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 랜드
- 감독
- 앨런 콜터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애드리엔 브로디, 다이안 레인, 벤 애플랙, 밥 호스킨스, 로빈 튜니
누군가의 사진첩을 들여다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롭습니다. 소소한 일상의 흔적과 기억이 담긴 사진첩 속에서 그 누군가는 영화 한 편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진첩의 주인공은 자신만의 독특한 감성으로 재미난 이야기를 우리에게 들려주죠. 그렇다면 한국영상자료원이 소장한 ‘어느 영화인의 사진첩’에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요? 많은 영화인들이 소중하게 간직했던 그 사진첩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어쩐지 ‘중요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만 같은 현장. 물론 그 ‘중요한 일’이란 사진을 보는 순간 단번에 눈치챌 수 있다. 사진 속 장소가 어디인지, 언제 찍은 것인지 모른다손 치더라도, 사진 속의 인물만으로도 이곳은 뭔가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이다. 1993년 7월 12일, 서울 종로구에 위치한 영화관 단성사 는 이날따라 매우 들뜬 분위기다. 역대 한국영화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울 것으로 기대되며 연일 만원사례를 기록하고 있는 < 서편제 >(임권택, 1993)가 상영 중이기도 했지만, 이 영화를 보기 위해 유독 특별한 손님이 방문했기 때문이다. 한껏 들뜬 분위기를 가득 안은 단성사를 찾은 특별한 손님은 이 사진이 들려주는 이야기의 주인공, (당시) 야인/정치인 김대중이었다. 한편 사진에서 김대중의 오른팔을 가볍게 붙잡고 함께 계단을 오르고 있는 이는 영화 <서편제>에서 한국적 아름다움을 필름 위에 새긴, 사진의 원 소장자인 정일성 촬영감독이다. “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 ”에는 이 사진 외에도, 단성사 휴게실에서 김대중과 담소를 나누고 있는 정일성과 오정해 의 사진도 포함돼 있는데, 이들의 표정에는 거물 인사와 함께 자리한 데서 오는 긴장감이 역력하다. 이즈음의 김대중은 연일 화제의 중심에 있던 참이었다. 그는 1992년 12월 18일에 치러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에게 패배한 후, 정치 은퇴를 선언하고 돌연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교 산하 국제문제연구소의 객원교수로 떠났다. 그 사이에 여러 언론은 그와의 접촉을 수없이 시도했지만, 정계를 떠나 야인으로 돌아간 그는 외부와 거리를 두고 통일문제 연구에 집중했다. 그가 6개월가량의 영국 생활을 마치고 귀국한 1993년 7월 초, 언론은 또다시 그의 거취에 대한 보도를 연일 이어갔다. 그러던 차에 귀국 후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이뤄진 그의 <서편제> 관람은 사회의 모든 관심이 집중된 은퇴 정치인의 행보에서 꽤나 튀는, 돌출 이벤트였다. 그가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것은 “제작사 측의 초청에 따라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1] 제작사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가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연일 거취 문제로 주목받고 있는 ‘야인’ 김대중을 초청했고, 김대중 역시 이에 응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궁금증이 생긴다. 태흥영화사는 왜 김대중을 단성사에 초청했을까? 김대중은 모든 외부와 거리를 두면서도 왜 태흥영화사의 <서편제> 관람 초청에 응했을까? 제작사 입장에서 생각해본다면, 혹시 태흥영화사는 화제 속 인물의 <서편제> 관람이 영화 홍보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서편제>는 이미 1993년 5월, 문화체육부 중개로 청와대 시사회를 개최했고 김영삼 대통령을 위시한 정부 관계자들의 찬사를 받아 화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던 종교인, 김수환 추기경이 <서편제>를 보러 단성사를 찾은 일도 있었다. 단성사를 방문한 김수환 추기경과 그를 맞이하는 <서편제> 제작팀(구체일 미상) 다시 말해, 정치계를 비롯해 종교계까지 <서편제>를 관람하면서, 영화의 우수성과 작품성, 화제성은 이미 충분히 입증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1993년 7월 12일의 이벤트는 단순히 영화 홍보를 위한 목적만은 아니지 않았을까? 