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살
- 감독
- 민제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최무룡, 이민자, 황해, 서영춘, 백금녀, 방성자, 남미리, 최지희, 이해룡, 황정순, 이수련, 최남현, 장혁, 김신재, 김효진, 박종훈, 김동언, 최준, 윤일주, 지방열, 김경란, 장원배, 권일정, 김신명, 김정화, 권성택, 김수천, 송일권, 지계순, 서애란, 박은미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책에는 저자의 후기가 없다. 책을 끝낸 단상만 있을 뿐이다. 그곳에는 이 책이 박사논문을 보완한 것이라는 정보와, 기억과 망각에 대한 상념과, 고마운 이들에게 전하는 문장만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에 싣지 않은 후기, 모두 떠난 뒤에 도착하려고 일부러 늦게 출발한 이의 기록이 될 것이다. 박사논문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먼저 드는 질문은 왜 사람들은 누아르에 대한 인상이 다들 제각각일까 하는 것이었다. 개인 블로그에 올린 글들을 읽어 보면 한국의 대표적인 누아르 영화로 박훈정 감독의 < 신세계 >(2012)를 꼽는 이들이 많다. 몇몇 이들은 김성수 감독의 < 아수라 >(2016)를 언급하기도 한다. 혹은 이해영 감독의 < 독전 >(2018)이나 변성현 감독의 <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2017)을 거론하기도 한다. 대부분 범죄자의 세계를 다룬 영화들이다. 많은 이들이 누아르는 어두운 세계를 어둡게 묘사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어두운 세계는 무엇이고 어두운 묘사는 무엇인가? 나의 논문은 이 질문에서 시작하였다. 두 번째 질문은 누아르 문헌들을 읽으면서 생겨났다. 여러 연구자가 글을 시작하면서 누아르 영화는 장르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누아르 영화는 분위기나 스타일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왜 이런 주장을 펴는 것일까? 이것이 두 번째 질문이었다. 논문은 이 두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첫 번째 질문은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알게 되었다. 두 번째 질문은 글을 마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책에서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는 시대와 지역을 가로지르며 합치되고 분기되는 혼종성의 산물이다. 시대의 경로에 지역의 특수성이 결합한다. 할리우드 고전 누아르에서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길에는 시대와 지역의 여러 흔적이 흩어져 있다. 누아르 장르가 혼종성의 산물이고 장르 역시 혼종성의 산물이기에 이는 당연한 일이다. 고전 누아르도 어느 날 불쑥 솟아난 지대가 아니다. 프랑스의 시적 리얼리즘과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와 미국의 하드보일드 소설의 영향을 받았고, 프랑스의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 담론도 가세했다. 기원에 대한 추적은 기원을 해체한다. 기원이나 종점도 없이, 이상이나 목적도 없이, 그렇게 휩쓸리고 뒤섞이며 흘러온 결과가 지금의 한국 누아르 영화이다. 나는 책에서 이 과정을 추적했다. 내가 원했던 것은 명확한 지도가 아니라 흔적들의 성좌였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누아르는 왜 장르가 아니라고 했는지 두 번째 질문에 대한 답 역시 어렴풋이 드러난다. 결국 나는 연구자들이 누아르 글을 시작하면서 짧게 언급한 한두 문장을 오랜 시간에 걸쳐 추적한 셈이다. 그렇지만 이 작업이 허망하지는 않다. 연구자는 앞선 연구자들이 남긴 가벼운 문장에 의문을 품고 긴 주석을 남겨 놓기도 한다. 『누아르의 타자들』은 연세대학교에 박사논문으로 제출한 「한국 누아르 영화의 위상과 표상」(2022)을 편집한 책이다. 일련의 과정은 영화의 편집 공정과 유사했다. 어쩌면 논문을 쓰고 책으로 펴내는 과정 전체가 나에겐 영화를 제작하는 공정을 상기시킨다. 차이가 있다면 영화를 만드는 작업에서는 프로듀서의 역할을 했지만, 책을 만드는 공정에서는 영화감독의 입장이 되었다는 점이다. 영화감독들과 오래 일하면서도 몰랐던 그들의 내면을 훔쳐본 셈이다. 책을 출간하면서 논문의 앞부분을 크게 줄였다. 논문에는 장르 이론과 필름 누아르에 관한 논의가 있었다. 구성도 바꿨다, 장과 절로 나뉜 논문을 책에서는 장만으로 엮었다. 그리고 마지막에 박찬욱 영화에 관한 비평 글을 실었다. 영화로 치면 마지막 편집본을 수정해 극장 개봉을 한 것이다. 편집본의 앞부분을 덜어내고 전체 구성을 손보고 보충 촬영을 실행한 셈이다. 