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점
- 감독
- 정인엽
- 제작년도
- 1981
- 출연
- 박원숙, 박암, 김한섭, 장미희, 오재두, 하용수
해방 후 스무 번째 배출된 배우 최남현(崔湳鉉)은 해방 후 스무 번째 영화계에 진출한 배우이다. 주증녀(<돌아온 어머니>(이규환)), 황정순(<여성일기>(홍성기)), 주선태(<청춘행로>(장황연)), 황해(<성벽을 뚫고>(한형모))와는 1949년 데뷔 동기인 셈이다. 그가 첫 선 보인 <돌아온 어머니>는 남편이 원양어선을 타고 나간 사이 홀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살아가던 아내(김연실 분)가 아편중독으로 죽고, 원양어선에서 돌아온 남편은 고아가 된 아들을 어렵게 찾게 된다는 얘기다. 이듬해 6.25전쟁이 일어나자 아내 역을 맡은 김연실(1911~1997)이 월북하고 최남현은 연극으로 활로를 찾아야 했다. 그가 영화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기영(金綺泳)의 감독 데뷔작 <죽엄의 상자>(1955)부터였다. 이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1955)을 비롯, <젊은 그들>(신상옥, 1955), <단종애사>(전창근, 1956),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아리랑>(김소동), <잃어버린 청춘>(유현목), <봉이 김선달>(이상 1957, 한홍렬), <돈>(김소동), <자유결혼>(이병일), <인생차압>(이상 1958, 유현목), <오 내고향>(김소동), <젊은 아내>(이강천),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이상 1959, 전창근), <흙>(권영순, 1960), <어부들>(강대진, 1961), <인목대비>(안현철, 1962), <또순이>(박상호, 1963), <혈맥>(김수용, 1963), <추풍령>(전범성, 1965), <하숙생>(정진우, 1966), <싸리골의 신화>(이만희, 1967), <망각>(이만희, 1967), <내시>(신상옥, 1968) 등에 주연과 조연으로 기용된다. [사진] 영화 <돈>에서의 최남현, 왼쪽은 배우 김승호 최남현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최무룡 주연)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진섭은 그의 역할에 대해 “전 화면을 통해 압권이며 무대경험에서 쌓은 액팅이 오버함이 없이 적으나 자연스러운 연기” ( 「능한 연출, 능한 연기 / ‘유전의 애수’를 보고」, 『한국일보』, 1956.07.26) 였다고 언급했다. 그는 이런 호평에 힘입어 1년도 안 돼 타이틀 롤을 맡은 <봉이 김선달>로 ‘최남현이라는 배우의 하나의 지위를 주장’ (「비교적 정돈된 야담영화 / 최남현의 ‘봉이 김선달’」, 『한국일보』, 1957.10.25) 할 수 있는 단계로 올라서게 된다. 이후 탈세와 횡령을 일삼다 법망에서 벗어나려 거짓 자살극까지 꾸민 아우(김승호)에게 "생눈 파먹은 날도적"이라고 욕설을 퍼붓는 형 이중건(<인생차압>), 일제의 식민주의 교육정책에 맞서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는 스승(<이름 없는 별들>), 드센 아내의 성화 속에 품팔이로 어렵게 살아가는 남산기슭 해방촌의 ‘3.8따라지’ 깡통영감(<혈맥>), 국군 낙오병을 숨겨줘야 하는 상황에 이르러 결단을 내려야하는 산골마을의 강노인(<싸리골의 신화>) 등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사진] <혈맥>에서의 최남현과 김승호(왼쪽) 이를테면 <봉이 김선달>, <인생차압> 등에서 보인 해학적인 요소, 처녀를 유린하고, 남의 애인을 가로챈 <유전의 애수>의 건달(인수 역), 피폐한 농촌에서 고리대금으로 농민들을 궁지에 몰아넣는 <돈>의 억조, 딸(윤정희)을 왕의 후궁으로 만들기 위해 사람을 시켜 딸이 사랑하는 하급 관리의 아들(신성일)을 성불구자로 만드는 <내시>의 김찬판 등 악역과 <이름 없는 별들>의 역사 교사 송선생, 을사늑약을 강제로 체결시킨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싸리골의 신화>의 주인공 강노인이 보인 카리스마적 면모가 여기에 해당된다. [사진] <고종황제와 의사 안중근>의 최남현. (사진제공 : 김종원) 그러나 최남현은 배우로서 절정기에 이른 1968년 어느 날 갑자기 고혈압으로 쓰러져 카메라 앞에 다시 나서지 못하게 된다. 10여 년에 걸친 투병생활 끝에 1977년 유현목 감독의 <문>을 계기로 재기, <한네의 승천>(하길종, 1977), <고가(古家)>(조문진, 1977), <족보>(1978, 임권택), <심봤다>(정진우, 1979), <짝코>(임권택, 1980), <물보라>(김수용, 1980) 등에 출연했으나 예전과 같은 활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개화의 물결 속에 전통을 고수하려는 <고가>의 주인공 김노인, 아집에 사로잡힌 <물보라>의 지초시, 뜬 구름 같이 살아온 <심봤다>의 조연, 인생을 달관한 <짝코>의 배역에서 열연하였다. [사진] <물보라>에서의 최남현. 