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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union]리셋 KBS 뉴스 8회 _ 2_ 한일 군사 협정___미일 압력 때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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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일/한미 투자협정 한 칠레 자유무역협정 반대 토론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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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위한 한미/한일 투자협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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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한일 투자자유화협정 공동대응을 위한 간담회’ 제안 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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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열의 시대]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을 했다고?
한국영상자료원이 보유한 10,000건 이상의 검열 행정자료들 중 흥미롭고 주목할만한 것들을 선별하여 영화사적 배경이나 상황과 함께 소개하는 시리즈입니다. 이 글들을 통해 새로운 자료들을 발견하는 기쁨과 아울러, 한국영화사를 보다 다양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계기를 만나게 되기를 기대합니다. 오늘날의 국가정보원, 80-90년대 국가안전기획부의 전신이자 박정희 정권 유지를 위한 핵심 권력기관, 수많은 민주인사들에 대한 고문으로 악명높았던 곳. 바로 중앙정보부다. 그런데 국가안보라는 거창한 임무를 수행하던 이곳이 영화검열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사실, 심지어 공식적이고 제도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던 사실은 그저 원로영화인 몇 분들의 증언으로 전해져 왔을 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우리 영상자료원이 검열서류들을 공개한 후에야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 역사가 체계적으로 정리되지는 못했다. 이 글은 그 예비적인 시도로, 중앙정보부가 영화검열에 참여했던 역사와 방식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1960년대 초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한 검열 개입 필자가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선에서 볼 때, 중앙정보부가 검열서류에 등장하는 최초의 사례는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재검열 문서다. <오발탄>은 1961년 4월에 개봉하였으나, 5.16쿠데타 직후 상영중지가 되었다. 이후 7월 20일 재검열을 거쳐 상영중지가 공식화되는데, 이때 재검열의 주체 중 하나로 처음으로 중앙정보부가 등장하는 것이다. 중앙정보부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것이 1961년 6월이니, 한달 남짓 지난 시점이었다. 당시 중앙정보부 검열관은 <오발탄>에 대해 “치안면에 있어서 역효과를 초래할 우려가 다분 내포하며 현 시국으로 보아서 상영불허함이 가하다고 사료됨”이라 밝혔다. 이후 <오발탄>은 1963년까지 상영정지 상태에 처하게 된다. 