삿갓쓴 장고
- 감독
- 최영철
- 제작년도
- 1985
- 출연
- 박세범, 최시형, 전숙, 박종설, 이진영, 서일홍, 김경섭, 박일환, 최종도, 마승회, 김윤숙, 민혜진, 조정숙, 권은주, 황순영, 이재철, 정원길, 콜롬부스 루스, 김상옥, 김인문, 이승현, 김지원, 한송이, 김기주, 국정환, 한무, 황인숙, 안진수, 안정무, 박정남, 나갑성, 홍충길, 김동호, 박효근
각자 다른 방식으로 기억하고 생각해야 할 수많은 올해의 영화들이 존재하지만, 이 지면에서 소개하고자 하는 영화는 헝가리 감독 라즐로 네메즈의 데뷔작 < 사울의 아들 >이다. 개인적으로 더 강렬한 감흥을 받았던 허우샤오시엔과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아름다운 영화, < 자객 섭은낭 >과 < 찬란함의 무덤 >을 제쳐두고 이 작품을 소개하려는 데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두 작품에 비해 상대적으로 국내에서의 관람 기회가 요원할 것 같았다(고 적었으나 이 글을 쓴 이후 <사울의 아들>이 내년 2월경 개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둘째. 홀로코스트라는 위험한 소재 속으로 대담하게 뛰어든 이 영화의 용감함을 더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었다. 셋째. 아직은 낯선 라즐로 네메즈라는 이 신인감독의 이름을 더 많은 한국 관객들이 기억했으면 했다. 마지막으로 조금 더 사사로운 이유를 들자면, <사울의 아들>은 올해 칸국제영화제 경쟁부문 상영작 중 무언가 새로운 것이 스크린 속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을 내게 처음으로 줬던 작품이었다. 영화제 초반부 상영작이긴 했지만,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사울의 아들>로부터 받았던 방식의 충격과 감흥을 선사하는 작품은 보기 드물었다. < 사울의 아들 >은 1944년, 아우슈비츠 비르케나우 수용소에서 손더코만도로 일하는 헝가리 출신 유대인 사울의 이틀을 조명한다. ‘손더코만도’라는 낯선 용어에 고개를 갸웃할 틈도 없이,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부터 사울이 이 죽음의 수용소 안에서 어떤 일을 해오고 있었는지 알려준다. 한무리의 유대인들이 알몸으로 샤워실에 들어간다. 사실 그들이 샤워실인 줄 알았던 그곳은 가스가 뿜어져나오는 살육의 공간이다. 이윽고 문이 닫히고, 끔찍한 비명과 절규가 들려온다. 모든 것이 끝나면 사울의 업무가 시작된다. 그는 능숙한 손길로 수감자들이 벗어놓은 코트에서 귀중품을 챙기고, 알몸의 시체들을 가스실 밖으로 끌어낸다. 온갖 분비물로 더럽혀진 가스실 바닥을 닦는 것 역시 사울이 해야 할 일이다. 그렇게 손더코만도들이 가스실을 비워내면 또 한 무리의 유대인들이 그곳으로 들어간다. 학살은 그렇게 도돌이표처럼 계속되고, 유대인 포로이지만 수용소 안에서 나치에 의해 고용된 잡역부(손더코만도)인 사울은 기계적으로 죽음의 흔적을 지우는 일을 반복한다. 그에게 죽음은 일상이다. 그런데 그렇게 초점 없는 일상을 살아가던 사울에게 뚜렷한 목표가 생기는 순간이 찾아온다. 수용소에서 한 남자아이의 시체를 보고 나서부터다. 사울은 그 소년이 자신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소년에게 유대인으로서 합당한 장례를 치러주고 싶어한다. 사울은 아이의 시체를 화장터로부터 빼내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수용소 안에서 아이의 장례를 치러줄 랍비를 백방으로 찾아다닌다. 그는 자신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수용소 안에서 나치에 대한 반란을 준비하던 손더코만도 일행을 돕는다. 사울은 홀로코스트를 다룬 수많은 극영화를 통틀어 가장 당혹스러운 주인공으로 기억될 것이다. 이미 죽은 자를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죽은 자의 육신을 합당한 방식으로 거두기 위해 종종 동료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그의 행동은 홀로코스트를 거론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윤리의 질문 저 너머에 있다. 