썬더일레븐 극장판 : 최강군단 오우거의 습격
- 감독
- 미야오 요시카즈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다케우치 준코, 노지마 히로후미 , 요시노 히로유키, 미야노 마모루, 쿠기미야 리에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드러나면서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전 세계는 물론이고 영화계도 큰 폭의 변화를 맞아왔다. 영화 산업 내부에서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드러났고, 그동안 얼마나 적은 수의 영화가 여성의 크레딧을 달고 생산됐는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영화계가 남성들만의 친목과 우정, 그리고 지배 카르텔 안에서 굴러왔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후 변화는 극적이라 할만하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지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나서는 영화들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도 줄어드는 분위기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여성 전기영화 붐이다. 방사능 연구에 혁혁한 공헌을 세워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 < 마리 퀴리 >(마르잔 사트라피, 2019), 멜버른컵이라는 경마대회에 우승한 최초의 여성을 다룬 < 라라걸 >(레이첼 그리피스, 2019), 여성의 정체성을 노래로 승화했던 호주 가수 헬렌 레디의 이야기 < 아이 엠 우먼 >(문은주, 2019),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스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을 네 배우(주로 줄리안 무어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통해 들려주는 <더 글로리아스 The Glorias>(줄리 테이머, 2019), 1960년에서 7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의 무차별 공격에 시달린 영화배우 진 시버그의 이야기 <시버그 Seberg>(베네딕트 앤드류, 2019), 어린 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주디 갈랜드에 관한 < 주디 >(루퍼트 굴드, 2019) 등이 실존했던 굵직한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 전기영화다.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스의 성추문을 그린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제이 로치, 2019)은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실존하는 두 여성과 폭스뉴스에서 일했던 여성들을 일체화한 가공의 여성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으며, 1970년 미스 월드 대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여성들의 < 미스비헤비이어 >(필리파 로소프, 2020)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기영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화제의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Mrs. America>(크리에이터 다비 월러, 연출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엠마 아산테,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 자니크자 브라보, 2020)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걸출한 인물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옴니버스 전기영화'로 볼 수 있다. 이들 전기영화/ 드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실존했던 인물들을 통해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는 온갖 제약을 뚫고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인공을 다루거나(<마리 퀴리> <라라걸>)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을 담아낸다(<아이 엠 우먼> <더 글로리아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미스비헤이비어> <미세스 아메리카>). 상당수가 여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의미 깊다. <라라걸> 같은 경우 여성 스태프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들 여성 전기영화는 그 내용 뿐 아니라 생산 방식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수산나 니키아렐리 감독의 < 미스 마르크스 >도 여성 전기영화다. 이 전기의 주인공은 무려 카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1855~1898)다. 그 옛날 마르크스주의를 익혔던 사람들조차 채 알지 못했겠지만, 엘리노어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 후계자로 여겨지면서 19세기 중후반 온갖 분야에서 열렬한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1855년 런던에서 카를과 예니 폰 베스트팔렌 부부의 일곱째 아이(이중 넷은 사망했다)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사회주의 신동’의 면모를 드러냈다. ‘투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녀는 14살 때부터 <자본론> 저술을 도왔고 16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며 여러 투쟁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성인이 된 뒤로 그녀는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최초의 여성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반열에도 올랐다. 또한 맹아 단계에 있던 여성운동에서도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었다. <미스 마르크스>는 엘리노어 생애의 후반기인 1883년부터 1898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이야기는 카를의 장례식식장에서 시작된다. 이 첫 시퀀스에는 이후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모든 인물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카를부터 그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미 사망한 큰 언니 예니첸의 남편 샤를 롱게와 아들 조니, 또 다른 언니 라우라의 남편 폴 라파르그,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리고 엘리노어의 사랑이자 원수가 되는 에드워드 에이블링까지. 이들 인물을 담은 영화는 세 개의 축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첫 번째는 운동가 엘리노어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급속히 퍼져감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중후반,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적 계승자는 절친 엥겔스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유산 관리권을 물려받으며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됐던 엘리노어 또한 이 '운동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화는 엘리노어가 여러 투쟁에 참여하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모습을 직접 화법으로 보여준다. 엘리노어가 <자본론>의 자본 축적 법칙에 관한 구절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읊는다든지 당대로선 매우 급진적이었던 여성 평등에 관한 연설 장면을 꽤 길게 편집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바가 19세기를 넘어 현재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두 번째는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카를 집에서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했던 데무트에게는 프레데릭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데무트는 죽을 때까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엘리노어는 여자 관계에선 방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엥겔스가 프레데릭의 친부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엥겔스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서 엘리노어는 혼란에 빠진다. 또한 언니 예니첸이 사망한 뒤 자신이 돌보고 있던 조카 조니가 아버지 롱게에게로 가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커진다. 