어쩌면 ‘김대중’ 그 자체가 태흥영화사에 그리고 영화 <서편제>에, 나아가 한국영화계에 특정 무언가를 상징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영화계와 김대중의 관계 내지는 영화계에서 ‘김대중’이라는 키워드가 가지는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이로부터 약 5년 전, 노태우 정권을 출범시킨 제13대 대통령 선거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87년 12월 16일에 치러진 제13대 대통령 선거는 1972년 10월 유신 이후의 첫 대통령 직접선거로,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당시 대표적인 민주 인사 김영삼(통일민주당)과 김대중(평화민주당; 이하 평민당) 역시 제13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대중은 민주정권 수립을 위해 양김(김영삼, 김대중)의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으나 결렬되었고, 이들은 각자 독자 후보로서 대선 레이스를 치렀다. 영화계 내에서도 국내 영화시장 보호 및 창작과 표현의 자유, 영화인 복지 향상 등 한국영화 발전을 위해 김영삼, 김대중에게 후보 단일화를 요구했지만, [2] 단일화가 결렬되자 평민당 김대중 후보를 공식적으로 지지하는 글을 발표했다. [3] 이에 평민당은 「평화민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4] 로 영화인의 요구에 호응했다. 여기서 평민당이 제시한 한국영화 발전을 위한 기본 원칙의 골자는 다음과 같았다. 「평민당에서- 이 땅의 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1987. 12.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영화계 현안문제를 고루 다루는 가운데서도, 여기서 주목해 볼 것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위해 평민당이 가장 먼저 제시한 극장 스크린쿼터 확대안이다. 1986년 12월에 개정되어 1987년 7월부터 시행된 제6차 개정영화법에는 외국인의 국내 영화업 허용 조항이 신설돼, 외국 영화사가 국내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마련되었다. 사실 이는 1985년부터 시작된 미국 통상압력의 한 결과로, 이를 토대로 1988년부터 UIP를 시작으로 20세기 폭스, 워너 브라더스(1989년~), 콜럼비아 트라이스타(1990년~), 월트디즈니(1993년~) 등의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국내에 영업 등록을 하고 자사의 영화를 직접 배급(직배)하기 시작했다. 할리우드 영화의 직배는 한국영화계에 위기로 다가왔다. 세계 영화시장에서 막강한 힘을 자랑하는 할리우드 영화가 국내에 직접 배급되면, 자본력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한국영화가 설 자리는 좁아질 수밖에 없는 까닭이었다. 설 자리가 좁아진 한국영화를 보호해줄 장치는 스크린쿼터 제도뿐이었지만, 이 역시 미국의 레이더망에서 안전할 리는 만무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크린쿼터 일수를 확대하겠다는 평민당의 공약은 생존 위기에 놓인 영화인들의 희망이자 기대와도 같은 것이었다. 다시 사진 속 1993년 7월의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1993년의 한국영화계는 스크린쿼터 문제, 나아가 영화 시장 개방 문제로 또다시 분주한 해를 보내는 중이었다. 미국의 압력으로 1988년에 시작된 ‘제2차 한미영화협상’에서 한국 정부는 1989년 1월부터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을 연차별로 완화해 1994년 1월부터 전면 폐지할 것에 합의했다. 이는 쉽게 말해 외국영화 상영 필름의 극장 공급량을 무제한 허용하는 것으로, 국내 영화시장 개방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1994년으로 예고된 영화시장 확대 개방을 목전에 둔 1993년의 영화계는 그해 1월, ‘스크린쿼터 감시단(위원장 정지영)’을 발족하고 전국 극장 상영 실적과 스크린쿼터 위반 실태를 조사, 감시하는 등의 활동을 전개하며 한국영화 보호의 마지막 보루인 스크린쿼터 사수에 매진했다. 이런 맥락에서 1993년 7월 12일, 단성사에서 <서편제>를 관람한 ‘야인’ 김대중은 한국영화 보호 및 육성을 공약으로 내세운 1987년의 ‘대선 후보’ 김대중과 교차한다.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외국영화 프린트 벌 수 제한 전면 폐지의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사수를 외치는 1993년 현재에, 미국 통상압력의 결과로 예고된 할리우드 거대 영화사들의 직배 위협에서 스크린쿼터 확대를 약속했던 1987년 정치인 김대중이 마치 소환되기나 한 듯이. 한국영화 흥행 신기록이 예고된 <서편제>를 야인 또는 정치인 ‘김대중’이 관람한다는 것은 이처럼, 그 자체로 한국영화를 위한 상징적인 이벤트였다. * 단성사에 김대중을 초청한 호스트, 태흥영화사의 이태원 대표는 그해 10월, 문체부의 스크린쿼터 20일 추가 감경 발표에 대응하고자 출범한 ‘스크린쿼터 사수를 위한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에서 시나리오 작가 최금동 , 감독 유현목 , 임권택 , 당시 한국영화인협회 이사장 유동석과 함께 공동위원장으로 추대되었고, 1993년 10월 27일에 예정된 영화의 날 기념행사 취소 및 제작 활동 중단 등의 공동 행동을 전개했다. 