사울에게 살아남는 것보다 중요한 건 그가 반드시 해내야겠다고 결심한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내는 것이다. 그 임무가 이치에 맞지 않고 때로는 광기에 가까운 집착처럼 느껴지더라도, 인간성이라곤 절멸해버린 것처럼 느껴지는 이 죽음의 수용소에서 사울의 행동은 가장 인간적인 제스처로 다가온다. 홀로코스트를 재현하겠다는 유혹에 빠지지 않았다는 점도 여타의 홀로코스트 영화와 < 사울의 아들 >이 차별화되는 지점이다. 아우슈비츠에서 행해진 수많은 살인과 잔혹 행위들의 참상을 재현하고 기록하는 건 이 영화의 관심사가 아니다. 오히려 무엇이 일어나는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그곳에 무엇이 있게 될지를 상상하게 만드는 게 홀로코스트에 대한 <사울의 아들>의 접근방식이다. 라슬로 네메즈가 이 영화를 위해 4:3의 화면비를 취한 건 바로 그러한 선택에 따른 게 아닌가 싶다. 107분의 러닝타임 동안 사울의 얼굴에서 거의 벗어나지 않는 <사울의 아들>은 주인공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온갖 사건들을 최대한 협소하게 보여준다. 충격적인 오프닝 시퀀스의 가스실 학살장면이나 포로들을 구덩이에 모아놓고 무차별적으로 총살하는 야밤의 비극적인 사건은 오직 사울이 체험하는 범위 안에서만 관객들에게 보여질 뿐이다. 프레임 밖으로 잘려나가거나 흐릿하게 처리된 이미지들의 공백을 메우는 건 사운드다. 단언컨대 < 사울의 아들 >은 올해 본 모든 영화를 통틀어 사운드를 가장 성공적으로 활용한 사례로 기억될 것 같다. 철컹거리며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 가스실에 갇힌 이들의 소름 끼치는 비명, 감독관들의 호령 소리, 폴란드어, 독일어, 유대어 등 수많은 언어들이 뒤섞여 만들어내는 정체불명의 화음은 관객이 볼 수 없는 것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하는 중요한 요소로 기능한다. 사운드 디자이너 타마스 자니가 만들어낸 <사울의 아들>의 음향은 날카롭고 명확하기보다 강렬한 울림과 긴 여운을 지니고 있는데, 이처럼 풍성하게 연출된 사운드가 제한적이고 압축된 시각적 이미지와 맞물려 효과적인 대구를 이룬다는 건 이 영화가 이뤄낸 기술적 성취를 짐작하게 한다. 장편영화 데뷔작 < 사울의 아들 >로 올해 칸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쥔 라슬로 네메즈는 벨라 타르의 2007년 작 < 런던에서 온 사나이 >의 연출부를 맡았던 경험이 있다. 유려한 페이스의 롱테이크 이외에도 그가 스승에게 물려받았다고 짐작되는 유산이 있다면, 그건 바로 대담함이다. “이것이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이것이 사랑이다, 이런 것들을 용감하게 표현하는 감독들의 영화를 보고 싶고 느끼고 싶다”는 스승의 말대로, 라슬로 네메즈는 여전히 누구라도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홀로코스트라는 역사를 소환해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구성하고, 금기의 질문들을 용감하게 돌파해나갔다. 그런 의미에서 <사울의 아들>은 기억되어야 할 영화고, 지지하기에 손색이 없는 작품이다. < 사울의 아들 >과 더불어 선정한 영화들에 대한 소감도 이 지면을 빌려 간략하게 전한다. 허우샤오시엔의 < 자객 섭은낭 >은 과연 글이라는 형식을 빌어 이 영화의 미학에 대해 얘기할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감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색감과 앵글, 리듬과 호흡. 허우샤오시엔의 그 모든 선택과 감각에 다시 한 번 감탄하게 된 영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의 < 찬란함의 무덤 >은 올해 본 가장 인상적인 설치물이 등장하는 작품이자 아피찻퐁의 최근작 중 가장 감상적으로 다가온 영화였다. < 스파이 브릿지 >는 <사울의 아들>과 정확히 반대되는 이유로 좋았는데, 예민한 소재를 누구나 납득 가능한 이야기로 풀어내면서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영화로 만들어낸 스필버그의 연출력을 기억하고 싶었다. < 캐롤 >을 선정한 이유는 무엇보다도 배우 때문이다.