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계
- 감독
- 장일호
- 제작년도
- 1976
- 출연
- 최형근, 노사강, 최성규, 한명환, 용일화, 임청하, 오희찬, 한성전, 윤미라, 이영옥, 태현실, 박암, 전운, 전숙, 신영선, 최성호, 추석양, 최재호, 김민규, 양일민, 김월성, 박광진, 주상호, 지방열, 임생출, 최일, 최성관, 윤일주, 임해림, 주일몽, 김대현, 김승남, 임성포, 박일, 박병기, 송일근, 장춘언, 나갑성, 정규영, 노강, 김기범, 나정옥, 김신명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다시 만난 세계: 식민지 조선의 극장문화 이야기 한국영상자료원에서 발간하는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를 바탕으로 역사의 지층 속에 묻혀 있던 이야기와 행간 속에 숨겨진 욕망들을 재조명합니다. 한성의 상설 실내극장은 대한제국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출현하기 시작했으며 여러 극장이 어우러져 극장가를 형성하게 되었다. 1902년에 건립된 희대 는 여론의 추이에 따라 우여곡절을 겪던 와중에 폐관과 재개관을 반복하다가, 1908년부터는 원각사로 이름을 바꿔 운영되었다. 별도의 극장명 없이 활동사진을 영사해 왔던 동대문의 한성전기회사 창고 건물은 1907년부터 광무대 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또한 같은 해에는 종로대로를 축선으로 삼아 장안사, 단성사 , 연흥사 가 신설되었으며, 새문 밖에서는 프랑스인 마전(馬田, martin)이 운영한 마전활동사진관 이 영업을 개시했다. 다만, 이들 극장이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으로 운영되지는 않았다. 영화가 간헐적으로 상영되기는 했지만 비중이 높다고 보기는 어려웠으며, 상영물은 대개 단편적인 활동사진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극장 프로그램에서 보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은 전통연희와 가무, 신파극 등이었다. ‘활동사진관’이라는 명칭을 내세웠던 마전활동사진관 역시 명창들의 공연을 병행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원각사 극장 전경 본격적인 영화 상설관은 일본의 자본력이 동원되면서 출현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경술국치와 함께 한성이 경성으로 바뀌는 시기와 맞물려 일어난 변화였다. 1910년에는 경성고등연예관이 영업을 개시했고, 이후 황금관 , 대정관, 유락관, 제2대정관 이 개관하면서 새로운 극장가를 형성했다. 이상의 극장들은 핵심 소구 대상으로 상정했던 재조선 일본인의 거주지인 남촌 부근에 터를 잡고 있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소수였던 일본인들만으로는 충분한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웠기에 남촌의 극장들은 조선인들의 출입을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고, 영화에 매혹된 조선인들 역시 새로운 사진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남촌의 극장을 드나들었다. 결과적으로 1910년대의 극장가는 종족 혼합적 공간 의 성격을 띠게 되었던 셈이다. 본디 극장은 입장료에 대한 지불능력만을 최소한의 문턱으로 삼는 곳이며, 수익을 보장해 줄 수만 있다면 어떠한 관객이라도 환영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곳이다. 다만, 경술국치 이후 식민지의 백성으로 전락한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에 대해 적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총칼을 앞세운 무단통치의 폭력 앞에서 그러한 반감이 대대적인 저항으로 표면화되지는 않았지만, 잠재된 불만은 종종 불온한 공기를 형성해내곤 했다. 그리고 일본인과 조선인이 뒤섞여 있던 극장은 종족적 적대감을 징후적으로 노출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해냈다. 이구영 은 영화사가 이영일 과 진행한 구술 채록 과정에서 영화를 매개로 종족적 대결의식 이 촉발된 사례를 다음과 같이 소개한 바 있다. (이구영) 그런데 거기서 사상적으로 충돌이 난 일이 한 번 있습니다.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그걸 이제 내가 얘기할게요. 왜 그런고 하니, 유도하고 권투하고, 시합하는 단편영화가 있었어요. 그러면 이제 서상호가 무대에 서면, 서상호는 일본놈 편으로 무대에서 박수를 치라고 가르치고 관중들은 한국 사람이 절반이니까 와~ 소리가 나고 말이죠. 그래서 권투 시합에, 거기서 큰 혼란이 일어났었어요. 그냥. [일본놈 치고 때리고 난리 나다시피 하고, 그짝 나고 말이지.] 허허허, 이럴 때 아주 골아봐라 하고 그놈이 쫓아들어오고 말이지. 