아래는 하용수 광물성의 카리스마와 최다 출연 기록 노경에 접어들면서 기세가 많이 꺾이긴 했으나 누가 뭐라 하든 최남현은 개성이 강한 성격파 배우였다. 그의 연기에서는 쇳소리가 난다. 갱도의 밑바닥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광물성의 낮은 울림- 최남현 연기의 장점은 누구에게서 빌려온 것이 아닌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 데에 있다. (김종원, 「인물영화사 / 중후한 조연 최남현」, 『일간스포츠』, 1987.07.08) 하지만 그에게는 1미터 75센티의 훤칠한 키와 상대를 꿰뚫어 보는듯한 눈매, 중후한 외모가 풍기는 무게감이 있는 반면 유연성이 떨어지는 아쉬움이 있다. 그 대신 뛰어난 연기감각과 형상력, 사람을 휘어잡는 힘이 있다. 이런 결과는 결국 제1회 부일영화상 조연남우상(1958, <인생차압>), 제4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 영화부문 대상(1967, <싸리골의 신화>), 대종상 남우조연상(1966, <추풍령>) 등의 수상으로 나타났다. [사진] <싸리골의 신화>에서의 최남현. 왼쪽 박기태 최남현은 1918년 1월 7일 김소월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에서 최찬수와 박이윤의 6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오산고등보통학교를 나온 후, 법관이나 은행가를 지망하는 급우들과는 달리 무대를 동경했다. 해방 이듬해에 월남하여 극예술협회(신협의 전신)에 들어갔으나 한동안 잔심부름을 하며 따분한 나날을 보내야 했다. 이런 그에게 출연의 기회가 온 것은 1944년 스물여섯 살 때였다. <은하수>라는 연극이었다. <범선 천우호(帆船 天佑號)>(1949)의 무대에 오를 무렵 영화 <돌아온 어머니>에 발탁됐으나 6.25전쟁으로 후속작이 이어지지 못했다. 그 대신 <명우 추해당(秋海棠)>(상록극회, 1951), <통곡>(극협, 1952) 등 연극 활동을 하며 어려운 전란기를 보냈다. 영화 촬영이 계속된 뒤에도 <한강은 흐른다>(신협, 1958) 등에 출연하여 연극과의 인연을 끊지 않았다. 공연이 없는 날엔 주선태, 박암 등 극협 단원들과 술로 회포를 풀었다. [사진]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에서의 최남현 최남현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외아들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80년대 이후에는 술과 마작, 화투놀이로 소일하다시피 했고, 장기간의 투병으로 고급주택 등 모든 재산을 날렸다. 말년에는 양로원 생활을 하며 병상에 있는 아내까지 뒷바라지하다가 1990년 1월 7일 일흔 한 살의 생애를 마쳤다. 그의 마지막 출연작은 대한항공 858기의 폭파 사건을 다룬 신상옥 감독의 <마유미>(1990, 단역)였다. 30대 초반부터 노역과 조연을 가리지 않고 스크린을 누볐던 최남현은 40여 년 동안 720여 편에 출연하는 최다 기록을 세웠다. *
2004년 | 튜브픽쳐스 감독, 각본: 김수현 | 각색: 김소정 김봉훈 | 제작: 황우현 황재우 | 촬영: 김철주 | 미술: 박혜성 | 음악: 이병훈 CAST 순이: 예지원 | 963: 김석훈 | 뭐시기: 정재영 | 개코: 박선우 | 장수로: 장선우 | 막내: 박희순 사연은 이렇습니다. 박수무당인 장수로(장선우)는 자신을 찾아온 여인네들에게 씨를 퍼트렸고, 그래서 배다른 형제들이 탄생합니다. 퀵서비스맨 963(김석훈), 레카차 드라이버 개코(박선우), 그리고 조폭인 뭐시기(정재영). 여기에 순이(예지원)이 가세하며 가족을 이룹니다. 순이는 길에서 뻥튀기를 팔다가 우연히 개코를 만나 가족이 되었고, 장수로는 젊은 순이에게 연정을 품죠. 