세 번째 축은, 어쩌면 그녀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실질적 남편 에드워드 에이블링과의 이야기다. 엘리노어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당대의 틀을 깨는 파격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는다. 마르크스 가문이나 엘리노어 마르크스에 관한 대다수의 전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에게 아킬레스의 건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곳곳에 설파한 운동가로 기록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엄청난 낭비벽과 쉴 줄 모르는 성편력으로 엘리노어의 삶을 자글자글 갉아먹었다. 이 영화에는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에이블링은 미국 유세여행에서 고급 와인과 꽃을 마음껏 질러대며 비용을 낭비해 이들을 초청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노어가 물려받은 유산 또한 펑펑 낭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노어는 인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에이블링을 신뢰하려 애썼고 그것이 그녀 삶 최대의 불운이었다. 영화는 가뜩이나 힘겨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나날을 살아가던 엘리노어가 아버지의 과거사에 배신당하고 에이블링에게 연달아 결정타를 맞으면서도 분투하지만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사실, <미스 마르크스>에서 아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뚜렷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을 그려서인지 영화는 순간순간 에피소드를 단순 나열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운동가로서의 엘리노어 보다는 한 남성과 가족 관계에 휘둘리는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며, 워낙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다 보니 그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풍부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감독은 나름의 '필살기'를 보여준다. 한때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던 전설적 가수 니코가 1980년대를 맞아 독자적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린 여성 전기영화 < 니코, 1988 >(2017)로 데뷔한 수산나 니키아렐리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 전기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기영화의 한계라 하면 실재했던 인물의 삶이라는 굴레에서 궁극적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일 텐데, 니키아렐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영화적 삶'을 부여하려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후반부 엘리노어가 펑크록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갑갑함과 버젓이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성과 결혼한 에이블링을 보는 괴로움에 둘러싸여있던 엘리노어는 이 장면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벗어버리려는 듯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도록 몸을 마구 내던진다. 어쩌면 진혼 의식이나 살풀이와도 같은 이 장면을 통해 니키아렐리 감독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순간의 해방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 한 장면은 앞서 언급한 여성 전기영화보다 이 영화가 한 발 앞선 지점이며, 어쩌면 이 지점이 앞으로 영화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P.S. 영화 속 ‘살풀이 의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미국 밴드 다운타운 보이즈 Downtown Boys의 음악이다.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에서 사용된 'Waves of History'부터 엥겔스가 사망하는 장면 직후에 흘러나오는 '인터내셔널가 L'Internationale'까지 여러 장면에서 곁들여지는, 좌빨 성향 농후한 이 미국 밴드의 거침없는 사운드는 어릴 적부터 "Go Ahead"라는 인생의 모토를 갖고 살아온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낸다.
일단 감독이 클락 그레그다. 누구냐고? < 어벤져스 >에서 장렬히 전사했지만 TV시리즈 <에이전트 오브 쉴드>를 통해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지키고 있는 필 콜슨 요원이다. 수십편의 영화에서 맹활약을 펼친 바 있는 이 배우가 사실은 작가이기도 하고 또한 감독이기도 하다. 작가로는 딱 한 편의 시나리오를 썼는데 그게 바로 < 왓 라이즈 비니스 >, 로버트 제멕키스의 히트 스릴러였다. 지금까지 감독으로는 두 작품을 남겼다. 그중 첫 번째 작품, 말하자면 감독 데뷔작이 오늘 소개하는 < 초크 >다. 영화를 보기 전에 선입견 팍팍 들어가게 사전 정보를 주입하자면 일단 원작자가 어마어마하다. < 파이트 클럽 >의 원작 소설가인 척 팔라닉이다. 저널리스트 출신인 이 작가의 작품 중 우리나라에 「질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 소설이 이 영화의 원작인데, ‘초크Choke’는 한마디로 이종격투기에 나오는 기술 초크, 그 단어다. 조르기 정도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영화의 중요한 설정을 가리키는 말로, ‘질식’이 더 내용에는 맞는 번역인 셈이다. 사실 감독 클락 그레그는 2008년 < 아이언 맨 >에 등장하기 전까지는 그닥 많은 관객들이 알아보는 배우가 아니었는데, <초크>도 같은 해인 2008년에 나온 작품이다. 위대한 배우와 끝내주는 배우, 그리고 내가 정말 좋아하는 배우가 나온다. 순서대로 안젤리카 휴스턴, 샘 록웰, 그리고 켈리 맥도날드. 영화가 시작되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교실 같은 곳에 둥그렇게 앉아 있는 미국인들. < 파이트 클럽 >의 고환암 환자 모임이 반사적으로 기억 날 것이다. 같은 원작자의 영향이 느껴지는 순간, 모여 있는 사람들의 면면이 ‘섹스 중독자’라는 것을 인지하게 되면 ‘혹시 이 영화는 섹스 중독자 판 파이트 클럽?’이라는 엉뚱한 기대가 버섯처럼 솟아오르게 되는데, 그건 아니다. 아니, 맞을 수도 있다. 어쨌든 샘 록웰이 맡은 주인공 빅터는 성중독자다. 세상의 ‘거의’ 모든 여자들을 자신의 성적 접촉의 상대로 생각하며 그들이 벗은 몸을 항상 상상한다. 이 모임은 치유를 목적으로 하는 곳이지 성중독자들끼리 정보와 기회를 교환하는 곳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빅터는 폭발적으로 섹시한 여성, 이름마저 섹시한 니코와 모임 중간중간 빠져나가 화장실에서 정사를 벌이기도 한다. 사실 빅터는 자신의 증세를 치료할 생각조차 별로 없다. 그저 니코와 만나기 위해서 이 모임을 나오는 것처럼 보인다. 아, 니코로 말할 것 같으면 파스 데 라 우에르타가 분했다. 이 배우가 헤픈 여자를 연기하는 것처럼 설득력 강한 캐스팅은 드물다. 샘 록웰 그렇다면 주인공 빅터는 뭘 해서 먹고 사느냐? 미국의 개척시대를 재현해 놓은 테마파크에서 개척시대 사람인 척 연기하는 일종의 투어 가이드로 살고 있다. 우리나라로 치면 민속촌의 거지, 이장님, 처녀귀신, 광년이 등의 알바가 떠오르는데 그거 맞다. 빅터는 자신의 직업적 커뮤니티 안에서도 수많은 여성들과 성관계를 갖고 있다. 이 파트에 감독인 클락 그레그가 직접 출연한다. 빅터와 그 절친 데니를 눈엣가시처럼 여기는 동료 투어 가이드인 찰리 역이다. 주로 대학생들이 알바를 하는 우리나라의 민속촌과는 달리 영화 속 테마파크엔 배우가 되고 싶었지만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 같은데, 빅터가 딱 그런 케이스다. 수입도 별로 좋지 않고, 삶의 태도도 매우 불성실하며 오로지 머리 속에는 섹스밖에 없는 주인공 빅터는 가끔씩 몫돈이 필요할 때 하나의 쇼를 벌이는데 그건 바로 식당에서 ‘음식물이 기도를 막아 질식하는 척’을 하는 거다. 그러고는 식당을 협박해 돈을 뜯어낸다? 아니다. 그렇게 질식한 것처럼 목을 잡고 주위 손님들을 둘러보다가 ‘딱 맞는’ 사람 앞에서 쓰러져 그 사람으로부터 구해지는 퍼포먼스다. 도대체 왜 이런 짓을 하냐고? 그 사람은 영웅이 된다. 결국 그에게 누군가의 생명을 구했다는 뿌듯함을 선물함과 동시에 그로부터 동정심을 얻어내기 쉬운 상태가 된다. 자신의 생명을 구한 그 사람에게 자신의 가난함과 비참함을 털어놓고 금전적 지원을 얻어내는 것. 아주 오랫동안 해 온 빅터의 장기이며 삶의 변곡점들을 돌파하는 하나의 필살기이기도 하다. 안젤리카 휴스턴 첫 문단에서 안젤리카 휴스턴 이야기를 했는데 왜 아직도 안젤리카 휴스턴 이야기가 안 나오느냐 현기증 난다, 이런 독자들이 계실 텐데 이제부터다. 대배우 안젤리카 휴스턴은 빅터의 어머니 역할로 등장한다. 현재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다. 중증이다. 알츠하이머로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한다. 빅터가 병원을 자주 찾아가는데, 그 이유는 일단 어머니께 효도하는 캐릭터라기보다는 어머니의 영향을 아주 많이 받은 캐릭터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병원의 여러 직원들과 성적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빅터를 주로 자신의 변호사로 생각하고 대화를 나눈다. 