뱀파이어 해결사
- 감독
- 프랜 루벨 커즈
- 제작년도
- 1992
- 출연
- 크리스티 스완슨, 도날드 서덜랜드, 폴 루벤스, 룻거 하우어, 루크 페리, 미쉘 에이브람스, 힐러리 스웽크, 패리스 본햄, 데이빗 아퀘트, 랜달 바틴코프, 앤드류 로리, 사샤 젠슨, 스티븐 루트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나는 게임을 즐기는 편이 아니지만, 어떤 게임에는 마음이 많이 붙들린다. 십여 년 전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와우)를 할 때도 그랬다. 피시방에서 나는 고민과 불만이 많은 청년 예술가이기를 잠시 멈추고 무쇠 갑옷을 입은 늑대인간으로 변신했다. 로그인을 하고 가상의 세상으로 진입하면 잠깐이나마 현실을 잊을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물론 그 안에도 현실 세상과 비슷한 생존의 법칙이 존재했다. 미션을 수행하고, 전략을 짜고, 경쟁이나 싸움에서 이겨야만 능력치가 올라가고 돈도 많아졌다. 하지만 꼭 그러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나는 게임 속 마을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아름다운 그래픽 풍경을 구경하곤 했다. 그리핀 등에 올라타고 날아다니는 게 가장 좋았다. 던모로에서 엘윈 숲까지, 엘윈 숲에서 모단 호수까지, 쓸데없이 이동만 하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아니면 스크롤을 상하좌우로 돌리면서 호젓한 호숫가를 마냥 거닐었다. 사람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고 게임에 몰입한다는데, 나는 화면 속에서 게임으로부터도 도피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름의 위안을 얻었다. 레벨업도 제대로 못(안) 하고 그만둔 게임이지만, 나에게도 한 시절의 추억이 남은 터였다. 와우를 다룬 다큐멘터리라고 하니 안 볼 도리가 없었다. <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 >(벤자민 리, 2024)을 홍보하며 넷플릭스는 여러 개의 공식 포스터를 띄웠는데, 그중 한 포스터가 영화의 핵심을 절묘하게 함축하는 듯해 눈길을 끌었다. 포스터를 가득 채운 것은 영화의 주인공인 노르웨이 청년 마츠의 얼굴인데, 절반은 현실의 얼굴이고, 나머지 절반은 픽셀이 깨어지듯 애니메이션으로 변환된 게임 속 캐릭터의 얼굴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희귀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뒤셴 근이영양증이라는 퇴행성 질환으로, 근육이 서서히 줄면서 신체 기능을 잃어가는 병이었다. 또래보다 발달 속도가 느리고 자주 넘어지는 아이였던 마츠는 하나씩 보조 장치가 늘어가다 열 살이 되기도 전에 휠체어 없이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누릴 수 있는 것이 얼마 없던 어린 시절, 마츠의 부모님은 게임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해 주었다. 그에게 유일한 위안이 되어준 게임이 바로 와우였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 어려워진 스물다섯 살의 어느 날, 마츠는 조용히 숨을 거둔다. 마츠의 가족은 그가 운영하던 블로그에 짧은 부고를 올린다. 그러자 놀랍게도 수많은 친구로부터 애도의 메시지가 쏟아진다. 그들은 마츠를 ‘이벨린’이라는 캐릭터 이름으로 불렀다. 스크린 너머에는 마츠의 가족이 전혀 모르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와우와 같은 롤플레잉 게임은 길드라고 불리는 커뮤니티에 여러 사람이 모여 함께 게임을 하는데, 마츠는 자신의 길드에서 늘 사람들의 고민을 잘 들어주고 문제가 있으면 나서서 도와주는 사람이었다. 해결사라 불렸고, 로맨티스트라고도 불렸다. 마츠 스테인, 아니 이벨린 레드무어의 활약담을 들으며, 마츠의 부모는 놀라워한다. 