정보부가 영화검열에 개입한 최초 사례로 추정되는 <오발탄> 재검열 문서 다만 <오발탄>은 특수한 사례로, 아직은 정보부의 영화검열이 일상적이거나 제도화된 것은 아니었다. 전수조사를 해보지 않아 단언할 수는 없지만, 대략 1961년 9월경이 되면 정보부가 빈번하게 검열에 개입하는 것을 서류로 확인할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첫 사례는 < 붉은 두목 >(이영, 1961)이라는 반공영화의 본편 검열서류이다. 이후 정보부는 주로 국가 안보와 결부된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검열자로 참여했다. 1962년 영화법 제정 후 제작신고라는 이름으로 시나리오 검열이 점차 (준)제도화되면서, 정보부는 본편뿐 아니라 시나리오 검열에까지 관여하게 된다. 이들 영화가 국가 안보에 관련된다는 점에서 중앙정보부의 개입이 정당화되었던 것일 텐데, 역으로 보자면 중앙정보부가 관심을 가짐으로써 반공영화가 국가의 안보 이익을 해치거나, 나아가 불온한 영화로 낙인찍힐 수 있다는 아이러니한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 7인의 여포로 >(이만희, 1965) *주1 사건일 것이다. 당초 공보부와 정보부의 합동 검열에서 이 영화는 소수의 제한사항만으로 통과되었으나, 이후 정보부의 입장 번복으로 영화 상영이 중단되고 반공법 위반으로 감독이 구속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검열 후 돌연 <7인의 여포로>의 상영보류를 지시한 중앙정보부의 서류(전언통신문) 반공영화만이 중앙정보부가 개입하는 장르는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 >(임원식·나봉한, 1964)와 < 춘몽 >(유현목, 1965)의 사례를 들 수 있겠다.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는 내용상의 불온성이 문제가 되었다기보다는 제3공화국의 초기 위기를 낳은 한일협정 반대 시위라는 시국상황과 관련되어 영화의 반일적 톤이 민감하게 포착된 것으로 보인다. 서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정상적인 절차에 따라 1964년 12월, 공보부 검열을 마쳤으나 돌연 1965년 3월 6일과 15일 두 차례에 걸쳐 중앙정보부가 추가 검열사항을 전달함으로써 검열 결과가 변경되었다. 이에 관해 신상옥 감독은 중앙정보부가 개봉을 반대했으나,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결정으로 개봉이 가능해졌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당시의 검열이 반드시 서류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는 사례다. <춘몽>이 형법에 저촉되는 영화이므로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하라는 내용의 정보부 전언통신문 <청일전쟁과 여걸 민비>의 경우 그 맥락상 정보부의 개입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음란, 외설이 문제가 된 <춘몽>의 경우는 상당히 이례적이다. 이 영화의 검열에 참여한 정보부는 “자학적 변태성향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 국민 여론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 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할 것이며 형법 제243조 및 제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 기관과 협조하여 조치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된다는 의견을 밝혔다. 정보부의 반대의견에도 불구하고 공보부는 문제 장면의 대폭 삭제 후 상영허가조치를 하였지만, 이후 감독 유현목 은 음화제조반포죄로 기소되어 유죄 취지의 판결(선고유예)을 받기에 이른다. 안보나 사상이 아닌 풍속 문제의 영화에 대해 중앙정보부가 개입한 이유에 대해 어떻게 보아야 할까? 