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정
- 감독
- 박상호
- 제작년도
- 1956
- 출연
- 김근자, 박인봉, 김영식, 고설봉, 강계식, 박은애, 이순, 박영태, 강창수, 윤신옥, 남가실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
강범구 감독은 신상옥 감독이 연출한 <지옥화>(1958)의 촬영을 맡아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12편을 촬영 후, 1962년 개봉한 <북극성>을 연출하며 감독으로 데뷔했다. 연출자로서 그는 액션스릴러 혹은 범죄추리물에 특기를 보여 ‘아주 타프한 작품을 만드는 신인’ 1) , “액션 감독으로 정평이 높은 준재 강범구 감독” 2) 이라는 평을 받았다. 또한 그의 초기작들이 1960년대 초반 대만에서 흥행에 성공하였고, 1966년에는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대만에서 작품을 만들었다. 강범구 감독 작품의 대만 흥행은 이후 한국영화가 본격적으로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에 진출하는 데 기폭제가 되었다. 강범구는 일제강점기 황해도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친척이 운영하던 사진관을 드나들며 카메라를 다룰 줄 알게 되었다. 해방 후 홀로 월남하여 한국전쟁을 겪고, 휴전 이후 국민대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을 한다. 이 시기에 연극 활동을 하면서 알게 된 박상호 감독이 영화 <젊은 그들>(신상옥, 1955)의 조감독을 맡았는데, 강범구에게 엑스트라 출연 및 동원을 부탁한다. 이를 계기로 영화 현장을 처음 접하게 된 그는 영화 촬영 카메라의 작동 원리가 자신이 다루던 사진 카메라와 유사하다는 것을 깨닫고 남다른 관심을 갖는다. (사진1) <해정>(박상호,1956) 포스터.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촬영부로 참여하며 영화 일을 시작했다. 그리하여 1956년 박상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해정>에서 촬영부 일을 시작했고, 이어서 유현목 감독의 작품에서 김명제 촬영감독의 조수로 일한다. 김명제는 미국의 미첼(Michell) 카메라를 모방하여 국내 여건에 맞게 개조한 ‘코첼’이라 불린 카메라를 만들어 사용했다. 강범구는 김명제와 같이 손수 촬영 기재를 고안해낼 정도로 기술력이 출중한 영화인 밑에서 촬영 기술을 익히는 동시에 일본영화촬영자협회에서 펴낸 『 일본영화촬영편람 』 을 보면서 영화 전문 지식을 습득했다고 한다. 그가 촬영 조수로 참여한 유현목 감독의 <유전의 애수>(1956)와 <잃어버린 청춘>(1957)은 전후 한국영화의 새로운 수준을 이룩한 작품으로 평가 받았다.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3) “카메라 앵글에도 많은 노력의 자취가 보인다”, “한국영화의 공통적인 폐단인 느린 템포가 시정되어 있어 유쾌”하고 “이동촬영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비교적 화면에 안정성이 있고 매끈”하다는 호평을 받았다. <잃어버린 청춘>은 ‘묘사가 착실’하고 ‘모방에서 독창으로’, ‘수준에 이른 작품’이라는 평을 받으며 제1회 영화평론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이처럼 강범구는 전후 한국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인 “현대극영화의 가능성을 제시하려는 젊은이들” 4) 의 일원으로 작업하며 영화인으로 단련되었다. (사진2) <지옥화>(신상옥, 1958)의 한장면. 