육체의 한계 속에 고립된 아들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갈 수 없다는 점을 늘 안타깝게 여겨왔는데, 스크린 너머에서는 그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리고, 우정을 쌓고, 연애하고, 다투기도 하며 살았던 것이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영화는 게임을 해로운 것으로 손쉽게 규정하는 세상의 편견에 정면으로 응답한다. 중증 장애인은 물론이고 사회와의 대면에서 다양한 종류의 어려움을 겪는 이들에게 게임은 분명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는 출입문이 될 수 있다. 경쟁이나 현실 도피가 아닌 주체적 개입과 나눔으로서의 게임, 몸의 확장으로 기능하는 가상 세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러나 게임의 사회적 가치나 치유의 능력을 그저 입증하는 것, 그보다는 훨씬 복잡다단한 질문들 속에 마츠(혹은 이벨린)의 세계는 놓여있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종류의 스크린이 등장한다. 먼저, 마츠의 죽음 이후 촬영된 가족과 지인의 인터뷰 영상이 있다. 현재 시점의 이 영상들은 창가의 액자 속 사진으로 남은 마츠의 얼굴, 정지된 마츠의 삶을 과거형으로 서술하는 회고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마츠가 어머니의 뱃속에 있던 1989년 어느 날로부터 시작하는, 과거 영상의 인용이 있다.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무럭무럭 자라는 아기 마츠의 모습, 조랑말 인형을 선물 받는 모습, 종종걸음으로 걷다 엉덩방아를 찧는 모습, 조금 느려진 걸음으로 등교하던 모습, 수영장에서 아버지의 등에 업힌 모습, 가족여행이 있던 날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 이 화면들은 대부분 가족이 촬영한 홈비디오로, 마츠의 짧은 인생을 찬찬히 훑는다. 애정과 근심이 묻어나는 시선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거칠게 요약되는 것은 점차 움직임이 없어지고 무기력해지는 퇴행성 근육 질환 장애인의 생애이다. 한편, 이 다큐멘터리는 남겨진 ‘데이터’를 통해 카메라가 찍을 수 없는 과거의 시간을 마츠의 시선으로 재구성한다. 마츠가 생애 마지막 10년 동안 온라인에서 보낸 시간은 약 2만 시간에 달한다. 그는 블로그에 많은 일기를 남겼고, 그가 속한 길드 ‘스타라이트’는 4만 2천여 쪽에 달하는 게임 내 채팅과 유저 로그 기록을 보관하고 있었다. 영화는 주인공 사후에 제작되는 인물 다큐멘터리가 지닌 한계와 가능성의 새로운 국면을 실험한다. 온라인상에서 일어났던 일들이 게임 그래픽 애니메이션으로 고스란히 ‘재연(再演)’될 때, 그 가상의 ‘재현(再現)’이 가져오는 구체성과 생동감은 실로 감동적이다. 그렇게, 마츠는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이 쓸 수 있었다. 더불어 그 다시-쓰기는 영화가 제시하는 다른 화면들을 다시-읽게끔 만든다. 마츠가 남긴 일기로 재구성된 내레이션은 홈비디오 화면 속 말 없는 마츠의 속마음을 훑는다(그는 얼마나 위트 넘치는 사람이었는지!). 우리는 마츠가 얼마나 다정하고 용감한 사람이었는가를 들려주는 온라인 친구들의 이메일 내용만큼이나, 그 컴퓨터 스크린에 비친 마츠 부모님의 얼굴에 집중하게 된다. 스크린들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 사이, 인물과 인물 사이로 틈입하며, 서로 간섭을 일으킨다. 겹겹의 진실이 우리 삶의 무대를 구성하고 있음을 드러내며, 영화는 ‘진짜 삶’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는다.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 IMDb 마츠는 근육이 퇴화하는 와중에도 특별히 주문 제작한 장비 덕분에 게임을 할 수 있었다. 낙관적인 사람이라면 이 다큐가 기술에 대한 경외를 가리킨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의 제공과 기술에의 의지가 누구나의 삶에서 양립할 수 있는 조건은 아니며, 접근 가능한 기술 위에서 자신의 삶을 온전히 획득한 것은 마츠 스스로의 노력이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 같다. 