어머니는 빅터를 끔찍하게 사랑하는데, 빅터를 알아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 어머니와의 관계도 매우 중요한데, 빅터는 어린 시절 엄마와 떨어져 여러 양부모와 지냈다. 엄마는 치매가 오기 전부터 이미 뭔가 정신세계가 독특했는데, 양부모와 잘 살고 있는 빅터를 찾아와 함께 돌아다니다가 집에 보내고 그런 식으로 살았다. 아버지가 누구인지 절대로 말해주지 않았는데, 빅터는 이제 자신의 그 출생의 비밀이 알고 싶어졌다. 어머니가 이제 얼마 오래 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새로 온 어머니의 담당 의사 페이지는 어머니의 병세가 지극히 악화됐음을 알린다. 이 영화의 매우 중요한 캐릭터가 이 의사 페이지다. 앞서 내가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한다고 말했던 켈리 맥도날드가 맡고 있다. 켈리 맥도날드로 말씀드릴 것 같으면 많은 이들이 미드 < 보드워크 엠파이어 >의 마가렛 역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나에게는 < 트레인스포팅 >에서 이완 맥그리거를 클럽에서 만나자마자 집으로 데리고 간 여고생으로 각인 돼 있다. 목소리가 특히 신뢰감 가는 배우인데, < 메리다와 마법의 숲 >에서 메리다 역을 맡은 배우이기도 하다. 하여튼 의사 페이지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어머니를 치료할 것을 빅터에게 제안한다. 자신의 전공이라는 줄기세포와 관련된 이야기인데 내용누설을 피하기 위해 더 이상 묘사하지 않겠다. 빅터는 어머니의 일기장이 집에 보관돼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것을 찾아낸다. 드디어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는 순간인가 했더니 아니다. 어머니는 이탈리아 사람, 일기는 온통 이탈리아어로 적혀 있다.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아는 의사 페이지에게 어머니의 일기를 맡겨 해석하게 하는데, 빅터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자신이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누군가의 보관된 체세포를 통해 탄생한 그의 클론이라는 사실을. 예측불가능한 스토리와 예측가능한 스토리가 새끼줄처럼 꼬여 있는 가운데 역시 < 파이트 클럽 > 원작자의 솜씨답게 적당히 재치있는 반전까지 도사리고 있다. 영화 < 초크 >는 300만 달러라는 비교적 저예산으로 만들어졌고 선댄스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한 작품이다. 이 상은 누구에게 주어졌느냐 하면 샘 록웰, 안젤리카 휴스턴, 켈리 맥도날드, 그리고 대니 역을 맡았던 브래드 윌리엄 헨케. 영화의 주요 배역들이 열연을 인정받았다. 샘 록웰이 할리우드에서 왜 그렇게 중요한 배우로 평가받는지 모르는 관객들이라면 의외의 한방을 얻어맞을 수 있다. 노년의 안젤리카 휴스턴은 아직도 괴력을 지닌 대배우라는 사실을, 켈리 맥도날드의 차원을 가늠할 수 없는 예측 불허의 연기를 맛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초크>다. 한국에서는 극장 개봉을 한 적이 없고, 오로지 IPTV에서만 만날 수 있다.
... (세 번째 이야기) < 장군의 아들 >은 세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 반지의 제왕 >과 달리 이 세 편은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이면서 서로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사실 내가 할 이야기는 일편에서 모두 다 했어요. 원래는 그런 다음 연출부를 했던 김영빈 감독이 이편으로 데뷔할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이게 흥행을 해도 너무 많이 한 거예요. 나는 다른 영화를 할 생각이었는데 이태원 사장이 나를 설득한 거예요. 이건 이편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라는 게 있는데 그걸 배신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거참, 내가 그 설득에 말려들어간 거예요” 아마 임권택 자신도 당황했던 것 같다. 그는 그저 잠깐 쉬어가며 1960년대 자신을 한번 돌아보면서 자기 자신의 현재를 점검해보고 싶었다, 라고 이 영화를 설명했다. 하지만 대중들은 여기서 어떤 활력을 발견했다. 1987년 민주화 대항쟁(의 승리), 1988년 서울 올림픽(의 순위). 무언가 부글거리는 사회적인 에너지. 거기서 무언가 다가오고 있다는 기분. 무언가, 라는 기대. <장군의 아들>은 그 자리에 도착했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도착인지를 물어보는 것은 또 다른 질문이다. 나는 여기서 단지 임권택의 자리에서만 대답할 것이다. 임권택은 이 장르의 영화, 좀 더 간단하게 <장군의 아들>을 계속 이어나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그건 <장군의 아들> 이전에 자리한 < 개벽 >이 설명하고 있다. 거기서 좀 더 앞으로 거슬러 올라갈수록 확신하게 된다. 반대로 <장군의 아들> 이후로 밀고 나아가도 대답은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장군의 아들> 일편 ‘이후’에 그것을 동일한 제스처로 반복해야 할 때 생긴 것이다. 모순의 자리. 거기서 멈추어도 안 되지만 더 밀고 나아가도 안 된다. 한 가지 가정을 해보자. 만일 <장군의 아들> 이편이 일편과 완전히 다른 태도를 취하면서 갑자기 역사의 고증을 바탕으로 김두한의 실제 모습을 다루는데 집중했더라면 대중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당신은 세 편의 이야기가 예외 없이 일제 강점하에서 멈춘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식민지의 경험. 김두한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해방을 맞이했고, 그런 다음 한국전쟁을 겪었으며, 1965년 국회의원에 당선된 사람이다. 세 편의 <장군의 아들>에서 김두한은 성장하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나이를 먹지 않는다는 문학적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문제는 거기서 생겨났다. 그런 다음에도 이편을 만들어야 한다. 이야기가 모두 소진되자 <장군의 아들> 이편은 이상한 모습으로 성립되었다. 사뮤엘 베케트의 표현. (같은 맥락은 아니지만) 다시 한 번 시도하기. 다시 한 번 실패하기. 다시 한 번 더 잘 실패하기. 거기서 무엇이 더 가능할까. 거기서 무엇을 더 실현시킬 수 있을까. 막다른 골목에서 약간의 우회. 먼저 이 영화는 다시 시작하면서 동시에 일편에 대한 후일담의 형식을 가졌다. 아마도 일편의 대중적인 성공이 이 영화의 줄거리와 등장인물에 대한 하나의 약속이 되었을 것이다. 세 가지 좌표. 이것은 지켜져야만 한다. 동시에 너무 여기서 멀리 벗어나면 안 된다. 그렇지만 이 줄거리를 반복하면 안 된다. <장군의 아들> 이편은 이 삼각형의 긴장 어딘가에 놓여있다. 이때 무엇이 이편을 작동시키는 힘이 될 수 있었을까. 전차(電車). 아니, 차라리 더 단언적으로 < 장군의 아들 > 이편의 영화적 주인공은 전차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전차는 조선시대 말 고종때 한양에 1898년 12월 25일 지금의 서대문에서 청량리에 이르는 구간이 개통하면서 처음 모습을 보였다. 이듬해 다시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2호선이 열렸다. 이 구간을 1900년 1월 원효로 4가까지 연장하였고, 1901년 남대문에서 서소문을 거쳐 서대문에 이르는 구간을 완성하였다. (그런 다음 이 구간은 여러 종점을 늘려가면서 계속 확장되었다) 전차는 서울 시민들의 중요한 교통수단이 되었지만 1969년에 이르러 다른 교통수단들과 도로 점유율의 실용성 문제로 전면 철거되었다. (그리고 당신이 잘 아는 것처럼 곧 뒤이어 지하철 공사에 착공하게 되었다)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보여주는 전차는 (아마도) 2호선인 종로에서 남대문에 이르는 노선일 것이다. 그러나 한성은 경성을 거친 다음 한국 전쟁 때의 폭격, 1960년대 이후 끊임없는 재개발을 거치면서 원래의 길목을 알아볼 수 없게 바뀌었기 때문에 정확하게 이 노선이 어떻게 이어지는 지에 대해서 나는 알지 못한다. 아마도 1954년에 처음 서울에 올라온 (다음 여기 머물면서 충무로를 드나들며 제작부를 거쳐 연출부를 시작하고 1962년에 첫 영화를 찍은) 임권택 은 (김두한이 종로통을 풍미하던 일제 강점하는 아닐 지라도 여전히 남아있는) 이 전차가 통과하는 길목(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물론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무대가 된 경성의 지리를 정확하게 재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사에 따르면 <장군의 아들> 일편과 이편 사이의 시간적 간격은 6개월이다. 김두한은 큰형님 김기환을 구하기 위해 혼마찌깡에 달려가 기꾸치에서 일대접전을 벌리고 김동회를 물리친 다음 마지막 장면에서 (일본 경찰에 붙어 앞잡이 노릇을 하는 창씨 개명한 한국인) 구니모또 형사가 호명하는 데서 끝난다. 그런 다음 이편은 김두한이 (아마도 그로 인해 구치소 생활을 한 다음) 경찰서를 나서는데서 시작한다. 종로패는 김두한에게 큰 인사를 드리면서 “형님이 들어가신 지” 육 개월이 되었다고 우리에게 일러준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수많은 종로에서의 싸움을 보면서 한 번도 전차를 본 적이 없다. (이미 연표를 제시한 것처럼) 전차는 역사적으로 그 사이에 들어선 교통수단이 아니다. 정확하게 무대가 된 시간적 배경을 거의 설명하지 않지만 이야기 안의 시간적 지표 중의 하나인 박계주 작가의 <순애보>를 미루어 짐작컨대 <장군의 아들> 이편의 시간은 1940년 그해 여름일 것이다. 