허허허. (중략) 그래 가지고는 [양자측이 있겠지만] 일본 놈은 그냥 나막신 신은 채로 구르고 몇번 구르고 한바탕 야단을 치는데, 한국 사람 심리가 그거예요. 우우 소리를, 그냥 반대로 한 거죠. 우우 했죠. 그러니까 이제 서상호는 일본 사람 편들었으니까. 무대 위에서라면 유도하는 아무개가 짜끄를 이겼단 말이야. 이렇게 소리지르면... 그러다가 이제 이기는 것이 좀 나와야 될 거 아닙니까. 이제 권투가? 그 때는 관중이 우뢰 같은 박수갈채가 나오는 데야... 흐흐흐. (이영일) 아하하하하. 그래 됐군요. (이구영) 그래서 그거 사상적으로 큰 문제가 벌어져서, 그게 중단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야단친 일이 있었어요. - 한국예술연구소 편,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 복혜숙, 이구영』 , 소도, 2003, 195쪽. 이구영은 영화 < 쌍옥루 >(1925)로 첫 영화를 발표한 이래 < 낙화유수 >(1927), < 승방비곡 >(1930) 등을 연출한 감독이었으며, 1920년대의 대표적 영화평론가로 활동한 바 있다. 또한 단성사 선전부장으로 재직한 이력도 갖추고 있었으므로 초창기 영화가의 분위기에 대해 풍부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변사 서상호가 경성고등연예관에서 활동했던 시기에 대해 회고하면서 영화 상영이 종족 간의 패싸움으로 비화된 사건이 있었다고 밝혔다. 일본 유도선수와 서양 권투선수가 맞붙는 짧은 영화가 상영되었는데, 해설을 맡은 서상호는 일본 선수에 대한 응원을 유도했지만, 일본인 관객들의 호응과 달리 조선인 관객들은 야유를 보냈으며, 외려 서양 권투선수가 활약할 때 박수갈채를 보냈다는 것이다. 결국 일본인 관객들과 조선인 관객들은 서로 욕설을 주고받고 방석과 귤껍질을 서로 집어던지며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경관들도 함부로 끼어들지 못할 만큼 살풍경한 분위기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모습은 종족 혼합적 극장의 분위기가 치안의 잠재적 불안요소로 지목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국면이었다. 한편, 영화가 극장의 핵심적 프로그램으로 부상하게 되면서 북촌의 극장가 역시 이러한 변화를 민감하게 받아들였는데, 1912년에는 우미관 이 건립되어 북촌의 영화상영관으로서 특권적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우미관이 조선인 관객을 독점 하기 위해 부단히 애써 왔다는 점이다. 특히 제2대정관의 노선 전환과 관련된 맥락은 우미관의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단초를 제공한다. 대정관 관주는 1914년 6월에 경성고등연예관을 매수한 후 제2대정관을 운영하기 시작하는데, 특이하게도 이곳은 남촌에 소재해 있었지만 조선인 관객들을 위한 전용관을 표방하면서 김덕경, 최병룡 을 비롯한 조선인 변사도 영입한 바 있다. 그러나 제2대정관은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아 다시 일본인 전용관으로 노선 전환을 꾀한다. 아마도 입지조건상 조선인 관객들만을 유치하기에는 수익 창출이 어려웠던 사정이 개입되어 있으리라고 추정되는데, 김승구 는 이 과정에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이면계약’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우미관은 대정관이 조선인 전용관을 포기하는 조건으로 매월 200원씩을 지불하기로 약속했다는 것이다. *주1 물론 이것은 북촌에 영화 상설관이 우미관 하나뿐이었을 때만 유효한 전략이었을 따름이다. 1918년에는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 이 단성사를 인수한 후 영화를 본격적으로 상영하기 시작하면서 경쟁 체제가 성립되었다. 또한 1922년에 조선극장 이 건립되자 북촌 극장가의 경쟁 구도는 3파전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결국 우미관은 점차 일류 상설관으로서의 지위를 양보하고 저가 입장료 정책을 펴며 틈새시장을 공략하는 모양새를 취했는데, 1920년대 이후부터는 단성사와 조선극장의 양강 구도가 자리를 잡게 되었다. (좌) 단성사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 단성사(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 (우) 조선극장 종족적 분할을 시도한 우미관과 제2대정관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 종족이 혼재된 객석의 풍경은 종족 간의 돌발적 충돌을 야기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운영을 방해하는 요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그런 의미에서 식민지 조선의 극장들이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나가게 되었다는 점은 자연스러운 현상처럼 보인다. 