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 서로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가늠하면서도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는 두 여자의 심리 묘사가 무척이나 아름다웠던 영화다. < 산하고인 >은 시간과 사람에 대한 지아장커의 애상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었고 < 폭스캐처 >는 스티븐 카렐의 괴물 같은 연기와 베넷 밀러의 차분한 연출이 인상적인 영화였다. < 클라우즈 오브 실스 마리아 >는 알프스 산맥처럼 정교하고 미스터리하게 흘러가는 내러티브의 묘미, 그리고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았지만 예상외로 꽤 매력적인 조합이었던 세 여배우-크리스틴 스튜어트, 줄리엣 비노쉬, 클로이 모레츠-의 앙상블을 지켜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선정했다. < 인 더 섀도우 오브 우먼 >은 보다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있었던 필립 가렐의 신작인데, 대사의 날카로움은 여전하고 흑백화면은 여전히 파리 특유의 정서(지금은 다른 이유에서 좀 더 특별해졌다)를 머금고 있다. 마지막으로 루카 구아다니노의 < 비거 스플래쉬 >는 정말로 사사로운 이유 때문에 선정한 작품이다. 이 리스트를 선정하기 위해 고심하는 순간, 풀장으로 첨벙 소리를 내며 뛰어들던 <비거 스플래쉬>의 한 장면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프랑소와 오종의 < 스위밍 풀 >과 같은 원작을 공유하고 있는 이 작품은, 여인의 육신보다 입수 장면이 더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영화다. 몸과 물이 맞닿는 순간의 마찰음,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비거 스플래쉬’를 몹시도 감각적으로 담아낸 작품이다.
< 이영일 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은 이필우 , 유장산 등 식민지 시기부터 활동한 영화인들의 구술채록을 담은 서적이다. 이 구술채록은 1960년대 후반 <한국영화전사> 집필을 위해 영화사가 이영일 이 구술 자료로 수집, 기록한 것이다. <증언록>에는 6.25전쟁 당시 피난지인 부산에서 영화인들이 뉴스영화를 제작하는 것을 지원하고, 환도 후 문화영화 제작을 의뢰하고,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1955) 제작 당시 35mm 미첼카메라를 대여해준 공보실 영화과의 행정 관리가 등장한다. 60여 년 전 공보처(공보실) 영화과의 젊은 관료였던 이 인물이 바로 한국영상자료원의 ‘2009년 생애사’ 구술자인 이성철 이다. 1950~60년대 공보처 영화과는 한국영화의 지원정책뿐만 아니라 검열 등의 통제정책을 주관했다. 따라서 공보처 영화과는 당시의 한국영화를 이야기함에 있어 중요한 기관이지만 정책과 산업 분야에서만 특정하게 언급되는 편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은연중에 정책과 산업 그리고 작품과 인물이 구분 지어진 상황에서 이성철 의 구술은 당시 한국영화계 내부의 여러 요소를 연결해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의미가 있다. 한국영화사의 가려진 역사를 수집하다 1922년생으로 2009년 구술 당시 88세였던 이성철 선생은 건강한 모습으로 무려 60여 년 전의 공보처 영화과에 대해서 생생한 기억을 풀어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영화인들이 술회했던 피난지 부산에서의 기억과 < 춘향전 >의 기억은 그의 입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재구성되었고, 1950~60년대 아시아영화의 큰 행사였던 아시아영화제 관련 자료에서 제외되었던 공보처 영화과와 아시아재단의 면모가 구체적으로 드러났으며, 국립영화제작소의 인력과 문화영화들이 개별적으로 호명되었다. 