박계주는 <순애보>를 매일신보(每日新報)에 1939년 1월 1일부터 6월 17일까지 연재하였고 그런 다음 같은 해 10월 매일신보사에서 단행본으로 출판하였다. <장군의 아들> 이편의 계절은 여름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김두한은 어린 남녀학생을 불러 박계주의 <순애보>를 읽게 한 다음 그걸 들으며 눈물을 훔친다. 약간 셈을 하고 싶다. 김두한은 실존 인물이며, 1918년 5월15일에 태어난 그가 23살 때의 이야기이다. <장군의 아들>은 이제 막 어른이 되려는 소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장군의 아들>에 넘쳐나는 청춘 예찬의 기쁨이라는 감정의 기호들. 어렴풋한 사랑. 서투른 첫 경험. 되찾은 우정. 혹은 은혜는 갚아야한다는 공명과도 같은 공감. 왜 김동회가 김두한에게 갚아야 할 마음의 빚에 대해서 하야시가 감흥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말하자면 잘 설명되지 않는 내밀한 공동체. 종종 그들의 배움은 불완전하고 서로에게 베푸는 예절은 때로 불가능한 규칙인데도 불구하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 그들 사이에 때로 적대감은 어떤 우애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 안에서 장르의 규칙은 그들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청하는 배움 때문에 무너지기도 하지만 그 위반 자체가 <장군의 아들>에서 우리들에게 다소 기괴하게 여겨지는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순간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장군의 아들>이 단지 1991년에 갑자기 부활한 1960년대 ‘다찌마와리’ 영화의 변주라는 지적에서 멈추면 안 된다. 이 영화가 우리들을 건드리는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가 장르를 지나친 다음 불가능한 가능세계에 가 닿으려고 애를 쓸 때 문득 마주치는 파토스의 헌신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이 세 편의 연작을 공격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다. 그저 이 세 편이 일제 강점하라는 무대를 빌려 폭력을 심미적인 차원으로 이동시키고 있다고 말하기만 하면 된다. <장군의 아들>에 나오는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시간을 헛되이 쓰고 있는 중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제 강점하의 경성 종로에서 민족의 자존심을 지키고 있다고 믿으면서 사실은 상인들에게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돈을 뜯어내는’ 중이다. 착각의 왕국. 그들은 자신들이 협객이라는 착각에 빠진 깡패들이다. 도착적인 위로에 심취한 폭력. 하지만 그걸 누가 모를까. <장군의 아들>에 냉소적으로 다가갈 때 우리는 차라리 이 영화를 보지 않는 편이 낫다. 핵심은 반대로 현실에서 불가능한 삶의 긍정적인 태도(중의 일부)가 왜 일제 강점하를 무대로 한 가상세계에서는 성립되느냐는 것이다. <장군의 아들>을 채우는 것은 어떤 현대적인 해석도 배제한 채 거기 머물고 있는 향수이다. 이때 여기에는 나른한 낭만주의와 갑자기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불화의 도전이 있다. 이 불화는 전적으로 과거의 가치 기준이 오늘날 우리 시대에는 왜 적용되지 않는지에 대한 질문에서 나온 것이다. <장군의 아들>은 단지 그 시대적 배경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그 가치의 체계 안에 순응하는 자리에로 반복적으로 호명하는 영화이다. 여기에는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한 충만했다고 할 만큼의 탄식에 가득 차서 거기에 머물고 싶어 한다는 인상이 도처에 남아있다. 다소 우스꽝스럽긴 하지만 <장군의 아들>에는 도올 김용옥이 그려낸 동양학 안에서의 철인(哲人)의 철인화(鐵人化)라고 부를만한 육화가 있다. (김용옥은 일편의 시나리오에 관여했다) 물론 김용옥은 이 영화가 장르영화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장군의 아들>은 흥미롭게도 가장 세속적인 밑바닥의 삶을 장르화 시킨 다음 그들에게 규칙의 윤리에 대해서 존중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이편은 김용옥 대신 (희곡작가이자 연극 연출자인) 이윤택이 이어서 시나리오를 썼지만 여전히 일편에서 세워진 불화의 바탕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무엇도 건드리지 않으면서 거기서 더 밀고 나아갈 때 영화는 더할 나위 없이 기호적이 되어간다.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기호학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를 성립시키는 시청각 기호들. 그것들만으로 만들어내는 형식들의 강도. 부서져나가는 것을 견디는 강도의 내밀성. 어떤 점에서 <장군의 아들> 이편은 세 편의 영화중에서 오로지 형식만 남은 영화, (만일 이런 표현이 허락된다면) 형식만으로 견디는 영화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그 내밀성의 중심에 전차가 있다. 우선 배치의 문제. 전차는 종로 한복판을 계속해서 가로 지르고 있다. 이 전차는 화면을 기준으로 가로로만 움직이고 있다. < 장군의 아들 > 이편에서 단 한 번도 이 기차가 세로로 오가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실용적인 설명. 이 세트장은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는 것이 전부이다. 그러므로 각도를 벗어나면 곧장 세트의 헐벗은 이면이 드러날 것이다. 이때 이 영화는 두 개의 카메라 위치를 가질 수 있을 뿐이다. 종로 한복판(이라고 가정된) 사거리의 교차점을 중심에 놓고 세로축을 기준으로 화면을 가로 지르는 전차 철도의 이쪽과 맞은편이라는 두 개의 공간만을 사용할 수 있다. 같은 설명의 다른 판본. 그렇게 되면 오른쪽과 왼쪽에는 카메라가 들어서지 못한다. 단지 이것은 좌우 화면만을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세로 축 중앙에서 45도 안에서만 카메라가 이동할 수 있으며 그 바깥을 사용하여 중앙 교차점을 기준으로 마름모꼴을 형성하여 움직이는 배치도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좀 더 간단한 설명. 종로 한복판은 네 개의 꼭지점 중 세로축의 양쪽 끝을 포기하고 가로축의 위와 아래만을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전차는 <장군의 아들> 이편에서 스펙터클하지만 동선을 진행하는 과정의 블랙홀이 될 수밖에 없다. 드러난 시각적 스펙터클. 과정 안에서만 보이는 시각적 블랙홀. 첫 등장. 시작하면 (혼마치깡의 하야시 구미(組)들과 김동회를 먼저 소개한 다음) 구치소에서 나온 김두한은 전차를 타고 종로에 돌아온다. 이 장면은 김두한의 전차에 대한 영화적 전유를 과시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그러나 그 곁에 구니모토 형사가 타고 함께 도착한 다음 이 전차로 이동할 수 있는 김두한의 (경성 내에서의) 반경거리를 줄거리 안에서 제한한다. 김두한의 신분에 대한 설명. 그리고 이야기의 경제성. 두 번째 등장. 김두한이 구치소에서 나오자 이튿날 아침 일찍 하야시 구미(組)가 종로에 쳐들어올 때에 전차가 지나간다. 이때의 전차는 명백히 와이프(wipe) 효과를 내면서 화면을 지워나간다. 이들은 운당여관에서 잠든 김두한과 종로패를 기습하여 승리를 거둔 다음 김두한을 종로 한복판에 무릎 꿇린다. 그때 하야시는 지나가는 전차를 멈춰 세우고 김두한의 굴욕적인 패배를 전시한다. 같은 장면의 다른 설명. 하야시는 종로통 조선상인들 앞에서의 이 부끄러운 순간을 지우려는 와이프 효과를 멈춰 세우고 그 시간을 할 수 있는 한 연장한다. 이야기 바깥에서 주인공을 돕기 위해 나타난 영화적 효과. 그것을 중단시키는 또 다른 등장인물의 요구. 세 번째 등장. 하야시와 (뒤이어 구치소에서 나온 종로패의 큰 형님) 김기환은 혼마치깡 사쿠라(櫻) 카페에서 굴욕적인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때 김두한은 술에 취해 모자를 두고 온다. 그 모자를 돌려주러 사쿠라 카페의 주인 세츠코가 종로를 찾아올 때 전차를 타고 온다. 네 번째 등장은 반복이다. (롱테이크로 연출된) 김기환이 종로패 부하들에게 수모를 당한 다음 떠나자(마자 기다린 것처럼) 김두한과 세츠코를 태운 전차가 도착한다. 전차는 마치 김두한만을 위해 운행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다섯 번째 전차의 등장이 내가 설명하려는 장면이다. 김두한을 찾아온 김동회는 종로 한복판에서 대결을 신청한다. 전형적인 서부극의 컨벤션. 두 가지 지적. 첫째, 일편에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은 이야기의 절정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편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고 37분이 되었을 때, 그러니까 영화의 사분의 일이 지나자마자, 둘을 마주치게 만든다. 말하자면 이편에서는 김동회가 중심에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 대결 이후 곧 이 인물이 이야기 바깥으로 나가게 될 것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대결 이후 김동회가 즉시 바깥으로 빠져나가지는 않았지만 중심의 외곽을 맴돌다가는 마지막 종로에서의 집단 대결 장면이 오기 전에 경성을 떠나 만주로 간다. (그런 다음 삼편에서 만주로 도망친 김두한과 다시 만난다) 둘째, 이 대결은 예를 갖춘 대결의 절정에 해당한다. 장르에서 언제나 절정은 맨 마지막까지 숨겨두는 법이다. 이걸 서둘러 보여줄 때 이제 < 장군의 아들 >에서 예(禮)의 시대가 끝났음을 알리는 것이다. 김동회와의 대결이 끝나자 이편에서는 마치 한 시대가 끝난 것처럼 일편과 같은 협객들의 예를 갖춘 대결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다. 