왼쪽부터 배우 최은희(쏘냐 역), 김학(영식 역), 조해원(동식 역) 강범구는 1958년 <지옥화>(신상옥)의 촬영을 맡아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다. 전후 걸작으로 꼽히는 이 작품에서 그는 위험을 무릎 쓰고 달리는 기차 위에서 액션 장면을 찍었다. 덕분에 속도감 있는 기차 추격 장면이 박진감을 더 했고, 촬영 데뷔작에서부터 대담하고 힘 있는 스펙터클을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사진3) <지옥화>(신상옥, 1958) 기차 액션 장면. 영식 일당이 미군 수송 열차를 털기 위해 기차에 올라탄 것을 기차 지붕 위에서 찍은 화면 이어서 강범구는 신상옥 감독의 첫 번째 멜로드라마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을 안정감 있게 촬영하였고, 이 작품은 서울에서만 10만 관객을 동원하여 흥행에 성공한다. 그는 촬영 감독으로 데뷔한 후 1961년까지 약 3년 동안 총 12편의 영화들을 촬영하는데, 그 중 정창화 감독의 <지평선>(1961)을 촬영하면서 이 작품을 제작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와 연을 맺게 된다. 그리하여 한흥영화사가 제작한 <지평선>(정창화, 1961), <현상 붙은 사나이>(김묵, 1961), <슬픔은 없다>(김묵, 1961)를 촬영했고, <북극성>(1962)으로 감독 데뷔하여 연출작 <동굴 속의 애욕>(1964)까지 최관두가 제작한 8편의 작품을 함께 한다. (사진4)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갱스터 범죄물로 한흥영화사(대표 최관두)가 제작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사진5) <현상붙은 사나이>(김묵, 1961) 크레딧 (사진6) <지평선>(정창화, 1961) 포스터 만주를 배경으로 한 독립군의 활약을 담았고 강범구가 촬영했다. 액션 장면을 속도감 있는 몽타주로 표현하고자 노력했다고 한다. <지평선>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거대 제작비를 들여, 우이동에 4만 평의 대지를 잡고 건평 3천의 오픈 세트를 세워 독립군의 근거지가 된 만주의 한 소도시를 만들고, 일본군과 독립군의 전투 장면을 촬영했다고 한다. 5) 강범구는 영화제작자 최관두를 “한국영화 액션 원조”라고 칭했는데, 그가 운영한 한흥영화사는 “한국 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6) 이라고 불렸다. 한흥영화사는 주로 대륙물과 액션, 범죄 스릴러물 제작에 주력했다. 최관두는 특히 만주 대륙물의 효시인 <지평선>(정창화, 1961)부터 대륙 액션물의 완결판이라 불리는 <쇠사슬을 끊어라>(이만희, 1971)까지 제작한 한국 액션영화의 개척자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1960년대 초부터 당시 주류 멜로드라마 장르와는 다른 궤적을 그린 작품들을 개척해온 한흥영화사에서 강범구도 자신의 감독작들을 연출하기 시작한다. 강범구는 촬영감독으로 활동하면서 연출자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완성도가 좌우되는 점을 체감하고, ‘카메라맨’ 역할에만 만족하기 보다는 주체적으로 작품을 지휘할 수 있는 ‘연출자’를 꿈꾸기 시작했다. 그는 <북극성>(1962)을 직접 제작하고 연출하여 감독으로 데뷔한다. 이 작품은 주동운 작가의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영화화한 것으로 한흥영화사 이름으로 개봉되었지만 눈에 띄는 반응은 얻지 못했다. (사진7) <북극성>(강범구, 1962) 포스터. 강범구가 제작하고 연출한 감독 데뷔작이다. 