고작 0과 1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데이터의 더미 속에서 누군가는 범죄를 도모하지만, 또 누군가는 어떻게든 삶이라는 것을 구성해 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 자신의 생애가 어떤 기록으로 쓰일 것인가를 마츠가 미리 고민한 결과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느낀 시점에, 마츠는 블로그 비밀번호를 남기고, 비밀리에 방안에다 카메라를 설치하도록 요청했던 것 같다. 덕분에 죽음에 가까워지는 몸으로 마츠가 살아낸 컴퓨터 앞에서의 마지막 생애 또한 기록될 수 있었다. 이 영화는 스크린 너머 ‘이벨린의 비범한 인생’에 부치는 경배이면서, 동시에 ‘마츠의 비범한 인생’에 관한 영화일 수밖에 없다. 비범함과 평범함이라는 관념의 줄다리기 속에서 주인공을 영웅화하지도 연민의 대상으로 만들지도 않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그럼에도, 마츠가 게임에 접속한 다음 늘 30분가량 정해진 코스를 달렸다는 대목에서는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다. 그건 그냥 산책길이 아니다. 꽃사슴과 회색늑대와 익룡이 함께 노니는, 영원히 닳지 않는 길이다. 마츠는 영원히 늙지 않는 몸으로, 지치지 않는 다리로 그 길을 달렸다. 하지만 그 길에 진입하기 위해 화면을 켜고, 정성 들여 만든 이벨린의 삶으로 로그인하는 매일의 루틴을, 어떻게 가상이라는 한 마디 단어로 설명할 수 있겠는가. 마츠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건 “단순한 스크린”이 아니었다. 현실에 굴복하지 않는 영혼이 향하는 “하나의 관문”이었다. 와우 개발팀은 마츠를 기리기 위해 ‘레벤 꾸러미’라는 아이템에서 생기는 수익 전액을 근이영양증 환자 지원 단체인 큐어뒤셴에 기부하고 있으며, 게임 안에 이벨린의 묘비를 설치했다. 이벨린은 그가 자주 가던 엘윈 숲에 위치한 수정 호수에 묻혀 있다. 와우 유저라면 누구나 참배할 수 있다. 좌표는 49, 65, 7이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속 아이템 레벤과 마츠(이벨린) 추모비 “ The Remarkable Life of Ibelin: A Life Rich with Community and Connection through World of Warcraft ”, Cure Duchenne 김영글(미술작가) l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한다. 허구와 사실의 관계, 언어와 이미지의 관계에 집중하며, 주로 이야기를 새롭게 직조하면서 역사적ㆍ사적 자료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사로잡힌 돌』(2024),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2021), 『모나미 153 연대기』(2019) 등의 책을 썼고, 주요 영상 작업으로 < 파란 나라 >(2019), <해마 찾기>(2016)가 있다.
유튜브는 이제 거의 모든 사람의 일상 풍경 중 하나로 자리 잡은 것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KBS와 MBC가 이미 있었던 것처럼, 1991년 개국한 SBS가 원래부터 있던 것으로 느껴지는 것처럼 유튜브도 이미 그런 느낌이다. 레거시 미디어의 전형성을 타파하는 어쩌구 그런 분석들도, 초등학생 장래희망의 상위권에 ‘유튜버’가 자리하는 것도 이제는 다 원래 그랬던 것 같다. 지하철에서도, 버스에서도, 카페에서도 사람들은 유튜브를 본다. 사람마다 선호하는 취향이 달라 열성적으로 유튜브를 시청하는 사람이라도 ‘유명 유튜버’라는 사람을 전혀 모를 수 있고, 해외에서 잘 나가는 사람이라 구독차 천만명이 넘어도 국내에서는 전혀 모르는 경우도 있다. 누구든, 어떤 취향을 가졌든 재미를 느낄만한 크리에이터가 무조건 하나는 있는 플랫폼. 현재로선 그게 유튜브가 가지는 소비재로써의 긍정적인 의미라고 생각한다. 이 영화는 한 유튜버의 이야기기다. 유망한 아역 배우로 시작해 < 올드보이 >의 어린 오대수로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으나 지금은 별 볼일 없는 전직 배우 오태경. 재기를 꿈꾸며 시작한 유튜브는 리틀 오대수 TV! (줄여서 리오) ‘구독자의 노예’를 자칭하며 일종의 해결사 혹은 대신맨 컨텐츠를 진행한다. 