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 돈키보이
- 감독
- 하모니 코린
- 제작년도
- 1999
- 출연
- 이완 브렘너, 클로에 세비니, 베르너 헤어조크, 에반 노이먼
사진: “ Sinners ”, IMDb 뱀파이어물과 좀비물을 좋아한다. 전염과 변형이라는 설정은 때로 경계와 정체성에 관한 질문을 날카롭게 벼리는 은유가 된다. 그 속에서 공동체의 무의식이나 내가 지닌 두려움의 근원을 마주하는 일은 늘 일말의 고통을 동반한 쾌감을 준다. 2025년 봄 개봉한 라이언 쿠글러 연출의 < 씨너스: 죄인들 >은 이러한 장르적 가능성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갱신한 작품이었다. 이 영화를 하나의 단어로 규정하기는 어렵다. 클리셰를 충실히 따르는 뱀파이어물이면서 동시에 음악영화이고, 인종차별을 다루는 정치적 블랙 호러이자 한편으로는 종교와 구원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성장영화이기도 하다. 이야기는 1932년 미국 남부 미시시피 델타를 배경으로 한다. 노예 해방 이후에도 수많은 흑인이 소작농으로 농장에 묶인 채 가난과 차별 속에 살아갔다. 일부는 사소한 죄목으로 체포되어 강제노역에 내몰렸다. 박해받는 삶 속에서 기타와 하모니카를 들고 길 위에 나선 흑인 음악가들이 델타 블루스를 탄생시킨 장소가 바로 이곳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쌍둥이 형제 스모크와 스택은 시카고에서 갱스터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 델타로 돌아온다. 낡은 제재소를 개조해 클럽을 열고, 블루스 뮤지션을 꿈꾸는 사촌 새미와 함께 개업 첫날 밤을 준비하며 새 삶을 그린다. 이들이 꿈꾸는 것은 흑인들만의 진정한 문화 공동체다. 그러나 새미의 블루스 선율이 울려 퍼지자 어둠의 불청객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클럽 문 앞에 선 세 명의 백인 뱀파이어는 입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한다. 자신들도 뮤지션이라며 “불쌍한 울새의 살을 깨끗이 발라먹었지(Pick Poor Robin Clean)”라는 가사의 다소 섬뜩한 노래를 아일랜드 포크 풍으로 연주한다. 능숙하고 경쾌한 연주는 순식간에 좌중을 사로잡는다. 그러나 본래 이 곡은 1927년 블루스 뮤지션 루크 조던이 발표한 노래다. 흑인 문화가 백인 사회에서 전유되고 소비되어 온 기나긴 역사가 압축적으로 포착되는 장면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세 백인은 뱀파이어가 되어 뭉쳤지만 다른 백인성의 층위를 드러낸다. 아일랜드인으로 설정된 레믹은 대기근과 식민 지배, 종교적 억압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주민의 후손이다. 그는 수백 년 전 침략자에게 동화된 피해자이자 문화적 흡혈을 욕망하는 새로운 침탈자다. KKK단원 조안과 버트 부부는 도덕적 타락을 멸시하며 타자를 배제해 온 미국 사회 내부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그들은 금화를 탐내다 레믹에게 물려 뱀파이어가 되었다. 흑백 대립 바깥에 위치한 인물들에게도 각자의 역사가 있다. 스택과 사랑하는 사이였던 메리는 백인의 얼굴을 가졌지만 흑인 가족 사이에서 자라 흑인처럼 말한다. 피부색과 문화적 정체성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인물이다. 마을에서 식료품 가게를 운영하는 중국계 미국인 부부 보와 그레이스는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백인과 흑인에게 따로 물건을 팔며 생계를 유지한다. 어느 쪽에도 완전히 속하지 못한 채 경계 위에 머무는 아시아인의 위치를 드러낸다. 땅의 ‘원주민’으로서 침탈과 학살을 가장 오래 겪어온 촉토인들은 이 모든 갈등 이전에 이미 추방된 공동체가 있었음을 환기하는 존재다. <씨너스: 죄인들>이 그리는 인종 갈등에는 이렇듯 서로 다른 상처의 시간이 혼재돼 있다. 영화 바깥에도 이 구조를 암시하는 시각적 장치가 있다. 개봉과 함께 공개된 십여 종의 인물 포스터다. 주연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등장인물 모두의 얼굴을 개별 이미지로 제작한 방식은, 단 하나의 영웅 서사가 아니라 경계인들의 초상을 나란히 놓겠다는 뜻으로 읽힌다. 사진: “Sinners”, IMDb 선악의 구도 역시 단순하지만은 않다. 쌍둥이 형제는 시카고에서 이탈리아 마피아의 와인과 아일랜드 갱단의 맥주를 훔쳐 왔다. 클럽을 여는 데 사용한 자본 또한 폭력과 약탈의 결과다. 