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줌 빈자리
- 감독
- 김도은
- 제작년도
- 2020
지금 말하려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을 지극히 사적인 영화들의 목록이다. 만들고 싶은 영화, 꿈꾸는 영화들, 마음으로 두고 싶은 영화들이 있기 마련이다. 이 열 편의 작품은 굳이 말하자면 각별히 올해 내 마음에 다가왔던 영화들이다. 그러니 작품을 평가하거나 가치를 나열할 생각 대신에 마음이 동했던 몇 가지 이유들을 적으려 한다. 먼저, 최근에 세상을 떠난 두 작가의 영화들이 떠오른다. 마누엘 드 올리베이라의 < 방문 혹은 기억과 고백 >(1993), 그리고 샹탈 아커만의 < 노 홈 무비 >(2015). 이 두 편의 영화는 서울아트시네마에서 기획한 추모전의 일환으로 상영했다(사실 이들을 추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삶과 죽음을 간결하면서도 대담하게 다룬 작품들인데, 두 편 모두 집에 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올리베이라는 영화가 예술이 아니며, 인생도 아니고, 그 둘 사이에 위치하는 것이라 말했었다. 나는 그 말에 공감한다. 영화는 늘 그 사이에 있고, 우리 또한 영화들 사이에 있다. 집을 보여준다는 것은 관객을 개인적이고 비밀스런 공간에 초대한다는 것인데, 그렇다고 우리가 그들에게 초대받을 만한 친밀한 이들인지는 잘 모르겠다. 결국 우리들의 방문이 작별을 통고받는 자리임을 알게 될 것이다. 장례식에 초대받았다는 말은 아니다. 실은 우리가 함께할 시간을 그들이 오랫동안 기다렸던 것이라 생각한다. 후카다 코지의 < 사요나라 >(2015)와 필립 그랑드리외의 < 밤임에도 불구하고 >(2016)는 바라보는 것의 불안을 오래간만에 느낀 작품들이다. 후카다 코지의 영화에 대해서만 짧게 언급하자면, 이 영화는 한국에서는 유일하게 대전아트시네마에서 개최한 영화제에서 두 차례 상영했다. 히라타 오리자의 안드로이드 연극을 원작으로, 이른바 ‘포스트 3.11 영화’의 계열에 자리 잡을만한 작품이다. 미래의 어느 때, 원전사고가 일어난 일본에서 해외 이주정책이 발표되고, 폴란드 난민 출신의 여인은 이제는 더 이상 떠날 곳을 찾지 못해 예정된 죽음을 기다린다. 하루하루의 소멸될 시간에서 유일한 말벗은 시를 읽어주는 안드로이드 로봇이다. 영화의 마지막 순간. 창가의 소파에 누워 마지막 시간을 보내던 여인은 마침내 숨이 꺼지고, 시간이 흘러 그녀의 피부는 썩어들어 가고 한 줌의 뼈로 남게 된다. 그 모든 시간을 그녀 앞에서 꼼짝 않고 바라보던 이는 그녀의 로봇이다. 우리가 사라진 이후에도 남게 될 세계에서 우리의 죽음을 지켜볼 시선이 여전히 있다는 것은 파멸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매혹적인가. 이어지는 세 편의 영화는 특별히 나이의 감각을 예민하게 느끼게 했던 영화들이다. 누구나 나이가 들어갈수록 고민하고 자숙한다. 자기 자신으로 남는 피로감과 새로운 자신을 만들어내야 할 욕구 사이에서 주저하고 용기를 내기도 한다. 주아옹 니콜라우의 < 존 프롬 >(2015)은 십 대들의 욕구와 환각 모험을 그리는데, 여전히 이런 경쾌한 움직임이 영화에서 가능하다는 단순한 사실을 확인하는 것으로 몹시 반가웠던 영화다. 이제 서른인 대만의 여성감독 위에이산의 < 어린 부모 >(2015)는 내가 꼽는 올해의 데뷔작 중의 한 편이다. 이 영화의 라스트는 당분간 잊지 못할 것 같다. 안이한 결말로 쉽게 끝나지 않으면서, 얇지만 날카로운 칼날에 베인 서늘한 느낌이 오래 남았던 영화다. 비극에도 불구하고 사람에게는 한 번 더 기회가 여전히 주어진다는, 그럴 기회가 있음을 믿게 하는 영화다. 사실 이 두 편의 영화는 이 작품을 본 소수의 관객들과만 대화를 나누고 싶은 ‘나만의 리스트’로 남게 될 것이다. 미아 한센 러브의 < 다가오는 것들 >(2016)은 유일한 개봉작이다. 서른다섯의 나이에 만든 성숙한 영화라는 점에서 공감했다. 생 말로의 고요한 섬, ‘파도와 바람 소리만을 듣고자 했다’는 샤토브리앙의 무덤에서 시작하는 오프닝이 영화가 끝난 뒤 다시 생각난다. 