한편 정계 은퇴를 선언했던 김대중은 1997년 대통령 선거에 다시 출마해, 제15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와 맞물려 한국 경제는 IMF 금융위기를 맞았고, 갓 출범한 김대중 정부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미국에 한미투자협정(BIT) 체결을 제안했다. 그리고 스크린쿼터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올랐다.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상대책위원회(약칭 비대위)’를 발족하고 본격적인 투쟁에 돌입했는데, 이때 역시 태흥영화사 이태원 대표는 배우 김지미 , 감독 임권택과 함께 비대위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영화계의 스크린쿼터 사수 투쟁은 노무현 정부 시기까지 이어졌으나, 그들의 투쟁으로 지켜온 스크린쿼터 146일은 결국 2006년 7월, 연간 73일로 축소되었다(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내용은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참조). *** [1] 《동아일보》, 1993. 7. 13., 5면. [2] 애국영화인 일동, 「 민주화를 갈망하는 애국영화인에게 드리는 글 II 」, 1987. 12. 11.,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49_01. [3] 이 땅의 영화인들, 「 이 땅의 민주화를 열망하는 애국시민에게 드리는 영화인의 글 」, 1987. 12. 14., 한국영상자료원,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관리번호 DZZ0001350_01. [4] 한국영상자료원, 『 영화시장 개방과 스크린쿼터 컬렉션 』, 관리번호 DZZ0001351_01.
어쩌면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질문할지 모르겠다. 할리우드 영화사에 거대한 영화사들이 그렇게 차례로 설립되었을 때는 눈길도 주지 않다가 왜 갑자기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에는 관심을 기울이는 건가요, 혹시 유명한 스타들과 감독이 여기에 참여했기 때문인가요. 위대한 이름들, D. W. 그리피스. 찰리 채플린, ‘미국인들의 스위트 하트’ 메리 픽포드. ‘남자 중의 남자’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만일 그렇게 질문했다면 당신께서는 오해한 것이다. 하지만 그 오해가 영화사의 순간들 중의 이 순간의 핵심이기도 하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이르기까지 짧은 우회를 해야 할 것 같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영화가 대중들과 만나자마자 제일 먼저 벌어진 일은 회사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빨라도 너무 빠르게 전개되었다. 영화는 뤼미에르 형제의 손을 떠나자마자 자본으로 전화하였다. 단순하게 돈을 내고 영화를 본다는 의미가 아니다. 영화는 시장에서 유통과정을 통해 가치를 구현하는 상품에서 출발하였다. 이 상품이 자본을 가진 자들에게 유리했던 것은 여기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이 자신을 자유로운 예술가라고 착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해고할 필요도 없는 계약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엄청난 주급(週給)을 받는 몇 명의 스타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일용직 비정규 노동자들이었다. 영화에서 이윤은 대부분 초과 잉여가치를 바탕으로 발생시켰으며 심지어 이 착취과정은 오늘날까지 일반화되었다. 1917년, 미국 영화산업이 전국적인 규모가 되었을 때 26개의 독립적인 체인을 운영하고 있던 극장주들이 모여 합병 형태의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First National Exhibitors Circuit)을 만들었다. 그들은 개봉작과 재개봉작으로 이원화된 극장 배급 시스템에서 개봉일정의 독점적 지위를 누리려고 했다. 영향력은 엄청나게 커졌으며 채플린의 야심작이었던 <개 같은 삶>과 <어깨 총!>의 흥행을 좌지우지하자 자신의 첫 번째 장편영화를 준비하면서 이들을 <키드>의 촬영현장에 초대하여 이 영화의 상업적 가능성을 설득시켜 상영 일수를 확보하려고 애썼다. 실제로 퍼스트 내쇼널은 미국 영화사에서 메리 픽포드와 채플린 영화를 내세워서 첫 번째 백만 불 흥행수입을 올리기도 하였다. 아직 용어가 등장하진 않았지만 최초의 블록버스터를 독점적 배급체인의 기반 위에서 만들었다. 