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세스 하이드
- 감독
- 세르쥬 보종
- 제작년도
- 2017
- 출연
- 호세 가르시아, 로망 뒤리스, 이자벨 위페르
※<어스> 결말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그림자는 내가 움직이는 대로 움직여야 지당하다. 주인공 애들레이드(루피타 니옹고, 이하 애디)가 아름다운 발레 동작을 선보이면 그림자가 따라서 춤추듯이. 그러나 그림자는 몇 번이고 넘어지고 휘청이며 자신만의 춤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느 날 밤 애디를 찾아와 귀를 긁는 목소리로 말한다. 사실 너야말로 내게 묶인(tethered) 그림자라고. <어스>는 전형적인 공포 영화다. 날씨 좋은 시기에 휴가를 떠나면 아주 혼쭐난다는 것을 우리는 <호스텔>에서, <트루스 오어 데어>에서, 혹은 <미드소마>에서 이미 봤다. 한밤중에 정상이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집을 침입하는 경우는 <더 퍼지>나 <노크: 낯선 자들의 방문>에서 본 것 같다. 인물들이 통통 튀는가 하면 글쎄. 이 가족은 아주 매력적이지만, 우리는 그들과 구면이다. 애디 가족은 그림으로 그린 듯한 ‘미국인’들이다. 꼭 심슨네 가족들처럼, 아둔한 아빠와 모성이 강한 엄마, 똑 부러지는 딸과 조금 덜 큰 아들의 조합은 영화 초반부에 이미 관객을 완벽히 영화 속 세계에 적응하게 한다. 새로울 것은 하나도 없다. 이제 전형적인 가족이 전형적인 장소에서 전형적인 사건으로부터 무사히 벗어나면 이 전형적인 영화의 공포는 해소될 것이다. 그러나 <어스>의 스토리는 전형적이지 않은 반전을 수반한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우리는 주인공이 사실 어린 시절 지상으로 탈출한 복제 인간이며, 레드야말로 지상 출신의 ‘진짜 애들레이드’란 것을 알게 된다. 레드와 사투 끝에 납치당한 아들을 구출한 주인공은 가족과 함께 차를 타고 떠나고, 뒷자리에 앉아 진짜 애디가 길을 잃고 자신과 만나 뒤바뀌었던 때를 회상한다. 그리고 문득 아들을 쳐다보다가 묘한 미소를 짓는다. 아들은 늘 가지고 다니는 주황색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 가족이 탄 차는 계속 달리고 길에는 복제인간들의 퍼포먼스가 길게 이어진다. 영화는 이렇게 끝난다. 하지만 찝찝한 공포감은 끝나지 않은 채, 손에 손을 잡고 선 복제인간들처럼 불길하게 늘어져 있다. 이 영화가 독창적인 지점은 침입자에 대한 공포로 시작해서 자신에 대한 공포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이야기 초반부에서 의문의 침입자는 나와 닮은 남이었다. 물론 얼굴이 닮은 기이한 자들에 대고 아들 제이슨은 “그들은 우리잖아. (They are us.)”라고 말하지만, 사건이 진행되면서 한번이라도 주인공 가족이 침입자들을 ‘나’라고 느낀 적이 있었나 싶다. 게이브는 에이브러햄을 처치할 때 주저했나? 제이슨은 플루토의 화상을 보고 동정심을 느꼈나? 백인 친구의 집에서 그들의 복제 인간을 죽였을 때도 마찬가지다. 친구의 얼굴을 한 사람들을 죽이기 위한 고민은 일 분도 할 수 없다. 사유지를 침입하지 말라던 중산층 가족은 이제 다른 중산층 가족의 사유지에서 복제인간 일가족을 전멸시키는 전사로 거듭난다. 그들은 우리지만, 우리는 그들이 아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내가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애디의 숨겨진 과거 때문이다. 그래서 오직 애디만이 죽어가는 엄브레를 안타깝게 쳐다보고, 플루토를 향해 손을 뻗는다. 