지면 관계로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당시 유현목 감독이 반공죄로 투옥되었던 이만희 감독을 옹호한데 대한 보복성 조치로 이해되고 있다. 상시적 검열자가 되다(1968년 말~ ) 1968년 말에 접어들게 되면 중앙정보부의 영화검열 참여 방식이 전환된다. 개봉되는 모든 영화에 대한 상시적인 본편 검열자로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정확히 언제부터 정보부의 본편 검열이 제도화되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다만 10월 5일에 검열에 합격한 < 일본인 >(김수용, 1968)의 경우에는 기존 방식대로 검열이 이루어졌으나, 10월 15일 시행된 < 수전지대 >(김수용, 1968)의 검열서류에서는 정보부의 영화검열의견서를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10월 중순(늦어도 11월 초순)경부터 정보부가 검열에 참여하는 관행이 시작되었으리라 추정할 수 있다. <수전지대>의 정보부 영화검열 의견서(삭제 대상으로 명시된 "집단 난투장면") 현재 시점에서 중앙정보부가 상시적인 검열자로 등장하게 되는 구체적 배경을 설명하는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김신조 사건이나 푸에블로호 납북사건과 같은 1968년의 안보적인 위기 상황, 1968년 7월 말 공보부가 문공부로 전환되었던 행정체제의 개편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짐작할 뿐이다. 새로 개편된 체제에 따라 상시 검열은 정보부 외 내무부(치안본부)와 주무부처인 문공부 세 곳이 담당했다. 이전의 주체와 비교할 때, 문공부(주)와 내무부(부)에 정보부가 추가된 것이라 볼 수 있겠다. 세 주체 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1970년대 문공부의 영화검열 담당 직원이었던 이남기 의 증언을 참고할 수 있다. 근데 그 검열관 구성은, 국산영화 경우에 대개 인제 과장하고 국산영화 담당 사무관하고 그 실무자까지 들어가요. 에. 들어가서, 그러고 인제 외부에서는 인제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파견된 이 검열관들이. 그래서 문공부하고 중앙정보부하고 그 저 치안본부하고 결국 세 개 기관이 맡아 전담하게 되죠. 그리고 인제 ... 안기부(정보부의 착각)에서 온 분들은 주로 인제 국가안보에 그 위해, 저해요인 같은 거. 우리가 남북분단 된지도 참 오래됐지만은 이런 긴장관계에 있으니까북한을 찬양한다든지, 요즘 어떤 세태하고는 전연 틀렸죠, 그 당시는. 그 엄격히 영화든 처리할 때니까. 그 북한 찬양 이런 문제. 그러고 인제 치안본부 청소년과에서 나오는 거는 결국 인제 청소년의 유해여부, 이런 걸 인제 보고. 그리고 요즘도 그 하지만은 청소년 그 관람 등급가부 이런 걸 주로 결정하게 되고. 그러고 그 유해성 저 윤리성, 이런 문제도 그때는 상당히 그 시기에는 엄격히 다뤘어요. - 채록연구 배수경, 『 2015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합작영화 2 김정란·이남기·구중모 』, 한국영상자료원, 2015, 147-148쪽, 강조는 필자 즉, 사상 및 안보에 관한 사항은 중앙정보부, 미성년자 보호(미성년자 관람가부 판정 포함)에 관한 사항은 치안본부가 맡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문공부는 전반적으로 검열 진행과정을 조율하고, 의견을 종합하여 제작사와 소통하는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공윤의 본편 검열 이후(1979년 4월~ ) 약 10년 이상 유지되었던 본편 검열 체제는 1979년 4월, 문공부가 본편 검열권을 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에 이관함으로써 변경된다. 공윤의 1기 영화 심의위원은 20인 이내로 구성되었는데, 이 중 심의위원 17인은 공윤위원장의 추천에 따라 문공부 장관이 위촉였고, 3인은 당연직으로 구성되었다. 이 당연직에 중앙정보부와 내무부의 검열관이 포함되었다. 