그러면서 이들은 매우 빠른 속도로 규모를 확장시켰고 1919년 전국 5,000개 극장을 체인화 시켰다. 물론 이 과정을 이미 할리우드를 장악한 제작사들은 수수방관하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파라마운드 영화사의 아돌프 주커는 공격적인 대응에 나서기 시작했다. 여기서 자본의 회전속도는 더 빨라지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합병과정과 할리우드 스튜디오의 대응 과정에서 복잡한 일이 벌어졌다. 이 과정은 그것만으로 영화라는 자본은 어떻게 자기 축적의 과정을 형성하였나, 라는 셀 수 없는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희생자는 언제나 그런 것처럼 계약서 바깥에 놓여있던 사람들이었다. 그 중에서도 영화를 연출하는 감독들과 출연하는 배우들은 불만을 표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 당시의 계약 관례에 따라 영화사와 5년 단위의 주급 계약을 맺었고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면 아무 가치도 없을 계약서를 그들의 동의 없이 쥐어짜기 시작했다. 그들만의 영화사를 만들어서 영화를 제작하자는 이야기를 처음 나눈 사람은 찰리 채플린과 더글라스 페어뱅크스, 그리고 메리 픽포드였다. 여기에 데이빗 W 그리피스와 서부극 영화의 스타 윌리엄 S 하트가 가세하였다. 이들이 모여 영화사를 세운다는 것은 할리우드 전체가 긴장할만한 사건이 되었다. 그들의 목표는 돈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충분히 스튜디오에서 안전하게 주급을 받으면서 영화를 연출하고 출연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바라는 것은 간단했다. 영화 프로젝트를 그들 자신의 뜻에 따라 거절하거나 선택할 수 있는 권리. 이제까지 할리우드는 감독과 배우에게 그런 권리를 인정하지 않았다. 계약은 숫자로 이루어졌고 작품의 내용을 결정하는 것은 제작자와 배급업자의 판단에 따라야만 했다. 그들이 영화사 이름을 ‘(하나로) 맺어진, 뭉친, 결합한, (다소 과장해서) 단결한 예술가들(United Artists)’라고 지은 데에는 그런 배경이 있다. 모든 것이 하나의 뜻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서명 직전에 윌리엄 S 하트는 파라마운트가 편당 20만 불로 인상하면서 여기서 빠졌다. 그때 윌리엄 S 하트는 일 년에 평균 여섯 편의 영화를 찍고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 픽포드와 찰리 채플린은 퍼스트 내쇼널 배급체인과 아직 계약이 남아있었다. 그리피스는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서의 자기 지분을 높이기 위해서 퍼스트 내쇼널과 별도로 세 편의 계약을 했다. 단지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만이 아무 계약조건의 단서 없이 자유롭게 유나이티드 아티스트에 함께 사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런 다음 아름다운 이야기만 기다리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는 영화사의 순간들, 의 다음 순간이 될 것이다) 이것은 돈의 문제이다. 하지만 돈의 이해관계로만 움직이던 할리우드에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는 하나의 모델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 이 정신을 이어받은 것은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조에트로프 영화사를 차릴 때였다. 스필버그도 자신의 영화사를 가지기를 원했다. 그렇게 뉴 시네마 이후 감독들은 자신의 프로젝트에 몰두하기 위해서 하나 둘씩 영화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자본의 순환 안에서도 누군가는 영화가 예술가의 선택의 문제가 되기를 원하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여기에 한 가지 후일담은 덧붙여야 할 것 같다. 그렇게 시작한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마이클 치미노의 어마어마한 야심에 찬 서부극 <천국의 문>의 박스 오피스에서의 재난으로 1981년 MGM에 매각되었다. 유나이티드 아티스트는 거기서 시작했고 거기서 끝났다. 60년에 걸친 역사. 하지만 이 영화의 예술적 야심을 그리피스, 채플린, 메리 픽포드, 더글라스 페어뱅크스는 탓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일본에서 현재 방영 중인 TV 애니메이션 <시로바코>는, 애니메이션 제작사를 배경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내용을 그린 애니메이션 작품이다. (뭔가 복잡해 보이는 설명이지만, 실제로 그런 내용의 작품이다.) 