돌아온 김두한은 평화를 깨고 종로 주변의 선배들을 찾아다니면서 세금을 요구한다. 선배들은 대결에서 패배했을 때 자신의 ‘동생’들을 맡기고 ‘나와바리’를 떠나는 대신 (일편과 달리)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거기서 연명한다. 이제 약육강식의 법칙만이 이편을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이 대결 이후에 김두한은 더 이상 김동회와 대결할 이유가 없다. 그들은 이 힘겨운 대결에서 얻을 게 없다. 과잉적인 제스처 속에서 선택된 태도. 더 이상 그것을 하지 않을 때 언제나 거기에는 그것을 하지 않는 이상의 이유가 있는 법이다. S#_1 S#_2 S#_3 S#_4 S#_5 S#_6 S#_7 S#_8 S#_9 S#_10 S#_11 S#_12 S#_13 S#_14 S#_15 신기한 첫 장면( S#_1). 김동회가 김두한과 대결할 때 그들이 종로 한복판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다짜고짜 둘이 마주선 것을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시작한다. 말하자면 이 쇼트는 마치 다음 쇼트와 순서가 뒤바뀌었거나 앞질러 나온 것처럼 등장한다. 그런 다음 장면에서( S#_2) 여기가 종로 한복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master_shot) 서로를 마주보면서 자신들의 동선을 원형으로 그려 나갈 때 이 모든 상황에 무심하다는 듯 느리게 두 대의 전차가 양쪽으로 마주보고 온 다음 서로 교차해서 지나간다. 물론 그 화면 효과는 우리들이 보고 싶어 하는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 장면을 정확하게 가로 막은 다음 다시 무대의 막이 열리듯이 그 둘을 다시 보여주면서 각자 제 갈 길을 따라 이동한다. 설명의 반복. 화면 안에서 다시 화면을 만들고(re_cadrage) 두 대의 전차는 화면을 지운 다음 다시 연다. (wipe_in_out) 그때 카메라는 이 모든 움직임을 허용하기 위해서라는 듯 둘이 마주보는 자리로부터 멀리 떨어져서, 전차가 교차하는 길목을 넘어서, 그런 다음에도 구경꾼들로부터도 더 멀리 떨어져서, 아마도 이 장면에서 가장 먼 구경꾼의 자리에 머문다. 김두한과 김동회, 이 둘은 이때 아무리 격렬한 대결을 벌인다 할지라도 (전차가 교차하는) 사거리 너머로 넘어오지 못한다. ( S#_3) 왜냐하면 이 둘이 그걸 넘어오기 위해서는 사거리의 저편으로부터 이편으로 넘어온다는 걸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을(bridge_shot) 피할 수 없는데 그때 왼쪽 혹은 오른쪽으로 이어진 세로의 방향과 마주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걸 보여주려면 방법은 하나밖에 없다. 거기에도 세트를 지어야 한다. 임권택 은 먼저 세트의 조건을 받아들인다. 남은 방법은 그들의 대결을 저 교차점으로부터 넘어오지 않게 진행하는 것이다. 이 씬에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액션 연출 자체는 간단하다. 그러나 전차가 교차하고 있는 종로 한복판에서 세트를 인정하고 그것을 성립시키는 것은 단지 이야기의 안에 들어온다는 문제가 아니다. 이 공간이 장소로서 구멍이 뚫린 결함을 지닌 사각형이며 두 명의 벡터는 서로의 힘을 자유로이 사용하면서 이 공간의 영화적 한계와 완전히 무관하게 활동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때 이 공간은 어떤 수단을 써서 이들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묶어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만들면 즉각적으로 한계가 드러나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임권택은 먼저 여기에 하나의 가상원을 그린 다음(imaginary circle) 김두한과 김동회가 여기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만든다. 전차가 교차하는 선을 넘으면 안 된다. 그러나 그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종로 한복판을 가로로 가상선을 그은 다음(imaginary axis) 전차가 교차하는 세로선을 180도로만 오고 간다. 이 공간을 임권택의 장소라고 부를 수는 없겠지만 나는 몇 번이고 임권택이 세트를 세운 다음 그 공간에 들어가서 제일 먼저 자기에게 주어진 조건의 제한을 재빨리 받아들인 다음 동선과 시선을 분리하여 이야기의 줄거리가 진행되는 작은 공간과 그것을 바라보는 큰 공간으로 만든 다음 두 개의 공간을 조립하는 방식을 현장에서 혹은 영화에서 보았다. 이때 둘 사이를 보충하는 것은 물론 영화를 보는 우리들이 자발적으로 시선의 결함을 메우는 상상적인 지도 그리기의 능력이다. 이때 약점은 시선을 구부려서 사용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원과 직선만이 활동할 뿐이다. 임권택은 하나의 시선을 더한다. 그건 누구의 시선도 아닌 영화의 시선인데 물론 그 쇼트는 대결하는 둘을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것이다. 자, 이제 우리는 이 대결 장면의 첫 쇼트를 설명하게 수 있게 되었다. 명성바에서 종로 한복판으로 갑자기 옮겨왔을 때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본 첫 장면( S#_1)은 이 시퀀스의 전체 운동을 위한 마스터 쇼트이다. 어디서 시작할 것인가. 그때 기준은 이야기가 아니라 그 시퀀스를 성립시키는 역량의 존재론과 연관 지어진다. 언제나 유기적인 쇼트들의 활동. 임권택은 쇼트가 문득 차원을 이동하여 견인되거나 혹은 반대로 갑자기 뒤로 물러나서 측량되기를 원치 않는다. 변화하는 전체 안에서 던져진 시간은 무엇을 표현하는가, 라는 질문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 마치 교차선 너머로 온 것에 스스로 깜짝 놀라기라도 하듯이, 혹은 그 자리에 대한 반작용이 있기라도 한 듯, 김두한과 김동회가 서로 주먹을 교환하고 동시에 나가떨어질 때 카메라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 위에서 아래로 두 개의 힘을 내려다본다. ( S#_4) 그러자 다시 마치 앞의 쇼트가 우리들의 시선을 방해하기라도 한 듯이, 그게 마치 일시적으로 디테일을 보기 위해 삽인 된 쇼트이기라도 한 양(insert_shot), 거의 동일한 위치로 다시 한 번 반발하듯이 앞의 자리로 돌아온다. (S#_5) 이때 김두한과 김동회, 이 두 개의 힘이 시선의 망에 사로잡혀 있음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구경하러 온 종로통 상인들이 구경꾼들 사이에 끼어든다. ( S#_6) 겹겹이 둘러싼 시선. 하지만 이때 이들의 자리가 어딘지는 분명치 않다. 우리들이 할 수 있는 추론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이 시선을 선행한 장면이 위에서 아래로 찍었기 때문에 이 장면의 시선이 45도로 세워졌다 하더라도 그건 거의 의미 없는 규칙이다. 물론 우리는 김두한의 후견인들이라 할 종로 상인들이 서 있는 자리 뒤편의 상점들을 미루어 짐작해서 길 건너편 왼쪽 자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영화의 규칙 안에서 얼마든지 배신이 허용된 설명이다. 이 짧은 시선의 쇼트로부터 재빨리 영화는 다시 김두한과 김동회가 대결하는 그 장소에로 돌아온다. 하지만 좀 더 가깝게, 좀 더 안으로 다가간다. ( S#_7) 임권택은 여기서 두 개의 리듬을 번갈아 교차시킨다. 하나는 김두한과 김동회를 멀리 보여준 다음 다른 쇼트와 번갈아 되돌아올 때마다 계속해서 앞으로 다가가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그 둘을 바라보는 시선의 자리를 유지하면서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이 만들어내는 원을 포함하면서 고립시키는 것이다. 이때 두 개의 리듬이 모두 영화로만 성립하는 운동의 교차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여기에 두 개의 리듬은 어느 것도 이야기에 매달리지 않는다. 아니, 차라리 이야기 바깥에서 영화를 진행하기 위해서만 필요한 요구에 응답한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 기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순서대로 오가면서 다른 한편으로 자꾸만 새로운 힘을 더해간다. 더 들어가자마자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 이번에는 구니모또 형사가 새로이 이 시선의 덧셈에 끼어든다. ( S#_8) 나는 이 편집의 순서에 대해서 지나칠 정도로 논리 정연한 것이 아닌가, 라는 의심이 있다. 이를테면 임권택은 이미 < 길소뜸 >에서 단 하나의 장면도 예외가 없는 논리의 세계를 보여주었다. 그게 지나치게 엄정해서 거의 숨 막힐 정도로 진행된 순서. 김두한과 김동회를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의 쇼트가 있다. 하나는 종로 상인들의 시선이고 다른 하나는 구니모또 형사의 시선이다. 이때 왜 앞의 것이 뒤에 오면 안 되는가, 라는 질문이 기다리고 있다. 대답은 다음 쇼트이다. 갑자기 김두한과 김동회를 이제까지 보았던 자리에서 뒤집어서 반대의 방향에서 그 둘을 바라보고 있다. ( S#_9) 단순하게 기술적으로 말하겠다. 이건 넘어갈 수 없는 선을 그냥 넘어간 것이다. 당신은 그게 지나치게 도식적이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나는 영화에서의 선이라는 도식은 문법에 속한다고 대답할 것이다. 오히려 당신의 걱정은 이걸 지속적으로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면 도식적인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해야 옳다. 그리고 물론 임권택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문제는 지나치게 잘 알고 있다는 것이다. 두 개의 힘을 향해 다가가던 리듬을 갑자기 중단하고 좌표 안에서 반대의 자리에로 건너올 때 거기에는 그 쇼트를 잡아당길 수 있는(attractive) 돌발적인 변화의 새로운 차원을 더해야만 한다. 