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변의 여인
- 감독
- 홍상수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김승우, 고현정, 송선미, 김태우, 문성근, 정찬, 이기우, 오태경, 조덕제, 최반야, 윤동환, 정주희, 장남열, 강성근, 이상민, 김한규, 돌이
김준겸 감독의 단편영화 < 여자여 >는 그 제목만큼이나 이상한 이야기를 가진 영화다. 인적 드문 해변, 한 남자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무료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낚싯대의 반응은 없다. 핸드폰이 울린다. 전화를 건 사람은 남자의 아버지다. 이왕이면 큰물에서 노는 큰 사람이 되라는 충고를 하는 아버지에게, 남자는 큰사발 먹고 큰 사람 되겠다는 다짐을 한다. 전화를 끊고 다시 낚시에 집중하려는데, 이번에는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온다. 그녀는 아들에게 성경 속의 어부 베드로를 이야기한다. 이왕이면 사람을 낚으라는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황당한 전화를 차례로 받으면서 남자가 보이는 반응이 좀 특이하다. 그는 세상에 무심하게 반응하는 사람이다. 황당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남자의 얼굴은 평온함을 잃지 않는다. 의미가 미끄러지는 전화 통화가 모두 끝나고 나면 이제 해변엔 완벽히 남자 혼자다. 새들만 바다 위를 날아다닌다. 그때, 갑자기 찌가 흔들린다. 남자는 낚싯대와 격렬한 사투를 벌인 끝에 무언가를 낚는다. 그가 낚은 것은 사람이고 여자다. 여자의 이름은 놀래미,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횟집으로 간다. 횟집에서의 데이트, 여자의 다리 밑으로 자꾸만 물이 흘러내리고, 식당 아줌마는 물기를 닦으라고 성화다. 여자는 갯지렁이를 먹고, 수조의 물을 받아 마신다. 이 모든 괴상한 사건이 벌어지는 동안, 남자는 그 일들이 일상적인 것처럼 반응한다. 조금 더 관계가 깊어졌다 싶었을 때, 여자가 몸이 다 말라 버릴 것 같다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남자는 당연하다는 듯 그녀를 따라나선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해변에서 남자는 다시 혼자 남는다. 남자는 여자가 사라진 바다 쪽으로 격렬하게 뛰어간다. 멀리 바다에서 여자가 돌고래처럼 뛰어오르는 광경을 보는 동안, 나훈아 의 <해변의 여인>이 간드러지게 흘러나온다. 바다를 바라보는 남자의 뒷모습은 마치 나라를 잃은 사람 같이 장엄하지만 얼굴 표정만은 평온하다. 영화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끝난다. 아마도 이 이야기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가망 없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 영화는 그런 방식으로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다. 다만 이렇게 이야기할 수는 있다. 의미 없는 세상의 한복판을 통과하는 우리들에게 이 영화의 남자는 ''''''''당황하지 말 것''''''''을 주장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일이 벌어지더라도 일상적으로 반응할 것. 그것만이 지금 여기를 통과할 유일한 방법이다. 가끔 우리를 다른 세계로 데려가는 영화들이 있다. 막 나가자는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낯선 세계가 낯익은 무엇인가로 변모하는 느낌을 주는 영화들. 의미에 저항하면서, 의미 사이의 결을 파악하는 영화들. 말로 파악되지 않는 세계에 관심이 있는 영화들. 명확함보다는 모호함의 상태로 빠져드는 영화들. 그런 영화가 독립영화 계의 주류를 이루던 시절도 있었다.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만들었던 신재인의 영화들. 혹은 이종필 의 < 달세계 여행 >를 꼽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마 누군가는 이런 영화의 계보에 놓기에 김준겸 의 < 여자여 >는 너무 소품인 데다가 시각적인 야심이 작다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소리 없이 강하다. 문득 다가와 낯선 세계를 펼쳐 보인 다음, 홀연히 사라진다. 거기에 조우하느냐 마느냐, 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조우했다면 몇 번이고 돌아보게 된다. 돌아볼 때마다 새로운 것이 보인다.