또한 공보처 영화과의 개별 사례를 통해 1950년대 대한원조정책의 진행과정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부분적으로나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듯 이성철 의 구술채록은 그동안 한국영화사에서 다루어지지 않은 이야기를 많이 담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영화행정가 이성철의 이력이 존재한다. 1942년 경성세무감독국 고원으로 행정업무를 시작한 그는 광복 후 총무처를 거쳐 1951년 전쟁 중에 영화과 계장에 임명되며 영화과와 연을 맺었다. 이후 1961년까지 무려 10년 동안 영화과장을, 1962년부터 1963년까지 국립영화제작소 소장을 역임한 이성철은 1950~60년대 한국 영화 행정의 전문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력으로 인해 그의 구술은 중흥기를 맞이한 상업 극영화뿐만 아니라 공보선전을 위한 문화영화에 대해 알려준다. 따라서 구술에서 드러나는 영화과장 이성철 혹은 국립영화제작소 소장 이성철의 정체성은 1950년대 또는 1960년대 초반의 시대적 상황과 맞물려 행정가, 검열관, 공보관, 영화 프로듀서 등 여러 분야에 걸친 인물로 다채롭게 해석할 수 있다. 1950년대 한국영화는 열악한 제반 환경으로 인해 공보실 영화과와 국방부 영화과 등의 정부부처나 미공보원과 아시아재단 등의 대외기관에서 일정 부분 지원과 원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영화과장 이성철의 역할도 경우에 따라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그가 “영화과 업무의 핵심”이라고 말하는 ‘검열’의 담당관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화인들이 <증언록>에서 이성철을 검열관이 아닌 조력자로서 기억하는 데에는 이러한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제1공화국부터 제4공화국까지 영화과장, 국립영화제작소 소장, 주일공보관장, 대한무역진흥공사(KOTRA) 이사, 주LA총영사관 문화원장을 역임한 구술자가 대한민국 정부의 공보선전정책의 기조와 목표를 바탕으로 영화를 바라보는 태도에서는 행정가, 공보관의 정체성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국립영화제작소를 캐나다 국립영화제작소(National Film Board of Canada)를 역할모델로 삼아 영화 인력을 육성해 예술로서의 문화영화를 제작하는 기관으로 만들려 했다는 술회, 그리고 그러한 목표가 좌절된 것에 대해 반복적으로 아쉬움을 드러내는 그의 태도에서는 영화인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1942년부터 1979년까지 40년 가까운 시간을 행정관리로 재직하고, 공무원 퇴임 후에도 포스트프로덕션을 운영한 그의 활동 이력은 6회의 구술채록으로 충분히 담을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식민지 시기부터 광복과 전쟁, 4.19와 5.16, 한일회담, 코리아게이트에 이르는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에 관한 구술과 더불어 행정 관료로서 영화과의 검열 및 지원 정책, 대한원조프로그램에 따른 아시아영화제 참가와 미국연수프로그램에 대해 상세히 풀어놓은 그의 구술은 어찌 보면 한국 현대사 그 자체일 수 있다. 이와 같이 방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고, 다양한 결로 접근할 수 있는 이성철 의 구술은 비단 화려한 이력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의 구술은 식민지 시기부터 현재에 이르는 삶을 드러내는 개인사이기도 하다. 과거의 일들을 증언하고 회고하는 것뿐만 아니라 연구자와 함께 과거의 사건을 토론하고, 재구성하는 과정을 거치며 성찰적인 자세를 보여준 이성철 선생의 구술은 구술채록연구가 단순히 수집?기록을 위한 사료가 아니라 구술자와 연구자의 공동작업이라는 것을 명징하게 보여준다.
