담배를 물다
- 감독
- 한준희
- 제작년도
- 2005
다이캐스트 모형 자동차 브랜드 중에 ‘쟈니 라이트닝’이라는 미국 회사의 브랜드가 있다. 미국 마텔사의 ‘핫휠’, 일본 토미사의 ‘토미카’ 등이 경쟁상대로서 대표적인 모형 자동차 장난감 브랜드인데 쟈니 라이트닝은 토퍼 토이사에서 소유하고 있다가 여러 번 문을 닫고 다른 회사로 팔려가는 과정을 거치면서도 오뚝이처럼 되살아나 모형 자동차를 생산해내고 있다. 국내 대형 마트 장난감 코너에서도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는 흔한 제품이지만 수집가용으로 출시되는 한정판은 정식 수입이 안 되고 구하기도 어렵다. 쟈니 라이트닝에서 최근 ‘2017 미국 머슬카’ 시리즈를 출시했는데 그중에서 세 편의 영화에 등장했던 머슬카가 포함되어 있어 호기심에 주문했다. 영화 <배니싱 포인트>(1971)에 등장하는 1970년형 흰색 ‘닷지 챌린저 R/T’, <매리와 래리>(1974)의 1969년형 ‘닷지 차저 R/T’, 그리고 <잭 리처>(2012)의 1970년형 ‘쉐보레 셰빌 SS’ 모델이 그것이었다. 위 세 편의 영화는 탈주의 쾌감을 확실하게 선사하는 영화로 닷지사의 머슬카를 몰고 나오는 것 외에도 음악과 카체이스 스타일 등이 닮아 있다. 도심 한복판에서 벌어진 저격 사건 현장에서 체포된 범인이 결백을 주장하며 지목한 단 한 사람 ‘잭 리처’가 사건 해결을 위해 홀로 나서게 되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잭 리처> 역시 로드 무비 성격의 영화는 아니지만 차종에 있어서는 차저와 챌린저를 비롯해 다분히 미국 머슬카의 특징을 노린 선택이다. 자동차 모델명 뒤에 붙는 ‘R/T’는 1960년대 이후 닷지 차량에 사용된 성능 표시로서 ‘로드/트랙’의 약자를 뜻한다. R/T가 모델명에 붙은 차량은 서스펜션, 타이어, 브레이크, 엔진 등의 성능이 일반 모델보다 강력하다는 뜻이다. 제작진이 얼마나 큰 의미 부여를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망자 신분의 주인공들이 머슬카를 몰고 질주하는 로드 무비 <배니싱 포인트>와 <매리와 래리>와 같은 영화에 등장하는 차종으로는 잘 어울리는 성능이지 않을까 짐작해본다. 물론 옳은 일을 하고는 있지만 도망자 신분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주인공 잭 리처(톰 크루즈)가 모는 1970년형 쉐보레 셰빌 SS 모델의 ‘SS’ 역시 ‘슈퍼 스포츠 버전’의 약자로 사실상 R/T와 같은 뜻이나 다름없으니, 탈주 즉, ‘도망’이라는 로망을 추구하는 자동차 모델로는 합격점을 받고도 남을 차들이 아닐까? <배니싱 포인트>(1971) 닷지 챌린저 R/T 장난감 전문 회사들이 어른의 수집 취향을 정확히 꿰뚫고 이들 영화 속 차량을 취급한 것에서도 느낄 수 있듯, <배니싱 포인트>와 <매리와 래리>는 영화적으로도 ‘도망자의 차’에 입문하기 딱 좋은 영화다. 그중에서도 <배니싱 포인트>의 추격 장면은 카체이스 영화 역사를 통틀어 종종 베스트로 손꼽히는 시적인 여운을 선사한다. 이 칼럼을 쓰면서 너무 많은 영화들에 ‘역사상 베스트’ 운운하는 게 조금 부끄럽기도 한데 이 영화는 카체이스 촬영 기술이 뛰어나서라기보다는 정서적 여운을 건드리기에 더욱 회자되는 것 같다. 아무튼 연출을 맡은 리차드 C. 사라피안 감독에 따르면 이 영화에 1970년형 흰색 ‘닷지 챌린저 R/T’를 등장시키려 한 것은 제작자인 대릴 F. 자눅의 뜻이었다고 한다. 제조사인 크라이슬러사에서 저렴한 값에 차를 렌트하는 대신 영화 곳곳에 크라이슬러사의 차를 등장시키는 일종의 협찬 광고를 따온 셈이다. 이 영화의 카체이스 스턴트 대역 운전을 맡았던 유명 스턴트맨 캐리 로프틴이 직접 닷지 챌린저의 토션 바를 쓰는 서스펜션 퀄리티가 촬영 및 쾌속 질주에 잘 어울린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타이어가 터져 버릴 정도로 달리고 또 달리는 단순하면서도 과격한 탈주 장면은 언제든 다시 봐도 통쾌하고 묵직한 쾌감이 느껴지는데, 이는 베트남전 참전 용사이자 카레이서 이력도 있는 주인공 코왈스키(배리 뉴먼)의 삶의 태도 혹은 성격을 설명하기도 한다. 그가 덴버에서 캘리포니아까지 밤낮없이 도로를 질주하는 동안, 그를 둘러싸고 억압하는 모든 사회적 굴레가 내던져지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된다. 그래서인지 <배니싱 포인트>는 상당히 실존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로도 해석된다. 요새는 여러 가지 프로덕션 상의 이유로 이 영화처럼 질주하는 장면을 편집도 없이 길게 찍지는 않는다. 