이때 하나는 김두한에게 긍정적인 관계의 쇼트이고 다른 하나는 부정적인 관계의 쇼트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구니모또 형사의 쇼트는 단지 서로 다른 시선의 요구에서 생겨난 것이(일 뿐만) 아니라 바로 다음 쇼트의 반대의 자리, 종로 한복판의 세로 선을 따라서 앞으로만 진행되던 카메라를 반대 방향으로 뒤집기 위해서 필요해진 반대의 자리에 놓인 인물(antagonist)의 쇼트이다. 두 개의 시선. 두 개의 반대의 힘. 그때 형식은 이야기를 경유해서 영화를 일시적으로 중단시킨 다음 그 반작용의 힘으로 순식간에 반대의 자리에로 넘어온다. 이때 이 쇼트는 이 시퀀스 전체에서 가장 이상한 구도로 보여 진다. 약간 위로 올라가 있지만(high_angle) 이와 비슷한 구도로 보았던 장면( S#_2)의 맞은편에서 찍은 것 같은 효과(reverse_shot)를 구태여 피하고 있다. 임권택은 이 쇼트를 음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지금 이 둘 안으로 더 가까이 들어가야 하기 때문이다. 이 시퀀스가 끝나면 이제 이 둘 사이에서는 새로운 우정(과 예기치 않은 한 여자의 등장으로 인한 본의 아닌 패배)의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더 파고 들어가야 하기라도 하듯이 서로 순식간에 주먹을 교환하는 김두한과 김동회를 따라 더 가까이, 그저 주먹을 휘두르면 맞을 것만 같은 거리까지(medium_shot) 다가간다. ( S#_10) 대결과 시선 사이의 기계적인 교환. 다음 장면은 다시 구니모또 형사가 바라보는 쇼트로 돌아온다. ( S#_11) 임권택은 이 교환의 도식을 지키면서 한편으로 기계적인 반복이 가져올 수 있는 구태의연함을 하여튼 피하고 있다. 이 반복은 재빨리 돌아가는 대신 반대로 더 멀리 뒤로 물러난다. 물론 아무리 멀리 물러나도 전차가 교차하는 길 건너편 이 길목을 빠져나가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우리는 그 자리에서 두 사람의 대결을 보았다. ( S#_2) 임권택은 두 사람을 좀 더 잘 보고 싶어 하기라도 하듯이 한껏 위로 올라간 다음 그걸 전봇대에 올라가서 구경하는 아이의 뒤에 서서(over_the_shoulder_shot) 바라본다. ( S#_12) 그 시대의 구경의 방식. 구경의 자리. 그 시대의 풍속. 낯선 위치를 시대 안에 자리 하기. 가장 멀리 빠져나간 다음 쇼트는 이 대결에서 가장 가까이까지 다가간다. 두 개의 클로즈업. 김동회( S#_13)의 얼굴과 김두한의 얼굴( S#_14). 마치 가 닿을 것만 같은 거리. 하지만 동시에 이 두 개의 쇼트가 유일하게 이 두 사람을 하나의 쇼트로부터 둘로 찢어낸 분리의 절단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 다음 맨 처음, 이 대결이 시작했을 때의 첫 번째 자리, 다시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서 재빨리 둘 사이의 마지막 주먹을 교환하고 김동회가 쓰러진다. (S#_15) 가장 단순하게 보는 방법. 김두한과 김동회의 정정당당한 대결은 김두한의 승리로 끝났다. 시나리오의 순환에 따라 설명하는 방법. 여기서 김두한이 지면 이야기는 더 이상 진행이 안 된다. 게다가 그것은 관객들이 기대하는 것이 아니다. 대결에서 지면 김두한은 규칙에 따라 종로를 떠나야 하고 종로패는 하야시 구미(組)의 아래로 들어가야 할 것이다. 미처 대결도 하기 전에 여기서 김두한의 승리를 누가 의심할까. 이때 단 한 사람, 임권택은 의심스럽게 쳐다본다. 하나의 쇼트라는 경기장 안에서 반복적으로 함께 활동하는 두 힘을 두 개의 쇼트로 찢어낼 때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는 데도 김두한을 보여준 다음 김동회를 보여주는 대신 그 반대의 순서를 선택한다. 나는 이 영화가 장르영화라는 사실을 환기시키고 싶다. 장르의 규칙. 컨벤션이라는 약속. 이때 대결의 장면에서 리듬은 두 개의 방향을 갖는다. 순방향과 역방향. 김두한에서 김동회에로 흐르는 대신 김동회에서 김두한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 주인공을 압도하는 맞은 편 대결하는 상대방. 우리는 일편에서 김동회가 마지막 순간 김두한과의 대결에서 갑자기 그 둘 사이의 긴장을 찢고 들어오듯이 외치는 목소리, “두한아, 넌 조선의 자존심이야, 지면 안 돼, 저 놈은 쪽바리다, 비록 조선의 피가 흐른다지만 왜놈들 개 노릇을 하고 있잖아, 죽여라, 죽여”라는 외침에 갑자기 대결을 포기해버린 것처럼, 좀 전과 마치 다른 사람인 것처럼, 맥없이 김두한에게 일방적으로 맞고 쓰러진 것을 보았다. 여기서는 갑자기 쇼트의 순서에서 불협화음을 만들어낸 다음 이 두 사람의 대결을 오로지 바라볼 수 있을 뿐인 자리, 그 둘 사이의 대결에서 어떤 감정적인 교환도 바라볼 수 없는 애매한 자리에로 옮겨간 다음 이 대결을 마무리 한다. 가장 시시하게 대답하는 방법. 그건 두 사람의 (무술) 대역을 보여주지 않을 수 있는 안전한 위치에요. 단지 그것뿐일까. 나는 그렇게 연출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없이 두 사람 사이의 액션을 진행한 연출의 예로 세 편의 < 장군의 아들 >로부터 열 개 이상의 시퀀스를 제시할 수 있다. 임권택은 우리를 모호한 자리로 데려간 다음 단지 결과만을 보여주면서 일편의 여운을 고스란히 남겨 놓는다. 왜 그렇게 해야만 했을까. 김동회는 이 대결이 끝난 다음 무언가 깊은 생각에 빠진다. 그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물론 끝내 설명하지 않는다. 아마도 대결 직후에 김두한이 위로하기 위해 데려간 명성 바에서 우연히 마주친 송채환을 보고 한눈에 사랑에 빠져들었고, 그럼으로써 다른 세계에로 도약할 준비를 하는 순간이라고 설명하고 싶을지 모른다. 하지만 김동회의 패배는 송채환을 만나기 전의 일이다.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지만 그런 다음 김동회는 자기의 손가락을 자르고 하야시 구미(組)를 떠나 만주로 간다. 무언가 여기에는 잘 설명되지 않는 상위의 관점 같은 것이 있다.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거기서 다른 세계가 자기의 고유한 성질을 가지고 생겨나는 것만 같은 순간. 이미 주어진 세상을 다시 재구성하는 것만 같은 단절. 그렇게 함으로써 이미 주어진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는 새로운 이야기의 법칙이 생겨난다. 나는 미처 감흥이 사라지기 전에 < 일대종사 >에로 돌아오고 싶다. 내가 전차를 이야기하는 순간 이미 당신은 눈치 챘을 것이다. 여기서 다루려는 장면은 엽문이 (홍콩에 잠시 머물렀던) 궁이를 찾아와 궁보산의 영정에 인사를 한 다음 “궁가 64수를 보여주시오”라고 청한 다음 시퀀스이다. 엽문이 궁이에게 1937년 동북에 있는 높은 산을 찾아가려 했지만 전쟁이 나는 통에 찾아가지 못하고 외투는 저당 잡힌 채 단추만 남았다면서 책상에 단추를 올려놓고 그녀에게 밀어 넣자 궁이가 그걸 만지작거리면서 “엽선생, 십년 전 섣달그믐 밤, 내가 어디 있었는지 아세요?”라고 마치 자문하듯이, 탄식하는 것처럼 말한, 그 다음 시퀀스이다. 그러면 이야기는 십년 전으로 갑자기 옮겨간다. 기차역이 보이고 “1940년 섣달그믐 밤 동북” 이라는 자막이 뜬다. 궁이는 아버지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제자 마삼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금 진천 북역에서 기다리는 중이다. 아마도 오늘은 고향에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타야할 것이며 그렇다면 여기에 오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하늘에서 눈이 내리기 시작한다. 시계는 11시 28분을 가리키고 있다. 전구 불빛이 깜빡거리고, 사람들은 고향 가는 길에 발길을 재촉한다. 난로는 장작을 때우면서 활활 타고 있지만 아무런 위로가 되지 않는다. 왕가위는 한껏 기차의 도착을 늦추면서 시간을 음미한다. 기다리는 시간. 서로 다른 성질의 쇼트가 번갈아 오가기 시작한다. 세상사에 관심도 없는 눈발. 궁이의 복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의 고향길. 제 시간이 되자 기차는 천천히 도착한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알지 못하지만 주인 곁에서 한껏 긴장한 원숭이. 일본군 점령하의 전구는 마치 금방이라도 꺼질 듯 깜빡 거린다. 역사의 기호들. 모든 것이 한 자리에 모여들 때 그 모든 쇼트들은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아니라 기차의 도착과 출발에 따라 서로 연결되고 분리된다. 슬로우 모션과 스텝 프린팅의 교차. 서로 다른 속도. 종종 이미지들은 뭉개지고 그때 인물들은 그저 형상만 어른거리듯 지나친다. 카오스처럼 보이면서도 기계 톱날처럼 서로 연결된 편집의 리듬. 그 안에서 세 개의 힘이 서로 각자의 법칙에 따라 활동하기 시작한다. 하나는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눈이다. 이 눈은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바닥에 쌓여만 간다. 종종 많은 액션 활극들은 그렇게 눈이 내릴 때 바닥이 매우 불안정하다는 걸 이용하기도 한다. 때로 미끄러지는 헛발질. 왕가위는 그런 따분한 클리쉐를 여기서 활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은 무술의 고수들이기 때문이다. 그 대신 눈은 쇼트들 곳곳에 스며들어서 섣달그믐 추운 겨울날 한기를 ‘보여’준다. 두 번째 힘은 마삼이 타고 가야 할 기차의 도착과 출발이다. 이때 왕가위는 궁이가 기다리는 대합실을 왼쪽에 설정하고 마삼이 오는 역의 입구를 오른쪽에 배치한 다음 기차를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들어오게 만든다. 마삼은 이 기차를 타야 고향에 가서 만두를 먹을 것이다. 기차가 도착하는 것을 가장 먼저 알아채는 것은 원숭이이다. 역 벤치에 앉아 눈을 맞으며 기다리는 궁이의 집사가 쓴 모자의 털이 흩날리기 시작한다. 돌아보는 집사. 대합실 창문에 비치는 기차의 불빛. 초조하게 궁이의 주변을 이동하는 카메라. 하지만 궁이는 미동도 앉고 앉아있다. 신호등을 들고 눈발을 맞으며 역무원이 막 들어오는 열차를 맞이하러 간다. 들어오는 열차. 