젊은 시절 그들이 인종차별만큼이나 아버지의 폭력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으리라는 점도 짐작할 수 있다. (친부 살해 소문으로 형제는 이미 고향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들이다. ‘죄인들’이라는 제목은 일차적으로 이들을 가리키는 듯 보인다.) 라이언 쿠글러는 흑인이 겪어온 고통의 역사를 조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모든 존재가 서로 얽힌 폭력의 계보 위에 서 있음을 끊임없이 암시한다. 영화는 묻는다. 죄인은 누구인가. 하지만 포스터에 찍힌 문구(We Are All Sinners)가 일러주듯, 죄를 귀속시킬 대상은 쉽게 단정되지 않는다. 이 질문을 가장 노골적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 뱀파이어의 수장인 레믹이다. 레믹은 평등과 하나 됨을 외치며 흡혈을 통한 영생의 길을 약속한다. 처음에는 “강요된 종교”였던 기독교를 향한 농담처럼 들리지만, 곱씹을수록 입맛이 쓰다. 인간이 차별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일은 살아생전에는 불가능하며, 죽어서야 비로소 모두가 동등해질 수 있다는 역설이기 때문이다. 인간 무리와 뱀파이어 무리의 대결은 러닝타임 한 시간을 훌쩍 넘긴 뒤에야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파국으로 치닫는 이 격투는 분명 < 황혼에서 새벽까지 >(로버트 로드리게즈, 1996)를 연상시키는 폭발적인 액션이지만, 어쩌면 이 영화에서 가장 덜 중요한 대목일지도 모른다. 장르적 환상은 언제나 현실에 실재했던 고통을 조금 더 견딜 만한 이야기로 바꿔 보여주는 방식이다. 이튿날 아침 무장한 채 트럭을 몰고 클럽 앞에 나타난 KKK단의 모습에서 우리는 한 편의 극영화가 연출한 클라이맥스의 뒷면을 슬쩍 엿볼 수 있다. 뱀파이어와 치고받고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건을 뒤집어쓴 인간들에게 무차별 총살을 당하는 이야기보다 훨씬 받아들이기 쉽다. 모든 초현실적 서사가 그렇듯, 흡혈귀와 인간의 하룻밤 소동 역시 잔혹한 현실을 뒤집어 각색한 이야기일 따름인 것이다. 사진: “ Sinners ”, IMDb 이 영화에서 블루스는 소재나 배경음악이 아니라 영화의 시공간을 흔드는 힘으로 작동한다. 뮤지션의 업보를 짊어진 사람은 생과 사의 경계를 가로지르며 과거와 미래의 영혼을 불러내는 중재자로 묘사된다. 그 정점은 개업 무대에서 새미의 블루스 선율에 맞춰 클럽 안의 모든 사람이 몸을 들썩이기 시작하는 롱테이크 시퀀스다. 블루스와 힙합, 중국 경극과 발레, 로큰롤과 디제잉이 하나의 공간에 포개지고, 서로 다른 시대의 몸들이 같은 박동 위에 놓인다. <씨너스: 죄인들>은 두 가지 화면비로 촬영되었다. 가로로 긴 2.76:1 비율로 상영되다가 특정 구간에서 1.43:1 아이맥스 GT 화면으로 확장된다. 클럽 롱테이크 시퀀스에서 이 전환은 특별히 압도적인 몰입감을 준다. 그것은 시각적 스펙터클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시간과 공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 눈앞의 스크린은 유한한 인간이 무한한 시간 속에서 구축해 온 문화와 역사의 총합처럼 느껴진다. 프레임은 이미 지나간 것과 아직 도래하지 않은 것을 포함하는 장소가 된다. 영화가 타인들과 함께 꾸는 집단적 꿈이며, 역사라는 무의식의 망막에 잠시 맺혔다가 사라지는 잔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은 “극장에서의 공동체적 경험을 여전히 믿는다”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의 말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씨너스: 죄인들>은 나의 신체가 극장이라는 어둠 속에 타자들과 함께 놓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경험하게 해주었다. 이 짜릿한 영화적 경험이 소수의 극장에서만 가능하다는 아이러니를 감안하더라도 말이다. 사진: “Sinners( 1 , 2 )”, IMDb 이 이야기가 흑인의 삶에 대한 헌사로서 만들어졌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영화는 피바람 부는 밤이 시작되기 전의 ‘좋았던 시간’에 타임라인을 할애하지 않는다. 개업을 준비하는 마을 사람들이 클럽 내부를 고치고 음식을 만들며 웃고 떠들던 낮의 시간은 의도적으로 생략된다. 결말에 이르러 스모크의 회상 속에서 몽타주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중요하게 남겨지는 것은 선택의 순간들이다. 기타를 내려놓고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아버지의 요구 앞에서 새미는 음악의 길을 택한다. 세월이 흘러 노인이 된 새미 앞에 뱀파이어가 나타나 영생을 제안할 때도 그는 거절한다. 