애디가 레드를 처치하는 장면에선 그녀는 웃으며 괴성을 지르는데 그 모습이 언뜻 지하인처럼 난폭해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아들 제이슨은 안아주는 엄마에게 팔을 두르지 못한 채 엉거주춤하고, 엄마의 미소에 화답하는 대신 가면을 쓰고 얼굴을 숨긴다. <어스>의 공포는 여기에 있다. 공포를 야기하는 원인과 그것을 느끼는 대상의 경계는 일차적으로 서로 꼭 닮은 겉모습을 통해 흔들리며, 반전을 통해 완전히 전이되어 버린다. 나와 똑같은 존재인 ‘도플갱어’에 대한 공포는 사실 퍽 오래된 소재다. 이 소재를 가지고 가장 대중적으로 어필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가 나온 게 벌써 1886년의 일이니까. 이렇듯 나를 닮았으나 더 흉포한 존재, 말하자면 무의식 속 리비도에 대한 불안은 오랫동안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변주되어 왔다. 도플갱어 호러는 좀비나 언데드에 대한 공포를 닮았다. 한때 죽어 묻혔던 것들이 기이한 모습으로 귀환하는 좀비 호러처럼, 도플갱어라는 소재에는 내 손으로 목을 졸라 무의식 깊은 곳에 묻어 놓은 흉측한 나, 열화된 나, 어두운 나의 귀환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반영되어 있다. <어스>는 이 불쾌한 공포감을 극대화하여 귀환하는 자와 나 자신의 위치를 전복 시켜 버린다. 애초에 내가 귀환한 자다. 내가 바로 흉측한 나, 열화되고 어두운 자다. 그래서 관객은 애디의 시점을 공유하며 스토리를 따라가다가, 애디가 과거를 떠올리고 미소 짓는 그 순간 함께 미소 짓는 어정쩡한 처지에 놓여야만 한다. 당황스러운 이 순간이 이 영화가 선사하는 경험이다. 주인공의 시점이 도플갱어의 시점으로 급속하게 전환되고, 우리도 그 순간 도플갱어의 시점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드디어 영화 속 이리 뛰고 저리 뛰며 고생하던 ‘저들’의 이야기가, 나와 나의 무의식 속 도플갱어인 ‘우리’의 이야기가 된다. 사르트르가 ‘타인은 지옥’이라고 했던가? 그러나 적어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지옥은 나와 나 사이의 가느다란 경계를 따라 존재한다. 그러므로 애디의 불길한 미소는 우리가 ‘진짜 나’라고 느끼는 그 아슬아슬한 경계를 빼앗기는 순간이다. 조던 필 감독의 전작 <겟 아웃>이 신체 강탈의 공포를 담았다면 <어스>는 정체성 강탈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결말 부분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파괴되기 때문이다. 애디는 누구인가? 애디가 지하인이라는 이유로 이제껏 살아온 모든 일상을 부정해야 하는가? 그러나 애디라는 존재가 분명 따로 존재했는데, 애디의 이름으로 애디의 삶을 살았다고 그가 진짜가 되는가? 한편 레드는 가여운 피해자인가, 미친 사이코패스인가? 그러면 이제까지 애디를 응원한 나는 누구 편인가? 답하기 어려운 질문은 영화가 끝나도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래서 <어스>는 무섭고 거북하다. 쿨한 음악과 강렬한 색감으로 무장했지만, 정체 모를 터널처럼 어둡고 끝이 없다. 영화 초반으로 돌아와서, 의미심장한 인상을 남기는 예레미야 11장 11절의 내용은 이렇다.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이와 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리니 그들이 피할 수 없을 것이라 그들이 내게 부르짖을지라도 내가 듣지 아니할 것이니••••••.” 아무렴, 우리는 재앙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신이 내린 최악의 재앙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일 테니.