이때 왕가위는 기차가 들어오는 것을 단지 소리만으로도 간단히 알려줄 수 있는데 (물론 더 간단한 방법은 그냥 역에 들어오는 기차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걸 누가 모를까?) 그 위에 음악을 덮은 다음 기차의 도착을 간접적인 이미지로 보여준다. 세 번째 힘. 기차의 도착에 맞춰 마삼이 도착한다. 궁이와 마삼의 대결. 마삼이 도착하자 멈춰있던 궁이가 활동하기 시작한다. 이때 조각난 세계가 갑자기 일사불란하게 하나로 모여들기 시작한다. 사방으로 흩어진 시선이 하나로 모여들고 그 중심에 궁이와 마삼이 있다. “빚 독촉보다 더하군. 섣달 그믐날 집에도 못가게 하고” 궁이는 마삼에게 그 기차를 탈 수 있는 기회를 가져갈 것이다. 그것만이 궁가의 무술을 되찾는 방법이다. “만두는 솥에 있지만 넌 못 먹을 걸, 제를 지낼 놈은 제를 지내고 밥을 먹을 놈은 밥을 먹듯이 해야 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지, 궁가의 것을 돌려받겠다” 이 두 개의 시퀀스는 전차 혹은 기차를 사이에 놓고 진행하는 대결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규칙도 동일하다. 한쪽이 쓰러지면 끝난다. 이 두 개의 대결은 공개적이며 구경꾼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다. 심지어 이 두 개의 대결은 (물론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아마도 같은 해, 1940년 단지 서로 다른 장소에서 벌어졌을 뿐이다. 차이라면 < 장군의 아들 > 이편은 종로 한복판 한여름이었고, < 일대종사 >는 중국 동북부의 기차역 정도이다. 하지만 그 둘은 단지 서사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완전히 다른 관계에 의지하고 진행된다. 그러므로 두 개의 시퀀스는 같은 방법으로 설명할 수 없다. 나는 <장군의 아들> 이편을 중심에 놓고 <일대종사>를 곁에 놓는 방식으로 생각하는 중이다. 비스듬하게 바라보기. 무대의 연출이라는 면의 좌표에서 궁이와 마삼의 대결은 김두한과 김동회의 대결보다 훨씬 조건이 나쁘다. 지금 막 도착한 기차가 궁이와 마삼이 서있는 공간에서 한쪽 180도를 모두 사용할 수 없게 차단해 놓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절반의 공간. 마삼은 그 기차를 타야하고 궁이는 마삼을 무릎 꿇게 만들어 궁가 무술의 필살기 노원괘인을 받아갈 것이다. 아마도 기차는 잠시 동안만 역에 정차할 것이다. 눈은 하염없이 내리고 섣달 그믐날 밤은 금방 밝아오지 않을 것이다. 왕가위는 마삼을 기차가 가는 방향에서 오게 만들었고 궁이를 마치 기차를 멈춰 세우듯이 반대편에서 마주 걸어오게 동선을 그어서 두 개의 선, 그러니까 기차의 철도와 두 사람의 대결의 선을 평행으로 놓았다. 순방향과 역방향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선. 그 선에 무관심한 철도의 선. 두 개의 평행선. 두 개의 트랙. 물론 왕가위가 구태여 이 장소에서 대결을 선택한 이유는 궁이와 마삼의 대결과, 기차의 도착과 출발이 만들어내는 정지와 활동이라는 기계적인 동작, 두 개의 운동 사이에서 새로운 관계를 작동시키려는 것이다. 마치 스쳐 지나가듯, 늦은 시간을 보여주기 위해, 그 자리에 매달려 있던 시계는 이 순간 그 어느 것도 멈출 수 없다는 힘의 기호가 된다. 여기서 모든 것은 오로지 앞으로 갈수만 있을 뿐이다. 기차의 출발시간. 궁이와 마삼의 대결. 내리고 또 내리는 눈. 이때 이상할 정도로 이 대결의 장면이 (이런 비유적인 표현을 허락한다면) 두텁게 칠해졌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킨다. 어딘가 둔하게 여겨지는 공간의 구석들. 나는 필요 이상으로 섬세하게 이루어진 금루를 환기시키고 싶다. 왕가위는 의도적으로 일부를 지워나가고 있다. 그럴 필요가 있었을까. 지워진 장소. 어떤 흐릿함. 지워져가는 흔적. 바라보는 시선들을 가로 막는 성에 낀 창문. 거기 내려앉은 어둠. 섣달 그믐밤은 그림자가 깊기도 하다. 우리는 이 시퀀스 전체가 궁이가 돌아보는 시간(flash_back)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두 개의 시간. 십년이라는 시간의 간격. 직선으로만 이루어진 선들의 다발. 각자의 선들의 방향과 힘. 그 사이에서 시간의 간격은 무엇을 남겨놓고 무엇을 지운 것일까. 기억 속의 대결. 그런데 궁이는 갑자기 왜 엽문에게 십년도 더 지난 이 이야기를 꺼내든 것일까. 엽문은 마삼에게 아무런 감정적인 원한이 없으며 또한 그가 궁이를 대신해서 그녀의 아버지인 궁보산의 복수를 행해야할 의무가 있었던 것도 아니다. 엽문과 마삼, 그 둘은 그저 스쳐 지나가듯이 금루에서 한번 보았을 따름이다. 엽문은 지금 오로지 궁이가 궁금해서 만난 것이다. 궁이는 단추를 돌려주기 위해서 만난 것이다. 그런데도 궁이는 마치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만났다는 듯이 힘겹게 마지막 순간에 이야기를 꺼내든다. 이유는 단 하나뿐이다. 궁이가 이 대결에서 마삼에게 졌다면 궁이와 엽문에게는 기회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엽문의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났고 궁이는 이제 궁가 무술의 유일한 전수자가 아니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패배는 궁가 무술의 권위를 마삼에게 넘겨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승리는 궁이에게 사랑의 패배에 다름 아니다. 삶의 쓰디 쓴 아이러니. 하지만 여기엔 다른 해석이 하나 더 있다. 다시 한 번 환기하지만 궁가 64수 무술의 최고의 경지인 노원괘인의 마지막 필살기는 돌아보는 것이다. 돌아보는 제스처. 돌아보는 시간. 후회. 어떤 방법을 동원해도 막을 수 없는 칼날 같은 아픔. 지금 이 장면을 바로 그 돌아보는 마지막 한 수, 노원괘인의 필살기로 엽문에게 대결을 청하는 것이라고 읽을 수는 없는 것일까. 궁이는 금루에서 엽문과 아버지 궁보산의 대결을 보았다. 그때 궁보산은 엽문에게 제안한다. “엽선생, 오늘은 내 마지막 대결이니 우리 생각을 겨루세” 생각을 겨룬다는 것. 두 개의 생각. 사유의 대결. 감정의 대결. 여기서는 사유와 감정 사이에서 우위를 논하지 않을 생각이다. 물론 두 사람은 이미 금루에서 그들의 대결을 ‘즐겼다’. 마치 포옹이라도 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 마치 입술이 거의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간 클로즈업의 슬로우 모션. 서로 가장 가까이 다가가본 시간. 개념들은 이번에는 정감의 기호들에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 하지만 아마도 이 돌아보는 시간의 대결은 궁이와 엽문의 마지막 대결이 될 것이다. 누가 돌아보는 시간을 견딜 것인가. 그런데 그 대결에서 승자가 있을 수 있을까. 지금 이 장면의 한 장면, 한 쇼트, 한 순간, 하나의 제스처, 하나의 액션, 하나의 동작, 한마디의 말, 하나, 하나가 마삼을 경유하여 고스란히 엽문에게로 향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시퀀스 안의 모든 시청각 기호들을 읽어나갈 때 그것이 모두 이미지로 옮겨진 궁이의 말이며 엽문을 향한 치명적인 노원괘인의 필살기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돌아본다는 것. 이때 더 이상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기차이다. 여기에는 두 대의 기차가 없다. 단지 한 대의 기차가 거기 잠시 멈추어 선 다음 제 시간이 되면 망설이지 않고 떠나갈 것이다. 무엇이 남고 무엇이 사라진 것일까. 나는 다소 자유자재로 시간을 뒤섞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이건 왕가위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만일 계보를 세워야한다면 왕가위는 명백히 오손 웰즈에서 알랭 레네를 지나 사방으로 시간의 거미줄을 쳐나간 네트워크를 따라가고 있다. 약간의 디테일. 기차는 마삼이 오기 전에 도착했고, 마삼은 이 기차를 타기 위해 막 역에 도착했다. 그런 다음 기차를 언제 떠나보낼 것인가, 라는 문제가 남는다. 십년 전 이날, 궁이의 기억 속에는 오로지 기차만이 남아있는 것처럼 모든 운동은 이 기차의 도착과 출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차라리 기차 시간표라는 운동 안에 이끌려 들어와서 화면 안의 모든 기호들이 그 안에서 활동한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오로지 여기서는 하늘에서 내리는 눈만이 자유로울 따름이다. 아니, 그것조차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궁이와 마삼의 대결이 시작되자 마치 그들의 대결을 방해하면 안 된다는 듯이 그 순간 그만 멈추고 만다. 우리는 이미 금루에서 궁이의 64수를 보았다. 혹은 그녀는 엽문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이 대결이 끝난 다음 나눈 궁이와 엽문의 대화를 환기시키고 싶다. 지금은 생각을 대결하는 중이다. 필살기 노원괘인의 필살기는 돌아보는 것이다. 궁이는 엽문에게 말한다. “엽선생, 64수를 보여드린 건 이걸 말하기 위함이에요. 사람밖에 사람 있고 산 너머 산 있듯 주먹이 앞만 보고 뒤를 못 보면 안 되죠, 여기서 많은 걸 깨우치시길” 그러자 엽문이 대답한다. “바둑에 같은 바둑판은 없는 법이죠, 잎사귀 밑에 꽃을 숨길 수 있는지 나중에 봅시다” 궁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그래요, 기다리죠” 이미 궁이는 노원괘인의 필살기를 알고 있었던 것일까. 왜 엽문은 지금이 아니라 나중에 보자고 한 것일까. 말하자면 이건 약속인 것일까. 나는 자막에 ‘한 마디 약속은 산보다 무겁다’라고 써 있었을 때 그 약속이 무엇이었는지를 한참 생각했다. 궁이는 엽문의 그 말에 기다리겠다고 대답했다. 무엇을 기다린 것일까. 궁이가 엽문에게 들려주는 십년 전의 섣달 그믐밤.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엽문은 홍콩에서 약국하면서 머물고 있는 궁이를 찾아왔을 때 첫 인사가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소, 라는 말 대신 궁가 64수를 보여주시오, 라고 청했다. 