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름 컬처 통합검색 결과
검색 결과 분류
총 26개
정확도 순 필터
영화정보
수집자료
파랑주의보
- 매체유형
- CD
- 연주시간
- —
스페어 / SPARE
- 매체유형
- CD
- 연주시간
- 30:05
필름 컬처 영화 주간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팸플릿
제2회 필름 컬처 영화 주간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팸플릿
제2회 필름 컬처 영화 주간
- 실물구분
- 아날로그
- 매체유형
- 전단지
Oh! Brothers
- 매체유형
- 일반본
- 보관위치
- —
콘텐츠
[실험영화]영화를 위한 선(백남준, 1964)
‘~을(를) 위한 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백남준 의 작업은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가장 먼저 선보인 작업은 <머리를 위한 선>(1961)으로, 작곡가 라 몬테 영(La Monte Young)이 쓴 퍼포먼스 스코어 <구성 19 #10 밥 모리스에게 Composition 19 #10(to Bob Morris)>에서의 지시문 “선을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라”를 백남준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잉크를 머리에 묻혀 길이가 긴 종이에 선을 그리는 퍼포먼스였다. 이 외에도 사람 머리 조각을 쇠사슬로 매달고 신어볼 수 있게 만든 <걸음을 위한 선>(1961), 거름 체에 물건을 매달아 악기처럼 소리를 내 볼 수 있도록 한 <손을 위한 선>(1961), 슬리퍼, 양철 주전자, 열쇠, 나무 인형 등 잡다한 사물을 줄에 매달아 바람에 의해 서로 부딪히게 만들어 풍경처럼 소리를 내게 만든 <바람을 위한 선>(1963)과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물을 설치한 후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한 <코를 위한 선>(1963), 검은 TV 화면 가운데에 가늘고 긴 흰색 세로줄이 나타난 < TV를 위한 선 >(1963) 등등이 있다. 이 작업들이, 그리고 백남준이 선 사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을뿐더러 그의 예술적 실천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리 유용한 접근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대부분의 작업이 전시되었던, TV를 처음으로 전시장 안에 들여옴으로써 백남준을 유명하게 만든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떠올려 보자. 이 전시의 독특함은 작업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었다. 전시의 제목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가 원했던 것은 ‘음악’을 ‘전시’하는 것이었던 듯한데, 관객은 전시장에 놓인 각종 작업을 직접 다루고 소리를 내 보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음악을 가만히 앉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로 보여주고자 했던 인터미디어적 특성, 작업에 대한 자유로운 경험과 자율적인 의미 생산에 대한 강조. 백남준은 1962년 갤러리스트 롤프 예를링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전시가 “회화나 조각이 아닌 ‘시간-예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음악이 그러하듯 시간을 통해서 가능한 미적 경험이었고 그리하여 전시장에서의 작품이란 관객의 시간과 상호적일 수 있는 장치였다. 그림 1: <흰색 회화>(1951) 앞에 앉아 있는 라우센버그 < 영화를 위한 선 >(1962-64)은 ‘비어 있는’ 필름의 프로젝션이다. 즉,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리더 필름을 영사기에 넣고 빛으로 쏴 흰 화면을 만든다. 이 화면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필름에 난 스크래치나 묻어 있는 먼지 때문에 무언가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것뿐이다. 일반적으로 필름 프로젝션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형식과 내용은 어디에도 없는 이 반영화(antifilm)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존 케이지는 이미지 없이 프로젝션 되는 <영화를 위한 선>을 보고 라우센버그의 <흰색 회화 White Painting>(1951)를 떠올렸다고 한다. 케이지가 라우센버그의 회화에 영향을 받아 <4분 33초>(1952)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우센버그는 “캔버스는 절대로 비어있지 않다”라고 믿었고, 케이지는 “소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이에 응답했다. 그림 없는 회화, 소리 없는 음악, 그리고 이미지가 없는 영화. 서로 상이한 매체지만 이들은 모두 비어있는 것이자 가득 찬 것에 대한 실험이었다. 