국내에서는 2014년 10월부터 애니플러스 채널에서 방영 중인데, 아직 미완의 작품을 이번 칼럼에서 다루고자 생각한 것은 이 작품 자체에 대해 논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 작품을 통해 일본에서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과정’을 알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와 더불어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시로바코>란 제목은, ‘하얀 상자’라고 하여 비디오테이프의 하얀 박스를 가리킨다. 애니메이션을 제작하게 되면, 수많은 제작 스태프들에게 완성된 본편을 녹화해서 돌리게 되는데 그때 일일이 발매된 소프트(DVD나 블루레이 등)를 주려고 하면 그 많은 인원에 대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도 하거니와 애니메이션이 소프트로 출시되는 것은 TV 방영 이후 한참이 지난 다음이니 너무 늦다. 그러니 공테이프에 녹화해서 나눠주다 보니 그 공테이프가 담겨 있는 ‘하얀 상자’ 모양을 빗대어 완성본을 ‘시로바코(하얀 상자)’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요즘은 시대가 바뀌어 더 이상 비디오테이프가 아니라 CD-ROM 혹은 DVD-ROM 등의 매체로 배포되게 바뀌었지만, 여전히 용어는 그대로 ‘시로바코(하얀 상자)’라고 부른다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시로바코(하얀 상자)’ <시로바코>의 주인공은 애니메이션 회사에서 ‘제작진행’이란 직책을 담당하고 있는 사원이다. 그렇다면 일본 애니메이션 계에서 말하는 ‘제작진행’의 역할은 무엇일까. 주로 TV 애니메이션 제작팀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직책명인데, 간단히 말해 애니메이션의 중심 스태프를 보좌하며 잡무를 담당하는 역할이 된다. 자세한 것은 일본어 위키피디아를 참고해보자. 직접 번역을 해보았다. 작화, 배경미술, 채색, 촬영, 현상, 편집 등 애니메이션 제작 공정은 분업화되어 외주프로덕션으로 나뉘어 있는 경우가 많다. 제작진행은 TV 애니메이션에서 해당하는 담당 화를 연출자(‘각화 연출’이라 불리우는 각 화별 담당 연출자)의 지시를 받아 각 제작 외주 프로덕션 사이에 제작 도중의 작품 작업물을 옮겨야 한다. 원화가 완성되면 동화 담당 업체로, 동화가 완성되면 채색 담당 업체로 운반한다는 식이다. 제작 중간 과정의 어떤 작업물을 지금 어느 부서가 갖고 있는지, 항상 변화하는 최신 상황을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납품일까지 남은 날짜와 필요한 작업량을 계산하여 확인하고 조정하는 일도 필요하다. 연출가만이 아니라 작화감독 등 개별 부서의 팀장 및 이하 스태프들과 스케줄 관리를 위해 절충을 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을 위해 뛰어다녀야 한다. 콘티 등 여러 인원이 공유할 필요가 있는 자료는 복사해둬야 하고, 가끔씩 스태프를 자택과 제작 스튜디오 사이에 이동시켜주기도 해야 한다. 업무 내용이 실로 다양하고 수많은 사람들과 만나야 한다. 화려하지 않고 눈에 잘 안 띄는 직책이지만, 제작진행이 없으면 애니메이션 제작은 불가능하다. (중략) 애니메이션 스태프의 생활 리듬은 불규칙적이기 마련이다. 작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고, 일이 끝나면 그 즉시 다음 공정으로 작업물을 옮겨야만 한다. 따라서 근무 시간이 불규칙할뿐 더러 장시간 걸리기 마련이고, 그로 인해 제작진행은 항상 과중 노동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육체적 피로뿐 아니라 항상 긴박한 스케줄 탓에 정신적으로도 힘든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업무 시간이 길고 힘든 일임에도 불구하고 급여가 그리 높다고는 할 수 없다. (중략) 가혹한 업무 탓으로 단기간 만에 그만두는 이가 많아, 매해 여러 번씩 직원을 모집하는 회사도 있다. (중략) 셀화로 제작되던 시절에는 연출조수를 겸직하는 경우도 있어, 연출자 옆에서 촬영 준비(필요한 작업물을 모아놓는 작업)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중략) TV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경우에, 각화마다 제작진행 담당자가 별도로 복수 존재하여 교대로 스케줄을 짜서 담당하게 된다. (후략) 이처럼 ‘제작진행’은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의 거의 전체를 지켜볼 수 있고, 또 연출가(감독)와 프로듀서 등 작품의 중심적 인물들과 직접 대화를 하게 되므로 제작진행 출신이 나중에 프로듀서나 감독이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로바코>에서 제작진행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도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의 전반을 다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과거에도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쿠로미 양>(다이치 아키타로, 2001)이란 작품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이 일본의 소위 ‘업계 애니메이션’ 중에서 최초로 애니메이션 업계를 무대로 삼았다고 일컬어지는데, 말하자면 <시로바코>의 원조격에 해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연출을 맡은 다이치 아키타로 감독은 < 후르츠 바스켓 > 등의 대표작이 있다. <시로바코>는 애니메이션 제작이 풀 디지털화된 현재 시점에서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크게 참고가 되는 작품이다. 