영화는 어머니의 죽음을 거쳐, 노년에 접어든 주인공 여인의 고립과 분리를 마치 섬의 고립처럼, 조수간만의 물결처럼 밀려오고 떠나가게 한다. 한때 급진적인 생각을 지녔던 주인공 여인은 학생들의 파업에 반발하고, 변모하는 철학 서적 마케팅 시장의 논리에 적응하지 못하고, 심지어 급진적인 사상의 제자에게서 사고와 행동이 일치하지 않는다는 비난까지 듣는다. 나도 이제 너무 나이가 들었다는 자각! 그녀는 “난 변했다”고 말한다. 제자는 그녀에게 “그런데 세상은 그대로인 걸요. 더 나쁘기만 해요”라 반문한다. 변한 게 없는 변화의 삶이라니. 삶의 변화란 어떤 마음의 결심을 하는 것만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 대신 다른 곳에 가고, 다른 것들을 보고, 다른 것을 듣고, 다른 책을 읽고, 다른 이들과 대화하는 것으로나 가능할 것이다. 구로사와 기요시와 켄 로치의 두 작품은 영화라는 노동을 떠올리게 한다. < 은판 위의 여인 >(2016)에서 한 컷을 촬영하는데 몇 시간 내지 하루가 걸리는, 노출 시간이 긴 촬영을 고집하는 은판사진작가의 강박적인 작업은 이미지에 대한 어떤 기대가 없다면 그저 시대에 뒤떨어진, 위험하고 지루한 노동일 것이다. 영화작업이란 여전히 무언가를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없이는 성립할 수 없는 노동이다. 켄 로치의 영화는 이제는 작가적 접근보다는 어떤 하나의 사상이 작동하는 영화로 받아들이게 된다. 그 외에 다른 불만을 내세우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이미 사상이 되어버린 예술가의 견해라고 할까. 다니엘 블레이크, 그는 시민의 권리를 주장하고 있다. 동정이나 연민이 아니라, 본디 그에게 속한 존엄을 되돌려 받기 위해 주장한다. 행복에의 기대, 그 이미지를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켄 로치에게 영화라는 노동은 시민에게 존엄을, 시민권을 되돌려주는 예술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마도 나 홀로 이야기하게 될 한 작품이 남았다. 케이타 무카이의 < 초콜릿 케이크와 호류지 >(2016)가 그런 작품이다. 이 영화를 함께 본 이들은 내가 아는 한 서너 명에 불과하다. 국내에서는 유일하게 제주영화제에서 두 차례 상영한 바 있으니, 제주 시민들 백여 명 정도가 더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영화를 ‘나라 국제영화제’에서 처음 만났다. 작은 미술관 강당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앉아 보느라 서다 앉기를 반복하는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해야만 했다. 나라에는 사슴은 많지만 국제영화제가 개최될만한 영화관은 없다고 한다. 나라시의 지원도 끊겨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내어 개막식 레드 카펫 행사에 나섰다. 영화제의 중심에는 알다시피 가와세 나오미가 있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내게 영화제 방문은 그녀에 대한 어떤 선입견들을 깨는데 충분한 기회였다. 그녀의 수고와 노력을 가까이서 지켜볼 기회였다. 아무튼, 이 작품은 실은 큰 기대 없이 보았던 영화다. 그때 그 시간에 볼 수 있는 유일한 영화였을 뿐이다. 영화 경험이 전무한 스물네 살의 청년이 만든 자전적인 다큐멘터리이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버림받아 아동 양호시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카탈로그에 실린 짧은 소개 글을 읽으며 이 영화를 끝까지 보게 될까, 염려 반 기대 반의 심정으로 몸을 뒤척거리며 영화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는데, 첫 내레이션부터 영화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석양에?