물론 문학적으로 이 말을 살짝 비틀어서 당신이 보고 싶어서 왔다는 말을 그렇게 돌려서 한 것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아마 모두들 그렇게 받아들이고 싶어 할 것이다. 나는 반대로 묻고 싶어진다. 정말 그 말이 엽문이 하고 싶었던 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궁이는 그 말에 대답한다. 만일 문지방을 넘자마자 그 말을 했다면 한바탕 대결을 하고 만두를 대접했을 텐데요. 나는 지금 만두를 생각하는 중이다. 오늘은 섣달 그믐날이다. 고향에 돌아가서 만두를 먹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마삼은 기차를 타러 온다. 궁이는 마삼에게 말한다. “만두는 솥에 있지만 넌 못 먹을 걸, 제를 지낼 놈은 제를 지내고 밥을 먹을 놈은 밥을 먹듯이 해야 할 일은 하늘이 무너져도 해야지” 오늘 궁이와 엽문은 아무도 만두를 먹지 못할 것이다. 그들에게 홍콩은 고향이 아니다. 그들은 돌아갈 기회를 놓쳤다, 그 말을 한 다음 탄식하듯이 궁이는 십년 전 그 이야기를 시작한다. 여기서 방점은 탄식(歎息), 에 있다. 이 말을 조심스럽게 음미해주었으면 좋겠다. 궁이는 마삼과의 대결에서 이겼다. 마삼은 피를 토한 다음 눈 바닥에 누운 채 말한다. “궁가의 것을 돌려줬다” 궁이는 할 수 있는 한 거만하게 내려다보면서 대답한다. “말은 바로 해야지. 네가 돌려준 것이 아니고 내가 되찾은 거다” 멈춘 줄 알았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이미 기차는 떠나간 다음이다. 궁이는 이 대결에서 힘겹긴 하지만 마삼을 무릎 꿇게 만들었다. 그런데 이걸 다시 떠올리면서 여기에는 승리에 대한 어떤 도취감도 없다. 왜 그녀는 탄식하는 것일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난다. 시간은 약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52년 일천선의 백장미 이발소로 옮겨간다. 그런 다음 엽문과 궁이는 마지막으로 경극을 보고 헤어진다. 영화는 그 이년 동안 엽문과 궁이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 오갔는지, 어떤 시간을 가졌는지 설명하지 않는다. 나는 약간의 실험을 했다. 이상하게도 내 동료들은 섣달 그믐날 이야기를 나눈 다음 경극을 보고 궁이와 엽문이 헤어지는 장면을 연이어 붙여놓고 기억했다. 그 두 개의 씬 사이에 이년이라는 간극이 있으며, 게다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라고 하면서도 일선천의 이발소 장면이 그 사이에 있었는지조차 어리둥절하게 생각 했다. < 일대종사 >는 엄격하게 엽문의 전기를 따라가는 영화가 아니며 궁이와의 인연은 지어낸 이야기이다. 그러므로 나는 반대로 물어보고 싶어진다. 왜 마삼과의 대결 이야기가 끝난 다음 궁이와 엽문과의 이별 장면을 진행하면 안 되는 것일까. 이년 동안 별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도 아니며 게다가 마삼과의 대결을 보여준 다음 이어서 일선천의 이발소를 보여주고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이 다시 경극으로 돌아와서 궁이와 엽문의 이별 장면을 진행한다. 무언가 여기에는 궁이와 엽문 사이의 인연에 대한 (영화 바깥에 있는) 우리들의 기억 위에 기억을 겹쳐놓고 싶어한다는 인상이 있다. 인상의 연상과 기억의 순서 사이에서 벌이는 내기. 기술적으로만 설명하면 이 탄식은 궁이와 엽문의 이별에 대한 감정을 이어 붙이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그 사이에 이년이라는 시간의 간격이 필요해진 것일까. 그런 다음 다시 그 간격을 지워버리고 있다. 궁이와 엽문의 섣달 그믐밤의 만남, 이 만남에서 궁이가 하는 십년전 섣달 그믐밤의 대결, 그리고 난 다음 이년 후의 일선천의 백장미 이발소, 그리고 다시 경극을 본 다음 이별하는 궁이와 엽문이 걸어가는 한밤 중의 길, 이 길에서 우리는 두 사람 이외에 그 누구도 보지 못했다. 마치 유령들이 거니는 것만 같은 그림자들. 텅빈 건물. 어떤 집에도 들어오지 않은 등불. 여기서 누가 구경꾼인가? 이 모든 장면의 광경들을 보는 사람은 우리들 뿐이다. 거의 서로 통하지 않는 조각들. 그것들을 영화라는 고유한 능력의 관점으로 묶어낸 다음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만들 수 있는 자리. 하지만 여기서 기억에 대한 진정한 내기가 시작된다. 왕가위는 그 자리를 잘 정리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때로 희미한 공통점을 놓아두고 종종 중단시킨 다음 그 안에서 영화를 보는 우리들의 시간 감각을 증발시키려 든다. 희박해져가는 기억. 궁이는 이야기 속에서 점점 사라져가는 등불처럼 보인다. 그때 그건 엽문이 아니라 우리가 느끼는 감각이다. 영화 속의 여러 개의 생명의 리듬. 그때 하나가 여기서 지워져가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보는 내내 마치 영화의 어떤 기능이 마비되어 작동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일대종사>는 잠시 동안 상승한 다음 내내 하강한다. 나는 두 장면 모두에서 불투명성을 설명했다. 그런 다음 구태여 여기서는 장면이라는 말 대신 광경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한다. 이때 (< 장군의 아들 > 이편의) 전차와 (< 일대종사 >의) 기차는 장면의 디테일(detail_particolare)이 아니라 광경의 디테일(detail_dettaglio)이라는 인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둘이 여기서 정확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뉘는 것은 아니다. 경계는 모호하고 어딘가에서 그 둘은 서로를 오간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따분하게 그 둘을 도식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다. 혹은 앙드레 고드롤과 톰 거닝이 제시한 매혹의 인력(spectator_in_attraction)이라는 개념 안으로 끌어들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내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은 이미지가 아니라 흔적 자체의 존재론이 어떻게 재현의 배치를 무너트려가면서까지 어떤 기쁨을 호소하느냐는 것이다. 과잉의 투여라는 문제. 거기에 얼룩처럼 남아서 자기의 존재를 사건으로 만들고 있는 중이다. 오로지 기능적으로만 말한다면 양쪽 모두 전차 혹은 기차가 있거나 없거나 차이가 없다. 만일 있다고 하더라도 그 차이는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여기서 그 존재의 차이는 오로지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시선의 경로에 대한 동요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전차와 기차를 단순하게 대결을 무대화시키는 장치라거나 혹은 알레고리라는 식으로 설명하고 싶지 않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서 나는 이 두 개의 힘이 아무 것도 말하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은 태도를 말하고 싶다. 이 두 편의 영화에서 전차와 기차는 우연히 거기서 마주친 대상이 아니다. 임권택 은 이 장면에서 구태여 김두한과 김동회를 종로 한복판 두 대의 전차가 교차하는 그 장소에로 대결 장소를 옮긴다. 왕가위는 십년 전 섣달 그믐밤 궁이와 마삼의 대결을 기차역으로 이끈다. 하지만 거기서 두 대의 전차, 혹은 막 도착한 기차는 그저 무심하게 궤도를 따라 떠나간다. 그때 그 힘은 단지 영화적 사건으로서만 존재한다. 이 존재 자체가 어쩌면 장면을 망쳐버릴 지도 모른다. 혹은 장면에 대해서 어떤 얼룩처럼 여겨지기조차 한다. 그런데도 거기 있어야만 한다. 아니, 차라리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 다시 시작해야만 한다. 마치 그것이 있는 자리에서만 이 사건이 성립되기라도 하듯이 여기에 온다. 영화에서 우리를 까다롭게 만드는 부분은 서사 안으로 통합되지 않으면서 거기에 불가사의하게 사건으로 존재하는 비인칭의 이것임, 과 마주칠 때이다. 영화에서 그 무언가를 건드릴 때 거기서 통일성을 요구하면 안된다. 기이하게도 여기에서 내가 마주친 순간은 그 존재의 사건들이 서로 다른 층위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임을 보여주고 있는 중이라는 영화적 시간이다. 나는 무엇보다도 교차하는 두 대의 전차, 혹은 막 도착한 기차가 불러일으킨 설명할 수 없는 기쁨을 말하고 싶다. 물론 이 기쁨을 가장 먼저 알고 있었던 사람은 루이와 오귀스트 뤼미에르 형제일 것이다. 시오타역으로 들어오는 기차. 상영시간 56초. 나는 잠시 멈추고 이 장면을 다시 보고 있다. 당신께서 부디 이 칸막이처럼 여겨지는 두 영화 사이를 횡단하면서 내가 찾으려는 것이 무엇인지 눈치채주었으면 고맙겠다. 가로 지르기. 영화를 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성립되면서 동시에 그 영화로부터 시작되는 다른 영화들과의 사이를 떠도는 것이다. 말 그대로 표류. 임권택을 말하면서 거기에 가 닿지 않으려는 노력. 그래서 왕가위에게 다가가기. 하지만 왕가위에게 머물지 않기 위해서 임권택에게로 돌아오기. 그 사이에서 나는 영화 안에 머무는 불가사의한 사건을 발견하고 기쁨에 넘쳐 어쩔 줄 모르는 중이다. 마치 열차처럼 양쪽을 오가면서, 놓쳐버린 열차를 그리워하면서, 다시 찾아올 열차를 기다리면서, 그 둘이 교차하는 그 시간이 바로 내가 영화와 대결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는다. 말하자면 내가 임권택에 관한 글을 시작하면서 맞이하는 첫 일 년, 작년의 그날로부터 오늘. 나는 지금 다시 시작하는 중이다. (세 번째 이야기 끝, 네 번째 이야기 계속) 장군의 아들 2 1991년 103분 컬러 1.85 감독 임권택 제작 태흥영화㈜ 각색 이윤택 촬영 정일성 조명 차정남 편집 박순덕 음악 신병하 박상민 김두한 송채환 송채환 신현준 하야시 이일재 김동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