이와 같은 체제는 1980년대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이는데, 정확히 어느 시점에 종료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로 확인되지 않는다. 보완 조사가 필요한 부분이다. 1979년 7월 24일, < 간첩잡는 똘이장군 >(김청기, 1979) 공연윤리위원회 위원별 검열의견서 중 하나. 검열자 임광수는 중앙정보부 검열위원이었다. 요컨대 중앙정보부는 1961년 설립 직후부터 1980년대까지 20여년간 영화의 검열자였고, 특히 1968년 하반기 이후에는 상시적으로 영화 검열에 참여했던 가장 중요한 검열자 중 하나였다고 할 수 있다. 국가 정보기관이 영화검열에 제도적이고 상시적으로 개입한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그만큼 당시 정부가 대국민 선전전을 광범위하게 수행했고, 영화의 대중 영향력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특히 초기에 반공영화를 중심으로 부분적으로만 관여하던 정보부가 1968년 말 이후 모든 영화의 본편 검열에 참여했다는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그것은 이 시기 국가 안보라는 것이 단순히 직접적으로 관련된 주제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영화가 다루는 국민의 일상에까지 확장해 가고 있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는 1970년대 유행했던 “총력안보”라는 개념으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 마지막으로 부기해 둘 사항이 있다. 간혹 검열서류에서 CIA라는 단어가 나타난다. 검열자료 연구 초기, 필자를 포함 관련 연구자들이 이를 미국의 정보부로 오인하는 경우들이 있었다. 그러나 CIA가 언급된 다양한 검열자료들을 볼 때, CIA는 KCIA(중앙정보부)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차후 연구를 통해 보다 분명히 밝혀져야 할 부분이다. *** 주1. <돌아온 여군>이라는 제목으로 재편집되어 1965년에 개봉했다.
[오늘의뉴우스]1964년 6·3항쟁의 현장
1964년 6월 3일 대학생들은 서울 시내와 전국 주요 도시에서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했다. ‘6‧3항쟁’으로 일컬어지는 이 날 시위의 직접적 원인은 박정희 정권의 한일회담 추진이었다. 5·16군사쿠데타 정부에 이어 1963년 12월 민정 이양으로 들어선 박정희 정부는 경제개발 자금을 일본에서 구하기 위해 한일협정 조기타결을 기도했다. 반면 야당 측에서는 이를 ‘대일 저자세외교’라며 비판했다. 학생들 역시 ‘한일회담 굴욕 타결 반대’를 외치며 1964년 3월 24일부터 시위에 나섰다. 계속 이어졌던 반대시위는 6월 2일 박정희 하야를 내건 고대생들의 가두시위에 이어, 다음날인 3일, 서울 시내에서만 약 1만2천여 명이 넘는 대학생들이 나오며 저항의 절정을 이뤘다. 그리고 이 6·3항쟁의 현장은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역사영상융합연구팀에서 미국 National Archives and Records Administration(이하 NARA)을 통해 수집한 <South Korean University Students Demonstrate>라는 약 18분짜리 영상에 잘 담겨있다. 영상에서 드러나는 시위는 다채롭다. 흰 가운을 입은 약대생들의 행렬이 있는가 하면, 무장한 경찰들과 팽팽한 몸싸움을 하는 학생들도 있다. 당시 고려대 재학생으로 한일회담반대시위에 적극 참여했다고 알려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모습도 찾을 수 있다. 가두시위 도중이던 ‘이명박 대학생’은 다른 학생들과 진지하게 무언가를 상의 중에 있다. 서울 약대생들의 시위 무장경찰과 몸싸움을 벌이는 대학생들 당시 고대생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이명박 전 대통령 시위 당일, 비가 오기 시작하자 많은 이들이 우산을 손에 들었다. 