물든 호류지(나라현의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의 절이라고 한다)가 보이면서 배경에는 희미한 종소리가 울린다. “호류지의 종은 두 시간마다 울린다.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금속의 울림은 온 마을을 부드럽게 감싸면서 울려 퍼지다가 사라져 간다. 내 어린 시절, 하루의 끝에서 울리던 그 소리는, 나를 불안하게 했다...” 호류지의 종소리는 부모에게 버림받아 아동 양호시설에 맡겨진 아이들에게 빨리 집으로 돌아가도록 재촉하는 불안한 소리였다. 양호시설의 통금시간은 여섯 시. 밤 아홉시에는 소등이 된다. 화면에는 마치 수용소를 보여주는 것 같은 몇 장의 사진들이 슬라이드 화면처럼 지나가고, 날마다 똑같은 고아원에서의 반복적인 일과들이 설명된다. 그나마 특별한 날이라면 달이 바뀔 때마다의 생일잔치였다고 한다. 파티 장식도 없고, 음악도 없었고, 늘 똑같은 축축한 버터크림의 초콜릿 케이크가 전부였던 생일잔치이다. 그런데 이 달콤한 초콜릿은 프루스트의 마들렌과도 같아 그에게 어두운 과거를 단박에 떠올리게 한다. 감독 케이타 무카이는 이 작품으로 양호시설에서 함께 했던 친구들을 찾아가 그들의 과거와 현재의 삶을 다큐멘터리로 담아냈다. 18세가 되면 아이들은 양호시설을 떠나 자립해 살아가야만 한다. 그는 이제 성인이 된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세상을 떠난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가고, 양호시설에 자신을 맡긴 아버지와 힘겨운 대화를 시작한다. 같은 처지의 아이들에 관심을 두어 양호시설 자원봉사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촬영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의 영화작업은 아이들의 성장 과정에서의 열등감, 부모에 대한 분노, 가난과 학대받은 과거의 상처를 스스로 말하게 하고, 상처를 어루만지고, 함께 했던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며 다시 예전의 친구들과 교류하는 계기를 만들어낸다. 그들은 앞으로도 함께 살아갈 것이다. 이들에게 기억은 그러므로 일종의 이중구속으로, 어떤 끔찍한 일을 당했더라도 그들은 양호시설에서의 삶을 비판하되 부정하지 않는다. 비록 수용시설의 경험이라 하더라도, 그 기억과 시간은 이제 간신히 긍정할 수 있게 된 자신의 삶이기 때문이다. 감독은 이를 한편으로는 달콤하고 씁쓸한 기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정든 고향에 대한 애착으로 표현한다. 초콜릿 케이크와 호류지의 종소리는 이 둘의 특별한 결합이다. 기술적 완성도와는 상관없이 나는 케이타 무카이의 촬영이 가장 탁월한 표현을 담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머니의 고향을 찾아가는 중반 이후의 장면부터는 내내 서서 보아야 할 정도로 몹시 감동을 받기도 했다. 나라국제영화제에서의 첫 상영 후 잠깐 감독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한국에서도 작품이 상영되기를 기원한다고 말을 건넸다. 그 자리에는 다큐멘터리에 나온 그의 친구들도 함께했다. 때마침 올해 제주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상영할 수 있었고, 상영 후 그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했다. 그는 해외에서의 첫 상영에 몹시 당황하는 눈치였다. 이렇게 공개될 만한 작품이 아니라며 부끄러워했고, 더 수준 높은 작품을 만들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나는 이 영화가 국내에서도 더 상영되기를 기대한다. 내가 그를 한 명의 작가로서 기대하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삶이 영화라는 것을 통해 더 나아가기를 바라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어떻든 나는 그의 다음을 기대하고 있다.