강범구가 두 번째로 연출한 <검은 꽃잎이 질 때>(1962)는 이경재 원작의 서울중앙방송국(HLKA) 라디오극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신문기자인 주인공이 서울에서 활동하는 간첩을 쫓는 이야기로 “본격 추리영화”, “본격적인 스릴러물”이라 불리며 평단과 흥행 면에서 두루 성공했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7) , “강범구는 처녀작 <북극성>에서 평조하였으나 <검은 꽃잎이 질 때> 한편으로 이를 완전히 만회해서 기염을 토했으며” “지난날의 명 ‘카메라맨’답게 훌륭한 카메라워크를 보여주고”, “우리 영화풍토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본격적 추리극을 시도”하여 “제법 박력 있게” 연출했다는 호평을 받는다. (사진8) <검은 꽃잎이 질 때>(강범구, 1962) 포스터. 하단에 경찰기동대 오토바이와 백차가 등장하는 추격 장면이 보인다. 강범구는 이 작품에서 기존 영화들에서 등장했던 총격전과 차별되는 새로운 액션 스펙터클을 선보이길 원하던 차에, 당시 서울 시경에서 외제 오토바이를 새로 장만했다는 소식을 접한다. 수도경찰청은 경찰의 기동력을 강화하기 위해 1961년에 미국에서 사십 대의 오토바이를 들여왔으며, <검은 꽃잎이 질 때>의 엔딩에 해당하는 간첩 추적 장면은 시경의 협조로 백차 5대, 시경 특별기동대 오토바이 20대, 세단 2대 등을 동원하여 서울 을지로, 종로, 돈암동을 빠져 의정부, 포천까지 내달리며 백주의 추격을 카메라 세 대로 촬영했다. 8) 감독 입장에서는 작품의 스펙터클 연출과 홍보 면에서 이득이었고, 경찰 입장에서는 방첩 의식 고취 및 시경을 선전하는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즉 상업극영화를 통해 대중성과 정부 시책 양쪽을 만족시키는 협상이 흥행 성공으로 이어진 경우이다. 그리고 강범구는 <검은 꽃잎이 질 때>의 흥행으로 인해 “액숀·스릴러의 총본산”인 한흥영화사의 ‘감독’으로 입지를 얻게 된다. 다음 작품 <안개낀 거리>(1963)는 그가 한국전쟁 및 전후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갖고 연출한 영화이다. 전쟁터에서 생사를 함께한 전우가 전후 복귀한 사회에서 범인과 형사로 조우한다. 한국전쟁 당시 전선에서 범인(이향 역)은 뛰어난 사격술로 형사(황해 역)의 목숨을 구해주었다. 그런데 현재 형사는 지난날 자신의 생명의 은인을 체포해야하는 입장에 처한 것이다. 이 영화는 두 주인공의 ‘기차 승강구 결투씬’이 백미로 꼽히는데, 형사와 범인이 서로의 손목이 수갑으로 묶인 채 달리는 기차에 매달려서 결투를 벌이는 액션 장면이다. (사진9) <안개낀 거리>(강범구, 1963) 포스터. 중앙에 두 주인공의 손목이 묶인 수갑이 빨강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안개낀 거리>는 1963년 대만 타이베이에서 <수갑(手銬)>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우수한 흥행 성적을 올렸으며, 당시 대만 언론에서 강범구 감독을 ‘액션·스릴러’의 귀재로 주목했다. 대만에서 발간된 영화 서적 『 세계영화감상 』 (1967) 한국 편에는 <안개낀 거리>에 대해 “인물의 심리와 성격부터 감정의 노출 등이 전편에 걸쳐 긴장감 있게 그려지고, 인간의 인지상정의 모순된 점을 생생하게 묘사하는 기교가 훌륭하다. 카메라 워크와 컷트의 극적 운영이 유럽과 미국 등 선진국 감독들의 작품에 비해 손색이 없다.” 9) 고 평하고 있다. 강범구는 <창살없는 감옥>(1963)에서도 전쟁을 배경으로 젊은이들이 겪는 모순적인 상황을 통해 한국전쟁과 분단의 비극을 이야기하고자 했다. 전작 <안개낀 거리>의 인물 설정 및 주제가 변주된 것으로 보이는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형사(황해 역)가 범인(이향 역)을 쫓는다. 범인은 수사망을 피해 한국전쟁 유격대로 잠입하는데, 형사가 뒤따라 자원입대하여 그를 추적한다. 둘은 격전지의 한복판에서 조우하고 목숨이 걸린 딜레마 상황에 처한다. 영화 제목은 동족상잔의 전쟁터를 ‘창살없는 감옥’에 갇힌 처지로 비유한 것이다. 