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탄소년단 '맵 오브 더 소울 : 원'
- 감독
- 하이브
- 제작년도
- 2020
- 출연
- 뷔, 정국, RM, 진, 슈가, 제이홉, 지민
거창한 의미 부여할 것 없다. < 극장판 체인소맨: 레제편 >(요시하라 타츠야, 2025, 이하 ‘체인소맨: 레제편’)은 소년만화 저변에 깔린 결핍을 건드리는 고자극 드라마다. 원작 만화의 저변에 깔린 온몸 비틀기 삐딱선과 달리 이번 극장판은 떡밥을 뿌리고 정직하게 회수하는 모범생의 면모를 선보인다고 해도 좋겠다. 다만 강렬하고 직관적인 이미지 자극을 곁들여서. 스핀오프처럼 다소 결이 다른 스페셜 이벤트 같은 에피소드였기에 가능했던 잠깐의 일탈, 쉼표, 한여름밤의 꿈 같은 에피소드였다. 마찬가지로 고자극의 작화와 눈알이 시려울 정도로 화려한 액션 시퀀스를 곁들여서. 요란하고 화려한, 사상 최대의 연애 싸움을 시각적으로 재구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재밌지만, 시간의 풍화를 뛰어넘는 명작이라고 보긴 어려울 것이다. 어떤 지표와 분기로 작용할 만한 깊이를 보장하는지도 모르겠다. 지극히 취향 저격의 안전하고, 검증되고, 무난한 작품이다. 반대로 말하자면 그러므로 이 범상한 애니메이션은 매우 사사로워질 자격을 획득했다. 너도 재밌고, 나도 재밌었다는 취향의 확인. 그리하여 의미를 찾아 헤매기보다는 즐거움의 안도감을 안기는 고백적인 작품이다. 영화를 향한 애니메이션, 순애의 재발견 2025년은 애니메이션의 강세가 확연한 한 해였다. 넓게 보면 영화산업의 (쇠퇴와는 결이 다른) 구조적 변화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비단 한국 시장만의 흐름이 아니지만 한국 시장에서 더 도드라지는 것도 사실이다. < 주토피아 2 >(자레드 부시, 바이런 하워드, 2025)가 2025년 전체 박스오피스 1위를 차지한 건 기존의 관성을 비춰볼 때 당연하다. 가족 관객을 타겟으로 한 검증된 IP의 속편이, 완성도와 무관하게 더 큰 흥행을 거두는 건 늘 반복되는 공식이나 마찬가지다. 반면 <체인소맨: 레제편>을 향한 호감과 열기는 단순히 수치적인 흥행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흥행 면에선 <귀멸의 칼날> 등 재패니메이션과 같은 흐름으로 묶을 수도 있겠지만 작화를 통해 쾌감을 준다는 면을 제외하곤, <체인소맨>은 다른 입장에 서 있다. <체인소맨>이 이번 극장판 레제편에서 맑게 길어 올린 부분은 한동안 일본 만화에 번졌던 유행 같은 감각, 이른바 순애의 연장선에 있다. 후지모토 타츠키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은 단순한 소년만화의 극장판 확장이 아니다. 차라리 폭력의 세계에 던져진 두 괴물이 서로의 상처를 핥으며 나누는, 가장 기괴하고도 아름다운 ‘보이 미츠 걸(Boy Meets Girl)’의 변주다. 스크린에 펼쳐지는 이 세계는 언제나 젖어 있다. 피비린내와 화약 냄새, 그리고 끊임없이 내리는 비의 눅눅함이 화면 너머로 전해진다. 덴지라는 인물은 태생적으로 결핍의 덩어리다. 그에게 욕망은 거창한 세계 구원이나 정의 구현이 아니라, 잼 바른 식빵이나 따뜻한 잠자리, 그리고 이성을 향한 원초적인 호기심 같은 것들에 머물러 있다. TV 시리즈가 덴지의 그 동물적인 감각과 혼돈을 거친 선으로 그려냈다면, 이번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혼돈 속에 싹튼 ‘첫사랑’이라는 감정을 포착하기 위해 카메라의 심도를 깊게 가져간다. <체인소맨: 레제편> 중 / 사진: IMDb , ⓒ 2025 M/CSMP ⓒTF/S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가 가진 특권 중 하나는 현실의 물리학을 무시하는 과장된 움직임, 흔히 데포르메라고 불리는 의도된 작화 붕괴다. 