내가 시나리오 작가로서 극장 스크린에 처음 크레디트를 올린 영화는 SF 옴니버스 < 인류멸망보고서 >(2010) 다. 각본은 아니고, 세 번째 세그먼트 <해피 버스데이>의 원안을 썼다. 영화는 제작 소식이 처음 알려졌을 때만 해도 매우 야심적인 프로젝트였지만 에피소드 두 편을 완성한 상태에서 나머지 에피소드를 만들 예산과 기획이 실종되어 수년간 답보 상태였다가 어떻게든 작품을 마무리하려 안간힘을 쓰던 중이었다. 회사에서 제시한 기본 콘셉트는 ‘지구와 소행성이 충돌해 인류가 멸망하기 직전의 하루’였고 ‘저예산으로 가능하게’, 라는 조건이 달렸다. 나는 한 소녀가 인터넷에 뭔가를 주문했다가 은하계 저편에서 배달되는 바람에 온 가족이 반지하 방을 방공호 삼아 숨는다는 이야기에, 우주에서 날아오는 소행성이 알고 보니 초거대한 8번 당구공이라거나, TV 홈쇼핑에서 개인용 방공관(棺)을 판다거나, 죽게 된 마당에 뉴스 앵커가 생방송 중에 불륜을 고백하는 등등의 아이디어를 더했다. 신출내기 작가였던 나는(물론 지금도!) 무려 SF 옴니버스 영화에 참여해 마지막 에피소드의 스토리를 맡은 일이 마냥 신기하고 자랑스러웠다. 작업하는 내내 속으로 한 작품을 떠올렸기 때문이리라. 한낱 평범한 개인의 쓸데없는 추억들을 조금 더 되돌아보는 것을 용서하시길. 전형적인 90년대 틴에이저로서 일본 서브컬처 개방 1세대의 퍼스트 임팩트가 일어나기 직전 무렵의 어느 날, 나는 시내의 외국어 학원에서 열린 해외 애니메이션 상영회를 찾아갔다. 어학 연구를 명분으로 옆 나라 영상문화의 숨은 애호가들이 모인 자리, 주최자로 추측되는 장발의 안경 낀 미남자가 나타나 본인이 소장한 LD(레이저디스크)에다 직접 한글 자막을 올린 영상을 프로젝터로 쏘기 시작했다. 이미 PC 통신을 통해 온갖 외국 영화와 일본 애니메이션의 불법 복제 비디오를 구해보고 있었기에 상영 자체는 그다지 대단한 일이 아니었지만, 그렇게 구한 VHS 비디오들이 복사를 몇 번이나 한 까닭에 거의 포르노 화질에다가 자막 같은 건 좀체 없었던 반면, LD에서 바로 떠낸 화질은 매우 훌륭했고, 한글 자막은 모든 것에 우선하는 아름다움이었다. 그렇게 본 것이 오시이 마모루의 < 공각기동대 >(1995)와 < 기동경찰 패트레이버 극장판 2 >(1993), 그리고 린 타로가 연출한 CLAMP의 < X >(1996) 였다. 특히 < X >의 상영을 다른 이유로 잊을 수 없는데, 이상하게 나 말고는 거의 누나들뿐이었던 강의실이 작품 결말부에서 비명과 눈물바다가 되더니 엔드 크레딧에선 X-JAPAN의 노래를 모두가 합창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아무튼 상영이 끝나자 다시 나타난 주최 측 남자는 상영작 외에도 찾는 작품이 있다면 자신의 LD 라이브러리에서 비디오로 떠주겠다며 소정의 작업비만 선불로 요구하는 리스트를 돌렸고, 나는 그가 애초에 이 영업이 주목적이었던 장사치가 아닐까 돈을 떼먹지 않을까 의심하면서도 좋은 화질로 다시 보고픈 < 아키라 >(1988)와 < 미궁물어(미궁 이야기) >(1987)와 카와지리 요시아키의 < 수병위인풍첩(무사 쥬베이) >(1993) 등을 체크하고 리스트에 없는 제목 하나를 대며 혹시 구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러자 남자는 나를 보며 ‘이 녀석 봐라?’ 하는 미소를 짓더니 그건 시간이 좀 걸린다고 답했다. 그는 다행히 먹튀는 아니었고, 얼마 후 나는 마침내 손에 넣은 작품의 VHS 테이프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VCR에 넣었다. 그리하여 그날 밤 나는 우주를 보았고, 새벽에 홀로 TV 앞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방금 본 엄청난 무엇에 대한 여운을 붙들고 한동안 멍하니 있었다. 바로 <아키라>의 오토모 가츠히로가 원작, 기획하고 총감독한 SF 옴니버스 < 메모리즈 >(1995) 다. 에피소드1: 그녀의 추억Magnetic Rose 모리모토 코지 연출의 첫 번째 에피소드 ‘그녀의 추억Magnetic Rose’은 세 에피소드 중에서 가장 개인적인 작품처럼 여겨진다. 