홍상수 의 목표는 매우 단순하고 한결같다. 그는 우리가 감각하는 매일의 현실을 영화로 옮기려고 한다. 영화가 삶을 구태여 비유를 거치지 않고 재생할 수 있는 매체라는 점에서 자연스런 선택이다. 하지만 정작 순수하게 이 목적을 추구하는 영화는 드물다. 우리가 감각하는 현실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편의적 현실- 달력으로 구획되고 인과 관계로 정리된 현실과 다르다. 홍상수에게 형식은 그것들을 뛰어넘어 영화와 삶이 맨 살을 맞대고 만나게 하기 위해 고안한 장치다. 제도와 서사의 압박을 배제하는 홍상수의 영화의 디제시스는, 꿈이나 회상을 태연히 아우르고 영화와 그림을 보는 동안 우리의 혼이 육체를 잠시 이탈해있는 시간을 별도의 경계 표식없이 포함하며 365일, 24시간의 도량 체계를 무시한다. 홍상수 영화에 등장하는 인간/배우가 캐릭터라기보다 ‘패턴’으로 표현되는 것도 유사한 이유에서다. 현실에서 우리는 타인을 만날 때 그의 특정한 면모를 필터링하여 하나의 유형으로 기억하지 않던가? < 극장전 > 이전, 대체로 홍상수의 영화는 시간을 배치하는 ‘수열’의 구성을 통해 위 목표를 간접적으로 실현했다. 이후 필모그래피에서는 홍상수는 보다 과감한 수단을 택하기 시작하는데 첫 비약은 < 옥희의 영화 >(2010)다. 4부 구성을 취한 <옥희의 영화>는 인물의 동일성이라는 내러티브영화의 금과옥조를 깬다. 한 배우가 연기하는 같은 이름의 사람인데도 인물의 동일성은 파괴된다. 4부의 옥희는 2부의 옥희와 같은 이름의 다른 인물일 수 있으며 극중극의 감독이기도 하다. <옥희의 영화>는 홍상수의 모든 전작을 하나의 집합으로 묶고 단숨에 그 여집합이 돼 버렸다. 자연히 <옥희의 영화>를 본 사람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까지 온 감독이 다음에는 무엇을 더 할 수 있을 것인가. < 북촌방향 >의 성준(유준상)은 서울에서 활동하다 지방으로 이사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 영화감독이다. 절친한 선배 영호( 김상중 )와 만난다는 명분으로 서울 북촌으로 짧은 겨울여행을 감행한 성준은 영호와 곧장 만나지 못하고 실패하고 혼자서 모르는 학생들과 술을 마시다가 만취해 과거의 애인 경진( 김보경 )의 집을 찾는다. 다시 인사동으로 돌아온 그는 영호와 영호의 후배인 영화과 교수( 송선미 )와 과거에 함께 영화를 찍었던 배우( 김의성 )과 어울리게 되고 ‘소설’이라는 술집에 몇 차례 들른다. 거기서 성준은 놀랄 만큼 경진과 닮은 가게 주인 예전(김보경)에게 끌려 접근한다. 인물의 동일성을 파괴한 < 옥희의 영화 >에 이어 <북촌방향>(2011)이 지워버린 원소는 시간의 동일성이다. 극중 사건은 얼핏 단선적으로 진행되지만 관객은 어느 지점에 이르면 불현듯 하루와 그 이튿날 사이의 경계가 의도적으로 소거됐음을 깨닫게 된다. 한 차례 베드신을 빼면, 이 여정에는 성준의 숙소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모든 인물은 내내 똑같은 옷차림이고 반복되는 상황에 처음처럼 반응하기도 한다. 예컨대 ‘어제’로 짐작했던 날에 성준이 먹은 생선구이 냄새를 오늘 만난 영호가 맡아낼 때 우리는 두 장면이 같은 날에 속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받는다. 