이처럼 < 귀여워 >는 어느 콩가루 가족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의 현장 공개는 실외와 실내 모두 이뤄졌습니다. 실외는 2002년 11월, 실내는 2003년 1월이었는데요, 영화 개봉이 2004년 11월이었던 걸 감안하면 꽤 간격이 큽니다. 원래는 2003년 5월 개봉이었는데 계속 미뤄졌기 때문이죠. 공개된 장면은 뭐시기가 아버지 장수로를 찾아온 신입니다. 동네 평상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는데요, 딱 봐도 건달기가 줄줄 흐릅니다. 역할을 위해 실제 건달과 합숙하면서 연기를 준비했는데 단 며칠 만에 완벽하게 ‘조폭화’되었다고 하더군요. 뭐시기를 바라보는 장수로 역의 장선우입니다. 후줄근한 옷차림에 파와 콩나물 봉지를 들고 있죠. 사실 <귀여워>의 가장 놀라운 캐스팅은 장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은 장선우 감독의 < 너에게 나를 보낸다 >(1994) < 꽃잎 >(1996) < 나쁜 영화 >(1997) 연출부 출신인데요, 자신의 데뷔작에서 스승을 배우로 모셔온 셈이죠. 원래는 한진희 씨가 맡을 예정이었는데 일정이 지연되면서 무산되었고, 이때 튜브픽쳐스의 황우현 대표가 ‘장선우 캐스팅’이라는 아이디어를 냈다고 하네요. 그런데 의외로 주변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역할 제안을 하게 되었으며, 처음엔 난처해하던 장선우 감독은 농담처럼 “한번 망해보자”며 승락했다고 합니다. 뭐시기가 앉아 있는 평상 근처의 풍경입니다. 황학동 철거촌 주변 아파트죠.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철거는 서울의 천민자본주의적 속성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죠. 황학동 아파트는 60년대 후반 강남의 주상복합 아파트처럼 부의 상징이었는데 10년도 못 가 철거가 거론됐어요. 서울이라는 공간이 갖고 있는 독특한 성격인데요, 끊임없이 변화가 이뤄지지만 실상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어요. 세우고 부수기만 반복할 뿐이죠.” <귀여워>는 지금은 사라진 폐허의 풍경에 카메라를 들이댄 영화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2000년대 초반 서울에 대한 기록의 측면에서도 가치를 지닙니다. <나쁜 영화> 연출부를 끝내고 일란성 세쌍둥이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에 대한 이야기를 구상하던 김수현 감독은, 장수로와 순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어내면서 이야기가 쉽게 풀렸고 그 결과물은 <귀여워>가 됐습니다. 963의 퀵서비스나 개코의 레카차 운전사는 모두 감독이 직접 경험했던 직업이라고 하는데요, 생계를 위해 그런 일을 하다 보니 자연히 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의 야생적 느낌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하네요. 이 영화로 백상예술대상 신인감독상을 수상했습니다. 이 시기 예지원은 < 생활의 발견 >( 홍상수 , 2002) 이후 독보적인 아우라를 지니게 된 배우였죠. 그녀에게 ‘순이’는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는 안성맞춤 캐릭터였습니다. 좁은 아파트 복도에서 촬영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집안 실내 장면은 양수리 세트에서 촬영되었습니다. 2003년 1월에 개봉된 세트 촬영 현장입니다. 밖에서 돌아온 아버지를 둘째 개코가 발톱을 깎으면서 맞이합니다. 이 역할을 맡은 배우가 왠지 낯익다고 느껴지신다면… 맞습니다. ‘하얀 겨울’이라는 노래로 유명한 남성 듀오 ‘미스터 투’의 멤버 박선우입니다. 김수현 감독의 동국대학교 영화과 후배인데요, 파격 캐스팅을 통해 이 영화로 데뷔해 신인답지 않는 노련한 연기를 보여주었습니다. 사실 박선우는 영화음악을 맡기는 줄 알고 연락을 받자마자 김수현 감독에게 달려왔다고 하는데요, 기다리는 건 ‘개코’라는 캐릭터였습니다. 이날 963은 오토바이에 순이를 태우고 질주하다가 함께 집에 들어오는데요, 순이를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는 장수로는, 아들에게 순이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며 아들의 뒷통수를 갈깁니다. 