우리 학교 일진 혼내주세요, 폐가에 가주세요, 치과 치료 받고 아픈지 얘기해주세요 같은 것들로 조금씩 인기를 얻고 있을 때 ‘광화문에 1인 시위 중인 피켓남의 사연을 알아봐주세요’라는 주문을 받게 된다. 다소 시시하다는 생각으로 패스하려던 찰나 구독자는 1000만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걸게 되고 태경은 피켓남을 만나러가게 된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아무 말을 하지 않는 피켓남. 그렇게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던 끝에, 우연히 여동생이라는 사람을 만나게 되고 시위의 이유를 듣게 되는데, 성추행 무고로 억울하게 유죄를 받은 피해자라는 것. 이 사연이 알려지면서 리틀 오대수TV는 떡상하게 되고 피켓남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을 하는 과정은 모두 유튜브를 통해 중계 되면서 정의의 사도가 된다. 여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점점 이야기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하는데… ‘사이버 렉카’라는 말이 있다. 사건이 터지면 누구보다 빠르게 가지고 와서 자극적인 컨텐츠로 가공해 업로드하고 조회수를 확보하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종의 멸칭이다. 왜 멸칭이냐. 이들은 자신들이 다루는 사건들의 진위여부에 대해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일단 남들보다 빨리 영상 만들고 조회수를 먹어야 유튜브의 무한경쟁시스템에서 관심을 얻을 수 있다. 이 세계에서 관심은 곧 돈이다. 사건을 파악하고, 다른 뉴스나 정황을 통해 진실을 검토하는 과정이 수반되어야 하겠지만 사이버 렉카들에게 이건 알바가 아니다. 그 시간에 하나 더 만들어 올리는게 남는 장사다. 이 시장에 진출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많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님 말고’. 만약 자신이 다룬 사건이 거짓이거나 잘못 알려진 것이라면 본인이 그 뉴스를 접한 창구를 핑계 대며 슬쩍 빠져나가거나, 만약 생각보다 일이 커진다면 검은 화면에 하얀 글씨로 ‘죄송합니다.’ 라고 쓴 썸네일이 달린 사과 영상을 올리고 몇 달 푹 쉬다가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한다. 세상에 이렇게 편한 돈벌이가 있나? 이 정도만 되어도 최악까지는 아니다. 더한 경우는 의도적으로 사건을 왜곡하고 좌표를 찍으며 구독자들을 선동한다. 이 분야의 이 바닥의 레전드들은 최악의 ‘혐오의 엔터테이너’로써 굵직한 이름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확실한 증거와 공들인 취재로 지금 바닥까지 신뢰도가 떨어진 기존 언론을 대체하려는, 책임감 있는 렉카들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유튜브의 ‘인기 동영상’ 같은데서 뉴스를 접한다면, 아마 그것은 아주 높은 확률로 거짓일 것이라고 확신에 가깝게 말할 수 있다.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 내용에 대해 길게 말은 하지 못했지만, < 좋.댓.구 >는 대 유튜브 시대에 반드시 한 번쯤은 생각해봐야할 부분을 생각보다 따끔하게 꼬집고 있다. 스크린라이프(컴퓨터 혹은 스마트폰에서 구현되는 화면으로만 영화를 구성하는) 형식을 취하는 영화들이 제법 선보였다. 생각나는 것만 나열하면 < 서치 >, <언프렌디드>, < 라방 > 등이 있겠다. 그때마다 호불호는 늘 갈렸다. 내러티브와 착 붙어 아주 잘 활용 된 경우도 있었고 괜히 정신만 없어져서 이야기를 파악하기 되려 더 어렵게 만들기만 했다는 평가를 받는 작품도 있었다. <좋.댓.구>는 전자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정신없음이나 답답함이 없다. 그냥 유튜브를 생각하면 된다. 당신이 유튜브를 자주 시청하는 사람이라면 굉장히 편안할 것인데 감독은 그 점을 고려해 UI부터 구독자의 닉네임, 댓글 내용까지 실제같이 보일 수 있도록 하나하나 구성하느라 굉장히 공을 많이 들였다고 한다. 