선언처럼 보인다. 그런 가운데 웡 춘 감독은 어머니의 죽음을 둘러싼 비밀을 스릴러적 구조로 치밀하게 축조하면서, 보다 장르영화적인 재미도 놓치지 않는다. 하지만 <매드 월드>의 ‘월드’를 꽉 채운 것은 바로 배우들의 잊히지 않는 표정이다. 에드워드 양의 < 하나 그리고 둘 >(2000)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금연령의 존재감은 물론, 오래전 (역시 이번 영화제 상영작인) < 무간도 >(2002)에서 파트너를 이뤘던 증지위와 여문락이 무려 15년의 세월이 흘러 아버지와 아들로 만났다는 점이 깊은 감동을 준다. 엘리베이터가 없는 아파트에서 다리가 불편한 아버지를 그 못지않게 온전치 못한 아들이 업고 한 계단씩 걸음을 옮길 때, 홍콩 반환 전이든 후든 홍콩영화를 향한 나의 애정 또한 변하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