유선영은 조선인들이 주로 출입했던 극장들이 일본영화가 아닌 서양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입장료도 저렴하게 책정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일본인 전용극장들과 뚜렷한 지역적, 민족적 분할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라 추정한 바 있다. 이와 같은 분할을 통해 조선인 극장은 식민치하에서 거의 유일하게 허용된 ‘ 종족의 공간 ’이자 ‘ 집합의 공간 ’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 극장이 스펙타클적 쾌락의 소비공간이었을 뿐만 아니라 동족 집단의 존재에 대한 확인을 통해 민족적 정체성을 위무받기 위한 공간 이었다는 해석을 내놓고 있다. *주2 더 나아가 종족공간은 지정학적으로 분할 되는 양상을 띠게 되었다. 물론, 북촌 지역에 건립된 일본인 극장들이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점차 북촌은 조선인들의 공간이며 남촌은 일본인들의 공간이라는 심상지리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백두산이 지적한 것처럼, 조선시대에 북촌과 남촌의 경계는 기존 거류민들의 기질이나 위치(청계천)를 기준으로 구분되었지만, 식민지배 이후 경제적이고 종족적인 경계구역으로 맥락화되는 경향이 현저해지게 되었다. 즉, 북촌 은 조선인의 종족적 공간이자 개발에서 낙후된 구도심 이라는 심상적 범주로 인식되었다는 것이다. *주3 이러한 변화는 치안당국의 통제를 용이하게 만든 요인이기도 했다. 이순진 이 밝힌 바와 같이, 낙후된 북촌에 종족적 ‘게토’로서 조선인 극장가가 형성되었다는 점은 종족 간의 충돌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며, 감시 역량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에도 좋은 조건이었다. *주4 다만, 극장 내에서 이루어진 종족 간의 갈등 상황이 어디까지나 극장의 울타리 안에서 봉합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던 것과 달리, 종족의 연대를 통해 결집된 에너지가 극장 바깥으로 확산 될 가능성은 훨씬 커지게 된다는 점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현 종로구 관철동에 위치했던 1937년 우미관 의 모습 (사진: 서울역사박물관," 우미관(1937) ", 서울역사아카이브) 둘째번 연주회를 열던 십이일 밤 우미관에는 일장 대풍파가 일어난 일이 있었는데, 그 사실을 들은즉 당일밤 아홉 시쯤 되어 무대에 섰던 이왕 다동 기생의 은희 아비가 품속에 있는 금시계를 잃어버린 소동 이 생기어 형사들은 필경 사람 많이 모인 중에서 못된 스리(소매치기)란 도적이 그리함인 줄 짐작하고 대활동을 개시하여 파하기 전에 틈틈이 나아가는 사람들을 일제히 신체 수색 을 한 바 마침내 시간이 다 되어 수백의 관객은 물결치듯 솟쳐 나아가자 준비하고 있던 형사들은 나아가는 사람마다 일일이 신체 검사를 할 때, 모든 관객들은 표 사가지고 구경왔다가 신체 검사를 당하는 것은 참으로 당치 못할 일이라 하고 호성을 지르고 풍파 를 일으키어 그대로 솟쳐 나아갔으므로 한참동안 그러한 혼란은 없었고 신체검사도 마치지 못하여서 매우 살풍경을 이루었다더라. - 한국영상자료원 편, 『 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1918-1920 』, 2009, 267쪽. 기사, “우미관의 소동”, 《매일신보》, 1919. 11. 14. 우미관에서 발생했던 경찰과 관객의 충돌은 종족공간의 파급력을 엿볼 수 있는 사례에 해당할 것이다. 금시계를 분실한 관객의 신고가 접수된 후 임석경관은 소매치기의 소행으로 짐작하고 증원을 요청했으며, 극장을 나가는 수백 명의 관객들에 대해 일일이 신체 수색을 시도하고자 했다. 그러나 관객들이 “표 사서 영화 보러 왔는데 신체검사가 가당키나 하냐”면서 강하게 항의하며 나가버리자 검사도 채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무척이나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관객들은 극장 안에서 행사된 공권력의 통제에 대해 공공연한 반감을 드러냈던 셈인데, 주목할 것은 이 사건이 3.1운동이 시작되었던 1919년 에 발생했다는 점이다. 전 조선 단위로 확대된 3.1운동의 여파가 남아 있던 경성에서 제국은 조심스러운 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경찰의 통제가 또 다른 저항운동의 도화선 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차 종족공간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가게 된 조선인 극장들은 중대한 소요사태가 예견될 때마다 치안 당국의 ‘일급 감시대상’으로 지목되기에 이른다. 그렇다고 해도 극장을 무조건 폐쇄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었다. 