이런 부분이 일반적인 극영화에서는 어색할 수 있는 전환을 부드럽게 만들고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재미들을 투입시키기에 적절했다. 아마도 영화의 시점에 해당하는 사람은 유튜브 프리미엄을 사용하지 않는 것 같다. 중간 중간 다양한 광고가 등장하는데, 엥 여기에 저 사람이 왜 나와? 싶은 사람들이 한두 명도 아니고 여러 명이 등장해 툭 툭 지나가며 재미를 준다. 문소리, 박현빈, 신동엽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무엇보다 박찬욱 감독의 등장이 감동을 준다. 뒷이야기를 들어보니 오태경 배우가 특별출연을 요청했더니 흔쾌히 받아주었다고 하는데 오래전 함께 일했으나 이제는 위치가 달라진 상황에서, 말하는 사람은 어려워서 고민이 많았을 것 같고 받아주는 사람은 반갑기도 하고 약간은 안쓰럽지도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잘된 쪽이 오죽 잘됐어야지...) 괜히 코를 한 번 훔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영화 초반에 등장하는 <올드보이>의 복도 장도리 씬을 패러디 한 중학교에서의 복도 뿅망치 씬을 보며 많이 웃었는데 오태경이 오태경을 연기했기 때문에 가능한 장면이자 재미였다. 평생을 <올드보이>의 그늘 안에 있었는데 가장 유명한 장면은 정작 자신이 나오지 않았으니 이렇게나마 원을 풀지 않았을까? <좋.댓.구>는 < 곤지암 >에 공동각본으로 참여했던 박상민 감독의 데뷔작이다. 2023년 7월 12일 개봉작이니 (글 작성일 8월 8일 기준) 공개된지 한 달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다. KOBIS를 뒤져보니 개봉 당일 전국 146개 스크린에서 186회를 상영했는데, 딱 열흘째되는 21일에는 전국 10개의 스크린에서 10회 상영을 했다고 한다. 당연히 많은 관객이 봤을 리가 없는데, 총 관객수는 13,195명으로 마무리 된 듯 하다. (게시일 기준 전국 누적관객수는 13,376명)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영화가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크린라이프 형식으로 만들어진 본 작품은 특히 유튜브를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가 일상적으로 접하는 유튜브 컨텐츠들에 대한 풍자 혹은 경고 그것도 아니면 넝~담~을 펼쳐 내는데, 이게 썩 그럴싸하고 재미가 있다는 말이다. 실제로 네이버 별점이나 영화를 본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면 평들이 상당히 준수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식이라면 역주행도 노려봄직 한데, 극장에서 볼 방법이 없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너무 크다. 네이버, 웨이브, 티빙 등에서 볼 수 있지만 아직 추가 요금을 결제해야 한다. 영화가 괜찮은만큼, 조만간 더 편하게 OTT로 보게 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영원히 잊고 싶지만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참혹한 순간들이 있다. 지우려 하면 할수록 더욱 선명한 사진으로 박재되는 그 순간들은 불현 듯 지금의 일상을 덮쳐오기도 한다. 묻어두었던 과거가 밀려오는 그 감각. 현재의 삶을 꺾어버리고 무력하게 만드는 그것에게서 우리는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이 있긴 할까. 조(호아킨 피닉스)가 생각해낸 방법은 자신의 죽음이다. 사람들의 의뢰를 받아 납치, 감금 등의 사건을 처리하는 해결사인 그는 생생히 떠오르는 과거의 기억으로 인해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 사건을 해결하고 일상을 보내다가도, 문득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들은 조의 생각을 갉아먹는다. 소리치는 아빠와 식탁 밑에 숨은 엄마, 그런 엄마의 손짓, 아빠의 발, 그가 쥔 해머. 