게다가 멀티플렉스 극장에서 허허벌판을 가로지르는, 길고 긴 도로의 끝과 끝을 달리는 자동차의 모습만 보여줬다가는 평점테러 당하기 딱 좋을 것 같다. <리피피>(1955) ‘도망자의 차’라는 이상한 카테고리에 영화를 골라 넣고 있자니, 줄스 다신 감독의 <리피피>(1955)를 처음 만났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 같다. 생애 마지막이자 최고의 작전이었던 퇴물 도둑 토니(장 세르베)의 보석털이가 실패로 돌아갈 운명에 처한다는 이야기인데, 누군가는 왜 이 영화를 누아르 영화가 아닌 ‘도망자의 차’ 카테고리에 들이미느냐고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숨소리조차 사치스러울 정도로 긴박했던 그리고 또 작전 자체로 기발한 면모도 보였던 금고털이 장면도 사실 자동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하지만 자동차는 의외의 순간에 결정적으로 등장한다. 범죄자로서의 프로 의식과 책임감, 내지는 비열하고 냉철한 감정이 뒤섞인 채로 주인공 토니가 결국 마지막 종착점에 다다랐을 때, 아주 처절하고 멋진 필사의 질주 장면이 등장한다. 이때 토니가 올라탄 차종이 ‘포드 비뎃’이다. 유럽 최초의 8기통 자동차라고 알려져 있는데, 영화의 정서적 핵심에 해당하는 이 장면과 자동차의 성능이 잘 맞아 떨어졌을 거라는 추측을 해본다. 카체이스 장면을 감각적으로 찍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슴 뭉클한(?) 도망자의 질주를 볼 수 있다는 것도 자동차 영화로서는 상당히 중요한 미덕이다. 그리고 그것이 정말 의외의 순간에 등장할 때 감동은 배가된다. <이탈리안 잡>(1969) 오스틴 미니 쿠퍼 S <리피피>가 프랑스 도둑들의 어떤 정신세계를 잘 보여줬다면 마이클 케인이 주연을 맡았던 피터 콜린슨 감독의 <이탈리안 잡>(1969)은 이탈리아 땅을 휘젓고 다니는 영국 도둑들의 영화다. 마크 월버그가 주연을 맡아 리메이크되기도 했는데 같은 브랜드의 자동차가 등장한다는 것 외에 마이클 케인의 오리지널 영화와는 여러모로 비교 불가다. 이탈리아는 람보르기니와 페라리를 만든 나라지만, 주요 도시의 길이 좁고 아스팔트 대신 자갈을 깔아 놓은 길도 많아 운전하기 썩 좋지 않은 나라라는 인식이 있다. 대신 조그만 크기의 자동차는 좁은 골목 사이 사이를 지나다니기에도 유용하고 또 영화적으로도 ‘탈주’ 실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래서일까, <이탈리안 잡>은 이러한 지역 특색을 매력으로 승화시켰다. 오죽했으면 무시무시한 스턴트 배우들의 운전 솜씨가 배우들의 연기를 압도하기까지 했을까. 런던 출신의 유명한 도둑 찰리(마이클 케인)가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400만 달러의 현금을 탈취할 작전을 세우는데 이때 쓰이는 범죄 도구가 바로 1967년형 ‘오스틴 미니 쿠퍼 S’다. 지금은 ‘미니’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이 차는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BMC)에서 1959년에 처음 만들어졌고 현재는 인수 과정을 거쳐 BMW 산하에서 만들어지고 있다. 1960년대 당시 영국의 국민차로 각광받았는데 몬테 카를로 랠리에서 3차례나 우승도 했던 차다. 영국 도둑들이 영국 국민차인 미니 쿠퍼를 이끌고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크게 한탕 벌이는 영화의 줄거리 속에는 영국과 이탈리아의 재미있는 ‘자동차 부심’ 대결도 숨어있다. 극 중 찰리 일행은 거사 직전에 마피아들에게 붙잡혀 이탈리아를 빈손으로 떠나라고 협박을 당한다. 영국과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깡패 집단들끼리 기 싸움을 벌이는 상황인데, 영국의 미니 쿠퍼가 탄생하게 된 이유도 이탈리아의 피아트 때문이었다. 1956년 수에즈 위기로 심각한 연료난에 처했을 때 유럽 전역에서 소형차들이 각광받던 때가 있었다. 그때 이탈리아의 ‘피아트 500’이 엄청난 인기를 끌었는데 브리티시 모터 코퍼레이션의 회장은 이 차를 극도로 혐오했다고 한다. 그래서 제대로 된 미니카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고는 대안으로 미니 쿠퍼를 세상에 내놓았다. 그렇다고 제작진과 이탈리아 자동차 산업계와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이 영화의 제작자인 매튜 필드와 마이클 딜리는 영화의 첫 장면에서부터 의도적으로 이탈리아 대배우 로자노 브라지라와 람보르기니를 함께 등장시키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누가 봐도 이탈리아의 상징 같은 배우와 자동차가 아닌가. 