특히, ‘꿈과 희망’만을 갖고 애니메이션 업계에 뛰어들고자 하는 지망생들에게는 ‘현실’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한편으로, 그런 현실 위에서 꿈을 잃지 않고 어떻게 해서 ‘직업’과 ‘자아실현’을 연결시킬 수 있을지를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도 흥미로운 애니메이션이라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주인공이 고교 시절 함께 아마추어 애니메이션 서클의 멤버 중에 유독 성우 지망생 한 명만이 작품 중반을 지난 현시점에서 특별한 결과를 내지 못하고 아직도 아르바이트를 하며 성우 오디션을 보러 다니는 것으로 묘사된다. 일본 애니메이션에 있어 가장 화려한 것이 성우이고, 일본의 성우는 거의 연예인 수준으로 인기가 높지만 그만큼 경쟁률이 무지막지하게 높다. 간혹 한국인인데도 일본의 애니메이션에 꿈을 갖고 성우학교에 입학하는 이를 볼 수 있는데, 국적만 한국일 뿐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재일교포가 아니라면 ‘네이티브 스피커’가 아닌 입장에서 사실상 외국인이 성우로 기용되기는 어렵다고 볼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꿈을 갖고 많은 비용을 들여 일본의 성우학교에 입학하는 외국인은 비단 한국인만이 아니라 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로바코>를 보면 일본인이어도 성우로서 데뷔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 수가 있다. 성우를 소재로 한 만화나 애니메이션은 <시로바코> 외에도 많으니, 최소한 그런 작품은 본 후에 일본 유학을 결심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그에 반해 차라리 그림을 그리는 쪽이나, 혹은 촬영, 컴퓨터그래픽 등 다른 분야에서는 외국인이 참가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과거에는 한국 회사가 일본으로부터 소위 ‘하청’을 받아 작업에 참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지금은 아예 일본 회사에 직접 입사한 한국인 애니메이터도 많다. 또 그림 분야만이 아니라 다른 전문 분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직원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런 이들에게도 <시로바코>와 같은 작품은 참고가 된다는 것이다. 일본에는 과거에도 이런 식의 ‘직업 내용을 살펴볼 수 있는 작품’이 꽤 많이 존재했다. 예를 들어 소위 ‘만화가 만화’ 같은 케이스다. ‘만화가 만화’란 만화가가 만화를 그리는 자체를 소재로 한 만화를 뜻한다. 지금 예를 들자면 대표적으로 「바쿠만」(오오바 츠구미 원작, 오바타 타케시 만화)과 같은 작품이 있겠는데, 그 외에도 좀비만화인 「아이 앰 어 히어로」(하나자와 켄고)에서도 주인공이 만화가 화실의 스태프(어시스턴트)라서 초반 1~2권에는 일본에서 만화가 및 만화가의 화실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참고가 되는 내용이 나온다. 또 「외쳐라 펜」(시마모토 카즈히코)은 전형적인 ‘만화가 만화’로서 작가 자신을 모델로 한 만화가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화를 그리며 일어나는 일들을 그린 작품이다. 「G전장 헤븐즈 도어」(니혼바시 요코)는 만화가와 편집자의 자식들이 주인공인데 일본의 상업만화 세계에서 마치 전쟁처럼 살아가는 만화가들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이밖에도 ‘만화가 만화’는 많이 존재한다.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 작년 일본에서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화제를 모은 만화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시마모토 카즈히코)의 경우엔, 작가 시마모토 카즈히코가 대학 시절 자신과 같은 학교에 재학 중이던 안노 히데아키(신세기 에반게리온), 야마가 히로유키(왕립우주군: 오네아미스의 날개), 아카이 타카미(게임 ‘프린세스 메이커’ 제작자) 등 이후 애니메이션 제작사 ‘가이낙스’를 설립시키는 중추가 되는 인물들과 만났던 때를 회고하는 자전적 만화로서 1980년대 애니메이션을 만들고 싶어하던 젊은이들이 나중에 어떤 식으로 일본 애니메이션계 를 짊어지는 인물로 성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시로바코>나 「아오이 호노오(푸른 불꽃)」과 같은 작품들을 보면 일본 애니메이션의 제작 과정을 알 수 있다. 