약간은 비뚤어지고 냉소적이면서 내성적인 963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연기하기 가장 까다로운 역할일 텐데요, 김석훈은 기존의 이미지를 벗고 역할을 해냈습니다. 집안 벽에 구멍이 뚫려 있는 구조가 매우 특이합니다. 철거촌에 있는 집인데. 집 안도 철거되어 있는 셈이죠. 좁은 세트 안에서 앵글을 만들어내기 위해 구조를 조금씩 바꿔가며 촬영을 했습니다. 당시 예지원의 매니저는 지금은 고인이 된 하용수 였습니다. <귀여워> 시나리오를 읽고 “혹시 예지원이라는 배우를 잘 알고 쓴 시나리오냐?”고 물을 정도로 적역이었다고 하네요. 배우 역시 순이와 자신이 많이 닮았다고 생각해서인지, 준비 과정부터 남다른 애정을 보여주었고 현장에서 감독에게 가장 힘이 되어 준 배우였다고 합니다. 당시 정재영은 < 킬러들의 수다 >( 장진 , 2001) < 피도 눈물도 없이 >( 류승완 , 2002)로 조금씩 주연급 배우로 발돋움하며 거친 마초 연기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말끝마다 “뭐시기”라는 말을 붙이는 뭐시기는 철거반을 이끄는 건달인데요, 정재영은 거의 완벽하게 역할을 해냅니다. 장수로의 부스스한 헤어스타일도 섬세한 작업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장선우의 연기에 대해 현장 스태프들은 “연기와 연기 아닌 것의 경계에 서 있는 묘한 느낌의 연기”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현장에서 김수현 감독은 매우 꼼꼼한 스타일이었습니다. 감독은 <귀여워>가 결국은 “네 남자가 순이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애쓰는 영화”라며, 남자들의 그 귀여운 모습이 <귀여워>라는 제목의 이유라고 설명했습니다. 이후 감독은 < 창피해 >(2011) < 우리 손자 베스트 >(2017) 등을 내놓았습니다. 김수현 감독은 말합니다. “남자들은 무엇인가 계속 이뤄내려고 하죠. 세상이든 자신이든 끊임없이 변화시키려고 하는데, 정작 되는 일은 아무 것도 없어요. 반면에 순이는 진지한 구석이라고는 없는 가벼운 사람인 것 같지만 그녀의 행동과 사고방식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요. 그녀는 변화를 주도하지 않고, 상대에 반응하면서 변화를 이끌어내죠. 남자들이 뭔가 이루려고 아등바등해서 세상이 더 힘들어진 것 같아요. 그런 점에서 자연에 동조하며, 말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 수 있는 대안을 보여주는 모델이 순이죠.”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침체의 시작 | 1970~1974년 1970년대 초·중반 한국영화계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며 국가 주도의 성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지만, 그해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산업화와 도시화의 어두운 일면을 극명하게 부각했다. 1972년 10월 유신 정권이 탄생했고, 한국 사회는 더욱 경직되어갔다. 물론 사회를 반영하는 영화도 마찬가지였다. 1960년대 한국영화 중흥기는 1970년대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업형 제작사를 육성하겠다는 정부 주도의 정책은 인위적이었던 만큼 효과가 오래가지 않았고, 폐해는 더 커져갔다. 이제 더 이상 영화를 대중오락의 왕자라고 부르기도 힘들었다. 1970년대 내내, 흑백이었지만 텔레비전 보급률이 꾸준히 상승한 반면 전국의 영화관 및 영화 관객 수는 줄어들었다. 불황기, 침체기 그리고 쇠퇴기로 불리는 이 시기, 영화인들은 더 나빠지지 않을 방향을 모색해야만 했다. 1973년 2월, 유신 체제를 반영한 영화법 4차 개정이 있었다. 그 골자는 1)제작사를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전환 2)제작업과 수입업의 통합 3)영화진흥공사의 설립이었다. 1972년 20개이던 영화제작사는 1973년 12개로 줄었고, 그 12개사에 제작권을 부여해 연간 제작편수를 130편으로 묶었다. 47편으로 한정한 수입권도 12개 제작사에만 나눠주었다. 