요절한 천재 애니메이터 콘 사토시의 흔적이 각본과 그림에서 강하게 느껴지는 이 애니메이션 판 <솔라리스>는 푸치니의 <나비부인> 중 ‘어떤 개인 날’이 우주 한복판에서 울려 퍼지는 문자 그대로의 ‘스페이스 오페라’다. 불멸의 명성과 사랑을 원했던 어느 프리마돈나의 욕망이 우주 한가운데 버려진 거대한 장미꽃 모양의 우주선에 담겨 있다. 우주 고철, 그러니까 쓰레기를 수거하던 일꾼들이 SOS 신호를 보내오는 이 우주 고성(古城)을 발견한다. 반복 재현되는 그녀의 추억 속으로 진입한 두 남자는 각자 자신의 기억 혹은 욕망과 마주한다. 한 명은 남아 기꺼이 그녀의 추억에 일부가 되고, 다른 한 명은 자신의 비극을 인정함으로써 도망친다. 우주 공간에 홀로 떠 있는 남자가 헬멧 속에 담긴 장미꽃잎을 후우, 하고 불어보는 마지막 장면의 이미지는 아름답고 쓸쓸하다. 에피소드2: 체취병기Stink Bomb 오카무라 텐사이 연출의 두 번째 에피소드 ‘체취병기Stink Bomb’는 배경을 현재 대한민국으로 바꾼 장편 실사 영화로 만들면 어떨까 싶은 욕망이 돋는 작품이다. 공권력과 사기업의 음흉한 거래로 이루어진 비밀 실험, 재난 상황에서 국가 시스템의 무능력, 이 모든 상황의 한가운데 방치된 소시민 등 아포칼립스 재난물의 대표적 요소들로 능수능란한 전개를 한다. 평화로운 지방 도시 외곽에 위치한 제약회사 연구소, 한 직원이 감기약을 잘못 집어먹은 탓으로 한순간에 화학전(戰)용 생물병기가 된다. 그가 지나는 곳마다 사람들이 코를 붙잡고 쓰러지는 대신, 계절에 상관없이 모든 식물의 꽃이 만개한다. 그가 재난의 원인임을 인지하지 못한 본사 수뇌부는 은폐할 서류를 반드시 챙겨오라고 지시하고, 명령에 충실한 남자는 자위대의 필사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수도 도쿄로 향한다. 파국 직전에 미국이 끼어들자 울분을 터뜨리면서도 곧 의존하는 군 장성들의 모습은 이 블랙코미디의 정점이다. 에피소드3: 대포의 거리Cannon Fodder 오토모 가츠히로 연출의 마지막 에피소드 ‘대포의 거리Cannon Fodder’는 대체 누구와 전쟁 중인지, 실제로 전쟁 중이긴 한지 전혀 알 수 없지만 오로지 적국으로 포를 쏘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전체주의 국가(어라? 가까운 곳에 비슷한 나라가 있는 거 같다)에서 한 가족의 하루를 컷 없이 연속적인 하나의 롱 테이크로 ‘펼쳐서’ 보여준다. 인간의 가치가 전복되어 수단이 곧 목적이 된 세계를 보여주기 위해, 작가의 야심은 형식의 실험을 시도한다. 영화적 양식의 애니메이션이라기보다, 프레임으로 들여다보는 연결된 거대한 그림. 애니메이션에서 다시 만화로, 만화에서 다시 회화로의 복귀. 이러한 펼침의 미학은 일본식 만화 스토리텔링의 근원으로 추정되곤 하는 두루마기 회화 ‘에마키’에 대한 오토모의 관심을 구현한 일련의 시도이다.(이후 < 쇼트피스 >(2013)의 에피소드 ‘화요진’으로 이어진다) 우리가 들여다본 그림의 끝, 대포의 거리에 사는 소년은 압제자의 초상화 앞에서 경례를 하고 잠자리에 든다. 축 쳐진 어깨의 아버지 같은 탄약수 대신, 어깨에 견장을 단 포수가 되는 꿈을 꾼다. < 메모리즈 >는 이제 애니메이션의 고전을 넘어 SF의 고전이 되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고전(Classic)의 생명력이 그러하듯이, <메모리즈>의 세 이야기는 언제 다시 봐도 낡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는다. 추억보정 때문인지, 그 시절 불법 복제 비디오로 보았던 LD 추출 화질이 지금의 정품 블루레이 화질보다 좋았던 것으로 느껴질 뿐. 세월이 더해갈수록 작품의 테마는 개인과 현실 세계와 맞닿으며 더욱 견고한 상징을 담은 이야기가 된다. 그 주제란 내 생각에 이렇다. 개인과 세계의 충돌. 개인을 삼키는 세계. 세계를 삼키는 개인. ‘세계’를 ‘테크놀로지’나 ‘기술 문명’으로 바꿔 써도 될 것이다. 그래서 남는 건 결국, 인간의 한 줌 기억 혹은 추억(들)뿐. 내게 <메모리즈>는 추억이면서도 언제나 새로운 영감을 주는 레퍼런스다.