라우센버그가 시각의 영역에, 케이지가 소리의 영역에 있었다면, 유령과 같은 이미지가 물러난 백남준 의 화면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기대되는 서사가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물적 조건인 기계 장치가 만들어내는 시간은 투명하다. 볼 것 없는 화면과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소리 앞에서 관객은 자기 자신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게 된다. 백남준은 기본적으로 지루함의 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지루함이 발생할 때 경계가 사라지는 일종의 미학적 순간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루함은 흥미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음악의 전시’ 서문에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니 해보라. 처음에는 (아마) 흥미롭겠지만 나중에는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아마)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백남준이 보기에 영화라는 것은 시간을 구조화하는 주요한 시간 기반 매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를 지배하던 형식과 내용이 직조된 기존의 구조를 제거해야만 했을 것이다. < 영화를 위한 선 >이 1960년대에 등장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60년대는 전반적인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적 실천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로버트 모리스는 1961년 <두 개의 기둥 Two Columns>을 만들어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이라고 폄하한 바로 그 전시장에서의 경험, 현상학적 미학을 강조한 미니멀리즘의 시작을 알렸다. 루시 리파드는 개념 미술의 맥락에서 미적 오브제가 사라져가는 60년대의 경향을 가리켜 ‘비물질화’라는 용어를 그의 1973년 저서에서 사용한다. 1958년 1월, 이미 앨런 캐프로는 「아트뉴스」지에 ‘잭슨 폴록의 유산’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삶의 영역으로 확장된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고 플럭서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과 삶의 경계를 지워 예술을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다다에 뿌리를 둔 플럭서스는 단순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다양한 방식으로 ‘DIY(Do-It-Yourself)’ 미학을 전파했다. 여기에는 1950년대에 존 케이지가 탐구한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 영화의 영역에서 또한 대단한 에너지를 지닌 움직임이 있었다.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시네마를 중심으로 아방가르드 영화가 활발히 전개된 것이다. 1962년 23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모여 뉴 아메리카 시네마 그룹이 정식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들이 적극적이었던 것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영화를 유통시키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조나스 메카스가 1964년 세운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는 당시 등장하던 영화와 비디오 예술 실천을 위한 중요한 장소였다. 이곳은 시각예술과 퍼포먼스가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곳이 되었고, 다양한 방식의 전시와 유통을 통해 주류 예술 밖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이곳에서 영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방식들이 실험되었다. 그림 2: 1965년 10월 28일자 「빌리지 보이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할 당시 백남준 의 여행용 비자를 위한 스폰서가 바로 메카스였다. 메카스는 플럭서스의 핵심 인물이었던 마키우나스와 잘 알고 지냈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처음으로 < 영화를 위한 선 >을 선보였던 것은 1964년 마키우나스가 초대해서 참여하게 된 플럭스홀(Fluxhall)에서의 6주간의 플럭서스 페스티벌(Fully Guaranteed 12 Fluxus Concerts)이었다. 백남준은 4월 25일 다섯 번째 콘서트(Concert No. 5)에서 <피아노를 위한 플럭서스 콘서트 Fluxus Concert for Piano>라는 제목의 작업과 함께 <영화를 위한 선>을 선보였고, 5월 8일 여덟 번째 콘서트(Concert No. 8)에서는 <영화를 위한 선>을 단독으로 상영했다. 