나는 책에서 누아르의 계보와 계열을 정리했다. 고전 누아르에 영향을 끼친 사조에서 시작해서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홍콩 누아르를 거쳐 글로벌 누아르에 이르는 여정과 이 지류들이 한국 누아르로 편입되는 흐름을 추적했다. 여기까지가 한국 누아르의 위상에 해당하는 영역이다. 나머지는 한국 누아르 영화들에 대한 비평이다. 앞부분이 한국 누아르의 계보에 해당한다면 뒷부분은 한국 누아르 영화의 계열이다. 책을 쓰면서 나는 두 가지 목표를 가정했다. 하나는 누아르라는 울창한 숲을 조감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뻗어 있는 나무들을 묘사하는 것이다. 독자들이 누아르의 검붉은 숲길을 함께 걷길 바랐다. <말타의 매>(존 휴스턴, 1941)와 <첩혈쌍웅>(오우삼, 1989) 중 (사진: " The Maltese Falcon ", " Dip huet seung hung ", IMDb) 한국 누아르 영화는 잔인하고 폭력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가 세계 관객에서 주목받은 이유는 이 잔인하고 폭력적인 감각 때문일 것이다. 단지 피가 튀고 살이 찢기는 장면들로만은 설명되지 않는 이 극단의 감각은 어디에서 유래하는 것일까? 이를 해명하기 위해 나는 필름 누아르의 장르 특성과 한국 현대사의 지난 상흔을 탐색했다. 필름 누아르는 이름 그대로 ‘검은 영화’이다. 그렇다면 ‘검다’라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책에서 이 단어의 문화적 의미를 탐색했다. ‘검다’라는 것은 폭력과 섹스의 기표이다. 검은 것은 따라서 두렵고 매혹적이다. 검게 내려앉은 도시에서 낯선 남녀가 만나는 것은 두렵고도 매혹적인 일이다. 누아르가 그리는 세계가 이런 풍경이다. 빗물이 고이고 네온이 비치는 거리에서 낯선 남녀가 만난다. 유혹과 살인의 예감이 얼굴을 스친다. 누아르는 명암대비가 선명한 키아로스쿠로 조명으로 이 공간을 채색한다. 이것이 우리가 그리는 할리우드의 누아르이다. 여기에 낭만과 비애와 비정이 교차하는 홍콩 누아르가 접속한다. 누아르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이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시각적이고 촉각적일 뿐 아니라 후각적이기까지 하다. 한국 누아르에는 피 냄새가 난다. 피의 비린 내음이 관객의 감각을 적신다. 그래엄 그린(Graham Greene)은 누아르 영화를 ‘피의 멜로드라마(Blood Melodrama)’라고 칭했는데 이는 한국 누아르 영화에 적절한 표현이다. 나는 누아르의 계보를 그리기 위해 고전 누아르, 네오 누아르, 글로벌 누아르를 탐색했다. 이 과정이 한국 누아르에 이르는 궤적의 수평선이라면 홍콩 누아르와 일본 누아르는 수직선이다. 이 선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한국 누아르가 있다. 이 지도는 평면도가 아니다. 여러 굴곡이 있는 입체적인 도형이다. 구릉은 솟았다 꺼지고 길은 사라졌다 나타난다. 책에도 적었듯이 한국 누아르에 영향을 준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오우삼 의 < 영웅본색 >(1986)과 쿠엔틴 타란티노의 < 펄프 픽션 >(1994)이다. <영웅본색>은 홍콩 누아르를 세계에 알린 영화이고 <펄프 픽션>은 글로벌 누아르를 견인한 영화이다. 할리우드의 필름 누아르는 1950년대 이후 주춤하다가 1970년대 과도기를 거쳐 1980년대 초에 네오 누아르로 부활했다. 1992년은 필름 누아르의 분수령이 되는 해였다. 이 해에 < 원초적 본능 >(폴 버호벤, 1992)과 < 저수지의 개들 >(쿠엔틴 타란티노, 1992)이 개봉했다. <원초적 본능>은 네오 누아르의 정점을 찍은 영화이고 <저수지의 개들>은 네오 누아르에서 글로벌 누아르로 넘어가는 전환점이 되었던 영화이다. 1992년은 또한 한국 누아르의 시작을 알린 < 걸어서 하늘까지 >(장현수, 1992)가 개봉한 해이기도 하다. 한국 누아르의 연대기에서 내가 주목하는 시기는 2000년 전후와 2010년 이후이다. 2000년을 전후해 < 해피엔드 >(정지우, 1999), < 텔미썸딩 >(장윤현, 1999), < 복수는 나의 것 >(박찬욱, 2002)이 개봉했고, 2010년 이후에 < 황해 >(나홍진, 2010), < 악마를 보았다 >(김지운, 2010), <아수라>(김성수, 2016)가 나왔다. 2000년 전후는 한국 누아르가 성숙한 시기이고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숙성한 시기이다. 달리 말하면 한국 누아르가 화려하게 꽃을 피운 시기가 2000년 전후라면 2010년 이후는 한국 누아르가 독한 향기를 내뿜던 시기였다. 그 향기는 비린 피 내음이기도 했다. <악마를 보았다> 중 <복수는 나의 것>에서 이미 조짐은 보였다. 이 영화에서 인물들은 간을 씹어 먹고 아킬레스건을 자른다. <황해>는 칼로 쑤시고 도끼로 찍는다. 피와 살점이 사방에 튄다. <악마를 보았다>에선 신체를 절단하고 인육을 먹는다. <아수라>는 집단 학살로 끝난다. 