국산영화 3편을 제작하면 외화 쿼터 1편을 부여했기 때문에, 당시 한국영화는 외국영화 수입 쿼터를 받는 수단으로 전락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제작사들은 졸속으로 영화를 만들었고, 제작비 대비 흥행 성적이 안정적인 저예산 액션영화 장르가 유행한 이유였다. 특히 이런 유의 영화는 네거티브 필름을 반만 써서 촬영하는 테크니스코프 사이즈로 만들어져, 제작비를 아끼는 대신 완성도는 포기했다. 외화 쿼터를 더 따내기 위한 방법은 정부가 제시하는 ‘국책영화’ ‘우수영화’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었다. 제작사들은 관객보다는 정권의 기호에 부응한 반공영화, 새마을영화를 만들었다. 한편 ‘한국영화의 육성과 발전’을 슬로건으로 내건 영화진흥공사가 발족되어 유신 정권의 지배구조를 영화 산업 내부로 뿌리내리는 역할을 맡았다. 영화계의 불황을 타개하겠다는 당국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산업의 불황은 가속화되었다. 1971년까지 200편을 넘겼던 한국영화 편수는, 검열 편수 기준으로 1972년 122편, 1973년 125편, 1974년 141편을 기록했다. 이러한 침체 일로의 영화계에 일순간 활력을 불어넣은 작품이 바로 이장호 의 < 별들의 고향 >이었다. 행운아에서 풍운아로 1945년 5월 서울에서 출생한 이장호 는, 흥미롭게도 영화 검열관이던 아버지 덕에 어릴 때부터 영화와 가깝게 지냈다. 홍익대 건축미술학과에 입학했지만 제도권 교육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부친의 권유로 신필림에 입사하게 된다. 그는 신상옥 감독 등의 연출부 생활을 했으나 적극적으로 임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연출부를 중도에 그만두기도 하고 극단 생활을 위해 신필림을 들락날락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일을 모색했다. 그의 인생은 말 그대로 한순간에 바뀌었다. 1973년 당대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별들의 고향」의 판권을 우여곡절 끝에 확보한 것이다. 사실 소설가 최인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알고 지낸 죽마고우였는데, 그렇다고 감독 데뷔도 하지 않은 친구에게 덜컥 판권을 넘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장호는 동생의 대학등록금을 최인호의 집에 던져놓고 오는 막무가내로, 결국 승낙을 받아낸다. 영화화 권리는 확보했지만 이후의 과정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스승 신상옥 감독이 데뷔는 시켜주지만 신필름의 노장 이형표 감독에게 촬영을 맡긴다고 하자, 연출권을 확보하기 힘들 것을 직감한 그는 신필림을 도망치듯 떠나 하길종 감독이 소개한 화천공사로 옮긴다. 도제 시스템이 확고하던 시절, 연출부 제2조수 출신의 영화청년이 일순간 감독으로 데뷔한 것은 여하튼 기적 같은 일이었다. 눈으로 뒤덮인 광나루의 백사장에 도착해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다 즉흥적으로 장면들을 만들어나간 것이 첫 연출 풍경이었다는 일화처럼 행운과 돌파력, 천재적 기질 사이의 어딘가에서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했고, 이장호는 46만이라는, 당시로는 전무후무한 흥행 성적으로 충무로의 스타 감독이 되었다. 1975년 연배가 위인 하길종, 김호선 등과 결성한 ‘영상시대’를 통해 ‘뉴시네마 운동’의 흐름을 이끌던 그는, 1976년 연예인 대마초 파동으로 감독직을 박탈당하게 된다. 촉망받는 젊은 감독에서 순식간에 낭인으로 전락한 4년간의 시간은, 그가 한국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979년 12월 유신 정권 종식으로 감독 자격을 회복한 그는 그간의 고민을 담아 연출한 < 바람불어 좋은 날 >(1980)로 재기에 성공한다. 