외려 제국은 극장이 영업을 중단하게 된다면 치안에 위협 요소가 될 수 있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다. 베르톨트 브레히트나 아우구스또 보알이 지적했던 것처럼 극장은 사회적 불만이 대규모 대중투쟁으로 번져나가지 않도록 방지하는 감정의 배출구 역할을 담당한 곳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제국은 사회통제와 치안 유지를 위한 유력한 기구로 극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제국은 조선인 극장들의 영업을 허용하되, 종족의식에 기반한 폭발력을 적절히 제어 하는 기술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흥행장급흥행취체규칙”(1922)을 필두로 극장 취체규칙들이 본격적으로 입안되었던 것은 그 연장선에 놓인 조치였다. 3.1운동 이후 제국은 기존의 무단통치에서 문화통치를 표방하게 되었던 바, 극장은 새로운 통제기술의 유효성을 확인하기 위한 유력한 시험대와도 같았다. *** 주1. 김승구, 「1910년대 경성 영화관들의 활동 양상」, 『한국문화』 53,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1. 주2. 유선영, 「극장구경과 활동사진 보기 : 충격의 근대 그리고 즐거움의 훈육」, 『역사비평』 64, 역사비평사, 2003. 주3. 백두산, 「1910년대 경성 북촌 조선인 극장가와 종족공간적 구성」, 『한국연극학』 63, 한국연극학회, 2017. 주4. 이순진, 『(조선인 극장)단성사: 1907-1939』, 한국영상자료원, 2011, 34쪽. 이광욱(극장문화사 연구자) l 읽고 생각하며, 말하고 글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과거의 기록을 뒤적이고 오늘의 사람들과 소통하며 함께 미래를 고민한다. 건국대학교 글로컬캠퍼스 조교수(동화 한국어문화학과), 한국영상자료원 객원연구원(『신문기사로 본 조선영화』 시리즈). 『드라마, 일상성의 미학』(2024) 공저, 「카프 연극대중화론의 전개와 송영 풍자극의 매체미학」(2018), 「도달한 임계점과 보존된 미래 – 발성영화의 정착과 경성 소재 조선인 극장의 연쇄 반응」(2021), 「표류하는 조선영화 : <임자 업는 나루배>에서 <정춘삼>으로 – 최초의 영화 판권 소송과 식민지 조선영화 시장의 추이」(2022) 집필.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한국영상자료원에 소장 중인 < Archives Korea 1930-1940 >은 여러 가지 의미로 어마어마한 기록영상 필름이다. 이 영상은 이미 2021년에 기록영상 컬렉션 의 일부로서 심층 해제와 함께 공개됐고 VOD 기획전 에서도 짧게 다룬 바 있지만, 1928년부터 1941년경까지의 방대한 시기를 촬영하고 두서없이 묶어놓은 꽤 불친절한 영상인 탓에 전체적인 맥락을 한 번 더 소개해 보려 한다. 캐나다에서 태어나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 제임스 헨리 모리스(J. H. Morris)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곳에서 트램 회사 ‘Market Street Railway’의 부매니저로 일하던 모리스는 28세가 되던 1899년에 서울로 건너와 한성전기회사가 부설한 전차 운행 관련 업무를 맡게 된다. 그의 여권(1910.2, 1918.4.)에 기재된 바대로 애초에 조선에 온 것은 '사업 목적의 임시거주'였지만, 근대적 시간 및 경제 개념이 부족했던 조선인들과 함께 아웅다웅하면서 정이 들기도 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캐나다 출생의 미국인 여성과 결혼(1902)도 하고 딸도 낳아(1905)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생각이 바뀐 듯하다. 결국 그는 서울 정동의 외국인 공동체 속에서 정확히 40년을 종횡무진 활약하다가 1938년에 돌아가게 된다. 조선에 올 때는 중간 경유지인 일본 고베에서 제물포까지 이동하는 데만 해도 11일이 걸렸지만, 고국에 돌아갈 때 즈음엔 23시간 정도면 가능해졌을 정도로 세상이 많이 변했다. "1899년에 조선에 온 J. H. 모리스씨는 40년간 서울에서 사업을 하다가 은퇴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현재 주소는 캘리포니아주 밀브래 하이랜드의 엘더 애비뉴 30번가입니다. 모리스 부부는 한국에 거주하는 모두에게 변함없는 친절과 배려로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 “Contributor's Column”, The Korea Mission Field 36 , no.2 (1940년 2월호) 그는 긴 조선 체류기간 동안 광산업, 자동차 수입 및 정비업, 램프 등 생필품 수입 판매업 등을 하며 미국, 일본, 중국 등을 수시로 오갔다. 