“요즘 우리나라에 웨스턴 붐이 일고 있잖아. 야 일본에 < 요짐보 >라는 죽여주는 영화가 있는데 이런 느낌적인 느낌으로다가 대충하나 만들어 볼텨?” 이탈리아의 어떤 영화제작자는 두 패의 악인들이 대립하는 어느 장소에 홀연히 나타난, 선인인지 악인인지 하여간 건달 같은 작자가 문제를 해결하고 멋지게 사라지는 이 이야기에 무척 끌린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세르지오 코부치라는 감독을 불러들여 시나리오도 없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완전한 무명배우였던 프랑코 네로를 일약 세계적인 스타로 만들었고, 관을 끌고 다니는 남자, 깜짝 등장하는 무기, 황당하도록 화끈한 결말 등 당대의 마카로니 웨스턴 영화들과 함께 장르의 클리셰라고 불릴 만큼 후대에 반복되는 요소들을 정립했던 이 영화는 1966년에 제작된 < 쟝고 > 다. 최근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장르를 아예 통째로 떠다가 본인 나름의 방식으로 아름답게 재해석해 < 쟝고 : 분노의 추격자 >를 만들기도 했다. < 쟝고 >(1966)와 < 삿갓 쓴 장고 >(1985) 그리고 시간이 흘러 1985년. 동북아시아의 조그만 나라, 영화 강국이라고는 부르기는 아직 어려웠던 한 나라에 이 비슷한 생각을 한 제작자가 또 있었다. 그는 많은 연출 경험으로 충무로에서 잔뼈가 굵은 한 감독을 기용했다. 이미 34편의 영화를 만들었고, 또 반 이상의 각본을 직접 쓴 사람이었다. < 대근이가 왔소 > < 특명 8호 > < 맨발로 왔다 > 같은 다수의 다찌마리 영화로 액션 연출에 경험이 많았고 < A*P*E 킹콩의 대역습 > 같은 영화로 미국과 공동작업 경험마저 있어 글로벌 인재로 손색이 없었다. 최영철 감독은 자작 시나리오로 배우를 캐스팅했고, 영화는 공개되었다. 천인공노할 사기꾼들을 정의로운 두 사내가 쳐부순다는 내용의 < 삿갓 쓴 장고 >는 대충 이렇게 제작되지 않았을까? 삐용삐용B무비의 마지막 원고를 어떤 영화로 해야 할지 나름대로 고민했다. 사실 이 분야가 그다지 많은 관심을 받는 것도 아니고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겠지만, 영상자료원 내에서도 볼 수 없는 영화가 정말 많았다. 필름으로는 존재하지만 다른 포맷으로는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 한녀 >나 < 관속의 드라큐라 > 같은 영화를 꼭 다루고 싶었다. 앞으로 더 나아지리라 믿는다.) 결국 고민은 마지막 회이니, B스러운 재미가 있으면서도 괜찮은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아니면 그냥 갈 데까지 간 영화를 소개할 것이냐 하는 원초적인 질문으로 수렴되었다. < 삿갓 쓴 장고 >는 후자에 포함하는 영화다. 몇 편의 허탈한 영화를 놓고 고민을 하였으나 이만한 것은 없었다. <삿갓 쓴 장고>와 함께 최종후보까지 올라간 < 햄버거 쟈니 >는 주인공 쟈니 윤 의 카리스마가 김인문-한무의 협공을 이기지 못해 탈락하였다. 장고와 소림사의 만남 영화가 시작되면 한 사내가 관을 끌고 나타난다. 승마 부츠와 청바지를 입은, 그리고 판초를 걸치고 카우보이모자를 쓴 그는 터덜터덜 밤길을 걷고 있다. 그때, 반대편에서 한 사내가 또! 관을 끌고 나타난다. 뭔가 비슷한 듯한 복장이지만 삿갓을 쓰고 거적때기를 어깨에 얹은, 비닐 장화를 신은 사내. 이 둘은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나눈다. 삿갓: 너 뭐야. 빨갱이가 아니면 신분을 밝혀 신분을. 카우보이모자: 내 이름은... 장고. 성은 장 씨고 이름은 높을 고자여. 그러니께 장하고도 고. 이제 알았능가. 근데 넌 뭐여. 삿갓: 난 소림사다. 성은 소씨고 이름은 임할 림에 스승 사. 고로 소 하고도 림사. 소림사. 장고( 김인문 )와 소림사( 이승현 )의 첫 만남이다. 음악이나 문학, 그리고 영화도 마찬가지로 ‘시간’이 창작과 감상에 모두 작용하는 예술들이 있다. 앞서도 몇 번 말했듯, ‘시작’은 그 미메시스의 시간에 진입하는 관문이므로 가장 중요한 것들 중 하나라 해도 모자람이 없을 것이다. 이 영화의 이렇듯 다짜고짜 전라도 사투리로 한자 풀이를 하며 관객을 인도한다. 이들이 통성명하는 계기도 엉뚱하다. 그냥 지나가고 있는 장고에게 소림사는 토마토인지 핏덩어리인지 뭔지 모를 것을 집어던진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소림사는 그때 마네킹을 해체하고 있었다. 어쨌든 화가 난 두 사람은 통성명 이후 시비가 붙는다. 장고: 근디 내가 니놈의 관상을 보니께 영락없는 쾡이여 쾡이! 명심보감에 대장부는 당용인이언정 무위인소용이니라 하였거늘... 