이후 작가주의적 인장이 새겨진 < 바보선언 >(1983), < 과부춤 >(1983)의 흥행 실패로 위기감을 느꼈지만, 보란 듯이 < 무릎과 무릎 사이 > (1984), < 어우동 >(1985)을 히트시키며 상업적 감각을 입증하기도 했다. 1987년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 이후의 영화는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30대 후반의 이장호 감독. <과부춤> 촬영 현장에서 아마추어리즘이 만든 참신함 1972년 9월 「조선일보」에서 연재를 시작한 「별들의 고향」은 연재 중은 물론이고, 단행본으로 출간된 1973년 한 해에만 15만 부가 팔릴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이장호 가 연출의 기회를 잡고 개봉 초기 관객의 주목을 끌어낸 것은 당대 최고의 소설을 판권으로 확보한 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하지만 단관 개봉 시절,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석 달을 상영하며 4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기록은, 영화 자체의 힘이 분명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기성 감독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맡았다면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 별들의 고향 >이 탄생할 수 있었을까. 거칠고 투박하지만 신선하고 감각적인 이 영화를 만날 수 있었을까. 당시 충무로의 선배 감독 다수가 판권을 탐내는 상황에서, 특유의 직관과 돌파력으로 이런저런 난관을 이겨낸 이장호는 어떻게 한국영화의 새로운 분기점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카메라를 직접 잡는 신상옥 감독 특유의 촬영 현장에서 게다가 제2조감독에 머물렀기 때문에 연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하지만 서구영화를 섭렵했던 영화청년으로서의 세월이 그의 연출 방향을 직관적으로 알려주었다. 그냥 자기 느낌대로 한 것이다. 물론 당대 최고의 촬영기사 장석준 이 함께한 것은 천우신조였다. 이장호는 자신이 즐겨본 일본의 전문 사진잡지 「아사히 카메라」에서 스크랩한 이미지들을 장석준 기사에게 보여주었고, 그는 척하고 구도를 잡아냈다. 영상뿐만 아니라 음악도 큰 몫을 했다. 이전의 한국영화는 시간도 없고 돈도 없어, 영화음악의 대가들이 녹음실에 오케스트라를 불러 잠깐 맞춰본 뒤 일사천리로 음악을 녹음하는 식이었다. 이장호는 고교 후배인 가수 이장희 에게 음악을 맡겼고, 아예 레코드 스튜디오에 자리 잡고 무려 40여 일을 투자했다. 이장희가 작곡하고 노래를 부르고 기타리스트 강근식 이 연주한 <별들의 고향>의 영화음악은, 국내 첫 OST 음반으로도 발매되어 영화만큼 성공을 거뒀다(그 이전의 한국영화 음반은 주제가가 수록된 것이지만, 이 앨범은 문자 그대로 ‘오리지널 사운드 트랙’이었다). 물론 기존의 전통적인 방식을 벗어나 혹은 잘 몰라서, 신선하게 음악을 배치한 것도 이장호의 감각을 기반으로 했다. 이장희가 부르는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한 소녀가 울고 있네’가 흐르는 장면들의 참신함이 특히 그렇다. 물론 시퀀스 전체를 마치 뮤직비디오처럼 음악을 전면에 내세워 연결한 장면들은, < 졸업 The Graduate>(마이크 니콜스, 1967) 같은 뉴 아메리칸 시네마를 떠올리게 만든다. 이장호가 “아마추어리즘의 승리”라고 규정한 것처럼, <별들의 고향>이라는 희대의 흥행작은 새로운 세대가 그들의 느낌대로 밀고 나간 덕분이었다. 사실 이 영화가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와 같은 혁신을 일으켰다고 말하기는 힘들 것이다. 나운규가 그리피스의 대작 멜로드라마를 염두에 두고 < 아리랑 >(1926)을 만들고, 이만희 가 할리우드의 빼어난 장르영화와 유럽의 예술영화를 소화해 < 만추 >(1966)를 만든 것처럼, 한국 상업영화의 새로움은 늘 서구 영화의 언어와 문법에서 힌트를 찾았다. 이장호 영화의 새로움 역시 서구 영화의 고전과 현대작을 섭렵한 영화광 출신의 감각에서 나온 것이었다. 물론 이는 <별들의 고향>에서 표면적으로 보이는 <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장 뤽 고다르, 1959)의 장 폴 벨몽도의 중절모나 < 상하이에서 온 여인 The Lady from Shanghai>(오손 웰스, 1947)의 거울의 방 같은 설정을 넘어서는 문제다. 분명한 것은 이 영화가 기존의 한국영화와는 다른 방향으로 물꼬를 틀었다는 사실이다. "오랜만에 같이 누워보는군"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 같은 대사가 흐르던 바로 그 장면 멜로드라마와 새로움 사이 < 별들의 고향 >은 20대 중반의 순진하고 발랄한 여성 경아( 안인숙 )와 그녀가 만난 4명의 남자가 만들어내는 이야기다. 