영원히 노래하는 저주 대신 삶이라는 박해를 끝낼 자유를 택한다. 영화는 다시 묻는다. 블루스는, 나아가 예술은, 죄인가. 아니면 구원인가. 음악은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평등도 해방도, 영원한 평화도. 다만 이 폭력적이고 상처투성이인 세계에서 잠시 다른 삶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며 불온하고도 마법 같은 순간을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을 뿐이다. 스크린이 이따금 그러는 것처럼.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아무튼, 야구』(2025), 『남의 노래』(2024),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 본 게재글은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교육 프로그램 ‘2021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선정작입니다. 흰 캔버스 위에 흑연을 든 손이 나타난다. 화가들에게 둘러싸인 여인이 그림을 지시하던 중 어떤 작품과 마주치고 누가 저것을 꺼냈냐며 묻자 카메라는 그 그림을 클로즈업한다. 그림의 제목은,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한 여인이 젖은 몸을 이끌고 섬 깊이 들어가 거대한 저택에 다다른다.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이 저택에 온 여성 화가다. 언니의 운명을 물려받아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엘로이즈와 그의 결혼을 위한 초상화를 그리는 마리안느. 그는 모델이 되길 거부하는 엘로이즈에 의해 ‘산책 친구’로 위장하곤 엘로이즈의 얼굴을 훔쳐보며 초상화를 그린다. 엿본 얼굴의 조각들을 짜 맞추듯 완성한 초상화를 본 엘로이즈는 그것이 자신과 비슷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혹평에 마리안느는 그림엔 ‘규칙과 관습’이 있다고 자신을 변호하지만, 그에 엘로이즈는 ‘생명력과 존재감’은 없냐며 되묻는다. 마리안느는 분에 차 그림을 뭉개버리고, 영화의 2막이 시작된다. 엘로이즈가 마리안느의 모델이 되겠다고 나서며 본격적인 초상화 작업에 들어간 그들은 서로를 관찰하고 응시하며 불꽃이 번져오르듯 알 수 없는 감정에 빠진다.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 엘로이즈는 응시하는 존재다. 그는 소피의 임신중절수술 현장에서 고개를 돌려버리는 마리안느에게 고개를 돌려 마주하라고 말하며, 관찰자의 시각으로 자신을 묘사하려는 마리안느에게 “우린 똑같은 위치에 있어요. 아주 동등한 위치죠. 당신이 날 볼 때, 난 누구를 보겠어요?”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한다. 이러한 엘로이즈의 태도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거듭 평등을 강조한다. 엘로이즈, 마리안느, 소피 세 여성이 나란히 담긴 부엌 신과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해 논쟁하는 신은 18세기 프랑스의 신분 제도를 배제해버린다. 한 폭의 명화 같기도 한 수평 앵글은 그 어떤 굴곡도 확대도 없이 고요하게 그들을 투과한다. 오직 타닥거리는 난롯불 소리, 세찬 파도 소리, 캔버스 위를 방황하는 붓 소리와 때때로의 정적만이 존재하는 화면 안에서 그들은 서로를 동등하고 평등하게 응시한다. 이러한 응시는 여태껏 남성적 시각에서 배척받아 온 여성의 이슈인 생리와 임신중절 또한 굴곡 없이 묘사한다. 소피의 임신중절수술을 재현해 그리자며 일어서는 엘로이즈를 따라 기억은 기록으로 진화하는데, 이는 여태껏 외면받아 온 여성의 역사에 대한 추상이기도 하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서로를 닮아가고 있다. 이는 복식을 통해 찾아볼 수 있는데, 첫 번째로 영화의 오프닝 속 마리안느다. 그는 엘로이즈의 것과 비슷한 모양의 짙은 초록색 드레스를 입고 학생들 앞의 모델이 된다. 두 번째로 연주회장에서 울 듯 우는 엘로이즈의 옷은 저택서 조율이 안 된 피아노를 연주하던 마리안느의 옷과 닮아 있으며, 심지어 정사를 나누던 중 엘로이즈의 눈동자가 마리안느의 것처럼 검게 변하기도 한다. 이처럼 영화는 지속적으로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를 일체화함으로써 화가와 모델, 관찰자와 피관찰자의 관계를 뒤집는다. 그리고 이는 앞서 말한 평등의 메시지와도 맞닿아있다. 뒤돌아봐. 마리안느는 자신 이전의 화가가 완성하지 못한, 얼굴이 지워진 엘로이즈의 초상화에 불을 지른다. 