하지만 각 대학 단위별로 가두시위에 나선 많은 대학생들은 비를 맞으며 소속 대학을 밝힌 플래카드를 내걸고 도심 곳곳을 뛰어다녔다. 아래와 같이 ‘단국대학’이라 적힌 커다란 플래카드와 더불어 태극기를 앞세운 단국대 학생들의 시위 행렬이 대표적이었다. 태극기와 ‘단국대학’ 플래카드를 든 단국대 학생들 무장 경찰과의 대치 속에 시위는 일부 과격한 양상을 띠기도 했다. 학생들은 최루탄을 쏘는 경찰에 맞서기 위해 돌을 던지며 대항했다. 영상은 학생들의 투석전 현장과 더불어 투석전이 남기고 간 도심에 굴러다니는 수많은 돌멩이들도 보여주고 있다. 경찰에 맞서 투석전에 나서는 대학생들 투석전의 흔적 학생들은 철사를 두른 바리케이드를 직접 손으로 옮기며 경찰의 저지선을 뚫었다. 트럭 탈취에 성공한 일부 학생들은 1960년 4·19 항쟁 당시처럼 트럭에 올라타 거리를 활보하기도 했다. 수많은 이들이 환호를 보냈고, 실제 많은 시민들이 시위에 합류했다. 경찰의 바리케이드를 옮기는 대학생들 트럭에 올라타 시위를 벌이며 이동 중인 대학생들 영상에서는 6‧3항쟁 당시 학생들이 내세웠던 다양한 주장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약대생들은 “민생고 끝이 없다 부정부패 규탄한다”는 주장과 더불어, 경찰의 최루탄 발포에 항의하며 “최루탄은 人體(인체)에 맹독성”이라고 쓴 플래카드를 들고 시위에 나섰다. “민생고 끝이 없다 부정부패 규탄한다” “최루탄은 인체에 맹독성” 서울대생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학생들은 “不信(불신) 받는 朴政權(박정권)은 辭退(사퇴)하라!”, “Y.T.P는 割腹(할복)하라!” 등의 주장을 앞세웠다. 특히 ‘YTP’는 당시 박정희 정부가 학내 사찰을 위해 이용했던 서울대 내의 대표적 단체였고, 학생들은 이에 대해 큰 분노를 드러냈던 것이다. “박정권 사퇴하라”, “Y.T.P는 할복하라” “박정희 물러가라” 요구와 함께 학생들은 일본과의 회담에 가장 앞장선 ‘김종필-오히라 메모’의 주인공 김종필에 대해서도 “김종필을 추방하라”라며 적개심을 드러냈다. "김종필을 추방하라" "박정희 물러가라" 그 외에도 “五(오) 원짜리 죽 먹는 놈 너만 잘났냐. 십만 원짜리 자가용 타는 놈 나도 잘났다 –국회의원”이라는 정치인에 대한 풍자라든지, 일본자본과의 교류에 앞장섰던 당시 재벌을 향한 “타도하자 亡國財閥(망국재벌)”과 같은 특색 있는 비판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이날의 시위는 결국 밤 9시 50분 박정희 정부의 비상계엄 선포로 끝이 났다. 무장 군인들의 진주 앞에 학생들의 저항 열기는 한동안 숨고르기에 들어가야만 했다. "5원짜리 죽먹는 놈 너만잘났냐 십만원 짜리 자가용 타는 놈 나도 잘났다." "타도하자 망국재벌" 1) 「South Korean University Students Demonstrate」 (한국근현대영상아카이브 NARA수집자료) 참조. 영상에는 영어 내레이션이 있지만, 소리가 작아 잘 들리지 않는다. 내용은 위 링크에 들어가면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실제 사실과는 다른 오류들이 많다.
[영화인][구술로 만나는 영화인] 김기 - 감독
' 김기 감독님..' 얼마 전에 만났는데도 오늘 또 다시 그리워지는 이름... 30여 년을 충무로 거리를 거의 매일 붙어 다니다시피 한 감독님, 매일 목욕하고, 식사하고, 술마시고 수없이 많은 작품을 디스커션하면서 그림자처럼 함께하던 충무로 시절... 그러나 많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추억을 되새기고 싶어 충무로를 이따금 찾는 감독님을 자주 만날 수 없어 송구스럽고 아쉬워서 그리워지고 넉넉한 그 웃음소리가 듣고 싶어 가슴이 뭉클해 질 때가 많다. 그만큼 충무로는 많이 변해가고 있다. 정도 세월 따라 많이 떠나갔고 낭만도 찾기 어려운 거리 충무로, 많은 영화인들이 젊음을 함께 해온 충무로는 이름만 그대로이지 지금은 삭막한 거리에 삭풍만이 흩고 지나간다. 