하지만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 과장됨 속에 기묘한 리얼리티를 부여한다. MAPPA의 제작진은 인물의 미세한 표정 변화, 특히 레제의 얼굴에 스치는 홍조나 덴지의 당황한 눈동자 등 감정의 떨림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액션 시퀀스에서의 속도감은 단순히 빠르기만 한 것이 아니라, 타격의 무게감이 관객의 뼈까지 전해지는 듯하다. 태풍의 악마를 타고 도심을 질주하는 장면이나, 덴지와 레제가 공중에서 얽히며 싸우는 클라이맥스는 애니메이션이 도달할 수 있는 역동성의 극단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미묘한 리얼리티의 근간에는 원작자의 시점이 투영되어 있다고 믿는다. TV 오프닝에서부터 고백하고 있듯 후지모토 타즈키 작가의 실천에는 영화, 달리 표현하면 카메라의 위치과 프레임에 대한 고민이 동반되어 있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자면 <체인소맨: 레제편> 역시, 아니 더욱 노골적인 방식으로 거의 모든 컷의 근간에 실사 영화에 대한 향수가 묻어 있다. 겪어보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첫사랑의 노스탤지어 노스탤지어는 영원히 그곳에 다다르지 못하는 것을 전제로 피어난다. 덴지와 레제가 맺어지지 못하는 것으로 애틋함의 감흥을 자아내는 것처럼, <체인소맨: 레제편>의 동력도 실사 영화에 대한 동경과 애정이 깔려 있다. 이것은 상하 혹은 우열의 관계가 아니다. 애니메이션은 실사 영화와 다르고 실사 영화가 될 수 없다. 그 구분을 전제로 하여 한없이 영화에 가깝게, 하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다다르고자 할 때 여타 애니메이션과는 다른 오리지널리티가 피어난다. <체인소맨: 레제편>의 오리지널리티는 노골적인 애정고백을 바탕으로 한 빽빽한 오마주로부터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덴지와 레제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메타포인 이솝 우화의 ‘시골 쥐와 도시 쥐’ 이야기는 덴지와 레제, 두 하이브리드(인간과 악마의 융합체)의 정체성을 묻는 질문으로 치환된다. 시골 쥐의 평온하지만 배고픈 삶과 도시 쥐의 풍요롭지만 위협받는 삶. 덴지는 언제나 도시 쥐의 삶 속에 던져져 있었으나 마음 한구석에서는 시골 쥐의 안온함을 갈구해왔다. 레제는 그런 덴지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디에 속하고 싶으냐고. 이것은 ‘자유’와 ‘통제’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공안 대마특이과라는 시스템(도시) 안에서 사육되는 덴지와, 그 시스템을 파괴하러 온 외부의 존재 레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진영에 서 있는 듯하지만 실상 누군가의 도구로 쓰인다는 점에서는 거울상처럼 닮아있다. 레제는 마키마의 안티테제로 만들어진 캐릭터답게 첫사랑의 이상향을 응축시켜 놓았다. 진정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악마로 변하는 이들의 능력이 아니라 소녀가 소년을 만나는 상황 그 자체라고 해도 좋겠다. 레제가 덴지에게 가르쳐주는 수영법, 카페에서 나누는 대화들은 그들이 ‘무기’가 아닌 평범한 ‘소년소녀’로 존재할 수 있었던 유일한 시간이다. 사진: IMDb( 1 , 2 ) 감독은 이 딜레마를 시각적으로 탁월하게 구현한다. 레제의 폭발은 화려한 불꽃놀이처럼 묘사되는데, 그녀의 머리가 폭탄으로 변하고 사지가 터져 나가는 그로테스크한 변신 장면은, 혐오스럽기보다는 일종의 해방감마저 준다. 화약(gunpowder)과 꽃(flower).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의 조합처럼, 레제는 치명적이지만 끝내 질 수밖에 없는 꽃이다. 