한국 누아르는 왜 이렇게 잔혹한 것일까?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나는 이 의문을 풀기 위해 한국 현대사의 사건들을 돌아보았다. 내가 주시한 역사의 현장은 1997년의 IMF 외환위기와 2014년의 세월호 참사였다. IMF 외환위기는 신자유주의의 도래를 알리는 사건이었고, 세월호 참사는 신자유주의의 모순을 폭로한 사건이었다. 한국 누아르 영화는 한국인들이 조우한 집단 외상의 표현이다. 집단 외상이 유혈과 학살의 드라마로 펼쳐진다. 가학과 자학의 피의 멜로드라마가 전개된다. 시대의 외상이 한국 누아르를 검붉게 물들였다. 한국 누아르의 집단적 자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 책은 한국 누아르에 대한 영화 비평인 동시에 한국 사회에 대한 문화 비평이다. 책의 저자가 자신의 책에 대해 말하는 것은 어쩐지 민망하다. 그래서 일부러 책에 저자 후기를 넣지 않았다. 저자는 숨어 있는 것이 좋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부러 약속 장소에 늦게 도착한 이를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터이니 쑥스러운 얼굴로 인사를 건넨다. 강봉래(영화문화비평가) l 연세대학교 커뮤니케이션대학원에서 미디어문화연구 전공으로 문화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임상수 감독의 < 눈물 >(2000)과 허진호 감독의 < 외출 >(2005) 프로듀서를 했고, 허진호 감독의 < 행복 >(2007)을 제작했다. 저서로 『누아르의 타자들』(2025)이 있다.
“서 있는 위치가 달라지면 펼쳐진 풍경도 달라진다.” 최규석 작가의 웹툰 「송곳」에는 폐부를 저미는 날카로운 대사들이 곳곳에 박혀 있다. 그 중 유난히 뇌리 깊숙이 박힌 저 대사가 요즘 자꾸 되살아난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 상황이 바뀔 수 있음을 표현한 대사지만 내겐 텍스트와 해석의 묘를 압축하고 있는 말로 다가왔다. 사실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본 것을 말한다는 건 적지 않은 용기와 확신이 필요한 일이다. 잠시 머뭇거리는 순간 보편적인 정답의 존재를 믿는 메아리가 거대한 조류로 변해, 작지만 용기 있는 의견들을 순식간에 삼키고 지나가기 십상이다. 최근 < 택시운전사 >와 < 군함도 > 등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을 둘러싼 담론의 탁류를 접하며 가벼운 회의에 사로잡혔다. 지금, 새삼 서광제 감독의 < 군용열차 >를 꺼내보고 싶다고 생각한 건 그 때문이다. 1938년 제작된 <군용열차>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친일영화로 분류된다. 실제로 당대의 대다수 관객들에겐 이른바 어용영화로 소비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다시 본다면 당대엔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것들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 군용열차 >는 두 개의 기둥으로 이뤄진 영화다. 하나는 얽히고설킨 남녀의 통속극, 다른 하나는 친일 어용의 열차기관사 이야기다. 당대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열차 기관사 점용은 기관사들의 선망의 대상인 군용열차를 몰 기회를 얻는다. 점용의 성공 뒤에는 오빠를 철도학교에 보내기 위해 기생이 된 동생 영심의 희생이 있다. 영심은 점용의 절친 원진과 사랑하는 사이다. 하지만 원진이 영심과 결혼하기 위해서는 기생집에서 데려올 거액의 몸값이 필요한데 평범한 원진은 도저히 그 돈을 구할 길이 없다. 한편 점용의 주변을 맴돌다 혼쭐이 난 수상한 남자가 있다. 남자는 원진에게 접근하여 점용이 모는 군용열차가 들어오는 시간을 알려 주면 거액의 돈을 주겠다고 회유한다. 원진은 업무수첩을 훔쳐 남자에게 전달하지만 이내 가책을 느껴 괴로워하다 점용에게 모든 사실을 털어놓는다. 결국 군용열차를 파괴하려던 시도는 실패로 돌아가고 점용은 군용열차 기관사의 꿈을 이룬다. 점용을 중심으로 본다면 이 영화는 ‘일본 제국의 승리와 동양영원평화를 위해’ 매진하는 철도기관사의 이야기다. 점용은 황국신민으로써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군용열차를 노리는 테러리스트, 그러니까 독립군의 계획을 분쇄한다. 이를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고 친구를 버리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실상 영화의 뼈대를 차지하며 이목을 사로잡는 건 영심과 원진의 애틋한 로맨스 파트다. 반면 영화에서 점용의 심리나 인간적 면모를 드러내는 에피소드는 사실상 거의 전무하다. 당위나 설득 없이 충성과 보국이라는 답변을 반복하는 점용의 캐릭터는 인물이라기보다는 차라리 기능에 가깝다. 