나의 <보이후드>를 떠나보내며 근래 본 영상 중 가장 가슴이 두근거렸던 건 올해 블리즈컨에서 공개된 <디아블로4>의 시네마틱 트레일러였다. 호러 분위기가 물씬 묻어나는 이 영상은 단편영화라 해도 손색없는 완성도로 보는 이를 홀린다. 트레일러는 게임을 위한 일종의 예고 영상이지만 게임 <디아블로>를 전혀 모르는 사람도 영상 속 소환된 악마 릴리트의 오싹한 자태를 마주하는 순간 감각적으로 반할 만 하다. 무표정하게 허공을 응시하던 시선이 아래로 흘낏 향할 때 형용하기 어려운 감흥을 자아내기 때문이다. 이건 독립된 창작물로 충분히 즐길만한 영상이다. 하지만 <디아블로>의 설정과 사전 정보를 숙지할 때 이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쾌감을 선사하리라는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한 단계 나아가 이 영상을 접한 시청자는 게임을 실제로 플레이 하면 릴리트의 오묘한 눈빛을 계속 떠올리며 또 다른 생생함을 체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본래 시네마틱 트레일러의 목적이니 말이다. 다시 말해 <디아블로>의 시네마틱 트레일러는 9분 20초의 단독작품인 동시에 안팎으로 연결되는 의미망을 통해 확장될 가능성을 품고 있다. 엉뚱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비슷한 사례를 픽사의 애니메이션 < 업 UP >(피터 닥터, 밥 비터슨, 2009)에서 발견한다. <UP>이 픽사 작품 중 가장 좋아하는 영화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UP>의 초반 칼의 인생을 압축한 무성 몽타주 시퀀스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상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열 개 남짓한 쇼트로 구성된 이 몽타주 시퀀스의 역할은 이후 전개될 영화를 위해 캐릭터의 전사(前史)를 설명해주는 쪽에 가깝다. 하지만 감히 단언컨대 이 우아한 몽타주 시퀀스는 <UP>의 전체 서사보다 훨씬 격렬하고 효과적으로 관객의 마음을 뒤흔든다. 고전무성영화를 연상시키는 이 몽타주 없이 <UP>의 정점은 성립되지 않는다. 반대로 칼의 70년 인생을 3분 남짓한 시간에 고스란히 보여주는 이 시퀀스는 <UP>을 다 보지 않더라도 충분히 감동적이다. 완결성을 지닌 짧은 영상들에 감탄하는 일이 잦아지면서 문득 한 편의 영화를 어떻게 감상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한다. 한 편의 영화는 감독에 의해 창조된 고유의 호흡과 리듬 안에서 존재한다. 그러나 종종 단일영화에 구속되지 않는 순간들을 마주하며 ‘어떻게 즐길 것인지’에 대한 질문이 피어오른다. < 어벤져스: 엔드게임 >(2019)(이하 <엔드게임>에 별 네 개 반을 준 뒤 한동안 ‘영화 보는 안목이 형편없다’는 쓴 소리에 시달렸다. 별점은 최소한의 가이드라고 생각해온 입장에서 별점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다만 비판이 따라올 걸 짐작하면서도 굳이 <엔드게임>에 높은 평가를 남긴 건 일종의 고백이자 포스트 시네마를 향한 탐색 때문이었다. <엔드게임>이 잘 만든 영화냐고 묻는다면 선뜻 고개를 끄덕일 수 어렵다. 단순히 기계적인 완성도로만 놓고 봐도 전작인 <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 >(2018)가 좀 더 신선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인피니티 워>가 발상을 뒤집어 타노스를 중심으로 히어로들의 역학관계를 재배치했다면 <엔드게임>은 벌려 놓은 이야기들을 수습하는데 공을 들인다. 전 우주를 무대로 하면서 흩어진 이야기들을 모아나가는 방식 역시 <인피니티 워>가 <엔드게임>보다 좀 더 영리하고 실수가 적다. <인피니티 워>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 대단원의 서막답게 이야기의 탁월한 균형 감각이 빛난다. 수많은 캐릭터를 적재적소 배치하는 조율 능력이야 말로 오늘날의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를 완성한 원동력이다. 반면 <엔드게임>은 서사는 좋게 말해 안정적이고 나쁘게 보자면 다소 밋밋하다. 우연과 행운이 남발되는 등 이야기의 구멍이 꽤 있는 편이고 토니의 장례식과 캡틴의 은퇴 등 후반부 사족도 적지 않게 늘어진다. 무엇보다 <인피니티 워>가 깔아놓은 무대를 반복한다는 점에서 그다지 놀라움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직하게 나를 뒤흔든 쪽은 <엔드게임>이었다. <엔드게임>에는 11년간의 축적이 있었기에 가능한 반칙 같은 감동이 있다. 나 역시 개별 영화는 각각의 성취로만 판단되어야 한다는 걸 모르진 않는다. 거장의 작품이라고 더 보탤 것도 없고 신인의 영화라고 얕봐서도 안 된다. 영화는 러닝 타임 안에 구축된 독립된 세계이며 온전히 영화 내적인 완성도로 평가 받아야 마땅하다. 