덴지가 그녀에게 건네려 했던 꽃다발, 그리고 마지막 카페 씬에서 들리지 않는 종소리는 이 영화가 결국 ‘실패한 첫사랑’에 대한 이야기임을 상기시킨다. 체인소 역시 피를 뒤집어쓸 때 비로소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억눌린 감정이 터져 나올 때의 카타르시스는 체인소의 소음과 겹쳐진다. 그들에게 사랑은 서로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부수고 태워버림으로써 완성되는 파괴적인 제의(祭儀)와 같다. 그리하여 이들이 빗어내는 시끄러운 소음, 불협화음은 불쾌감 이면에 애잔함을 베이스로 깔고 있다. 폭탄의 악마가 터뜨리는 굉음은 청각을 마비시킬 듯 몰아치지만, 역설적으로 이 영화가 가장 빛나는 순간은 폭발의 순간이 아니라, 폭발 직전의 고요함, 혹은 폭발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 남은 재(ash)의 정적에 있다. 태풍이 지나가고 당신의 뇌리와 망막에 남는 건 송곳니를 드러내며 웃던 덴지가 레제와 함께 학교 수영장에 잠입해 밤의 유영을 즐기는 시퀀스이리라 믿는다. 물의 질감, 달빛이 부서지는 수면, 서로의 몸짓을 훔쳐보는 시선은 액션 장르의 문법을 잠시 잊게 할 만큼 서정적인 이 장면에는 이뤄지지 못할 순수이기에 성립되는 아름다움이 있다.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고 있는 줄도 모른 채, 그 불꽃의 반짝임이 예뻐서 넋을 잃고 바라보는 아이들의 위태로운 아름다움. 고백하자면 한동안 좋은 걸 그냥 좋다고 말하지 못했다. 의미를 찾아다니고 가치를 부여해야만 한다는 강박의 저주에 빠진 것 같았다. 때론 있지도 않은 의미를 찾느라 아는 척, 감동 받은 척, 거짓된 취향을 무장한 적도 있다. 어떤 척을 하는 걸 나쁘게 보지 않는다. 그건 갈망이자 방향이며 강렬한 에너지다. 스스로 정한 이상에 도달하려고 발버둥치는 사이 단련되는 부분도 있고, 때때론 그 과정과 행위 자체가 자신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종종 너무 멀리 와버려 지금 어디에 떠 있는지 위치를 확인하기 어려운 순간이 다가온다. <체인소맨: 레제편>은 그때 발견한 작은 등대 같은 작품이다. 직관적으로 재미있고, 익숙하고 빤해서 더 마음이 가는 쉼터. 재밌는 걸 그냥 재밌다고 말할 수 있는데도 적잖은 용기가 필요하다. 되돌아보니 우리는 모두 한때 덴지였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고, 그저 눈앞의 다정함에 목을 맸던 시절. 그리고 우리는 모두 한때 레제였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혀야만 내가 살 수 있었던, 거짓말로 진심을 감춰야 했던 시절. 굉음이 남긴 이명(耳鳴)은 꽤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 것이다. 사진: IMDb 송경원(씨네21 편집장) l 영화 논문, 비평, 기자 글쓰기까지,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리액션 사이에서 흔들리고 방황한지 15년. 이제야 영화 글쓰기가 나의 직업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은, 2023년 《 씨네21 》 편집장이 되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찾듯 영화를 보고, 읽고, 쓴다. 2009년 《씨네21》 영화평론상 수상, 2011년부터 부일영화상, 부천국제영화제,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애니메이션영화제 심사위원 등 역임. 『프로듀서』(2019), 『만화 웹툰 작가 평론선―이충호』(2021), 『마음의 일렁임은 우리 안에 머물고』(2021, 공저), 『얼룩이 번져 영화가 되었습니다』(2024) 등 집필.