브루스 젠킨슨에 따르면, 이 행사에서 <영화를 위한 선>은 “업라이트 피아노와 더블베이스가 놓인 다락 공간의 전면에 위치한 가정용 영화 스크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크기로 상영되었다. 1965년 11월 2일에는 조나스 메카스가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에서 만든 행사 ‘뉴 시네마 페스티벌Ⅰ’에서 <영화를 위한 선>을 선보였다. 다케히사 고수기는 이 행사에서 백남준이 노출된 빈 필름과 노출되지 않은 빈 필름 두 가지 버전으로 스크리닝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라이브 퍼포먼스를 결합시켰다고 회고한다. 피터 무어가 촬영한 <영화를 위한 선>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진이 바로 이 행사에서의 기록이다. 이 사진을 보면 백남준은 <영화를 위한 선>이 상영되는 스크린을 마주하고 서 있다. 한 해 전의 상영과는 달리 스크린의 크기가 훌쩍 커졌다. 그는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화면을 드나드는 간단한 행위를 수행했는데, 이는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영화를 위한 선>에 대한 백남준 자기 자신의 관람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영화의 미니멀리즘적 경험인 것이다. 메카스는 「빌리지 보이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백남준의 (시네마테크에서의) 저녁을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라 몬테 영, 스탠 브래키지, 그리고리 마르코폴로스, 잭 스미스, 혹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앤디 워홀의 예술처럼, 그의 예술은 천 년 동안 이어진 미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다른 고전적인 예술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분석되고 경험된다. (...) 빛이 이미지가 된 자리에 이미지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림 3: 플럭스키트, 1965 그림 4: 플럭스키트 안의 <영화를 위한 선> 패키지 < 영화를 위한 선 >이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는지는 모호하다. 「플럭서스 Etc: 질베르트 & 릴라 실버만 콜렉션」에 따르면 <영화를 위한 선>이 포함된 백남준 의 필름 스크리닝이 1962년 12월 파리의 학생과 예술가를 위한 미국인 센터(American Center for Student and Artists in Paris)에서 있었고, 마키우나스 또한 「필름 컬처」 1966년 겨울호에 <영화를 위한 선>의 제작연도를 ‘1962-1964’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작업은 제작년도를 표기하기에 무척 까다로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를 위한 선>의 필름은 이후 여러 버전으로 제작되어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이 작업의 핵심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생필름을 프로젝션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작업의 요체는 필름일까? 백남준이 사용했던 바로 그 원본 필름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작업이 제공하는, 백남준이 고민했던 시간에 대한 경험이 중요한 작업일까? <영화를 위한 선>은 형식과 그것이 놓이는 맥락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무엇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1962년의 상영에 대해 케이지는 “1시간 길이의 이미지 없는 필름”으로 기억했으며, 메카스는 시네마테크에서 16mm필름으로 30여분 길이로 상영했다고 밝힌다, 여기에 더해 마키우나스가 플럭서스의 오브제와 인쇄물을 보급하고 유통시키기 위해 DIY 버전으로 만든 에디션 플럭스키트(Fluxkit, ‘A’ 카피와 ‘B’ 카피 모두 1965년 제작) 이후에는 <영화를 위한 선>이 주로 루핑으로 상영되었음을 상기해보면(이는 유통을 위해 작은 크기의 패키지로 제작된 탓에 필름의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작업의 정해진 상영 방식은 없는 듯하다. 이 말은, <영화를 위한 선>의 물질적 상태가 정해진 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영화를 위한 선> 단 한 작품에 대한 연구를 통한 전시를 기획하고 이에 관련된 책 「Revisions: Zen for Film」을 펴낸 한나 횔링이 다루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영화를 위한 선>을 전시장에서 봤던 세 번의 경험을 떠올리는데, 한번은 필름 프로젝터로, 한번은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프로젝션으로, 한번은 필름이 담긴 캔이 유물처럼 전시되어있는 경우였다. 