하지만 적어도 내겐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만 감상하는 일이 불가능했다. 상영 시간 내내 불쑥불쑥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다른 영화들이 치고 들어와 마치 추억의 앨범을 꺼내보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과거로 돌아간 토니 스타크가 아버지를 대면할 때 < 아이언맨3 >에서 홀로그램으로 재현된 자신의 기억을 마주하는 장면이 생각났다. 배불뚝이가 된 토르가 과거의 아스가르드로 몰래 잠입할 땐 < 토르: 라그나로크 >는 물론 고전 오페라 같던 < 토르 > 1편의 그림자를 발견한다. 캡틴 아메리카가 < 어벤져스 > 1편 시점의 스타크 타워로 잠입해 들어가는 장면은 또 어떤가. 캡틴이 귓속말로 “헤일, 하이드라”라고 속삭이며 < 윈터 솔저 >의 유명한 엘리베이터 씬을 재현할 때의 즐거움을 개별영화에서 느낄 수 있을까. <엔드게임>은 한 편의 영화라기보다는 차라리 연속극의 최종장에 가깝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11년의 세월동안 개별영화 간의 경계를 허물고 세계관을 이어 붙여 거대한 우주를 창조했다. 이건 단순히 설정과 정보를 공유한다는 차원을 넘어 관객의 시간이 축적되어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체험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영화들은 일견 매우 느슨하면서도 강력한 방식으로 연결되어 있다. 개별영화로도 충분히 즐길 만 하지만 22편의 경험들이 축적되었을 때 발생하는 쾌감과는 비교가 안 된다. 이 새로운 종류의 어트렉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전통적인 영화의 개념으로는 설명하기 쉽지 않다. 혹은 평가 절하 할 수 밖에 없다. <엔드게임>을 철저히 개별영화로 논하자면 무난한 완성도의 기획영화의 범주를 벗어나기 힘들다. 무엇보다 이 영화는 3시간의 상영시간이 기계적인 조립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 아이리시맨 >(2019)이 비슷한 3시간동안 한 호흡으로 감싸여 있다면, <엔드게임>은 1시간은 분절된 3편의 에피소드가 연속되는 형태다. 첫 1시간은 타노스의 핑거 스냅으로 전 우주의 절반이 날아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상실감을 다룬다. 이 에피소드는 한적한 행성에서 소임을 마치고 농사를 짓고 있는 타노스의 목을 날려버리는 것으로 시작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문제의 원인을 제거했지만 상처는 회복할 수 없고 남겨진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오늘을 버텨야만 한다. 블록버스터 프렌차이즈 영화에서 이렇게 무겁고 정적인 분위기로 시작하는 건 이례적인 선택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전작에서 한껏 끌어올렸던 피날레의 분위기를 차분히 가라앉힌다는 점에서 영리하고 합리적인 판단이다. 이어지는 1시간은 시간여행을 통해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오는 미션을 보여주는데 <어벤져스> 초창기의 아기자기한 맛이 살아있는 에피소드다. 무엇보다 이 파트는 11년을 이어온 팬들을 위한 서비스라는 인상이 강하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의 지난 시간으로 돌아가 숨겨진 얼굴을 다시 대면하는 건 개별영화 바깥으로 체험을 확장시키는 효과가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대단원의 1시간은 그야말로 블록버스터답게 물량을 쏟아 붓는다. 닥터 스트레인지가 미리 본 미래의 계획이 발동하여 모든 히어로들이 한 자리에 집결할 때 짜릿한 전율이 관통한다. 이건 <엔드게임>의 피날레가 아니라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가 11년 동안 준비한 피날레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무난한 완성도와 쉽게 가라앉히기 힘든 흥분 사이에는 거대한 괴리가 있다. 이 좁혀지지 않는 간극을 어떻게 설명할지가 나의 고민과 질문이었다. 다시 돌아가, 명쾌한 답을 낼 순 없었지만 우선 내가 느낀 ‘감정’에 충실하기로 하고 높은 별점을 매겼다. 시간이 지나 답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얼마 전 마틴 스코세이지는 <아이리시맨> 개봉과 함께 마블영화에 점령된 극장가에 일침을 가하며 ‘시네마’ 논쟁을 촉발시켰는데 그가 자신의 견해를 밝힌 뉴욕타임즈의 기고문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글의 제목은 “왜 마블영화는 시네마가 아닌가”였지만 나는 거꾸로 거기서 마블영화의 가능성을 보았다. 