나만이 특별히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 누구나 이런 리스트들을 가지고 있다. 수제화를 만드는 공방, 군내 나는 저장고에서 숙성된 치즈, 조간신문 읽기, 받침대 위에 놓인 달걀을 깨는 의식, 사선으로 낙하하는 낙엽, 오래된 모피 가게, 기이한 빛을 발하는 박물관의 광석, 물 위에 뜬 장난감 배. 아르헨티나 감독 가스통 솔니츠키(<파피로젠>(2011), <푸른 수염의 성>(2016))는 팬데믹 기간 동안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을 빌미로 하여 그 자신이 사랑하는 것들(대부분 과거의 유산으로 지칭되는 사물과 장소)이 유효성을 잃어가는 현재의 오브제들에 대해 숙고한다. 가스통 솔니츠키의 다섯 번째 장편영화 < 어 리틀 러브 패키지 >(2022)는 일상적 공간에 대한 시적인 탐구이다. 장소에 대한 그의 영화적 건축은 두서없이 선택된 시청각 오브제들의 배열로 구성된다. 도시 공간은, 때로는 유기적으로, 때로는 의도적으로 그들을 구성하는 잡동사니들의 모음 또는 평범한 사물과 의식의 추상화로 묘사된다. 영화의 무대는 옛 유럽의 대표 도시 비엔나이다. 영화의 시작은 공공장소에서의 흡연이 금지되기 직전 비엔나의 커피 하우스에서 합법적으로 담배를 필 수 있었던 마지막 날을 묘사한다. 중년의 카페 주인이 금연을 고지하는 스티커를 출입문 위에 붙이고 있다. 한 시대의 종언과 동일시되는 이 규제 조치가 야기한 문화적 영향은 무엇인가? 현대적 삶의 속도에 마지막까지 저항해 온 도시는 구식의 쓸모없는 물건들만 넘치는 지나간 시대의 유물로 남을 것인가? 내쳐 이런 가치판단은 정당한가? 금연령의 여파를 훑어가는 프롤로그 이후 서사는 인생의 교차로에 있는 두 여자의 이야기로 건너뛴다. 주인공 안젤리키(안젤리키 파푸리아)는 절친이자 인테리어 디자이너인 카르멘(카르멘 채플린)의 도움을 받아 비엔나에 아파트를 구하려 한다. 팬데믹의 영향으로 공동생활이 거부됨에 따라 개인들의 은둔생활로 물러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이는 상황에서 안젤리키에겐 모든 것이 성에 차지 않는다. 삐걱거리는 마룻바닥, 타일의 색상, 가동되지 않는 난방, 너무 멀리 떨어진 레스토랑까지,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이곳에 안식처는 존재하는가? 두 여성 주인공은 텅 빈 도시의 거리를 배회하고, 건물들을 둘러보고, 호의적인 대화를 나누거나, 어떤 아파트를 사야하는지에 대해 논쟁한다. 한 장면에서 카르멘은 아무 것도 결정하지 못 하는 안젤리키에 불평한다. “네 침대 밑에 돈다발을 가지고 죽을 작정이니?” <어 리틀 러브 패키지>는 새로운 유형의 하이브리드 에세이 필름이다. 다큐멘터리, 에세이, 픽션과 같은 수식어를 거침없이 벗어난 이 영화는 현대 도시 생활의 문제를 다루면서 즉흥 연출을 토대로 하여 예술적 자유를 발견한다. 내러티브 영화 제작의 전통 안에서 실재하는 장소, 건축, 사물, 소리 등의 재료를 참신한 눈으로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형식적 새로움을 전달한다. 솔니츠키는 캐릭터가 움직이는 맥락과 풍경을 관찰하면서 우리가 ‘픽션’이라고 부르는 인공적 공예품을 다른 방향을 이끈다. 느슨한 서사를 가지고 있지만 내러티브를 구성하는 액션은 아파트를 찾는 일(안젤리키)이거나 시골집에서 보내는 소소한 일상(카르멘) 뿐이다. 안젤리키가 방황하는 비엔나에서 카르멘의 가족들이 거주하는 말라가로, 다시 비엔나로 회귀하는 여로를 통해 이 영화는 창의적인 시간 낭비, 환담을 나누며 피는 담배의 맛을 여전히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동시에 카르멘의 가족들이 머무는 시골마을과 자연, 미래만큼이나 강력하게 과거에 속해 있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한땀한땀 모은다. 카르멘 가족의 자연주의적인 라이프스타일은 비(非) 생산적인 활동의 필요성, 일상의 쾌락에 전념하는 삶의 가치를 역설한다. 전통적인 내러티브 구조를 포기하기로 한 선택은 자유와 제한을 모두 가져오기 때문에 특정 효과가 다른 효과를 희생시키면서 나타날 수 있다. 스토리 안에서 두 주인공은 비엔나의 일상이 펼치기 위한 매개체에 지나지 않는다. 솔니츠키 특유의 화법은 내러티브, 다큐멘터리, 스틸 이미지, 몰입형 사운드 사이를 장난스럽게 오간다. 