일제강점기를 버텨온 남녀의 안타까운 현실을 포장하기 위한 일종의 위장 내지는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제작하기 위한 기계적 알리바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반면 원진과 영심의 캐릭터는 피와 살이 도는 생생함을 안긴다. 원진은 변변한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조선 청년의 애환을 안타깝게 드러낸다. 영심은 일방적 희생을 강요당하는 당대의 여성상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데, 이 지점은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한국문학에 빈번히 등장하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누이’의 변형이라 할 만한 설정이다. < 군용열차 >는 몇몇 장면에서 연출적 괴리를 숨기지 않는다. 가령 원진이 독립군과 이야기 할 때 영상과 음성이 불일치하는 장면들을 보며 제작 후 녹음 과정에서 불가피한 수정이 가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원진이 황국신민의 의무를 외치면서도 굳이 한복을 입고 선로에 뛰어드는 것도 의아하다. 프로파간다적인 주제와 충돌할만한 단서들을 곳곳에 남겨두고 있는 것이다. 영화 읽기란 이야기의 틈새에서 좋은 질문을 발견하는 작업이다. 간혹 창작자 본인도 의식하지 못했던 시대의 흔적들이 발견되기도 한다. < 군용열차 >는 친일어용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있지만 역설적으로 일제 치하의 아픔과 저항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 영화다. 당대 일본인, 친일어용 지식인, 핍박받는 조선인 등 어떤 위치에서 보았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영화를 감상했을 것이라 상상해본다. 본래 습자지처럼 붙어있되 전혀 다른 성질의 두 서사를 분리해내기 위해서는 본래 적극적인 독해가 필요하다. 하지만 시간이라는 촘촘한 거름망을 지난 지금 우리가 <군용열차>에서 친일영화의 뼈대를 발라내고 그에 저항했던 속살을 발라먹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의 표리부동한 양식에서 최근 역사를 소재로 한 영화들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고전 영화를 읽는다는 것은 평자의 위치와 좌표를 확인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때로 고전은 시간을 거스른 시금석이 되어 당대에는 쉽게 읽어 내지 못하는 정보들을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낸다. 오래된 영화가 끊임없이 되살아나 생명을 유지하는 비결은 거기에 있다. 서 있는 위치가 바뀔 때마다 영화는 다시 태어난다.
의외로 애니메이션은 ‘듣는’ 매체다. 때론 강렬한 시각적 자극보다 청각적 호소력이 훨씬 강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얼마 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뽀로로 역을 연기한 성우가 출연해 아이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코너를 들었다. 뽀로로를 철썩같이 믿는 아이들의 마음이 참 귀여웠지만 그보다 먼저 성우의 연기에 감탄했다. 아이가 뽀로로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건 단지 동심의 상상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은 목소리만으로 캐릭터에 피와 살이 돌게 하는 몇 안 되는 표현방식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눈으로 움직임을 감상하고 귀로 캐릭터를 상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만큼 애니메이션 성우들은 적지 않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성우의 목소리는 곧 애니메이션 캐릭터 그 자체다. 캐릭터에 대한 사랑은 성우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애니메이션 전반의 팬덤으로 확장된다. 팬과 연기자, 좋은 작품의 삼박자를 갖추면 산업은 절로 순항하기 마련이다. 아쉬운 건 이처럼 단단한 팬덤이 늘 긍정적인 쪽으로만 작동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 < 겨울왕국 >의 흥행과 함께 제기된 국내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더빙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 제작 애니메이션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몇 해 전부터 해외 수입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편수는 급격히 늘었다. 