마틴 스콜세이지는 말한다. “히치콕 자체가 하나의 프랜차이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달리 말해 그는 우리의 프렌차이즈였다. 새로운 히치콕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였다....(중략) 극장 안에 형성된 관객과 영화 사이의 팽팽한 교감 혹은 화학작용 때문이었고, 이를 실제로 체험하는 것은 가히 짜릿했다.” 여기서 ‘히치콕 영화’를 ‘마블 영화’로 바꾸면 이상한 짓일까. <엔드게임>은 21세기의 프렌차이즈이며 그 자체로 하나의 이벤트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 <엔드게임>과 같은 종류의 영화들은 극장이란 한정된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영화 바깥으로 촉수를 넓혀나간다는 점이다. 개별영화가 가지는 팽팽한 교감과 화학반응은 분명 <아이리시맨>과 같은 시네마(좁혀서는 내러티브 영화)에 비해 떨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엔드게임>은 3개의 분리된 에피소드를 느슨하게 조립한 구성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대로 이 분리된 에피소드들, 조각난 시퀀스들은 몇 년 전 다른 영화에서 뿌려놓은 떡밥들을 회수하고 연결되기 시작한다. <엔드게임>은 관객의 체험 속에서 <아이언맨>의 특정상황과 연결되고, < 앤트맨 >의 장면들과 이어지며, < 닥터 스트레인지 >의 세계와 겹쳐진다. 요컨대 이것은 한 편의 영화가 아니다. 한 편의 영화, 극장이라는 밀폐된 시공간으로 볼 땐 느슨하고 조악해보였던 조각들이 11년의 세월동안 뿌려놓은 다른 조각들을 소환하며 전혀 다른 종류의 서사를 구축해나가는 것이다. 나는 도저히 <엔드게임>을 한 편의 영화로 감상할 수 없다. 굳이 비슷한 사례를 찾는다면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이 12년 동안 촬영한 < 보이후드 >(2014)를 봤을 때 유사한 감흥을 느꼈다. <보이후드>에는 서사의 절정이 없다. 매 순간 진실이 묻어있고 각자의 정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관객을 향해 열려 있는 영화다. <보이후드>가 시간을 압축하는 방식을 통해 시간 흐름 자체를 목격할 수 있다면, <엔드게임>은 11년의 체험과 축적을 통해 각자의 시간을 기억할 수 있도록 유도한다. <아이언맨>의 탄생을 목격한 내가 핑거스냅을 튕기는 아이언맨의 대사 ‘나는 아이언맨이다’를 듣는 다는 건 단순히 한 편의 영화 안에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엔드게임>이 영화사에 남을 걸작이라고 칭송하고 싶진 않다. 그것이 의도된 것인지, 미학적인 목적을 지니고 있는지도 아직은 모르겠다. 내가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이른바 세계가 ‘변했다’는 사실이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아니 <엔드게임>은 비록 영화의 껍질, 영화산업의 육체를 빌리고 있지만 이미 ‘(전통적인 개념의) 영화가 아닌 어떤 것’이다. 21세기 프렌차이즈의 결과물을 보며 새로운 종류의 체험이 당도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엔드게임>의 피날레에서 느꼈던 전율은 단지 3시간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처 의식하지 못한 사이 어느덧 11년의 세월동안 길들여진 끝에 나온 보상이었다. 가치판단을 잠시 미뤄두고 이야기해보자. 이제 영화를 온전히 영화라는 틀 안에 가둬놓을 수 있을까. 여전히 전통적인 개념을 갈고 닦아 나가는 시네마들도 있겠지만 동시에 이제 극장의 문이 열려버렸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우주의 탄생 역시 사실 우연이었다. <아이언맨>의 성공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오늘의 결과를 낳았다.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끝은 필연과 의지의 산물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아니 드디어 한편의 영화가 끝이 났다. 물론 또 다른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계속 태어날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 다시 그 세계에 첫 발을 들일 엄두가 나지 않는다. 교통사고처럼 나를 덮쳤던 2008년 <아이언맨> 이후 11년 간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는 즐거움만큼이나 피로도 안겨주었다. 어쩌면 <엔드게임>을 향한 나의 찬사와 박수에는 이별의 홀가분함도 약간은 묻어 있으리라. 이렇게, 아니 이제야 한 편의 영화를 떠나보낸다.