카메라는 그저 있는 그대로를 기록하지만 프레이밍은 평범한 일상적 사물들의 예술성을 드러내기 위해 다른 모든 것들을 희생한다. 촬영감독 루이 포사스(<우리들의 사랑스런 8월>(2008), < 타부 >(2012), < 자마 >(2017))의 기술적 완벽함은 크나큰 영감을 주는데, 달리와 픽스 쇼트 등 고전적인 접근 방식을 활용한 장면들은 이상적인 구도와 조명 설계의 표본이다. 시간이 존재하지 않거나 다양한 시간의 층이 병존하는 도시를 배경으로 그 자신을 연기하는 것처럼 보이는 배우들, 픽션과 리얼리티의 교환, 외부 내레이터로 설정된 멕시코 작가 마리오 벨라틴의 건조한 목소리, 어린이의 손으로 칠판에 그린 단순한 그림들의 병렬 배열은 뚜렷한 맥락을 형성하기보다 역사적 금지, 시대적 전환기에 날로 새로워지는 세계에 대한 다면적 풍경을 스케치한다. 신선한 카메라의 눈은 도시의 인테리어 장식, 디자인의 감각, 우아한 고전음악, 강인하게 버티고 선 오브제들을 인간의 삶으로 되돌려주기 위해 애쓴다. 20세기의 유산들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는 지금 <어 리틀 러브 패키지>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신화에 머무르지 않고 일상적인 사물 안에서 시간의 보물들을 인양한다. 초월적인 이미지는 강요됨이 없이 일상적 사물 안에서 발견된다. 강렬한 색상과 조명으로 가득 찬 이미지는 명확하고 추상적이며 그들 간의 관련성에 대한 서사적 맥락은 모호하다. 예를 들어, 비엔나의 자연사박물관 진열장을 돌아다닐 때 카메라는 광물 앞에서 멈추고 그들 안에서 환각적인 색상이 뿜어져 나온다. 생산적 기능과 가능성을 잃어버린 사물과 장소들은 도시 전역에 고독하게 서 있다. 장인의 손길이 깃든 수제 신발의 황홀한 아름다움에 비해 번들거리는 스포츠카는 얼마나 가벼운가? 20억 년 전 가봉에서 발생한 최초의 방사능 폭발 잔해물은 또 어떤가? 형이상학적인 순간은 조작이나 구성에 의해 만들어지기보다는 자연 세계에 실존한다. 영화의 실제적인 주인공인 비엔나는 유럽 문명의 대표자가 아니라 평범한 물건들과 의식이 보존된 장소로 탐사된다. 도시 정물화의 세공이나 무인 항공기를 들고 있는 10대 소년, 질 좋은 치즈를 생산하기 위한 구식 제조법 따위로 표현되는 카페하우스 시대의 종언은 유머러스한 논평으로 가득 차 있다. 청각적 관점에서는 감정을 강화하는 전통적인 사운드의 표준 관행을 따르지 않고 보다 개방적인 사운드트랙을 구성한다. 완전히 투명한 색상에서 신비로운 명암대비에 이르는 색채 전략과 사운드 스케이프를 사용하는 벽화 장면들은 노스탤지어와 호기심,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왜 나만이 사랑하는 것들의 특별한 목록이 필요한가? <어 리틀 러브 패키지>는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전염병, 전쟁, 고립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 지난 몇 년은 씻을 수 없는 상실감을 주었다. 무엇을 잃었는지에 대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나간 시간의 뒤편에서 솔니츠키의 영화는 이 새로운 상황에 대한 해독제라기보다는 감수성의 상실에 대한 해독제가 되고자 한다. 주황색 네온이 켜진 모피 상점 이미지가 우리의 시선을 당길 때, 청신한 고전 음악의 피아노 선율이 귀청을 자극할 때, 수백 년을 이어온 바이딩거 카페의 아침 루틴이 지속될 때, 이 비엔나 쇼윈도에는 시간의 위협에 대항하는 것들이 쓸쓸하고 뻔뻔하게 전시되어 있다. 격렬한 역사의 소용돌이 안에서 점점 더 재앙이 되어가는 현실의 습격에 대처하기 위해 우리들에게는 피난처를 제공할 시간 캡슐이 필요하다. 영화의 말미, ‘블랙’의 ‘Wonderful Life'가 흐르는 비엔나의 카페에 운집한 사람들이 경쾌한 담배 구름 속에서 공생하는 시간의 회복을 경축하고 있다. 이 초월적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사운드트랙 위에서 불멸의 음악이 재생되는 동안 분주하게 즐거움을 나누는 카페의 활성화된 공기를 담는다. 이 도시가 애써 간직하고 있는 아름다운 흔적들을 보존하기 위해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을 가지고 우리는 다시 돌아가야 한다.