일본 애니메이션이라고 하면 한국에서는 무조건 ‘애니메이션 선진국’, ‘만화의 왕국’이라는 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서양, 특히 미국과 비교할 때 상당히 종사자에게 있어서 불리한 업무 환경이라고 비판받는 경우가 많다. 앞서 일본어 위키피디아에 기재되어 있는 제작진행 담당자의 업무 내용에도 설명되어 있듯이, 급여는 매우 낮은 편인데 업무 시간도 상당히 길고 아주 고생스럽다는 것이다. 이는 제작진행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애니메이터 역시도 마찬가지이고, 오히려 그나마 회사 소속인 제작진행에 비해(제작진행 역시도 대개 계약직이라 비정규직인 경우가 많지만) 애니메이터는 대부분의 경우 프리랜서이므로 아무런 보장이 없어 더 불리한 직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로 인해 일본에서는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있고, 프리랜서인 애니메이터에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일종의 고용보험을 만들자는 움직임도 있는 것이다. 스튜디오 지브리가 일본에서는 상당히 오랜만에 ‘모든 애니메이터를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를 추진했는데, 회사의 양대 기둥이 되어 온 두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가 고령으로 은퇴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이미 종래의 ‘완전 고용’을 포기하는 쪽으로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다고 하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알 수가 있다. 아주 예전, 일본을 대표하는 유서깊은 애니메이션 회사 토에이 애니메이션(토에이동화)을 필두로 애니메이터들은 전부 회사 소속이었다. 아니, 그 이전에 일본영화계 자체가 대부분의 스태프, 심지어 배우들까지를 회사에서 고용하는 형태였다. 오히려 그때에는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능력 있는 연출자나 배우들은 회사와의 계약 기간이 빨리 끝나고 프리랜서로 나가려는 분위기였다. 스포츠 선수나 요즘 연예인과 소속사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보면 되겠다. 즉 당시에는 영화제작사가 제작 스태프도 고용했고 연예인 매니지먼트도 담당했다는 뜻인데, 지금 국내에서 가수 분야의 경우 매니지먼트와 음반(음원) 제작을 같은 회사에서 담당하는 것과 비슷하게 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그때는 왜 영화 분야에서도 그런 식이었는가 하면, 간단히 말해서 할리우드도 그랬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으니 아주 간략하게 말하자면, 소위 ‘할리우드 황금기’ 시대에는 할리우드 영화사에서도 스태프와 배우들이 영화사 소속인 경우가 많았다. 2011년에 발표된 영화 < 아티스트 >를 떠올리면 되겠다. 그래서 그 영향을 받아 일본 영화계도 마찬가지 방식이었고, 영화 제작사가 애니메이션도 제작하던 초창기에는 애니메이션 업계도 비슷했던 것이다. 하지만 애니메이션 업계가 점점 변화하면서 모든 애니메이터를 회사가 고용하여 급여를 주는 형태가 점점 불가능해졌고, 결국 전체 사원 애니메이터를 해고하고 외주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분야별로 생기기 시작하면서 현재와 같은 형태가 일본 애니메이션(그리고 미국에서도 비슷하게 바뀌었다)의 주류 시스템이 되었다. 할리우드에서도 시스템이 바뀌면서 많은 배우나 스태프들이 그 변화 속에서의 소위 ‘패러다임 시프트’에 적응하지 못하기도 했는데, 사회 전체가 보다 좌파적, 사회주의적이었던 과거 일본에서는 그 과정이 보다 과격하게 진행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당시 토에이동화 소속의 애니메이터 노조에서 서기장(직함 자체가 매우 공산주의적이지 않은가)을 맡기도 했고, 역시 토에이 노조에서 부위원장을 맡았던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은 최근까지도 일본공산당 지지를 공표했던 것이다. 이 둘은 마지막까지도 토에이동화가 사원 애니메이터를 해고하는 데에 대해 노동쟁의를 통해 꽤나 과격하게 반대한 바 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그 둘이 중심이 되어 만들어진 스튜디오 지브리는 애니메이터를 사원으로 고용하는 형태를 취한 것이다. (계약직 형태가 많은 것 같기는 해도.) 