아동 시장의 확대, 교육용 애니메이션 열풍, 비교적 저렴한 수입가격 등 몇 가지 요인이 맞물리며 경쟁적으로 수입을 한 탓이다. 애초에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만큼 더빙은 필수였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한정된 시장에서 적은 비용으로 경쟁하려니 고육지책으로 짜낸 것이 소위 ‘연예인 더빙’이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마케팅 효과까지 노릴 수 있어 대다수 수입사들이 연예인 더빙에 집중했다. 하지만 비슷한 영화들이 양산되면서 이내 목소리 연기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짧은 기간 더빙을 해야 하는 환경 상 질적인 하락을 피해가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 전문성우를 기용한 < 겨울왕국 >이 크게 흥행하며 찻잔 속 태풍으로 그쳤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이다. 일각에선 <겨울왕국>의 흥행에 성우들의 연기력도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분석을 내놓았고 이에 맞춰 작품의 질을 위해 전문성우를 기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전문적인 기량을 요구하는 분야인 만큼 성우들의 숙련된 연기가 작품의 질을 높인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 겨울왕국 >으로 한동안 소외되었던 성우업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긍정적이다. 다만 성우팬덤을 중심으로 종종 그 정도가 지나친 지적들이 있어 조금은 걱정스럽다. 가령 그간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부진과 질적인 하락을 전부 연예인 더빙 탓으로 단순화시키는 태도가 그렇다. 상대적으로 억눌려 왔던 성우 팬들은 간혹 이 문제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설 때가 있다. 심지어 특정 연예인, 혹은 비전문 성우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단지 방향이 바뀌었을 뿐 연예인 더빙 일색이었을 때의 일방적인 논리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숙련되지 않은 연예인 더빙, 날림으로 녹음한 사례가 없진 않다. 하지만 반대로 기존 연기자나 스타가 녹음한 작품이 훨씬 좋을 때도 있다. 심지어 드림웍스, 블루스카이 같은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도 상황에 따라 전문성우와 스타를 번갈아 기용한다. 일반화시킬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이는 당장 속은 후련할진 몰라도 결국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게으름으로 이어진다. 차라리 누가 녹음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녹음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성우 더빙, 연예인 더빙 이전에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진심으로 연기하는지부터 봐줬으면 좋겠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성우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보다는 더빙과 자막판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먼저 주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황에 따른, 취향에 따른 유연한 표현방식의 선택, 그리고 다른 방식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제야 애니메이션을 넘어 외국영화들까지 극장에서 더빙으로 볼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의외로 애니메이션은 ‘듣는’ 매체다. 때론 강렬한 시각적 자극보다 청각적 호소력이 훨씬 강하게 작동하기도 한다. 얼마 전 한 라디오 방송에서 뽀로로 역을 연기한 성우가 출연해 아이들의 고민을 상담해주는 코너를 들었다. 뽀로로를 철썩같이 믿는 아이들의 마음이 참 귀여웠지만 그보다 먼저 성우의 연기에 감탄했다. 