< 철의 꿈 >(2013)의 다공성 내러티브는 완전한 가상의 영역에 있다. 그곳은 구획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 다른 예술 형식과 재료들이 웅성거리며 대화하는 장소이다. 영화감독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박경근의 실험적 다큐멘터리 영화는 설화와 역사, 과거와 현재, 개인과 공동체의 서사를 겹겹이 엮어 뒤죽박죽된 연대기 속에서 근대성이 지워버린 사람, 의식, 과정을 되살리기 위한 혼란스러운 여정을 그린다. 다큐멘터리, 픽션, 아방가르드의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이 영화의 변칙성은 도시 지형의 변화 과정을 조명하고 근대 국가의 성립에 관한 반성적 인식 위에서 구축되었다. <철의 꿈>의 서사는 영화 내내 반복되는 네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첫 번째는 감독 자신의 목소리로 기술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을 배음으로 불교 의식 또는 무속 의식을 제시하는 계열의 영상이다. 보이스오버가 이 계열에만 속하는 것은 아니나 신을 찾겠다며 떠나간 연인에게 보내는 구어체 나레이션은 신과 사랑(열망)을 하나의 줄기로 엮는다. 두 번째는 내러티브 안에서 아카이브 푸티지의 재사용이다. 포크레인과 기중기로 이룬 경제개발, 한강의 기적, 산업화를 견인한 철강, 조선 산업의 자취, 생존과 인권을 요청하는 노동자 시위, 성장과 번영의 흔적들이 뉴스릴의 형식으로 드문드문 끼어든다. 아카이브 푸티지는 여러 계열들 간 관계에 대한 증언이 되고 가차 없이 진행된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비추는 거울이 된다. 세 번째는 철의 위용 또는 공포를 보여주기 위해 울산 현대중공업과 포스코의 안과 바깥을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 이미지들이다. 웅장하고 단단한 기계와 철로 만든 배, 철근과 철판 더미들, 쇳물 따위는 위엄이 넘치는 물질에 대한 경외감 또는 괴물의 형상을 닮은 이미지에 대한 공포를 동시에 자아낸다. 그러나 철에 관한 이야기는 영화의 절반에 불과하다. 다른 하나는 네 번째 요소에 해당하는, 다소간 허구가 가미되어 상상적 기술로 해석되는 고래에 관한 이미지들이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암각화가 물속에 가라앉아 있다는 울산 반구대 암각화의 내력과 함께 그 위에 새겨진 고래의 전설이 소환된다. 고래와 짐승들, 고래잡이, 사냥하는 사람들, 그들이 쓰는 도구들이 새겨져 있다는 암각화를 보며 먼 옛날 사람들은 부족의 화합을 다지고 고래 신을 숭배하는 재래의식을 치렀을 것이라고 화자의 목소리는 말한다. 그런즉 <철의 꿈>의 질문을 요약하면, 태곳적 고래는 어떻게 철의 신으로 거듭났는가? 쯤이 될 것이다. 서사와 주제, 스타일의 관점에서 텍스트의 핵심 줄기를 이루는 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요소이다. 조선과 제철 산업의 이모저모가 고래의 이미지와 디졸브되는 조형적 연상효과의 기저에는 무엇이 있는가? 고래와 철의 공통점은 여럿이다. 저들은 거대한 몸집을 한 거인이고, 길흉화복을 주재하는 신성의 대상이며, 시기를 달리하여 한국인의 의식을 지배한 이데올로기이다. 연인에게 버림받은 트라우마를 구체성 있는 신을 찾는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은 화자는 바다의 고래, 조선소, 제철소에서 광대하고, 숭고하고, 영적인 신을 찾는다. 울산의 지정학적 역사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에서 쇠퇴한 장소성과 그것을 대체한 산업 유산의 번성을 변화하는 운명에 대한 투사로 규정된다. 도시의 유산은 산업화 이후 새로운 신을 찾는 사람들의 갈망과 비교되는데 이러한 서사의 줄기는 신성을 찾아 떠난 연인에 대한 진술에도 해당이 된다. 현대성과 숭고함에 대한 묵상에서 실패한 사랑에 대한 사념으로, 해양 공업 도시 울산의 제철소 및 조선소의 이미지에서 고대 고래 신의 형상으로, 사랑의 트라우마에서 신비로운 주술의식으로, 서사의 의제는 두서없이 떠돈다. 아카이브 영상은 천천히 움직이는 팬과 정지된 카메라 쇼트를 기반으로 한국전쟁으로 파괴된 국가 산업을 재건하려는 이상적 낙관주의와 근대화를 맹종하는 와중에 이 사회가 도달하지 못했던 결핍의 흔적들을 대조한다. 