한때 화려했고 아름다운 얼굴들과 마주치고 정이 넘쳐 흘렀고 꿈과 희망이 명멸했던 거리 충무로에 김기 감독이 발을 디딘 것은 1957년경이다. 1929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기 감독은 흥남화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민족의 비극 6,25전란 당시 단신으로 월남한 실향민이다. 김기 감독은 피난지 부산에서 동아대학 이종인 박사의 소개로 영화감독 이봉래 를 만나게 됐고 이감독의 조감독 써드로 영화와 첫 인연을 맺게 된다. 단신 월남해 사고무친이였던 김기 감독은 그때부터 이봉래 감독을 스승으로 모시고 희망에 찬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온몸에서 피가 터질 것 같은 열정으로 김기 감독은 영화에 매달렸고 그때 그의 눈에서는 시퍼런 불길이 쏟아지는 듯 했다고 한다. 그런 김감독의 열의에 애정을 가졌던 이봉래 감독은 다음 작품에서는 그에게 기록을 맡겼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당시에 기록이란 직책은 조감독 퍼스트에 버금갈 만한 위치였으니까.. 그렇게 조감독으로 끗발을 날리면서 오직 이봉래 감독 한 분을 일편단심 영화의 스승으로 모시고 7년여를 영화 속에 인생을 건 김기 감독에게 마침내 데뷔할 기회가 온다. 김기 감독의 영화감독 데뷔는 1964년, 영화계와 가요계에 일대 지각변동을 가져온다. 김기 감독이 첫 연출한 극영화 ' 동백아가씨 '는 1964년도 흥앵기록에서 2위를 멀찍이 따돌리고 흥행 톱이라는 획기적인 기록을 세우면서 멜로영화의 거장이 되는 빛나는 앞길을 약속 받았다. 동시에 가요계에서는 거의 무명이었던 여가수 이미자 가 영화 '동백아가씨'의 주제가를 불러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오늘날 국민가수 이미자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이렇듯 한 명의 걸출한 영화감독과 국민가수를 떠오르게 한 ' 동백아가씨 '는 드라마작가 추식이 집필한 라디오 연속극이 원작이였다. 당시 영화 기획자였던 노헌조 는 라디오 드라마를 사들고 시나리오작가 윤석주 에게 시나리오를 맡겼고 감독으로 기대주였던 조감독 김기를 선택한 것이다. 영원한 스승 이봉래 감독도 김기 감독의 데뷔를 진심으로 축하해 줬다. 부산 다대포에서 ' 동백아가씨 '를 크랭크인 하는 날 이봉래 감독은 부산까지 내려와 김기 감독이 연출하는 현장을 지켜보면서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우고 '김기! 잘해라!' 하며 격려를 보냈고 ' 고맙습니다, 선생님!' 얼마나 멋진 스승과 제자의 모습인가? 영화 속에서 '동백아가씨'주제가는 이미자 의 노래를 립 싱크해서 바의 마담이 된 엄앵란 이 불렀다.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면 대학생 신성일 이 학습자료(꽃과 식물채집) 조사차 섬마을에 들어왔다가 실족하게 되고 섬처녀 엄앵란의 아버지 김승호 가 그를 구출해주면서 엄앵란과 신성일의 사랑은 싹튼다. 신성일은 기약없이 서울로 떠나고 엄앵란은 임신한 배가 불러오자 아버지 김승호의 눈을 피해 신성일을 찿아 서울로 올라온다. 갈 곳 없던 엄앵란이 깡패두목 황해 를 만나 보호를 받으면서 애를 낳고 바의 인기 마담이 돼서도 신성일을 못잊어 '동백아가씨' 노래를 부르는데 마침 바에 온 신성일이 엄앵란을 보게되고 다시 둘의 사랑은 뜨겁게 불붙는데.. 깡패두목 황해의 순정적인 사랑이 얽혀드는 전형적인 멜로 영화다. 지금으로선 진부한 스토리보드지만 1960년대 당시로선 손수건을 몇 개씩 적셨던 장안의 화제작이었다. ' 동백아가씨 '로 화려하게 데뷔한 김기 감독은 1965년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를 연출하면서 멜로 감독의 위치를 확고히 해놓고 세 번째 영화로 공군영화 ' 성난 독수리 '를 연출했다. 멜로 영화에서 갑자기 군사영화로 장르를 옮긴 것은 '동백아가씨'의 제작자 노헌조 의 친구였던 공군장교가 많은 소재를 제공하면서 공군영화제작을 요청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같은 해에 ' 첫사랑 ' 1967년에 ' 독거미 ' ' 남매 ' 1968년에 ' 연상의 여인 '에서 내가 시나리오에 참여한다. 소설가 곽학송 의 시나리오에 윤색으로 가담하면서 난 김기 감독과 바늘과 실처럼 30여년 가까이 소중고 행복한 인연을 이어온 것이다. 