영화평론가 이영일은 <창살없는 감옥>을 이만희 감독의 전쟁영화와 함께 다음과 같이 평했다. “군대는 단순한 아이언 오거니제이션(철의 조직체)이 아니라 인간의 결합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떠들고 있는 점은 무척 대견한데, 나는 지난 2년동안 3천만 인구가 모두 군복 착용을 강요당하는 듯 한 환각에서 이런 작품들을 본 것은 적으마한 위안으로 여기고 있다.” 10) (사진10) <창살없는 감옥>(강범구, 1963) 포스터. 배경에 낙하산 부대가 보인다. <창살없는 감옥>에서도 강범구는 특색 있는 액션 스펙터클을 연출하길 원했고, 그 결과 당시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낙하산 부대가 등장한다. 영화 속에서 적진에 투입되는 인물들이 진격하는 모습보다는 하늘에서 떨어져내리는 수직 낙하 이미지에 착안하여 시나리오를 수정했다. 그리하여 공수부대의 지원을 받아 낙하산 부대를 촬영했고, 비행기와 카메라 두 대를 동원하여 공중 촬영을 진행했다. 이 작품 또한 대만에서 <제3특공대(第3特攻隊)>라는 제목으로 개봉되어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더불어 영화 속에서 여주인공이 불렀던 주제가도 중국어로 번안되어 동남아 지역까지 인기를 끌어모았다. 이듬해, 1964년 강범구는 연이어 한국전쟁으로 인한 비극이 전후 사회에 지속되고 있는 문제를 짚어내는 작품들을 연출한다. 원제가 ‘목격자의 증언’이었던 <당신만을 위하여>(1964)는 가부장의 빈자리를 대신하여 생계를 책임지는 여성이 주인공이고, <동굴 속의 애욕>(1964)은 한국전쟁 당시 남편을 찾으러 산속으로 들어갔다가 빨치산 생활을 하게 된 여성을 그려냈다. (사진11)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재판을 받는 피고인들 왼쪽에 갓난아기를 안고 있는 옥녀(배우 김난영)와 오른쪽 끝에 동록(배우 박노식)이 공모하여 옥녀의 남편을 살해한 혐의에 관해 심문이 진행된다. <동굴 속의 애욕>은 권순영 판사의 수필집 『법창의 봄』(1955)에 실린 같은 제목의 재판 실화가 원작이다. 한국전쟁 당시 현재의 강원도 화천군 상서면 다목리 주민들이 겪은 전쟁 체험을 다룬 이야기로, 이 지역은 본래 북한 땅이었다가 휴전 이후 남한으로 편입된 수복지역이다. ‘수복(收復)’의 사전적 의미는 잃었던 땅이나 권리 따위를 되찾는 것이지만 실제로는 ‘수복 지구’가 대한민국에 속했던 적이 없었다. 따라서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본래 북한 주민이고 본인의 이동에 의해서가 아니라 전쟁으로 인한 분단선의 이동이라는 순전히 외부적 요인 때문에 남한 사람으로 귀속이 변경된 비자발적 월남인들이다. 이는 대한민국에서 공식화된 월남 동기인 ‘북괴가 싫어서’나 ‘자유를 찾아서’라는 반북·반공주의가 적용될 수 없는 사례이다. 강범구는 이러한 수복 지구 주민의 경험을 자신의 월남인 의식에 빗대어 설명한다. “난 이북사람이고 그래서. (중략) 그게 굉장히 가슴에 사무친다고. 그건 우리의 그 사상 때문에 전쟁이 일어난 게 아니거던, 예. 그 권력 잡은 사람들이 자기네들 권력 싸움 위해서지, 우리하곤 아무 관계 없는 거야. 내가 지금 해석을 해도 그래요. 그래서 인제 그걸 바탕에 두고 인간의 그 본성을 한번 그려볼라구 했던 거죠. 그 굉장히 그땐 새롭드라구, 그 책을 보니까.” 11) <동굴 속의 애욕>은 젊은 부부가 신문에 대서특필된 살인용의자 옥녀의 재판을 구경 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재판은 남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는 옥녀의 유죄 여부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고, 피고인인 동록과 옥녀 및 증인들이 진술하는 내용이 과거시점의 액자 구성으로 재현된다. 