고래의 상실은 철강 조선 산업의 뒤안에 인간 노동의 효용이 점차 사라지고 있는 중공업의 첨단 작업 프로세스와 나란히 놓인다. 인간과 자연의 이 고뇌에는 무엇이 뒤따를 것인가? 질문에 답을 구하는 경로를 하나의 몽타주로부터 유추해볼 수 있다. 국립현충원에서 치러진 포스코의 창립자인 고(故) 박태준 회장의 영결식을 찍은 푸티지 위로 비탄조의 조사(弔詞)가 흐른다. “우리는 지금 믿을 것이 없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아”라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을 타고 하늘로 치솟는 불과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 기하학적으로 교차하는 철근 구조물들의 몽타주가 제시되고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긴 고래의 이미지가 프레임을 가득 채운다. 이미지의 논리는 철의 신에 의해 추방당한 고래를 추억한다. 고래를 파묻고 세워진 철의 성채, 근대의 영화(榮華)를 좇았던 우리들의 공동체에 탈(脫) 산업화 시대의 신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상의 맥락에서 <철의 꿈>은 현상이나 사태에 대한 주관적 생각을 특별한 형식의 구애 없이 기술하는 에세이적인 특질보다 정연한 질서와 체계를 갖춘 몽타주의 구성적 미학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 몽타주의 본질은 프레임을 연결하는 것이 아니라 분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 중요성은 표현의 핵심 요소들이 상호 작용하도록 하는 과정에 있다. 형상화의 특질(옛 연인에 보내는 편지의 형식)로 보아 <철의 꿈>은 현실과 세상에 대한 주관적 관점을 넘어 창작자의 역사적 체험과 기억, 정황을 텍스트의 재료로 한 사적 다큐멘터리의 지류로 볼 수 있겠으나 문제는 그리 간단치 않다. 전지적 화자의 목소리에 해당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반드시 담화자의 실 체험에 기반한 사실이라고 단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어쩌면 고백조의 나레이션은 텍스트의 요구에 따라 문맥화된 진술일 수 있으며, 따라서 사적 체험의 전용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 이 영화는 이미 존재하는 이미지에 의존하여 그것을 새로운 서사 담론에 도입하고 구성 요소 간의 형식적 연관성을 통해 의미를 재구성할 수 있도록 만든다. 화자이자 연출자인 박경근의 목표는 한국의 근대화 과정을 압축한 울산이 철의 도시로 번성하면서 사라진 것들, 새로운 신들이 나타나면서 대체한 주술의 서사를 더 크고 더 넓은 캔버스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고도로 양식화된 연출 및 편집은 궁극적으로 다큐멘터리 또는 이중 픽션으로서 결정 불가능한 특징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성은 아카이브, 픽션, 다큐멘터리 등 다양한 소스의 혼합을 활용하여 형식적, 실재적 차원에서 동시에 작동한다. <철의 꿈>이 구사하는 하이브리드 내러티브는 다큐멘터리와 아방가르드 형식을 오가며 작업할 수 있는 통합된 미학적 범주이다. 이런 유형의 영화에서 이야기의 형식을 결정하는 것은 현실이지만 눈앞에 있는 재료와의 관계를 재정의하는 텍스트의 수행적 측면은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아카이브 푸티지의 배열은 새로운 문맥 안에 놓이게 되면서부터 구성적 행위가 된다. 구성적 행위는 관습을 뒤엎고 미개간의 영역으로 비상함으로써 본래 의도를 뛰어넘는다. 상이한 요소들이 병치되고 결합하는 비선형 내러티브는 기억을 자극하고, 이미지와 소리가 충돌하여 독립적인 표현 요소들 간의 신비하고 종종 뒤늦은 연결을 활성화한다. 세계와 그 기록을 내려다보는 영화의 광대한 영역에서 레퍼토리의 분해와 재조립이 다양한 표현 채널을 통합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발굴된 영상과 음향의 파편들, 현재에 포착된 다른 시간의 흔적들, 관찰과 상상을 결합하여 <철의 꿈>은 역사의 잔재가 여전히 편재하여 모든 이미지 아래에 숨어 있고 그들 사이에 나타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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