그는 작품이 여러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러한 상태, 계속적으로 재물질화 되고 관객의 참여 또한 그 의미가 갱신되는 이러한 상태가 <영화를 위한 선>의 복잡하고 흥미로운 점임을 얘기한다.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의 이벤트를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영화의 문화와 이것을 유희적으로 즐기는 데 관심이 많았다. 플럭서스의 활동을 영화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한 그의 노력 덕분에 플럭서스 그룹은 플럭스필름(Fluxfilm)라는 이름 아래 많은 필름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키우나스는 1962년부터 1970년 사이에 백남준 , 오노 요코, 벤 보티에, 폴 샤리츠 등 플럭서스 그룹에서 제작한 영화 37편을 모아 플럭서스 앤솔로지(Fluxus Anthology)를 편집했는데, 그 첫 번째(Fluxfilm No.1)가 바로 < 영화를 위한 선 >이다. 이 버전에서 <영화를 위한 선>의 러닝타임은 7분 58초이다.(플럭서스 앤솔로지의 전작은 모두 우부웹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www.ubu.com/film/fluxfilm.html). <영화를 위한 선>의 16mm 버전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아카이브 형태로 수장고에 보존 중이다. 질베르트 & 릴라 실버만 플럭서스 컬렉션에 포함된 이 필름은 현존하는 필름 중 유일한 극장용의 긴 버전이지만, 이는 더 이상 상영용으로 쓰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누군가가 뉴욕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영화를 위한 선>의 이 버전을 대여하고자 하는 경우 미술관은 필름을 대여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크리닝의 개념만을 대여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화를 위한 선>을 빌리는 이는 프로젝터를 구비하기만 한다면, 길이를 마음대로 정하여 아무 16mm 빈 필름 리더를 상영에 사용할 수 있다. 최근 뉴욕현대미술관의 정책은 원본 필름을 이 작업의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나 횔링은 밝히고 있다. 이는 분명 설치나 참여형 예술, 이벤트로서의 영화, 퍼포먼스 등 최근의 예술 실천뿐만 아니라 디지털 사본이 무한히 증식 가능한 당대의 매체적 조건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일 것이다. <영화를 위한 선>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메인 사진 설명: 피터 무어, <영화를 위한 선> 앞에 서 있는 백남준. 1965년 11월 2일
[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변인식 - 평론
“우리는 아직껏 이 땅에 영화는 있었어도 영화예술은 부재했음을 알고 있다. 우리는 ‘영화부재’의 책임을 미래의 우리들 스스로에게 묻고자 한다 … ‘새 세대가 만든 새 영화’ 이것은 구각을 깨는 신선한 바람, 즉 무덤같은 권위주의를 향한 예리한 투창이어야 한다. 과연 이 땅에서 단 한번의 ‘누벨바그’나 ‘뉴 시네마’ 운동이 전개된 적이 있었던가?” (‘영상시대’ 동인 선언문 中, 1975.7.18) ‘한국영화의 예술화운동’을 기치로 내건 ‘영상시대’는 다섯 명의 영화감독( 김호선 , 이원세 , 이장호 , 하길종 , 홍파 )과 한 명의 평론가( 변인식 )로 구성된 30대 소장 영화인들의 동인회였다. 변인식은 일찍이 ‘비평가의 자세’란 “영화제작에 영향을 끼치고 관객들의 감상수준을 높일 수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영화평단은 자유항인가: 비평의 모랄과 순수성’ <영화예술> 1965년 12월호) 그는 ‘단문(短文)의 인상비평’이나 ‘사이비 논객’ 이 횡행하는 기성평단의 평론을 신랄하게 비평하거나 수작으로 평가되던 작품들에 대해 비판적 글쓰기(‘< 안개 >는 예술영화인가’, ‘< 장군의 수염 >과 영화의 본질’ 등)를 함으로써 크고 작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가 참여했던 ‘< 화분 > 논쟁’(‘영화적 색맹성: 영화 <화분>이 제기한 문제들’)은 당시 큰 이슈가 되었음은 물론, 한국영화비평사의 주요 논쟁을 넘어 이후 『한국논쟁사』 에 실릴 정도였다. 변인식 은 청소년기 미군부대 근처에 살면서 봤던 할리우드 영화들과 고교시절 스승의 소개로 프랑스• 이탈리아 명화들을 접한 후 영화광이 되었고, 대학시절 4•19를 경험하면서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는 고려대 국문과 재학중 ‘영상’이라는 동인회를 조직하고 <고대신문>에 영화평을 기고하는 한편, 유현목 , 이강천 등의 감독과 이영일 같은 평론가를 초청해 토론회를 벌이기도 했다. 변인식은 이영일이 발행했던 <영화예술>의 신인평론가 추천으로 등단후(‘영화현실과 포토제니: 이탈리안 리얼리즘과 한국영화’ 1965.6, ‘침식당한 사랑의 신화: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론’ 1965.7) 활발한 활동을 하던중, 1968년 서울신문의 제 1회 신춘문예 영화평론 부문에 ‘한국 문예영화의 허점’으로 당선된다. 