소림사: 대장부는 마땅히 남을 용서할지언정 남의 용서를 받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 이 말이지? 장고: 허! 소림사: 너도 글깨나 아는 모양인데 내가 딴 건 몰라도 명심보감 하나만은 줄줄 외고 있지. 후후 장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공부해서 남 주는 거 아니니께 참말로 다행일세. 하지만 네놈은 푸줏간 신세도 되지 못하는 쾡이 신세여 쾡이! 소림사: 니놈은 너구리 신세고 너구리! 장고: 너구...!? 명심보감 웬 뜬금없는 명심보감 타령이며 쾡이, 너구리 타령인지 알 수가 없다. 아무리 이들의 싸움을 이해해보려 해도, 영화 시작 5분 내에 펼쳐진 일이라 물리적인 시간 앞에서 무릎을 꿇게 된다. 뒤에 어떤 전사가 나오느냐? 그런 거 없다. 그냥... 싸운다. 게다가 이놈의 명심보감은 영화가 끝날 때까지 계속 등장하는데 이들의 삶의 지침 같은 것이려니 하고 그냥 넘어가 보도록 노력을 해보자. 하지만 가슴 한 켠에 늘 육법전서를 넣어놓고 언제든 꺼내어 읽는 장고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조금 이상하다. 물론 시골에서 경찰시험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것이라는 이유는 있다. 경찰 시험공부를 하는 것과 육법전서를 늘 품에 담고 다니는 것이 무슨 상관인지는 전혀 모르겠지만 30살의 장고는(당시 김인문 씨 나이 46세) 그렇게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정신을 좀 차려야겠다. 간략한 내용은 이렇다. 경찰이 되어 부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장고. 서울에서의 생활비 마련을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새끼돼지 수십 마리를 데리고 왔으나, 악당 두꺼비(한무) 일파의 사기에 당해 모든 것을 잃고 만다. 한 편 장고와 비슷한 사연을 가지고 교통경찰이 되기 위해 관 같이 생긴 궤짝에 강아지를 잔뜩 데리고 올라온 소림사 역시 두꺼비 일파에게 걸려 모든 것을 잃고 만다. 그들은 우연히 만나 시비가 붙었던 탓에, 서로가 상황이 이렇게 만들었다 생각하고 만나기만 하면 싸운다. 그러던 중 장고는 무일푼인 상황이라 한 레스토랑에 웨이터로 취직을 하고, 두꺼비 일당을 찾아 복수할 것을 다짐한다. 우연히 부모의 원수가 두꺼비 일파와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된 장고는 그들을 추적하던 도중 필름을 입수하게 된다. 이것은 국제 마약상의 루트를 정리한 필름이었다. 한편 소림사 역시 일자리를 찾던 도중 우연히 장고가 일하는 레스토랑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어 함께 일하며 조금씩 서로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그러나 두꺼비는 소림사에게 접근하여 필름을 훔쳐오면 많은 돈을 주겠다고 유혹하게 되고 소림사는 제안을 거부하지 못하는데... 머릿속에서 내용을 끼워 맞추어 정리하긴 했지만,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다. 그들이 끌고 다니는 관 속에는 새끼 돼지들과 강아지가 들어 있었고, 장고는 육법전서를 들고 다닌다. 소림사는 부모님이 뺑소니로 돌아가셔서 교통경찰이 꿈이다. 그러나 공부 밑천이었던 강아지를 두꺼비에게 다 뺏기고 ‘세계교통정리 선수권대회에 출전해서 챔피언도 따먹으려 했던 꿈’이 좌절되어 절망한다. (이게 내가 정리해서 쓴 것이 아니라 영화에 등장하는 대사다. ‘뺑소니 없는 명랑 교통질서 확립’이라는 대사는 내가 웃기려고 쓴 거로 생각할 것 같아 아예 뺐다.) 만약에 장고가 칼이라도 맞았는데 그 자리에 육법전서가 있어서 목숨을 구했다던가, 소림사가 교통정리 스킬을 발휘해 위험에서 벗어난다든가 하는 에피소드가 있었다면 참 좋았겠지만 그런 거 없다. 이들이 아는 건 명심보감 뿐이다. 자꾸 장고와 소림사 얘기만 하니까 악당들은 좀 악당다운가 보다 싶으실 수도 있는데, 그럴 리가 없다. 악당 중간보스 두꺼비도 사연이 있다. 시골에서 상경해 돈을 벌어 금의환향해 두 동생들과 행복하게 살려 했지만 ‘여자 좋아하다가’ 결국 악의 길로 빠져든 안타까운 인물인 것이다.(이것도 대사를 통해 스스로 도출한 결론이다.) 게다가 그는 나쁜 짓을 하고 다니면서도 조직원들과 함께 ‘두꺼비 합창단’을 만들어 언젠가는 가수로 데뷔하고 싶은 꿈이 있다. 