즉 액자 구성의 가장 안쪽에서 재현되는 이야기가 옥녀와 같은 북한 인민이 겪은 한국전쟁이고, 이들이 전후 현재 시점에서는 죄수복을 입고 재판을 받고 있는 남한 주민이다. 영화는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들의 전사(前事)를 액자 속으로 들여다보도록 배치함으로써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신문 헤드라인이 담지 못한 진실을 이해하도록 이끈다. 그리고 ‘사상 때문이 아니라는’ 감독의 의도와 같이, 옥녀를 북괴의 꾀임에 속고 뒤늦게 깨닫는 어리석은 빨치산으로 도식화하지 않고, 전쟁 세대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무고한 양민의 전쟁 경험으로 열어둔다. 강범구는 <동굴 속의 애욕>이 한국전쟁을 그리는 데 있어 오래 남을만한 이야기라고 여기며, 기회가 된다면 리메이크 해보고 싶은 작품이라고 한다. (사진12)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옥녀의 재판을 보러 온 사람들이 법원에 모여있다. 영화의 오프닝을 여는 젊은 부부를 비롯한 ‘재판 구경’ 대중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이들은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고 주인공을 이해와 공감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사진13) <동굴 속의 애욕>(강범구, 1964)에서 심경의 변화를 겪는 옥녀. 극한 상황에서 분투하는 인물의 생존 본능과 욕망, 그에 따른 복잡한 심리를 표현해낸 배우 김난영의 연기가 돋보인다. <소만국경>(1964)은 강범구가 다시 액션 연출의 특기를 살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활약을 담은 영화이다. 소련과 만주 접경지역을 배경으로 독립군과 일본군, 비적떼 등이 출몰하여 다양한 액션을 펼치는 장르적 쾌감을 선사한다. (사진14) <소만국경>(강범구, 1964) 포스터 <탈출명령>(1966)은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가 강범구 감독에게 연출을 의뢰하여 만든 한국·대만 합작영화이다. 고인하는 1960년대 초반부터 한국영화계와 교류하며 한국영화들을 대만에 소개하는 데 관심을 쏟았고, 강범구가 연출한 작품들이 대만에서 흥행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앞서 언급한 <창살없는 감옥>을 수입하여 대만에서 <제3특공대>라는 제목으로 개봉하고, 대만뿐만 아니라 동남아 지역에서도 큰 수익을 거둔 인물이 바로 고인하이다. 그는 평소 존경하던 강범구 감독과 함께 대만에서 대규모 전쟁 액션 영화를 만들길 원했다. 한국 측에서는 기획자 박민이 대영영화사 소속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감독과 배우, 조감독 등이 대만으로 향했다. <탈출명령>은 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일본군이 세운 포로수용소에 갇혀있는 인물들을 탈출시키는 내용이다. 이를 위해 대만 아리산(阿里山) 밑에 야외세트장을 짓고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하여, 일본에서 필름 현상을 했다. 대만 촬영현장에서 강범구와 주요 대만 영화 스태프들은 일제식민지 시기 성장 배경을 공유하는 동년배들이었고, 서로 일본어로 소통하는 데에 무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는 대만 중앙전영공사의 대규모 영화 스튜디오와 최신 영화 기재, 일본 영화인들과의 기술 교류 등을 접하고 당시 한국영화계에 비해 격차를 느꼈다고 한다. <탈출명령>은 <최후명령(最後命令)>이라는 제목으로 대만에서 개봉했으나 흥행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대만 영화인 고인하는 이후 강범구를 비롯한 한국영화계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국과 중화권 및 동남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교류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진15) <탈출명령>(강범구, 1966) 포스터. 