쿠엔틴 타란티노가 찰스 맨슨 일당의 샤론 테이트 살해 사건을 다룬 영화를 만든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기분은 묘했다, 타란티노의 관심은 언제나 현실이 아니라 영화였다. 그가 열광하며 보았던 온갖 영화들에서 증폭되고 변형되어 황홀한 영화적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 그것은 완벽한 피안이었다. 현실에서는 결코 이룰 수 없는 찰나를 만끽하는 영화적 리얼리티의 낙원을 타란티노는 창조했다. 역시 타란티노였다.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2019)는 샤론 테이트의 살해를 다루는 영화가 아니라 그녀가 살았던 시대의 영화들을 타란티노의 방식으로 재구성한 세계였다. 샤론 테이트가 죽지 않은 세계를 보여주는 평행우주랄까. 마블이 < 어벤져스:엔드게임 >(2019)에서 핑거스텝으로 사라진 사람들을 되살리는 평행우주를 만들었던 것과도 비슷하다, 타란티노는 영화 속에 샤론 테이트가 영원히 살아 있는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그곳에서 샤론 테이트는 어떤 미래를 살았을까. 영화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스타가 되었을까. 아니면 로만 폴란스키의 아내로서 살아가다가 이혼하고 또 다른 삶으로 나아갔을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중심은 그러나 샤론 테이트가 아니다. 한때 TV 드라마 <바운티 로>의 주연으로 인기를 끌었다가 서서히 내려가고 있는 릭 달튼과 그의 스턴트 배우인 클리프 부스다. 미국이 아닌 이탈리아에서 서부극을 찍으러 가는 릭 달튼의 행보를 보면 당연히 지금까지 거장으로 현존하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젊은 시절이 겹치게 된다. 1959-65년까지 방영된 드라마 <로하이드>로 인기를 얻었고, 1964년부터 세르지오 레오네의 < 황야의 무법자 <(Fistful of Dollars), < 석양의 무법자 >(For a Few Dollars More), < 석양에 돌아오다 >(The Good, the Bad and the Ugly)를 찍으며 또 다른 명성을 얻은 클린트 이스트우드. 릭 달튼은 평행우주의 클린트 이스트우드다. 타란티노는 영화 속에 실제 배우와 영화들을 마구 던져놓는다. 여자들은 샌님들만 좋아한다고 투덜대는 스티브 맥퀸이 나오고, <대탈주>에 대신 릭 달튼이 출연한 상상을 보여준다. 최고라고 으스대는 이소룡이 클리프 부스하고 싸우다 망신당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조롱하기도 한다.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을 당연히 받았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곳은 다른 세계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의 이소룡은 우리가 알고 보았던 이소룡과 다르다. 슈퍼맨이 평행우주에서 슈피히어로가 아니라 빌런이 될 수 있는 것처럼, 이곳의 이소룡은 오만한 허풍꾼이다. < 재키 브라운 >(1997)을 만들었을 때의 비판이 생각난다. 당시 스파이크 리는 < 펄프 픽션 >(1994)과 <재키 브라운>에서 흑인들이 내뱉는 ‘깜둥이’(nigger)라는 단어 등을 거론하며 인종차별이라고 비판했다. 타란티노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흑인 친구들은 늘 서로 ‘깜둥이’라고 부른다며 웃어 넘겼다. 타란티노의 영화는 현실이 아니다. 모든 것이 재배치되고, 새롭게 해석되는 평행우주다. 그것 역시 현실의 반영이라고? 찰스 맨슨을 숭배하는 히피족들은 이미지와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TV에 나오는 폭력적인 드라마들을 보면서 성장한 탓에 폭력적이 되었고, 그들을 타락시킨 감독과 배우들을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에게 이미지는 곧 현실이다. 마약에 취해 눈앞에 보이는 환영도 그들에게는 현실이다. 그들은 허튼 망상을 믿고, 망상을 현실에 구현하려 한다. 그것이 현실에서 벌어진 찰스 맨슨 일당의 범죄였다. 영화나 TV 등의 이미지가 그들을 타락시킨 것이 이유일까? 아니다. 찰스 맨슨 일당이 호화 주택가로 침입하여 범죄를 저지르려 한 동기는 개인적 원한이다. 돼지새끼라던가, 그들의 어린 시절을 망쳐놓았다던가 하는 말들은 다 헛소리다. 그들에게 현실은 모두 왜곡된 이미지이고, 그들을 타락시키는 가짜가 된다. 