한편으로는 서울기독교청년회(YMCA)에서 재정 임원을 역임했고 왕립아시아학회 조선지부(RASKB)의 회원(회보 속 회원록 기준으로 1915년부터 1940년까지)이기도 했으며, 그가 1924년에 마련한 강당 공간을 외국인 대상의 초교파 연합 교회인 서울유니온교회(Seoul Union Church) 및 서울외국인학교(Seoul Foreign School)의 각종 예배 및 행사 용도로 제공하는 등 정동의 선교사 모임들과도 돈독한 관계를 유지했다. <모리스 홀(Morris Hall) 앞 미국 장로교 조선선교회 연례 모임 기념 사진(1939)> 사진: Moffet Korea Collection (Photograph, Series 5, Box 33) “서울외국인학교협회는 작년에 매입한 건물 2층에 새로운 강당을 완공했다. 이 강당은 300명의 청중을 편히 수용할 수 있으며, 협회는 건립위원회 위원장 J. H. 모리스 씨의 봉사와 관대함을 기려 환호 속에 이 새로운 강당을 "모리스 홀"로 명명하기로 의결했다. 서울유니온교회는 준비되는 대로 이 강당에서 정기 주일 예배를 거행하기로 했다.” - “Notes and Personals” , The Korea Mission Field 20, no.4 (1924년 4월호), p.80 <정동 21번지, 모리스 상회(J. H. Morris & Co. Seoul) 전경> *주1 모리스 상회가 취급하던 물품은 자동차 및 부속들, 타이어, 모터사이클, 램프, 화재보험 등 다양했다. (좌)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20 no.2 (1924년 2월호), (우) 광고지면, The Korea Mission Field vol.13 no.8 (1917년 8월호) 무엇보다도 사진광이었던 그는 유니버설 필름의 조선 내 수입 배급업을 하면서 필름 촬영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1920년대 후반부터 조선을 떠나는 순간까지의 왕성한 활동들을 필름 길이 기준으로 3시간 30분 가량(16mm 필름 7권), 적정 속도로 영사했을 때의 기준으로 5시간 15분 가량의 방대한 촬영본으로 남기게 된다. 그가 샌프란시스코에 돌아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2년 2월에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뜨게 되니, 거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영상으로 기록했던 셈이다. 4일 월요일. 구름. 쌀쌀함. 서울 집. 하디(Hardie) 박사의 집에서 케른(Kern) 및 그 일행들과 저녁식사를 했다. 식사 후 모리스(Morris)씨가 자신이 직접 찍은 영상을 보여줬는데, 동쪽 궐 내, 금강산, 필리핀, 백두산의 모습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9시 반 경에 귀가했다. - 『윤치호 일기』(尹致昊日記) 10권 중 12월 4일 일기 J. H. 모리스의 일대기와 그를 둘러싼 정동의 선교사, 외교관, 사업가 공동체를 이해하는 것은 이 뜬금없는 푸티지 모음집의 진정한 의미를 파악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된다. 1930년대 초중반 전주와 함흥 일대의 선교 활동 모습, 뜬금없이 중국에서 촬영된 푸티지들(1920년대 중후반부터 선교공동체가 모색했던 중국 선교와의 관련성 등), 1936년 5월 28일 이화학당 개원 50주년 행사 등이 촬영됐던 이유, 그리고 샌프란시스코 차이나타운에서 194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진행됐던 “Bowl of Rice" 퍼레이드를 비롯한 캘리포니아 인근의 풍경들이 1940년에서 1941년 즈음에 촬영됐던 동기 등 대략적인 맥락은 이제 그의 생애와 그가 속했던 공동체와의 관계를 통해 어느 정도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게 된다. <Archives Korea 1930-1940> 중, 1940~1941년에 촬영된 푸티지들 (좌) 캘리포니아 레드우드(Redwood) 공원, (우) 샌프란시스코 “Bowl of Rice” 퍼레이드 특히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영상 속 인물들 사이에 흐르는 정서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조차 쉽게 구하기 어려운 극동의 한 나라에 자리를 잡고 서로 의지하고 갈등하며 3세대에 걸쳐 함께 했던 60여 년의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들은 마냥 착한 사람들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선교지의 발전과 그 국민들에 대해 함께 공부하고 고민했던 흔적들이 기록 여기저기에 남아 있으며, 어려움 속에서 하나의 목표를 위해 움직였던 공동체로서 서로 간의 유대감도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정동에서 태어난 2세, 3세들은 서로를 ‘Korea Kids’라고 칭했고, 1940년대 초 일제의 압박에 밀려 각자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도 최소 50여 년 이상 조선에서의 추억담과 서로의 근황을 Korea Klipper 라는 이름의 월간 소식지로 엮어 구독했으니 말이다. <J. H. 모리스의 사위(딸 Marion의 남편)인 스테판(C. H. Stephan)이 최근에 사망했다는 셔우드 홀(Sherwood Hall)의 전언> 사진: The Korea Klipper vol.39, no.2 (1980년 2월호), 첫번째 소식. 