반면 일정한 시퀀스 안에서 <북촌방향>은 최소한의 선후관계가 보존한다. 홍상수 감독은 이렇게 요약한다. “(<북촌방향>에는)감정이나 정보가 축적되어가는 축이 있고, 매일이 첫 날처럼 보이는 축이 있다.” 매번 처음인 것 같으면서도 기시감을 발생시키는 이 시간 구조는 여행자인 동시에 과거 서울 주민이었던 주인공 성준의 중간자적 상태와 어울린다. (홍상수 영화의 주인공은 대개는 객지의 여행자다.) 그는 이 도시에 과거의 인연과 기억이 없지 않으면서도, 낯설어하면서 재빨리 (성준은 영화 첫 머리에 “슝슝”이라는 표현을 쓴다) 북촌을 겉핥고 통과하고 싶어한다. 감정과 기억이 축적되는 축과 매번 처음으로 돌아가는 축, 둘의 엇갈림이 팽팽하고 아름답지 않다면 이 특이한 시도는 모호함을 위한 모호한 술책에 그쳤을 것이다. 그러나 <북촌방향>은 기적적인 균형을 지탱한다. 밤 골목에서 성준이 키스를 받고 예전이 느닷없이 경진의 언어로 “오빠!”라고 외치는 찰나, 두 시간대는 마침내 선로가 겹친 열차처럼 충돌하며 터진다. 이 정점에서, <북촌방향>은 놀랍게도 이 영화가 전혀 무심해보였던 파토스와 감정의 울림을 끌어낸다. 성준의 미묘하게 굳은 마지막 표정의 클로즈 쇼트에는, 같은 얼굴을 한 두 여자 가운데 한 명을 간절히 원하고 한 명으로부터는 필사적으로 도망치려는 사랑의 역설, 그리고 해방감과 폐소공포증이 교차하는 현대인의 일상감각이 담겨있다. 그래서 영화가 끝난 후에도 긴 그림자를 남긴다. 프로덕션의 부피를 극단적으로 줄인 < 옥희의 영화 >(총 6회차 촬영) < 북촌방향 >(총 7회차 촬영)에 이르러 홍상수 감독은 < 해변의 여인 >의 극중 감독 중래( 김승우 )가 말한 ‘우주를 설명할 수 있는 가느다란 우연의 실’에 관한 이론을 어느 때보다 직접적으로 실천한다. 4부 중 1부만 구상하고 출발한 <옥희의 영화>와 한 인물이 같은 장소에 세 번 간다는 설정만 손에 쥐고 시작된 <북촌방향>은, 철저히 제1자(mover 움직이지 않고 다른 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존재)만 던져놓고 일련의 우연-촬영 당일의 상황과 배우의 상태, 감독 자신의 발견-이 붙어 영화가 몸을 불려가는 식으로 완성됐다. 이와 같은 생산양식에 관한 사고의 전환은 불비한 자본으로 부득이한 선택을 뛰어넘어 홍상수 영화의 독창적 서사와 인물 만들기 방법론에 밀착한다. 아니, 유기적으로 맞물려있다는 표현이 적당할 것이다. 오늘날 산업화된 영화 제작의 첫 번째 조건이 예측가능성임을 상기할 때, 캐스팅부터 심지어 컬러로 만들지 흑백으로 만들 지까지 즉흥적으로 결정되는 홍상수 영화는, 일종의 ‘위원회’에 의해 기획과 조정, 포장을 통해 나오는 주류 영화의 반대말이다. 전진하지도 상승하지도 않으면서 정해진 구역 안에서 빙빙 돌며 이동하고 같은 지점에 가서 다른 걸 발견하는 남자의 여정을 그린 <북촌방향>은, 홍상수 영화의 핵심이 목적이라는 ‘허위’를 철저히 배격한-목표를 피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가!- 소요의 쾌감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훗날 홍상수 영화 만들기의 엠블럼으로 회고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