혹은 파병 시절 구하지 못했던 피해자 여성들, 그들이 갇혔던 컨테이너의 손잡이, 손잡이를 열자 보였던 시체 더미. 손전등 아래 보이는 시체의 얼굴. 눈. 입. 벌어진 입. 조는 어머니와 대화를 나누다가도, 길을 걷다 행인의 얼굴을 마주하다가도, 편집되어 떠오르는 과거의 순간에 괴로워한다. 삶이 계속되는 한 영원할 것 같은 그 괴로움. 조는 그 괴로움에서 벗어나고자 죽음을 꿈꾼다. 마치 여기에 없었던 것처럼 말끔히 사라지는 죽음을. 이렇듯 사라지고 싶은 조의 심리와 그런 그를 트라우마에 가두는 조의 현실은 그가 길을 걷는 장면들을 통해 드러난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 방식으로 길을 걷는 조를 스크린에 배치한다. 한 구석과 정중앙. 제목에서 암시하듯이, 조는 원래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사라지기를 반복하는데, 그때마다 영화는 그가 떠나기 직전 혹은 직후의 공간을 바라본다. 이 때문에 조는 8차선 도로 너머에서 언뜻 보이거나, 벌판을 가로질러 숲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조금 스친다. 죽음으로서 현실에서 사라지고 싶은 조의 심리는 스크린에서 정말로 사라지는 듯한 이미지를 통해 시각적으로 구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는 조가 손쉽게 사라지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카메라는 그를 끈질기게 프레임의 정중앙에 배치하는데, 이로 인해 길을 걷는 조는 한참을 걸어도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갇혀있는 듯 보인다. 예컨대 영화 초반부, 현관문이 아닌 골목길로 난 쪽문을 통해 집을 나서는 조의 모습에서 이러한 구도가 여실히 나타난다. 카메라는 건너편 도로에서 그를 마주 봄으로써, 골목길을 한참 걸어 나오고 있는 조가 프레임 상에서는 여전히 한 자리에 머물도록 만든다. 결국 조는 가정폭력의 기억이 서린 집의 그늘을 쉽게 벗어나지 못하는 인물로 비춰진다. 이러한 서사의 시각적 구현에서 전작 <케빈의 대하여>(2011)와 <가스맨>(1998)을 통해 은유적 이미지를 정적이면서도 정확하게 구사하는 것으로 평가받은 린 램지 감독의 시선이 느껴진다. 한편, 괴로운 과거에 갇힌 조는 괴로운 현실에 놓인 니나(예카테리나 삼소노프)를 만난다. 시의원의 딸인 니나는 권력 세력이 연루된 성폭력 조직에 납치되어 끔찍한 성폭행 범죄에 노출되고, 조는 시의원으로부터 니나를 구해달라는 의뢰를 받아 범죄 현장에서 그녀를 구출한다. 그리고 잠시 뒤, 니나를 조수석에 태워 돌아가던 차 안. 조는 문득 니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창문에 머리를 기댄 채 숫자를 거꾸로 카운트다운하고 있다. 마치 어린 시절의 조와 오프닝 시퀀스에서의 조가 그러했듯이. 이렇듯 카운트다운을 하는 니나의 행동은 니나가 조와 닮아 있다는 인상을 남긴다. 그러나 한 가지 다른 지점은 카운트다운을 하는 동안 두 사람이 서로 다른 태도를 보인다는 점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조의 첫 번째 카운트다운이 등장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어두운 화면에서 나지막히 카운트다운을 하는 조의 목소리 직후 비닐을 뒤집어 쓴 채 질식사하기 직전인 그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이 때문에 조의 카운트다운 끝에는 죽음이 있을 것이라는 예감을 남긴다. 반면 니나는 자살시도는커녕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는 얼굴로 카운트다운을 하며 영화에 등장한다. 그 숫자의 끝에 니나가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는 쉽게 유추할 수 없다. 무엇을 위해 카운트다운 하는 것인지 그녀에게 직접 물어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테지만, 니나는 또 다시 권력자에게 납치당하고 만다. 니나를 잃은 이후 조가 마주하게 되는 것은 주변인들의 죽음이다. 조는 분주하게 움직여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알 만한 이들을 찾아가지만,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난 현장에 뒤늦게 도착할 뿐이다. 