사실 영화는 내러티브의 밀도가 희박한 편으로, 시간순으로 줄거리를 정리하기 위해서는 소설을 빌려 그 행간을 채워야 한다. 작은 회사 경리인 경아는 직장 선배인 영석( 하용수 )의 구애로 연인으로 발전하지만, 그는 아이까지 지운 그녀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두 번째 남자는 중년의 만준( 윤일봉 )이다. 경아는 만준의 두 번째 부인이 되지만, 경아를 닮은 전부인이 의처증으로 자살한 것과 경아의 낙태 경험이 밝혀지면서 파경을 맞는다. 이후 경아는 호스티스가 되고 화가 문오( 신성일 )를 만난다. 삶의 의욕을 잃었던 둘은 동거를 시작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지만, 폭력적으로 그녀에 집착하는 옛 애인 동혁( 백일섭 )이 찾아오면서, 문오도 그녀와 헤어지게 된다. 고향으로 떠났다 서울로 돌아온 문오는 1년 반 만에 술집에 있는 경아를 만나고, 그녀가 잠든 사이 돈을 두고 나온다. 그리고 1년 후 경아는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눈밭에서 죽음을 맞는다. 영화의 시작과 끝은, 문오가 유골함을 들고 경아를 회상하는 장면과 한강에 그녀의 재를 뿌리는 것이다. 영화는 이야기를 촘촘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소설에 기반을 둔 것이 그 이유겠지만, 현장에서 즉흥적으로 연출하며 장면을 만든 결과이기도 했다. 촬영해놓은 필름을 돌려보며 편집실에서 구성을 시작했다는 이장호의 증언처럼, 그는 편집을 통해 아마추어리즘을 참신함으로 바꿔놓았다. 이 영화는 플래시백의 리듬도 균일하지 않고 오히려 복잡하지만 이는 되레 관객에게 긴장감을 주고 영화 속으로 몰입시킨다는 점에서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영화의 발전도 계단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별들의 고향>은 자연스럽게 한국의 관객을 한 단계 성숙시킨 영화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냉정하게 보자면, <별들의 고향> 역시 이전 한국영화의 멜로드라마적 감수성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지금의 감각으로는 영화의 중반부 두 번째 남자 만준과의 에피소드가 특히 그렇다. 하지만 경아로 분한 안인숙의 연기가 이마저도 상쇄시킨다. 아역 배우 출신인 그녀는 여리고 순진하고 발랄하지만 도시의 비정한 남자들에게 버림받는 경아 캐릭터를 훌륭하게 소화해, 영화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한편 이 영화는 여성의 수난담과 성적 과잉을 관음증적 볼거리로 제공하는 호스티스 영화의 출발점으로도 평가된다. 하지만 카메라가 경아를 잡아내는 구도나 쇼트들의 배치를 자세히 보면 여성의 입장에 공감하고 가부장적 폭력을 고발하는 것으로도 읽어낼 수 있다.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을 캐릭터 경아역의 안인숙 호스티스 영화와 청년 영화의 산파가 되다 < 별들의 고향 >이 출현한 덕분에 1970년대 중반의 한국영화와 관객들도 새로운 활력을 얻은 것은 분명하다. <별들의 고향>이 선취한 도시 속 젊은 여성의 이야기는, 김호선 감독에 의해 세련돼졌다. 조선작의 연작소설을 원작으로 한 < 영자의 전성시대 > (1975)가 36만 관객을, 조해일의 장편소설을 원작으로 한 < 겨울여자 >(1977)가 58만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과 비평 양쪽을 두루 만족시켰다. 하지만 이 작품들의 성공은 1970년대 후반, 순수한 여주인공이 호스티스로 전락해 여러 남성을 거치는 과정을 관음증적으로 전시하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가 양산되는 계기가 된다. ‘청년 영화’로서의 선명한 줄기는 미국 영화과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하길종 이 만들어냈다. 통기타. 청바지.생맥주로 대표되는 청년 문화의 생기에, 당대 청년들의 저항과 체념의 정서까지 담아낸 < 바보들의 행진 >(1975)이 바로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