그리고 같은 해에 한성영화사 정진모 사장이 제작한 '장마루촌의 이발사 '에 김기 감독과 내가 동승했다. '장마루촌의 이발사'가 제작되면서 참으로 희한한 에피소드가 하나 있었다. 내 친구 중에 도봉산 암자에 은거한 도사 한사람이 있었다. 김기 감독과 정진모 사장이 부인을 동반하고 나의 안내를 받아 유난히 더운 여름날 도사를 찾아간 것이다. 무더운 한여름 산행으로 땀에 훔뻑 젖은 우리 일행은 암자 앞에서 시원한 사이다를 마시고 있을 때 도사가 나타나서 대뜸 나를 가르키며 한다는 말이 '야, 너 왠 거지하고 같이 다니냐?' '거지라니? 임마! 한국영화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사장님을 거지라니?' 정진모 사장은 육척 거구에다 한여름에도 신사복에 중절모를 쓰고 다니는 신사이며 명동 주먹왕 이화룡 의 왼팔이었다. 한주먹에 내 친구 도사는 사망할 수도 있었다. 점을 보기는커녕 일촉즉발 험악한 사태를 김감독과 내가 기적적으로 진정시킨 건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뒤 도사의 말이 씨가 됐는지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그때 연일 계속된 한일협정 반대 데모로 인해 흥행에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 연출력이 뛰어난 작품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고 이에 탄력을 받은 김기 감독은 그 다음해에는 무려 7편을 연출하는 괴력을 발휘한다. ' 설녀 ' ' 초심 ' ' 목메여 불러봐도 ' ' 가슴에 맺힌 눈물 ' ' 울지도 못합니다 ' ' 한발은 지옥에 ' ' 용호7협 '등 다양한 작품들 일곱 편을 맹렬히 연출해 낸 것이다. 연이어 1970년에 ' 천사여 옷을 입어라 ' ' 울고간 여인 ' '' 일등사장 ' ' 돌아온 남아 ' ' ' 사랑에 목숨걸고 ' 등 5편을 연출하면서 김기 감독은 전성기를 구가한다. 1971년에는 ' 욕망의 사나이 ' ' 두남자 ' 1972년 ' 토요일 오후 '' 어머님전상서 ' ' 내실 사모님 ' 그리고 1973년 ' 어머니의 영광 '을 연출하고 김기감독은 자신의 인생에서 두 번째 행운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 동백아가씨 '로 감독 데뷔를 한 것이 첫 번째 행운의 시동을 건 전환기라면 1973년 ' 여로 '를 제작과 감독을 겸한 것이 두 번째 행운의 신호탄이었다. ' 여로 '의 흥행은 가히 천문학적 인파를 동원했고 김기 감독은 마침내 황금마차를 탄다. 김기 감독이 감독 데뷔작이 라디오 드라마였고 그의 첫 번째 감독 겸 제작한 작품은 TV연속 드라마였다. TV 연속극으로 인기가 폭발했던 '여로'를 TV가 없어서 보지 못해 목이 탔던 사람들이 '여로'가 영화로 만들어져 극장에서 개봉이 되자 극장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말았다. 연속극에서 천정부지로 주가를 올렸던 인기스타 태현실과 장욱제가 영화에서도 그대로 출연해서 웃기고 울리자 관객들의 반응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연속극으로 '여로'는 일년여 긴 시간을 웃기고 울렸다면 영화 '여로'는 단 두 시간 안에 울리고 웃기고 다해버리자 그 인기가 어땠는지 짐작이 간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전국의 흥행업자들이 ' 여로 '속편을 만들어 달라고 돈을 바리바리 싸들고 올라와 턱바치게 졸라댔다. 물론 김기 감독은 '여로'속편도 제작감독을 겸해서 발표했다. '여로'속편도 전편 못지 않게 대박을 터트렸다. 이때가 김기 감독의 영화인생 황금기의 시작이었다. 김기 감독의 잘다져진 연출력은 재력과 함께 빛을 더하면서 제작 겸업에서 떠나 연출에만 전념해서 수십 편의 명작들을 감독해 낸다. 수많은 작품들 속에서 어렵게 명작들을 골라낸다면 우선 1978년에 언어의 마술사라는 드라마작가 김수현 이 소설로 발표한 '상처'를 김기 감독이 영화로 주옥처럼 빚어낸 것이다. 김자옥 과 이영하 가 주연을 한 ' 상처 '는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어 다시 한번 관객들의 사랑을 받는다. 