말하자면 그는 영화산업의 확대와 매체의 증가로 영화평론가에 대한 필요성이 절실했던 한편 비평의 제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1960년대에, 영화전문잡지의 추천과 신춘문예라는 공인된 절차를 두루 거친 첫 번째 평론가였던 셈이다. 변인식은 수십년간 한국영화평단을 함께 이끈 이영일, 김종원 등과는 다소간의 데뷔시차와 이력의 차이가 있다. 이영일, 김종원이 문학에서 출발해 1960년대 이후 <영화예술>, ‘한국영화평론가협회’ 의 주축멤버로 오랜 파트너십을 보여왔다면, 그는 영화인생 내내 고등학교 국어교사로 38년간을 재직해왔고, 1960년대부터 비평활동을 시작했지만 1970년대 들어 더욱 주도적인 활동을 펼쳤다는 점이다. 또한 대학내에서 영화 써클을 만들고 서구영화에 매혹되며 비평과 토론회 등을 통해 공론장을 형성했던 씨네필 출신 평론가의 첫세대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인식 은 부조리한 한국영화의 현실에 메스를 가하는 글쓰기로 1972년 한국 최초의 본격영화평론집 『영화미의 반란』을 출간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그는 “한국영화가 반세기의 역사를 지났음에도 단 한번도 영화미학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거나 반역하려는 의지를 엿볼 수 없었다는” 점을 개탄한다. 이는 전세계의 영화들이 ‘새로움’으로 물결치고 있던 1960•70년대에 최악의 현실로 치달아 가고 있던 당시 한국영화계의 상황에 대한 젊은 평론가의 가차없는 성찰이었다. 이 무렵 그는 소장파 대학교수, 평론가, 저널리스트 20명 정도로 구성된 ‘현대영화비평가그룹(1972년 12월)’을 창립하고 회장직을 맡는데, 이는 하길종 의 < 화분 >의 청룡상 심사를 둘러싸고 보수적인 기존 영화평단과 발생했던 갈등으로 인해 뜻을 같이하는 젊은 동조자들과 함께 새로운 영화를 지향하기 위한 것이었다. 변인식은 또한 1970년부터 발족된 ‘소형영화동호회(발기인: 유현목 , 하길종, 정일성 , 유영길 , 변인식, 최일수)’ 활동을 통해 자신이 재직하고 있던 신일고의 영상을 담은 8mm 교육문화영화 두 편을 각본•감독했다(1972). 소형영화동호회를 통해 배출된 영화감독으로는 배창호 , 장길수 , 신승수 감독 등이 있다. 1975년 누벨바그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이상적 모델로 ‘한국영화 예술화’를 내걸었던 ‘영상시대’ 동인들의 활동은 다양한 방면(신인 연출자/연기자/스탭 선발, 관객운동, 순수영화예술동인지 발행 등)에서 ‘새로운 물결’을 갈망하며 한국의 영화문화를 변화시키고자 했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변인식 에 따르면 1975년에서 78년까지 ‘영상시대’ 기간 동안 동인감독들이 만든 작품 11편중( 하길종 < 여자를 찾습니다 >, < 한네의 승천 >, 이장호 < 그래그래 오늘은 안녕 >, < 너또한 별이 되어 >, 김호선 < 여자들만 사는 거리 > < 겨울여자 > 등) 대다수가 대중소설을 영화화했고, 그들이 지향했던 예술영화, 작가영화에 크게 미치지 못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였다. 변인식이 발행인이었던 계간지 <영상시대>(1977년 여름 창간, 편집위원: 김승옥 , 김화영, 안병섭 , 최인호 , 하길종) 또한 <카이에 뒤 시네마>나 <필름 컬처>를 염두에 두고 한국의 영화문화운동을 꿈꿨지만 2권 발행에 그치는 좌절을 겪었다. 1970년대 ‘영상시대’의 영화운동에 대한 영화사적 평가는 지면을 달리해 논의되어야겠지만 이들의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는 당대 한국영화계가 직면했던 ‘새로운 것과 낡은 것’, ‘예술과 산업’, 그리고 ‘세계적인 것과 지역적인 것’ 사이의 딜레마들이 존재하고 있다. 변인식 은 왕성한 필력으로 40여년 동안 두 권의 평론집(『영화미의 반란』 『영화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과 수십 편의 논문을 쓰고, 현대영화비평가그룹 회장, 한국영화평론가협회장, ‘영상시대’ 동인활동과 잡지<영상시대> 발행, <영화평론> 발행, 한국소형영화동호회, 동서영화연구회, 대학강의, 영화제 심사위원 활동 등을 하면서 2000년 신일고등학교의 교감으로 명예 퇴임했다(홍조근정훈장 수상). 제자들에 따르면 교단에서의 변인식은 학생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액션 배우이자 영화이야기꾼, 한 마디로 ‘영화에 미친 선생님’이었다고 한다. 서구 모던 시네마와 이론들의 강렬한 세례를 받은 변인식 의 비평세계가 한국의 대중적 장르영화들을 논하는 데 있어 얼마나 적절한 것이었는지는 다소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또한 변인식을 비롯한 ‘영상시대’ 동인들이 제기했던 ‘새로움’의 의의와 한계, ‘한국적 리얼리즘’ 전통과의 단절과 지속의 역사성은 1970년대와 이후 영화(비평)사를 구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영화주의적(씨네필)이고 객관적인 비평을 추구했던 그의 비평을 관류하는 비평가로서의 자의식과 논쟁적 글쓰기, ‘영화미학’에 대한 천착 등은 주제비평과 인상비평이 주류를 이뤄온 한국영화평단에 비평정신이 살아있는 글쓰기로서 기억될 수 있을 것이다. / 글: 이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