지금은 < 에반게리온 > 시리즈를 가지고 가이낙스에서 독립한 안노 히데아키 감독의 스튜디오 카라 역시도, ‘애니메이터의 노후 보장’ 등을 고민하면서 사원 제도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으로 만들어졌다는 것 같은데, 어쨌든 지브리나 카라 모두 일본에서 흥행면에 있어 가장 성공한 작품을 이미 내놓았기 때문에 그 바탕 위에서 직원들의 복지 혜택까지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겠다. 국내에서도 영화 분야에서 소위 ‘열정 페이’ 문제가 많이 논의되는 상황 속에 <국제시장> 윤제균 감독의 회사가 스태프들과 표준 근로계약서를 통해 작업했다는 기사가 많이 나왔는데, 비슷한 상황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사실은 일본의 애니메이션 업계 역시도 여전히 ‘열정 페이’ 위에 성립되어 있다는 것이고, 일본에서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모색이 이제야 시작되고 있는 단계라고 보면 되겠다. (따라서, 작품의 연출 방식이나 제작 방법 등을 참고한다면 모를까, 제작 시스템이나 회사의 구조 등에 있어서는 미국이 아닌 일본을 참고로 하는 것은 그다지 바람직한 방향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이라고 해서 물론 전부 완벽한 시스템을 갖추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보다 합리적인 시스템을 위해 세세한 스태프들까지 각종 단체를 통해 표준적인 계약서와 계약 관계를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으니 좀 더 참고할 만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어쨌든, 이런 ‘시스템’이나 ‘절차’에 대해서는 사실 외국이 정확하게 실무에 있어서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알기는 쉽지가 않다. 직접 외국의 해당 업체에 들어가서 몸으로 부딪혀보지 않으면 체험하기가 어렵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러기에는 언어의 문제도 있고 상황상 불가능한 경우가 많지 않은가. 그렇기 때문에 체험자들의 경험담이 소개되어야 하는데, 관련서적이 많이 있는 것도 아니고 체험담을 듣는다는 것도 그리 쉽지 않다. 우연하게 동료나 선배를 통해 잠깐잠깐 조언을 들을 수 있는 것이 고작인 경우가 많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시로바코>와 같이 전체적인 업계 사정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은 크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만화 업계에 대해 <바쿠만>이 국내의 독자들의 이해도를 많이 올렸듯이, <시로바코>도 그런 역할이 되었으면 생각한다. 물론 <바쿠만>에서 일본만화의 모든 측면이 다 소개된 것은 아니고 거기에 다뤄지지 않은 내용이나 오해를 불러일으킨 면도 있었듯, <시로바코> 역시도 한계는 있겠으나 워낙 참고할 자료가 없는 한국의 현실 속에서는 그나마 목마른 자에게 잠깐의 소나기 역할이라도 될 수 있지 않은가 생각하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트리거류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독본」 사실은, 작년에 일본에서 출간된 「애니메이션을 직업으로!: 트리거류 애니메이션 제작진행 독본」(이 책의 저자는 애니메이션 <킬라킬>을 만든 제작사 ‘트리거’의 이사 겸 프로듀서 마스모토 카즈야) 등과 같이 실제로 참고가 될만한 관련서적이 국내에도 번역되는 편이 더 확실할뿐 더러 이해에도 도움이 될 것이겠지만 그렇지 못한 상황에선 기왕에 수입된 <시로바코>라도 볼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개인적으로는, 국내에도 애니메이션 업계가 존재하고 있고 지망하는 이들이 많은 상황에서 좀 더 애니메이션 제작에 관련된 서적이 많이 출간되길 희망한다. 구도나 데생 같은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작법서’는 이미 많이 나왔고,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시나리오를 위한 ‘스토리 작법서’ 역시 고전이 될만한 프로프나 캠벨의 저서는 물론이고 재작년부터 화제가 된 오쓰카 에이지의 저서도 번역판이 나왔다. 하지만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분야에서 그런 작법이 아니라 ‘업계 상황’을 알려주는 직접적인 서적은 아직 거의 없고, <시로바코>나 <바쿠만>을 보면서 간접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아쉽다. 또 이 작품들은 일본 업계가 아니라 한국의 업계를 다룬다는 한계점도 있으니 더더욱…. 한국의 업계는 좁다 보니 건너건너 다들 아는 사이라서 비판을 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애니메이션이든 영화든 만화든 게임이든 지망생이 존재하고 매년 신입이 들어오는 업계이니만큼 입에서 입으로 소문만으로 돌고 끝날 것이 아니라 정확하게 상황을 정리해주는 서적이나 직접적으로 업계를 보여주는 작품이 국내에도 좀 더 나와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