마리안느가 붙인 가슴께의 작은 불씨가 캔버스에 번져 올라 엘로이즈를 삼키는 모습은 오르페우스 신화에서 에우리디케를 빨아들이는 지하 세계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이 신화에서 오르페우스는 지하 세계에서 자신의 아내, 에우리디케를 구하던 중 하데스와의 약속을 저버리고 뒤를 돌아봐 또다시 아내를 잃는다. 오르페우스 신화에 대한 엘로이즈의 재해석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실상은 이렇다.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보게 한 것은 그의 얕은 인내심이나 충동이 아닌, 에우리디케의 “뒤돌아봐요”라는 한마디 작별 인사다. 시간은 흐르고, 마리안느는 작별하는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담긴 그림을 출품한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그림 속 오르페우스의 것과 같은 푸른 망토를 두르고 있으며 에우리디케는 흰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이는 마리안느가 마주한 엘로이즈의 마지막 모습과 매우 흡사하다. 헤어짐의 순간에 엘로이즈는 마리안느에게 말했다. “뒤돌아봐.” 엘로이즈는 지하세계에 남겨진 것일까? 그 옛 신화 속 에우리디케처럼. 뭐예요? 좋아하는 곡이요. 영화는 이들의 사랑을 다분히 정적으로 묘사한다. 눈빛이나 표정을 통해 절제된 채 묘사된 감정선은 영화 내에서 음악과 함께 두 번 고양되는데, 첫 번째는 하모니 신이다. 어두운 밤 모닥불 앞에 모인 여성들은 ‘그들은 도망칠 수 없다.’라는 노랫말을 반복해 부르며 하모니를 이룬다.(이 의문스러운 하모니는 상당히 성스럽고 웅대하게 들린다.) 이 음성과 함께 마리안느를 응시하던 엘로이즈의 치맛자락에 불이 붙고, 마리안느는 그 모습을 홀린 듯 지켜본다. 이 장면은 곧 마리안느에 의해 기억, 기록되며 추후 마리안느가 엘로이즈를 회상하며 그려낸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이다. 두 번째는 엔딩 신이다. 이별 후 마리안느는 연주회장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엘로이즈를 마주한다. 영화가 시작된 이래 줄곧 최소한으로 제한되었던 음악은 일방적인 재회의 현장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온다. 외딴 작은 섬에서 조율되지 않은 피아노 소리로 연주되던 비발디: 사계 여름이 거대한 연주회장에서 오케스트라와 재연주되고, 동시에 관객은 줌 인하는 카메라를 통해 빨려 들어가듯 엘로이즈의 내면세계와 동화된다. 이처럼 의도적으로 배제되던 음악이 절정의 순간에 느닷없이 튀어 오르는 연출은 셀린 시아마의 전작에서도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다. < 걸후드 >에선 ‘Diamonds’가, < 톰보이 >에선 ‘Always’가, 그리고 <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에선 비발디: 사계 여름 3악장이 화면 밖으로 솟구치며 굴절을 만들어낸다. 후회하지 말고 기억해요. 외딴 섬이라는 영화의 공간적 배경은 18세기 프랑스라는 시간적 배경과 맞물려 영화의 피륙을 낭만적으로 직조한다. 해안가와 저택을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유독 공간적 배경이 강조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포스터 속 파도 신이다. 이별을 앞둔 것을 실감한 후 다툰 마리안느와 엘로이즈는 거센 파도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흐느낀다. 이때 그들 너머에서 휘몰아치는 파도와 파도 소리는 이들의 소망과 현실 사이의 갈등을 더욱 극적으로 만든다. 허나 이 판타지적인 시공간적 배경과 대조적으로 이들 멜로의 결말은 꽤나 사실적이다. 이 파도 앞에서 마리안느는 용서해달라 말한다. 결혼하지 말라 청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손을 잡고 몰래 섬을 빠져나와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어요-같은 이야기를 만들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가 이별을 선택한 것처럼 사랑의 도피가 아닌 일주일간의 추억을 택하며, 후회하지 말고 기억하기를 약속한다. 사랑에 빠진 순간은 결코 명확할 수 없다. 그들이 처음 얼굴을 마주한 바닷가에서였는지, 은밀히 훔쳐본 얼굴을 되짚어보며 캔버스에 옮기던 낮이었는지,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서로를 마주하던 밤이었는지 우리는 모른다. 그 모든 순간을 후회하지 않고 기억할 뿐이다. 나아가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함께 행하는 그리기는 휘발성을 지닌 기억을 영구적이며 쌍방향의 입체성을 띠는 기록으로 승화시켜낸다. 