< 자기만의 방 >(2013)을 통해 자신의 방에 있는 기억의 흔적들을 더듬고 방 벽에 프로젝션을 하여 세상과 만나던 고재홍 감독이 <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 >을 통해 방 밖으로 나왔다. 고정된 채 자신의 방 안을 탐구하던 그의 카메라는 이제 서울의 도심 속을 걸어 다니는 그의 손에 들린 채 세상과 만난다. 취업준비를 하며 오가는 길에 찍은 학원과 지하철의 풍경들, 퀴어페스티벌을 반대하며 울부짖는 사람들 그리고 경찰의 손에 들린 채증용 카메라. 그 속에 담긴 풍경들은 혼란스럽고 허무하기만 하다. 대학 시절 문학 교수님께 보내는 서간체 형식의 에세이 내레이션에서 감독은 “1920년대에 헤밍웨이는 전쟁으로 인해 무너진 사회와 인간에 의해 허무를 느꼈다면, 전쟁조차 일어나지 않는 평온한 시대에 저는 왜 이렇게 허무한 감정이 드는 걸까요.”라며, 세상과 대면하며 느끼는 자신의 갑갑한 심정을 이야기한다. 1920년대 헤밍웨이의 세대가 느낀 허무와 2010년대 우리 세대가 느끼는 허무는 다른 허무이다. 전쟁으로 모든 것이 파괴되고 폐허가 된 풍경을 바라보아야 했던 그 시대의 허무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믿음과 기대가 깨어진 후에 오는 환멸의 감정에 가까웠을 것이다. 그러나 전후의 세계, 21세기 한국 땅에 발을 딛고 살아가는 세대가 느끼는 허무는 그처럼 뚜렷한 계기가 없는 불명의 허무이다. 믿음과 기대가 깨어진 지 오래인, 이미 폐허가 된 세계에서 나고 자란 이들의 허무. 이러한 감독의 마음은 그의 카메라를 통해서뿐 아니라 그가 꾼 꿈을 통해서도 표현된다. 취업에 실패한 취준생의 자살로 비칠까 걱정이었다는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꿈, 망각에 저항하고자 하는 세월호의 싸움을 연상시키는 자신이 완전히 소멸되는 꿈과 소멸에 대한 두려움, 아픈 어머니를 뒤로한 채 불꽃축제를 찍으러 나갔지만 불꽃이 터지지 않은 꿈. 이렇듯 감독은 혼란하고 허무한 세상과 그 풍경이 반영된 자신의 꿈들 사이를 헤맨다. 이러한 상황에서 감독에게 구원, 지도가 되어주는 것은 문학과 빛이다. 영화의 제목으로 빌려온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에서 나이 많은 웨이터는 모든 것이 허무이고 인간도 한낱 허무에 지나지 않는 세계에서 필요한 것은 아늑하고 환한 불빛과 어떤 종류의 깨끗함과 질서라 말한다. 감독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이것들이 지금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은 고립된 개인의 위로나 평안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감독은 주인공 노인이 청새치, 상어와 외로운 사투를 벌이는 헤밍웨이의 마지막 소설 「노인과 바다」를 떠올리며 지지 않겠다는 마음, 아직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들이 남아있다는 믿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카메라가 보여주는 것 역시 자신이 만들었던 영화 속 사랑했던 주인공들을 다시 만날 수 있도록 해 주는 통로로서의 빛, 꿈속에서와는 달리 팡팡 소리를 내며 밤하늘을 수놓는 불꽃들과 이를 보며 기뻐하는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어떤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며 성호경을 긋는 조문객의 뒷모습이다. 취업준비학원이든, 퀴어페스티벌이든 어딘가로 들어가지 못하고 속하지 못한 채, 바라보고 부유하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의 카메라는 무기력하게 방황하는 현재 청년세대의 모습을 반영한다. 그러나 동시에 카메라와 내레이션은 상기한 것처럼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허무와 아름다움을 분명히 구별한다. 또한 줌인한 보름달을 스크린에 가득 채움으로써 카메라로 할 수 있는 최대의 것을 영화의 엔딩으로 보여주며 무기력과 허무에 지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낸다. 이는 청년세대에 대하여, 무기력과 허무에 고립되거나 혹은 공허하고 맹목적인 의지만 보여주는 이미지와 텍스트가 대부분인 요즘, 현실을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세상에 대한 믿음과 의지를 놓지 않는 <깨끗하고 불빛 환한 곳>을 지지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