모리스의 영상을 보면 이렇듯 서로에 대한 신뢰와 친밀감이 언뜻 비춰지는 장면들이 있다. 중일전쟁 직전의 긴장감과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 등으로 인한 우울한 분위기 속에서도 영국 영사관에서 열린 1937년 5월 24일 대영제국 기념일(Empire Day) 행사 중의 아이들은 해맑기만 하고 공동체 친구들은 서로를 향해,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미소 짓는다. 1935년 3월에 경복궁 후원이 특별 개방되면서 열렸던 야외 연회장에서는 붐비는 방문객들 사이로 다른 장면에서 낯익은 얼굴들이 나타난다. 이때 카메라와 이들의 정서적 거리는 매우 가까워 보인다. <Archives Korea 1930-1940> : 모리스를 보고 활짝 웃어 보이는 사람들 (상) 1935년 경복궁 후원 (3:48:24), (중) 같은 장면, 구세군 모자를 쓴 새뮤얼 모팻 선교사? (3:48:05), (하) 1937년 영국 영사관, 대영제국의 날 행사 (4:46:32) [참고] 이하 제시되는 타임코드(시:분:초)는 적정 속도로 조정한 KMDb VOD 버전 기준의 시간입니다. 모리스의 이 방대한 기록영상 필름은 모리스 사후 그의 딸 매리언(Marion)이 간직하고 있다가 친분이 있던 로스 H. 맥도널드(Ross H. Macdonald) 토론토 대학 교수에게 전달했고, 그의 사망 후 아내 리스(Leith Macdonald)가 캐나다 연합 교회(United Church of Canada)에 기증했다. 그리고 2020년 1월, 모리스의 손녀와 친분이 있던 다큐멘터리 영화작가 마티 그로스(Marty Gross)의 도움을 통해 <Archives Korea 1930-1940>는 드디어 어언 80여 년 만에 한국영상자료원에 도착했다. 진면목이 드러난 모리스 필름의 이모저모를 짧은 글 하나에 모두 설명하기란 무리가 있다. 덧붙이자면 이 영상에 등장하는 장소, 건물, 인물, 상황에 대한 식별은 이제 걸음마 단계이다. 16mm 필름 품질 상의 한계도 있지만, 기록영상 속 정보를 새롭게 하나 식별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정작 우리의 주인공 모리스 씨의 얼굴을 식별하는 데에만 해도 여러 근거자료를 교차 검증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고 이마저도 100% 확신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의 추정은 다음과 같다. (이외에도 미 감리교 디지털 컬렉션의 자료 를 함께 참고해 볼 수 있다.) (좌) J. H. 모리스의 여권(1918.8.21.) 속 가족사진 : 순서대로 모리스(47세), 딸 매리언(14세), 아내 마벨(45세) (우) 마벨(Mabel Clair Perkins)의 여권(1923.11.5.) 속 사진 <서울유니온 50주년(1939년) 기념사진 속 모리스(68세)> 사진: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위 사진 중 모리스 부분 확대>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 추정 인물 - (상) 3:21:18 (하) 3:16:17 <Archives Korea 1930-1940> 속 모리스의 가족들 (상) 모리스의 딸 매리언 부부로 추정되는 인물들 (3:14:08), (하) 맨 오른쪽은 모리스의 아내로 추정 (3:17:36) ※ 참고 문헌 Morris, J. H. “Early Experience with the Seoul Street Railway”, The Korea Mission Field vol.36 no.2 (1940년 2월호), Seoul: 26-27. Macdonald, Leith, “Rare Film Footage Captures: Korea in the '30s”, Korean Culture , vol.8, no.2. (Summer 1987). 33-37. Underwood, H. G. “An American Boy in Yesterday's Seoul - 'Golden Days' Fondly Recalled”, KOREANA vol.5, no.1, (Spring 1991), 19-26 Clark, Donald N. “Impermanent Residents: The Seoul Foreign Community in 1937”, TRANSACTIONS of the Royal Asiatic Society, Korea Branch , vol.64, (1989) 19-37. *** 주1. 사진: Cameron, W. H. Morton. Present Day Impressions of Japan; the History, People, Commerce, Industries and Resources of Japan and Japan’s Colonial Empire, Kwantung, Chosen, Taiwan, Karafuto. Edited by W. Feldwick. Chicago: Globe Encyclopedia Co., (1919) p.854