어떠한 굴곡도 확대도 없이 올곧은 시선으로 그려진 사랑. 고요한 응시와 약간의 흑연으로 ‘기록’된 28페이지는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본 게재 원고는, 17-19세 청소년을 대상으로 진행한 한국영화박물관 교육 프로그램 ‘청소년을 위한 영화 글쓰기 키트’의 최종 과제입니다. 일본 영화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자, 가족 영화의 대가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가족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정의 내리길 반복한다. 덕분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속 가족은 어딘가 평범하지 않다. <바닷마을 다이어리>의 엄마가 다른 자매,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의 떨어져 사는 가족,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의 아들이 바뀐 가족, 그리고 그 중 <어느 가족>의 가족이 가장 정상적이지 않으면서도 진짜 가족보다 더 진짜 같은 가족의 모습을 보여준다. 닮지 않아도, 피로 이어지지 않아도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고 힘이 되어주는 가족의 모습을 보여주며 관객들에게 혈연이 다 무슨 소용인지, 진짜 가족이란 무엇인가를 묻는다. 시바타 가족을 통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무엇일까? ‘납치’와 아동학대를 당하는 어린아이를 ‘구한’ 것의 갈림길에 있는 이 사람들에 대해서 관객들은 전혀 범죄자로 여기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의 처지에서 공감하고, 그들을 진짜 가족보다 더 가족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진짜 가족과 그 사람들에게서 안전함을 느끼며 잘 살던 린(사사키 미유)과 쇼타(죠 카이리)를 억지로 돌려보낸 경찰에게 분함을 느낀다. 이들은 아이를 학교에 보낼 수도, 아플 때 병원에 데려갈 수도, 돌아가신 할머니의 장례도 치를 수 없는 불완전한 부모이고 가족이지만 우리는 이들을 보며 가족이라는 관계가 성립하기 위해선 단순 피뿐만 아니라 많은 조건이 있음을 깨닫는다. 첫째, 폭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 엄마가 자기에게 옷을 사준다는 이유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맞고 살던 린에게 노부요(안도 사쿠라)는 사랑하면 때리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때린다’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부모-자식의 관계는 갑-을 관계와 닮아 있어 자식은 쉽게 ‘갑질’에 노출이 되곤 한다. 단지 때리는 것만이 폭력인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식이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선 무언가를 해야 한다며 강요하는 것이 가장 아무렇지 않게 행해지는 갑질, 폭력인데, 노부요는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린에게 처음으로 사랑한다면 보듬어주고, 강요보단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 부모라는 것임을 알려준다. 둘째, 항상 함께할 것. 쇼타는 차 안에 방치되어 있었고, 린은 추운 겨울밤에 혼자 베란다에 나와 있었다. 한창 부모의 손길이 필요할 나이에 부모 없이 방치해 두는 것은 가족으로서 할 일이 아니다. 꼭 한 번씩은 가족에게 상처받고, 버림받은 이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선택해 가족이 되었다. “스스로가 선택하는 편이 더 강하지 않겠어? 유대라던가 정 같은 거”라는 노부요의 말을 떠올려보자. 사회는 이들을 원래 가족의 품에, 시설에 보내버리는 둥 이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려 더 이상 만날 수 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들은 비록 사회가 인정해주는 가족은 아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었고 행복이었던 지난날들을 떠올리며 이들만이 진정한 내 편, 내 가족이었다는 기억만큼은 누구도 우리에게서 훔쳐 갈 수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해 보이듯 이들은 더이상 함께할 수 없는 ‘우리’를 기다리며 다시 함께할 꿈같은 날들을 기다린다. 