배우 신영균, 박노식, 이대엽, 손미희자 그리고 대만배우 왕모초(王莫愁) 등이 출연했다. <탈출명령>의 필름 현상 작업이 일본 도에이 현상소에서 진행될 때, 이곳에 들렸던 신상옥 감독이 <탈출명령>의 해외 로케 촬영 화면을 보고 강범구에게 베트남전 영화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신상옥 감독의 신필름이 제작하는 <여자베트콩 18호>의 연출을 맡아 베트남으로 향했다. 이 작품은 당시 베트남전에 파병된 국군 비둘기부대의 협조를 받아 촬영했다. 촬영 중 전투 장면을 위해 묻어둔 폭탄이 뜻하지 않게 폭발하여 조명기사 이계창이 현장에서 숨지는 안타까운 사고가 발생했고, 강범구 역시 부상을 당하여 한쪽 눈의 시력을 잃는다. (사진16) <여자베트콩 18호>(강범구, 1967) 포스터. 전시 중에 제작된 영화이고, 베트콩 등장 장면을 촬영 중 실제 베트콩으로 오인 받아 미군으로부터 포위당한 적도 있다고 한다. 이후 강범구는 가수 남진 주연의 <울려고 내가 왔나>(1967)부터 직접 제작한 <항구의 왼손잽이>(1971)까지 음악영화, 검객영화, 반공영화, 갱스터 범죄영화 등의 다양한 작품들을 연출한다. (사진17) <울려고 내가 왔나>(강범구, 1967) 포스터. 당시 가요계의 스타 남진이 주연을 맡았다. (사진18) <대검객>(강범구, 1968) 포스터. 당시 홍콩무협영화가 한국 관객에게 호응을 얻으면서, 이른바 ‘칼싸움 액션’이 펼쳐지는 검객영화가 유행했다. 이 작품은 정통검술을 익힌 배우이자 무술감독인 안일력이 검술지도를 맡고 고증에 충실하여, 한국 검객물의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을 받았다. (사진19) 1960년대 활동 당시의 강범구 감독 출처:“한국감독의 50인”,[1970 영화연예연감], 국제영화사, 1969 1974년에 개봉한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은 한국의 동아수출공사와 홍콩 영화제작사 골든하베스트가 합작으로 만들었다. 동아수출공사는 강범구와 대만 영화인 고인하를 통해 골든하베스트에서 제작한 이소룡 주연작 <맹룡과강>(이소룡, 1972)을 수입하기 시작하면서 골든하베스트와 돈독한 거래 관계를 맺게 되었다.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대표 이우석과 이웃 관계로 일찍이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으며, 1970년대 초중반 동아수출공사 기획실에 근무한다. 이 시기에 그가 참여한 <일대영웅>의 홍콩측 감독 팽장귀는 한국어에 능숙한 화교였고, 한국에서 로케이션 촬영을 진행했다. (사진20) <일대영웅>(강범구·팽장귀, 1974)의 한장면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 기획자로 활동하면서 작품 기획, 시나리오 작가 섭외 및 완성, 감독과 스태프 구성, 캐스팅, 제작 현장 및 후반작업 진행 등 작품을 구상하여 완성하기까지 전 과정을 총괄하였다. <마지막 다섯 손가락>(김선경, 1974)부터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까지 9편을 기획했는데, 그 중 <남사당>(이규환, 1975)은 이규환 감독의 은퇴기념영화로 제작되었다. 이규환 감독은 일제강점기 <임자없는 나룻배>(1932)로 데뷔하여 한국영화사 초창기부터 활동한 원로 감독이었고, <남사당>은 선배 영화인에 대한 존경과 예우를 담아 기획된 작품이다. 