동대문활동사진소는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에서 전등의 편리함을 알리고 종업원을 위안한다는 명목으로 1903년 세운 극장이다. 1908년부터 그 이름을 광무대라 불렀다. 한성전기회사는 고종이 세운 황실기업이었다. 1896년 말 고종은 한성전기회사 자본금 총 20만원 중 내탕금(內帑金)으로 10만원을 내어 이근배(李根培), 김두승(金斗昇)의 명의로 창업을 준비시키고, 1898년 한성전기회사를 세웠다. 회사의 운영과 설비는 경인철도 부설공사의 청부인으로 조선에 들어와 있던 미국인 콜브란(H. Collbran)과 보스트윅(M. R. Bostwick)에게 맡겼는데 이때 이들로부터 차관 10만원을 받았다. 이때 받은 차관으로 말미암아 소유자인 황실과 운영자인 콜브란 측 사이에서 채무 분쟁이 발생한다. 이 문제는 1901년 7월 콜브란이 한성전기회사 사옥에 게양된 태극기를 성조기로 바꿔 달면서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 1902년 8월 대한제국 정부는 한성전기회사에 대한 문부조사(文簿調査)를 실시하여 콜브란 측의 잘못을 따졌으며, 1903년 조선인들은 콜브란 측의 부당한 처사에 항거하는 뜻으로 통문(通文)을 배포하고 전차안타기 운동을 펼쳤다. 이러한 움직임에 당황한 미국은 해병 100명을 파견하여 한성전기회사 사옥 주변을 경계시키는 등 사태를 악화시켰다. 한성전기회사에서 동대문활동사진소를 만들고 활동사진을 상영하기 시작한 시점은 서병달(徐丙達)이라는 사람이 전술한 채무 분쟁과 관련하여 종로에 운집한 군중 앞에서 콜브란을 성토하다 경무청에 구금되는 사건이 일어났던 1903년 6월이었다. 아래는 활동사진 상영을 알리는 신문광고이다. [사진 2] 최초의 활동사진 상영 광고 “ 東門 內 電氣會社 機械廠 에셔 施術 活動寫眞 은 日曜 及 陰雨 를 除 外 에 每日 下午 八時 로 十時 지 設行 大韓 及 歐美 各國 의 生命 都市 各種 劇場 의 絶勝 光景 이 具備 외다 . 許入料金 銅貨 十錢 ” 1 콜브란은 기계창 안의 창고를 활동사진관으로 만들어 수익 사업을 펼치는 동시에 한성전기회사에 대한 조선인들의 좋지 않은 감정도 무마시키고자 했다. 순회 영사나 1회성 상영이 아닌 상설 상영을 추진한 배경이 여기에 있었다. 한성전기회사는 활동사진 기계를 구입하여 전차 기지가 있던 동대문의 전기회사 기계창과 전차 종점인 서대문 근처의 황실희대에서 활동사진을 상영했다. 이때 상영된 것들은 대한제국과 구미 각국의 도시 모습을 담은 실사영화와 짧은 길이의 극영화들이었다. 그러나 활동사진관이 개관한 이후에도 콜브란과 고종 사이의 채무 분쟁은 해소되지 못했다. 손진민(孫振玟) 등 민족주의적 성향의 인물 10여명이 한성 각 통에 전차안타기 운동에 참여하자고 촉구하는 통문을 배부하는 등 반외세 운동도 절정에 달했다. 악화되던 채무 분쟁은, 러일전쟁 발발의 기운이 감도는 가운데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원한 고종이 한성전기회사를 미국에 넘기면서 마무리되었다. 이로써 한성전기회사는 미국에 본사를 둔 한미전기회사(韓美電氣會社)로 바뀌었고, 고종은 일개 투자자로 남게 된다. 한성전기회사가 미국 자본의 한미전기회사로 바뀐 뒤에도 동대문활동사진소의 운영은 계속되었다. 1906년 당시 한미전기회사의 활동사진 수입은 1,181.39원으로 회사 전체 수입의 0.6%를 차지했다. 1907년에는 625.84원으로 전체 수입의 0.2%, 1908년 1~8월에는 138.10원으로 전체 수입의 0.1%에 머물렀다. 결국 동대문활동사진소는 1908년 광무대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 [사진3]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 표지 동대문활동사진소로 운영될 당시의 시설이 어떠했는지를 알려주는 자료는 없다. 다만, 동대문활동사진소가 광무대로 이름을 바꾼 후의 극장 모습은 노래 책인 『무쌍신구잡가(無雙新舊雜歌)』 [필자 주: 1910년대 일반에 유행하던 노랫말을 수록한 잡가(雜歌)집. 1915년 유일서관(惟一書館) 발행.] 의 표지에 그림으로 남아있다. 이 그림으로 추정컨대 극장의 객석은 2층 규모로, 2층 객석 한쪽에는 만국기가 걸려있고 활동사진관으로 이용해서인지 무대의 폭이 좁은 편이었던 듯하다. 가부키 등을 공연할 때 필요한 화도(花道)는 없다. 이는 다음의 회고를 통해서도 개략적인 확인이 가능하다. 무대에는 미국긔와 됴선긔를 그린 휘장을 처놋코 그 휘장 압헤 굵은 줄을 가로 매여 놋코 맨 - 먼저는 少女 광대가 나와서 줄을 타고 그 다음에 휘장을 거더 치우더니 조선 녀자가 춤 ( 僧舞 等 ) 을 몃 가지 추고 그리고 불이 지는 고로 『 익크 활동사진이 나온다 』 하고 기다렷더니 한참이나 캄캄한 대로 잇다가 식 언 외투를 닙은 서양 사람 한 가 웃둑웃둑 서잇는 것이 환 - 하게 빗취엿다 . 2 1908년 개장한 광무대는 1909년부터 박승필(朴承弼)이 운영을 맡는다. 이후 전통연희 상연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활동사진 상영을 그만 둔 것은 아니었다. 당시에는 프랑스의 파테사(Pathé)가 파격적인 가격으로 필름을 판매, 싼 가격의 필름이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이것이 상하이를 통해 조선에까지 들어와 광무대에서 상영되었다. 활동사진 전용관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광무대는 조선인들이 활동사진을 관람하던 대표적인 장소였다. 1909년 한미전기회사가 일한와사전기회사(日韓瓦肆電氣會社)에 인수되면서 광무대 연극장도 와사전기회사가 소유하게 된다. 