탈렌트였던 이영하는 '상처'에서 은막의 스타로 첫데뷔를 힌다. 그리고 탈렌트였던 원미경 이 영화배우로 데뷔한 첫작품이 김기 감독이 연출해서 대박을 터트린 ' 청춘의 덫 '(1979년)이었다. '청춘의 덫' 역시 김수현이 TV드라마로 발표하면서 인기 절정을 향해 달리던 중 방송심의위에서 방송중단 선고를 받은 작품이였다. 인기 드라마였으나 중도하차한 드라마라서 중반 이후부터는 이야기가 뭉텅 없었다. 김기 감독과 나는 '청춘의 덫'의 하체 만들기에 돌입했고 거의 몇 달을 목욕탕에 들어 앉아 땀을 빼가며 디스커션을 했다. 영화 ' 청춘의 덫 '에서 가난한 한진희는 회사원인 유지인 의 도움으로 대학을 졸업했으나 한진희 는 출세욕에 불타 유지인을 버리고 회장의 딸 원미경 유혹한다. 배신당한 유지인은 복수심을 이기지 못하고 회장의 큰아들에게 접근해서 한진희를 잘라버리려고 계략을 꾸민다. 여가서부터 드라마에 하체가 없는 거였다. 나는 시나리오에서 하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한진희는 유지인의 계략을 간파하고 우여곡절 끝에 유지인을 선제공격키로 하고 유지인을 살해한뒤 시체를 유기한다. 그리고 돌아오던 한진희는 흥분한 나머지 차의 핸들을 잘못 꺽어 차가 천길 벼랑으로 굴러 사고사를 당한다. 며칠 후 한진희의 무덤에 목례를 하고 떠나는 여자가 있었다. 그는 바로 유지인이였다. '청춘의 덫'도 극장개봉에서 대박을 터트려 제작회사를 돈방석에 올려 놓는다. 실향민인 김기 감독은 남북 문제를 심층 있게 다뤄낸 문제작 ' 남과북 '를 1984년 연출해서 비상한 관심을 끌어 모았고 여세를 몰아 1985년에는 문예작품 ' 화녀촌 '을 만들어 예술작품을 만드는 감독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한다. 그렇게 열정적으로 연출한 극영화가 51편 군홍보영화 걸작들이 30여편 모두 80여편의 영화를 연출하고 마지막 작품으로 이광수 원작 ' 유정 '을 만들고 조용히 충무로에서 비켜난다. 김기 감독 그의 인생 사전에 '실례'란 단어는 찿기 어렵다. 좀처럼 남한테 실례를 하지 않는 영화감독 김기. 그를 처음 사귀기는 좀 어렵다는 사람이 있다.그러나 한번 알게 되면 영원불멸의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다정다감한 충무로의 신사이다.단언할 수 있는 것은 김기 감독을 좋아하지 않는 영화인은 없다. 그만큼 그는 인간관계의 폭이 넓다.그중에도 이미 고인이 된 김응천 감독, 그리고 설태호 감독, 조문진 감독, 문여송 감독과도 교분이 두터웠고 시나리오작가로는 내가 김기 감독의 곁을 가장 많이 지키지 않았나 싶다. 많이 변했고 많이 좋아졌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화려했던 충무로 시절, 주인의 한사람이었던 김기 감독이 이젠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고 비켜섰지만, 언제나처럼 건강한 모습으로 충무로에 자주 보이시기를 소망한다. 문상훈(시나리오 작가) / 2003년 <프로필> 1929년 2월 15일 함흥 출생 흥남화학전문학교 졸업 1964년 < 동백 아가씨 >로 데뷔 <작품 연보> 1964 동백아가씨 1965 여자가 고개를 넘을 때 / 성난 독수리 1966 첫사랑 1967 독거미 / 남매 1968 연상의 여인 / 장마루촌의 이발사 1969 설녀 / 초심 / 목메어 불러봐도 / 가슴에 맺힌 눈물 울지도 못합니다 / 한발은 지옥에 / 용호칠협 1970 천사여 옷을 입어라 / 울고 간 여인 / 일등사장 / 돌아온 남아 사랑에 목숨걸고 1971 욕망의 사나이 / 두 남자 1972 토요일 오후 / 어머니 전상서 / 내실사모님 1973 어머니의 영광 / 여로 / 배뱅이 1974 속 여로 / 가버린 사랑 / 설야 1975 형사 배삼룡 / 반수반인 1976 졸업생 1977 별삼형제 / 병사와 아가씨들 1978 상처 1979 돌의 초상 / 청춘의 덫 1980 여자이기 때문에 / 마지막 밀애 1981 겨울에 내리는 봄비 1982 유혹 / 겨울사냥 1983 약속한 여자 1984 남과 북 / 도시에서 우는 매미 1985 초야에 타는 강 / 화녀촌 1987 유정 외 80 작품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