아이가 뽀로로와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건 단지 동심의 상상력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아마도 애니메이션은 목소리만으로 캐릭터에 피와 살이 돌게 하는 몇 안 되는 표현방식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눈으로 움직임을 감상하고 귀로 캐릭터를 상상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런 만큼 애니메이션 성우들은 적지 않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성우의 목소리는 곧 애니메이션 캐릭터 그 자체다. 캐릭터에 대한 사랑은 성우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지고 이는 다시 애니메이션 전반의 팬덤으로 확장된다. 팬과 연기자, 좋은 작품의 삼박자를 갖추면 산업은 절로 순항하기 마련이다. 아쉬운 건 이처럼 단단한 팬덤이 늘 긍정적인 쪽으로만 작동하는 건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 전 < 겨울왕국 >의 흥행과 함께 제기된 국내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더빙 문제가 대표적인 사례다. 국내 제작 애니메이션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몇 해 전부터 해외 수입된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편수는 급격히 늘었다. 아동 시장의 확대, 교육용 애니메이션 열풍, 비교적 저렴한 수입가격 등 몇 가지 요인이 맞물리며 경쟁적으로 수입을 한 탓이다. 애초에 저연령층을 대상으로 한만큼 더빙은 필수였고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한정된 시장에서 적은 비용으로 경쟁하려니 고육지책으로 짜낸 것이 소위 ‘연예인 더빙’이었다. 상대적으로 적은 비용으로 마케팅 효과까지 노릴 수 있어 대다수 수입사들이 연예인 더빙에 집중했다. 하지만 비슷한 영화들이 양산되면서 이내 목소리 연기에 대한 지적이 이어졌다. 짧은 기간 더빙을 해야 하는 환경 상 질적인 하락을 피해가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 전문성우를 기용한 < 겨울왕국 >이 크게 흥행하며 찻잔 속 태풍으로 그쳤던 문제가 본격적으로 불거진 것이다. 일각에선 <겨울왕국>의 흥행에 성우들의 연기력도 결정적인 요소였다는 분석을 내놓았고 이에 맞춰 작품의 질을 위해 전문성우를 기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틀린 말은 아니다. 전문적인 기량을 요구하는 분야인 만큼 성우들의 숙련된 연기가 작품의 질을 높인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 겨울왕국 >으로 한동안 소외되었던 성우업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도 긍정적이다. 다만 성우팬덤을 중심으로 종종 그 정도가 지나친 지적들이 있어 조금은 걱정스럽다. 가령 그간의 극장판 애니메이션의 부진과 질적인 하락을 전부 연예인 더빙 탓으로 단순화시키는 태도가 그렇다. 상대적으로 억눌려 왔던 성우 팬들은 간혹 이 문제에 대해 공격적으로 나설 때가 있다. 심지어 특정 연예인, 혹은 비전문 성우에 대한 비난을 서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단지 방향이 바뀌었을 뿐 연예인 더빙 일색이었을 때의 일방적인 논리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인다. 숙련되지 않은 연예인 더빙, 날림으로 녹음한 사례가 없진 않다. 하지만 반대로 기존 연기자나 스타가 녹음한 작품이 훨씬 좋을 때도 있다. 심지어 드림웍스, 블루스카이 같은 할리우드 대형 스튜디오들도 상황에 따라 전문성우와 스타를 번갈아 기용한다. 일반화시킬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이는 당장 속은 후련할진 몰라도 결국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게으름으로 이어진다. 차라리 누가 녹음하는가 보다는 어떻게 녹음하는가를 먼저 생각해줬으면 좋겠다. 성우 더빙, 연예인 더빙 이전에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진심으로 연기하는지부터 봐줬으면 좋겠다. 한발 더 나아간다면 성우에 대한 무조건적인 애착보다는 더빙과 자막판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먼저 주장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상황에 따른, 취향에 따른 유연한 표현방식의 선택, 그리고 다른 방식에 대한 너그러운 이해가 필요한 시점이다. 그제야 애니메이션을 넘어 외국영화들까지 극장에서 더빙으로 볼 수 있는 선택의 자유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