또 영화에서 산산조각이 나는 스포츠카 디노 페라리에 얽힌 사연도 있는데 당시 피아트의 회장이었던 지아니 아넬리가 촬영을 위해 선뜻 빌려줬다고 한다. 왜냐하면 피아트는 영화의 배경이기도 한 토리노 경제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기업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안 잡>의 제작을 반겼다고 한다. 당시 유럽 영화계에서 최고의 자동차 스턴트팀을 이끌었던 곡예 운전사 레미 줄리엔은 이 영화에서 스턴트 총괄을 맡은 이후 피아트에 스카우트되어 공식 드라이버가 되기도 했다. 이런 알아둬도 쓸데없는 사연을 모두 차치하고서라도 <이탈리안 잡>은 자그마한 소형 자동차들을 가지고 당시로써도 획기적이고 지금 봐도 스펙터클한 카체이스 장면을 탄생시켰다. 아마 21세기에는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도심 추격 장면은 절대로 구현할 수 없을지 모른다. 대리석으로 이뤄진 저택이나 도심 한복판에 세워진 백화점 실내, 혹은 건물 옥상을 타고 자동차들이 질주하는 장면을 과연 누가 찍을 수 있을까. 이전 칼럼에서 소개한 <블리트>나 <프렌치 커넥션> 같은 영화의 도심 카체이스 장면도 21세기에는 구현이 어려울 것이다. 그보다 대단한 장면을 찍을 기술적 준비는 충분히 되어 있겠지만. 가장 최근에 무식한(?) 도심 카체이스 장면을 선사해준 영화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도로 주변을 다 때려 부수면서 질주하던 <킬러의 보디가드>(2017)였다. 촬영 현장 메이킹 영상이 참으로 궁금하다. 반면에 도심 추격 장면을 블록 구간별로 쪼개 찍어 편집으로 이어 붙일 수밖에 없었던 <베이비 드라이버>(2017) 같은 영화는 스타일을 강조하는 쪽으로 방향을 선회한다. <드라이버>(1978) 다시 과거로 돌아가, 나만의 ‘도망자의 차’ 카테고리에 포함된, 그리고 카 체이스 영화의 묘미를 잘 드러낸 연출은 월터 힐 감독의 <드라이버>(1978)였다. 사실 이 영화는 자동차보다 드라이버라는 캐릭터 자체에 더욱 무게가 실린 영화이긴 하다. 어쩌면 소위 ‘도망자의 차’ 영화 중 가장 자동차가 중요하지 않은 영화이기도 하다. 배우 라이언 오닐이 연기하는 이름도 없는 캐릭터 ‘드라이버’는 범죄자들을 딜리버리 해주는 역할을 하는데 어떤 면에서 그에게 중요한 것은 운전 실력이지 자동차가 아닌 듯 보인다. 어떤 자동차도 운전할 줄 알아야 진정한 장인이라고 눈빛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영화는 수많은 ‘드라이버’ 영화들, 예를 들면 최근의 <드라이브>(2011)나 <베이비 드라이버> 등의 영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월터 힐 감독의 다른 영화들을 찾아봐도 그는 항상 자동차를 하나의 캐릭터 이상으로 잘 다룬다. 3편의 연재 칼럼 내내 영화 속의 특정 자동차 브랜드나 성능에 주목해서 역으로 영화의 매력을 들여다보곤 했는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은 하나도 중요한 게 아닐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말 중요한 것은 자동차를 어떻게 캐릭터처럼 생명력 넘치게 그려낼 것인가, 이지 않을까. 물론 ‘도망자의 차’ 영화들이 전해주는 ‘재미’의 핵심은 탈주의 기술에 있고, 또 그 기술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자동차다. 그런데 카메라에 담긴 자동차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뭘까. 무엇이 자동차를 주인공처럼 보이게 할까. <뺑반>(2018) 시나리오 표지 최근에 2018년 한국영화 기대작 취재를 하면서 <뺑반>의 한준희 감독을 만났는데 그 역시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뺑소니 사고 조사를 전담하는 경찰 수사팀이 주인공인 <뺑반>은 어쩌면 한국영화 중 가장 본격적으로 카체이스 액션을 선보이는 영화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렇게 표현하면 카체이스 액션에 있어 거의 선구자격의 노력을 기울였던 <썸>의 장윤현 감독이 기분 나빠할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돌려 말하면 어떨까. <뺑반>은 2018년 현재 카체이스 액션에 있어 가장 기대해도 좋을 국내 최고의 스태프들이 모였다. 김태경 촬영감독과 허명행 무술감독, 장근영 미술감독, 그리고 특수효과에 데몰리션 팀이 참여한다. 경찰 영화와 자동차 영화로서의 카체이스 액션이 결합할 <뺑반>의 개봉을 기대하면서 영화와 자동차 칼럼 연재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