그렇게 가짜와 진짜를 뒤섞으면서, 엉망진창인 히피들의 낙원을 허름한 목장에 구현한다. 스스로를 설득하기 위한 가짜 현실을 만들어냈고 점점 망상에 사로잡힌다. 영화에서 한 번도 자신의 얼굴과 이름을 정면으로 보인 적이 없는 스턴트 배우 클리프 부스는 스판 목장에 가자마자 알아차린다. 이곳은 가짜라는 것을. 히피들은 가짜를 진짜라고 세뇌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간다. 클리프는 언제나 자신이 가짜임을 알고 있으니까, 그들의 모순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영화 속의 그는 가짜이고, 현실의 그는 가짜로서 재현되는 자신을 받아들인다. 그것이 곧 타란티노의 영화 속 우주다. 영화의 세계야말로 지극히 구체적인 현실이고, 영화는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그건 영화일 뿐이야, 라고 말해도 좋다. 이미 그 자체로 완벽한 하나의 우주를 만들어내고 있으니까. 클리프 부스는 아내를 살해했다는 의심을 사고 있다. 타란티노는 무엇이 진실인지 보여주지 않는다. 클리프는 정말 살인자일까? 필요하다면 클리프는 태연하게 살인을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클리프가 아내를 살해했는지 여부는 과연 중요한 것일까? 보통의 영화라면 그렇다. 현실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타란티노는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둔다. 지금 보이는 이미지만으로 그를 판단하고 빠져들게 만든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보여주는 이미지는 결국 가짜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짜들로 구성된 세계에서 진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원했던 진실을, 타란티노는 유려하게 만들어내서 보여준다.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은, 극장을 찾아가는 샤론 테이트였다. 샤론 테이트는 자신이 출연한 영화 <렉킹 크루>(The Wrecking Crew>를 보러 간다. 자신이 출연한 배우라고 극장 직원에게 소개하고, 포스터 앞에서 사진을 찍고, 어두운 극장에서 스크린을 보며 미소 짓는다. 딘 마틴이 출연한 스파이영화. 영화에 출연한 자신을 보며 너무나 행복해 하는 샤론 테이트의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쓰렸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그녀가 곧 죽어야만 한다니. 시간을 멈추고만 싶었다. 이미 타란티노는 < 바스터즈:거친 녀석들 >(2009)에서 히틀러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주었다. 우리는 모두가 히틀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있다. 그는 베를린의 지하 벙커에서 권총으로 자살했다. 그래도 타란티노는 굳이 특공대가 히틀러를 암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이유는 간단하다. 보고 싶으니까. 나의 세계, 내가 만든 영화에서 히틀러는 끔찍하게 죽어야만 하니까. 실제 역사가 어떻건 나의 우주에서 히틀러는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되어야 마땅하니까. 아마도 그런 마음일 것이다. 영화에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상상이 아니라, 또 다른 우주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에서 아마도 샤론 테이트는 행복하게 잘 살았을 것이다. 가끔 이웃의 릭 달튼과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샤론 테이트의 목소리가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순간 안도했다. 아, 그녀는 죽지 않았구나. 살아 있구나. 타란티노의 영화 속이라면, 나는 그녀의 모습을 언제나 볼 수 있겠구나. 그래서 너무나 좋았다. 타란티노 특유의 ‘헤모글로빈’은 마지막에 한 번 강렬하게 나올 뿐이지만, 그의 어떤 영화보다도 더 끌렸다. 단지 그녀가 살아 있는 우주를 선사해줬다는 점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