그와 함께하는 부하인 빈대, 벼룩, 모기, 파리 등등이 합창단의 멤버다. 그는 아지트에서 부하들과 함께 ‘두란두란’(아마도 80년대 보이그룹으로 유명했던 ‘듀란듀란’을 지칭하는 모양이다.)을 들으며 미래의 자기 모습을 그리곤 한다. 구수한 사투리 이 정도만 설명해도 이게 뭐야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한데, 가장 충격적인 연출은 아직 말도 안 꺼냈다. 장고는 악당들의 끊임없는 음모와 협박에 필름을 돌려주기로 한다. 두꺼비 조직의 보스 김달성( 김기주 )은 해변가에 가면 외국인 여자가 한 명 있을 것이니 그녀에게 필름을 주고 전달했다는 표식으로 장미를 받아오라고 말한다. 해변으로 간 장고, 과연 금발의 외국 여인이 비키니 수영복을 입고 서 있다. 할 일이 있어 오기는 했지만 외국인은 어색한지라 “헤...헬로” 하고 말을 거니, 그 외국인 여인은 “아따 이제 왔능가. 싸게싸게 필름 내놓더라고!” 라며 구수한 전라도 사투리로 대꾸한다. 이에 놀란 장고가 아니 어째서 사투리를... 하고 묻자 금발의 백인 여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야 내 고향이 전라동께 그라지. 어여 필름이나 내놔야?”라며 구수하게 말을 한다. 로버트 할리도 있는데 이게 무슨 문제이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악당의 함정이었다. 가까스로 아수라장을 빠져나온 장고는 결국 그와의 마지막 대결을 준비하게 되는데. 엿장수 가위 최종 보스 김달성과 장고의 대결은 영화 역사상 가장 성의 없는 대결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싶다. 김달성은 웬일인지 미국식 카우보이 복장을 하고 나타나 장고를 위협한다. 그를 위협하는 무기는 총? 아니다. 칼? 그것도 아니다. 그럼 하다못해 야구방망이? 역시 아니다. 엿장수 가위다. 이유? 없다. 왜 두꺼비파 최종보스 김달성이 살상무기로 엿장수 가위를 사용하는지 아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나마 이에 맞서는 장고의 밥주걱은 대사로 처리를 해주고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림사는 영화 중간에 악당 패거리들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면서 ‘엄마의 유물’이라고 쓰여 있는 빨랫방망이를 선보인다.) 김달성: 아니 밥주걱? 장고: 그래 너는 악당 베르나도 산초가 아니라 국산 놀부니께!! 김달성: 놀부...?? 장고: 그래 놀부가 싫으면 어서 이 오동나무 코트를 입어! 끌고 온 관을 가리키며 ‘오동나무 코트’를 입으라 불호령을 내리는 장고의 굽히지 않는 모습에 응원을 하고 있자니 조금 머리가 아파오는데, 대결을 마치고 부모님 운운하며 앞으로 착실하게 살라고 일장연설 하는 장고의 뒤로 구슬프게 흐르는 ‘어머님 은혜’를 듣고 있으면 결국 효도해야겠다는 마음이 차오르며 결국 다른 생각은 모두 잊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후다닥 스크린에 차오르는 엔딩 크레딧. 이상하게 슬픈 크레딧이다. 몇 번을 돌려봐도, 감독 이름이 안 나온다... 한국에도 ‘알란 스미시’ 같은 이름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알란 스미시’는 미국에서 제작자의 간섭 혹은 스태프와의 불화 등 영화가 의도대로 제작되지 않아 연출자가 자신의 이름을 올리기 거부할 때 대신 올리는 이름이다. 대표작으로는 < 헬레이저4 >가 있다.) Directed by Alan Smithee 최영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주로 액션영화에 치중되어 있다. 간간이 다른 장르의 영화를 연출하곤 했는데, 이번에 소개한 < 삿갓 쓴 장고 >를 포함해 , < 백백교 >와 같은 괴작들이 있다. 특히 < A*P*E 킹콩의 대역습 >은 이 분야에서 국내외 모두 알아주는 작품이라 굳이 소개하지 않았을 정도다. 그래도 몇 작품을 제외하고는 나쁘지 않은 흥행성적으로 꾸준히 영화를 찍어왔던 감독인데, 사업 파트너의 배신으로 수익금을 돌려받지 못하고 92년 이후 작품 활동이 중단되었다니 가슴 아픈 일이다. 김인문 이승현 한무 감독: 최영철 각본: 최영철 개봉극장: 명보(서울) 관람인원: 573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