그리고 1913년 와사전기회사가 이 연극장을 창고로 쓰기로 하면서 광무대는 지금의 을지로 4가에 위치했던 황금유원(黃金遊園) 내 연기관(演技館)으로 이전되었다. 박승필은 이 연기관 역시 광무대라 이름 붙여 운영했는데, 1918년부터는 단성사의 운영권까지 획득하게 된다. 이후 박승필은 광무대를 구극(舊劇) 전용극장으로, 단성사를 활동사진관으로 그 기능을 구분하여 운영하였다. 이런 식의 구분은 단성사가 직접 활동사진을 제작하면서 빛을 발하게 된다. 1924년 7월 단성사에서 이필우를 중심으로 촬영부가 조직되고 <장화홍련전>을 제작한다. 단성사의 변사와 광무대의 배우들이 동원되어 만들어진 <장화홍련전>은 1924년 9월 5일 개봉되었다. 이렇듯 박승필은 자신의 흥행 사업에 광무대를 효과적으로 운용했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면서 전통연희보다는 활동사진과 연극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것을 깨닫고, 광무대를 토월회(土月會)에 장기 임대하여 토월회가 광무대 시대를 활짝 여는 데 도움을 주기도 했다. 1927년 봄, 박승필은 자신이 일으켜 키운 광무대의 운영을 인척 박승배(朴承培)에게 넘기고 단성사 운영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러던 중 1930년 5월 2일 화재로 광무대가 소실된다. 광무대가 사라지면서 토월회와 단성사의 박승필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단성사를 전용관으로 이용하려던 토월회 단원들이 건물주인 다무라 미네(田村みね)에게 접근하여 단성사의 운영권을 뺏으려 했던 것이다. 이 문제는 토월회가 단성사를 포기하면서 일단락됐지만, 광무대가 사라지고 난 후 발생한 하나의 사건으로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1) 《황성신문(皇城新聞)》 1903년 6월 24일자. 2) 「활동사진 이약이」『別乾坤』1926년 12월호, 91쪽. * 본문은 필자의 『조선영화의 탄생』((주)박이정, 2018) 42~45쪽의 내용을 발췌, 수정하였으며 일부분 유민영의 『한국근대극장변천사』(태학사, 1998)를 참고하여 가필했음을 밝힌다. * 사진 1(글 상단). 동대문활동사진소가 자리했던 한성전기회사(후신 한미전기회사) 기계창 [자료] 「유완조액(游玩遭厄)」《황성신문》 1903.07.10. 近日 東大門 內 電氣鐵道社 中 에 活動寫眞 機械 를 購入 하야 士女 의 觀玩 에 供 으로 觀玩者 가 下午 八時 로 十時 지 電車 에 搭載 하야 紛紛往觀 하난 人山人海 를 簇聚 하야 每夕 票價 收入額 이 百餘元 이오 車票價 도 亦然 한 三昨日 은 新門 內 協律社 에도 如彼機械 一坐 를 排置 하고 觀玩 켸 으로 玩客 游女 數千人 이 聚集 하얏다가 忽然 電火 가 裂破 하야 滿屋 火光 이 奮迅 으로 衆人 이 一時 驚動 하야 自相 踐踏 하며 或 數仞 墻垣 에 自墮 하야 衣冠毀裂者 와 破頭折脚者 와 傷脅壞肢者 의 類 가 無數 한데 翌朝 에 視之 한 則 錦貝纓 香佩 等屬 이며 靴子 繡鞋 等屬 이며 紗羅 衣幅 等屬 이 或 半截 或 一隻 或 一片 이 紛紛堆積 하얏다더라 [자료] 광고, 《황성신문》 1907.10.26. ○本院 經費補充 기 爲 야 慈善演奏會 를 東大門 內 前光武臺 에셔 陰 九月 二十六日 爲始 야 限 三日 開會 야 順序 가 如左 오니 慈善 신 僉君子 枉臨 시와 觀覽 심을 望 홈 順序 一 奏樂 一 有志 紳士 慈善演說 一 世界 에 有名 活動寫眞 一 衛生幻燈 一 奏樂 一 臨時 야 滋味 잇 演藝 도 잇소 京城孤兒院 告白 [자료] 특별대광고, 《황성신문》 1908.05.26. 東大門 內 光武臺 에셔 陰 本月 二十七日 브터 諸般演藝 를 一新改良 야 古今 奇絕 事 를 摹倣 고 聖世風流 를 敎演擴張 야 僉君子 의 性情 과 眼目 에 感發愉快 케 玩賞品 을 設備 얏 오니 及期 光臨 심을 敬要 順 序 官妓男舞 佳人剪牧丹 劔 舞 梨衣舞 僧 舞 閑良舞 性 眞 舞 矢射舞 舞 鼓 電氣光舞 地 球 舞 舞童 項 莊 舞 法國 巴京 에셔 新購入 活動寫眞 隆熙二年 五月 日 時間 下午 七時半 으로 同 十一時 지 入 埸 券 英美烟草株式會社 에셔 製造 有名 紙券烟草 空匣 을 持來 시면 許入 북 표 二十匣 刀 票 十匣 히 이 로 十匣 滿 月 十匣 오 루 도 十匣 自行車票 五匣 人 物 票 十匣 鷄 票 五匣 만 부 十匣 靑 紙 烟 五匣 環 票 十匣 黃 紙 烟 五匣 以上 各種 中 一種 만 持來 시면 一人 의 代金 을 當 但 紙烟匣 이 無 야 不得已 境遇 에 代金 도 収入 [자료] "참신 굉장 활동사진", 《대한매일신보》, 1909.06.09. 佛蘭西 巴里城 떼 兄弟商會 漢城 特派員 이 東大門 內 光武臺 에셔 來 六月 捌日 부터 每日 午后 八点鍾半 에 活動寫眞 을 開設 空氣 를 應用 야 發出 留聲器 로 歐米 各國 奇妙 歌曲 과 壯快 軍樂 을 吹奏 며 仝 風景風俗 을 撮寫 야 新鮮美 麗 畵本 을 每日 別種 으로 交換 恒常 보아도 롭슴니다 觀覽料 壹等 四拾錢 二等 二拾錢 三等 拾錢 5 . 「극장 파순(泒巡) 보호」《황성신문》 1910년 2월 16일자. 近日 東大門 內 光武臺 에 光觀人 이 多數 故 로 何等 爭鬪 가 不無 다 야 東部警察署 에셔 巡查 八名 을 再昨夜 에 該臺 에 泒送保護 얏다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