무엇보다도 그를 가장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조가 자살시도를 할 때마다 그를 찾고 부르며 죽음을 중단시키던 어머니는 손 쓸 새도 없이 권력세력에 의해 살해당한다. 이제 그에게는 죽음을 저지할 어머니의 부름조차 남지 않게 된 것이다. 결국 조는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래도록 꿈꾸던 죽음을 택한다. 그의 카운트다운이 끝나면, 삶 또한 끝날 것이다. 40, 39, 38, 저 멀리 엄마의 시체가 수장되는 것이 보인다. 37, 36, 주머니에 한 가득 돌을 넣은 조 또한 곧 저 깊은 강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다. 33, 32. 기다리던 죽음이 목전에 다가왔을 때, 조는 문득 카운트다운을 하던 니나의 목소리를 떠올린다. 그때 조는 왜 니나의 카운트다운을 떠올렸을까. 29, 28, 환각처럼, 니나가 물속에 가라앉는 것이 보인다. 니나의 카운트다운은 죽음을 향했던 것일까, 혹은 삶을 향했던 것일까. 20, 19. 조는 결국 주머니의 돌을 빼내고 수면으로, 햇빛으로 올라간다. 환상처럼 보이던 니나 또한 그를 따라 세상으로 나간다. 그렇게 조는 오랫동안 꿈꾸던 죽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죽음으로 향하지 않는다. 그는 다시 길을 나서며, 니나를 구하는 것을 선택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니나는 조의 도움 없이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았다. 자신에게 향할 수 있었던 칼을 다른 누군가에게 겨누어 괴로움으로부터 스스로를 구해낸 것이다. 심지어는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온 조를 향해 무던하게 “이제 괜찮아요.”라는 말도 건넨다. 이는 조가 니나를 구해내는 동명의 원작소설과 다른 결말이다. 이에 대해 린 램지 감독은 여자 아이 캐릭터를 수동적으로 그려내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며, 서사 내에서의 역할이 많아진 만큼 캐릭터의 이름 또한 원작과 다른 니나로 바꿨다고 밝힌 바 있다. 수동적이지 않고 능동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아내게 만들었다는 그 설명처럼, 니나는 죽음을 향하지 않은 카운트다운을 한 듯하다. 그리고 그 카운트다운은 이제 조와 함께한다. 두 사람은 괴로움뿐인 현실의 끝에서 그렇게 만난다. 고통스러운 현실을 혼자서 살아내야만 했던 두 사람은 이제 어떤 현실을 살아가게 될까. 앞으로 살아갈 현실은 과연 지금까지의 삶보다 더 나은 것일까. 그리고 그 속에서 그들이 향하는 카운트다운의 끝에는 무엇이 놓여 있을까. 두 사람은 그 답을 알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가지 분명한 건, 지금 이 순간 죽음을 택하지 않고 길을 나설 것이라는 점이다. 니나와 마주앉은 레스토랑의 한 구석. 니나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조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완벽한 죽음을 생각한다. 발랄한 음악이 흐르는 이곳에서 당장 죽음을 택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긴다. 그리고 그 죽음을 택했다고 느낀다. 하지만 죽음은 벌어지지 않았다. 잠시 후 돌아온 니나는 조를 조용히 깨우며 말한다. 나가요, 아름다운 날이에요. 아름다운 날이구나. 니나의 말을 따라 읊조리던 조는 무슨 생각을 떠올렸을까. 영화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와 니나가 사라진 이후에 남겨진 빈자리를 포착한다. 하지만 여느 때와 달리 그들은 이곳에 있었던 흔적을 남겼다. 흔적 없이 그림자처럼 사라지던 두 사람은 이제 함께 길을 나설 것이다. 부디 그 삶에서는 흔적을 남기며 살아도 괜찮을 만큼 괴롭지 않기를, 그들이 있었던 빈 테이블을 오래도록 바라보며 기원한다. 그들은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