같은 해에 강범구는 김기영 감독이 <만추>(이만희, 1966)를 자기만의 색깔로 리메이크한 <육체의 약속>(김기영, 1975)을 기획하였고, 정소영 감독의 <애수의 샌프란시스코>(1975)를 기획하여 미국 로케 촬영까지 담당했다. 또한 <걷지말고 뛰어라>(1976)로 소설가 최인호를 감독으로 데뷔시키는가 하면, 1976년에 개봉한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는 관객의 호응을 얻어 ‘진짜 진짜 시리즈’로 후속편이 이어지며 하이틴 영화 붐을 이끌었다. (사진21) <진짜 진짜 잊지마>(문여송, 1976)의 배우 임예진, 이덕화. 이후 강범구는 동아수출공사를 떠나 해외로 눈을 돌려 국내보다 나은 영화제작 여건을 찾고자 대만으로 건너갔다. 그는 대만 광고영화 프로덕션 회사에서 활동 중에, 한국영화진흥공사 홍콩 법인과 연계되어 대만에 수출하는 한국영화들을 관리하기도 했다. 당시 <증언>(임권택,1973), <들국화는 피었는데>(이만희,1974), <섬개구리 만세>(정진우,1972) 등의 한국영화들이 대만에서 상영될 수 있도록 관여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대만에서 만난 로웨이(羅維) 감독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도 거주하며, 중화권 작품 거래를 위해 서울-홍콩-대만을 오가며 지냈다. 강범구는 홍콩 골든하베스트를 비롯한 중화권 작품들을 한국에 소개하고 거래를 중개하는 역할을 했으며 골든하베스트 대표 레이 초우, 홍콩에서 활동한 제작자이자 감독 로웨이, 이한상, 오사원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 대만 영화 감독 유가창 등의 아시아 영화인들과 폭넓게 교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후, 강범구는 1980년대에도 한국과 홍콩 혹은 한국과 대만 영화사와 연계된 일종의 합작 형태의 작품들에 참여한다. 1988년에 개봉한 <칠소여복성>(강범구·맥담웅)까지 협업하고, 1986년경부터 1995년경까지 중화권 외화 수입 거래 중개자 역할을 해왔다. (사진22) <괴시>(강범구, 1981) 한국 최초의 좀비영화라고 불리는 미스터리 공포물 강범구가 홍콩에서 관람했던 서구 좀비영화를 한국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연출했다고 한다. 대만 배우 유광옥, 강명이 출연했다. 강범구는 1960년대 초반 “액숀·스릴러의 본산” 한흥영화사에서 활동하면서 일찍이 액션영화 감독으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는 1960년대 중반에 한국·대만 합작영화의 연출을 맡아 해외 활동을 시작했고, 그로 인해 냉전 시기 분단된 영토 안에 국한된 시야에서 벗어나 보다 ‘다른’ 영화 환경이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 60년대 후반 한국영화 제작편수는 200편을 넘어가면서 한국영화 전성기의 정점을 찍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 이면에는 상영하지 못하고 사라지는 작품들과 정당한 처우를 받지 못하는 영화인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유신 이후 1970년대 국가주의 영화 제도 및 규제 하에서 영화 제작 환경이 더욱 악화되자 그는 한국을 떠나 동아시아에서 새로운 활로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대만 영화제작자 고인하를 비롯하여 홍콩과 대만에서 영화계 네트워크를 형성한 강범구는 ‘한국의 중국통’이라고 불리우며, 한국영화와 중화권 및 아시아 영화 시장 간의 본격적인 교류에 앞장섰다. 한국영화계에 1960년대 후반부터 홍콩 검객물과 무협물이 인기를 끌면서 액션영화가 부상되었지만 정부의 영화시책 제도 관점에서는 저속, 저질영화로 저평가되었다. 하지만 관객의 부응은 이와 반대였기 때문에 한·홍 합작 액션 영화 등이 70년대를 거쳐 80년대까지 제작되었다. 