진짜 가족보다 더 깊은 유대와 정을 느끼는 가족. 애초에 가족의 시작은 혈연이 아님에도, 가족은 무조건 혈연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람들의 고정관념에 ‘시바타 가족’은 돌을 던진다. 그리고 우리는 이에 반성하듯 비극적인 결말에 눈물을 쏟는다. 그러나 사회는 여전히 차갑고, 단호하다. “버린 게 아니라 주워온 거예요. 버린 사람은 따로 있는 거 아닌가요?”라는 노부요의 말에 경찰은 공감하지 못한다. 오히려 뻔뻔한 범죄자로 인식할 뿐이다. 우리의 현실이 그렇다. 관객들이 영화를 통해 그들 안에 껴서 그들의 생활을 바라보고 함께하며 보는 것을 사회는 알지 못한다. 실제로 이 가족에 대한 뉴스가 세상에 공개된다면 <어느 가족>을 보며 눈물을 흘렸던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눈물을 흘려줄 수 있는가? 세상에 다양한 형태의 가족이 있다는 것을 단순 영화 한 편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세상의 또 다른 ‘시바타 가족’을 위해 이제는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시기가 왔다.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 불쾌한 요소들 절도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유사 매춘 행위를 통해 돈을 벌고, 납치를 돈을 요구하지 않았으니 납치가 아니라며 황당할 정도로 뻔뻔한 이들을 우리는 왜 불쾌하게 바라보지 않는가. 일단 이것이 연민이나 동정은 아니다. 처음 린을 납치해왔을 때도 노부요는 돈이 되는 것을 데려오라고 딴지를 걸기도 했고, 린의 실종 뉴스가 나와도 방귀 뀐 사람이 누구냐고 장난치며 그 상황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는 생각도 않았다. 쇼타가 도둑질을 하던 상점의 사장이 이들의 도둑질을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렇듯 이들의 뻔뻔함에 속아 영화를 보는 내내 이것을 범죄로 받아들이지 않게 되었다. 범죄를 미화하려는 의도는 아니었겠지만, 이것이 좋은 현상인지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독특한 제작방식 2018년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 작품은 스토리 뿐만 아니라 제작 과정도 스토리 만큼이나 놀랍다. ‘액션’을 외치기 전에도 계속해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생각하고, 더 좋은 영화를 만들려는 감독의 욕심은 무엇이든 가능하게 한다. 아직 미완성인 시나리오지만 여름을 놓칠 수 없어 여름 장면만 먼저 찍은 것은 물론이고, 배우의 연기에 맞춰 시나리오를 수정하기도 한다. 또, 당시 칸 영화제 심사위원장이었던 배우 케이트 블란쳇은 "안도 사쿠라의 연기, 특히 우는 장면의 연기가 굉장히 인상적이었고, 앞으로 우리가 찍는 영화에 우는 장면이 있다면 안도 사쿠라를 흉내 냈다고 생각하면 된다"라고 말하며 안도 사쿠라의 연기를 극찬했는데 케이트 블란쳇이 말한 그 장면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안도 사쿠라가 “노부요는 한 번도 엄마라고 칭해본 적이 없어요, 그럴 기회가 있어도 엄마라는 단어를 쓰지 않죠”라고 말한 것을 기억해두고 그것을 그대로 영화 속에 녹여낸 것이다. 독특한 미장센 영화에는 음악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독특한 소재답게 독특한 음악을 사용하여 영화의 분위기를 이끌어간다. 특히 영화의 오프닝인 쇼타와 오사무(릴리 프랭키)가 함께 장을 보는 장면에서의 그 음악이 없었더라면, 지극히 평범한 가족의 장보기로 밖에는 안 보였을 것이다. 더구나 뒤죽박죽 산만해 보이면서도 잘 어우러지는 집 안과 밖의 풍경은 전혀 다른 가족 구성원의 하모니가 잘 어우러진다는 것을 나타내는 듯하다. 이들이 따뜻한 가족이었는지, 뻔뻔한 납치범, 좀도둑에 불과했는지 우리는 모른다. 하지만, 나름대로 사정, 상처를 안고 사는 어른이 과거의 자신을 보는 것 같은 어린아이를 진짜 부모보다 더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사랑해주었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유독 아동학대에 관한 뉴스가 자주 들려오는 요즘, 피해자 아이들에게 굳이 진짜 가족과 함께할 필요 없다고 얘기해주는 이 영화는 세상의 많은 ‘시바타’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건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