이 시기 강범구의 연출작 목록을 살펴보면 당대 한국영화 시장에 홍콩 무협물과 액션물이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의 경험을 통해 과거 한국-홍콩-대만 간 다양한 방식의 합작 혹은 협업 제작이 이루어지게 된 배경과 경위에 관해 들여다볼 수 있다. 즉, 이러한 제작 관행이 각자 정책적으로 혹은 자본력 측면에서 자국 영화시장 내에서 부족한 지점들을 보완하는 자구책으로 기능한 측면을 이해할 수 있다. 각기 합작 주체의 입장에 맞게 완성한 작품들은 자국 영화로 변용되기도 했기 때문에 그 무국적성이 비난 받기도 하지만, 이들은 애초 기획부터 내셔널시네마 범주에서 미끄러져 비본질적이며 경계가 없고, ‘경계 없음’이 상업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다. 따라서 위장 합작이라는 명명으로 단정하기 보다는, 당시 영화 제작 환경과 영화 시장을 둘러싼 생동하는 문화 경제 및 다층적인 문화 협상을 입체적으로 조망해 볼 수 있다. 강범구는 문화는 정체되어 있지 않고 영역이나 구분 없이 자연스럽게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점에서, 폐쇄적이거나 제한적인 문화 규제 및 정책을 반대한다고 강조했다. 끝으로 그는 한국전쟁과 동족상잔의 비극을 자신의 영화 인생에 있어 ‘풀지 못한 숙제’로 품고 있다. 그 주된 이유는 ‘반공이 국시’인 시대에 활동하면서 남북관계에 관한 성찰적인 영화 창작이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장차 그는 이북으로 교류하며, 여전히 영화를 통해 폭넓은 시야로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바램을 갖고 있다. 아무쪼록 그의 염원이 반드시 이루어지길 바란다. 1) 이영일,「특집 한국영화 1963년」,《국제영화》 1964년 1·2월호, 63쪽. 2) 『 1970 영화연예연감 』 , 국제영화사, 1969, 434쪽. 3) 〔신영화〕 묘사 착실한 멜로드라마/ 유현목 감독의 <잃어버린 청춘>”, 《한국일보》, 1957년 9월 21일; “[단평] <유전의 애수>”, 《경향신문》, 1956년 7월 30일; “[신영화] 모방(模倣)에서 獨創(독창)으로/ <잃어버린 청춘>”, 《조선일보》, 1957년 9월 21일; “[신영화] <잃어버린 청춘> 수준에 이른 작품”, 《서울신문》, 1957년 9월 22일 참고. 4) “[신영화] <유전의 애수>, 한성영화사에서 제작 완료”, 《조선일보》, 1956년 6월 13일. 5) “1천만환의 오픈·센 본격화하는 제작태도”, 《경향신문》, 1960년 11월 14일 4면 참고. 6) “재재정비된 영화사순력(巡歷) ① 한국유일의 서부극공장 ‘액숀·스릴러’의 총본산 ” , 《영화세계》, 1962년 11월호, 92쪽. 7) 《영화세계》, 1962년 8월호, 45쪽; “[새 영화] 처음 시도된 본격 추리극 /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 1962년 6월 7일 4면; “[새영화] 본격적인 추리극의 시금석 / 강범구 감독 <검은 꽃잎이 질 때>”, 《서울신문》,1962년 6월 6일 4면; “본격적인 스릴러물 기획 <검은 꽃잎이 질 때>”, 《경향신문》,1962년 3월 30일 4면 참고. 8) “[방울새] 때 아닌 기동대/ 영화촬영에 총동원”, 《경향신문》, 1962년 4월 29일 4면; “[스타디오 소식] <검은 꽃잎이 질 때>/ 경찰기동대도 등장/ 백주의 추격전“, 《동아일보》, 1962년 4월 29일 4면 참고. 9) 魯稚子(LU CHIH-TSE), 『世界電影欣賞 APPRECIATION OF THE WORLD FILMS』, BOOK WORLD CO., 1967, 61~62쪽. 10) 이영일, 앞의 글, 1964년. 11) 박진호,「강범구」,『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2009, 한국영상자료원, 198쪽.